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8/11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1/04
    현실의 투쟁 과제로부터 시작하는 교육 운동. 미래를 책임진다
    다예지예

현실의 투쟁 과제로부터 시작하는 교육 운동. 미래를 책임진다

현실의 투쟁 과제로부터 시작하는 교육 운동. 미래를 책임진다.

 

김태균(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상임대표)

 

1+1 = 2

1+1 = 2+3+4+@

어느 것이 맞는 답일까?

 

인간의 아름다운 힘, 공동체

 

인간은 인간을 포함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세상을 상대로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고 넓히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동을 하면서 인간의 장엄한 역사를 이루어 왔다.

한사람의 힘보다는, 한사람과 또 한사람이 모여 단지 그 합인 두 사람의 힘보다는,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한사람의 힘과 또 한사람의 힘이 합쳐서 둘, 셋, 넷 이상의 사회적 힘을 발휘하면서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세상을 상대로 노동하면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그 위엄을 구축해 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 사회는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생산수단을, 그리고 과학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왔으며, 더욱 더 위대한 업적은 바로 후배들에게 이러한 사회의 힘을, 집단의 힘을,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상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 계획, 그리고 이를 책임지고 운영해 갈 주체인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을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해 왔다는 점이다.

 

계급의 출현과 함께 모든 것이 뒤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인간의 역사는 계급의 출현과 함께 모든 것이 뒤 바뀌어 버렸다. 인간사회가 생산하고 있는 모든 업적을 단지 지배계급을 위해, 피 지배계급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을 하면서 스스로의 생산력 발전의 제약으로 그리고 사회발전의 걸림돌로, 계급은 인간 사회의 재앙으로 등장을 했다.

이제 재앙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하는 주범으로서 계급이라는 체계는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계급이라는 사회적 토대는 그 동안 인간사회가 형성하고 생산했던 수많은 업적을 한 줌의 재로 만들고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세계를 상대로 한 인간의 노동의 역사 또한 계급 사회의 출현과 함께 인간과 세계를 상대로 한 노동에서 인간과 인간을 상대로 한 투쟁의 역사로 전환되면서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는 불운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교육 또한 여타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계급의 출현과 함께 지배와 피지배가 상존하는 사회 체제의 우월성 및 영구성에 대해, 그리고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로의 발전을 거세하고 계급 사회에서도 누구나 지배계급으로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등의 환상을 심어주는 이데올로그적 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인류 역사의 발전은 20세기 들어 쏘련이라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등장을 하면서 계급사회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회라는 양 사회 체제 속 에서 인류가 공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을 해 왔다.

물론 교육 또한 이러한 냉전의 시대에서 서로의 체제의 부당성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중심으로 작동을 했으며 특이나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서의 교육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현상 분석조차 거부를 하면서 현존하는 쏘련을 비롯한 새로운 사회 체제에 대해 온갖 비방과 비난을 서슴지 않고 이를 재생산하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을 설정하는, 체제유지를 위한 극단적 기능 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또한 형식적으로 의무교육 또는 무상교육의 이름으로 자본주의 사회체제도 인류 공동체의 역할 속에 교육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식의 형식상 평등교육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사회주의권의 변화 이후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체제에 대한 인류의 선택권이 없어진 상황에서 굳이 형식상이라도 평등교육을 취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비용을 지속적으로 지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아니,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체제 안정을 위한 교육에서, 자본주의 계급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기제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기 시작했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은 더 이상 형식적이나마 인류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공적 영역의 그 무엇도 아니며, 단순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영도성(?)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해 생산되고 육성되어야 하는 피 지배 계급의 생산기지로 전락했을 뿐이다.

이제 새롭게, 아니 완전히 다르게 시작을 해야 한다.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인간이 착취를 당하는 사회, 과학기술혁명의 성과가 전체 인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 지배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착취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사회, 인류 공동체가 책임지고 함께 모색해야 할 교육이 계급사회를 옹호하고 피 지배 계급을 생산하는 기지로 전락한 사회.

이제는 아주 새롭게 시작을 해야 한다.

기존의 사고와 관념을 다 버리고 아주 새롭게 상상을 시작하자.

인간의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돌아가기 힘들고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아 산을 뚫기 위해 만들었던 다이너마이트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용이한 수단으로 사용이 됨을 반성하면서 번 돈을 다 꼴아 박아 노벨 재단을 만들었다는 노벨의 오류를 이제는 더 이상 반복하지 말자.

인간의 착취를 위한 생산력 발전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지배수단으로서의 과학기술혁명이 아니라, 지배 - 피 지배가 완전한 것 인 양 치장하는 교육이 아니라 아주 새로운 상상을 통해 아주 새롭게 시작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그림과 상을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산력을,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계급이 없는 사회를 아름답게 그리는 교육을, 계급으로부터 역사발전이 신음하는 사회가 아닌 아주 새로운 세상 건설을 위해 투여해야 하며 인간사회가 생산한 수많은 업적을 이제 하나의 계급이 아닌 인간에게 되돌리는 새로운 역사를 건설하는 노동으로, 투쟁으로 일어서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의 교육은 계급이 없는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망상적 계급사회의 우월성을 교조적으로 주입시키고, 이러한 계급사회에서 몇 안 되는 지배계급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자본주의 사회의 주류 가치인 경쟁과 대립을 교육의 형식에서부터 내용까지 주입시킴으로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유지의 첨병의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자본주의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계급사회 그 자체가 극단적으로 달려가면서, 교육 또한 상술한 자본주의 교육 그 자체의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본 시장의 기능으로서의 역할 또한 강제적으로 부여 받게 된다.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한 교육의 변화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것에 부족하여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돈이 돈을 먹는 상업 은행 자본 중심으로 그 무개 중심이 이전되어 왔고, 이제는 돈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권리를 상품화 하여, 시골동네 뻥튀기 장수처럼, 또 다른 상품으로 수차례의 뻥을 튀겨 이윤을 획득하는 금융 투기 자본 중심으로 그 무개중심을 이전시켜 오면서 발전하였다.

결국 이러한 투기금융자본 중심의 자본주의는 이제 그 어느 자본의 권리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돌고 돌아 투기금융자본이 산업자본과는 무관한것인양 사회발전의 재앙으로 등장하면서 이놈의 자본주의 체제는 극을 달리고 있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발전과 함께 교육은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산업자본과 상업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은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의 우월성과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그의 기제로서 그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역할은 교육 내용뿐만이 아니라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다수의 피 지배계급의 운명처럼 1등을 위해 다수가 존재하는 평등을 가장한 냉엄한 계급사회의 논리를 교육현장의 형식적 체계로까지 강제 당해왔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의 교육이 투기금융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이제 이데올로그 기제로서의 교육현장, 1등을 위해 다수가 존재해야 하는 형식 논리적 교육현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품 그 자체로서의 교육현장을 요구받고 있다. 교육을 상품화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최소한의 평등권인 일국의 국민 자녀가 교육 받을 권리를 자본의 소유 여부에 따라 피 지배 계급 자녀의 교육권은 박탈하고 그나마 계급사회에서 형식적 중재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변했건 자본주의사회의 국가권력이 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정책은 그래도 좋았다.!?!?!?!

 

고교등급제, 기여 입학제, 본고사를 금지하는 3불 정책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은 그나마 좋았다. 라고 이야기 할 동지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4월15일 학교 자율화 조치로 표현되는 이명박 정권의 경쟁과 대립 중심의 교육 정책보다는 그래도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이 좋았던 것은 아니냐? 라고 반문하실 동지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웃긴 것은 노무현 정권 때도 그랬고 그 이전인 김대중 정권 때도 그랬고 지금 이명박 정권 때도 마찬가지로 경쟁과 대립의 학교 교육으로 인해 매년 우리들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슬픔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물론 노무현 정권 때는 그래도 고딩이 자살을 했고 이명박 정권 때는 초딩이 자살을 했으니까 노무현정권이 그나마 더 좋은 것 아니냐? 라고 반문 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소위 SKY 대학이라 불리는 특정한 대학 중심으로 한국 대학이 서열화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고교 평준화는 이름뿐이다. 더구나 고교 평준화라는 이름 속에 수많은 특수목적고와 외국어고등학교 신설은 그 이름과 무관하게 특정한 1등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입시학원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이렇게 서열화 되어 있는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사교육 현장을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중딩의 모습이 바로 노무현 식의 3불 정책일 뿐이었다.

물론 이명박 정권은 기왕 고교가 서열화 되어 있으니까 사문화된 고교 등급제를 폐지하고, 대학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공립대학 법인화를 통해 자본들에게 매각하고 대학의 원활한 돈벌이를 위해 기여 입학제를 그리고 학생선발권을 학교당국에게 주는 본고사를 부활하기 위해서 3불 금지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보다 더 발광하고 있음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아하, 참 그리고 무척 중요한 중학교 입시 부활을 위해 국제중학교 설립 및 초, 중, 고딩을 상대로 한 전국적 일제고사 실시 및 그 성적 공개로 전국의 아이들을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학교 또한 줄을 세우겠다는 원대한 꿈(?)은 분명 노무현 정권과는 다른 이명박 정권만의 교육 정책인 것을 틀림이 없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이나 이명박 정권의 그것이나 대학을 일부 대학 중심으로 줄을 세우고 이에 맞추어 초중고교를 줄을 세우기 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영원함을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그의 기제로서의 교육과 1등만을 위한 교육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단지 차이라면 특목고, 외국어 설립을 통해 고교의 실질적 서열화 및 고교 입시를 부활을 노무현 정권이 주창했다면 이명박 정권은 국제중 설립과 일제고사 실시를 통해 중학교 입시제도 부활 및 대 놓고 점수 공개를 통해 전체를 서열화 하고자 한다는 점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결국 50보 100보의 차이일 뿐 아닌가?

참, 굳이 또 다른 차이를 이야기 하라면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자본주의 체제가 유일무이한 사회 체제이며 영원히 발전할 것이라고 교육현장을 통해 내용을 강제한 점에서는 동일하나 제국주의 2차 대전 이후 한반도 정부수립의 과정에서 반민특위 활동을 미친 듯이 때려잡았던 이승만 정권을 놓고 한쪽은 부정을 또 다른 한쪽은 긍정을 하는 역사 교과서 시각에 대한 차이 수준일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과 한국 교육의 현실

 

이명박 정권은 취임식에서 “선진화를 위해서는 인재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교육정책의 방향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야 한다고 ” 주장을 하면서 이명박 정권 인수위에서 밝혔듯이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은 대학입시 자율화 정책과 고교다양화 300프로젝트, 그리고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으로 그 내용이 모아지고 있다. 경쟁과 자율, 선택과 집중,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구호아래 추진되고 있는 이몀박 정권의 교육 정책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결국 교육의 시장화이며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최적점에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정부(교과부)에서 관장했던 교육정책 관련한 권한을 대학교육의 경우 대학교육발전협의회 (대교협)로 초중고교 및 사회 교육은 시도 교육감 협의회로 이관하면서 기존의 교육부를 없애고 인재과학부와 교육과학기술부로 재편하였다.

대학의 경우 정부가 관장하는 국공립 대학의 경우 법인화를 통해 민영화 사업을 추진하고 대학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학생 선발권을 대학 당국(대교협)에게 이관을 함으로써 대학 입시제도의 살인적 경쟁의식을 더욱 더 부추지고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초중고교의 획일화된 일제고사 실시 및 그 성적의 공개로 인해 전체 학생과 학교의 점수로 인한 서열화 작업과 더불어 외고 및 특목고 확대 강화를 통해 고교 평준화를 실질적으로 해체하고 국제중 신설 등을 통해 중학교 입시, 고등학교 입시제도 부활까지 예견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학교 평준화 해체 작업은 일제고사 실시 및 특정한 학교 신설을 통한 작업과 동시에 학교 교육 노동자들의 평가를 통하여 학교와 학생 그리고 선생에 대한 전 방위적 서열화 작업을 추진이 되고 있다.

 

결국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의 일편적인 서열화 작업 및 입시제도 부활은 결국 지난 달 성적 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초등학생의 시신을 더욱 더 차디차게 만들 뿐이며 전 세계적으로 20조원이라는 최고의 액수를 사교육 시장에 쏟아 붇는 한국의 사교육 시장에 있어 노동자 민중의 살림살이는 더욱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금 더 삶과 밀접하게 이명박 정권의 교육 정책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정권 출범 이후 이명박 정권은 지난 4월 15일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의 커다란 그림을 “학교 자율화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노동자 민중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계급사회에서의 자본주의 체제 유지 및 지배계급의 재생산 기지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교육의 기제를 이제 이명박 정권은 대한민국이라는 주식회사의 CEO답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돈벌이의 장으로까지 활용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단 1명의 일등을 위해 모든 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웃긴 것은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경쟁과 대립이라는 구도에서 패배자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열심히 하면 1등이 될 수 있다는 환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된다. ‘개천에서 용난다’ 지금도 촌 동네 가면 동네 입구에 “00자녀 00대학교 입학 경축” 이라는 현수막이 그럴싸하게 걸려 있다.

그래 맞다. 맞아 그러나 이제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소위 SKY 대학 및 주요 수도권 소재 대학 의대, 치대, 한의대 입학생 부모들의 소득수준을 보면 2006년 월 400만 원 이상의 부모를 둔 입학생이 20%를 넘고 있으며, 200만 원대 미만의 월 소득을 둔 부모의 자녀는 4%초 채 안 되는 통계치를 보면 “개천에서 용이 아니라 지렁이도 나올 수 없는 상황”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어디 이뿐인가? 말 나온 김에 오랜쥐 이야기도 해보자

 

소위 조기유학이라 해서 어릴 때 몇 년 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아이들이 있다. 조기육학은 아니더라도 방학 때 되면 호주건 캐나다 미국등지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는 아이들이 있다. 물론 돈이 안 되어 미국 등은 못가더라도 동아시아권이라도 아이들 어학연수를 다녀온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노동자 민중의 이야기는 아니다.

노동자 민중은 살림살이가 조금 괜찮다면 영어전문학원이나 개인 또는 그룹별 과외 정도라고 시킨다. 이도 안 되면 재능, 대교, 빨간팬 등 방문학습지라도 시킨다. 영어 관련해서 말이다. 문제는 다수의 노동자 민중의 자녀는 영어 관련해서 별도의 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학교 근처 조그마한 보습학원에서 전 과목 대상으로 한 학원을 다니는 정도이며 이도 안 되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주는 CD나 TAPE가지고 집에서 영어 학습 하는 경우일 것이다. 물론 다수의 노동자 민중의 자녀들은 아예 영어공부를 포기하는 아이 또한 매우 많은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이렇게 사교육비 사용에 대해 계급적으로 확연하게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1/N으로 나누거나 총액으로 했을 때는 무지 많이 투여하는 듯한 통계치가 나오곤 한다. 실재로 지난 2007년 한국의 사교육비는 20조 400억 원에 이르며 이는 OECD가입 국가 중 최고의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는 나라라는 명예(?)로운 영광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아주 새롭게 시작을 하자

 

매년 11월만 되면 한국은 몇 가지 사건을 들썩 거린다. 전태일 열사를 기리며 그해의 투쟁의 과제와 1년 투쟁을 결산하는 전국 노동자 대회, 지난 12년 공교육 과정과 나머지 태교부터 시작된 20년 정도 되는 사교육 과정을 결판내는 대학 수능 시험, 그리고 시험에도 안 나오고 노조 소식지에도 안 나오는 수능 시험 전후로 해서 매년 평균 4-5명의 고딩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까지 한국은 11월만 되면 들썩 거린다.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을 보는 일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매년 20% 가까운 대학이 미달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20%에 가까운 입시생들이 입학을 포기하고 다시금 입시를 준비한다고 한다. 이중에 몇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대학이 부족하고 들어가려고 하는 입학생이 많으면 이를 선발하기 위한 선발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아니 입학생보다 대학이 부족하면 대학을 더 만들면 된다. 대학을 충분하게 만들어 모든 노동자 민중의 자녀들이 대학을 입학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시금 내년을 준비하고 대학은 대학대로 20% 이상의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일까?

 

이렇게 대학이 살인적인 입시의 한 복판에 있다 보니까 이를 준비하는 고등학교는 철저하게 대학 입시를 중심으로 편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 시키는 고등학교는 무조건 좋은 고등학교.

 

중학교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 많이 입학시키는 좋은 고등학교를 많이 보내는 중학교는 무조건 좋은 중학교다. 물론 이러한 좋은 중학교를 많이 입학시키는 초등학교가 좋은 초등학교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다.

 

결국 좋은 초등학교,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내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한국의 2가지 풍경중 하나인 밤 12시가 넘어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학원가로, 사교육시장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또 한 가지 풍경은 밤 12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술집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야기 한다. 공교육이 제대로 자기 역할을 못하니까 사교육을 시키는 것 아니냐? 라고 말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분명하게 사교육의 문제는 공교육의 자기역할 부재가 아니가 공교육이 어떻게 하던 그것과 무관하게 철저하게 체계화된 입시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대학입시로 인해 공교육 또한 입시 준비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며, 사교육 시장이 증대될 수밖에 없는 물적 토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투쟁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투기금융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미국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유럽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이 되면서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허둥지둥 구제금융 투입 및 은행 국유화 등을 통해 면해 보려고 하는 세계 자본가계급의 안타까움(?)은 있으나 결국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발상과 상상을 동원하지 않으면 80억 인구의 사회체제로부터의 고통은 해소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서 교육 투쟁의 기조는 당연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는 요구와 상을 제시하며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세상은 짜여 있는 체계가 아니고 만들어져 있는 상 또한 아니다. 현실의 투쟁 과제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며 현재 발 딛고 있는 우리의 투쟁 과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아름다운 세상인 것이다.

 

대학 입시로부터 모든 것이 규정되어져 있는 한국교육의 현실을 대학 입시제도는 그대로 둔채 예를 들어 노무현 식의 3불 정책을 유지한다고 그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인가? 한국의 대학 입시 제도를 건드리지 않고 초중고교의 서열화 저지 투쟁이 그 어떤 의미와 향후 과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대학 입시 제도를 건드리지 않고 20조가 넘는 사교육 시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물론 대학 입시 제도를 건드린다고 모든 것은 해결되지 않음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그 기제로서의 교육현장, 자본주의여 영원하라! 를 쉼 없이 외쳐대는 한국의 교육현장을 극복하는 투쟁은 대학입시제도 폐지 투쟁과는 어찌 보면 다른 영역의 투쟁 과제일수 있다.

 

문제는 모든 것은 해결할 수 없어도 최소한 현재 발생되고 있는 수많은 현실적 모순을 극복함에 있어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면 당연하게 한국의 교육 투쟁의 방향은 대학 입시제도의 전면적 폐지 투쟁으로 집중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입시제도 폐지 투쟁?

 

자녀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시기가 되면 대부분의 노동자 민중은 집에서 가까운 학교라는 물리적 거리라는 조건을 선택의 주요한 기준으로 판단을 할 것이다. 물론 중학교와 고등학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 우리 모두 두 눈을 꼭 감고 대학 선택의 기준이 집에서 수십, 수백km 떨어져 있는 관악산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을 그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자.

관악산에 없고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해서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다른 학교보다 학력이 떨어지나?, 아니면 쪽팔리나?

 

대학의 입시 제도를 어떻게 폐지 할 것인가? 대학의 입시제도가 폐지되려면 현재의 초중고교처럼 대학의 평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한국의 대학은 사회와 동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한국 사회의 주류계층이라 불리는 지배계층으로 진입하는 진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대학의 평준화는 사회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전에는 어렵다는 결론이 도달하며, 사회의 계급적 분화가 해소되기 전에는 쉽지만은 않은 과제이다.

 

그렇다고, 계급을 해소하고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근절하지 전까지, 매년 4-5명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수많은 사교육 시장에서 우리들의 아이들을 내 맡기고, 수십, 수백일간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임금 인상분을 고스란히 학원 원장에게 가져다 바쳐야 하는 악순환을 계속 할 것인가?

사회의 주류층의 진입구로의 대학, 그리고 이러한 대학의 서열화로 인해 초중고교의 서열화, 보다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바쳐야 하는 임금, 전 세계 어느 아이들보다도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잘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의 건강권, 이제 하나의 통으로 바꾸기 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

 

우선 의사, 판검사, 공무원, 교육노동자등 사회의 공적 노동을 담당하는 공적 노동자들은 동일 노동과 동일 임금의 원칙하에 전체 국가가 관리 운영하는 체계를 구축하자. 그리고 나서 이러한 공적 노동자를 육성하는 국공립 대학을 전국 단위에서 건설하자. 그리고 이러한 국공립 대학의 입시전형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입학하듯이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자. 쉽지 않은가?

 

최소한의 사회적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더라도 전체 사회공동체를 위한 노동을 행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하에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의무교육의 형태를 빌어 육성하자. 그리고 이러한 국공립 대학을 위해 국가와 사회의 교육 재정을 전면적으로 투입하고 지원하자.

 

결국 현실의 아픔으로부터 시작되는 교육 투쟁은 새로운 사회체계의 상과 그림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며 이러한 출발이 결국 새로운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의 교육의 상을 그려내는 준비운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인당 2만 불 시대라고 한다. 4인 1가족이라 하면 한가족당 8만 불이다. 지배계급처럼 넉넉하게 살지는 못해도 이렇게 죽지 못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가고 싶은 대학을 못가 매년 젊은이 4-5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노동자 임금의 40% 이상을 사교육비로 사용하는 이 야만스럽고 지긋지긋한 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끝장을 내야 한다.

 

아니 끝장을 못내도 최소한 죽은 이들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단지 먼저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의 투쟁 과제임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00지역노조도 생기고 여성노조도 생기고 일반노조도 생기고 있으며 투쟁을 한다. 한축에서는 실업자 노조 건설을 위한 깃발을 제작하고 있기도 하다. 학부모 노조는 어떨까?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교육 정책에 대해 조직의 이름으로 한판 동을 뜨는 싸움판을 그려보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