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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사...

인간사냥을 통한 돈벌이와

백인 주인님들의 재산 중 '동산'(움직이는 재산)으로 취급되던 흑인들이

어떻게 미국에 적응해 나가는 지를 기록한

흑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투쟁을 기록한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일독을.




자본주의 성장의 역사는 이윤추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기심에 기반한 이윤추구의 동기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왔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윤추구의 이면에는 정당한 방법 즉, 기술혁신이나 정상적인 상거래를 통하지 않는 방법 또한 숨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윤이 남는다면 무엇이든지 상품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 인간사냥을 통한 돈벌이는 가장 적나라한 이윤추구의 한 부끄러운 단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미국 흑인사에서 다루고 있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유럽과 이른바 신대륙으로의 강제 이주는 이런 인간의 삐뚤어진 이윤추구의 산물이다.  그야말로 아프리카 흑인들은 노예의 사슬을 온 몸에 칭칭감고 한낱 도구로서 기능해 왔다는 것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신세계에 도착한 흑인들의 체형이나 생활방식은 아주 다양했지만 거기에는 많은 공통된 문화유형이 있었다.  이들 종족은 법체계를 갖춘 정연한 정부, 그리고 잘 조직된 사회체제 아래서 통제되고 있었다.  각 개인은 집합적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종족에 대한 깊은 정체성, 즉 소속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공업, 예술, 신앙 또는 음악과 춤 등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폭넓은 영역이 있었다.』는 기록은 아프리카 대륙 자체로 발전을 위한 맹아들이 형성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금은보화를 찾아 이른바 미개한 나라를 개명시켜준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 발전의 싹을 자르는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는 물론 이런 의문을 중심내용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런 의문이 이르게 하는 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윤추구를 위해 노예노동의 필요성이 증대되자 노예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아래의 기술들은 노예들을 어떻게 유럽과 아메리카로 잡아왔는 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1441년 항해왕 Henry는 그의 선원인 Antonio Gonsalves로 하여금 군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프리카인을 노예 10명을 리스본으로 데려온 게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유럽출현이라 할 수 있다.』


『노예무역회사는 노예를 수용할 창고를 건립하고 원주민 추장과 거래를 했다.  백인들은 노예조달을 위해 아프리카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아프리카인들에게 그 일을 하도록 했다.  유럽 상품에 현혹된 어떤 부족은 다른 부족을 급습해 약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약탈하고 해안의 노예창고로 목에 가죽끈을 맨 한 떼의 노예를 줄지어 행진시키기도 했다.』


『가격은 매우 다양했지만 건강한 남자의 평균 비용이 60달러였고, 여자는 15달러 미만에 살 수 있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에 구매자는 항상 전담의사로 하여금 노예를 검진케 함으로써 신중을 기했다.』


『아메리카에서 노예 수요를 창출한 것은 설탕이었고, 설탕산업이 노예의 지리적 분포를 결정했다.  그때까지 유럽에서 귀했던 설탕이 이제 큰 관심거리가 되면서, 서인도제도는 보통 설탕제도라고 불렀다.  사탕수수 경작은 노예노동에 매우 적합했다.  그 작업은 땅을 개간하고 갈고 씨뿌리고 제초하고 수숫대를 자리는 등 배우기에 쉬웠다.  그들은 1년 내내 노동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대규모로 무리지어 일을 시킬 수 있었으므로 쉽게 감독할 수 있었다.』


이런 노예무역의 번성으로 흑인 노예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근심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노예들의 반란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가혹한 법과 가혹한 처벌을 통해 흑인노예들을 통제하게 된다.


『노예법은 매우 혹독했다.  어떤 섬에서는 주요 위반항목에 “백인을 죽이려고 계획하거나 상상하는 것”이 포함하기도 했다.  흑인노예는 법에 주인의 동산이라고 규정되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거의 없었다.  흑인법이 노예폭동에 대비해 아주 가혹해진 것은 백인보다 훨씬 많아진 흑인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19세기가 되자, 서인도제도의 노예는 더 이상 큰 이익을 가져오지 않았다.  상품의 공급과잉으로 서인도제도산 설탕가격은 점점 떨어졌고, 노예수요도 이에 맞추어 줄어들었다. 여기서 단련된 많은 노예들이 영국 식민지로 흘러들어 갔다.』


『뉴욕은 북부의 어느 식민지보다 유색인의 수가 많아지자, 노예법도 펜실베니아, 뉴저지, 뉴일글랜드보다 가혹했다.  노예의 음모를 막기 위해서 일할 때가 아니면 3명 이상의 흑인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장례식에도 관을 메는 사람이나 묘를 파는 사람을 제외하고 12명 이상은 참석할 수 없게 했다.』


그러나 흑인노예들의 운명은 퀘이커교도를 중심으로 극히 소수 양심적인 노력들이 전개되기도 하지만 노예노동의 가치가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등을 통해 입증되는 전개과정 속에서 변화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 변화는 흑인노예 자신들의 역사적 주체로서의 주체적인 참여와 폭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 가치를 입증하면서 그 영역이 확대강화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퀘이커교도 집단 외에 흑인의 운명을 보다 낫게하려는 노력은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립전쟁 즈음에 흑인들에게 보다 밝은 날을 예견하게 하는 두 가지 진전이 있었다.  즉, 노예무역에 대한 적대감 고조와 흑인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노예 무역을 반대한 것은 노예폭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은 흑인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군에 입대하는 자가 대게 자유를 얻었다.  더구나 전쟁이 자유의 이름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많은 미국인은 노예신분으로 인간을 붙잡아 두는 부도덕성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게 되었다.  노예폐지론자들이 협회를 조직하고 종교단체가 흑인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고, 주정부와 연방정부에서는 반노예제 조치를 취했다.』


『산토도밍고의 뚜쌩 루베르뛰르의 폭동처럼 성공하여 흑인이 통치하는 새로운 국가의 출현은 미국의 노예들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1822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베시의 폭동이나, 터너의 폭동 등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특히 남북전쟁과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에서 흑인들의 역할이 지대하게 나타나면서 필연적으로 이에 걸맞는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흑인노예들이 참여한 자유의 이름으로 전개된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전쟁과정에서 자각해 나가는 흑인노예들의 이런 요구를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역사적인 요구로 부각되게 하였다.


『남북전쟁 발발의 원인은 다양했지만 첫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단연 노예제였다.  링컨같은 인물에게 전쟁의 최우선적 목적은 노예해방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흑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찾아 나섰다.  군사작전은 주로 남부땅에서 이루어졌고, 북부 양키군대가 접근할 때마다 흑인들은 북부진지로 몰려들었다.  공식적으로 이런 대규모 탈출은 1861년 3명의 버지니아 노예가 도망해 먼로 요새의 은신처를 찾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틀러 부대장은 도망노예를 주인에게 돌려주기를 거절했다.  그 소식은 빠르게 노예들 사이에 퍼졌고, 많은 노예들이 성조기(북부)에 이르는 데 성공하면 자유가 보장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노인이나 젊은이, 아프거나 건강한 사람, 충직한 하인이나 비천한 농장일꾼 할 것 없이 여러 층의 노예들이 도망을 쳤다.』


『1940년 중반에는 군복무중인 흑인 수는 육군 13,200명과 해군 4,000명 정도로 많지 않았다.  그 해 10월, 전쟁부는 흑인과 관련해서 징병비율을 그들의 인구비중과 일치하게 하고, 백인군인들과 혼재시키지 않는다는 두 가지 방침을 발표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일 아침에 애리조나호의 삼등 취사병인 밀러가 세운 공적이었다.  경고벨이 울리자 밀러는 갑판으로 나와 죽어가는 함장을 옮기는 것을 돕고 나서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그는 침몰하는 애리조나호를 포기할 때까지 적어도 네 대의 적기를 떨어뜨렸다.  이후 밀러는 니미츠장군이 직접 해군 십자훈장을 달아 주었고, 사후에는 의회에서 주는 명예훈장의 수혜자가 되었다.  그 역사적인 날의 업적으로 해군의 인종차별정책이 드러났고 개선이 행진이 시작되었다.』


『흑인의 지위가 변한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으로 보다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에 비해 44년에는 100만명 이상의 유색인 노동자들이 민간부문에 종사했다.  이 기간 동안 정부기관에 고용된 흑인의 수는 6만에서 30만으로 껑충뛰었다.  전쟁기간 동안 산업분야에서 흑인여성의 고용은 4배나 늘어났다.   1940년에는 단지 4.4%의 흑인남자가 숙련공 범위에 있었으나 4년 후에는 7.3%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반숙련공 흑인남자의 비율은 12%에서 22.4%로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940년 흑인 10명 중 7명이 농장, 가정부, 비숙련직에 집중되었으나 1945년에는 5명으로 줄어들었다.』


『한국전쟁은 군대의 흑백 통합을 촉진했다.  아무런 군사상 효율성의 손실없이 인종 혼합부대는 전투에서 함께 싸웠다.  흑인들과 합쳐진 이후 백인 부대의 사기가 높아졌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2년 후 1955년, 국방부는 모든 흑인독립부대는 폐지됐다고 선언했다.  군대 내 인종통합의 증가로 흑인이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늘었다.  1963년까지 육군에는 3천명의 흑인장교가 있었다.』


하지만 뿌리깊은 미국사회 내의 흑인들의 처지는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었지만 흑인노예에서 미국사회의 당당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지난한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인정투쟁은 흑인 자신들의 몫이었다.  특히 이른바 연좌농성식 비폭력투쟁으로 흑인노예들의 자각과 단결을 촉구하게 되었고, 미국사회 내의 여론에 일대 경종을 울리게 된다.


『브라운판결로 미국은 유색시민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공립학교에서 단지 인종에 기초한 어린이의 분리는 위헌이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법원은 1896년의 프레시 결정을 완전히 뒤집어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 하므로 흑인들로부터 수정헌법 제 14조가 보호하는 평등한 대우를 박탈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1960년 2월 1일 시작한 연좌농성 운동은 그린스보로의 노스캐롤라이나 농업기술대학의 대학생 4명이 울워스 가게의 분리된 점심 카운터에 앉았으나 식사제공이 거부된데서 비롯됐다.  그들은 계속 자리에 앉아 책을 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 지방의 흑인 치과의사가 그들의 행동을 배우자는 의미에서 뉴욕의 CORE에 전화를 걸었고, 숙련된 현장 운동가들이 그린스보로에 도착했다.  그들은 집회를 이끌면서 학생들의 연좌농성에서 웃거나 되받아치거나 욕설하지 않으며, 넋두리나 성냄없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인 비폭력 저항의 방법을 배웠다.   다른 시의 학생들이 그린스보로의 데모를 듣고 연좌농성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며, 곧 많은 사람들이 그 운동을 실천했다.』


이런 흑인들의 주체적인 투쟁을 통해 미국의 시민으로 자신들을 정립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참여와 엘리트층으로도 진입해 나기 시작한다.  정치인, 사업가, 법조계, 의료인 등의 대열로 진출하고, 흑인 지역사회의 자립프로그램을 실행해 나가는 것 등이 흑인들을 미국의 시민으로 자기정립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 남녀 모두 정치 참여자가 크게 증가하고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 연대를 강화해 흑인 선거직 공직자의 수는 1971년 1,860명에서 85년에는 6,056명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그러나 그러한 증가가 감동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이들 6,056명은 전국 선출 공직자의 1%에 지나지 않았다.  1985년 흑인 다수가 거주하는 20개가 넘는 남부 카운티에서 공직에 당선된 흑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일부 백인은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흑인에게 투표하려고 하지 않았다.』


『흑인들은 비록 연방정부나 주정부의 행정, 입법, 사법 등 3부 모두가 민권의 추구에 적극적이라 할지라도 정치만으로 그들의 모든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의 소중한 자원을 환영하면서 흑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책임임을 깨닫고 그들 내부의 요구, 문제, 병리 등을 고치려고 노력햇다.  그들은 헐뜯기와 탓하기를 자제하고 지역사회 자립프로그램을 강화하고 확장했다.  흑인들은 1984년 내시빌의 흑인가족대표회의에서 “우리의 문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 가 할 수 있는 것은 많다”고 주장한 제이콥의 충고에 동의했다.』


『건실한 흑인 사업가층을 육성하는 일, 법조인들은 인종차별없는 사법체제를 위해 일했다.  의료계도 인종차별주의 제거와 함께 국민건강 정책을 수립하고 수행하기 위한 소수민족 대표의 확대를 내세웠다.  특히 보다 나은 경제적 삶을 위해 이 시기 대다수 흑인들은 기부나 자선이 아니라 동등한 기회를 요구했다.』


『흑인들은 기회평등을 위한 투쟁이 오래 걸릴 것이고, 거기에는 항상 그들이 건너야 할 강이 하나 더 있지만, 그 목표에 결코 약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투쟁국면에서 이제 그들은 수년 동안 그 문화세계의 내부, 즉 그들의 고유한 예술적 창조력, 독창적 자질, 지적 성취 등을 새로 바라보면서, 인종적 결속과 진보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단계를 추구했다.  그들은 보편문화를 풍부하게 함으로써 여러 방법으로 인류의 자유의 기저를 확대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데 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들은 “Black is beautiful"는 표현에 새로운 깊이, 의미 및 정확성을 부여했다.』


미국에서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미국사회를 통합하는 데 있어 흑백간의 문제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으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주체로 자각해 나가는 과정이 축적될 때만이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누가 대신 역사를 써줄 수는 있지만 그 역사는 결국 언젠가는 소멸해버리고 만다.  역사는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중요하고, 역사는 몸으로든 기록이든 스스로 기록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흑인들을 차별했던 과거가 현재에도 끈질기게 음으로 양으로 잔존하여 미국의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국가적인 차원의 사회통합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미국의 흑인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그들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기회도 엿보인다.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인권을 실현하고 확장할 자유를 가지므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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