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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성노동자연대 한여연 출범 선언문 (잠실'성노동자의날'발표) 2005·06·29 13:41
전국성노동자연대 한여연 출범 선언문
우리 성노동자들은 지난 9월 23일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오늘까지 9개월 여를 혹독한 시련속에서 인고의 나날을 지새웠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았고, 아니 도저히 죽을래야 죽을 수 없었고 이렇게 살아남아 ‘성노동자의 날’ 에 이르렀다. 오늘 ‘성노동자의 날’, 이 자리에 우리 성노동자들이 함께 하기까지는 지난 겨울 칼바람 몰아치는 여의도에서의 극한적인 단식투쟁을 비롯해 온몸으로 끊임없이 저항한 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반도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다양한 이름의 성노동자들이 무수히 존재했지만, 오늘 한국의 성매매 특별법 경우처럼 성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사례는 결코 없었다. 더욱이 성매매 금지주의라는 반인권적인 정책이 이른바 참여정부라는 노무현 정권에 와서 강력히 시행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법이란 무릇 주권재민의 원칙아래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성매매 특별법은 성노동자들을 주권재민의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겉으로는 “성매매 피해여성” 이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자활시키겠다는 등 성노동자들을 위해주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성노동자들에게 오명과 낙인을 찍으며 시혜를 베푸는 양 선전에 급급했던 게 이 정책의 현 주소였다.
그럼 이 모든 기만적인 정책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그 주인공들은 바로 한국의 여성계 권력자들이다. 이미 정치세력으로 깊숙히 자리잡은 여성 권력자들은 미국에서 40여년전에 유행하던 급진적 여성주의에 매몰된 여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역사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해왔다고 믿기에, 소위 가부장제를 없애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여성주의 이론은 당시에는 맞는 얘기였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그러나 여성계 권력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우리 성노동자들이 고객을 기다리는 모습이 죽기보다 싫었다. “남성들에게 어떻게 여성의 몸을 팔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용납할 수 없는 생각이 그녀들로 하여금 성노동자들을 일거에 퇴치해야 될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군산 개복동 사고처럼 일부 악독한 업주들이 빚은 대형 사건이 커다란 구실을 제공했다.
이제 여성계 권력자들은 성매매 특별법을 통해 우리 성노동자들을 모두 “성매매 피해여성”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무지한 얘기다. 성매매 피해여성이라는 개념은 성(性)과 관련한 인신매매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 일하는 성노동자다. 누가 우리를 인신매매 했다는 말인가. 국제사회에서도 “인신매매”와 “성노동”은 엄격하게 구분하건만 한국에서는 배웠다는 사회지도층들이 그 정도 분별력도 없단 말인가.
우리 성노동자들 또한 같은 여성으로써 굳이 여성계 권력자들과의 다툼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말살하려는 저들의 시도에는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여성계 권력과 한국의 모든 정치권력은 답해야 한다. 성매매 특별법이 실효가 없을 것이라는 여론이 절대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강행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 성노동자들은 여성계 권력이 입법부 및 행정부에 가한 공갈협박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마치 성매매 특별법 제정과 시행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은 은연중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양 혐의를 두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표결에 반대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한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은 성매매 특별법의 효과를 부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며 억압적인 회의 분위기를 전한 바 있다.
이렇듯 여성계 권력의 압력 때문에 입법내용이 제멋대로 결정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계 권력의 압력에 굴종한 모든 정치권력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특별법 통과에 기여한 국회의원들은 성별을 떠나 주권자의 하나인 성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책임을 분명히 져야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여성계 권력에 압도당한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지난 3월 이른바 집창촌 패쇄법안인 '성매매 집결지 폐쇄 및 정비에 관한 법률'을 제정키로 하였고 , 여성가족부는 이미 집창촌 폐쇄를 위한 연구 용역을 의뢰한 상태가 아닌가. 따라서 우리 성노동자들은 이 모든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바로 소름끼치는 여성계 권력이기에 그들을 계속해서 지목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노동운동의 투쟁과정에서 많은 이웃들을 만났다. 집회 시위하는 길거리에서, 사이버 운동공간인 인터넷에서 그리고 세계여성학대회에서, 성노동자들의 처지와 생각을 이해하는 이 땅의 양심세력들은 도처에서 우리 성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과 노동권 쟁취를 돕기 위해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분들은 우리들이 성노동에 종사하게 된 원인과 과정을 사회구조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영향력있는 한 사회단체는 “사회적 낙인과 편견 대신 성노동자 여성에 대한 인권옹호로 인식이 전환되어야 한다” 면서 “성노동자도 인간이다. 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자!” 라고 제 사회단체에 행동을 과감하게 촉구했다. 또 어떤 학자는 법과 공권력에 의한 성매매 근절의지는 문제가 있으며, 성노동자들에게는 자치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다른 학자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매매춘 그 자체가 아니라, 매매춘을 바라보는 우리의 적대적인 태도이므로 현상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하고 있다.
여성계 권력이 성매매 특별법 실적으로 자랑하는 집창촌에서의 업소 40% 감소 및 성노동자 수 50%의 감소는 온갖 음성적 성매매 분야의 풍선효과를 유발한 것에 불과하며, 성매매가 범죄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는 것은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여성계 권력이 분명하게 자랑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매매 특별법 시행을 계기로 우리들을 자활시킨다는 구실하에 오히려 자신들의 직장과 정치적 발판을 확실하게 마련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변 상인 등 정직한 성산업인들이 필요하다. 그분들은 우리들과 생계를 나누는 다정한 이웃이며 협력관계에 놓여있는 분들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 성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영업장소와 주거를 제공해주는 성산업인이 없다면 결국 음성 성매매 시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들의 안전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다. 따라서 정직한 업주가 자신의 사유재산인 자본을 투자하고 우리가 노동을 제공해 협업할 때 양자간 노동조건과 분배가 합리적이라면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행 성매매 특별법 아래서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우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단속과 오명과 낙인으로 생존권을 잃고 극도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성노동자들은 엄연히 인간이다. 그리고 노동자고 비정규직이다. 더 이상 이 억압의 굴레에 승복할 수 없다.
우리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자는 우리를 옥죄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향해 돌을 던지기 바란다. 우리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성노동을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판단해서 적절한 시점이 되면 탈 성노동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따라서 이는 여성계 권력이 법을 매개로 위계에 의해 강요되어질 사안이 아닌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성노동자의 날’을 선포하며 성노동권 쟁취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는 전국성노동자연대 한여연을 통해 성노동자들의 신세계를 열고자 한다. 성매매 대신 성노동을, 성매매여성이 아닌 성노동자가 되어 우리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것이다.
- 우리의 요구
하나. 성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하나. 성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라
하나. 성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라
하나. 성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라
하나. 성노동자와 정직한 성산업인의 관계를 인정하라
하나. 민의를 역행한 반인권 악법 '성매매 특별법'을 폐지하라
2006 년 6 월 29 일
전국성노동자연대 한여연
노동운동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채 만 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소장)
1. 내부의 이견과 그 해결, 그리고 ‘학습’의 중요성
우선, 여타의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혹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느냐, 아니냐” 등등의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에 수시로 부딪히게 되고, 그럴 때마다 당연히 내부에서는 이견과 대립이 발생하기 마련.
이렇게 이견과 대립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가장 먼저 제시되는 대답은 : “민주적인 방식으로!”
그렇다. 내부에 이견이 발생하면 ‘민주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충분한 토론과 이견의 조정,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을 통해서 그 이견을 해소해 가야 한다.
2)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견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이견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 자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는 것.
― 예컨대, ‘말의 어금니가 몇 개인가’라는 문제는 ‘토론과 다수결’만으로는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없는 것.
따라서 조합 활동 등 노동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견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문제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것.
그러면, 문제 자체를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 당연히, 진지하고 가능한 한 체계적인 ‘학습’이 요구된다.
― 추상적으로는 ‘학습’과 ‘실천’이 함께 요구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의 일상의 삶과 여러 조합 활동, 파업 등이 모두 ‘실천’이기 때문에, 그러나 체계적인 ‘학습’이 없이는 그 실천은 맹목적적인 것으로 돼 버릴 뿐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학습’.
― ‘학습’의 중요성은, “자유는 필연 속에 있다”(Hegel)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2. 노동운동 내부의 두 개의 대립적인 노선
노동운동 내부에는, 크게 보면, 전통적으로 두 개의 대립적인 노선이 존재한다. 즉 ‘개량주의적 노선’과 ‘변혁적 혹은 혁명적 노선’의 대립이 그것.
이 두 노선의 대립은 정치적이고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예컨대 ‘파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파업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매듭지을 것인가’, ‘파업에서는 무엇을 얻어 낼 것인가’ 등등,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사실상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견과 대립을 낳는데, 이는 문제에 대한 이해 및 태도가 다르기 때문.
이 대립은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과 구조, 그리고 그 운동법칙에 대한, 그리고 좀 특수한 문제로서는 ‘국가’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
* [예-1] 97년 말 - 98년 초 경제위기시의 태도, 특히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태도.
그런데, 노사정위원회란?
최장집 (김대중 정권,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 “노사정위원회는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노동의 동의를 구하려 만든, 제도적 개선을 위한 고안물이라 할 수 있어요.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자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을 초래하는 문제들을 노동의 동의를 얻어 관철시켜 사회적 저항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장치입니다. 물론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기능하는 한편, 노동이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이기도 했습니다만, 후자의 성격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사회 제52호, 2001년 3월호)
* [예-2] 과학기술혁명에 즈음한 노동운동의 기본적 노선에 관한 태도.
임영일 : 70년대 오일쇼크에서 시작된 장기불황의 국면을 거치면서 이 체제내화된(길들여진) 노동운동에 대한 자본의 공세는 자본이 개발한 계급투쟁의 새로운 무기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구조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계발해간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신경영전략’이라고 이름지었던 온갖 것들일본적 생산방식, 린 생산방식, 팀작업, JIT, 신노동문화, 신인사제도, 경영혁신 등등이 이 시기에 자본이 개발한 새로운 계급투쟁의 물질적 기초라면, 소위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라 할 수 있다. 이제 자본은 불황이나 경제위기의 국면에서는 물론이고 호황의 국면에서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양보’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세적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이제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받아들일 것을 노동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소위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변화가 배경이 되고 있었다. (“공황기의 한국 노동운동의 과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편, 연대와 실천 1998년 8월호, pp. 6-7.)
결국, 임영일 교수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도 과거의, 따라서 시대에 뒤떨어진 전투적인 노선을 버리고 타협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길, 사회민주주의적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으로서, 그 논거를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과학기술혁명’과 그에 의해서 개발된 ‘새로운 생산방식’에서 찾고 있는 것.
즉, “이제 자본은 (과학기술혁명을 통해서)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에, “이제 자본은 불황이나 경제위기의 국면에서는 물론이고 호황의 국면에서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양보’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세적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투쟁해 봤자 아무 일도 될 일이 없으므로 “노동이 양보”하여 타협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길을 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적 부(富)의 기본요소인 ‘상품’에 대한, 그 가치에 대한 무지의 소산.
― 가치는 사회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
―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아담 스미스의 역설’에 대해서, 즉 공기나 물의 가치와 다이아몬드의 가치에 대해서 보자.
3. 사회 문제를 보는 기본적 시각 혹은 방법
이상 예에서 든 혼란과 오류는 결국 주어진 문제를 올바로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것인데, 주어지는 사회적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1) 역사적인 관점에서,
2) 제반 사항과의 관련 속에서, 즉 다른 명제와의 관련 속에서,
3) 그리고, 역사의 구체적 경험과 결부시켜서 고찰해야.
예컨대, 레닌은 ‘국가’의 문제를 논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음.
이 문제를 가능한 한 과학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국가가 어떻게 하여 발생하고, 또 어떻게 해서 발전해 왔는가를 대략 역사적으로 회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과학의 문제에서 가장 확실한 것, 또 이 문제를 올바르게 다루는 습관을 들이고, 수많은 사소한 것이나 서로 다투고 있는 천차만별의 의견 속에서 미궁에 빠져버리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문제를 과학적 관점에서 다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역사적 관련을 잊지 않는 것이고, 어떤 현상이 역사상 어떻게 하여 발생했는가, 이 현상은 그 발전에서 어떠한 주요한 단계를 거쳐왔는가 하는 관점에서 어떤 문제나 고찰하는 것이고, 그 현상의 이러한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그 사물이 오늘날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하여"(스베르드로프 대학 강의, 1919), 레닌전집 29, p. 478.)
4. 노동운동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 기본적으로 고찰해야 할 문제들
노동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이들 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없을 경우, 주관과 자의, 그리고 허위의 선전․선동이 운동을 지배.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자본-임노동’ 관계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적 성격
― 임금, 잉여가치, 이윤, 지대, 이자 등등
* 특히 임금이란 무엇이고, 잉여가치, 이윤 등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 이른바 ‘무노동 무임금’론이 말하는 임금
2)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 혹은 공황
― 경제위기 = 공황의 원인
* 노동자들의 파업 등에 의한 과소생산(過小生産)이 아니라 과잉생산(過剩生産)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다.
― 경제위기가 노동자계급에 미치는 영향
* 자본주의적 생산과 상대적 과잉인구, 산업에비군의 문제
3) 국가
― 국가의 역사성과 계급성
* 인류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국가의 발생
* 다시, ‘노사정위원회’에 대해서
― 허위의 선전과 주관적인 관념․소망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이론과 구체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5.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최근의 경향, 과학기술혁명 등
1)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배경과 공기업 사유화, 노동의 유연화 등의 정책
* 20세기의 자본주의의 역사, 특히 1930년대의 대공황, 제2차 대전, 전후 호황, 1970년대 이후의 전반적 위기의 재격화 등을 이해해야.
2) 과학기술혁명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 등에 대한 이해가 중요.
* 과학기술혁명과 그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는 그만큼 생산력과 생산관계과의 모순,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를 심각하게 격화시킨다.
* 따라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혹은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라는 식의 주장은 경쟁에 맹목적적인 개별기업적 관점일 뿐 객관적으로는 경제위기를 심화 혹은 격화시키는 것.
6. 노동운동의 올바른 방향?
기타, ‘한국’의 특수 상황을 반영하여, 한․미 및 한․일 관계와 분단 문제, 즉 이른바 ‘민족문제’ 혹은 ‘민족모순’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나, 여기에서 상세한 논의는 생략.
다만,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이른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 즉, 민족문제는 계급문제의 한 현상형태.
당장 민주노총의 차기 대의원 대회에서는 아마 ‘노사정위원회’ 참여 여부 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 현명한 판단을 기대.
최근 노동자투쟁과 언론의 ‘노동귀족’ 이데올로기 언론 대응도 중요하지만 연대성 회복이 시급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 / [진보정치] 190호 / 2004.08.23.
올 여름 노동계의 마지막 투쟁의 고비에 보수언론의 잇단 노동자 비판이 이어졌다.
LG칼텍스노조의 투쟁에는 “고임금 노동자의 배부른 투쟁”, 서울지하철 노조의 파업에는 수 조원 적자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태한 노동자들의 “ 명분없는 파업” 등등의 비난이 봇불처럼 쏟아졌으며 노동조합의 홈페이지에도 시민들의 질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매경 등 경제신문과 조선, 중앙, 동아를 비롯한 보수언론뿐만 아니라 방송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공세에 대해 저들은 항상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수우익언론이라고 비난만 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많은 국민들에게 <대기업노조, 노동운동 = 배부른 귀족노조>라는 이미지를 덧씨움으로써 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조합원을 동요시키고 노동운동을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양 노동조합에는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직권중재가 떨어지고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등이 발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난하기보다는 노동조합의 ‘과격투쟁’을 국민들이 더욱 비난하였다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 공세의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지하철 노조의 3일만의 파업 철회, LG칼텍스노조의 직장복귀 등에는 정부의 직권중재 회부와 사측의 징계 위협, 노조 내부의 대응태세 미흡 등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여론의 악화라는 변수가 주도적으로 작용했다는 언론의 평가가 마냥 거짓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엘지칼텍스 노조위원장은 파업 마무리를 하면서 조중동과 매경, 한경이 노동자들의 요구는 귀담아 듣지 않고 회사측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며 “조합원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말했다. 늘어난 비정규직, 노동강도의 강화, 5년간 자본금의 두 배가 넘는 주주배당과 투자부진은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노동자들에 대한 비난만 퍼부어진 것에 대해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지역언론의 노동자 헐뜯는 기사에 대해 참다못한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는 성명서를 내기까지 하였다. 노동자 파업을 비난하며 강성노동운동의 변화와 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을 주문한 지역언론이 정작 비정규직 57명을 해고한 롯데백화점과 항의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백화점 홍보성 사진기사를 남발한 행태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언론은 불쾌하다는 입장을 드러냈을 뿐 지면의 개선은 없었다.
이러한 공세에 분열되는 노동자의 모습도 심각하다. 각 노조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는 배부른 대기업 노동자의 투쟁을 비난하는 비정규직이나 “어용 한국노총”과 “귀족 민주노총”을 함께 질타하는 목소리가 많이 실려있다. 함께 연대해야 할 비정규 노동자가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 못지않게 이데올로기투쟁의 영역이 중요하다고 그동안 말해왔지만 최근의 투쟁과 관련해서 더욱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한 대응이나 대안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의 투쟁과 관련해서 기업별 노조의 한계에 갖혀 노동조합 스스로 대여론전이나 홍보, 선전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 노조 간부 교육과정에 대언론 브리핑기술이나 기법도 들어 있다. 우리도 홍보선전의 중요성을 시급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만이 아닌 노동운동의 방향성 정립일 것이다. 기업별 노조주의나 정규직 노조만의 노동조건 개선을 벋어난 노동운동의 사회운동성이나 연대성 회복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언론의 공세나 노동자간 분열이 성공하게 된 것은 민주노총이 내세윘던 비정규직 차별철폐나 연대임금정책 등 사회운동적 방향이 보다 철저히 조합원이나 투쟁 속에 각인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는 개별 노동조합에게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운동 전체의 혁신도 더불어 필요한 때이다.
노동시장 문제해결이 '집단 이기주의' 해결 열쇠
-2004년 상반기 노동시장 상황과 하반기 전망-
권혜자(한국노동사회연구소 전 연구위원)
최근 하반기 경제성장률은 예상외로 4%대로 둔화되고, 내년도 경제성장률도 3%대로 내려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고유가와 물가상승 위험 속에서 내수 회복이 늦어진다면, 하반기에 예상되는 수출 둔화와 맞물려, 일본형의 장기침체나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경기침체의 동반현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관적 경제전망과 정부의 경기부양책
각종 내외신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데 이어, 전경련과 일부 경제학자들은 '좌파적인 분배노선'을 견지해 온 정부야말로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이라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간 정부는 내수는 회복의 기미가 있고 수출은 괜찮은 편이며, 오히려 지나친 위기론이 경제위기 심리를 유포하고 있다고 반박했으나, 며칠만에 콜금리를 내리고 직접적인 경제부양 정책으로 선회하기로 결정했다. 금리인하, 연기금의 주식시장 투자, 정부지출 확대, 감세 조치 고려 등을 통하여 설비투자를 촉진하고 내수 진작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경기부양정책이 내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망이 불투명하다. 경기부양 설비투자 촉진 고용 촉진 내수 성장의 흐름에는 단절된 고리들이 존재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회복세가 예상외로 더딘 상태에서 한국경제는 대외적으로는 국제유가 폭등과 중국의 긴축정책, 대내적으로는 내수침체의 장기화와 함께 그간 호조를 보였던 수출의 둔화국면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기 실적을 추구해 온 기업들이 경기 부양정책의 결과로 설비투자를 증대시킬 것인가는 불투명하다. 정부의 직접적인 경기부양 선회에도 불구하고 정책기조는 여전히 '투자 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높은 상태에서 단기 실적만을 추구해온 기업들의 투자기피가 개선되지 못할 경우 경기부양정책은 시중 부동자금의 규모만을 부풀려 부동산 투기나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이 글에서는 상반기의 경제상황과 노동시장 상황을 연계하여 살펴봄으로써 하반기 노동조합운동이 처하게 될 경제적 상황과 조건을 개관하고자 한다.
부진한 설비투자와 늘지 않는 일자리
기업의 국내 설비투자 부진과 해외 직접투자의 증대는 민간부문의 일자리 창출의 장애로 작용함으로써 내수 진작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이 되고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기업의 설비투자 부진은 매출액 감소 때문이 아니었다. 제조업의 매출액은 증대하고 있으나, 총자산 규모는 연평균 1.2%씩 감소하고 있다([표1] 참조). 기업들이 현금, 단기금융상품, 유가증권으로 이루어진 현금성 자산의 보유를 늘리는 한편 설비투자를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동안에 현금성 자산은 연평균 7.9% 증가한 반면, 기계장치 등 유형자산은 연평균 4.1% 감소하였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주로 중견대기업에서 심화되고 있다. 기업들이 국내 경제상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재무안전성을 높이기 위하여 현금자산의 보유를 늘리는 한편, 설비투자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금은 풍부하지만, 그것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민간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표1] 제조업 자산규모의 추이 (단위 : 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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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연평균증감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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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액 |
505 |
528 |
536 |
569 |
604 |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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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자산 |
614 |
567 |
545 |
546 |
585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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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자산 |
222 |
209 |
197 |
215 |
241 |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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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성자산) |
48 |
49 |
46 |
58 |
65 |
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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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자산 |
392 |
358 |
348 |
331 |
344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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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자산) |
270 |
253 |
239 |
238 |
242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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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자산 |
92 |
85 |
78 |
76 |
76 |
4.1% |
자료 : 한국산업은행 기업재무분석 각호. 기업의 보유자산 현황분석, 2004.7에서 재인용
기업의 투자위축은 단기실적주의와 더불어, 최근의 유가 급등, 하반기의 수출둔화 예상, 단기간에 내수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에 가속화되고 있다. 기업들의 올해 3/4분기 기업경기 전망을 살펴보면, BSI(기업경기실사지수, 기준치=100)는 89의 수치를 나타내고 있어, 전 분기 105에 비해 하락세로 반전되었다. 2/4분기에 비해 경기가 호전된다고 예상한 업체가 22.6%로 전 분기(30.2%)에 비해 줄어든 반면, 악화된다고 예상한 업체는 33.5%로 전 분기(25.4%)에 비해 증가하였다(대한상공회의소, 2004.7).
내수침체 상태에서 국내기업은 해외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올 상반기 중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는 총 35억달러로 지난 해 대비 66% 늘었고,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은 18억3천만달러로 110% 증가했다. 중소기업과 개인들의 해외 직접투자도 각각 30.5%, 57.9% 증가하였다(파이낸셜뉴스, 2004. 7. 30). 이런 상황에서는 민간부문에서 신규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기 어렵다.
민간 대기업의 하반기 채용규모는 전년에 비해 감소할 예정이다. 매출액 기준 100대 기업을 포함한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신규채용규모를 조사한 결과, 32.2%만이 채용 계획을 확정하였으며, 확정된 채용 인원도 지난해보다 14% 가량 감소한 총 9,584명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수출 주력기업과 내수기업간에 신규채용 규모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유통, 식음료, 건설 등의 내수 관련 기업들의 신규채용규모는 예년의 50%에 불과하다(인터넷 취업 포털 잡링크, 2004. 8).
정부는 공공부문에서 올해 35만여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지만, 이를 민간부문으로 파급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다. 상반기에는 28만3천개의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하반기에도 5만5천개의 일자리를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공공부문의 일자리 창출은 여전히 임시직 등 비정규직 비중이 높아 일시적 실업률 증가에는 대처할 수 있어도 체감실업률에는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계는 정부 정책기조의 변화와 함께 대대적인 기업지원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직접적인 경기부양정책과 대통령의 고용안정 특단 대책의 주문 등은 경기 침체 상황을 자본과의 협력 속에서 풀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건조한 노동시장 지표와 물가상승 압박
피부로 느끼는 경제 상황의 악화 정도에 비한다면, 노동시장의 지표들은 약간만 악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노동시장은 상품시장에서 파생된 시장(derived market)이므로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의 시차(time lag)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과연 우리나라의 고용지표들이 경기상황을 정확히 반영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7월 현재 실업자는 전달에 비해 5만여명 늘어난 81만4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실업률도 3.2%에서 3.5%로 늘어났는데, 이는 실업률이 5개월만에 상승세로 전환한 것이다. 청년실업률은 7월 들어 약간 하락했으나, 오히려 30대 이상의 실업률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5월 이후에는 36시간미만의 단시간 취업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7월에는 전월에 비해 58만여명이 증가하였다. 최근 경제활동참여율이 상승에도 불구하고 취업자수가 약 7만여명 줄어들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경기침체로 경제활동에 참여하려는 사람의 수는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상황이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비자 물가의 상승이 심상치 않다. 올해 7월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4.4% 올랐고, 장바구니 물가인 생활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5.8% 상승했다. 생산자 물가는 7% 상승함으로써 98년 외환이기 이후 최대의 상승폭을 경신했는데, 일반적으로 생산자 물가가 소비자물가로 전가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해 하반기의 물가상승은 이미 예고된 상태이다.
소비자의 체감경기를 말해주는 분기별 생활 형편지수(CSI)도 2002년 3/4분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100을 넘지 못했다. CSI가 100을 넘으면 생활형편이 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음을 나타내며, 100 미만이면 그 반대이다. 외환위기 이후 경기전망이 가장 높았던 1999년 4/4분기와 올해 2/4분기를 비교할 때 고용전망 CSI는 117에서 66으로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셈이다(한국은행, 소비자동향조사 분석).
고유가와 물가상승 압력 하에서 내수 붕괴, 설비투자 기피, 수출 둔화가 지속될 경우, 한국경제가 장기 침체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일축하기는 어렵다.
내수 붕괴와 임금인상률의 둔화
2002년 이후 400만 신용불량자가 포함된 1500만 신용불량자 가족의 경제활동 붕괴에도 불구하고 고용을 포함한 노동시장 지표들은 미미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임금노동자 중에서도 저소득층의 생계 붕괴는 이미 나타난 사실이다.
경제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는 가운데, 저소득 노동자 가구의 가계적자가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다. 2002년 이후 전체 노동자가구의 흑자율이 23.7% 21.7%로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위 소득계층 20%(1분위)에 속하는 저소득 노동자 가계의 적자는 이미 2002년에도 적자였고, 그 적자폭은 2년만에 -13.3% -25.6%로 크게 확대되었다([표2] 참조). 이는 경제 침체과정에서 주로 저소득 노동자들의 생계가 이미 붕괴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또한 가계부채는 물론, 가구당 부채상환 부담이 올해 최고조에 달하고 있어 당분간 내수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표2]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 5분위별 흑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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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1분위 |
2분위 |
3분위 |
4분위 |
5분위 |
전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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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4 |
-13.3 |
8.6 |
16.9 |
22.7 |
39.2 |
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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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4 |
-19.1 |
7.3 |
17.9 |
25.0 |
38.4 |
23.5 |
|
2004 1/4 |
-25.6 |
5.4 |
16.6 |
23.6 |
37.9 |
21.7 |
주:흑자율 = (흑자액 / 처분가능소득) X 100
자료 :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각년호에서 재구성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3년 말 개인부문의 금융부채는 483조원으로 가구당 부채는 3,156만원에 달했다. 이는 1999년 214조에 비교할 때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한국은행, 2004). 그리고 도시근로자 가계의 가처분소득 중에서 부채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외환위기 전까지는 10%대였으나, 올해 1/4분기에 25.9%로 늘어났다. 이는 근로자 가계가 월 처분가능소득의 1/4 이상을 빚 갚는 데 쓰고 있다는 것이며, 그 만큼 가계의 소비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수 침체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전망인데, 이는 2001년 이후 2002년 3, 4분기까지 늘어난 부동산 담보대출의 3년 만기 상환 부담이 올해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최고조에 이를 예정이기 때문이다(문병식, Weekly Focus, Economic Research, 대신경제연구소, 2004. 8).
가계가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가계가 보유한 부동산 등 자산소득이 증가하거나, 둘째, 가구원의 신규 취업으로 새로운 소득이 발생하거나, 셋째, 임금소득의 증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 억제로 자산소득의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고, 경기침체로 고용증대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가계는 임금인상을 통한 소비진작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임금인상은 전년에 비해 크게 둔화될 예정이므로 임금상승을 통한 소비 진작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된다. 먼저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에 영향을 미치는 올해 법정 최저임금의 인상률은 전년에 비해 13.1%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월 환산급여 64만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5인이상 명목임금 상승률(1월∼5월 누계)은 임금총액 기준으로 전년 대비 4.6% 상승에 그쳤다([표3] 참조). 소비자 물가 인상분을 고려할 경우 실질임금인상률은 전년 동기 대비 1.3%에 불과하다. 이는 전년도 동기의 실질임금 상승률 7.1%에 비교할 때 대단히 낮은 수치이다.
[표3] 사업체규모별 월평균임금 수준 및 추이 (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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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3 (10.7)143.12,263 (6.6)142.1300 - 499인2,347 (7.4)158.22,531 (7.8)159.0500인 이상2,907 (17.7)195.93,018 (3.8)189.61,919 (8.5)129.32,032 (5.9)127.7100 - 299인전규모2,036 (11.2)137.22,131 (4.6)133.85 - 9인1,484 (6.9)100.01,592 (7.3)100.010 - 29인1,749 (6.9)117.81,867 (6.8)117.330 - 99인 |
2003년 5월 누계 |
2004년 5월 누계평균지수평균지수 |
주 : ()내는 전년 동기 대비 상승률.
자료 ; 노동부, 매월노동통계조사
올해 임금인상이 국회의원 선거로 인해 예년에 비해 늦어졌긴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올해 임금상승추세에는 분명히 달라진 점이 있다. 올해 임금상승에서는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상승률이 500인 미만 중소기업들의 임금상승률보다 낮은 3.8%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90년대 이후 대기업의 임금상승률이 중소기업의 임금상승률보다 추월하면서 기업규모간 임금격차가 확대되고 있었다. 이는 전년도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상승률이 17.7%로 중소기업에 비해 매우 높았다는 점에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징적이다. 이러한 통계가 임단투가 정리되기 이전의 통계라는 점을 고려해도, 대기업의 임금인상 둔화가 중소기업에도 파급되어 전체적으로 올해 임금상승률이 크게 둔화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이슈 괴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반기에는 경제상황 및 노동시장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예정이다. 고유가와 수출 둔화 상태에서 설비투자 부진, 내수 침체, 물가상승 압박이 지속되고, 비정규직들의 고용불안과 저소득층의 생계 붕괴가 가속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반기에 노동조합운동이 부딪치게 될 정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노동시장 이슈들이 노사관계 영역의 이슈들과 더욱 괴리되고, 노사관계 이슈의 발목을 잡게 될 위험성이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노동시장과 관련된 이슈들이 비정규직 보호법, 차별시정기구 관련법, 최저임금법 개정, 일자리 창출, 저소득층에 대한 빈곤대책 등이라면, 노사관계와 관련된 이슈들은 공무원의 노동3권 보장, 직권중재 및 손배·가압류 관련법, 임박한 철도·택시·화물연대와 공무원노조 등의 투쟁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이슈들은 물론 모두 양대 노총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노사관계 이슈들이 주로 조합원들의 관심사인데 비해서, 노동시장 이슈들은 주로 비조합원들의 관심사라는데 우려할만한 요소가 있다.
노사관계 이슈들에 대해서는 노동운동의 대응주체들이 형성되어 있는 반면에, 노동시장 이슈들에 대해서는 대응주체들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비정규직 고용이나 일자리 창출, 저소득층의 생계 대책과 같은 문제들은 경제정책의 기조 등에 대한 목적의식적 법·제도 개입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그에 대한 노동운동의 개입수준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노무현 정부의 정책선회를 고려해 본다면, 하반기에는 노동시장 이슈는 물론, 노사관계 이슈의 해결도 상반기보다 어려워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정위원회의 참여나 위상 재편의 문제는 전략적인 상황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노조 조직 내외의 팽팽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결정의 관건은 노동계가 사회적 협의기구를 통해서 정부의 정책기조를 견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런데 사회적 협의기구 참여 문제는 상반기와 하반기에 달라진 점이 있다. 상반기에는 노무현 정부를 매개로 자본을 견제하는 문제였다면, 하반기에는 이미 형성된 정부와 자본의 협조관계를 견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배제하고 본다면, 노동계는 하반기에 정규직 중심의 주력부대를 앞세워 노사관계 이슈와 함께 노동시장 이슈를 풀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숨을 바친 항거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이슈들은 여전히 일부 산하조직과 양 노총 일부 부서의 역할로 한정되어 있다. 저소득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자들이 조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자리 문제나 노동시장 양극화와 같은 이슈를 어떻게 정규직 노사관계의 이슈와 결합시킬 것인가?
노동시장 이슈에 집중해야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최악의 상황은 노동시장 이슈들이 역으로 정규직 노사관계의 발목을 잡게 되는 상황이다. 노동계는 노동시장 이슈와 함께 정규직 노사관계 이슈의 해결을 내걸겠지만, 결과적으로 투쟁의 동력을 갖춘 노사관계 이슈만이 부각됨으로써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되고 대내외적인 비판에 무력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이 하반기에 노동시장 이슈의 해결주체로 부각되지 못할 경우, 당분간 노동운동의 사회적 위력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하반기 상급단체의 투쟁목표는 임박한 산하조직의 투쟁 지원과는 분리하여 설정될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 이슈로의 집중이야말로, 하반기 노사관계 이슈를 풀어내는 고리가 될 수 있다.
출처: 노동사회 2004년 9월호, 통권91호
양극화 시대의 노동운동, 갈 길이 멀다 -2004년 민주노총 상반기 투쟁 평가와 전망-
이상학 /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
민주노총은 상반기 투쟁을 마무리하고 하반기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2월 신임 집행부가 출범한 이후 탄핵정국, 총선, 임단협, 파병반대 투쟁을 거쳤으며 8월 통일투쟁을 마무리하고 하반기 투쟁에 착수하고 있다. 상반기 투쟁에서 민주노총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쉬움과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임단협을 중심으로 상반기 투쟁을 되짚어 본다.
산별교섭 제도화의 진전
2004년 상반기 투쟁에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산별교섭이다. 병원, 금속산업에서 사용자 단체 구성과 산별협약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규율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산별교섭 제도화가 진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보건의료노동조합에서 사용자 단체 구성을 둘러싼 진통을 거듭한 끝에 핵심쟁점에 대한 노사합의를 이끌어 내었으며 금속산업에서도 최저임금, 손배가압류 등 중요 쟁점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산별협약을 둘러싼 논란이 남아 있으며 금속의 경우 핵심사업장이 포괄되지 못하는 등 극복하여야 할 과제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산별교섭 확보는 민주노총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40% 정도가 산별노조에 소속되어 있으나 산별교섭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2004년 금속과 보건의 산별교섭 성과는 이런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노동운동 내외에서 산별교섭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을 깨고 주요 산업에서 산별교섭이 확보되었다. 이는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조합의 현장 조직력이 위협받고 있으며 사용자들이 산별교섭을 기피하고 있는 현실의 어려움을 딛고 쟁취한 것이다. 2004년 산별교섭의 성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보완하여야 할 부분을 점검하여, 2005년 산별교섭을 준비하는 것이 민주노총의 과제로 남아 있다.
구체화된 비정규직 요구
다음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꼽을 수 있다. 보건과 금속에서 산업별 최저임금이 타결되었으며 일부 자동차와 병원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을 위한 교섭이 이루어지는 등 2004년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정규직과의 차별철폐, 균등 대우, 비정규직 임금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사용제한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방안이 임단협에서 제시되었다. 2004년 임단협 투쟁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구호수준을 넘어서 임단협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는데 성공한 경우가 나타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요구와 투쟁이 현장에서 조직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앙단위의 제도개선 투쟁과 함께 현장에서 임단협 투쟁에서 비정규직 관련사항을 포함하도록 한 민주노총의 지침이 일정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규직 노동조합의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기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실정이며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현장의 임단협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권리보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산별단위의 교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 투쟁이 전개되어야 하며, 이는 민주노총이 당면하고 있는 최대 과제이다.
하반기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노동권 확보를 위한 제도개선 투쟁에 집중할 계획이다. 아울러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구조를 차단하고 차별을 낳고 있는 경제구조의 양극화와 소득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분배를 강조하는 경제정책과 조세개혁, 사회보장 획기적인 확대 등을 추진할 것이다. 또한 하청 및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서 원·하청간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어야 하며 중소사업장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현실화시키고 정부정책을 대기업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에서 탈피하도록 하는 민주노총의 투쟁과 교섭이 배치되어야 한다. 한편, 올해 최저임금투쟁은 민주노총 조합원이 조직적으로 결합하면서 최저임금 투쟁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된다.
본래 취지 실종된 노동시간 단축
2004년 임단협에서 최대의 쟁점은 노동시간단축이었다. 10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부문, 금융보험업에서 주5일제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주5일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병원과 지하철 등 공공부문에서 노동시간단축을 둘러싼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으나 상당수 사업장에서 주5일제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노사간의 갈등은 예상보다 적었다. 그러나 병원과 지하철 등에서 정부와 사용자들이 노동시간단축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인력충원이 불가피한 사업장에서 인력충원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더욱이 자본은 노동시간단축을 단순히 비용증가로만 접근하고 있어 노동시간단축의 근본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노동시간단축 교섭에서 "주5일제냐 주40시간제이냐"가 쟁점이 되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병원노사교섭에서 병원 사용자들은 평일 하루 7시간을 일하고 토요일에 출근하여 일하는 방식으로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이겠다는 안을 들고 나왔다. 주6일 40시간 노동을 한다면 노동시간단축의 본래적인 취지가 실종된다.
뿐만 아니라 노동시간단축은 실노동시간 단축이 되어야 함에도 실노동시간 단축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노동시간단축에도 불구하고 실노동시간이 크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가 많다. 노동시간단축이 분배교섭으로 전락하면서 실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와 여가의 확대로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취지가 무색해진 측면이 있다.
또한 노동시간단축이 대기업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비정규직과 중소사업장에서는 노동시간단축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자간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투쟁과 교섭이 배치되지 못하였다. 노동시간단축과 관련한 법으로 인하여 한계가 있지만 노동시간단축 투쟁전선을 전국적으로 구축하여 적용시기와 실노동시간 단축, 교대제 변화 등을 크게 쟁점화시키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분배교섭을 넘어서, 사회공헌기금 요구
민주노총이 2004년 임단협에서 제기한 노동연대기금(사회공헌기금)은 노동운동이 분배교섭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 임단협에서 현대자동차의 울산지역발전기금, 완성차의 자동차 발전기금, 병원에서 보건연대기금을 조성하기로 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비정규직의 확산과 노동자 내부의 차별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기 역할을 위한 기금조성이 민주노총에서 임단협 지침으로 결정되었으나 결정시기가 너무 늦게 이루어지는 등의 한계로 2004년은 시범적인 모범을 만들어 내고 2005년 이후에 본격적인 기금 조성을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건의료와 자동차에서 나름대로 산업의 특성에 맞게 기금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사회적 쟁점화에 성공하였다.
차별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연대에 노동이 의미 있는 제안을 하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연대기금에 대한 반대입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차별문제는 정부와 자본이 만들어 낸 결과이기 때문에 제도를 개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경하여야 하는 문제이다. 정권과 자본에 대해 이러한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차별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동연대기금은 의미가 있으며 노동이 조성하는 기금의 규모에 따라서 향후 다양한 사업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명분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
최근 정부는 노사자율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현안 사업장에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노사자율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철 등 몇몇 사업장에 직권중재가 발동되고 LG 칼텍스에 경찰력을 투입하는 등 정부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구시대의 유물인 직권중재를 적용하여 노사자율에 의한 교섭을 봉쇄하고 노사정간의 대화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또한 정부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조합 내부 문제에 개입하려는 듯한 발언으로 노정간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과의 대화를 언급하고 있는 정부의 진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용자 또한 당면한 노사관계를 스스로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직권중재와 정부의 강경한 노동정책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 몇몇 사업장에서 사용자측의 의도가 관철된 것을 빌미로 노동조합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2004년 임단협 투쟁 과정에 일부 노동조합은 탄압에 맞설 충분한 준비 부족과 효과적인 전술구사에 실패하면서 투쟁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경제 양극화와 내수의 심각한 불황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본과 여론의 공세를 헤치며 투쟁하여야 하는 노동조합으로서는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였으며 민주노총과 연맹과의 긴밀한 전술 공유가 요구되었다. 노사자율의 분위기가 확대될수록 노동조합의 투쟁은 사회적인 명분과 철저한 준비, 그리고 효과적인 전술을 갖추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2004년 상반기 임단협 투쟁은 산별교섭, 비정규직, 노동연대기금의 쟁점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우리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에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과거보다는 전향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4년 민주노총의 상반기 임단협에서 성과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우리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해결하여야 하는 과제와는 여전히 먼 거리에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내부 혁신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변화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투쟁과 교섭전술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2004년 하반기와 2005년을 준비하여야 한다.
출처: 노동사회 2004년 9월호, 통권91호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
[쟁점]선배 노동운동가가 본 현 노동운동의 위기, 원인, 해법
프레시안 / 2004-09-02 오전 9:45:06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을 '위기'로 규정하며 '위기의 1차 요인'을 노동운동 내부에서 찾는 담론이 발표돼 파장이 주목된다.
"현 노동운동, 10명의 노동자 가운데 1명의 이익만 대표"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를 지내는 등 오랜 기간 노동운동에 깊게 관여해온 노동운동권 선배인 박승옥 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은 계간지 <당대비평> 최근호(2004년 가을호)에 기고한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현재의 노동운동은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운동으로서의 정당성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오늘날 조직노동자는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 노동운동의 이런 낮은 대표성이 나아질 전망조차 별로 없다. 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만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고 나머지 9명은 대부분 그 1명보다 훨씬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 놓여 있는 셈"이라며, '10명의 노동자 가운데 불과 1명의 노동자의 이익'만 대표하고 있는 민주노총-한국노총을 비판했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는 다수 노동자들의 비판에 겸허하게 귀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 연구원은 현재 노동운동 방식에도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댔다.
그는 "노동조합이 임단협 위주의 ‘전투적 투쟁’을 해마다 되풀이 해오며 그 성과를 누리고 있는 동안 이를 무(無)로 돌려버리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의 역설이 진행되고 있었다"며 "그것은 임단협 이외의 노동자 생활조건,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대안의 정책 부재가 낳은 필연의 결과였다"라고 질타했다.
그는 "취약한 사회복지의 현실에서 노동소득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교육비와 보건의료비, 교통비, 주거비, 불합리한 조세 등은 인상된 임금을 도로 가져가 버리곤 했다"고 지적, 노조가 임금인상이라는 눈앞의 과실에만 집착할 뿐 노동자가 어렵게 몇% 올린 임금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 빈부격차를 한층 심화시킨 작금의 아파트값 폭등 등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무능을 꼬집었다.
그는 또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대해서도 "지금 진행되는 산별 전환은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동일한 범주의 산별 조직으로 조직화해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조직률을 높이는 ‘확산의 산별조직화 운동’이 아니다"라며 "기존의 정규직 노조 테두리 안에서 헤쳐모여 식으로 산별로 전환하는 것은 정규직 노조의 교섭력을 높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전태일 정신으로 돌아가야"
조목조목 현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한 박 연구원은 '전태일 정신으로의 복귀'를 노동운동의 정신적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지난날 전태일은 청계천의 중소영세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며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날 전태일 정신의 계승이란 자식들과 함께 자살이라는 극단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극빈의 노동자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3등 시민으로 전락한 중소영세 하청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는 1970년 전태일이 하고자 했고 실천했던 노동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운동"이라며 "이미 제도화된 노동운동과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조합 기구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다 바치며’,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한국 노동운동은 풀뿌리에서부터 새로운 형태로 다시 시작해야만 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어디로 갔고, 병원노조의 '참의료'는 어디로 갔는가"
박 연구원은 최근 민주노동당의 국회진출, 새로운 이수호 민주노총지도부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면서도, 이것만 갖고서는 '현 노동운동의 위기'가 해결될 수 없다고 단언햇다.
그는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극단적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솔직히 현재의 노동운동은 권력을 가질만한 능력과 정치프로그램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재의 정체성 위기 문제는 단순히 성장과 분배 가운데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노총 산하단체인 전교조와 병원노조를 직접 언급하며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어디로 갔는가. 병원노조의 '참의료'는 어디로 갔는가. 자치와 자율의 민주주의를 이루고 인간관계의 근본을 바꾸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던 노동운동의 수많은 의제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질타하기도 햇다.
'생태'와 '시민'이라는 대안
그는 이같은 노동운동의 위기 돌파를 위해선 우선적으로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능동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되며 그 과실을 향유하는 데서 벗어나 생태적 대안 모색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성장의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 이제 노동운동은 삶의 양을 따지는 욕망의 운동에서 삶의 질을 따지는 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노동하는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며, 한 대안으로 '생태적 대안'을 찾는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제언했다.
그는 "이제 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등 주변부노동자를 조직하는 풀뿌리 노동운동으로의 전환과 함께 생태적 전환의 녹색운동으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며 "생산협동조합, 소비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한 공제조합과 생활공동체운동 등 모든 조직 형태를 창조와 도전정신으로 폭넓게 모색하면서 정책과 일상생활의 실천까지 생태적 전환이라는 시각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연구원은 또 '기존의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하고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해 대중적 영향력을 강화할 것을 제언하기도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계급 개념과 결합되어 있는 과거의 노동자 개념은 상당한 배타성을 갖고 있다"며 "계급의식과 적대감을 지나치게 고취시키는 계급 개념은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이유로 "노동자들이 매우 파편화된 상태로 분절되어 있고, 오늘날은 특히 경제 체질의 변화와 더불어 잡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계급의 분류가 애매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식 또한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따라서 "계급형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운동과 조직화 전략은 어찌 보면 폭이 좁은 일정 한계 내의 낡은 운동만을 상정하는 것이며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능력의 소치일 수 있다"며 "진정한 대안모색 운동이라면 기존의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배타적 계급운동은 설혹 가능하더라도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데 폭넓은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노동운동, 이제 폭력행동 그만둬야"
이처럼 현 노동운동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한 박 연구원은 마지막으로 '폭력투쟁'의 전면중단을 촉구했다.
그는 "노동운동은, 아니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이제 폭력행동도 그만두어야 한다"며 "정말 폭력이 정당하게 필요하다면 원주민들 전부가 마을공동체의 회의를 통해 무장투쟁을 결정한 멕시코 원주민 게릴라들인 사파티스타처럼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해마다 되풀이되는 춘계투쟁, 하계투쟁의 파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파업은 노동조합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투쟁형태이며 이것이 남발된다는 것은 하지하의 전략일 수 있다"며 "더구나 아직도 시위 때 등장하는 쇠파이프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로 인해 다치는 것은 노동자와 그리고 노동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국방의 의무 때문에 거기 서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폭력 평화의 운동방식이 바로 생태적 대안 모색의 운동방식이다. 대화와 설득, 자치와 자결의 민주주의가 생태적 대안모색의 운동방식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전체가 생태적 전환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도록 하는 과감하고도 광범위한 공론화의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진실의 언어와 성찰의 삼보일배보다 더 위력 있는 것은 없다. 이제 우리는 싸움이 아니라 자기반성을 통해, 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와 전환을 모색해야만 한다"고 글을 끝맺었다.
박 연구원의 이같은 글은 최근 '하투 실패' 및 경제상황 악화 등으로 위기감이 고조된 노동운동계에 '일대 논쟁'을 불붙이는 한 계기가 될 전망이다. 그는 1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같은 글을 쓰게 된 이유와 관련, "이 주제가 생산적 논쟁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 연구원의 바람대로 '생산적 논쟁'이 전개되기를 기대하며, 그와 <당대비평>의 양해를 얻어 글 전문을 게재한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 있을 경우 이 또한 전재할 것을 약속한다. 편집자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박승옥 : 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수석연구원.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당대비평]
노동운동은 끝났는가
1950년 3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또한 아예 초토화되어 버렸던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1970년 민주노동운동이 전태일의 분신이라는 참혹한 통과의례를 통해 다시 태어난 지도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1987년 여름의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도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은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 과연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해고되면서 얻고자 했던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연례행사처럼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을 되풀이해 온 한국 노동운동이 과연 민주노총의 선언과 강령이 명시하고 있듯이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있는가. 이 같은 물음에 “예”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은 아직도 멀고 먼 피안일 뿐이다. 노동운동은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운동으로서의 정당성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은 ‘가진 소수의 비도덕성’을 질타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다수의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위기를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어느새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으로 바뀌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총은 오히려 기득권 세력으로 매도되기도 하고 이에 대해 동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더구나 노동운동은 ‘왕자병 환자’로 치부되는 경향 아래 자신을 옹호해주는 어떠한 사회세력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이는 단순히 자본 측과 보수언론의 왜곡된 보도 때문만은 아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의 까닭을 국가와 자본의 탄압 또는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행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수긍할 수 있는 손쉬운 책임회피의 답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외부의 요인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조건일 뿐이다. 변화하는 상황에 탄력 있게 대응하여 살아남아 풍성한 열매를 맺느냐 아니면 도태되어 멸종되느냐 하는 것은 거의 모두 주체의 문제이다. 위기의 1차 원인은 노동운동 자체의 내부 요인에 있다.
조주은 : 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 파업을 하면서도 ‘삐삐아줌마’를 불러서 같이 놀고 (…)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있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서 미끼를 던지면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기도 한다. (…)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
전순옥 :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화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 대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 6천만원을 받는 곳도 있다. 강연을 하러 가면 아예 노조에서 그런다. 강연 듣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 정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그런 노동운동이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 「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 전순옥 vs 조주은」, 《프레시안》, (2004. 5. 16).
20세기 후반 급속한 압축성장과 급격한 사회변화의 실험장이었던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가장 주요한 사회변화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주역이자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1980년대와는 질과 양에서 전혀 다른 사회로 탈바꿈했다. 우리 사회의 과제 또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을 비롯한 한국 사회운동의 의제나 운동방식도 180도 바뀌어야 할 절박한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2004년 민주노총의 집행부가 새로 들어서면서 이전 집행부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긴 하다. 2004년 임금인상 요구에서도 특별요구로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등 취약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임금'을 추진하고 있고 새롭게 정책연구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또 민주노총을 주요 기반으로 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17대 국회에 처음으로 진출하여 이전과는 다른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진보정치’의 실험을 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이런 새로운 정책 추진과 정치 실험에서 한 걸음 더 크게 나아가 근본에서부터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타개가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다. 기존의 운동철학과 방식을 아예 전면 혁신하는 일대 전환을 모색하지 않는 어떤 새로움도 결국은 인물의 새로움으로 끝나고 말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운동이 목말라 하는 생명의 푸르른 수액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 성찰의 숲 속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투쟁의 과실을 누리고 있다
1987년 이전까지 한국의 노동자들은 군사독재의 무단 통치 아래 노조 결성조차 불가능한 사업장 독재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노예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하루 일당이 커피 한 잔 값도되지 않았고, ‘타이밍’을 먹으며 이틀 사흘 연속 철야를 밥 먹듯이 해야 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1989년까지 2년 반 동안 노동자들은 ‘대폭발’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5천 개 이상의 노동조합을 신규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2003년 현재 명목상으로는 1986년에 비해 거의6배나 올랐고 월노동시간은 227.8시간에서 200.8시간으로 줄었다. 법정 주당 노동시간도 이제 주 40시간으로의 전환이 눈앞에 가까이 와있다. 한마디로 이제 노동자들의 요구는 어느 정도 관철되었고 최소한 조직노동자들은 그 투쟁의 과실을 누리고 있는 상태이다.
1987년 이후 (…) ‘노동’은 망할 우려가 없는 공기업, 은행, 재벌대기업의 경영자들과 담합하여 고용안정과 높은 수준의 보상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 한국의 노동운동도 의도하지 않게 이러한 지배연합의 동조자 역할을 해왔다.
- 최영기, 「87년 이후 노동정치의 전개와 전망」,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한국노동연구원, 2001).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일어난다. 오늘날 조직노동자는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안 된다. 노동운동의 이런 낮은 대표성이 나아질 전망조차 별로 없다. 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만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고 나머지 9명은 대부분 그 1명보다 훨씬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 놓여 있는 셈이다. 숫자상으로만 보면 민주노총의 조합원수는 1995년 406,748명에서 2002년 685,147명으로 무려 28만 명 정도 늘어났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한국노총의 조합원수가 1,208,052명에서 876,889명으로 줄은 데서 확연히 알 수 있듯 이 같은 증가는 대부분 한국노총 소속 노조의 민주노총으로의 상급단체 변경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또한 IMF 경제위기 이후 뚜렷해지기 시작한 노동시장의 비정규직화 경향은 1999년을 기점으로 비정규직이 50%를 넘어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하고 이들의 대다수는 조직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어떠한 결실이나 혜택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2004년 2월 1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박일수 씨의 분신을 계기로 1만 4천 명에 이르는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노동자들 및 금속산업의 비정규직 실태가 부각된 바 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오히려 회사 측 입장에 서서 하청노동자들 및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대책위원회와 갈등을 빚었다. 2003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임금단체협상을 타결하면서 조합원 9만 8천 원, 사내하청은 7만 8천원의 기본급을 인상했다. 이는 대기업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킨 의미 있는 성과였음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오히려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4년에도 역시 정규직 9만 5천원, 비정규직은 그 80%인 7만 6천원 인상으로 귀결됨으로써 오히려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현재 대기업노조의 주요 투쟁들은 본질적으로 이들을 중심의 위치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자본의 공격에 대한 방어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 비정규직과 영세기업의 노동자들에 대해 ‘전술적인 원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주변부 노동자들의 투쟁과 요구는 사실상 정규직과 대기업 노동자들의 현재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인정된다. 만일 그 수위를 넘어선다면 “노동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오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받기 십상이다.
-박영삼, 「비정규노동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소고」,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
노동운동은 철저히 약자 중심의 운동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지금의 노동운동에선 ‘사람’ 냄새가 부족하다고 이들은 충고한다. (…) “지금 대공장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 차별 문제가 심각하잖아. 노동자들 스스로 짓밟잖아. 그건 운동할 자격도 없는 거지. 자기 사업장에서 같이 일하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운동을 하면서 자기 걸 개선해야지 자기 것만 끌어올리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끌어올리지 않으면 서로 망해.”(박순희)
- 「비정규직 외면하는 노조, 운동할 자격 없다」, 《프레시안》, (2004. 3. 9).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은 기업과 정부의 입장만 강화시켜 줄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사실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구분조차 한국에만 있는 지극히 모호한 개념의 용어일 뿐이다. 노동운동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정규직 과보호가 비정규직 문제를 낳는다는 자본가들의 어이없는 주장이 나올 수조차 없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노동자의 고임금이 비판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과실을 함께 나누지 않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중소영세기업 비정규, 여성,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현재의 노동운동 관행이 비판 대상인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 말 폴 바란과 폴 스위지는 선진국 노동자들은 제 3세계를 착취한 잉여의 떡고물로 사육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제 3세계의 굶주림과 불평등, 착취의 참상은 늘어가는 반면 선진국 노동자들은 혁명성을 상실한 대중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동남아시아 노동자들과 견주어 볼 때 한국 정규직 노동자들 소비수준은 이미 선진국 노동자들과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아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로서 물신주의와 소비중독의 그늘 아래 사육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폴 바란(Paul Baran: 1910~1964)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스탠포드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진보적 매체인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를 창간한 폴 스위지(Paul Marlor Sweezy: 1910~2004)와 함께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네오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다. 폴 바란의 대표적 저서로는 『성장의 정치경제학』이 있으며, 폴 스위지와의 공저인 『독점자본』이 있다.-편집자)
해외 관광의 엄청난 증가와 함께 1990년 이후에만 500억 원이 넘는 해외투자를 하면서 한국은 이미 악명 높은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확산되어 있다. 더구나 국내에는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하면서 초저임금과 초장시간 지대의 늪에 빠져 있는 4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 인권침해의 참상은 한국 노동운동의 정체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해외로 진출한 한국 기업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폭력, 인격모독 등 각종의 노동탄압 사례는 다름 아닌 우리의 부끄러운 1970년대이다. 노동운동이 이에 대한 어떠한 대책이나 연대활동도 마련하지 못한 채 제조업의 공동화와 일자리 유출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면, 해외 및 이주노동자의 1970년대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주변부 노동자의 참상과 함께 부메랑이 되어 21세기 한국 노동운동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근거지에서부터 허물어뜨릴 것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임단협 위주의 ‘전투적 투쟁’을 해마다 되풀이 해오며 그 성과를 누리고 있는 동안 이를 무로 돌려버리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의 역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임단협 이외의 노동자 생활조건,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대안의 정책 부재가 낳은 필연의 결과였다. 취약한 사회복지의 현실에서 노동소득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교육비와 보건의료비, 교통비, 주거비, 불합리한 조세 등은 인상된 임금을 도로 가져가 버리곤 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에는 시장이라는 유령의 손에 의해 일자리마저 박탈당하는 구조조정을 일상으로 강요당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변화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은 더욱 가열찬 총파업 투쟁과 ‘총력집중투쟁’, 심지어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와도 같은 총파업선언의 빈번한 반복이었다.
1998년 이후의 노동운동은 (…) 매우 비효율적인 투쟁이었다고 평가된다. 1998년 이후 3년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기업 차원에서나 전국 차원에서 큰 성과를 내기 어려운 성격의 투쟁이었다. 왜냐하면 1998년 이후의 투쟁은 시장의 규율(market discipline)을 상대로 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노동운동은 1987~1997년간 국가의 규율을 상대로 했던것과 같은 패턴으로 대중투쟁 일변도의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 최영기, 위의 논문.
더욱이 노동운동은 갈수록 떨어져 가는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유력한 탈출구를 산별로의 전환에서 찾고 있었다. 물론 한국 노동운동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기업별 노조 체제의 감옥에 갇혀 발전을 방해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1997년 노동법의 개정과 함께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이 가시화되었고, 2003년 현재 민주노총의 경우 금속(2001), 보건의료(1998) 등 산별노조로 소속이 변경된 조합원은 40%(25만 명)를 넘고 있다.
문제는 산별 조직으로의 전환에 대해 아무도 그 당위성을 부정하지 않고 있고 또 산별 전환의 초기임에도 산별 전환이 만능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진행되는 산별 전환은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동일한 범주의 산별 조직으로 조직화해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조직률을 높이는 ‘확산의 산별조직화 운동’이 아니다. 기존의 정규직 노조 테두리 안에서 헤쳐모여 식으로 산별로 전환하는 것은 정규직 노조의 교섭력을 높이는 데는 의미가 있을지언정 현재의 노동운동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별 기여를 못하리라는 게 솔직한 전망이다. 기업별 노조 체계를 깨뜨리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 중심으로 갈수록 기득권화하는 현재의 노동조합 구조와 의식을 과감히 깨지 않는 산별 전환은 결국 기업별 노조의 변형에 지나지 않게 될 위험성이 크다.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기조, 즉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이제 한국판 생디칼리즘에 다름 아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생디칼리즘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의 가혹한 탄압과 자본가들의 비타협 억압 정책을 자양분으로 급속히 성장했다가 급속히 소멸되어버린 노선이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노동계급 이외의 어떠한 사회세력과도 협력하지 않고 오로지 노동계급 독자주의의 폭력 총파업과 직접 전투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 공격과 해체를 꿈꾸었다. 한국에서 1987년 이후 한꺼번에 분출된 노동조합의결성이나 노동쟁의는 단순히 임금인상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개별기업별로 10~30가지의 요구사항은 결국 작업장에서의 권위주의 질서를 개혁하자는 생산 현장의 민주화투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운동을 거꾸로 군사화시켜 노동조합을 전투부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보루 역할에서도 빠르게 밀려나 버리게 만들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전투’는 노동운동을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정당성의 혼란에 지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민주주의와 평화 세력이 아닌 무책임한 싸움꾼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습의 저항집단으로 인식되게끔 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의 허다한 문제점을 극복해나갈 능력과 철학이 있는 대안세력의 행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같은 노동운동에 대해서 그동안 진지하고도 다양한 진단과 전망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1998년 이후 개발독재 모델에서 시장독재 모델로 전환된 상황에 대응하여 노동운동은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해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에 나서는 동시에 보다 유연한 조직화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중소영세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최영기: 2001)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벗어나 정치참여를 통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박태주: 2002) 또 기존의 조직화-연대투쟁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음으로 이제 영향력-정치화 모델의 새로운 전략노선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임영일: 2003) 그러나 이 모든 지적과 우려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서는 “우리 노동운동이 더 열심히 시간을 두고 노력해 나가면 이 문제들은 조만간 극복되거나 적어도 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임영일: 2003) 새로운 변신을 꾀하지 못하고 저항의 노동운동 관행을 답습하고 있는 노동운동의 무능에 대한 아쉬움이다.
지난날 전태일은 청계천의 중소영세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30년이지난 오늘날 전태일 정신의 계승이란 자식들과 함께 자살이라는 극단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극빈의 노동자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3등 시민으로 전락한 중소영세 하청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길이다. 이는 1970년 전태일이 하고자 했고 실천했던 노동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운동이다. 이미 제도화된 노동운동과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조합 기구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다 바치며’,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한국 노동운동은 풀뿌리에서부터 새로운 형태로 다시 시작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생태적 대안 마련 없이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다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 이후의 노동운동 과정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막연하지만 정의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의 대안공동체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업공동체의 해체로부터 도시로 방출된 노동자들이 ‘산업공동체’란 말이 아예 성립되지 않는 가혹한 자본-임노동 관계의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사람 냄새가 나는 인간관계의 공동체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의 도구,이른바 ‘자판기 노조’로 변질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단위노조의 경제투쟁 성과조차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불가항력으로 구조조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IMF 경제위기 당시 체험할 수밖에없었다. 이에 따라 공동체는 살벌하게 분열되었고 공동체의식은 실종되어 버렸다.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극단적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솔직히 현재의 노동운동은 권력을 가질만한 능력과 정치프로그램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재의 정체성 위기 문제는 단순히 성장과 분배 가운데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능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되며 그 과실을 향유하는 데서 벗어나 생태적 대안 모색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성장의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 이제 노동운동은 삶의 양을 따지는 욕망의 운동에서 삶의 질을 따지는 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노동하는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
우선 우리는 노동의 개념을 자본주의의 임노동으로 한정하는 경직된 인식을 이제는 버려야만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은 분명히 상품이며 이윤의 원천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동안에는 인간임을 느끼지 못하고 노동이 끝나고 임금을 소비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치를 못 느끼는 노동을 단지 생존의 필요 때문에 계속할 것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가치를 느끼며 사는 삶은 불가능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응고된 노동, 응고된 일은 상품이자 동시에 자아의 연장이다. 노동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실현이며 자연과의 조화이다. 인간의 삶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노동을 통해 공동체와 소통하고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과 소통한다. 우리는 이 같은 노동의 건강한 능동성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의 노동을 비하하면서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야만 대안은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다.
산업화가 전지구로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생태계 자원을 아무런 대안 없이 무제한으로 마구 퍼다 쓰는 인류의 문명생활은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들고 있으며 발전과 성장을 거듭해 온 산업사회는 명백히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감히 성장중독증, 발전중독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이 체제를 시급히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다소의 금단증세는 자원약탈이란 예금횡령죄의 대가로 우리가 미래세대에 마땅히 치러야 할 값싼 보석금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소비되어 없어지는 것을 ‘생산’이라고 규정하고 소비와 낭비를 ‘성장’이라고 부추기는 눈먼 쓰레기 같은 경제학의 신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연을 고려하지 않기는 근대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아니면 다른 어떤 사회체제건 지구자원의 도둑질을 통한 말 그대로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성장이란 이제 불가능하다.
성장 모델의 폐기와 생태적 대안 모색은 당장에는 현실의 노동자들 요구와 배치되는 측면이 많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 걱정부터 할 것이다. 그러나 생태적 전환은 사회 전체의 변화이며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롭고 건강한, 그리고 수많은 일자리의 창출 과정이기도 하다. 태양력, 풍력, 수력, 조력, 바이오매스 등 지속가능한 에너지 생산시스템과 생태건축, 자연 유기농업부터가 그렇다. 월드워치연구소는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은 화석연료보다 5배의 일자리를 만들어낸다고 계산했다. 실제 독일의 경우 태양에너지로의 전환으로만 110만 개, 생태적 교통정책으로 100만 개, 물보호 기술과 물절약 기술의 발달로 25만 개, 생태적 세제 개혁으로100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프란츠 알트, 『생태적 경제기적』, 2004) 이미 유럽의 노동조합은 제한적이지만 환경보호조치가 일자리 파괴(jobkiller)의 측면보다 새로운 고용창출의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노동조합의 즉자적 대응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지도력과 철학, 그리고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의 정책대안 제시 능력과 실천능력이다.
1970년대 후반 공해추방운동이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에서 노동조합이 생태적 대안을 자신의 의제로 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02년 전력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파업의 실패 이후 발전노조가 시민사회단체와 더불어 전력산업의 대안적 발전방향을 ‘공공화, 민주화, 녹색화’로 정하고 에너지 절약과 환경친화의 지속가능한 에너지시스템을 의제로 삼고자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이례적인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민주노총의 선언과 강령 그 어디에도 생태문제에 대한 인식은 배어 있지 않다. 다만 민주노동당이 그 강령에서 “인간의 물질적 부를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인간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유지하면서 생태계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추구한다”고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라며 자본주의 극복의 사회주의 대안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노동운동의 대안 이념이 될 수 없음이 이미 현실에서 입증되었다.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개인소유를 제한한다고 해서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이 저항의 민주화운동에서 1990년대 시민단체의 등장과 더불어 참여의 민주화운동으로 전환했다면 이제 민주화운동은 성찰의 민주화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이제야 뒤늦게 민주노동당을 통한 참여의 운동으로 진입하고 있지만 참여와 함께 성찰의 운동으로 곧바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어디로 갔는가. 병원노조의 '참의료'는 어디로 갔는가. 자치와 자율의 민주주의를 이루고 인간관계의 근본을 바꾸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던 노동운동의 수많은 의제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제 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등 주변부노동자를 조직하는 풀뿌리 노동운동으로의 전환과 함께 생태적 전환의 녹색운동으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생산협동조합, 소비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한 공제조합과 생활공동체운동 등 모든 조직 형태를 창조와 도전정신으로 폭넓게 모색하면서 정책과 일상생활의 실천까지 생태적 전환이라는 시각으로 재편해야 한다. 이제 참다운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은 단순히 자본의 억압 착취를 제거한다고 얻어질 수 없으며, 양극화와 차별을 철폐하는 노동운동의 건강성은 사람과 사회가 자연의 일부임을 겸허히 인식하는 생태공동체의 전망 속에서 비로소 뜻있는 출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생태주의로의 인식 전환이고, 그 인식 전환을 위한 민주주의의 대화와 설득력과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다. 극도의 배금주의, 극도로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벗어나 자율 자치의 교육과 학습 공동체, ‘보다 더 많이’가 아니라 ‘보다 더 적게’ 소비하고, ‘보다 더 가까운’ 대안 사회의 전망은 이 같은 노력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위기와 파탄의 징후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기는 하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그 산물인 대량폐기물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기는 하다. 허지만 문명의 발생과 함께 탄생한 종교의 가르침과 금욕주의가 문명 발전을 중단시킨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현대 자본주의의 욕망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중독이 된 말기 증상의 암이며 지금은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고 미래 세대에게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이 병을 치료할 수밖에 없는 절박성이 있다.
노동운동은 시민권을 회복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이제 시민권을 회복해야 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에는 이윤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자본의 배타성과 마찬가지로 부정의 배타성이 곳곳에 기저로 깔려 있다. 긍정의 능동성으로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생태적 대안 모색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일정 정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노동운동은 시민이란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민은 ‘서울 시민’이라는 말처럼 일반 국민을 지칭하는 용어이지 결코 부르조아지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0년대 말부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및 종교계와 문화예술 지식인 중심의 재야민주화운동을 제외하고 그때까지 사회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일반 시민들을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환경문제, 여성문제, 보건의료문제, 부패문제, 법률문제, 조세문제, 소수자문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낡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일상생활 속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노동운동은 은연중 이런 시민운동을 부르조아지의 배부른 운동으로 폄하하고 적대시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운동에게 한계와 고립만자초할 뿐이었다. 낡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자기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듯 노동운동은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낡은 노동자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개념과 결합되어 있는 과거의 노동자 개념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배타성을 갖고 있다. 계급의식과 적대감을 지나치게 고취시키는 계급 개념은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계급과 계급의식, 그리고 계급형성은 일정한 괴리가 있다. 노동시장의 단절과 대응하여 노동자들 또한 매우 파편화된 상태로 분절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오늘날은 특히 경제 체질의 변화와 더불어 잡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계급의 분류가 애매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식 또한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계급의식으로 나아가면 더욱 그렇다. 계급형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운동과 조직화 전략은 어찌 보면 폭이 좁은 일정 한계 내의 낡은 운동만을 상정하는 것이며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능력의 소치일 수 있다. 진정한 대안모색 운동이라면 기존의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배타적 계급운동은 설혹 가능하더라도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데 폭넓은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많다. 노동자들은 더 많이 이런 시민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아니 노동운동은 시민운동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시민사회를 근본의 대안 모색으로 끊임없이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 시민운동이 그동안 준정당의 여론형성형, 대변형 전시운동이라는 전략 선택으로 인해 밑으로부터의 조직화가 미흡했다는 면에서 노동운동의 시민운동과의 결합은 시민운동의 새로운 활로일 수 있으며, 그리고 이는 또한 노동운동의 공동체성 회복이자 생태적 대안을 구체화시키는 한 과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 방식은 전환되어야 한다
2003년 3월 28일부터 5월 31일까지 65일 동안 계속된 새만금살리기 삼보일배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파문과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삼보일배는 한국의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방식에 대해 전환을 촉구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운동이 흔히 취하는 다양한 투쟁, 집회와 시위, 여론 호소 작업 등과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생태주의 대안을 모색하는 사회운동은 당연히 운동방식도 생태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노동운동은 당연히 단체행동의 방식부터 기존의 부정과 투쟁의 관행을 넘어서서 이를 포섭하는 긍정과 설득, 성찰과 포용과 절약의 새로운 방식을 실천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아니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이제 폭력행동도 그만두어야 한다. 정말 폭력이 정당하게 필요하다면 원주민들 전부가 마을공동체의 회의를 통해 무장투쟁을 결정한 멕시코 원주민 게릴라들인 사파티스타처럼 나서야 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춘계투쟁, 하계투쟁의 파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파업은 노동조합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투쟁형태이며 이것이 남발된다는 것은 하지하의 전략일 수 있다. 더구나 아직도 시위 때 등장하는 쇠파이프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로 인해 다치는 것은 노동자와 그리고 노동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국방의 의무 때문에 거기 서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뿐이다.
비폭력 평화의 운동방식이 바로 생태적 대안 모색의 운동방식이다. 대화와 설득, 자치와 자결의 민주주의가 생태적 대안모색의 운동방식이다.노동운동은 노동자 전체가 생태적 전환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도록 하는 과감하고도 광범위한 공론화의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진실의 언어와 성찰의 삼보일배보다 더 위력 있는 것은 없다. 이제 우리는 싸움이 아니라 자기반성을 통해, 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와 전환을 모색해야만 한다.
"지금은 '70만 힘'을 이끌지 못하는 무능력을 고민할 때"
[박승옥씨 주장에 대한 현 노동운동가의 반론]
프레시안 / 2004-09-06 오전 10:19:02
황광우/ 민주노동당 전 중앙연수원장
박승옥씨의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에 대한 반론
진짜 노동운동이 왕자병에 걸린 것인가? 설령 노동운동이 왕자병이 아닌 황제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우리는 그 비판에 귀 기울여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은 엄혹할수록 좋은 것. 우리 사회에서 가장 왼편에 서 있는 노동운동이 스스로조차 비판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오류를 정정하지 못한다면, 그 노동운동으로 사회의 무엇을 바꾸겠는가? 지난 10여년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실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정부와 자본의 폭압에 맞서 여기까지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여러 노동조합 간부들께 적어도 우리가 양심적 지식인이라면 먼저 인간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 길을 따라 성장해온 지금의 노동조합운동은 그 시야의 협애함과 계획의 근시안, 오만과 자폐 등 여러 측면에서 부정적 양상을 노정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박승옥씨의 비판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지적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폭력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촉구한 점이다. 폭력 집단과 싸우다 보니 폭력 집단을 닮아갔다는 지적에 대해 그것이 아무리 사태를 과장 왜곡한 비판일지라도 우리는 자성할 필요가 있다. 과연 전투경찰과 대치하면서 휘두르는 몽둥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폭력은 필요악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거부해야할 지배자들의 악행인지, 도덕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 등 여러 면에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무지하고 거친 폭력 집단과 상대하려면 필사즉생의 투지가 필수적이었다. 어찌 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적 노사관계의 반영일 수 있다. 하지만 총파업을 투쟁의 목표로 생각하는 무지한 상디칼리즘이 민주노총 간부들의 무의식 깊이 내장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투쟁의 수단을 투쟁의 목표로 전도시킨 상디칼리즘의 단순, 무식은 노동운동의 미래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할 것인지, 미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촉구한 점이다. 자본의 성장주의를 따라 노동운동도 성장주의의 공범자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다 볼 것을 지적한 것은 모든 노동조합 간부들이 고민해 보아야 할 의미있는 지적이다.
만일 박승옥씨의 글이 오늘날 노동조합 간부들이 보이고 있는 부정적 양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報告)하면서 노동조합 운동에 경종을 울렸다면, 노동운동에 애정을 갖는 이들의 존경을 받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이라. 이게 뭔가? 나는 한참 동안 당혹하였다. 박승옥씨가, 노동운동을 고립시키지 못하여 안달하는 노무현 정권의 나팔수라도 된 것인가? 지난 13년 전 <죽음의 굿판을 집어 치워라>며 후배들의 분신 항거를 <또 다른 파쇼>로 비난하였던 김지하 선배가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글이, 그 진정성을 떠나, 누구의 노리개감이 되는지 글 쓰는 이들은 조심하여야 한다. 나는 위 타이틀이 박승옥씨의 진심이 아니라 믿고 싶다. 그런 류의 타이틀은 평소 진보진영에 냉소적이고, 특히나 노동운동을 씹어 먹지 못하여 분해하는 조중동의 언어이다. 황제병이나 왕자병은 노무현이나 유시민의 행태 분석에 적합한 언어가 아닌가?
민주노총에 대해 뭐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이 걸핏하면 내뱉는 소리가 조직률이다. 박승옥씨 역시 “오늘날 조직노동자는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며 또 조직률 타령으로 비판의 포문을 연다. “노동운동의 이런 낮은 대표성이 나아질 전망조차 별로 없다”며 노동조합 운동의 음울한 미래를 걱정한다. 한심한 일이다. 그러면 전경련은 국민의 몇 %를 조직하고 있는 단체인가 물어 보라. 국민의 0.1%도 조직하지 못하는 전경련더러 그런 낮은 대표성으로 뭣 하려 하는가, 왜 저들에겐 따끔한 충고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민주노총의 너무 적은 조직률을 보고 우울해 할 때가 아니다. 70만명이나(!) 되는 이 거대한 힘을 정당하게 이끌어가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민주노조운동이 봄 날 흐드러지게 피었다 허무하게 지는 목련꽃이란 말인가. 민주노조운동의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을 예고하는 박승옥의 진단은 자신의 관념으로 세계를 대체하다가, 세계가 자신의 관념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곧바로 우울증에 빠져드는 낭만적 지식인의 병적 심리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1987년 민주 대항쟁으로 한국은 마침내 민주주의의 본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지는 87, 88년 대파업 속에서 향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노동자부대가 탄생하였다. 민주노동조합운동은 이제 17살 먹은 사춘의 소년이다. 향후 20년 한국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어 나갈 운동으로 노동운동말고 무엇이 있는가?
시계가 2000년을 가리키면서 한국 사회에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정부 재정의 공룡화>이다. 2000년을 넘어가면서 한국 정부는 100여조원의 예산을 집행하였다. 나는 100조원이 넘는 거대한 부를 가져간 정부가 서민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왜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정말 답답하다. 2004년 이제 정부 예산은 200조원을 넘어섰다. 노동운동은 정부로 하여금 서민들의 생활비를 책임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생활비 인하 투쟁에 앞장 서는 노동운동에 전 국민은 환영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40대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 3-4000천만원이 많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 보면 4인 가구가 한 달 살기 팍팍한 돈이다. 왜냐? 너무 많은 돈을 뜯기기 때문이다. 자동차 기름값 이거 너무 과도하다. 6만원어치 기름에 세금이 4만원. 정부가 그렇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가면서 서민들의 지하철 요금, 버스비 하나 책임지지 않는 것은 그 정부가 불량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요금, 버스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모두들 핸드폰을 소지한다. 한 가족의 통신비, 20만원이 훌쩍 넘는다. 에스케이와 한국통신은 지금 과도한 독점 이윤을 빨아 먹고 있다. 통신비, 내려야 한다. 연 700만원이 넘는 사립대의 학비, 서민들의 등이 휘고 있다.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의 경우 아이들의 학비를 지원받는다. 일반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정부는 대학생 학비의 50%라도 책임져야 한다.
박승옥씨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 하였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은, 해 보았자, 다시 생활비 상승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밑 빠진 독>을 <밑 안 새는 독>으로 교체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밑 안 새는 독>을 만들어 나가야 할 판에 박승옥씨가 내놓는 독은 <밑 없는 독>이다. 생태적 대안의 독은, 안 먹고 안 쓰는 <밑 없는 독> 아닌가? 그것은 무소유로 살아가는 법정 스님에게나 어울리는, 아직은 우리 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속의 독>일 따름이다.
박승옥씨의 글을 보면서 우리는 당혹한다.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분이 이렇게 사고가 단순할 수 있을까?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 한심한 일이다. 도대체 오늘의 노동운동이 얼마나 많은 임금, 얼마나 많은 여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말인가? 생태주의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은 좋으나, 생태주의를 위하여 노동 운동을 성장주의 운동이라 낙인찍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흑백논리이다.
박승옥씨는 생태주의적 대안 모델을 찾길 호소하였다. 나는 생태주의자가 아니기에 생태적 담론을 목청껏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핸드폰을 피하는 것으로 소박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가끔씩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을 외운다. “만일 사람들이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1세기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자가 어떤 사상을 갖고 어떤 실천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한 탐색이 필요한 때이다. 21세기의 사회주의자가 놓쳐서는 안 될 원리는 <다양성의 원리>이다. 생명은 다양하다. 유일한 진리는 없다. 사회주의자는 다른 여러 사상, 여러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견해를 갖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실천해야 한다. 박승옥씨도 열린 마음으로 사회주의자의 고뇌를 공유해주길 바란다.
‘왕자병론’의 외피를 쓰고 재생된 ‘종양론’이라는 유령
-박승옥씨 글에 대한 짧은 소회
이광일: <정치비평> 편집위원, 정치학 박사
프레시안 / 2004-09-08 오후 5:11:19
1.
1989-90년 초 공안정국과 전노협 건설의 와중에 ‘노동운동위기 논쟁’이 있었다. 학계에서는 고려대 최장집교수가 ‘한국노동운동은 왜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는가’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그리고 그 외부에서는 지금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를 쓴 박승옥씨가 <창작과 비평> 지면을 통해 ‘종양론’으로 상징되는 위기론으로 그 중심에서 전도사로 활약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박승옥씨가 또 그 전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역시 상황은 다소 상이하지만, 동아일보 등이 박스기사로 그것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지니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90년 초 위기논쟁이 그랬듯이 그것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박승옥씨가 즐겨쓰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지금도 위기라면 위기이다. 그런데 박승옥씨가 말하는 위기의 근거를 보니, 10여년 전 그가 주장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낮은 노조 조직율, 전투적 조합주의, ‘계급주의’, 성장주의로 요약되는 생산력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이 발견되는데, 박승옥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노동운동을 비판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위상과 영향력을 사실보다 업그레이드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장집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예로 90년대 초 위기논쟁에서 노동운동이 급진적 정치세력의 헤게모니 아래 있는 것처럼 해 놓고 그들 때문에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했다고 비판하는 방식이 그것인데, 이러한 비판은 그 전제가 옳지 않음이 입증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지배담론에 불과한 것임은 물론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서로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급진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운동, 특히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만일 사실이 그랬다면 지금 노동운동이 이처럼 힘겨워하고 있을까.
90년대 초 ‘위기론 논쟁’ 당시 위기론자들이 주장하고픈 것을 굳이 유추해 보면, 그 위기는 ‘급진노동운동의 위기’였을 텐데, 이들은 그것을 확장시켜 전체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식으로 담론을 펼쳐갔던 것이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항상 즐겨 사용하는 수법인데, 그들은 객관적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정상황에서 사회정치적 국면전환용으로 이러한 논쟁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90년 초 박승옥씨가 위기에 처했다고 했던 그 노동운동은 혈혈단신 공안정국과 싸우면서 전노협을 건설하고 그리고 지금 민주노총에 이르렀는데, 애석하게도 10 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박승옥씨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이 지점에서 90년 초 제기된 박승옥씨의 주장이 그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 그가 다시 노동운동에 대해 가하는 이런저런 ‘비판’에 대해 일일이 대꾸할 필요성 또한 느끼지 않는다. 박승옥씨가 말하는 민주노총 등의 미비한 조직율, 성장주의에 근거한 운동패러다임, ‘전투적 조합주의’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 활동가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비판과 그것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발상 사이에는 많은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개괄적으로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박승옥씨가 위기의 근거로 지적하는 양상들이 진정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인가. 우선 모두에서 언급해두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한다면, 그 가장 큰 원인은 여전히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강력한 정치적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는 기존 노동조합의 조합주의,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 그리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비판들은 상이한 양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문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박승옥씨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 핵심원인인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의 글 어디에서도 날카로운 비판과 그것의 극복방안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 항상 외곽을 때리는 그의 글쓰기는 과거 90년대 초 위기론을 이야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험에 근거한 현상을 나열하고 설명할 뿐, 그 현상의 뿌리에 자리잡은, 원인을 밝혀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의 감각에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그의 조합주의 비판은 대기업 남성, 조직노동자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에 집중된다. 여기에서 조합주의는 그람시적 의미로 ‘계급이기주의’를 의미한다. 분명 이 지적은 제도화되어 가는 노동운동을 볼 때, 음미할 필요가 있다. 특히 50%를 넘어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지금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언술이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반성을 통한 주의설적 다짐과 결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주체적 수준에서의 반성, 결의는 운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나아가 ‘신빈곤층’이 양산되는 구조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자본주의가 존재한 이래 실업자,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은 계속 존재해 왔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지금 이 문제들이 핵심사안으로 대두되었는가? 거기에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버티고 있는 현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지적에 대해 ‘또 자기변명적인 구조적 요인을 들먹이고 있네’라며 비판할 것인가. 지식인이라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거나,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박승옥씨가 역설하고 있듯이 그의 눈에는 이미 노자간의 모순은 보이지 않으며, ‘계급주의적 운동’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박승옥씨는 기존 노동운동의 조합주의를 생디칼리즘을 매개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라틴계 노동운동의 역사와 쇄락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라틴계의 나라에서 왜 생디칼리즘이 번성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국가와 자본의 엄청난 탄압이 중요 원인이었지만, 더욱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기에 혁명적 지식인들이 그 ‘무식한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배신했던 역사가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빠리꼬뮨이후 프랑스 노동운동의 상황을 박승옥씨는 알고 있는가. 노동자대중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했던 혁명적 지식인 노동운동가들이, 활동가들이 보였던 그 변신과 훼절을 박승옥씨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지금 박승옥씨를 포함하여 과거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 중 노동자들을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가. 그들은 노동운동의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정치세력들, 사회세력들과 혹 ‘정치적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존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벌이는 그 메스꺼운 싸구려 술판을 비판하기 이전에, 그 장면을 가지고 노동운동 전체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성찰적으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오히려 박승옥씨의 논지 자체가 생디칼리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정치운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이제 첫걸음을 띤 민주노동당을 격려하기보다 ‘정확하지 않은 선험적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새로운 노동자정치운동을 그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승옥씨 스스로 부지불식 중에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바라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인정하든 안하든 박승옥씨가 비판한 생디칼리즘의 덫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결과를 의미한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 그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정도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노조는 만능열쇠처럼 보인다. 노조가 비정규직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고통,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고 발상의 대전환을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의 비판은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로 이어진다. 그는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이 생산력주의에 빠져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논리와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생태주의를 제시한다. 이른바 성장제일주의로 표현되는 생산력주의는 분명 운동을, 나아가 인간의 삶과 사회관계를 질곡에 빠뜨리는 주원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노동운동, 아니 사회운동의 향방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이라면, 활동가라면 누구나 지적하고 있다. 박승옥씨가 꿈꾸는 생태세상은 그 어느 누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박승옥씨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꼬뮨에 대한 희망 또한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희망하는 그러한 사회관계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장애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탐욕의 물질주의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자기성찰을 통한 수도에 정진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핵심적인 원인이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대중의 투쟁과 고통으로 얻어진 모든 성과와 ‘발전된 사회관계’를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분절, 변형시키고자 하는, 따라서 가장 극단적 수탈구조로서의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의 극복을 위한 구체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박승옥씨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수도승처럼, 그는 단지 당위론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박승옥씨는 90년대 초 있었던 위기논쟁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한 바 있다. 이른바 87년 이후 형성된 ‘자유주의적 정치협약’에서 제도적으로 배제된 노동운동이 유일하게 쓸 수 있었던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박승옥씨가 그렇게 비판하였던 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의 시민권이 부정된 공안정국 시기에 노동운동의 유일한 투쟁의 무기였다는 사실을 박승옥씨는 그 당시 정말 몰랐는가. 몰랐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려줌으로써 문제는 해소되겠지만, 그가 알면서도 애써 이 사실에 눈감아 버렸다면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주장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노동운동은 어떠한가. 물론 생산적 비판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 때에 비해 오히려 상황은 호전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신자유주의시대 ‘두 개의 국민프로젝트’가 의미하는 것, 즉 한 국가 내에 부자와 가난한 자, 그 속에서 온갖 권리를 누리는 자와 그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기름과 물처럼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진정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노정하는 한계가 무엇인지 그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너무 전투적이어서 문제인가. 아니다. 그것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과거 전노협 건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활동가들이 수많은 논쟁을 통해 확인해주었듯이,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고백하였듯이, 치열한 투쟁은 하였으되 자기운동의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그런데 박승옥씨는 이러한 운동의 역사와 논의의 성과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장, 즉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을 매개로 기존의 노동운동세력을 민주주의와 평화세력이 아닌 무책임한 ‘싸움꾼’으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습의 저항집단으로 내몰고 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박승옥씨의 판단과는 달리, 지금 노동운동은 시위장소에서 치고받는 노동자와 전경의 문제를 화두로 잡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반성해야 할 만큼 저열한 수준에 있지 않다.
3.
지금 왜 박승옥씨는 다시 노동운동을 꾸짖고 있는가. 왜 과거의 발상을 새로운 언술로 재포장하여 기존 노동운동의 성과와 그 내부에서의 변화노력을 무화시키는가. 그는 써클적 수준에 머물렀던 과거와 대중적인 수준으로 발전한 현재 노동운동의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10년 전 당시 ‘고립무원에 처한 노동운동’이 최장집교수와 박승옥씨의 ‘위기론’에 좌지우지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역경을 헤치고 나온 지금의 노동운동은 동일한 담론에 휘둘릴만큼 나약하지 않다. 물론 박승옥씨가 제기한 문제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원인과 해결방안 사이에 구체적 매개물이 없다면 그것은 황광우씨가 지적하듯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는 스님에게나 필요한 처방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주장은 그의 인식, 혹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말한 ‘가진 자들’의 이해를 옹호하는 사회정치적 지배담론으로서의 효과만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제 박승옥씨가 언급한 전태일열사에 대한 생각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전태일열사에게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전태일열사가 시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안고 살다 갔다는 점에 주목할 때, 지금 전태일열사가 살아 있다면 그는 진정 어떻게 행동했을까. 당연히 그는 비정규직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삶을 중심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 친구를 많이 갖게 됐을 그는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고통스런 현실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옆에서 훈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현장으로,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더 많은 지식인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삶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글로벌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우회한 채, 박승옥씨처럼 자족적인 생태주의를, 하루 연명하기조차 힘든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을 옹호하는 논지를 펴면서 ‘보다 적은 소비’를 그렇게 과감히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너무 비약이 많으며 그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직면한 ‘지상의 고통’을 더 은폐한다.
박승옥씨에게 현재의 노동운동은 과거와 변함없는 그의 논지에 근거해 볼 때, 그가 주장했던 바 여전히 90년대 초와 같은 ‘종양’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박승옥 민주화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의 현 노동운동 비판글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에 대해 황광우 민주노동당 전 중앙연수원장이 지난 6일 반론을 제기한 데 대해, 류동기 교사가 재반론을 제기했다.
류동기 교사는 노동운동가는 아니나, 평소 한 노동자 입장에서 느껴온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박승옥 연구원의 문제제기에 전폭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글에 대한 재반론이 있을 경우에도 이를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정말 박승옥님 주장을 '저주의 굿판'으로 보십니까"
[황광우씨 반론에 대한 재반론] "노동자간 빈부격차 직시해야"
프레시안 / 2004-09-07 오전 10:07:13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에 사는 중학교 교사 류동기입니다.
프레시안에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에 대한 반론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이 있지만 용기가 없어 시작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으로 잘되기를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노동 운동에 대한 박승옥님의 글은 솔직히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잘 풀어 써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가 이제는 뒤를 돌아보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방향에 대해 성찰을 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조 활동에 대해 이제는 예전처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 않습니다. 경제위기 이후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언론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싶으시겠지만 언론은 예전보다 더 자유롭게 말을 하게 되었고, 몇몇 거대언론에 의해 통제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감히 말할 정도로 분위기는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언론은 노동 현장과 노동운동을 이전보다 더 상세히 잘 알려주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무조건 언론 탓만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이 예전과 달리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본의 맛도 보았고, 교육의 수준도 높아졌고,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민주주의를 거대 언론, 더 많이 가지려는 자본가들, 그리고 권력가들이 적극적으로 악용하기에, 황광우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의 글이 “누군가의 노리개감이 된다”는 주장에 저도 공감을 합니다.
어째든 사람들이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좀 더 민주적인 방법으로 노동운동이 전개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의 다양한 조건이 변한만큼 우리는 현재의 노동운동에 대해 천천히 생각을 하고 좀 더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황광우님이 주장하신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소 감정적으로 글을 쓰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감정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노동운동을 시작하는 동기가 되고,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서로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타개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할 때는 감정보다는 차가운 이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누군가 자신과 다른 생각으로 말을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일 때일수록 더욱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박승옥님의 글에서 논란의 중심은 황광우님이 지적하신 대로 폭력적 시위와 전투적 조합주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찰입니다. 그러나 황광우님의 글은 그 논란을 불러일으킨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이성적 반론을 못하시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만 "노동운동을 씹어 먹지 못하여 분해하는 조중동의 언어다. 황제병이나 왕자병은 노무현이나 유시민의 형태 분석에 적합한 언어가 아닌가?"라는 말씀을 하시니, 이는 중요 논점을 비켜가고 상대의 허점이 될 만한 것을 비난하는 조중동의 언어를 몸소 실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노총의 조직률을 어설프게 전경련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결국 현재 노조의 모습이 전경련의 모습과 같다고 시인하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전경련은 최상위 자본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대표인 척 하지만 실은 대자본가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단체입니다. 그들의 주장으로 인해 부도를 맞이하거나 강제 합병당하는 중소기업이 많고, 은근슬쩍 편승한 일부 중소자본가들은 덕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 단체가 기업체 전체의 대표성이 있다고 전제를 하고 그것과 비교할 때 민주노총의 12%는 더욱더 대표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노총도 결국은 최상위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마치 조직되지 못한 다른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노총과 전경련이 닮은꼴입니다. 아직 풀지 못한 비정규직문제와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대해 잘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자본가가 상대적 약자인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의 고혈 짜낸 돈으로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기 때문입니다. 즉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노동자와 중소자본가 희생으로 배가 불러가는 전경련처럼, 상대적 약자의 고혈이 민주노총의 배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따끔하게 충고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라고 질타하는 것도 역시 빈약한 논리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감상적 대응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적인 논점인 현재의 노동운동 모습에 대해서는 벗어난 어설픈 자기변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황광우님은 또한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현재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노력을 해서 만들었는데 왜 박승옥님이‘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을 이야기하냐고 질타를 하십니다. 또한 박승옥님의 글에 대해서 "우울증에 빠져드는 낭만적 지식인의 병적 심리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노동운동은 현실을 그대로 직시한 후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진단하고, 무엇을 준비할지 알게 되고, 어떻게 대응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모습을 바꿉니다. 20년 전 노동현실과 10년 전 노동현실, 1년 전 노동현실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전에 이루어온 과거의 성공에만 집착하여 현재를 보지 못하고, 아니, 안 보려고 하고, 이미 성공했던 방법들이 계속해서 성공할 것이라는 정말 무사안일적인 생각으로 현실의 많은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재를 분석하지 않고는 미래를 준비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을,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박승옥님에게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이라는 저주의 굿판을 접으라고 황광우님이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박승옥님이 말씀하신 것이 저주의 굿판입니까? 아니면 현재 노동운동에 대한 우려입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향후 20년 한국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어나갈 운동’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바뀐 현실도 직시하지 못하면서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또한 노동현실에 대한 황광우님의 인식 정도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현실 인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기업 노동자의 연봉에서 빠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는 것이 팍팍하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것보다 더 적은 연봉으로 4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아예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황광우님이 주장하신 "70만의 힘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무능을 고민할 때"라는 것은 최소한 그 70만은 어느 정도 먹고 살아간다는 전제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황광우님의 고민인 ‘70만의 무능’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꿀지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같은 노동자라도 많이 받는 사람과 적게 받는 사람들과의 경제적 차이가 줄어야 한다는 것이지, 더욱 늘어나는 방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노동운동의 모습은 70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파업을 벌이는 것이지 다수의 노동자를 위해 파업을 벌이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 박승옥님이 대표성에 의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 노동현장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70만의 힘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무능만을 고민하는 것은 배부른 노동자의 자기기만입니다.
또한 벌써 폐기되어야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자본가의 권력을 자신들이 대신 차지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의도가 없다면 20년 전의 현실 상황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한 책으로 현재의 상황에 밀어붙이는 어리석음처럼 아직도 과거의 상황을 현재로 인식하고 그 대안을 절대 진리로 믿고 나아가는 것으로 밖에는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현재는 분명 노동자 사이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2000년 한국 정부 재정의 공룡화를 말씀하시면서 정부가 서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황광우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0조원의 거대한 부를 가져간 정부가 서민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왜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정말 답답하다"라고 폭발적인 감정으로 호소를 합니다. 어설픈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얼마 전 한 외국일간지는 한국의 복지 모습에 대해서 1만불인 사람들이 2만불의 복지를 실행하려고 한다고 뼈있는 지적을 했습니다. 황광우님이 요구하시는 그 많은 복지들이 과연 누구의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광우님은 투사적인 모습으로 "노동운동은 정부로 하여금 서민들의 생활비를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생활비 인하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운동에 전국민이 환영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황광우님의 주장은 다음의 글을 보면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40대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 3-4000만원이 많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보면 4인 가구가 한 달 살기 팍팍한 돈이다. 왜냐? 너무 많은 돈을 뜯기기 때문이다"라며 많은 세금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황광우님이 원하시는 복지를 실행하려면 아마도 우리가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합니다. 3-4000만원을 받는 노동자에게 현재의 세금도 많아 힘들다고 말씀하시는데 월급을 그만큼 받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몇 %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보다 적게 받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현실이 고통스럽겠습니까? 민주노총이 파업으로 올린 임금만큼 임금을 올릴 수 있는 노동자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과연 황광우님이 주장처럼 ‘전국민이 환영의 박수’를 보내겠습니까? 민주노동당의 많은 복지 공약에 대해서 상당수의 국민들과 심지어 같은 노동자들조차도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복지와 세금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십니까?
황광우님의 말씀처럼 물가는 너무나 살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족의 삶은 정말 최소의 생활만 가능한 정도라는 것도 공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답이 과연 정부에게 모든 것을 떠미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에게 떠미는 것이 결국 우리가 부담하게 된다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황광우님의 연봉 중에서 황광우님이 주장한 대로 정부에게 우리의 사회복지비용을 모두 맡기는 대신 현재 월급에서 2-300만원을 더 땐다고 하면 찬성하시겠습니까? 설혹 황광우님은 찬성하신다고 하실지라도 다른 70만 노동자가 찬성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가진 사람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곳을 버리고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 계속 이야기되는 외화반출 사건은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더불어 불안을 느낀 자본가들이 자신의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있는 현실의 반증입니다. 그렇다고 1945년 북한이 지주들을 죽이고 토지를 강제로 몰수 하던 것처럼 자본가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미워했던 권력의 횡포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다시한번 가진 사람들에게 저지르자는 것인데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다른 나라의 간섭과 혼란은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부유세라는 것이 정의로운 법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의사에 반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강탈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다수의 폭력일 뿐입니다.
경제성장에 맞는 복지가 가장 바람직한 복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1만불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이면 1만불의 복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그 소득의 차이가 최소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연대가 됩니다. 그래서 노동자 사이의 정규직-비정규직과 같은 계급을 없애자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고의 틀을 바꾸어 ‘긍정과 설득, 성찰과 포용과 절약의 새로운 방식을 실천’하고 나누자는 것입니다.
황광우님도 자본주의 본질이 폭력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 폭력을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 행한다는 것은 결국 절대로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신의 부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끝없는 경제발전과 성장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사람들의 관계를 고립시키고 고독하고 외롭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가슴에 상품이라는 것을 채우도록 강요를 하고 그 속에 위안을 찾도록 유도합니다. 상품을 손에 넣는 순간은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허한 가슴을 채우기 위해서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상품을 구입하고 얼마 못가 버리고, 새로 구입하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 미래에 갚으라고 신용카드를 지워주고 무한정 상품을 사게 한 후 노동을 영원히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순간부터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참된 노동은 아닙니다.
참된 노동운동의 목표는 노동해방이지 임금투쟁이 아닙니다. 노동해방을 노동을 하지 않고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노동해방인데, 현대인들은 여가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본말이 전도된 노동 현실입니다. 결국 현재의 대안으로는 아무리 투쟁을 하고 자본가와 싸우더라도 결국에는 노동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여유를 가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원하고, 더 많은 돈을 가지려니, 더 많은 권력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폭력적 투쟁 내지는, 다른 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착취에 해당하는 폭력으로 돈을 얻어내는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노동과 노동운동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박승옥님의 생태주의는 우리 안에 숨은 자본에 의해 끝없이 자극되는 욕망으로 인해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그 자본의 논리를 깨어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생태주의는 황광우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논리가 만들어 놓은 생명 경시, 파괴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태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로 박승옥님의 대안을 "밑 없는 독"이니 "무소유로 살아가는 법정 스님에게나 어울리는, 아직은 우리 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속의 독>일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정말로 자본주의에 의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나 나올 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분이 이렇게 사고가 단순할 수 있을까"라고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노동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시작을 해야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사람들이에게 의지하여 그들이 주는 떡고물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아먹을 수 있을까? 그들이 남긴 떡고물 한 덩어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잘 나눌까? 그들이 떡 만드는 과정에 어떻게 하면 참여할까? 고민하는 것이 노동해방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으로는 절대로 노동해방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떡을 만들고 그 떡을 고루 나누고 그 나눈 떡으로 배를 채우는 모든 과정이 바로 노동해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사람들과 정당하게 경쟁을 해야 합니다. 경쟁을 자본주의 논리로만 생각하여 버리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기업을 만들고, 노동자들에 의해 운영되어,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야 합니다. 자본가의 것을 빼앗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본가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는 달라야 합니다. 땀이 가지는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노동자입니다. 남의 노동으로 배를 채우는 자본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본가의 기업과 노동자의 기업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노동자의 자본을 축적해야 합니다. 자본이 악이라고 하여 자본을 버리는 것은 자본과 자본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자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고 존재해야만 합니다. 자본이 있어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노동해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자본을 모으고 그 자본을 자연과 인간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낭비를 위한 자본의 활용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자본의 활용이어야 합니다. 자본가를 적으로 상정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자본가를 동반자로 인정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노동해방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짧은 소견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쓴 글은 아닙니다. 좀 더 냉철하게 현실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쓴 것입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돈을 지배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회,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회, 소비가 우리의 고독을 채우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채우는 사회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불쑥 글을 드렸습니다.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노동운동 논쟁 5탄] 박승옥씨 글에 반박한다
전지윤: 반전 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단체 <다함께> 기자
프레시안 / 2004-09-10 오후 3:33:41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한국 노동운동을 비판한 박승옥 씨(이하 존칭 생략)의 글(‘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당대비평> 2004 가을호)이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실리면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노동귀족론’을 무기로 노동운동을 공격해 온 상황에서 박승옥의 글은 의도와 상관없이 곧 지배자들의 노동운동 공격에 이용됐다.
<매일경제신문>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이미 배가 불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변모했(다)”(9월 5일자 사설 ‘선배 노동운동가 충고 경청해야’)며 노동운동을 비난했다. SBS는 9월 3일 뉴스에서 “(노동운동이) 집단 이기주의란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며 박승옥의 글을 언급했다. 이처럼 박승옥의 글이 ‘악용’되는 것은 박승옥의 노동운동 비판 논리가 노무현과 지배자들의 노동운동 공격 논리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박승옥은 이미 1992년 “나라경제를 살리는 것이 곧 근로조건을 개선시키는” 길이라며 대화와 타협의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을 주장했었다.
나는 이런 논리에 맞서 노동운동을 방어하고, 이어서 노동운동의 진정한 문제점과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운동이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인가?
박승옥은 한국 노동운동이 “정당성의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기의 원인을 “노동운동 자체의 내부 요인”에서 찾으며 그는 두 가지 글을 인용한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서) … 아가씨를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 … 받기도 한다”
“대기업 노동자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는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사용자와 유착한 부패한 노조 간부의 모습이 민주노조운동에서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정권과 자본에 유착한 ‘어용노조’에 반해서 성장해 온 운동이다. 민주노조운동 일부에서 생기는 일탈을 경계하는 것과 이런 일탈을 마치 운동의 주된 특징인 것처럼 과장해서 운동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박승옥의 과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을 언급하면서도 반복된다. 그가 “또 다른 가진 소수”,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는 6천만 원”, “고용안정과 높은 수준의 보상” 등을 인용ㆍ언급할 때 노무현과 조ㆍ중ㆍ동의 ‘노동귀족론’이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평범한 노동자들과 수십ㆍ수백 배나 차이가 나는 진정한 ‘가진 소수’들(국내 1백대 기업 임원들의 2002년 평균 연봉은 2억8천4백13만 원이고 10대 기업 임원의 평균 연봉은 13억1천5백84만 원이다)을 우선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과 근로조건을 과장한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대표적인 ‘노동귀족’(?)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도 기본급은 1백30여만 원에 불과하다. 휴일도 없이 잔업, 철야, 특근까지 하루 14시간씩 일해야 연봉 5천만 원이 가능하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월급 평균은 2백12만 원 정도인데 이것은 4인 가족 기준 표준생계비 3백60여 만 원에 한참 못 미친다.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은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만’ 나은 것이다.
더구나 박승옥도 인정하듯이 이런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마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투쟁의 과실”이다. 즉, 민주노조를 건설해 단결하고 투쟁해 온 노동자들이 지배자들의 양보를 받아낸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ㆍ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
물론, 박승옥의 지적처럼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 “대다수는 조직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어떠한 결실이나 혜택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사실 기업주들은 민주노조 운동이 투쟁으로 쟁취한 결실과 혜택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늘려왔다.
이로부터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민주노조 건설을 통한 단결과 투쟁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87년 이후 투쟁으로 쟁취해 온 ‘과실’을 따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민주노조로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에 앞장서 연대해야 하고, 이 속에서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를 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임금과 근로조건의 상향평준화가 가능하다. 이미, 올해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은 정규직ㆍ비정규직 연대 투쟁으로 온전한 주5일제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루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바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더 나은 조건을 따내는 것이 “중소영세기업 비정규 여성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꼴”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성과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확산되는 선례가 되곤 한다. 지난해 현대차 노조가 파업으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를 따내자 <조선일보>는 “중소 및 영세업체에 도미노 식으로 확산될 … 악영향”을 걱정하며 “현대차 임단협 결과가 다른 기업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 서둘러야 한다.”(2003년 8월 8일치 사설)고 절규했다.
이 사회의 진정한 불평등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진정한 불평등은 노동자 전체와 소수 특권 지배자들간에 있다. 이 불평등한 구조에 맞서는 투쟁에서 가장 선봉에선 노동자들을 매도해서 나머지 노동자들과 이간질시키고, 투쟁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노동귀족론’의 본질이다.
그런데 박승옥이 이 같은 본질을 놓친 채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주변부 노동자들의 참상”이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근거지에서부터 허물어뜨릴 것”이라며, 참상과 고통의 뿌리인 체제와 지배자들이 아닌 노동운동을 겨냥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덧붙여 박승옥이 받아들이는 바란과 스위지의 ‘독점이윤론’, 또는 ‘식민지 초과 이윤론’은 자본주의의 핵심이 강대국의 제3세계에 대한 수탈이나 독점자본의 중소자본에 대한 ‘수탈’(가치이전)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가치창출)에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이 이론은 강대국ㆍ독점기업의 노동자가 제3세계ㆍ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식민지 초과이윤’ㆍ‘독점이윤’의 착취에서 이익을 본다는 논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단결을 방해한다.
이 이론은 제3세계 많은 나라가 오히려 투자에서 배제되어 있고, 세계 투자의 70퍼센트가 선진국간에 이뤄지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선진국ㆍ독점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은 더 높은 생산성과 고부가가치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이들 또한 착취 당하고 있다.
전투성에 대한 공격
‘주변부 노동자들의 참상’에 분노하는 박승옥이 체제와 지배자들을 비난하고, ‘주변부’ 노동자들과 연대 투쟁에 소극적인 ‘중심부’ 노조와 노동자들을 비판하며 적극적인 단결 투쟁을 호소했다면 나무랄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변부’ 노동자와 ‘중심부’ 노동자의 단결을 해치는 논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아가 엉뚱하게도 ‘중심부’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을 공격하고 있다.
그가 “총파업 선언의 빈번한 반복”, “대중투쟁 일변도의 전략”,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인용ㆍ지적할 때 그의 칼 끝은 분명히 ‘전투성’을 겨냥하고 있다.
그가 ‘정권과 자본에 맞선 전투적 투쟁’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소중한 전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그런 투쟁은, 그 성과가 물가인상 등을 통해 도로 사라지는“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이다. 또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판 생디칼리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내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은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후퇴한다. 이 때문에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것을 “시지프스의 노동”이라 말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는 파업에 대해 “그 경제적 결과들이 겉보기에 하찮다고 해서 그것들에 눈감아서는 안되며, 무엇보다도 그 도덕적 정치적 결과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노동조합을 통한 일상적인 투쟁과 파업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의 의식과 조직이 성장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투쟁은 …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박승옥이 제시한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한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은 노동자 대중을 상층지도부와 정부의 협상을 바라보는 수동적 구경꾼으로 만들 것이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노동귀족론’과 경찰력을 양손에 휘두르며 노동자 투쟁을 파괴하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구슬러 ‘노사정 대타협’에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승옥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투쟁보다 대화에 중심을 두며 이런 시도에 말려드는 것을 “이전 집행부와는 사뭇 다른 행보”라며 지지하고 있다.
박승옥이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판 생디칼리즘”이라고 비판할 때도 그의 비판의 초점은 ‘전투성’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조합주의’다.
생디칼리즘(조합주의)은 정치와 정치운동을 배척하고 노동조합을 통한 경제적 투쟁만을 강조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총파업 등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혁명적 생디칼리즘까지 포괄하는 모든 생디칼리즘의 문제점은 정치 배제에 있다.
이런 정치 배제와 기권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공장 담벼락 안에 가두어 경제적 투쟁마저 마비시키며, 결국 정치에 대한 주도권을 부르주아 정치인이나 개량주의자들에게 맡겨버리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경제 투쟁에 머물지 않고 정치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은 상호 작용해, 노동자들의 의식과 힘을 강화시킨다.
‘전투성’이 경제적ㆍ조합적 투쟁에만 한정되면 결국 전투성마저 갉아먹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투성’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 투쟁에서 발휘되는 ‘전투성’이 정치 투쟁에도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니라 독 자체를 바꾸는 투쟁으로, 즉 ‘임금인상’이 아니라 ‘임금노예제 철폐’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고, 이 투쟁에서 혁명적 정치와 조직은 필수 불가결하다.
생태적 위기와 마르크스주의
그러나 박승옥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대해 혁명적 대안이 아니라 ‘생태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사회주의는 노동운동의 대안 이념이 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의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에 지나지 않”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개인소유를 제한한다고 해서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태적 위기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 기초해 있다. 그는 “자연을 고려하지 않기는 … 마찬가지”라며 마르크스주의를 매도한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이다.
마르크스는 자연이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우리는 언제나 외국인을 지배하는 정복자처럼 자연의 외부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피와 뇌를 가진 우리가 자연에 속하고 그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어리석고 부자연스러운 관념”을 비판했다.(<자연변증법>)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환경파괴가 이윤을 위한 경쟁적 축적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즉각적인 이윤을 위해 생산과 교환에 참여하는, 개별자본가들은 가장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들만을 우선적으로 고려”(엥겔스, <자연변증법>)하기 때문에 이윤을 위한 환경 파괴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경쟁적 축적의 노예인 개별 자본가들의 통제권을 뺏는 것은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이다.
노동 대중이 사회 전체의 필요와 안전을 위해 생산을 집단적ㆍ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주의도 “성장과 발전의 이념”이라는 박승옥의 주장은 옳지 않다.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은 자본주의의 특징일 뿐이다.
아마 박승옥은 구소련 등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환경 파괴를 보고 “이미 입증되었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관료 지배자들이 미국과 군사적ㆍ경제적 경쟁 속에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환경을 파괴하며 강박적 축적을 한 구소련의 모습은 이것이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임을 입증할 뿐이다. (토니 클리프, <소련국가자본주의>, 책갈피)
따라서 “‘보다 더 적게’ 소비”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이 체제의 진정한 문제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소수 지배자들이 인간과 자연을 착취한다는 데 있다.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다수 대중의 수중에 돌려서 인간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 핵심이다. 그런 사회는 반드시 저소비 사회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돈이 없어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가 될 것이다.
계급투쟁과 폭력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대안으로 보지 않기에 박승옥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과 계급투쟁 사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는 … 부정의 배타성이 곳곳에 기저에 깔려 있다”고 비판한다. “계급의식과 적대감을 지나치게 고취시키는 계급 개념은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고 “배타적 계급 운동은 … 공동체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물이나 사회 내부의 모순과 대립ㆍ갈등에서 변화와 발전을 설명하는 ‘부정의 변증법’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본다.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대립하는 두 계급 사이의 적대는 필연적이다. 조지 부시와 노무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대감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은 ‘공동체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공동체는, 예컨대 이라크 파병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국가보안법 폐지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분열돼 있다. 이런 분열의 바탕에는 대립되는 이해관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낡은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에 맞서서 피지배 계급이 승리할 때 역사가 발전한다고 봤다. 이 투쟁의 승리를 위해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물론 이것은 박승옥이 생각하는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과 “공동체의 통합”에는 맞지 않겠지만 말이다.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박승옥은 “노동운동은 … 이제 폭력 행동도 그만두어야 한다. … 아직도 시위 때 등장하는 쇠파이프는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폭력에 반대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진정한 폭력을 먼저 비난해야 했다.
이처럼 진정한 폭력을 모른 척하며,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한 노동자들의 방어적 폭력만을 매도하는 것은 보수언론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예컨대 김주익, 이해남, 이용석 열사의 잇단 죽음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치솟았던 지난해 노동자대회 다음날 조ㆍ중ㆍ동의 1면 헤드라인은 “화염병”, “불바다”, “폭력시위” 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맨손에 쇠파이프만 든 1천 명의 노동자 사수대가 2만 명의 중무장한 전경들에게 토끼몰이 식으로 구타ㆍ진압 당한 것이 노동자대회의 진상이었다.
용역깡패나 경찰력에 맞서 자신들의 투쟁을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방어적 폭력은 대개 불가피하고 정당하다. 선정적으로 “쇠파이프”를 말했지만 “파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에서 보이듯 그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 자체에 부정적이다.
대중 행동 대신 그는 “삼보일배”같은 소수 행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소수행동은 대중 행동을 통한 대중의 의식과 조직 성장을 대체할 수 없다. 소수 행동은 무엇보다 지배자들을 물러서게 할 수 없다.
전태일 정신 계승
박승옥은 이번 글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다 바치며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간 전태일 정신의 계승을 말했다.
전태일 열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세대 …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짤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고 썼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동등하게 보장되며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인간적인 정을 느끼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태일 열사의 이같은 비타협적ㆍ혁명적 사상은 박승옥이 말하는 전투성과 계급성이 거세된 노동운동 노선과 전혀 다르다.
진정한 전태일 정신의 계승은 노동운동이 전투성과 계급성을 더욱 고양시키며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가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목적지인 ‘노동해방 세상’까지 굴려야 한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전태일 유서)
[노동운동 논쟁 6탄] 박승옥씨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최병천 /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프레시안 / 2004-09-16 오전 11:08:23
박승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의 글을 계기로 촉발돼 진행되고 있는 '노동운동 논쟁'에 대해서 최병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부장이 글을 보내왔다. 최병천 부장은 "민주노동당의 공식 입장이 아닌 전적으로 개인의 의견"임을 전제한 뒤, 노동운동에 대한 문제점과 나름의 대안을 정리했다. 편집자.
"노동운동, '스웨덴 모델'에서 배우자"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박승옥의 글은 전반부 문제제기와 후반부 대안제출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승옥이 제출한 대안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을지라도 '문제제기의 핵심'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박승옥 문제제기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노동내부의 양극화 심화, ▲노동운동의 정책적 대안부재, ▲노동운동의 사회적 아젠다 능력 상실 등이었다. 사실 노동운동의 위기와 노동내부의 양극화 심화 등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한 것이다. 혹자는 박승옥의 문제제기가 조중동과 경제신문 등에 의해서 악용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러한 비판방식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조중동이 무슨 짓을 하건 박승옥의 문제제기가 타당한지 여부를 중심으로 생각해서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극복할 것은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본 글은 박승옥의 문제제기에 대체로 공감하며 박승옥과는 다른 방식의 '대안적 해법'을 제출하고자 한다. 아무쪼록 필자의 부족한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의 논의를 통해 풍부해지기를 고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제한된' 계급 대표성
잘 알다시피 현재 노동조합 조직률은 11%이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조합 조직률을 중시하는 것은 '양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 때문이다. 조직률 11%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 '1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만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86%는 100인 미만 사업장(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들 대다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100인 이상 사업장의 노동자들만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없다. 즉, '조직구성'의 차원에서 볼 때 '제한된' 대표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노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앞으로의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90년대 중반 노동조합 조직률이 15%정도인 적이 있었는데, 당시 100인 이상 사업장의 90%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말은 거꾸로 만일 노동조합 조직률이 30%정도 될 때 비로소 명실상부한 계급적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률 30%가 되기 위해서는 100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조합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박승옥이 11%의 낮은 조직률을 언급했던 이유 역시도 이렇듯 조직률의 '양적' 측면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적' 측면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박승옥의 문제제기에 화답하려면 찬반입장을 떠나 낮은 조직률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 명실상부한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 노동 내부의 양극화 심화 등에 대한 진전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비껴가는' 모든 반론은 읽는 이로 하여금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대안'은 도대체 무엇이며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이 과연 대안을 모색할 적극적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것이 현재 노동운동 위기 논쟁 전체를 관통하는 논쟁의 핵심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시적 코포라티즘의 '진보적' 의의
박승옥과 황광우는 한국노동운동의 핵심 극복과제로 전투적 조합주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한국 노동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지윤이 잘 지적했듯이 '전투적 조합주의(생디칼리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치투쟁의 중요성, 노동자 정당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점인데 이러한 편향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를 초래하는 핵심적 요인은 조직, 교섭, 분배구조를 총망라하는 '기업별 노조 체계' 그 자체로 인한 것이다. 기업별 노조 체계는 실로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기업별 노조체계로 인해서 규모가 작은 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조합원으로 조직화되기 어렵고, 조합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가로막고 있으며, 기업단위 교섭체계로 인해 자금여력이 있는 대기업과 자금여력이 부족한 중소 영세기업의 '분배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더군다나 대기업에 소속된 노동자의 경우 '기업복지'가 발달하여 사회복지에 대한 투쟁동력에서 이완되는 작용도 하고 있다. 실제로 전국에서 복지수준이 가장 낮은 지역중 하나가 대기업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한 울산지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업별 노조체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상을 좀더 입체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상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기업별 노조 차원의 노동-자본 협상('미시적' 코포라티즘)과 좀더 거시적인 국민국가 차원의 노동-자본 협상('거시적' 코포라티즘)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유럽의 경우 과거에는 강력한 중앙 집중 산별 교섭이 주를 이루다가 최근에는 총연맹(또는 산별) 차원의 거시적 노동-자본 협상과 기업 차원의 미시적 노동-자본 협상이 상호보완적인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경우 미시적 코포라티즘에 해당하는 기업별 노조와 기업별 협약만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못한 89%의 '미조직 노동자들', 즉 중소영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비정규직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여성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통로가 사실상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업별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산별노조의 건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산별노조의 건설은 '미래'이고 89%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실'인데, 그렇다면 산별노조가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89%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산별노조로 이행하고자 하는 '본질적 취지'가 무엇이었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산별노조로 이행하고자 했던 것인가? 우리가 산별노조라는 '조직형식'으로 이행하기 위한 본질적인 이유는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교섭 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89%의 미조직 노동자가 존재하는 한국적 상황을 감안할 때 거시적 코포라티즘(사회적 조합주의)은 특히나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진보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째, '거시적 코포라티즘'은 노동계급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미조직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 현재 기업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미시적 코포라티즘은 조직된 노동자(100인이상 사업장)의 이해관계만을 대표하고 있다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는데 반해, 거시적 코포라티즘은 노동계급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에 훨씬 더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둘째, 거시적 코포라티즘은 미시적 코포라티즘에 비해서 '포괄적인 협상'이 가능하다. 알다시피 기업단위 노조에서 협상할 수 있는 의제는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가령, 비정규직 문제만 하더라도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며 또한 제도개혁을 하더라도 연관된 제도가 종합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실제로 유럽의 노사정 합의기구(사회적 코포라티즘)에서 협상되는 것들은 아주 포괄적이다. 단지 임금문제와 고용보장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연금정책, 공공의료정책, 실업정책, 주택정책, 재정정책, 환율정책 등 노동자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을 협상 의제에 포함하여 노동-자본-정부간의 포괄적 협상이 이루어진다.
대기업 노동자일수록 조직력, 투쟁력, 협상력 등에서 우월적인 지위에 있기 때문에 거시적 코포라티즘의 필요성을 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은 대기업 노동자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거시적 코포라티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동시에 거시적 코포라티즘을 통해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전략적 성과물들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궁극적으로 이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거시적 코포라티즘(사회적 조합주의)이 실효성있게 작동하기 위해서 사회적 협약 기구의 '위상'을 올바로 확립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기업별 협상(미시적 코포라티즘)에서 그렇듯이 협상전략의 일환으로 총파업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협상의 파트너가 꼴통 같은 짓을 할 때 일시적으로 '협상 결렬'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거시적 코포라티즘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은 본의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중소기업/비정규직/여성노동자들의 '절박한' 이해관계를 외면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거시적 사회적 합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노동조합 운동을 하는 분들 중에는 사회적 합의 구조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 분들이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98년 노사정대타협의 패배에 대한 경험적 학습효과가 한몫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98년의 치명적인 오류와 뼈아픈 패배는 사회적 합의라는 '틀'(형식)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노동운동세력의 '아젠다 전략의 부재'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합의구조는 하나의 '협상 틀'(형식)이다. 새로운 협상 틀(형식)이 내용적 진보성까지를 자동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내용적 진보성을 채우는 문제는 결국 '아젠다 전략'으로 귀결된다.
아젠다 전략은 의제설정 전략, 조직 동원 전략, 시민사회와의 연대 전략 등을 포괄한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특히나 중요한 것은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중심고리"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발전에 대한 중장기적 전망 속에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과 '나중에'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분 없이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박승옥은 현재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정책적 대안부재"와 "의제설정 능력의 무능"을 지적하였는데 전적으로 타당한 지적이었을 뿐더러 정책적 대안능력과 의제설정 능력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거시적 코포라티즘'이라는 새로운 협상 틀을 가지게 될지언정 98년의 치명적 오류와 뼈아픈 패배를 재현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민주노총의 이수호 신임 집행부는 사회적 합의구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사회적 합의구조는 정책적 대응능력과 의제설정 능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거나 오히려 노동운동을 옥죄는 '덫'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 코포라티즘의 진보적 활용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민주노총 정책연구소 등에 대한 '획기적인' 인적. 물적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의 '전략적 아젠다'를 위하여 - '네덜란드 사례'에서 배우기
현재 노동운동이 처한 어려움을 전략적으로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실질적 진전, ▲노동 '내부의' 평등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전략, ▲산별노조에 대한 실질적인 '이행전략'의 제출, ▲노동조합 조직률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는 조직화 전략 등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과제들은 하나같이 굵직 굵직한 과제들인데 우리는 위와 같은 과제들을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연관된' 종합적 프로그램 속에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네덜란드 모델'과 '스웨덴 모델'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진보적 시사점을 주고 있다. (지면관계상 네덜란드 모델과 스웨덴 모델의 개괄적 특징은 생략하고 궁금한 분들은 참고문헌을 활용하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네덜란드 모델의 진보적 특징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노동시간(주당 33시간)과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간에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보험 혜택에 있어서 정규직과 동일하게 대우받을 뿐만 아니라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의해서 '시간당 임금'을 기준으로 보면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없기 때문에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의 '호환'이 이뤄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외에도 네덜란드 모델에서 특히나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 더 있는데 ▲공공고용서비스 체계를 통한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노동시장 개입', ▲노동내부의 평등을 지향하는 '산업별' 기업연금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유럽에서 드물게 근로자 파견제를 수용했지만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공공고용서비스체계를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 3명, 자본측 3명, 정부 대표 3명을 포함 총 9명으로 구성된 중앙고용위원회 (Center Employment Board)와 총 28개의 지방노동위원회는 노동자들에 대한 취업알선, 교육훈련 등을 수행하며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또한 최근 노무현 정부가 2006년부터 퇴직연금제를 도입하겠다는 것과 관련해서 네덜란드식 기업연금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 기업연금제는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모델인데, 다음과 같은 '진보적'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산별차원의' 강제연금이라는 점이다. 네덜란드 노동운동은 연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산별차원의 강제연금을 채택하고 있으며 그 결과 연금혜택을 받는 노동자가 91%에 이를 정도로 높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민연금의 경우 비정규직을 포함하여 600만명의 국민들이 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산별차원의' 기업연금제도는 연금이 기업간 경쟁조건이 되는 것을 막아 '노동 '내부의' 평등'을 달성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네덜란드 기업연금의 99%는 확정급여형을 채택하고 있으며 전체 노동자의 87%가 산업별 연금에 가입되어 있다.)
둘째, 네덜란드의 기업연금 운용은 노동과 자본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산업별' 사용자 대표와 '산업별' 노동자 대표가 동일한 비중으로 연금이사회(Pension Board of Directors)를 구성한다.
셋째, 이렇게 구성된 산업 차원의 연금은 외부의 증권회사, 투자자문사, 뮤추얼펀드, 보험회사 등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산업 부문 내의' 자체적인 금융서비스 회사에 맡긴다. (참고로 노무현 정부가 퇴직연금제 도입 발표를 하고 난 이후, 재벌과 외국자본이 장악한 금융권은 퇴직연금제 시장규모가 100조원이 넘느니, 150조원이 넘느니 하며 '돈 독'이 올라 벌써부터 들떠 있는 분위기이다.)
기업연금제도는 엄청난 자금 규모로 인해서 적립방식, 운영방식 등이 어떤가에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격을 뒤바뀔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다. 흔히 경제학계에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와 독일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구분하곤 하는데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발전에는 확정기여형-외부위탁형-주식시장 중심의 기업연금제도의 발달이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을 정도이다.
네덜란드식 기업연금제도는 적립방식, 운영방식, 지배구조 등에서 영미식 기업연금제가 금융자본주의를 촉진ㆍ조장하여 노동배제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것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네덜란드 모델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 특징'들을 살피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제도들이 노동 내부의 '연대'를 이루고자 하는 조직화된 노동조합운동의 목적의식적인 노력으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가령 네덜란드는 96년 유연-안정성(Flexicurity) 협약을 통해 24개월 이상 근무하는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 지속 의무를 부과하고 연금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조치들을 도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적 진전은 네덜란드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내부의 평등과 노동 내부의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해고 요건에 대해 부분적으로 양보하면서까지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산업별' 기업연금제도, 기업연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배구조 참여, 노동시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적극적 개입,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함께 '안정성'을 위해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을 도입하는 노력 등이 병행되어 25%까지 하락하던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상승세로 반전되어 90년대 중반 30% 수준으로 올라갔다.
노동운동의 '전략적 아젠다'를 위하여 - '스웨덴 모델'에서 배우기
스웨덴 모델이 주는 진보적 특징에 대해서는 노동운동 내부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 90%가 넘는 노동조합 조직률, 1932년부터 현재까지 3번 정도를 제외하고 전부 좌파정당이 집권한 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회복지 수준, 높은 여성 지위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스웨덴 모델은 전 세계 진보진영의 연구 대상이자 동시에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스웨덴 모델은 많이 알려졌지만 스웨덴 모델이 내포하고 있는 '조직화 전략'과 '노동 내부의 평등' 전략에 관해서는 공론화가 부족했던 것 같아 이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겐트(Ghent) 제도'라는 노동친화적 실업보험 제도와, ▲연대임금제에 담겨진 노동 내부의 평등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50%가 넘는 나라들은 채 10개국이 되지 않는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벨기에 등 대부분 북유럽에 몰려 있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다는 공통점 이외에도 실업보험의 방식으로 겐트(Ghent)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겐트(Ghent)제도는 실업보험 방식의 일종인데, 영국식 국민보험과 달리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에게만 실업보험이 적용되는 제도이다. 노동조합의 가입과 고용을 연계시킨 것이 '유니언 샵'인데, 실업보험에서 유니언샵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는 단순하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임금정책수준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 '연대임금제도'에 담겨있는 노동 내부의 평등 정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도는 제도 그 자체가 철저하게 '노동내부의 단결'을 목적으로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로 설계된 것이다. 스웨덴 노총(LO)은 연대임금제도를 통해 동일업종 동일노동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 '기업규모'와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연대임금제도는 속성상 대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는 한편, 동일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중소자본은 '생산성'이 그만큼 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퇴출(구조조정)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연대임금제도)를 수행하지 못하는 중소자본은 퇴출되었고 이때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실업에 대해서는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과 연계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해결하였다. 실업보험, 직업재교육, 취업알선 등의 직업 재전환 과정 일체를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대임금제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임금정책이나 단순한 복지정책 및 실업정책이기 이전에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실질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종합적인 정책설계였으며 동시에 산업구조조정과 경제성장을 '노동친화적'인 방법으로 이룩하기 위한 스웨덴 노총(LO)의 수년간에 걸친 연구와 전략적 의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스웨덴 모델과 네덜란드 모델에서 공통되는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째,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 '조직률 제고'에 전략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노-사-정이 참여하는 공공고용서비스 체계 및 산업별 기업연금제도를 통해서 노동조합이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스웨덴의 경우 겐트(Ghent)제도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정책적 조합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또한 '노동 '내부의' 연대'를 이룩하기 위해 정규직ㆍ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를 얻어내서라도 목적의식적인 제도 개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분적으로 해고 요건 완화를 수용하면서까지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업연금 혜택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산별단위 기업연금제도를 설계하였고, 스웨덴의 경우 연대임금제를 통해 대기업의 경우 연대임금 수준에서 의도적인 임금억제를 하도록 제도를 설계하였다. 물론 한국적 적용에 있어서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은 실현가능성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것은 '강요'이지 양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맺으며-"노동 '내부의' 연대"에 기반을 둔 진보적 코포라티즘 전략을 위하여
필자는 위의 내용들을 통해 '거시적 코포라티즘' 전략이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진일보한 협상틀일 수 있음을 밝히고, 또한 내용적 진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젠다 전략 수립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전략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아젠다 전략의 수립으로는 ▲비정규직 문제, ▲노동 '내부의' 평등, ▲산별노조로의 '이행전략', ▲노동조합 조직률 제고 등을 거론하며 네덜란드 모델과 스웨덴 모델에서의 시사점을 정리해 보았다.
가령 이런 것이다. 기업규모의 격차가 커서 노동과 자본의 '이질성'이 크면 클수록 산별노조의 추진은 쉽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산별노조의 이행은 목적의식적인 '제도적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산별차원의 기업연금제도’의 도입, 현재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가 하고 있는 업무를 노동조합(또는 노사공동)이 운영하는 ‘산별차원의 고용시장위원회’ 같은 것을 설립ㆍ운영하여 산별노조를 하는 것이 산별노조를 하지 않는 것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인센티브"를 끊임없이 설계하여야 한다.
그래서 산별차원의 고용시장위원회로 하여금 연구개발(R&D)사업, 직업훈련, 인적투자, 취업알선 등의 사업을 주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업들은 모두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제고하면서도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 강화에 기여하여 노동조합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도 증대시킬 것이다.
또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어디서 어떻게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입으로만' 네덜란드 모델을 떠들지 말고 네덜란드 모델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 특징에 걸맞게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보험 혜택을 보장하고 시간당 임금이 같도록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업연금제도야말로 네덜란드식 기업연금제도를 적극적으로 채택할 일이다.
위와 같은 전략적 아젠다를 쟁취하기 위해서 민주노총은 대기업노동자들을 포함한 조합원 전체와 충분한 토론을 통해 심도 있는 공론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기업노동자들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일정부분 책임을 지겠다는 '사회공헌기금'의 기본 문제의식을 살려 대기업노동자들의 '임금자제'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임금자제를 양보하는 대기업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의 인센티브, 예컨대 '우리사주제' 형태로 지불하는 방법을 적극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우리사주제'는 현재 주식시장의 43% 가량을 외국계 자본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기업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미국에서 종업원지주제(ESOP)가 발달하게 되었던 배경에는 80년대 M&A 바람이 불어 경영권 방어차원에서 경영자가 종업원지주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 기업들은 '외국계 자본'을 들먹이며 뻔뻔한 거짓말로 경영권 방어차원에서 출자총액제의 완화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외국자본'에 의한 경영권 인수를 그렇게 우려한다면 기업에 장기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핵심 내부자인 종업원과의 동반자 관계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기업별 노조, 계열사 구조에 의한 내부노동시장의 존재, 연공서열식 임금구조 등의 측면에서 한국의 노사관계는 흔히 일본식 모델과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기업별 노조체계의 문제점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좌파가 거의 몰락직전에 있는 상황이며 그리고 인해 현재 일본의 사회ㆍ정치적 세력관계는 우파와 극우파의 대결로 변화되었다. 한국에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면 일본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60년대 안보투쟁이 있었을 정도로 화려함과 전투성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형식적 격렬함 여부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얼마나 노동계급이 실질적 단결을 이룩할 수 있도록 제도가 설계되었으며 또한 뿌리내리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좀 더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현재 한국경제의 기본구조가 '남미 모델'로 재편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주식시장의 43%, 은행지분의 30%, 핵심 상장회사들은 이미 외국계 지분이 50%를 넘었고, 노동시장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정규직 중심으로 유연화되고 있는 상황이며, 자본은 투자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풍부한 현금성 자산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연히 경제 전체의 성장잠재력이 고갈될 뿐만 아니라 경제주체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장기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정책수립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걱정하는 '절박함'은 과거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그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다. 또한 한국경제의 진보적 재건을 위해서라도 노동자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관계를 조직하고 여론화시키고 제도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노총의 위기와 노동운동의 위기는 불구경하는 구경꾼의 자세로 접근될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실질적 재건 여부에 따라서 한국사회가 산별노조와 노동자정당의 '양 날개'가 원활히 작동하는 유럽식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모델로 진행될 것인지 아니면 기업별 노동조합의 한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진보적 색깔이 거세되고 기업에 내부화된 일본 혹은 남미 모델로 갈 것인지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기 : 본 글이 작성되는 중간에 '근로자 파견제'와 관련된 황당한 정부 개악 안이 제출되었다. 만일 현재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자 파견제와 관련된 개악 안이 통과된다면 이는 노동조합 운동 자체의 존립을 허물게 될 것이며, 현재의 정규직 노동자들조차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추진되는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 안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법안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합의구조'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 글에서 제시된 사회적 합의구조의 필요성은 '현재' 참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노무현 정부의 최소한의 진전된 자세를 전제로 할때만 유의미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 모델‘에 관한 참고 자료
김훈(2003), 「네덜란드 노사관계」, 『세계의 노사관계 변화와 전망』, 한국국제노동재단
김태현(2003), 「네덜란드 모델, 장님 코끼리 만지기」, 『노동사회 2003년 8월호, 통권78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광표(2003), 「네덜란드 노동운동 탐방기」, 『노동사회 2003년 8월호, 통권78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윤영모(2004), 「네덜란드 사회협약 체결, 임금동결? 사회보장제도 개혁!」, 『노동사회 2004년 1월호 통권83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병천(2003), 「연금제도와 개혁의 비교자본주의론」,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 연금개혁의 비교자본주의론』, 아연출판사
이상훈(2004), 「네덜란드형 대타협, 그 기적과 환상」,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주진우(1999),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의 특징과 한국에의 시사점」, 『노동사회 1999년 3월호, 통권 31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전창환(2003), 「네덜란드 모델과 네덜란드 기업연금제도」,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 연금개혁의 비교자본주의론』, 아연출판사,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최병천(2003), 「네덜란드 모델의 진짜 핵심 : ‘획기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비정규직의 ‘차별철폐’」, 『월간 말 8월호』,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황기돈(2001), 「네덜란드의 일자리 나누기정책과 정책적 시사점」, 『노동교육 31호, 32호』, 한국노동교육원
황기돈(1998), 『적극적 복지를 통한 노동시장 유연화, 네덜란드의 사회경제 개혁』, 한국노동연구원
‘스웨덴 모델’에 관한 참고 자료
고세훈(1996), 「서구 복지체계의 변화와 정당-노조관계 : 영국과 스웨덴」, 『고려대학교 EU 연구센터 제4회 학술세미나 : 유럽과 한국의 민주화 비교』
이병천 외 역(1993),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 - 스웨덴』, 백산서당
이헌근(1999), 『'제3의길'로서의 스웨덴 정치』, 부산대학교 출판부
조영철(1997), 『스웨덴 복지국가모형의 위기와 변화』, 국회 입법조사분석실,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신정완(2004),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경험이 한국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주는 함의」, 한국사회경제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신정완(2000a),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의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1980년대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경제ㆍ사회정책의 변모를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 연구』, 창간호.
사회적 코포타리즘?
하이에나새끼 / 진보넷 블로그 / 2004년 09월 17일 03:11
지난번 박승욱씨의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후로 프레시안 에서는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부장인 최병천 씨가 '거시적 코포타리즘' 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가 말하는 거시적 코포타리즘이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하향조정하는 결과만을 불러올것이라 판단하며 그가 제시한 네덜란드와 스웨덴 모델을 통해 그러한 '합의' 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하려고 한다.
최병천씨는 현재의 노동운동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100인 미만 사업장' 의 노동자, 다시 말해서 조직되지 못한 89% 의 노동자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들이 참여하고 그 이해관계를 반영할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해법으로 거시적 코포타리즘, 즉 개별 사업장이나 연맹 단위가 아니라 '포괄적인 협상', 즉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 를 대안으로 말하고있다.
그러나 그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하향평준화 시켜 '노동자들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 을 완화시키는 역활만을 수행할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수 없다. 계급적 대표성은 다같이 못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얻어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주장하는 사회적 코포타리즘은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스웨덴식 , 혹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양보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복지정책의 향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환상으로 바라보는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상황은 '모든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웨덴에서 배우자고 한다. 스웨덴이 낮은 실업률,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좋은 복지제도 등을 성취했었던 것은 사실이며, 사민당이 매우 오랫동안 스웨덴의 지배정권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사민당은 1938년에 노동조합과 사용자 연합이 파업 금지등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살쯔요바덴' 협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1947년에 사민당은 '연대임금정책' 을 추진하는데, 금속노조의 숙련 노동자들이 양보해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으' 라는 것이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 의 골자였다.
당연히 금속노조의 노조원들은 이에 맞서 싸웠고 금속노조가 탈퇴하면서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도 파행을 겪었다.
스웨덴 모델이 높이 평가받는 것에는 시장을 규제하고 인간의 복지나 사회적 가치·연대 등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모델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하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웨덴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것은 전후 호황기에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조건, 당시 서유럽보다 더 큰 규모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 즉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을 때만 가능했었던 일이며 일시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세계적 호황과,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의 길을 택하면서 세계 대전의 피해와 전후 군사비 지출 부담을 줄여, 경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자본주의발전사 - 노동전선기획단회의
<전 체 목 차>
1.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내며
2. 자본주의 사회와 공황
3. 자본주의, 위기 극복과 모순 심화의 역사
(1) 자본주의는 어떻게 성립되었나?
(2) 독점자본주의 형성과 제국주의
(3) 국가독점자본주의 형성과 제2차 세계대전
(4) 전후 자본주의의 부활 ―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
(5) 1970년대 위기 ―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다극화시대
(6) 신자유주의 시대
4. 자본주의 위기를 둘러싼 논쟁
5. 노동자와 민중은 경제위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현대자본주의발전사(1)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내며
노동전선 기획단회의
역시 경제위기의 영향력은 메가톤급이라 온나라를 덮쳤던 수해보다 더 극심하게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진영을 강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정도 도움의 손길도 없다. 이제 노동자와 민중은 스스로를 도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현대자동차 자본가는 계급적 직관을 가지고 단 한 명이라도 '정리해고'하기 위해 버텼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다. 자본가들은 여기에 더 보태어 한 목소리를 낸다. 노동조합이 버티는 바람에 손실이 컸다고, 이렇게 고용조정을 마음대로 못해서야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나 노동진영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용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아무튼 우리나라가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는게 우선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위의 주장을 적나라하게 하지는 않지만 "원칙과 현실은 다르다"면서 현실가능한 요구를 들이밀자고 하는데, 그 요구란 것은 보통 노동자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상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되면 자본가들은 그 요구를 일부 수용해서 조직된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어느정도 보장하면서 그렇지 않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담시키게 된다. 그래서 결국 사회적 총량으로 보면 노동자들의 고통의 크기는 커지기만 한다.
'경제위기만 극복되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을 갖고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럴 경우에는 '꿈 깨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 논리는 결국 노동자들이 기껏 쌓아올린 권리를 위기 때마다 다시 허물어뜨리는 시지프스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경제위기가 일시적이며, 노동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극복 가능하고, 또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그 때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 힘이 생기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착각이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일시적이지도 않고, 허리띠를 졸라매서 극복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자본의 구조조정은 노동자의 권리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힘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을 가능성은 없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이제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도 지불유예 선언을 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위기는 이제 동유럽을 거쳐 곧 남미로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위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자본주의 전 과정에 걸쳐 계속되어 왔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가지 대안을 만들어왔으나, 그것은 한편으로 위기를 심화시켜왔을 뿐이다.
게다가 최근에 득세하고 있는 초국적 금융자본은 자본가들도 불안해할 만큼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한층 심화시키고 있는데,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들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처럼,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달려가지만 결국 넘어지고 말 것이다.
왜 이런 위기가 발생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위기의 극복 대안도 경쟁력 강화나 허리띠 졸라매기, 고통 전담에 있지 않고 자본주의 극복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야 눈에 잡히는 대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며,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계급적인 관점에 입각하기 위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발현하는 과정을 지켜보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계급적 관점이야말로 현실적 관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모순은 어떻게 심화되어 왔는지, 자본주의는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왔는지, 그 시도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극복하면서도 다시 심화시켜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기획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계급적 관점을 갖는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현대자본주의 발전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본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한 기본설명이 있어야 현실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동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공황이란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공황이라는 폭발적 계기를 통해 드러나는지 그 매카니즘을 살펴본다.
그리고나서 현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자본주의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개의 시기로 나누어보려고 한다. "모든 구멍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자본을 창출하고 노동자계급을 창출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민중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과정을 수반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성장하고, 자본주의는 자신의 원리에 따라 경쟁해가면서 모순을 발현시킨다. 자본주의 발생 이후 독점의 진전과 제국주의화, 그리고 제1, 2차 세계대전, 공황과 전후 황금기(케인즈주의와 사민주의의 결합기), 그리고 1970년대 이후의 위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과정을 차근히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경제위기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나타난 여러가지 논쟁점을 소개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진보진영의 논쟁, 그리고 진보진영 내부의 여러 논쟁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에서 비롯했는지, 그리고 초국적 금융자본과 초국적 기업의 움직임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를 판단한다. 그 마지막은 어디에서부터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인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 노동자계급은 모름지기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움직여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은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노동자계급의 위치에서 행동하는 것임을. 그래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은 노동자계급의 힘과 의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움이 된다. 그래서 위기의 극복 대안도 경쟁력 강화나 허리띠 졸라매기, 고통 전담에 있지 않고 자본주의 극복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야 눈에 잡히는 대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며,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계급적인 관점에 입각하기 위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발현하는 과정을 지켜보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계급적 관점이야말로 현실적 관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모순은 어떻게 심화되어 왔는지, 자본주의는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왔는지, 그 시도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극복하면서도 다시 심화시켜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기획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계급적 관점을 갖는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현대자본주의 발전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본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한 기본설명이 있어야 현실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동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공황이란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공황이라는 폭발적 계기를 통해 드러나는지 그 매카니즘을 살펴본다.
그리고나서 현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자본주의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개의 시기로 나누어보려고 한다. "모든 구멍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자본을 창출하고 노동자계급을 창출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민중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과정을 수반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성장하고, 자본주의는 자신의 원리에 따라 경쟁해가면서 모순을 발현시킨다. 자본주의 발생 이후 독점의 진전과 제국주의화, 그리고 제1, 2차 세계대전, 공황과 전후 황금기(케인즈주의와 사민주의의 결합기), 그리고 1970년대 이후의 위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과정을 차근히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경제위기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나타난 여러가지 논쟁점을 소개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진보진영의 논쟁, 그리고 진보진영 내부의 여러 논쟁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에서 비롯했는지, 그리고 초국적 금융자본과 초국적 기업의 움직임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를 판단한다. 그 마지막은 어디에서부터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인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 노동자계급은 모름지기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움직여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은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노동자계급의 위치에서 행동하는 것임을. 그래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은 노동자계급의 힘과 의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대자본주의발전사(3): 자본주의는 어떻게 성립되었나?
노동전선 기획단
자본주의는 '시작'이 있었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태초부터 있었던 제도가 아니며, 따라서 영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종종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회는 진보해왔고, 자본주의 역시 그 과정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기에 그 진보의 역사를 믿는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머물지 않고 더욱 진보된 사회를 그려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다른 체제와는 다른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구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이 주인인 사회이다.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또 노동력을 사서 생산수단에 결합해 상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상품을 팔아서 다시 자본을 축적한다. 이 '자본축적'이라는 동기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품경제'가 발달해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갑돌이가 공장에 나가서 열심히 자동차를 만든다고 할 때 그는 자기가 타기 위해 그것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갑돌이에게는 그것이 자동차이든, 볼펜이든 상관이 없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갑돌이에게 일을 시키는 자본가가 타려고 그 자동차를 만들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자본가 역시 그것을 자기가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상품으로 팔기 위해 만든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쓰기 위해 물건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갑돌이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는 달랐다. 그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처럼 내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이 먹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어부가 배를 만든다면 그것이 자신이 타고 바다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와 그 전 사회가 다른 점은 '상품경제'에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물건을 만들 수 있지는 않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요하고, 공장이 필요하며, 또 토지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자본이 많이 든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산수단을 갖고 팔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취직을 해서 물건을 만드는데 이용될 뿐이다. 그래서 갑돌이는 그 할아버지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생긴 상품은 결코 갑돌이의 것이 되지 못한다. 다만 갑돌이는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그의 사장으로부터 받을 뿐이다.
다만 갑돌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처럼 토지에 묶여 있지 않다. 봉건영주가 하라는 대로 강제로 일을 하지도 않는다. 갑돌이는 자유스럽게 출퇴근하고, 선거 때도 사장과는 다른 사람에게 투표할 수 있다. 그는 회사에 나가서는 사장 앞에 약자일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는 사장과 똑같은 인격체로 대접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생산, 상품교환 관계가 인간 노동력의 상품화로까지 발전한다. 자본가는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자본주의에서 이윤은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에서 생겨난다.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력을 재생산 하는데 필요한 생활자료들의 가치가 된다. 하지만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의미가 있는데, 자신에게 필요한 생활자료의 가치 이상의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자신보다 더 많은 가치들을 충분히 생산해낼 수 있다.
자본가들은 일반적 상품 교환의 원칙에 따라 노동력 상품을 구입하는데, 그 가치에 기초한 가격을 임금으로 지불한다. 구입한 노동력 상품은 생산 과정에서 소비된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생산물 속에 자신의 노동력 가치 이상의 상품 가치를 형성해낸다. 하지만 그는 생존에 필요한 노동시간 부분에 대해서만 임금을 지급받는다. 그것을 넘는 잉여노동 시간에 생산된 가치는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고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이고, 노동자가 노동력 가치 만큼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일부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가치 이상으로 임금을 받아 축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가치만큼 돌려준다면 자본가들의 이윤증식은 불가능할 것이고, 노동자들이 모두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지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를 만들어내어서 그들이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들의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전유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증식해나간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더 늘리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리거나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또 생산수단을 발전시켜서 일정한 양의 생산물을 만드는데 드는 노동시간을 더욱 축소한다.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일이야말로 계급사회로서의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본질이지만, 이 계급대립과 착취의 본질은 노동력 상품의 매매가 상품 교환의 일반적 원칙에 따라 행해진다는 형식적 합리성의 외관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2. 자본주의로의 이행
우리는 조선시대 말기에 자본주의 싹이 트고 있었건 아니건 간에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이식당했다. 독점자본주의 국가간의 식민지 경쟁으로 세계가 자본주의화하는 과정에서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펴보려면 우리나라와 같이 외부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가 아닌, 자생적으로 자본주의화한 나라를 대상으로 고찰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생형태는 저마다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의 모습을 일반화해서 살펴본다.
1) 봉건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 본원적 축적
자본주의 이전의 사람들은 자기 토지와 자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기 가족의 노동력으로 생산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은 이들 봉건농민에게서 생산수단, 특히 토지를 빼앗아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자연적 결합'을 파괴한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빼앗긴 노동력을 임노동자로 전환시키며,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이 장악해서 임노동 착취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생겨나려면 농민에게서 토지를 빼앗아야 하고, 이로 인해서 분해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자본'과 '임노동력'으로 만들어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통일시켜야 한다. 이 과정을 일컬어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이라고 한다.
본원적 축적 과정은 봉건제 하에서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가능했던 것인데, 생산력 발달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축적, 이런 잉여생산물을 사고 파는 상품 경제의 발달,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화폐경제의 발달, 그리고 화폐를 얻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출발한다.
노동자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은 토지를 가지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토지를 빼앗기는 데서 시작한다. 농민에게서 토지를 수탈하는 과정은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자본가들은 농민들이 확보하고 있었던 토지보유권을 빼앗아 그 토지를 자신의 사유지로 선언하고, 농민들을 땅에서 마구잡이로 쫓아내었다. 14세기 후반에 시작된 1차 엔클로저 운동은 '양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프랑드르 지방의 양모공업 발전과 가격 등귀에 자극을 받아 농촌에서는 봉건영주들이 양 목장을 만들기 위해 농민들의 공동지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이 바람에 쫓겨난 농민들은 외부의 토지로 이주를 하든가 도시에서 빈털털이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토아스 모어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영국의 양은 원래 조금밖에 먹지 못했지만 이제는 매우 대식가가 되고 난폭해졌으며 인간까지 먹으려 든다.……국내에서 가장 질이 좋고 값이 비싼 양모가 산출되는 지방에서는 어디를 가나 귀족이나 신사층, 더우기 승려까지 경작을 위한 땅은 조금도 남겨 놓지 않았다"
엔클로저 운동은 1차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18세기 중엽의 2차 엔클로저 운동은 지주들이 땅을 근대적 대규모 농업용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 '물권'과 같은 토지 보유권을 갖고 있었던 봉건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완전히 빼앗긴 채 말 그대로 무산자가 되어서 임노동자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산자들이 흘러넘친다고 해서 그들이 바로 임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임노동자가 되려면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경영이 발달해야 한다. 봉건제 하에서 무산자들이 할 일은 빌어먹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경영에서는 무산자들이 오히려 생산의 주역이 된다.
봉건제 말기 영국에서는 농촌의 국지적 시장권이 발달함에 따라 재산을 모아 부유해져서 땅을 모아 지주가 되는 사람도 생기고(근대적 지주), 지주와 봉건영주로부터 땅을 빌려 땅이 없거나 적은 농업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사를 짓는 자본가적 차지농(농업자본가)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공업에서도 모직공업을 중심으로 16세기부터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가 전개된다. 이들이 시민계급(부르주아)을 이루게 되는데, 이들은 영국의 국제적 우위에 기초한 식민지 착취 및 국내적 보호정책(소위 중상주의 정책)의 원조 아래 발전하여 18세기 후반부터 공장제 공업으로 약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가 마련되고, 이제 축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과정은 2차 엔클로저 운동의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땅에서 분리된 노동력은 자본에 고용된 임노동력으로 전환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햇빛을 받으며 자신의 생산수단으로 자유롭게 노동하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남녀노소가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14시간 이상의 지옥같은 노동을 하는 공장생활에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공장노동은 천한 것이었고, 농민들은 비록 땅에서 쫓겨났지만 그런 노동형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기도했던 것이다.
이런 노동력을 공장의 임노동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강제'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고 무서운 강제가. 그래서 소위 구빈법(poor law)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말은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이 법으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가 잡힌 사람을 본보기로 사형을 시키거나, 귀를 자르거나 고문을 하고, 낙인을 찍었으며, 강제 수용소에 들여보냈다. {장발쟝}을 읽어본 사람이면 기억할 것이다. 단지 빵 하나를 훔친 죄로 3년간이나 강제 노역을 하게 한 것은 그당시 구빈법이 얼마나 끔찍한 법이었는지 알게 한다. 강제수용소와 감옥이야말로 농민들을 노동자로 훈련시키는 좋은 곳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일정한 시간에 맞춰 일을 하게 하고, 규율에 길들여지도록 만드는 혹독한 과정을 배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따사롭고 인정 많던, 그리고 자유롭게 노동하고 신앙심 깊던 봉건 농민들은 '근대적 노동자계급'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는 그 탄생에서부터 모든 구멍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그만큼 비참함을 동반하면서 만들어져왔던 것이다.
땅을 수탈당하고, 가혹하게 훈련된 임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피 위에서 착취의 준비를 마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는 이제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무대에 오른다.
2) 절대왕정(16세기-18세기)의 형성과 시민혁명
부르주아가 진정하게 역사의 주인이 되려면 정치권력을 잡아야 한다. 자본주의를 유지·온존시키는 정치권력이 없다면 결코 그들의 지배는 계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봉건제의 지배계급인 봉건영주들은 자신의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그런 봉건영주와 부르주아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한판승부는 필연적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필연적으로 봉건제를 누르고 승리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오랜 싸움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결국 부르주아는 봉건영주들을 누르고 권력의 주체가 되어 자본주의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부르주아의 정치권력 장악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절대왕정' 시기를 짚어보아야 한다.
봉건제에서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 때는 '민족국가'라는 개념도 없었다. 유럽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었고, 각 나라의 왕은 실질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당시 수공업생산물이나 원격지 상품을 판매하던 도시의 상인들이 이제 조금씩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도시들은 스스로 무장을 해서 봉건영주로부터 독립하고, 자체적으로 힘을 키워나갔다. 반면 농민들은 봉건영주의 착취에 대항하여 투쟁을 해왔다.
화폐지대의 도입은 봉건영주의 권력을 후퇴시켰고, 농민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농업도 한층 발달하고, 농민들은 봉건적 속박에서 차츰 자유로와졌다. 그러나 봉건영주는 농민들이 자유를 확대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억누르려고 했다. 농민들은 이에 맞서서 봉건영주를 적으로 하는 전쟁을 벌였고, 대표적인 것이 1525년에 있었던 독일의 '농민전쟁'이다. 그러나 도시민들은 봉건영주의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 편에 서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가 루터도 농민들을 억압하는 글을 썼다. 결국 이 전쟁에서 봉건영주들은 승리했다.
이처럼 농민들의 힘은 차츰 자라났고, 봉건영주들은 이렇게 자라나는 농민들을 억압하기 위해 '왕'을 상징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힘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상인들의 경우 상업독점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영주들의 힘에 대항해서 더 많은 부를 늘리거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보호막이 필요했다. 또 상인들은 전 국토를 통일하여 통행세가 없이도 자유롭게 왕래하기를 바랬으며 화폐가 통일되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절대적인 왕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라나는 농민들의 힘에 대응하기 위해 봉건영주들이 후원하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상인들이 왕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15, 16세기가 되면 이런 왕의 권력은 아주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절대왕정은 이처럼 무너져가는 봉건제국의 마지막 권력으로서 봉건영주들과 자라나는 반봉건세력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었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절대왕정은 자본축적의 기틀을 마련했다. 절대왕정의 출발에서도 그랬지만 이후의 진행에서도 상인들은 절대적인 힘이었다. 절대왕정은 왕의 군대를 유지하고 관리들을 부리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의 충당은 당연 상인들의 몫이었는데 상인들은 국내에서는 금과 은의 확보에 한계를 느끼고 해외 식민지로 눈을 돌린다. 그래서 국가는 상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국가 최대의 목표인 '국부(國富)'는 국가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으로 규정된다'는 원칙에 따라 중상주의 정책을 편 것이다. 상인들은 절대왕정의 비호 아래 식민지 지배를 전제로 상인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절대왕정의 중상주의 정책은 모직물 수출을 강화시켜 이것이 엔클로저 운동으로 연결되어 임노동자를 창출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업자본이 농업자본으로 투자되어 농민층의 분열을 가속화했고, 상업자본이 소생산자들과 결탁하여 후에 자본주의로의 발전에 핵심인 산업자본의 창출을 도왔다.
이처럼 절대왕정은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 역할을 충분히 함으로써 스스로 창출한 산업자본가에 의해 무너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시민혁명'이다. 부르주아는 봉건영주들과의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하게 반봉건혁명을 수행하기를 원했다. 이 목표는 부패와 사치로 점철되어 있었던 절대왕정 타도 투쟁으로 자리잡혔다.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통해 중상주의 지주였던 절대왕정을 타도함에 따라 영국의회를 장악한 시민계급(부르주아)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민계급은 상인을 위해 봉사하던 각종 규제가 절대왕정과 더불어 사라지자 자유무역의 기치 아래 착실히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산업자본의 축적 과정이다. 뒤이어 18세기가 되자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도 영국을 본받아 시민혁명은 불꽃처럼 퍼져나갔다. 프랑스 혁명에서 국왕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교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늦고 지방영주가 난립해 있던 독일은 프랑스군이 독일의 봉건영주를 분쇄함으로써 시민계층의 발전을 도왔다.
이 투쟁의 주요 담당자는 농민, 수공업자, 그리고 아직은 소수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시민계급의 지도 아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성과는 결코 이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부르주아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이들을 다시 속박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만 투표를 할 수 있었고,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고만 했다. 반면 노동자와 수공업자, 농민들 사이에는 급속하게 '민주주의'의 이념이 퍼져나갔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정치권력을 민중에게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었다.
민중들의 이런 투쟁에 다급해진 부르주아는 타협책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서구 자본주의의 일반적 정치형태로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결코 융합될 수 없을 것 같은 이념을 부르주아는 '대의제'를 통해 융합시켰다. 민중들의 정치를 인정하되,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민중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지 부르주아가 그냥 던져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자신의 기치로 내건 부르주아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절차적 형식'으로 만들어버리고, 내용에서는 완전한 부르주아의 지배를 실현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지배권을 완전히 확립하면서 절차상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지배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리잡혔다.
3)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전 - 산업혁명
자본주의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업혁명'이다. 자본과 임노동층의 생성, 그리고 부르주아의 권력 장악 등 자본주의의 특성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산업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완전한 '자본주의'로 갖춰지게 된 셈이다.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의 위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마와 면의 혼직 직물업이 대두되면서 면직업 중심으로 먼저 변화가 일어난다. 면직업은 방추 8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니(Jenny) 방적기'의 발명에서 시작하여 방적기가 대형화하면서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를 이룩한다. '제니 방적기'의 도입에 따른 생산력 증대는 국민경제 전체제를 뿌리로부터 뒤흔든다. 제니를 도입한 소생산자와 그렇지 않은 생산자 간에 격차를 불러일으켜 한축은 산업자본가로 성장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다른 쪽은 산업노동자로 전락하는 소생산자층의 양극분해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방적기의 발명이 계속되어 1790년대에 이르면 와트의 증기기관을 이용한 '뮬 방적기'가 만들어진다. 뮬 방적기를 가동하는 공장들은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 대규모 공장으로 발전하여 공장제도를 확립시켰고, 공장의 도시 집중을 초래한다. 또 동력의 사용은 기계체제를 성립시켜 노동자는 기계체제에 편입되고, 전 노동과정이 협업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또한 1811년에는 뮬 방적기가 전 영국 방추수의 90%를 점하게 됨으로써 제니 방적기에 의존하고 있던 소생산자층을 남김없이 분해시켜 버린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그들에게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죽은 기구인 기계에 대하여 살아있는 부속물로 합체되고 종속되기에 이르른다. 이상과 같은 면직업에서의 생산양식의 변화는 다른 산업부문에서도 변혁을 일으키는 선도적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영국은 선진자본주의로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공업혁명과 병행해서 18세기와 19세기 중엽에 걸쳐 진행된 농업혁명에 대해서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서 영국은 증대하는 공업인구를 먹이기 위해 곡물수입을 늘렸다. 이에 즈음하여 농업의 기술적 개량과 보급에 전력을 다했고 노우포크 농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농업기술체계가 실현되었다. 이 노우포크 농법은 비료의 대량 사용, 합리적인 사륜작 체계, 마차의 사용, 가축 축사와 사육의 유기적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삼포제도에 근거한 경지의 공동 이용 및 공동 방목을 특징으로 하는 경지제도와는 모순되는 것이다. 그래서 삼포제의 폐기가 요구되고, 이 방법을 실현하고자 대농이나 차지농이 주체가 되어 대규모 엔클로저 운동을 진행한다(2차 엔클로저 운동). 이 운동은 의회의 청원과 그 허가에 기초해서 국가권력의 도움을 얻어 행해졌다. 농업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했던 2차 엔클로저 운동은 농업에서 자본제적 요소를 탄생시킨다. 실시 과정에서 거액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대부분의 농민은 몰락하고 농업경영과 토지소유가 분리되어 지주―자본가적 차지농―농업노동자라는 근대적 소유관계가 확립된다.
이처럼 산업혁명은 자본의 형성, 임노동자의 형성, 부르주아의 정치권력의 장악 과정과 맞물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사회의 주도적인 생산양식으로 만들어놓았다.
앞에서 자본주의는 '진보'의 역사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고 했다.
정말로 자본주의는 진보한 체제이다. 자본주의의 진보는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으로 표현되며, 한편으로는 모든 민중들의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다. 비록 그것이 형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 진보를 이끈 부르주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냈다.
한마디로 해서 부르주아는 자신의 모습을 닮은 세계를 창조한다.
부르주아는 농촌을 도회지의 주도권 하에 종속시켰다. 그는 거대한 도시들을 창출하였으며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의 수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그리하여 우매한 농촌생활로부터 상당수의 인구를 구출하였다. 그는 농촌이 도회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마찬가지로 야만국가나 반야만국가가 문명국가에, 농민이 부르주아지에, 그리고 동양이 서양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의 분산과 소유권의 분산, 그리고 인구의 분산을 계속해서 제거하였다. 그는 인구를 밀집시키고 생산수단을 집중하였으며 재산을 소수의 손에 집적하였다. 이것의 필연적 결과는 정치의 집중이었다. 대체로 느슨한 연방제 하에서 상이한 이해관계, 법률, 정부 그리고 조세체계를 가지고 있던 독립된 영방들이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부, 하나의 국가적 계급 이해, 하나의 관세로 압축되었다.
부르주아는 겨우 백년밖에 되지 않은 상층계급으로서의 지배를 통해서,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달성한 것보다 더 육중하고 거대한 생산력을 창출하였다. 자연력의 정복, 기계, 공업 및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증기선 항해, 철도, 전신, 지구표면의 방대한 지역의 개간, 운하공사, 땅으로부터 많은 인구의 호출 등과 같은 이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태내에 잠들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 세기에는 꿈이나 꾸었겠는가?
우리는 지금 그보다 더 발달한 상황을 목도한다. 부르주아는 이제 전세계를 단일한 시장으로 통합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서 국가의 장벽을 없앤다. 발전된 정보통신 수단은 전세계 시장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이런 통합은 영토의 통합, 주권의 통합으로까지 이어져 유럽은 통합을 준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신체 정복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라는 동기가 제공한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성과이다. 그러기에 자본주의는 참으로 진보한 사회이며, 이러한 진보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자본주의가 더욱 성숙하면 스스로 이런 진보 자체를 가로막게 된다. 그 모순이 표현된 것이 지난 달에 이야기했던 '공황'이다. 이제 역사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3.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팔 자를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세계는 완전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되었다. 자본가는 이제 세계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한가지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태내에 자신의 무덤을 팔 자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앞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거니와 초기의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임금수준을 낮추었고, 여자와 아이들을 고용했다. 노동시간은 한없이 길었고, 노동자를 위한 문화적 배려는 손톱만큼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 비참함의 단면을 잠깐만 들여다보자.
1835년 영국 면직물 공업의 고용상태
* 여기에서 소년은 13세부터 18세까지
(A reduction of hours, an increase of wages, A documentary history of American industrial society)
의학아카데미 회원인 비에르메는 그당시 프랑스 노동자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들이 매일 아침이면 도시로 흘러들어와서 저녁이 되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 다수는 부인들로서 그들은 창백하고 굶주리고 진흙 속에서도 맨발 상태였으며, 부인들보다 좀 더 많은 수의 어린애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더럽고 여위었으며, 직기 옆에서 일을 할 때 기름을 덮어 써 두터워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G.D.H.Cole, Studies in class structure, London, 1955)
많은 아이들이 노동을 했는데, 부모들은 자기 자신들이 낮은 임금을 받는데다 또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위협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애들을 일터로 보냈다. 아이들 역시 생계의 반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하루 14시간이 넘도록 일을 했다. 이런 아동노동에 대해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에 대해 자본가들이 어떻게 반박했는지 들어보라.
"일할 만한 충분한 힘도 없고 만족할만큼의 일감을 찾지 못한 부모들이 지금도 여전히 많이 있다. 그들을 위해 애들이 생계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부모들로부터 자기 애들의 노동능력을 사용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또한 밥벌이 할 사람이 전혀 없는 가족이나,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힘으로 부양하기 불가능한 애들밖에 없는 과부도 많이 있다. 그 과부에게 "당신은 애들을 공장에 보내서도 안되며 애들이 일해서 당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만일 국가가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국가는 또한 실업자에게 일감을 주고 또 일할 수 없는 자를 도울 의무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국가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The economic status of the New York Cith negroes 1850-1863)
저임금의 아동노동을 통해 성인 남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초과착취하면서 늘어놓는 자본가들의 궤변은 단지 초기의 자본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또한 선배 노동자들은 한없이 긴 노동시간 속에서 초과착취를 당하며 자신을 위한 시간을 전혀 갖지 못했다.
공장감독관인 산더스의 부인노동에 관한 1844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 노동자 중에는 며칠을 제외한 수 주간 동안 계속해서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식사시간을 포함하여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기 때문에, 주당 5일동안은 집에 오가거나 침대에서 휴식하기 위한 시간을 6시간밖에 갖기 못하는 부인들이 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이 객관적인 증거로 우리 앞에 있는데, 누가 도대체 자본 축적이 자본가들의 근면의 결과라고 주장하는가!
그러나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했을지라도 선배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계급'으로 여겼고, 투쟁을 통해 그 의식을 단련했다.
노동자들은 엄격한 노동규율 하에서 공통된 노동을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처지를 철저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 간의 경쟁은 노동자 서로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생산조건과 그에 따른 전반적인 생활 상태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계급으로 스스로를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계급의식'으로 발전하려면 조직되어야 하고, 새로운 사회의 성격과 그 원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미래의 전망을 공유하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배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루어나갔다. 노동조합, 공제조합이나 협동조합, 노동계급기구, 신문, 선동을 통해서였다.
여기에서 자본주의 초기 선배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8세기 말 노동조합은 지방동업자모임이라는 형태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초기의 지방동업자모임은 대부분 사교적 성격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모임은 1792년부터 새로운 공장노동자 중심 부문인 랭카셔 면방적공들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교적 성격을 벗어나 노동자들의 '조직'이 되기 시작했다. 1799∼1800년 영국의회에서 악명 높은 결사금지법을 서둘러 통과시킨 것은 이러한 조직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과 1871년 사이에 있었던 혁명의 시기에 비밀결사나 공제조합, 직인조합과 같은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투쟁도 계속되었는데, 초기에는 조직되지 않은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811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 즉 기계의 도입으로 일을 빼앗긴 수공직인들이 들고 일어났던 투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즉자적인 투쟁은 노동자들의 조직이 활발해지면서 곧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가장 많이 고용되어 있던 여성들도 투쟁에 동참했다. 1836년 로웰에서의 파업은 여성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1806년에서 1815년 사이에 필라델피아, 뉴욕, 발티모어, 피츠버그의 제화공들은 여섯번이나 법정에 소환되었으며 '범죄적 공모'라는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모든 투쟁에는 현재 세계에 대한 혐오와 적극적인 수단 및 자신의 힘에 의해 지상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욕구가 들어있다. 이전의 피지배계급과는 완전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투쟁은 정치적인 운동으로도 발전했고, 정치적인 운동과 경제적인 운동은 상호 결합되었다.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과정에서 있었던 1939년 8월 5일 집회에서는 총파업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영국에서는 1848년에 10시간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1789년과 1871년 사이에 정치적인 조직을 활발하게 결성했다. 그리고 {노동자 잡지} {인민} {수공업자} 등과 생시몽의 {지구}, 푸리에의 {신세계}, 카베의 {민중} 등 실로 많은 노동자 잡지가 발행되었다. 이런 조직과 선동에 힘입어 1832년 6월과 1834년에 파리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고, 1831년과 1834년에는 리용노동자의 반란이 있었다. 1839년 블랑키주의자의 투쟁, 1833년과 1845년의 파리의 목수와 가구장인에 의한 파업, 1846년 광부파업도 큰 투쟁에 속한다. 이들은 이 투쟁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를 옹호했다.
이 투쟁의 절정은 1871년의 '파리코뮌'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내부의 모순을 대외정책으로 해소하려고 하였고 그것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나타났다. 이 전쟁 결과 프랑스가 패배하자, 파리 민중이 떨쳐 일어나 보나파르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공화파와 왕당파는 파리의 노동자가 봉기할 것을 우려하여 각 지구의 무장해제를 시도했다. 파리 민중들은 이에 봉기하여 '국민군 중앙위원회'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임시 권력기관으로 '코뮌 평의회'를 선출하고 노동자 권력을 세웠다. 대표적인 강령을 보면, 상비군을 폐지하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하는 것, 시의 각 국에서 코뮌 의원을 보통선거로 선출하여 시민에게 책임을 지고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시의원들로 구성되는 것, 코뮌은 행정부인 동시에 입법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 코뮌 임금 수준을 노동자의 임금수준과 비슷하게 조정하는 것 등이다. 이처럼 코뮌은 이전의 정치형태를 대신하여 노동자계급의 자기 지배력을 확립하고자 했다.
코뮌은 경험 부족과 노동자정부에 두려움을 느낀 세계 자본가들의 공동전선에 의해 72일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계급은 성숙된 의식을 갖추고 정치투쟁의 경험을 한 것이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자계급은 숫자가 증가하고 더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성장하고, 그 힘을 자각하게 된다. 노동자들이 자신을 노동자계급으로 자각하고 스스로를 조직할 때, 그리고 투쟁할 때 진정한 '노동자계급'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의 승리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최후의 승리자는 조직된 노동자계급이 될 것이다.
마치며
자본주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항구불변한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봉건제의 산물이었듯이 우리는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보다 발전하고 만인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의 꿈을 꿀 수 있다. 아니 그 꿈을 실현시켜야 한다.
둘째, 자본의 축적은 결코 검소함의 산물도 아니고, 신의 은총도 아니며 오로지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혹독한 억압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계속된 축적은 노동자에 대한 엄청난 수탈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 어떤 찬양도 이러한 수탈을 가리지는 못한다.
셋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일화는 자본가들의 정치권력 장악과 결합되어 있다. 부르주아의 정치권력 장악 과정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권력을 독점했다. 그동안의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는 이런 권력독점에 대항해서 투쟁한 역사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권력이며, 우리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할 때에는 새로운 주체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 필수적임을 인식해야 한다.
넷째, 자본주의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생산력의 무한 확장을 이루었다. 생산력의 확대는 전세계 민중들의 풍요를 가능하게 할 정도이지만 결코 그 생산력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오히려 '공황'을 통해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다. 전세계 민중의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한 생산력의 확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진보를 가로막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극복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자본주의의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는 스스로를 '계급'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투쟁 속에서 새 사회의 전망을 구체화한다. "투쟁의 과정에서 잃는 것은 쇠사슬이요얻는 것은 전세계"인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암울한 자본주의 전망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현대자본주의발전사 (4): 독점자본주의 형성과 제국주의
노동전선 기획단
자본주의가 세계화하면서 이제 자본주의는 완전하게 승리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커다란 결함을 안고 있었으니, 그 결함의 폭발이 바로 공황이다. 자본주의는 초기부터 많은 공황을 겪어왔다. 여기에서는 자본주의가 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독점으로 전환하고, 그것이 제국주의 쟁탈전인 세계대전을 낳게 되는 경과를 살펴볼 것이다. 이 기간은 대략 1875년에서 1918년까지의 기간인데, 흔히 제국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는 우리에게도 고통스러운 역사로 기록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로 착취당하던 우리 선친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 혁명의 시대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하는 각국 민중들의 투쟁이 피의 흔적으로 남아있으며, 또는 영광의 상처로 남아있다.
이제 그 흔적을 찾아 떠나기로 하자.
Ⅰ. 독점과 제국주의에 대하여
1. 독점이란?
(1) 자본의 축적
자본은 가치의 유일한 창조자인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노동의 산물인 잉여가치, 즉 잉여생산물을 획득하여 자신의 부를 쌓아간다. 또한 이 쌓여진 잉여가치의 일부를 생산과정에 다시 투자하여 잉여가치를 더욱 많이 남기고자 한다. 이처럼 자본은 생산의 확대를 위하여 잉여가치의 일부를 남겨서 다음 생산과정에 추가로 투하해서 자본의 투자분을 더욱 높이는데, 이것을 자본의 축적이라 한다.
자본축적은 필연적으로 생산규모의 확대를 낳게 되며, 또한 생산규모의 확대로 인해 기업간의 경쟁은 더욱 격화된다. 자본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해당기업은 생산기술을 향상시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고, 상품의 원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에 상품을 시장가격 이하로 판매해도 초과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한 자본이 다른 자본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를 유지하게 되며, 그 자본은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축적은 집적과 집중을 통해서 더욱 확대된다. 자본의 집적이란 개별자본이 잉여가치의 축적을 통해 그 총액을 증가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과정은 개별 자본의 근면함의 산물은 아니다. 노동을 최대한 착취하고, 다른 곳에서 자본을 끌어다댐으로써 집적을 한다. 자본의 집중이란 몇 개의 비교적 작은 자본을 합병하여 하나의 큰 자본으로 만드는 것이다. 합병은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삼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온갖 협잡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초기에는 집중의 형태가 소자본간의 결합, 합병을 통한 대기업화로 나타나지만 독점이 발전하면서는 대기업간의 합병이 비일비재한 일이 된다.
집적과 집중을 통해 만들어진 큰 자본, 대기업은 기계사용을 통해 분업과 전문화를 실행할 수 있으며, 설비이용율을 극대화해 절약과 절감의 효과까지도 보게 된다. 또한 대기업은 생산조건, 판매조건 등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며 은행의 대부도 유리하여 그 독점적 지위를 확고히 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독점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2) 독점을 가속화하는 주식회사제도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기업은 거대한 자본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자본은 이제 더 이상 개별 기업에서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커진다. 이에 따라 자금을 사회적으로 집중시켜 조달하는 주식회사제도가 도입된다. 주식회사제도는 19세기 초부터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였던 영국보다도 오히려 19세기 중반부터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진 독일이나 영국에서 선을 보였다.
주식회사제도는 그 기업에 필요한 자본을 다수의 주식으로 분할하여 그것을 증권시장에 매각함으로써 자금을 획득하여 기업의 경영을 도모하는 형태이다. 이렇게 하여 거대한 고정자본을 필요로 하는 산업에서도 개인적 기업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생산과정의 거대한 기계화ㆍ근대화ㆍ고도화가 추진될 수 있었으며 생산력은 한층 발전하였다. 은행대출의 경우 상환기간이 있어 그 기한에 갚지 않으면 안되지만, 주식발행에 의해 조달된 자금은 상환할 필요가 없는 무기한의 채무이기 때문에, 고정자본을 대규모로 필요로 하는 중화학공업에서 주식회사가 발달하게 된다. 주식회사제도를 통해 사회적 자금의 획득과 이용은 이전 자본주의 단계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며 생산력의 확대ㆍ자본의 집중이 촉진된다. 여기서 주식회사는 산업자본의 고정자본 필요액이 크게 상승하고 또한 신용제도가 발달한 시기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주식회사제도는 자본과 생산의 집중을 실질적인 소유권(=지배권)의 집중으로 만든다. 예를 들면, 섬유공업에 10개의 주식회사(주식발행액은 각각 1천 원이라고 가정한다)가 활동하고 있으며, 주식발행액의 30%만 소유하면 주주총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각 회사의 주식발행액의 30%인 합계 3천 원을 소유한 대주주는 10개 회사(주식발행액 합계 1만 원)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10개 회사의 자본과 생산을 자기의 지배, 통제 아래 둘 수 있게 되고, 하나의 운영방침에 따라 독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우리사주 제도나 소액주주 운동을 통해서 소유권자의 전횡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식회사제도는 자본의 집중을 위한 제도이며, 일부 주식소유자들이 소유권을 독점하도록 되어 있다. 주식회사제도는 본질적으로 독점자본주의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제도인 것이다.
주식회사제도의 성립ㆍ발전에 따라 대기업은 경쟁기업 주식의 매점을 통해서도 자본과 생산의 집중을 촉진하게 된다. 자본의 집중은 자본주의 단계에서도 간간히 나타났지만 생산력의 발전과 주식회사제도의 보급으로 각 자본에 의한 자본과 생산의 집중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흡수ㆍ합병되거나 대기업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은행에 의해 촉진되기도 했다.
(3) 독점의 동반자 금융자본
독점을 촉진하는 요소에는 주식회사제도 이외에 은행의 역할도 있다. 은행은 대부자본의 수요와 공급을 매개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은행자본은 산업자본에게 화폐자본을 공급하여 잉여가치의 일부를 나눠받는다. 그러나 은행업의 발전, 즉 화폐소득의 증가, 은행망의 확대, 거대은행의 형성 등 속도가 가속화되면서 은행은 중개 역할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산업계의 생산자본의 집적ㆍ집중과 함께 은행업에 있어서도 자본의 집적ㆍ집중이 고도화된다. 중소은행은 거대은행에 합병ㆍ흡수ㆍ계열화되고 거대독점은행이 성립된다. 이 과정에서 은행은 나중에는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고 수익도를 결정하여 그들을 파산시키든가 또는 자본을 늘려 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독점자본으로서의 은행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규모로 지배하게 되며, 그들은 또한 서로의 경쟁에서 상대를 파산시키고 융자를 통해서 상대를 정복하며, 주식을 매점하고 자유협정의 방법과 독점적 결합의 조직으로 신용체계 내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기업이 거대화되면서 거액의 자본이 필요해지자, 기업들은 그만큼 은행의 융자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대출을 해주는 은행자본의 규모가 커질 뿐만 아니라 위험도 그만큼 큰 까닭에, 가능한 은행은 많은 기업을 끌어 들여 그 위험을 분산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은행은 기업과 기업간의 합병, 인수 즉 기업결합까지도 유도한다.
증대하는 은행의 집적, 거대은행의 결합 등은 자유경쟁 시기의 은행과 산업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은 더욱 강하게 융합되고, 생산과 자본의 집적과 그에 따른 독점의 발달을 기초로 해서 금융자본이 완성된다. 이러한 금융자본은 다종다양한 산업부분을 통제하고 지휘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산업에 대한 권력을 획득하고 지배를 행사하는 은행은 이미 단순한 은행자본이 아니라,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통일적 독점체인 금융자본의 한 기관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 은행의 '새로운 역할(활동)'이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이 언제인가라는 물음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새로운 내용ㆍ형태ㆍ기관에 의한 은행과 산업기업 사이의 연관, 달리 말해 집중적인 동시에 비집중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대은행은 1890년대 이전만 해도 전혀 특징적인 경제현상이 아니었다.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그 출발점은, 중요한 '기업활동'들이 일어나고, 은행의 산업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비집중적 조직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1897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출발은 좀 더 늦은 1900년의 공황기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황에 의해 비로소 산업 및 은행에서의 집적과정은 엄청나게 가속화·격화되고 한층 강력해졌으며, 산업과의 연관을 처음으로 대은행의 실질적인 독점으로 전화시킴으로써 훨씬 밀접하고 능동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4) 독점조직 형태
1870년대(즉 1873년 대불황) 이후 독점을 형성·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독점조직의 형태들이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독점조직의 형태는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콘쩨른이 기본 골격을 이룬다.
카르텔이란 같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이 생산물 가격, 판매시장, 생산규모, 특허권의 교환, 노동력의 고용조건 등에 관한 협정을 맺는 것을 말한다. 카르텔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우선 카르텔의 참가 기업들이 자기들의 생산물의 가격을 일정 수준에 고정시키기로 협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각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생산을 확대한다면 협정된 가격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생산량에 대한 또다른 협정, 즉 생산 카르텔을 만든다. 또한 참가 기업들 사이의 판매 조건이 다르다면, 각 기업은 협정가격, 생산량 유지에 곤란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새롭게 판매조건 카르텔을 형성하며 나중에는 시장분할 협정까지
맺게 되는 것이다. 카르텔은 해당 대기업이 협정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생산상의 문제, 사업상, 법률상으로는 독립되어 있다.
독일의 경우 카르텔의 숫자는 1896년에 약 250개였고 1905년에는 385개로 대략 1만2천 개의 기업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카르텔은 특정 산업부문 전체 생산의 70∼80%를 자신의 수중에 집적시킨다.
신디케이트는 동일 생산부문의 소수 대기업이 상품의 통일적 판매나 원료 매입에 관한 협정을 맺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는 카르텔과 달리 협정의 수준에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총사무소를 설치해서 기업의 상품판매, 원료 구입을 통일적으로 처리한다. 신디케이트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은 생산상, 법률상으로는 카르텔과 같이 독립되어 있으나 상업상에서의 독립성은 잃는다.
트러스트는 기업간 합병을 말하는데 이는 상업상 독립성이나 생산상, 법률상으로 독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철강트러스트의 경우 그 산출량은 1901년 미국 총 철강 생산고의 66.3%를, 1908년에 56.1%를 차지했으며, 철광석 산출량은 1901년과 1908년에 각각 43.9%, 46.3%를 차지했다. 이렇게 트러스트의 경우는 각기업의 독립성을 완전히 폐지하고 이것을 새로운 단일기업으로 합병하며 그들의 생산성을 대규모화한다. 이렇게 해서 트러스트는 독점의 최고 발전단계를 나타내게 된다.
콘쩨른은 하나의 대금융자본가 집단에게 공동으로 의존하고 있는 경제부문이 다른 대기업, 대회사, 은행이 연합하여 편성한 독점조직이다. 독점의 형성은 새로운 자본의 형성과 진입을 곤란하게 하는 요인들, 기존의 거대기업들 사이의 경쟁을 인위적으로 배제시키려는 결합들(독점조직의 형성과 같이), 그리고 산업자본의 독점적 결합을 추진하는 은행자본의 발달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독점적 단계'를 이루는 제국주의로 넘어가 보자.
2. 제국주의란?
17·18세기에 일어난 식민지쟁탈전쟁은 시장 확보와 원료산지 확보를 위한 유럽 열강들의 싸움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제국주의는 존재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형성 전의 제국주의와 이후의 제국주의는 그 규모와 형성 과정, 발전의 양태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주요한 특징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첫째 특징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자본축적의 심화, 곧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과정이다. 두 번째의 특징은 금융자본의 거대화와 그에 따른 지배이다. 이를 금융과두제라 하는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으로 탄생한 금융자본은 그 스스로가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며 그에 따라 전체 경제체제를 이 거대해진 금융자본이 지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독점의 심화에 따라 형성된 과잉자본을 타국에 수출하는 것, 곧 자본 수출을 특징으로 한다. 네 번째의 특징은 자본가 집단(단체)에 의한 세계분할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열강에 의한 영토적 분할을 제국주의의 그 특징으로 한다.
강대국에 의한 타국 영토의 군사적 침략이라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의 제국주의는 과거 제국주의와 형태상으로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제국주의는 그것이 독점자본의 형성,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한 금융과두제가 세계 경제를 분할 지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특징 중 첫째와 둘째의 특징은 앞의 독점에 대한 부분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세 번째의 특징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자본수출
전적으로 자유경쟁이 지배적이었던 구 자본주의의 전형은 상품의 수출이었다. 그러나 독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최근 단계의 전형은 자본 수출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유형의 독점이 형성되는데 자본주의가 발전한 모든 나라에서 자본가의 독점단체들이 형성되었으며, 자본의 축적이 엄청난 규모에 달한 소수의 극히 부유한 나라들이 독점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선진국에서는 막대한 '과잉자본'이 생겨난다.
이 과잉자본은 그 나라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후진국에 자본을 수출함으로써 이윤을 높이는데 이용된다. 일반적으로 이들 후진국에서는 자본이 희소하고 토지가격이 비교적 낮으며, 임금이 낮고, 원료가 싸기 때문에 이윤이 높다. 이것이 자본수출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자본 수출은 그것을 수입하는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그 발전을 크게 가속화시킨다. 그러므로 자본 수출이 자본 수출국의 발전을 어느정도 정체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동시에 전세계에 걸친 자본주의의 발전을 더욱 확대ㆍ심화하는 것이다.
자본 수출은 대부자본의 수출과 산업자본의 수출이라는 두가지 형태를 취한다. 대부자본의 수출은 먼저 어떤 국가의 자본가나 정부가 다른 나라에 대한 외채응모의 형태로 실현된다. 나아가 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을 다른 나라에 직접 수출함으로써 그곳에 자기 은행을 설립하거나 또는 토착은행을 종속시켜 협정을 맺든가 결합할 수도 있다. 또한 자본 수출은 비단 후진국에 국한되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가 그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자본 수출국들은 자기들끼리 세계를 분할하게 된다.
(2) 세계의 분할
- 자본가 단체들간의 세계분할
독점자본가의 단체인 카르텔ㆍ트러스트는 먼저 국내시장을 자기들끼리 분할함으로써 자기나라의 산업을 완전히 장악해 간다. 자본 수출이 늘어나고 대독점 연합체들의 대외적ㆍ식민지적 관계망과 '세력권'이 확립됨에 따라 점차 이전 단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된 단계, 국제 독점체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이들 독점체들에 의해서 세계시장은 분할된다. 이것을 자본가 단체들 간의 경제적 분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국주의적 관계들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열강에 의한 영토적 분할
제국주의의 또하나의 특질로 열강에 의한 영토적 분할을 들 수 있다. 현대는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단계' 즉 '금융자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적 식민지 정책의 독특한 시대이다. 물론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 이전에도, 아니 자본주의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노예제를 기초로 했던 로마도 식민지정책을 추구했으며 제국주의를 실시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 시기는 금융자본의 식민지정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정책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금융자본과 그 대외정책―이는 곧 세계의 경제적ㆍ정치적 분할을 위한 열강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이 국가 종속의 수많은 과도적 형태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라는 두 개의 주요 집단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금융적ㆍ외교적 종속의 그물에 갇혀있는 다양한 형태의 종속국들이 있는 것이다.
Ⅱ. 독점 형성과 제국주의 전개과정
-제1차 세계대전까지
1. 1987년 대공황과 독점의 형성
(1) 자본주의 초기부터 지속된 공황
영국을 선두로 시작된 자본주의 세계의 발달로 이제 전세계는 자본주의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나라마다 달랐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미발달한 후진국에 남는 자본을 수출하거나, 군사적 침략을 감행했다. 그런데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과잉자본 수출은 결국 공황으로 이어지곤 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어났던 공황은 과잉자본의 투기에 의한 공황이었다.
1808년 에스파니아 및 외국령 서인도제도의 문호가 영국에 개방되면서 남미 경제도 개방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영국의 자본은 과잉투기를 시작했는데, 그 결과 1811년에 공황이 한차례 있었다. 1822년의 호황을 맞이하여서는 실존하지 않은 남미의 공화국 차관이 영국에서 모집될 정도로 불건전한 투기가 성행했다. 이렇게 사기적 투기가 성행하고, 은행에서 이를 조장하면서 마침내 영국 내부에서는 자본이 궁핍한 상황을 맞게 되었고, 결국 1825년에 또다시 공황을 맞게 되었다. 영국은 1832년부터는 어느정도 상승기에 접어들었지만 36년에 또다시 공황에 직면했고, 이것은 4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의 공황이 과잉생산 공황이 아닐 수 있었던 것은 과잉자본이 주로 철도나 금광개발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는 직접적인 생산물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과, 생산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것이며, 결국 자본주의 시장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투자는 이후 과잉생산 공황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50년대에 들어서서는 공황이 성격이 달라진다. 자본주의 본래적 의미의 과잉생산 공황이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연결이 확대되어 한 국가에서의 공황은 세계 공황으로 심각하게 파급되었다. 이 때는 이미 세계 주요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확립했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급속도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이었다.
1857년에 미국에서 개시된 공황, 그리고 1866년 금생산의 증대로 인한 공황 등은 이전과는 다르게 과잉생산으로 인한 공황이었고, 이것은 세계로 파급되었다. 그런데 이 공황이 아주 큰 파괴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제국간에 교역이 활발해진 데다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국내시장이 확대되면서 수요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870년대의 공황은 달랐다. 1973년의 공황은 오스트리아에서 폭발하여 차츰 유럽 전체를 휩쓸고 런던의 거래소 공황을 야기하여 마침내 세계에 만연했다. 게다가 이 공황은 80년대 초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호경기와, 89∼90년의 극히 단기적인 호경기를 제외하고는 22년간이나 유럽의 경제를 주름지게 했다는 점에서 큰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다. 이 공황은 농업공황으로 출발했다. 이 때 이미 농업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깊숙하게 편입되어 있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농업기술이 발달했고, 이로 인해서 과잉생산은 필연적이었다. 세계는 자급자족을 할만큼의 식량생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생산물의 과잉은 농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농업인들은 급격하게 몰락해갔다. 농업인구의 구매력이 급속하게 감소하자 이것은 곧 공산품의 과잉을 초래했다. 이것이 1870년의 공황을 근 20년이 넘게 지속되도록 만든 요인이다.
영국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온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1870년대의 공황을 맞이하여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 공황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 자본은 독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 축은 영국에서 미국과 독일로 이전되었고, 산업구조 역시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국가 간의 새로운 대립과 항쟁이 시작되면서 제국주의 쟁탈전의 막이 올랐다.
(2) 독점을 가능하게 한 기술혁신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19세기 말의 대공황에서 탈출하고자 찾은 길은 기술개발이었다.
제철업에서는 이미 1850년대 말부터 1860년대에 걸쳐 등장한 '벳세머의 전로'와 지멘스의 '마르땡의 평로'에 의해서 철강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19세기 말에는 이들 장치의 보급으로 철강산업은 연철에서 강철로 교체되었다. 화학공업에서 1861년 솔베이법이 발명되고, 18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유기화학공업이 새롭게 발흥하였다. 20세기에는 독일의 하버와 보쉬가 공중질소의 고정화를 통한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해서 대량생산형 화학공업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혁신기술을 기초로 해서 전기, 통신, 전자기술이 발전했고, 내연기관이 개발되면서 자동차공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1892년 디젤 증유기관이 발명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석유가 새로운 연료로 등장하고 이것이 자동차 엔진으로 이용되어 대규모적인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이런 기술변혁은 사회 전체의 기술체계를 전환시켰다. 전기와 석유가 동력원으로 새롭게 이용되고, 철강이 각종 기계나 건물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그러면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기술혁신에 의한 중화학공업으로의 발전은 대량생산을 실현할 조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은 생산과정에도 변화를 일으키는데, 기업활동 과정의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연속된 생산단계를 결합시키고, 원료와 부품의 조달이나 판매, 제품 개발 등 업무의 내부통합을 진행시킨다. 노동대상의 흐름이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기업이 이를 가능한 한 계획하고 제어하는 것이 대량생산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기업들은 거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거대기업은 대량생산과 수직적 통합기업이라는 구조적인 특징을 구비해가며 성장하게 된다. 그런 거대기업이 바로 독점자본이다.
독점형성의 선두 주자는 영국이 아니라 독일과 미국이었다. 그러면서 세계 자본주의의 판도는 현격하게 달라지게 된다. 독일과 미국의 독점형성 과정을 살펴보고, 왜 영국에서는 독점형성이 늦었는지 알아보자.
(3) 독점 진행과정
- 독일에서의 독점 형성
독일은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러 제국으로 갈라진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다. 17세기 '30년 전쟁'의 여파로 독일에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은 중단되고, 거꾸로 봉건체제가 재편되어 수백개의 영방국가가 난립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독일은 1871년 보불전쟁의 승리로 알사스와 로렌 지방을 획득하고, 오랜 숙원이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함과 동시에 금본위에 기초한 통일적 통화·신용제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의 선봉에 선 것은 비스마르크였다. 정치적 통일을 통해 강력한 권한을 구축한 비스마르크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생산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1873년의 공황을 맞이해서는 보호관세제도를 강화하고, 은행의 원조 아래 대규모 설비투자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독일 자본주의는 20∼30년 안에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60∼70년대의 기술혁신도 이러한 배경 아래서 촉진되었고, 이와 동시에 은행자본의 집중도 추진해서 금융독점의 맹아가 싹텄으며, 특히 근대적 주식회사제도도 확립되었다.
이제, 기술혁신, 금융독점, 중화학공업의 발전, 국가의 강력한 지원, 그리고 보불전쟁에서의 승리로 획득한 50억 프랑의 배상금은 독일이 선진적으로 독점형성을 할 수 있는 커다란 조건이 되었다. 독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주로 카르텔의 형태로 독점을 형성했는데, 1911년에 카르텔이 600개가 될 정도로 모든 중요 산업이 카르텔화했다. 그리고 이 카르텔은 마침내 공동의 판매망인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면서 발전했다.
독일에는 1870년대에 이미 석탄과 철강기업에 의한 탄전 및 광산의 매점 경쟁, 생산제한 협정 등이 등장했지만,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893년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 1896년 라인·베스트팔렌 선철 신디케이트, 1904년 독일 제강연합의 결성 등이 그것이다. 전기기계공업에서도 1890년대에 A.E.G나 지멘스 등 대규모 종합전기 기계산업이 창설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합병과 집중이 더욱 강화되었다.
독일은 카르텔의 형태로 독점자본을 성립시키는데 주식회사제도를 이용했다. 은행이 독점체의 주주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중역을 파견하면서 은행이 산업자본을 지배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은 금융독점의 형태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들의 독점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예를 들어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의 경우 루르 지방 탄전의 산탄량 86.7%, 전독일의 45.4%를 지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독점력을 바탕으로 대외경쟁에서 덤핑판매를 통해 가격 우위를 점하고, 국내 시장에서는 고가판매를 자행했다. 그런 독점 이윤은 독점기업의 성장을 더욱 촉진했다.
- 미국의 독점 진행과정
"자유경쟁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며, 우리는 과점과 사적집산주의가 루울인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갈브레이드의 이러한 주장은 독점 형성기의 미국 사회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 독점이 진행된 것도 역시 1873년의 공황을 기점으로 해서였다. 미국은 독일과는 다르게 트러스트의 형태로 독점이 발달했는데, 그 구체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국 중상주의의 독점적 무역구조 속에서 이윤을 흡수당하여 근대자본주의의 발전이 억제되어 온 미국 식민지는 식민지인의 이익을 옹호하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식민지 독립전쟁이라는 사회적 변혁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의 승리로 해방된 미국에서도 자본주의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었으니, 그것은 남부의 대농장제도였다.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은 거대한 노동자군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부의 노예들은 묶여있는 존재였고, 그들이 근대적 노동자로 전환하려면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도의 폐지를 선언한 링컨은 북부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한 것이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하면서 거대한 노예들은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산업의 노동자로 전환되었다.
남북전쟁은 또한 은행에서의 독점을 발전시켰다. 전쟁을 하기 위해 정부는 돈이 필요했다. 정부는 은행업자들의 신용을 담보로 해서 제조업자들에게 전쟁물품을 구입했다. 그러면서 은행업자들의 힘은 커졌고, 이들은 급격하게 은행독점으로 발전했다.
1873년의 공황을 맞이하여 미국의 일부 자본은 급격하게 독점화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882년 스탠다드 석유 트러스트이다. 스탠다드 석유 트러스트는 록펠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사회사업가로 이름이 높은 록펠러는 천사의 얼굴 이면에 또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록펠러가 독점을 완성시키기 위해 저지른 온갖 추잡한 사기와 협잡은 독점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지만, 그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는 초기에 작은 석유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때는 석유가 많이 나는 곳에 시추공만 꽂으면 되는 때라 작은 석유 회사들이 난립해 있었다. 석유는 술통과 같은 나무통으로 운반했는데, 록펠러는 운반업자를 매수하여 경쟁사의 석유를 수송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서 경쟁사를 몰락시키거나 흡수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나머지 경쟁사들이 모여서 수송관을 설치하는 새로운 수송방법을 개발하자, 이것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기 위한 공작을 벌였고,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록펠러의 Ohio Standard 석유회사는 1879년에 30개 사와 트러스트 협정을 하여 약 250개의 경쟁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유의 90%를 독점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1882년에 다시 14개 사의 전 주식과 26개 사의 주식 대부분을 록펠러를 비롯한 9명이 수탁하여 일체의 권리를 행사하는 형태의 트러스트로 재편했다. 이런 방식의 트러스트는 이후 트러스트의 전형이 되었다.
그런데 이 트러스트는 관습법과 주법에 저촉되어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는 해산된다. 1890대의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트러스트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서부 농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연방정부에서 입법한 것이다. 이런 반트러스트 전통은 미국에서 오래동안 지속되었지만, 그것이 독점의 형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록펠러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는 해산되었어도, 이후 그는 록펠러 재단이라는 콘쩨른을 형성하여 오히려 보다 강력한 독점체를 구성했으며, 많은 산업부분의 독점체가 이에 따라 콘쩨른으로 전환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강력한 금융독점체이다.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의 예에서 본 것처럼 미국에서의 독점 형성은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1898년에서 1902년에는 대합동 붐이 일어나 1901년에는 세계최대의 기업 U.S.스틸이 설립되었다. 또 전기기계공업에서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G.E, 웨스팅하우스 등 거대기업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대은행들에 의해 자금이 조달되었다. 대표적으로 U.S.스틸의 경우 공장 800개를 합병하고 자본 720,000,000$를 통합했다. 이들 거대한 트러스트와 주식회사들, 기업연합 등은 노동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그들의 강화된 힘을 행사하면서 자본의 지배력을 집중시켰다.
레닌에 의하면 1904년의 미국에서는 전체의 1% 정도로서 100만 달러의 생산고를 가진 대규모 기업들이 전체 노동자의 25% 이상을 고용하였으며 총생산량의 38%를 생산하였다. 5년밖에 지나지 않은 1909년의 숫자를 보면 이들의 지배력은 노동자들의 30%를 차지하고 생산량의 44%를 차지할만큼 증가하였다.
- 영국은 왜 독점형성이 늦었는가.
한편 영국은 자유무역체제 하에서 형성된 사업구조와 축적구조가 강력한 생명력을 갖고 있었기에 독점형성에서는 뒤질 수밖에 없었다. 면공업 중심의 축적구조 지속, 세계은행으로서의 역할, 높은 무역이윤과 상업이윤 등이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집중적 투자를 지연시키고 독점형성을 방해한 것이다.
광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광산업에 있어서 영국은 19세기 말에 세계 최대의 산출국이며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1870년의 대공황을 맞으면서 영국도 국내적 국제적 시장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은 독점을 형성하여 대응하고자 했으나 생산자 수가 너무 많았고 생산과 판매의 조건이 각양각색이었다. 예컨대 1925년까지도 영국의 중요한 경쟁상대인 유럽 Wesfulia 지방의 경우 불과 70개의 기업이 연간 1억 톤을 생산하는데 반해 영국은 약 2,500개의 광산을 약 1,400의 기업이 소유한 채 연간 2억 6천만 톤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산된 상태로는 기업 집중을 위한 자산평가도 잘 안되는데다 기업주들의 이해관계
를 조정하기가 힘들어서 사실상 독점 형성은 불가능했다. 그러면서 1인당 채탄량은 계속 떨어져 1883년 333톤에서 1913년 243톤으로 떨어졌다. 독점형성이 안되면 경쟁에서 밀린다는 절박한 위기감 때문에 국가에서는 1926년에 합동촉진(탄광업법) 및 국가에 의한 독점보강법(1930년의 석탄광업법)을 만들어 독점을 재촉했으나 독점 형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936년 이후에 가서야 보상지불에 의한 국유화 방안을 제출하게 되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서야 광산을 전면적으로 국유화하면서 독점이 가능해졌다.
이런 형편이니만큼 영국의 산업적 독점은 1870년대를 기점으로 그 힘이 상실되어버린 것이다.
(4) 국제 독점체의 형성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경쟁장에 뒤늦게 참여한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은 보다 발전된 기술과 보다 근대적인 공장이라는 이점으로 독점을 형성하며 세계시장을 넘보기 시작했다. 독일과 미국의 이상과 같은 독점 형성은 차츰 산업과 은행의 결합을 필연화했다. 이는 거대기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생산기구가 거대화하고,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고정자본에 투자를 많이 해야 하므로, 부동자금을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설비투자금을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1901년 U.S.스틸 설립 당시 투자은행업자 모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실, 1904년 독일 철강연합 결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것이 베를린 대은행이었다는 사실 등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금융자본'은 독점의 형성과 확립 과정에서 그 중핵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금융자본과 결합한 독점자본은 이제 자신의 범위를 세계로 넓히고자 한다. 자본수출은 그 중요한 추진력이었다. 이는 유리한 직접투자시장을 구하는 것뿐 아니라, 판매시장, 원료자원 및 기타 이권의 확보와 결부되어 독점의 세력범위, 즉 식민지의 확대를 촉구하는 것인데, 이로 인해서 국제적 독점간 투쟁이 전개된다. 또한 국제 독점은 세계시장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국제 카르텔을 형성해서 시장을 분할 지배한다.
국제 독점을 살펴보면 미국의 G.E사와 독일의 A.E.G사가 상호협정을 맺고 서로가 시장을 할당하며, 또한 각국 가입 기업의 주식을 최대한 소유함으로써 국제적 지배권을 완전히 확장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G.E사 하나만 하더라도 각국에 분신을 가진 전기공업에서의 전세계적인 트러스트이다. 그리고 석유를 보면 미국의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나 영국의 더취 쉘 콤바인이 이미 국제 트러스트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국제적 독점 카르텔만 해도 1897년의 40개에서 1910년에는 100개, 1931년에는 320개로 각각 증가했다.
국제적 독점에 의한 세계의 경제적 분할과 그 투쟁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의 영토 분할 및 재분할을 위한 투쟁, 즉 제국주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2. 제국주의 쟁탈전
자본주의에서 과잉생산은 필연적이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과잉생산품을 팔아먹기 위한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탈하고 수탈하는 것은 세계 역사상 항상 있었던 일이지만 자본주의에서의 제국주의적 침탈은 그런 침탈과는 달리 상품을 팔아먹을 시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제국주의는 직접적 영토지배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그 과정은 피와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1) 제국주의
1880년과 1914년 사이에 유럽과 아메리카 바깥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세계는 몇몇 국가들의 공식적인 통치나 비공식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 이 지배를 담당했던 나라들은 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일본이었다. 대공황을 불러일으킨 과잉생산은 수출을 통해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기에 제국주의 국가들 내의 독점 기업가들은 엄청난 수의 잠재적인 소비자들을 가진 세계무역 지도상의 빈공간을 찾아 그곳을 자신들의 색깔로 채우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내부에 가중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시야를 바깥으로 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정치가들에 의해 제국주의적 침략은 더욱 활발해졌다. 나중에는 다른 영토를 도둑질하는 것이 그 나라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까지 인정될 정도였다.
이런 식민지 침략의 선두에 선 것은 역시 영국이었다. 영국은 16세기부터 이미 무역에서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상선과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였다. 16세기의 무역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실어오고, 미국에 담배와 원면을 실어간 다음, 값싼 공산품을 아프리카의 항구까지 실어 나르는 노예무역이었다. 1792년에서 1815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값싼 노동력으로 최저의 비용만을 들여서 원료 산지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로 노예무역에 의존했던 시기와는 달리 제국주의 정책은 1870년대 대공황을 맞이해서는 국내의 상품들을 판매할 시장을 찾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영국은 특히 대공황기에 세계경제에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실업이 증대하며, 노동운동이 고양되는 등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면서 1870년대 중반에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1875년에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사들여 운하 지배권을 손에 넣은 것을 비롯하여 1876년에는 발루지스탄을, 1878년에는 동지중해 키프로스섬을 확보하고, 1882년에는 이집트를 점령했다. 영국은 이후 10년 정도 사이에 아프리카 북단에서 남단까지 식민지화하는 소위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완료했다. 살기 위해서 영국은 다른 영토를 침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자본 수출도 했는데, 영국의 자본가들은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자본을 국외로 빌려주거나 해외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영국 내부에서 투자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수출은 영국 상품의 수출만큼이나 영국 경제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해외 투자는 영국 총 국가 자산의 1/4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국이 이렇게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동안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놀고 있었을 리는 없다. 프랑스와 독일, 벨기에, 포르투갈, 이탈리아, 미국 등도 다투어 식민지 획득에 나섰다. 그러나 그 때는 세계의 영토분할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 서로 식민지를 놓고 다투기보다는 아직 식민지가 되지 않은 땅을 찾아 깃발을 먼저 꽂는 방식이었다.
미국은 먼저 인디언, 멕시코인, 스페인 및 영국인들을 희생시키면서 협소하고 인구가 산재되어 있는 동부의 연안으로부터 태평양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군사적 팽창 정책에 착수하였다.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의 노골적인 인수, 사실상의 쿠바 인수, 중앙아메리카 전체에 걸친 세력권 확대, 카리브해의 전략적 지배,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에 있었던 남미 전체 지역에 대한 미국 투자 허용 등의 이익을 챙기면서 제국주의적 노정에 착수했다.
제국주의자들이 새로운 땅을 침략할 때는 갖가지 명분이 뒤따랐다. 종교의 이름으로, 또는 개화의 이름으로 새로운 땅에 들어간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땅과 인간과 문화에 대한 도둑질을 자행했다. 대중선교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진행된 개종활동은 식민지 지배의 길을 터놓았고, 서양의 문화적 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소수에 의한 지구의 정복은 강제와 제도에 의해 식민지 사회를 변화시켰고, 식민지의 지배자들은 서구화를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하면서 민중들의 고통을 버려두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의 경제적 종속은 매우 심하게 된다. 각종 초과착취가 횡행하고, 비싼 지배국의 상품을 사야 하는 식민지 국가의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식민지 경제는 왜곡된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제1차 세계대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가속화하면서 세계는 전쟁의 가능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세계의 영토 분할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서 이제는 새로운 땅을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식민지가 된 땅을 두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경쟁을 해야 할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세계는 제국주의적 세계 전쟁의 전면화라는 피할 수 없는 길을 향해 있었다.
이미 1880년대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세계전쟁의 가능성을 분석한 바 있으며, 1890년대에는 전쟁에 대한 우려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평화를 위한 형식적인 모임을 계속하였다. 세계(범)평화회의와 노벨평화상 제정(1897), 그리고 최초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등 각국 정부의 이상적인 평화 공약 선언이 계속된 것은 그만큼 세계대전의 위험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반의 산업화 과정에서 소화기와 포탄의 화력과 속도가 혁명적으로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훨씬 효율적인 터보엔진을 장착하고 훨씬 효과적인 부장력과 더 많은 포를 탑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함을 만드는 등 1880년대 살상기술은 급격하게 발전했고, 각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확장했다. 제국주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전쟁준비에 많은 돈을 들이도록 요구하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화학과 제철분야에서 커다란 산업을 만들어냈다. 1892년 엥겔스가 관찰한 것처럼 "전쟁준비가 거대산업의 한 부분이 되면서 거대산업은 정치적 필수품이 되었"던 까닭에, 전쟁과 군수품 생산의 공생은 불가피하게 정부와 산업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군수회사들은 대부분이 독점 거대산업이었는데, 이 군수물자들은 국가에 의해 소비되어야 했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간의 식민지 획득경쟁이 심화되자 각국간에 경제적 이해관계는 정치 군사적 관계로 비화하여 갖가지 외교 군사상의 대립과 협조, 결합과 분열이 되풀이되었다.
1880년대 초에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협조관계가 형성되었으나(1881 삼제협상, 1882 삼국동맹), 1890년에는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영국에 대한 대항을 의식해 서로 접근했다.(1894년 러불동맹) 영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는 대립적인 입장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이미 산업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 된 독일의 팽창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정치적 협상을 했다. 또한 일본이 러시아를 침략함으로써 그 크기에 비해 힘이 없음이 판명되자,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게 되었다.(1904 영불협상, 1907년 영러협상). 이리하여 1900년대 후반에는 점차 영국과 독일의 각축이라는 대립구도가 선명히 그려지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의 각축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삼국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협상 사이의 정치 군사적 대립의 심화로 현실화되었으며, 1914년 6월 28일 마침내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1890년 이래 민족간의 합병과 투쟁이 계속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민족문제 때문에 분열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여기에 대해 독일이 명백하게 지지를 표명했다. 이미 세계대전의 기운이 넘쳐흐르던 유럽은 사라예보의 작은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전쟁으로 빠져들어갔다. 이 전쟁은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4년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영국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승리하고 독일을 맹주로 한 동맹국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 결과적으로 참전국 모두는 패배자나 마찬가지였다. 이 전쟁으로 전 유럽에서 2천만 명이 사망하고, 참전국의 경제구조는 황폐화되었다.
독일은 해외 영토를 모두 잃고, 국내 생산력도 파괴되었다. 또한 막대한 양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면서 정치 사회적 위기가 가속화되었고, 바이마르 체제가 성립된다. 영국은 승전국이었으나 군수물자 및 생필품을 수입해야 했고, 파운드화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심각한 경제불황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는 철도와 도로가 파괴되고, 부채가 많아졌다. 이처럼 유럽 모두는 전쟁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반면 이 전쟁으로 커다란 이득을 얻은 국가도 있었다. 미국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까닭에 유럽 각국에 거액의 수출을 할 수 있었고, 연합국에 차관을 공여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일약 150억 달러 이상의 채권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제 미국은 자본주의의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이어받을 만큼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간다. 또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1차 대전 이후 영국 중심의 세계 체제는 무너졌다.
또한 이 당시 각국의 민중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인한 민족주의적 동원으로 인해 각국 민중들은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서게 되고, 각국의 혁명운동은 억압당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의 와중에 제국주의 일각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국가를 성립시킨 러시아 혁명에 의해 각국의 혁명운동은 고양되고,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3. 세계 노동자들의 반제국주의·반독점 투쟁과 러시아 혁명
제국주의와 독점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투쟁 역시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투쟁만큼 격렬했다. 식민지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선진국들의 혁명투쟁의 결절점이 바로 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었다.
(1) 식민지 국가들의 반제국주의 투쟁
이미 18세기 말부터 민족해방투쟁의 움직임이 있었다.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인 '시오의 학살'에서 볼 수 있듯이 1820년대 그리스 민중들은 터키의 지배에 대항했고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반면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상인과 지식인들이 독립운동에 가세하면서 그리스는 독립하게 된다.
이집트와 아랍지방에서도 마호메트의 직계를 자처하는 하심족(후의 이라크, 요르단), 이슬람 세계의 혁신파를 자처하는 사우드족(후의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나폴레옹의 원정 아래 근대화한 이집트의 메헤메트 알리 등이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또한 발칸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세르비아의 두 왕조는 농민 투쟁을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유럽에 근접해 있었던 까닭에 유럽 강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정당할 수밖에 없었다. 발칸반도는 아직도 민족문제로 인해 투쟁이 계속되고 있어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린다.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인도와 중국에서도 투쟁은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초기 식민지들의 반제국주의투쟁은 대부분 종교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는데, 1840년대 아편전쟁 후 중국에서의 평영탄, 그리고 1850년에 시작된 태평천국운동 등 외국세력에 대항하는 인민의 직접적인 운동이나, 1857년의 인도의 세포이 반란, 우리나라의 갑오농민전쟁, 중국의 의화단의 난 등은 종교적 색채에 극단적인 배외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 투쟁이었다. 또한 어느 정도 근대적인 군사력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이집트의 아라비 대령의 반란(1882), 터키의 청년터키당의 혁명(1908)에서 보듯이 군인의 역할이 컸다.
자본주의의 국제적 발전은 식민지 종속적 민족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식민지 지역의 발전을 왜곡시켰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해서 이들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적 발전은 두드러지게 촉진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식민지의 희생 위에서 치러졌으며, 식민지 민중들의 고통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고통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이집트의 와프드당 결성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민족자결 원칙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선진국들만의 것으로 귀결된 것에 대한 분노를 포함하는 것이다.
또 이 시기에는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이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비쳤다. 손문의 연소용공(聯蘇容共) 등 국공합작의 방침이나 케말의 터키 해방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2) 노동자 투쟁
식민지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해짐과 함께 선진 제국주의 국가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물결쳤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노동자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했고, 이들은 거대한 계급으로 등장했다. 1867년에서 1875년 사이에 노동조합들은 법적인 지위와 특권을 상당정도 획득하고 작업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는데, 선거권을 확장하는 것도 투쟁을 통해서였다. 그 전만 해도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참가할 수 있었다. 만약 노동자들을 선거에 참여시킨다면 수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패배가 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르주아지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그리고 자본력이 형식적 평등을 보장하더라도 부르주아지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나서야 그들의 두려움은 조금씩 가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인정받는 것은 투쟁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는데, 벨기에에서는 1893년과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스웨덴은 1902년에, 그리고 핀란드에서는 1905년에 참정권을 위한 총파업이 있었다. 이런 투쟁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보통선거권도 확립된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1910년의 경우 프랑스는 철도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15만 명의 철도원을 징집해서, 즉 이들을 군법 하에 둠으로써 철도 총파업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대에는 전국적인 운수노동자들과 광산노동자들이 전국적 범위의 집단적인 협약을 파업을 통해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큰 힘을 갖고 있는 금속산업의 노동자들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자들의 정당은 이미 강력했다. 민주적이고 선거에 의한 정치가 허용되었던 곳은 어디나 혁명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고무되었다. 1875년에 통합되어 이미 선거에 참여할 역량을 갖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1880년까지도 이러한 정당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나 1906년에는 사민당의 존재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동안의 노동운동의 성장, 노동계급 정당의 건설 및 대중적 기반 강화, 마르크스주의의 확산은 제2차 인터내셔널(1880년대 말∼1890년대 초)로 이어졌다. 조직적인 면에서는 제2차 인터내셔널은 당과 노동조합의 방만한 동맹이었으며, 4차 총회(1900년 파리)에 와서야 기술적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사회주의 사무국]이 설치될 정도로 느슨한 조직이었다.
이 2차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하고 일관된 투쟁은 반전(反戰)투쟁이었다.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에 노동자들이 총알받이로 나서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1891년 제2차 총회의 결의문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는 것을 이야기한 이래 전쟁 반대는 지속적으로 논의된 주제이다. 특히 1907년 제7차 총회(슈트트가르트)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촉구한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특히 발칸 반도에서 군사적 위기가 발생한 1912년 제9차 총회의 [바젤 결의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혁명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때의 인터내셔널은 23개국, 27개 정당, 378만 7천 명의 당원이 있었으며, 이들에게 우호적인 1천만 노동조합원이 있었다. 그러나 2차 인터내셔널의 주축이었던 수정주의자들 및 사회주의 정당의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은 총회의 결의를 실천할 행동을 취하지 않고 2년 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전쟁 지지를 선포하고 제국주의의 품에 안겼다. 결국 제2차 인터내셔널은 붕괴하는데, 1919년 레닌이 제3차 인터내셔널을 결정하고, 사민주의자들이 1920년에 2차 인터내셔널을 재건하면서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의 이념적 분화가 분명해진다.
결국 노동운동을 제대로 지도할 힘이 없음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혁명의 기운은 왜곡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섭되었다.
(3) 러시아 혁명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러시아 혁명'으로 최초의 결실을 맺었다. 레닌을 지도자로 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세비키)의 지도 아래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빈농과 동맹하여 1917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러시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다른 선진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발전의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섰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러시아에는 150개가 넘는 독점체들이 주요 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업의 독점화와 은행자본의 집중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는 귀족들이 토지 소유의 61.9%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을 구성하는 100개 넘는 민족들은 짜리즘에 의해 가혹하게 수탈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모순과 빈농의 고통이 이들을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참여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2월 짜르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광범한 혁명적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 아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와 농민대표 소비에트 병사위원회 등을 도처에서 조직한다. 한편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3월 2일에 수립된다. 이런 이중권력 상태에서 볼세비키 정당은 임시정부의 반혁명적 본질과 민중에 대한 배신행위를 폭로하고 민중들을 획득하기에 힘을 기울인다.
6월 11일 임시정부는 서방 제국주의 진영의 요구에 따라 독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한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7월 3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전쟁을 즉각 중지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에 들어간다. 이 시위에 대한 임시정부의 탄압으로 56명이 사망하고, 650명이 부상했으며, 볼세비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리고 노동자는 무장해제되어 혁명적인 군부대는 해체되거나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러면서 권력은 반혁명적인 임시정부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러나 볼세비키는 대중의 지지를 업고, 혁명을 수호할 것을 호소하며, 노동자, 병사, 농민들을 조직한다. 그 결과 볼세비키의 지도 아래 적위대와 혁명적 병사들은 수도의 주요 지점을 장악함과 동시에 1917년 10월 새벽 2시, 동궁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체포하면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었다.
새로운 노동자 정부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무장을 재건하고, 힘을 비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18년 2월 협상은 결렬되고, 독일은 모든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한다. 하지만 적위대와 새로운 혁명군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페트로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는 저지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형성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으며 각국의 혁명 투쟁은 고무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정책의 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자본주의 발전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지난 호부터 계속 강조해왔던 바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황은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공황국면에서 팔짱을 끼고 있지는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데, 그 노력이란 것은 대부분 일부(독점자본)를 제외한 나머지를 고통에 몰아넣는 것이다. 1870년대의 공황을 맞아서 자본은 독점을 형성했고, 대다수의 노동자와 나머지 민중들을 소외시켰다.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본의 노력은 식민지 민중을 수탈하는 데에 이르고, 이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 전쟁으로까지 이어진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민중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그런데 그렇게 자본이 몸부림쳐서 일시적으로 위기가 모면되는 것 같아도, 그것은 결국 더 큰 위기를 부른다. 이처럼 위기는 지속되고, 그 위기 극복책은 민중들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이 부패한 자본주의를 어찌할 것인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둘째, 독점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미 자유경쟁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토록 당연한 이야기가 요즘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일명 '신자유주의'는 '자유 시장 경제'만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기에 국가가 개입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너무나 우습게도 자유시장 경제는 그 논리를 주장하는 독점자본에 의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또한 국가의 개입이라는 것도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이루어졌음을 애써 외면하는 발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독점자본의 권력을, 지금도 강하지만 국가의 틀을 완전히 뛰어넘을 정도로 더할나위 없이 강화하겠다는 표현에 다름아니다.
셋째, 계속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식민지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독점자본의 수탈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노동자들의 힘의 강화는 모두 어려움을 딛고 발전해온 것이다. 경제위기라고 해서 움추러들고, 경제위기라고 해서 그 동안의 투쟁의 성과들을 모두 내어주고 후퇴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자본의 위기나 경제의 부침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투쟁을 통해 권리를 증진시키고, 발전을 해나갈 뿐이다. 그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넷째, 왜곡된 민족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자의 대표라고 하는 제2차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하고, 노동자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명분은 왜곡된 '민족주의'였다. 지금 이런 민족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판치고 있음을 본다. '국민경제'라는 논리, '국가경쟁력 강화'의 논리를 수용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회주의적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태도이다. 이런 논리로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쟁탈전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노동자에게는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국제주의'가 있을 뿐이다. 만약 민족주의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식민지(영토적 지배를 하든, 아니든) 지배를 강화하려는 제국주의에 맞선 경우 뿐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식민지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철저하게 다르다.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입각한 제국주의 반대, 그리고 전세계 노동자의 총단결만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관점이다. 그렇지 않은 어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도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현대자본주의발전사 (5):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형성과 제2차 세계대전
노동전선 기획단
1. 국가독점자본주의란 무엇인가?
(1)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발생 및 개념
자본주의 단계에서 상부구조로서 국가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의 이익―비록 자신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본질적으로―을 옹호한다. 즉, 사유재산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데에는 사유재산을 자본으로 전환하여 그 가치를 증식시켜 가는 행위, 다시 말해 자본가 계급의 이윤추구 과정을 보호하고 육성시켜 간다. 그러한 이윤추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황이나 불황시기에 이 자본주의 국가는 새로운 자본축적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직·간접적인 역할까지도 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가 갖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기관에 의한 직접적인 경제개입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국가기관이 독점조직과 융합하고 독점조직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가는 독점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독점조직은 국가기관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이용하여 국가의 경제활동에 전면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기의 지배를 강화해가며 이것을 통해 고액의 독점이윤의 획득을 보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의 과정은 자연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은 아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모순에서 기인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인 것이다. 즉,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더욱 심해지는 노동자계급의 빈곤, 국내시장이 상대적으로 축소되면서 나타나는 시장형성의 어려움 등이 그 원인인 것이다. 또한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나타나는 종속국의 민족해방운동의 성장, 제국주의 국가간의 시장쟁탈을 둘러싼 투쟁의 격화 등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모순의 극복과 자본주의의 위기관리의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징 및 국가개입의 형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자본간의 경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획득의 어려움을 국가의 개입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속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면 우선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모든 정책들에 있어 독점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국유화정책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국가가 직접적으로 생산부문을 장악하여 자본축적 과정을 원활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일부문에 난립하고 있는 비능률적인 기업들을 통폐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국영기업으로 육성하기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적 총자본에 원료, 반제품, 서비스를 값싸게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도 한다. 또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통하여 새로운 산업,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상품의 개발을 촉진하고 그 연구개발의 성과를 값싸게 민간기업에 이전시키는 과정들이 모두 이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국가의 역할 속에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로 사회보장제도를 특징으로 한다. 국가가 모든 국민들에게 교육, 보건, 주택, 후생 면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을 사회보장제도라고 부른다. 교육과 보건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거나, 서민용 주택을 국가가 건설 관리하여 저소득층에게 낮은 임대료를 받고, 소득보조금을 저소득층에게 지급하며, 실업자에게는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노후에는 연금을 국가가 지급한다. 또한 탁아소를 설치, 운영하여 부녀자의 직장생활을 보호하며, 노인과 병약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을 돌보는 사회봉사자를 보조 유지한다.
이런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의 노동력 관리의 일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일정하게 산업예비군을 유지해야 자본의 이윤추구가 가능해지므로 국가는 산업예비군을 유지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것이 사회보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또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드는 비용의 일부를 자본이 아닌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담당하여 자본의 이윤추구를 원활하게 한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을 자신의 세금으로 일부 받는 셈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회보장제도는 독점자본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하는 한 수단이기도 하다.
세번째로는 국민경제의 군사화를 촉진시킨다. 국민경제의 군사화는 제국주의 시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나타난 경제현상이다.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 시기에는 전쟁기간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국가의 군사비지출과 군수공업은 국민경제 있어서 일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았다. 독점자본주의의 시기에 들어와서 제국주의 각국은 모두 잇달아 국민경제를 군사화의 길로 추진해 온 것이다.
이 군사화를 통해 독점자본은 막대한 양의 이윤을 가져갈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국가의 군수발주 완성을 구실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 정도를 크게 강화할 뿐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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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나아가 그들이 국가를 통해 독점자본에게 유리하게 국민소득의 재분배를 행하게 하여 많은 이익을 더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독점자본가에게 이윤이 풍부한 대량의 군사발주를 하는 것과 그들에게 대부금과 보조금을 무한정 제공하는 것은 물론 원료 및 재료 내지 기술력과 기술정보 및 연구 실험 경비들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이 아닌 일상시기에서도 군수생산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독점자본은 지속적인 생산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군수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인 군산복합체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 독점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독점을 더욱 심화시키며 노동자계급과의 대립을 첨예화하게 된다.
(3)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계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와는 다른 특징을 갖는 것은 국가의 경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독점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발생하는 여러 가지의 모순에서 기인하고 있다. 즉, 독점자본의 이윤획득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와 모순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자본의 위기극복을 위한 또 다른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과연 독점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는 국가가 자본주의 경제 및 사회의 재생산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국가의 재정지출이 크게 증가한다. 사회적인 기초설비―도로, 항만, 철도, 통신, 전력―를 확충하며, 국영기업을 운영하고 팽창하는 관료와 공공부문의 취업자를 유지하며, 국방과 치안유지를 위하여 국가의 재정지출은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국가의 재정수입은 조세수입과 국영기업 이익금이다. 이중에서도 조세수입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다. 이는 납세자들이 조세저항 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재정지출의 증가와 그로 인한 재정위기는 공황기나 불황기에 더욱 확대된다. 국가는 이러한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시도들을 하게 된다.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한다거나 물가와 임금의 상승을 억제하여 국가의 재정지출의 증가를 규제한다거나 국방비와 치안유지비를 감축하는 방안이 있으나 사실상 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반독점세력이 더욱 증가하게 된다. 자본과 생산의 집적과 집중이 만들어 놓은 노동자군의 형성은 독점적 대기업에 맞먹는 대규모 노동조합의 결성을 가능하게 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대규모 노동조합과 노동자계급의 조직화된 반발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비독점기업 및 일반 소비자들과도 대립하게 된다. 결국 독점자본에 반대하는 세력들, 곧 노동자계급, 비독점자본, 일반소비자들이 일종의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자본에 대한 투쟁을 넘어서서 국가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국가의 경제개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는 자본의 운동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독점세력들을 강화시키고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2.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형성 (1) 1929년 세계대공황 -대공황의 서막 첫 번째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는 다시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며 변하지 않을 번영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았다. 전 세계의 식민지 민중들은 제국주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눈부신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혼란에 빠졌던 세계경제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영국을 중심으로 한 금본위체제가 회복되었다. 특히 30억 달러의 대외 채무를 지고 있다가 1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하여 일약 1백 5십억 달러의 채권국으로 변신한 미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전후 경제부흥을 계기로 돈을 벌었다. 세계경제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는 데 따라 신흥 부국인 미국의 뉴욕 '월가' 증권거래소는 날마다 오르기만 하는 증권을 사기 위해 모여든 투자가들로 북적거렸다. 1929년 10월 24일은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날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의해 희생당한 11명의 주식투자자들의 자살은 24일을 기존의 날과 다른 날로 만들었다. 월가의 주식값이 최초로 큰 폭의 하락세를 기록한 날로, 전대미문의 파멸적 타격을 인류에게 가한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날을 일컬어 '암흑의 목요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닷새 뒤에 다시 한번 주가의 대폭락이 일어났다. 이날 월가의 주식값은 무려 43%나 떨어졌다. 그리하여 11월에는 9월의 절반을 밑도는 수준으로, 그리고 다음해 7월에는 29년 9월의 8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 여파로 미국에서는 5천여 개의 은행이 부도를 냈고 수만 개의 기업이 파산했는가 하면 9백만 명의 저금통장이 쓸모 없는 종이쪼가리로 변하고 말았다. 뒤이어 베를린, 파리, 런던, 동경의 증권거래소에도 주가 폭락의 풍파가 몰아닥쳤다. 월가를 덮친 '목요일의 암흑'은 이미 서로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던 세계경제의 흐름을 타고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공장, 모든 가정에 빠짐없이 찾아들어 음울한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경과 1920년대에는 식민지와 후진국들의 각종 농산물과 원료생산이 증가했고, 선진공업국의 경우에는 눈부신 기술발전에 의해 최신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러한 생산력의 증가는 고용을 줄어들게 하면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팔아야 할 상품은 많아졌지만 이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줄어들었다. 과잉생산은 먼저 농업부문의 공황을 불러왔고 공업생산에 있어서도 서서히 공황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1925년에 정점에 이른 건축업이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1929년 6월을 고비로 공업생산지수도 하락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매년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려 그 돈을 유럽과 세계 곳곳에 투자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경제의 불황은 곧장 전세계로 파급되었다. 미국은 불황이 시작되자 투자를 줄이기 시작했고 유럽의 국가들은 보호무역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각 국가들은 시장을 폐쇄하거나 관세를 높였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시장 개방을 요구하였다. 모든 국가들은 국제적 무역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방법을 구사하였지만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것은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당시 불황의 심각성은 몇 가지 통계수치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923년부터 25년 사이의 평균 지수를 100으로 잡을 때 1933년의 공업은 60, 건축은 14, 고용은 61, 노동자의 임금은 38 수준으로 하락했다. 실업자는 1930년에 3백만, 33년에 1천5백만으로 늘어났다. GNP는 1928년의 8백50억 달러에서 30년 6백80억, 32년에는 3백70억 달러로 떨어졌다. 미국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공업생산액의 1925∼29년 평균을 100으로 할 때, 29년 2/4분기에는 113.1이었으나 32년 3/4분기에는 65.9에 불과했다. 29∼32년 사이에 세계무역량은 70.8%나 감소했고 실업자는 5천만 명을 훨씬 넘어설 정도였다.
그러면, 대공황의 구체적인 상황을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 공황이 도래하기 바로 전, 1920년대 중반까지 산업에 있어서는 생산성이 급속도로 향상되어 가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것은 상위 5%의 고소득자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20년의 22%에서 1929년 26%로 높아졌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수에게로 부가 쏠리게 되었던 것이다. 자본가들은 겉으로 보이는 경제번영에 주목했고 주식을 포함한 금융자본의 축적에 열을 올렸으며 금융투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 속에서 주식시장의 붕괴는 경제 전반에 걸쳐 파급되었다. 실업자는 1933년에 전체 노동력의 1/4인 1,300만 명으로 늘어났고 산업의 생산력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될 조건을 만들었다. 자본에게는 공황이라는 위기를 탈출할 계기를 만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경우,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체결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은 경제를 혼란시키고 화폐가치를 하락시켜 1923년 인플레이션은 절정에 다다랐다. 인플레이션은 소수의 거대한 자본과, 다수 노동자의 빈익빈 상태를 가져왔고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민중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독일은 화학, 전기, 그리고 기계의 제 산업이 근대화되어 다시 세계시장의 경쟁에 참가하였고 인플레이션은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안정일 뿐이었다. 미국의 경제 공황이 독일에 미친 영향은 치명적이었다. 전후 독일의 경제 재건이 미국의 단기 신용에 의존하였으므로 미국의 단기 대여 환수는 독일 경제를 빠른 속도로 파국적 사태로 인도하였다. 농산물 가격 폭락, 생산의 저하, 소득 저하, 실업증가, 수출부진, 회사의 파산이라고 하는 어두운 연쇄 반응은 독일 경제의 파국적 전조였다. 1931년 독일은 경제 파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국은행 금리를 7%로 인상하였으나 닥쳐오는 경제위기는 막을 수 없었다. 1931년 7월 초 외환의 고갈로 독일에서 가장 큰 은행인 다름슈태테르은행이 파산하였다. 이에 독일 정부는 모든 외환 지출과 은행 통제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모든 산업이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독일에서 실업자가 200만을 넘었다. 경제 공황이 심각해지면서 1932년에는 독일에서 실업자가 6백만 명에 도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또 독일의 독점자본은 세금으로 저소득층과 실업자의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국가"에 등을 돌리고 독재 정치의 수립을 바랬다. 독점자본은 지속적인 사회위기 속에서 증대하는 공산주의 운동으로 인한 사회혁명에 두려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상황의 전개는 바로 정치의 장에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독점자본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하고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잠재울 자, 바로 히틀러라는 전대미문의 독재자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대공황은 생산력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자본주의 세계를 지배해온 '영원한 번영'을 기대하는 낙관적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어버렸다. 시장의 논리(자본의 무정부성)의 허구성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시장의 논리는 자본주의적 경쟁을 통해 생산을 극대화하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당시까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실업이나 상품의 과잉생산으로 인해 경제공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궁핍화와 생산력의 빠른 발전으로 인해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난다'고 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에 불과하다고 비웃었으며, 실업은 기껏해야 일시적이거나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실업자란 게으른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과잉생산에 의한 공황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대공황은 창고에 상품을 가득 쌓아두고도 민중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하였으며 바쁘게 돌아가던 공장과 기계를 멈추게 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황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부자는 더 부유해졌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경쟁기업을 헐값으로 인수하고 떨어진 주식을 휴지값으로 긁어모았다. 공황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자본가들은 더 큰 독점자본가들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해 각지에서 실업자들의 항의시위가 일어났고 1932년에는 1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같은 절망적인 시위는 그때마다 군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결과 공황이 전세계로 번져나가자 각국은 해외에 투자한 자본을 속속 철수시키는 한편, 자국이 보유한 외화를 금으로 바꾸어 국내로 반입했다. 당시의 금본위제 아래서는 은행에서 화폐를 금으로 교환해주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국제적인 중금주의 무역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 1931년 9월, 영국이 금의 태환을 중단함으로써 금본위제는 다시 무너졌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의 양이 부족해짐으로써 세계 무역량은 더욱 줄어들었고 열강들은 경기회복을 위한 통제경제를 실시했다. 1932년 영연방 국가들이 오타와에서 회의를 열어 연방과 식민지를 외국에 대해 봉쇄하고 높은 수입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하자 다른 강대국들도 앞다투어 블록경제를 형성했다. 세계는 이제 파운드, 달러, 엔, 마르크, 프랑 등 같은 화폐를 사용하는 제국주의 강대국과 그 연방 및 식민지를 한데 묶은 몇 개의 블록으로 분할되었다. 다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과 독일 등에서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말살하고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파쇼체제, 즉 나찌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탄생했고, 미국과 영국의 경우에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수정을 통한 강력한 국가통제 하에 독점을 강화시키는 체제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은 경쟁을 넘어서는 시도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이다. 기존의 식민지만으로는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고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점자본은 공황이라는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전략을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통해 실현하기 시작했고, 다수의 노동자와 민중을 전쟁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2)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전략
독점자본은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 생산과 시장간의 무계획성, 발전의 불균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권한을 국가에게 부여하였다. 둘째, 시장의 논리(자본주의의 무정부성)에 의한 상품생산을 법·제도적으로 규제할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셋째, 공황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노동계급의 저항투쟁에 대응할 경제·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넷째, 노동운동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및 의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쇄를 진행하였다. 다섯째, 공황의 상황을 전시경제와 전쟁 준비로 전환하였다. 이를 통해 독점자본의 축적을 더욱 공고히 할 새로운 단계, 즉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국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전략은 뉴딜정책으로 대표될 수 있다. 뉴딜정책을 금융정책, 농업정책, 산업부흥정책과 공공사업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 금융정책 1933년 3월 초에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국적인 은행 휴업을 선포하고 자금의 해외 유출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그는 곧 의회에 요청하여 긴급금융법을 통과시키도록 하였다. 긴급금융법에 따라 대통령은 융자, 통화, 금, 은, 외환거래를 규제할 긴급조치권을 얻었다. 그리고 재무장관은 모든 금과 금 증서의 예치를 요구할 권한을 얻었다. 또한 연방지불준비제도의 회원이 된 전국 은행과 주 은행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 문을 열도록 규정하였다. 그 결과로 1929년에 2만 5,568개였던 은행이 이제는 1만 4,771개로 줄었다. 대공황이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것은 금융통화 문제였다. 그에 따라 뉴딜은 인플레이션, 금융개혁, 중권거래 감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금융정책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단계로 루즈벨트는 신용부문에 역점을 두었다. 신용을 확대하기 위한 기구로서 이미 후버 행정부에 의해 재건금융공사가 설립되었고 이후 루즈벨트 행정부는 그것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긴급금융법을 제정하였다. 이를 통해 자본가들에게 대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화폐와 신용에 대한 연방정부의 권한을 더욱 확대시켰다. 결국 긴급금융법을 비롯한 금융제도의 변화는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통해, 독점자본의 축적을 정부의 통제 하에서 보다 용이하도록 만들어내고 자본의 무정부성을 극복해내고자 했다.
- 농업정책 정부는 면화 재배자들에게 경작지 면적을 적어도 30% 줄이도록 하였고 이는 농업조정청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과잉생산된 면화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한 정책은 면화뿐만 아니라 밀, 옥수수, 돼지, 담배, 소, 땅콩, 호밀, 보리, 아마, 사탕수수, 사탕무우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가격을 유지하고 생산을 제한하기 위한 독점행위인데, 이로 인해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자 수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떠나 빈민이 되었다. 정부는 1935년에 귀농청을 설립을 통해 빈농, 소작농, 농업노동자에게 영농 자금을 주어 농경지에 재정착하도록 하려 하였으나 실은 이것은 계속적인 농업노동자들의 시위를 잠재우지 않으면 안 되는 연방정부가 내놓은 고육책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소수의 부농을 중심으로 보호나 특혜를 정부로부터 부여받게 되었고 그 비용은 납세자들이 부담했다. 결국 뉴딜의 농업정책은 정부가 농산물의 생산과 가격을 결정하는 동시에 토양 자원을 유지하고 농민의 신용 자원 대부분을 관리할 책임을 지면서 국가 통제를 강화해나가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규모의 농업자본뿐이었다.
-산업부흥과 공공사업 연방정부는 전국산업부흥법을 시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전국산업부흥청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우선 노동시간과 임금에 관한 총괄적인 규약을 만들었는데 이 총괄 규약은 소년노동을 금지하고 산업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의 주당 작업시간을 각각 35시간과 40시간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산업노동자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40%로 정하였다. 그후 정식 규약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에 관한 통일된 규약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규약이 준수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국민들과 중소기업가들은 규약 제정 과정에서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특히 규약의 제정과 운영이 대기업 위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점을 더욱 강화시켜나갔다. 그러자 비난의 소리들이 높아졌다. 연방정부는 독점을 규제하고 경쟁을 유지하려는 제스츄어를 보였지만 그러한 조치들도 당시 더욱더 강화되어 가고 있던 정부와 독점자본의 협력 추세를 가로막지 못했다. 정부와 독점자본의 밀착, 더 정확하게는 국가의 개입과 통제에 의한 독점자본의 축적은 전력산업에 대한 규제에서도 잘 나타났다. 1936년에 12개의 지주회사가 전국에서 생산되는 전력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전력산업은 19세기 후반의 철도산업처럼 독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철도회사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여 무질서가 나타나고 그 때문에 연방정부의 규제를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전력회사들도 그와 같은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테네시계곡 개발공사도 마찬가지의 형태였다. 개발공사를 창설하면서 모든 권한은 개발공사에 위임되었으며 제품을 제조하는 것 이외에도 부동산을 획득하고, 댐을 건설하고, 수력 발전소를 세우고, 홍수 관리사업을 추진하고, 토양침식을 막고, 식목활동을 지원하는 등의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이렇듯 정부 권력의 강화와 확대는 대중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독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모든 산업은 정부에 의한 보호와 자금정책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의회는 1933년에 철도긴급법을 제정하여 철도의 곤경을 완화해 주었으며 이에 따라 연방철도조정위원회가 구성되어 철도측 대표들의 자문을 받아 낭비를 줄이고 운임을 적정 수준으로 내리고 철도회사의 신용을 개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철도회사들에게 트러스트 금지법의 적용을 면제시킬 수 있게 하였다. 결국 기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투자는 자본 스스로가 투자하기 버거운 산업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었으며 향후 기간산업은 모두 민영화되었다. 여기에서 공공사업을 통한 실업의 감소와 고용의 창출은 그 일환이었을 뿐이며 생산된 상품을 구매할 최소비용의 지출이었을 따름이다.
-소결 자본들이 대공황에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본주의 체제를 회생시킬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되자 국가를 개입시켜 스스로를 구출하려 했던 시기가 바로 1929년 대공황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이다. 독점자본들은 루즈벨트와 뉴딜의 개혁을 통해 국가를 통한 독점을 강화하면서 공황을 극복하고 노동자·농민들의 거센 저항을 분쇄하는 도구의 역할을 충실히 진행한 것이다. 뉴딜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1929년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진 국민총생산고롤 올림으로써 저항하는 국민을 옛날의 익숙한 생활방식대로 되돌아가게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독점자본의 위기를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물건을 살 능력이 있는 국민이 필요했고, 이것을 자유로운 경쟁이 아닌 국가의 통제와 계획 속에서 진행시킴으로써 독점자본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노동시간의 단축도,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제도 법으로 관철시켰다.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대규모 공공사업들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보수주의자들과의 약간의 마찰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계획 속에서 독점자본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결국 실현해냈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개혁조치들 마저도 1939년 9백만 명의 실업자들을 남긴 채 중단되었다.
(3) 독일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전략
정부는 우선적으로 은행제도를 인수하고 가능한 한 자본이동, 외환시장, 국내신용구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계획(New Plan) 하에 구축되었는데 민간은행과 금융기관은 공공규제 및 통제체제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수입은 오직 허가에 의해서만 가능해졌다. 국가의 강력한 규제와 통제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대규모 공공투자 및 재정지출 정책을 단행하였는데 자동차산업과 건설업의 고도성장은 재정지출 정책을 통한 정부의 특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자동차 산업 및 건설업 자체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사회간접시설, 특히 도로를 비롯한 기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투자로 이어졌다. 따라서 독점자본은 세금혜택, 보조금, 직접투자 등을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었고 두 산업 이외의 중요한 산업에까지 독점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로 통화공급의 확대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유럽시장에서 고립화된 조건 속에서 수출을 통한 경제회복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생산과 시장의 통제와 규제를 보다 용이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측면으로 고려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가격, 임금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재정지출 정책, 통화확대 정책은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나치정부의 이해와 일치되었으며 강력한 독재자를 원한 독점자본의 이해와 일치되었음은 물론이다. 1930년대 초반의 공황이라는 위기적 상황 하에서 독점자본과 그들의 경제관료는 경제 성장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를 할 수 있는 나치정부의 정책 체제를 지지하였다. 핵심적인 경제계획 외에 몇가지 추가적인 통제가 있었는데, 이러한 추가적인 통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가와 임금, 그리고 해외무역에 대한 통제였다. 물가와 임금에 대한 통제는 경제회복기에 비전통적인 자금조달 방식을 보완하려는 정부의 통화정책에 대해 보수주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임금통제는 또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자본가가 노동비용의 감소를 계기로 독점을 더욱 강화하고 다른 산업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조건을 창 출할 핵심적 정책이었다. 따라서 경제회복기에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성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의 위기 극복은 핵심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에 있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나치정부의 최우선 정책은 전쟁 준비였으며 전시경제체제 구축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여러 물자들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이 속에서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개입은 독점자본의 자본축적을 공고히 하였던 것이다.
3. 제2차 세계대전
(1) 성격과 특징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1차 세계대전과 같이 독점자본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 소련이 참가하면서 전선은 보다 복잡해졌다. 파쇼체제에 대항하는 반파시즘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는데,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 전쟁을 통해 소련과 독일이라는 두 적을 무너뜨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선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대립관계, 파시즘과 다른 국가들간의 대립관계,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을 제외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차츰 몰락해갔으며, 이에 따라 식민지 제 민족의 저항이 활발해졌다. 제국주의 내부에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는 투쟁이 활발했다.
(2) 전개과정
① 전운이 다시 감돌다
-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 1919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조인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으로 독일은 식민지를 모두 상실했고, 프랑스에게 알사스-로렌 지방을 반환했으며, 거액의 배상금도 부담해야 했다. 이 조약은 1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임에도 불구하고, 패자인 독일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서 독일 국민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러한 조약은 주로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각각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한 데다가 인구와 공업 면에서도 열세였기 때문에 독일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서 자국의 안전을 보호받고자 했다. 영국은 독일이 너무 약화되면 상품시장을 상실하는 데다 프랑스의 헤게모니가 강화될 것을 우려하여 조정자로 행동했다. 미국은 식민지의 입장에 근거한 민족자결주의 요구들을 내세웠으나, 이것은 새로운 식민지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의 영토를 계속 지배했으며, 민족자결의 원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족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동유럽 국가들만이 독립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패전국에 대한 압력과 소련에 대한 간섭을 위한 것으로서 반사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한가지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베르사이유 체제도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군비축소와 배상 문제를 둘러싼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이해조정 과정에서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사기술과 무기가 크게 발전했다. 전쟁의 파괴력을 경험한 세계는 군비축소 교섭을 시작했다. 제일 진전을 보인 것은 해군력 제한이었다. 해군력 제한은 1922년의 워싱턴 회의, 1930년 런던회의에서 합의되었다. 그러나 해군력은 이미 사멸해가는 단계였고, 공군과 육군의 강화가 오히려 큰 문제였다. 하지만 국제연맹에서 군비축소에 대한 교섭은 진행되지 않았다. 실제적인 군비축소 교섭이 지체되었다 하더라도 평화를 위한 선언과 조약들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928년에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파리에서 조인되어 "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국제적인 분쟁해결을 위해 전쟁에 호소하는 것을 부정하고, 또한 그 상호관계에 국가의 정책수단으로 전쟁 포기를 각자 인민의 이름으로 엄숙히 선언한다. 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상호간에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체의 분쟁 또는 의견 차이는 그 성질 또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막론하고 평화적인 수단 이외의 수단으로 처리 또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약속한다"고 했다. 이 조약은 15개국이 참가하여 1929년까지 15개국 모두가 비준하고 발효하여 1938년까지 독립국의 90%가 조인한 주요 조약이었다. 1932년 2월 소련, 미국이 참가한 제네바 일반군비 제한회의에서 독일의 군비평등권을 인정하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4개국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독일의 군사력을 제한했던 베르사이유 체제의 사실상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1933년 7월에는 소련의 제창으로 '침략과 정의에 관한 조약'이 소련,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 이스토니아, 라트비아,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처럼 평화에 관한 의지는 드높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의지는 현실의 전쟁 기운을 막지 못했다. 특히 1933년 세계경제회의 실패로 세계경제의 위기를 세계의 협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함이 판명되었다. 세계 경제위기는 생산력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전쟁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실은 베르사이유 체제를 붕괴시키고, 전쟁의 흐름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 파시즘의 득세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가속화되면서 사회적 갈등과 긴장은 증대되었고 노동자들의 운동은 고양되었다. 그러자 독점자본은 이제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파시즘이다. 192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국민 파시스트 당의 권력 장악, 1933년 독일에서의 나치당의 정권 장악, 그리고 1937년 일본에서의 근위 내각 성립에 따른 파시즘 체제의 성립 등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파시즘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파시즘 국가들은 스스로를 '가지지 못한(have nots) 국가'로 규정하고 자원 확보 등을 중심으로 광역경제권을 형성하려고 했다. 예컨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독일의 대생활권 등이다. 그들은 이를 위해 주변의 국가들을 침략하고 타민족을 억압 수탈하는 정책을 공세적으로 펼치고자 했다. 그 과정 중의 하나로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를 침략했고, 일본은 만주를 침략해서 1932년 3월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웠다.
- 파시스트들의 전쟁 시도에 대한 서방의 태도 파시스트들의 움직임이 빨라진 1938년에도 서방은 유화정책을 계속하고 있었다. 독일은 1938년 동방진출 정책을 시작했고, 3월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그리고 4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했다. 9월 29일 히틀러, 체임버린, 달라디에, 무솔리니로 구성된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수뇌는 뮌헨회의를 열어 수데텐을 독일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체임버린 등은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간섭과 유화는 왜 가능했는가? 소련의 존재는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었다. 1930년대 세계 각국이 극심한 공황을 겪으면서 실업률이 고조되었을 때 소련에는 실업이 없었을 뿐더러 활발한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 국가들은 전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독일로 하여금 암묵적으로 소련을 침공하게 하고, 소련의 힘을 약화시킨 후 독일과 소련을 모두 무너뜨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상원의원이었던 트루만은 "만약 독일이 승리하고 있다면 러시아를 도와야 하며,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독일을 도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으로 가능한 한 양자가 서로를 많이 죽이도록 해야 한다"(New York Times, July 24th, 1941)고 주장한 바 있다. 스탈린은 서방의 전략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6개월 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불간섭 정책은 다음과 같은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 침략국의 흉악한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일본이 중국이나 더 나아가 소련과의 전쟁에 휩쓸려드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독일이 유럽의 분쟁에 얽혀들고 소련과의 전쟁에 휩쓸려드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모든 교전국들을 전쟁의 수렁 속에 깊이 빠지도록 내버려두며 이를 은밀하게 조장한다. 교전국들이 서로를 약화시키고 기진맥진하게 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약해졌을 때 새로운 왕성한 힘을 가지고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전쟁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는 약화된 교전국들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값싸고 쉽게!"(스탈린, 소련공산당 제18차 당대회 개막연설(1939. 3) 소련은 고립을 피하고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1939년 4월부터 영국, 프랑스와 제휴를 추진했으나 교섭은 순조롭지 않았다. 스탈린은 군사산업을 강화하고 숙청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다. 독일은 폴란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소련과의 평화를 유지하여 양쪽으로부터의 정면작전을 피하려고 했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독일과 소련은 1939년 8월 23일에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해 세계 반파시스트 운동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동안 대부분의 공산진영은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파시즘의 수괴라고 할만한 독일과 세계 반파시즘 운동의 선두라고 생각되었던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결국 각국의 반파시스트 운동은 고립되고 말았다.
② 전쟁의 전개과정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직후인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입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폴란드는 독일의 진격전으로 며칠만에 서부지역의 절반이 점령되었고, 9월 17일에는 소련의 적군이 동부지역 반을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독일 선전포고를 해놓고도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아 '이상한 전쟁'이라고 불리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1940년 4월 독일은 덴마크, 노르웨이, 뒤이어 5월에 중립국 오스트리아, 벨기에를 공격하고 6월에 파리를 점령했다. 프랑스의 페탕 내각은 독일군에 항복, 비시에게 정권이 넘어갔지만, 드골이 런던에서 조직한 망명정부의 저항과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이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도 5월에 수상이 된 처칠의 지도 아래 공습을 버텨 히틀러의 단기결전 기도를 좌절시켰다. 이 사이에 소련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병합했다. 1940년 9월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체결했는데, 이탈리아는 이미 6월에 독일측에 가담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히틀러는 1940년 12월에 러시아의 영토를 독일의 생존권역으로 한 발파라이소 작전명령을 내렸고, 1941년 4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발칸반도에 침입하여 대소련관계가 긴장되자 6월에 소련을 침공했다. 초기에 독일은 소련을 진격하여 밀어 부쳤으나 곧 적군(赤軍)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 과정에서 1941년 8월 미국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이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여 나치 타도와 소련 원조를 선언하고 세계기구 창설 구상을 제시하면서 반파시즘 연합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원은 많지 않았다. 1941년 12월에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제2전선을 형성할 때까지 소련의 적군은 그야말로 단독으로 독일군과 싸웠는데, 제국주의 열강이 바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독일이 더 이상 동부 진격을 피할 수 없도록 밀어 부쳐 소련과 전쟁을 하도록 하고, 그 속에서 소련과 독일 모두의 약화를 바란 것이다. 소련의 적군은 이 싸움이 소련의 장래를 결정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스탈린에 의한 집단농장화, 대숙청이 자행되면서 사회주의 소련에 대한 회의가 광범위해지고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붉은 군대는 열심히 싸워서 독일군을 물리쳤다. 1990년에 출판된 소련 고등학교 교과서 <소련사> 11장은 '대조국전쟁의 승리자는 인민'이라고 제목을 붙인 요약 부분에서 "역사의 비극적인 파라독스는 1917년에 선언된 자유와 정의의 이념을 굳게 믿은 소비에트 인민이, 동시에 수백만 명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스탈린의 전제정치 아래서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1941년 6월에 인민이 선택한 것은 결코 스탈린 체제의 수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국과 혁명이념을 방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승리의 무기를 단련하고 조국을 부양할 경제를 만든 것은 전 인민의 헌신적인 노동, 영웅주의, 자기 희생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소련의 적군은 승리했다. 이 승리로 전세는 근본적으로 전환되어 이후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경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후 적군은 전략적인 기선을 빼앗아 전쟁 종결까지 그 기선을 잃지 않았다. 적군은 이후 베를린까지 한 발 한 발 일방적으로 그리고 착실하게 독일군의 공격을 물리쳐갔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섬멸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6월에 연합국은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독일을 마지막으로 공격했다. 그 결과 1945년 5월 7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그해 8월 15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도 항복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3) 2차 세계대전의 결과
첫째, 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은 세계광공업 생산의 60% 이상을 차지했고, 다른 연합국에 거액의 채권을 가진 세계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은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 재편에 착수했고,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에 편승해 신식민지적 지배질서를 구축했다. 그래서 이후의 세계는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라고 할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 아래서 흘러갔던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권이 성립되었다. 중국의 사회주의화, 동유럽의 사회주의화로 그동안 소련을 고립시켜왔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책은 실패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의 발언권이 세지면서 소련을 정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형성과 소련의 인정은 세계를 사회주의국가와 자본주의국가로 나누어 냉전 시대를 열었다. 셋째로 구식민지 체제가 붕괴하고, 신식민지주의 시대가 열렸다.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군사를 동원했다. 영국은 병사의 50%인 약 250만 명을 인도에서 동원했다. 인도 국민회의파는 이에 대한 협력조건으로 독립을 요구했으며, 1942년에는 인도의 영국군 철수를 요구했기 때문에 비합법화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디오피아와 소말리아를 점령한 이탈리아와의 전투에 케냐 등에서 징용된 30만 명에 가까운 아프리카인이 가담했고, 서아프리카에서도 영국, 프랑스에 의해 30만 명이 동원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이 종식된 후, 식민지에서는 전쟁을 통해 훈련받은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발언권도 커졌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상이 약해짐에 따라 구식민지체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방식의 신식민지로 재편되는 운명에 처한다. 신식민지는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위가 약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또 식민지 체제가 붕괴해가는 제 조건 하에서 만들어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제 정책의 총체이다. 이들 조치는 경제발전에서 뒤떨어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유지 및 확장을 위한 것이다.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해방과정에 있는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 대한 신제국주의 정책의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은 이들 국가들에서 반공정책을 취하는 조건으로 각종 원조를 행했다.
4. 이 시기의 투쟁들
(1) 중국 혁명
중국은 러시아 혁명에 고무되어 민족해방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1921년에는 진독수를 서기장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노동운동은 1922년 이래 고양기를 맞아 1년 동안 3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파업이 100회 이상 일어났다. 국민당을 재건한 손문은 1923년 연소용공의 방침을 결정해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반제국주의 운동은 고양되어 1925년 일본자본 공장에서 중국인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에 항의하는 투쟁이 전개되었고, 상해총공회는 6월 1일부터 노동자총파업 지령을 내렸다. 이후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7월 광동성에서 국민정부 수립이 선언되고,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이 조직되어 북벌을 시작했다.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장개석은 1927년 상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장개석은 1928년에 북경을 함락하고, 동북지방의 군벌 장학량도 이에 가담하여 중국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1927년 국공합작 붕괴 이후 중국공산당은 무장봉기 노선을 취해 3대 규율와 6항주의를 지키며 민중과 공고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혁명 농촌에 의한 도시의 포위라는 전략을 세워 혁명근거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가족 수에 따라 분배하는 정책을 취했다. 공산당은 계속되는 토벌작전에도 세력을 굳건히 하여 1931년 11월 서금에서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장개석은 일본과 싸우지 않고 서금을 공격하여 1934년에 이를 점령했다. 중국공산당은 7월에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 1935년 10월에 대장정을 마치고 근거지를 섬서성 북부의 연안으로 정했다. 1935년에는 일본의 화북 분리정책이 구체화되고, 이에 따라 대규모의 항일민중운동이 폭발했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은 오히려 이러한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전국적인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광범위한 항일운동에 고무되어 국민당도 내분이 일어나 장학량이 내전 정지와 항일통일전선을 원해 1936년 장개석을 감금하고 공산당에 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이 사건이 서안사건인데, 이로 인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멈추지 않았고, 민주적 개혁 세력을 억압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일본군이 점령한 광대한 지역에서 항일 유격전을 조직하고, 해방구를 확장하면서 그 지역에서 항일투쟁과 민주주의의 결합, 계급투쟁과 계급연합의 결합을 강조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실천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국공합작은 1946년 전면적으로 깨지고 내전으로 전환되었다. 공산당이 이 내전에서 승리해서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갔고,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국민 30만 명의 민중 앞에서 주석이 된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2) 프랑스와 스페인의 인민전선
1934년 2월 6일, 프랑스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정부를 강제 퇴진시키려고 국회를 공격하여, 13명이 죽고, 300명이 넘게 부상당했다. 이에 따라 대규모 반파시스트 공동 시위가 일어났다. 불황으로 프랑스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프랑스의 민중들은 우익을 선거에서 패퇴시키고, 경제 회복과 동시에 파업과 공장점거로 답했다. 6월에 6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직장통제, 국유화 등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투쟁을 지도해야 할 프랑스 공산당은 결정적인 순간에 파업을 끝내도록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서 민중정권의 희망은 사라지고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 라발 정권에게 권력을 넘기고 말았다. 스페인에서도 내전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국제적인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의 장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서곡이었다. 스페인에서는 1936년 온건한 진보세력과 사회당에 공산당, 무정부주의자가 가세한 인민전선이 결정되었으며, 인민전선은 2월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인민전선 정부를 조직하고 정치범 석방과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부르주아 정당 출신 각료들로 구성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조직했고, 6월에는 100만 명이 넘게 파업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7월 모로코에서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인민전선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고,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 도착함과 동시에 스페인의 몇몇 도시에서도 군대가 쿠데타에 가담해서 파시즘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 쿠데타의 대부분은 자발적인 노동자계급의 봉기로 패퇴했다. 그러나 프랑코는 스페인 남부의 몇몇 지역을 확보하여 대지주와 자본가 귀족을 모았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과 영국은 불간섭정책을 취했으나, 소련은 이에 인민전선정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그러나 피카소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1937년 4월 게르니카에 대한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힘을 모은 반란군은 방어선을 돌파하여 1939년 3월 결국 마드리드를 함락시키고 말았다. 스페인 노동계급은 프랑코에게 패배했다.
(3)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해방 운동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의 5.4운동, 터키의 근대화운동, 이집트의 와프트 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은 종교적 운동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는 공산당이 지도하는 해방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인도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불복종 대중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집트에서도 반영운동이 시작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0개국 이상이 혁명을 일으켰다. 1930년에는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1921∼37년에 활동)의 지지로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세계흑인노동자대회가 열려 민족해방투쟁의 역군이 된 노동자의 조직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1935년 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 침략과 이듬해 병합에 대한 이디오피아의 저항운동은 국제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1941년에는 이디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가 이끄는 군대가 아디스 아바바에 입성하여 같은 해 전 국토를 해방시켰다.
(4)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
1944년 적군은 소련 영토를 완전 회복하고, 독일군을 뒤쫓아 국경을 넘었다. 폴란드에서는 1944월 7월에 성립한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에 런던 망명 정부의 미코바이티크가 합류하여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2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합당하여 통일노동자당을 결성하여 정권을 확립했다. 불가리아는 독일측에 가담하고 있다가 1944년 전선 이탈과 중립을 선언했다. 9월 대중적인 저항운동을 조직한 조국전선이 소련의 대 불가리아 선전포고와 침입과 동시에 봉기하여 정부를 수립했다. 1945년 11월에 조국전선이 총선거에서 압승하고, 1947년에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런던 망명정부와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 세력이 1945년에 신정부를 조직해서 5월 프라하 해방 후 국민전선이 결성되었고, 1946년에 공산당에 총선거에서 대승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1941년 티토가 총사령관인 인민해방 빨치산 부대 총사령부가 조직되어 독일군 점령에 대항했고, 1943년 11월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회의에서 형성된 유고슬라비아 해방 전국위원회가 전국을 해방시켰다. 1945년 11월 헌법제정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이 압승했다. 알바니아는 1939년 이탈리아 병합 이후 레지스탕스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43년 창설된 최고인민해방평의회, 1944년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회의가 설립되었다. 이것이 임시민주정부의 역할을 맡아 1946년에 인민공화국 성립을 선언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인민운동이 약화되어, 적군해방지구에서 신 정권이 수립되었다. 헝가리는 1944년 데브레첸에서 민족독립전선정부가 수립되어 1949년 2월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루마니아는 1945년 3월 농민전선의 페트르 그루자를 수반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어 1947년 왕정을 폐지하고 사회당 공산당의 합작에 의한 노동자당이 중심이 된 농민전선 등으로 이루어진 인민민주주의전선이 1948년 4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정권을 확립했다.
4. 마치며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를 살펴보면서 몇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이제 우리의 투쟁 대상이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독점자본과 그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이다. 국가는 결코 중립적인 기관이 아니며, 독점자본의 이윤추구를 최대한 보장하고, 그를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고, 그 자체로 독점자본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투쟁이 필연적으로 국가를 향한 것일 수밖에 없고, 최종적으로 권력의 장악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국가'라는 것이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조직하는 완결적 기관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파시즘은 자본주의 과정에서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파시즘을 히틀러의 광신으로 인한 일종의 희극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파시즘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의 극단적인 정치형태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 이탈리아와 일본, 독일에서는 파시즘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파쇼 정권은 오래동안 유지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파시즘 권력 아래 오랫동안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정권이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지 못하면, 독점자본은 위협을 느낄 때 언제나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존하려 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노골적인 테러지배인 파시즘으로 옮아갈 수 있다. 세번째는 케인즈주의가 결코 우리의 대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운동진영 일부에서는 케인즈주의가 우리의 대안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케인즈주의의 핵심은 국가독점자본주의 형성이다. 일자리 창출이라든가, 사회복지제도의 확충은 그 속에서 노동력관리를 위한 부수적인 시책일 따름이다. 그나마 이것도 자본가들의 반발에 부딪쳐 좌절되기 일쑤였다.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환도 자본의 위기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자본가들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지금 신자유주의 공세로 독점자본의 살 길을 모색하고 있는 현 정권에게 케인즈주의적 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독점의 강화를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케인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굶거나 길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일자리 확충이나,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요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주요 요구가 될 수는 없다. 공황의 시기에는 더욱더 공세적일 필요가 있다. 지금 독점자본이 이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강하게 문제제기를 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사회적 통제와 노동시간 단축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공세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일자리 창출이나 사회보장 제도 확충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정권이 모르거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정권의 문제해결 방향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방향으로 문제틀을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케인즈주의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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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본주의발전사(6): 전후 자본주의의 부활
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과정
인류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전쟁은 드디어 끝났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민중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유럽의 가난한 도시 주민들은, 아마도 유럽의 4억 인구 중 1/4 가량은 올 겨울에 굶주리게끔 운명지워져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굶어죽을 것이다. 재앙의 중심지는 여러 곳이다. UNRRA의 책임자인 레만 씨의 말에 의하면, 바르샤바에서 1만 명의 주민이 굶어죽을 것이라고 한다. 헝가리, 특히 부다페스트에서는 기근으로 인한 사망이 거의 100만에 달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특히 비엔나와 오스트리아 북동부에서는 칼로리 섭취율이 하루 1천 칼로리를 밑돌고 있으며, 몇몇 소도시들 예컨대 비네노이쉬타트 같은 곳에서는 주민들이 거의 아사상태를 헤매고 있다. " - 이코노미스트. 1946. 1. 26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재인용)
이 전쟁으로 인해 민중들은 죽고, 다치고, 굶주렸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였던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었던 1930년대의 공황은 자취를 감추고, 미국은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제는 미국의 압도적인 지위 아래 세계경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만이 남은 과제였다.
1.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변화
(1) 선진국들의 세력관계 재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의 세력관계는 완전히 재편되었다.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자신의 이전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프랑스는 전쟁의 피해를 아주 심하게 입지 않아서 강대국으로 인정되었고,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은 자신의 패권을 미국에 완전히 넘겨주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보호하는 상인선단을 잃었고, 미국에서 전시물자를 많이 공급받았기에 그 대가로 해외 재산의 대부분을 넘기고 상당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 전쟁 이후 식량 공급도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유럽은 1946년 40억 달러의 대미 무역적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1938년의 8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대미 무역적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식량과 공산품(특히 수송차량)이었으며, 원료수입은 전전에 비해 1/3정도가 많았다. 이러한 유럽의 상황과는 다르게 미국은 완전한 패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참전국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이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모든 나라들이 독일의 점령으로 크게 파손되고 있을 때에 미국은 모든 산업을 현대화하고 확장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산업생산은 전전보다 50%나 확장되었다. 미국은 전시계약으로 과학적 기술적 연구를 증진시켜 원자폭탄을 생산했고, 자동화를 통하여, 그리고 원자에너지를 이용하여 생산성 증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군사강국임을 입증하고 세계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2) 냉전의 개시
소련은 전쟁 때문에 극심한 타격을 입었는데, 2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전사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소련의 영향은 상당히 확장되었으며, 동유럽에 사회주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소련은 세계에서 주요국으로 부상하였다. 소련과 미국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러시아로 하여금 전쟁을 통해 힘을 가지도록 만든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영국은 히틀러가 등장하도록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다…독일 국민은 민주주의 하에서 러시아보다는 훨씬 나은 동맹자가 되었을 것이다…미국과 러시아는 이데올로기가 너무 달라 장기의 협력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재인용
이 말은 미 국무장관 바이런이 1945년 여름 사석에서 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이 소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3월 12일에 있었던 의회 연설에서 냉전의 개시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촉구했고,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이야기했다. 즉 '극소수 무장세력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한 전복 행위에 저항하는 자유민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체제의 논리는 소련의 팽창주의적 침략이 체제 위기를 불러오는 근원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측면에서 소련을 봉쇄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전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적 재건이 추진되었다.
(3) 신식민지주의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은 제국주의 식민지체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시즘의 주요 부대가 궤멸되면서 식민지체제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 식민지는 정치적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제국주의 국가들은 군사적 방법으로 인도네시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정책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제국주의자들은 새로운 식민지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새로운 전략을 일컬어 신식민지주의라고 한다. 신식민지주의 전략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①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주권국가를 제국주의에 우호적인 군사, 정치적 동맹국으로 바꾸는 것 ②민족해방혁명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 즉 구식민지국의 대부분에 있어 제국주의의 직접 정치지배를 유지하는 것 ③민족해방혁명을 향한 발전과 심화, 그 사회경제적 변혁으로의 성장 전화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신식민지주의적 조치는 경제발전에 뒤떨어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정책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신식민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은 반공정책과 경제지원이라는 무기로 이들 국가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만약 한 구식민지 국가가 대외정책상 중립주의를 표방한다면 그 국가는 즉시 '신용할 수 없는' 국가의 부류에 들어가 미국의 증여와 차관의 축소, 정지 등 여러 가지 제재가 가해졌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 이들 중립국은 미국이 구식민지 및 반식민지에 제공한 경제원조 총액의 10% 미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미국은 군사원조의 100%와 경제원조의 약 90%를 반민중적 대외정권을 지지하고, 장개석, 이승만, 고 딘 디엠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또한 미국은 이들 신식민지를 군사블록으로 끌어들여 동남아시아조약기구와 바그다드조약을 만들어내었다. 미국은 이들 블록에 들어온 아시아국가의 영토 안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그 곳에 그들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들 조약 가맹국이 사회주의국의 남부 국경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방어하는 주요 방어선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구식민지국가에 대리정권을 육성하고, 극우적인 반민중세력을 키우는 것은 신식민지전략의 중요한 요소였다. 구제국주의자들은 여러 가지로 자신의 지배를 신식민지 내에서 강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가능하다면 직접지배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비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베트남, 말레이시아, 알제리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기타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과 지역에서 있었던 유혈의 식민지 전쟁과 토벌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대리인에게 정권을 넘겨주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예를 들어 베트남에서 물러나야 했던 프랑스는 남베트남에 그들의 대리인인 바오다이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는데, 그는 미국의 대리인인 고 딘 디엠에 의해 경질되었다.
2. 세계 경제질서 재편
전후 세계경제 질서는 미국에 의해 재편되었다. 미국은 전쟁에 의한 번영을 전후에도 유지하기 위해 환율을 안정시키고, 자유통상제도를 확립하며, 유럽의 부흥을 꾀했다. 그것은 각각 브레튼우즈 체제와 GATT, 그리고 마셜플랜으로 구체화되었다.
(1) 브레튼우즈 체제의 성립
연합국은 전후 세계의 통화와 금융을 재건하기 위해 1944년 7월에 브레튼우즈에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다. 이 회의 결과 7월 22일 연합국통화회의의 최종 의정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설립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943년 영국의 케인즈안(국제청산동맹안)과 미국의 화이트안(연합국환안정기금안), 그리고 이 두 안의 타협을 위해 캐나다가 발표한 '국제환동맹안' 등 3안을 중심으로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의 성립 과정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대립과 타협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영국의 패배로 귀착되었다. 당시 미국은 37.5억 달러의 차관공여를 내용으로 하는 미·영 금융협정을 체결하는 대가로 영국측의 양보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협정의 결과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도가 채택되었다.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각국의 환율은 이 달러를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환율을 조정하지 않도록 했다. 이 속에서 자유·무차별무역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채무국에 고정 환율과 자유로운 무역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외화를 공급하기 위한 기관인 IMF가 만들어졌다. IMF는 1947년 3월에 발족되었다. 당초 가맹국은 40개국이었다. 당시에는 달러가 원하는 재화를 구입하는 유일한 통화였기 때문에 모든 국가들은 달러를 갖기 원했다. 영국에서 제출한 케인즈 안에서는 미국이 230억 달러 어치의 수출품을 출자하고 그대신 230억 달러의 IMF예금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장기원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통화기금의 규모를 90억 달러로 줄이고, 이 재원은 '회원국의 국제수지상의 불균형 기간을 단축하고 불균형의 정도를 줄이는' 목적에만 허용하게 되었다. 고정된 환율은 일반적으로 유럽 나라들을 미국과의 관계에서 경쟁적이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게 하였다. 그러나 재건 수요를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 초과가 불가피했던 시기에는 이러한 과대평가된 환율은 유럽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미국 공급품들을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국의 부흥과 후진국 개발에 필요한 자본재와 수입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IBRD가 만들어졌다. 이 기관의 자금원은 가맹국의 납입자본금과 세계은행채 발행, 대출증서 매각, 대출회수금 및 이익금으로 이루어지며 대출은 상대국의 개발계획과 채무능력을 엄격히 심사한 이후 결정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30년대 세계시장이 블록주의에 의해 분할·파괴되었던 것을 반성하고 세계경제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이것은 광대한 영국의 지배영역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고, 외환관리를 축으로 한 무역장벽을 철폐하려는 미국의 이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2) GATT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는 국제무역을 자유·무차별체제로 확립하기 위해 형성된 것으로 1947년 봄에 타결되었다. 원래 미국이 제안한 자유무역기구는 미국으로서는 영국의 영향권인 파운드 지역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미국의 제안은 1947년 ITO(국제무역기구)헌장을 통해 국제무역고용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특혜관세의 폐지, 수입관세의 인하를 기본 선으로 하는 이 헌장은 미국 내부의 대립, 영국의 저항, 신흥 독립국의 비판에 의해 유산되었다. 이 때문에 ITO의 하부기관이었던 GATT가 무역 문제의 국제협의기관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GATT는 ITO헌장을 작성했던 제네바 회의에 참석한 23개국 상호간의 관세인하 교섭의 효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규정들과, 관세 인하의 결과 국내생산자가 입을 손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규정들을 ITO의 헌장으로부터 발췌하여 하나의 협정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GATT는 당초 체결국 대외무역총액의 85%를 점하는 국가들이 협정을 수락했을 때 확정적인 효력을 발생하는 것인데, 협정을 수락한 체결국이 하나도 없으므로 GATT는 자신과 함께 작성된 '잠정적 적용에 관한 의정서'에 기초하여 현재까지 잠정적으로 실시되고 있는데 불과하다.
(3) 마셜플랜
마셜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 16개국에 대해 행해진 대외원조계획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행해진 미국의 개별적인 각국별 원조를 유럽의 종합적 부흥계획에 대한 원조로 단일화한 것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RP)이지만, 이 계획을 최초로 공식 제안한 미국 국무장관 마셜의 이름을 따서 마셜플랜이라고 부른다. 마셜은 1947년 6월 하버드대학에서의 연설에서 대유럽 경제원조 계획의 구상을 밝히는 가운데, 이 계획은 '특정 국가나 주의(主義)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아, 빈곤, 절망 및 혼란에 맞서려는 것'이며 '유럽이라는 말에는 영국도 소련도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이 계획이 유럽을 미국자본주의의 이익에 예속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거부했으므로 대상국은 서유럽 16개국으로 확정되었다. 1948년 4월에 미국은 대유럽 경제원조를 실시하기 위한 기관으로 경제협력국(ECA)을 설치하고, 그로써 마셜플랜은 정식 발족되었다. 이로부터 1952년 6월까지 4년 3개월동안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 원조자금의 유입에 의해 달러 부족을 보충하는 동시에 수입달러자금 및 수입원조물자에 해당하는 액을 자국통화로서 특별계정에 적립하여 소위 대충자금을 설정하고, 이 대충자금을 미국과의 협정에 의해 미국의 지시를 받으면서 산업경제부흥에 이용했다. 이 기간동안 마셜플랜에 의한 대유럽 자금공여는 128억 달러에 달한다. 대충자금이란 피원조국 정부가 원조의 증여분에 맞춰 그 달러액과 같은 액수의 자국통화를 특별계정에 적립한 것이다. 피원조국인 마셜플랜 참가국들은 적립액 중 5%(미국정부의 파견기관의 비용으로 충당됨)를 제외한 나머지 95%를 미국 정부의 동의 하에 자국통화의 안정과 경제재건을 위한 용도로 사용해야 했다. 이 적립액은 형식적으로는 적립국의 소유이나 원조국의 동의없이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증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편 마셜플랜에 의한 경제원조와 병행해서 1949년 9월 제정된 '상호방위법'에 의거한 소규모 군사원조가 미 국방성에 의해 행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직접적 군사원조의 증대 뿐만 아니라 경제원조도 전략목적에 종속되었다. 마셜플랜은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으로부터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각국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조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미국상품 특히 잉여농산물에 유럽시장을 보장해주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또한 이 계획의 실시 과정에서 서유럽경제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이후 EEC로 이어지는 유럽자본주의의 통합 계기인 구주경제협력기구의 조직도 마련되었다. 전후 일본의 자본주의 재건도 같은 의미이다. 당초 비군사화, 민주화라는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은 변화하여 1948년 1월 "일본을 반공의 방벽으로"라는 로얄성명에 의해 일본은 냉전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마셜플랜의 결과 서구 각국의 공업생산은 1948∼1950년 사이에 전전 수준을 회복했다. 또한 서구에서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현저하게 후퇴했다.
3. 유럽 좌익의 사민주의 정당으로의 노선 변화
전쟁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많은 희생을 치뤘기에 그만큼 발언력이 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기회주의적 지도부들은 이 힘을 자신들의 정치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고자 했다. 냉전 개시와 더불어 대부분의 공산당은 몰락하고, 노동자의 정당은 사민주의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독일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노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살해되었고, 추방당한 자들도 귀국이 지체되었다. 특히 반쪽이 스탈린 하에서 독일 민주주의공화국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연방공화국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독 노동자들은 1948년 11월의 대파업을 통해 사회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1949년에 열린 독일노동조합동맹의 창립회의는 경제계획, 주요산업의 국유화 및 노동자들을 위한 완전한 자영체제 등을 요구하였는데 1951년에야 파업의 위협으로 광업, 철강업에 대한 공동결정법을 쟁취한다. 그러나 1952년 경영조직에 관한 법률을 위한 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사회구조의 변혁은 무너진다. 그러나 임금인상, 조업시간 단축 및 사회적 향상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사회민주당에 의해 채색된 계급동반자 이념이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의 저항 의지는 사라졌다. 1953년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국민의 정당으로 탈바꿈하겠다고 노선을 전환했다. 패배한 독일뿐 아니라, 영국도 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결국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멀어져갔다. 영국의 경우 체임벌린 내각이 무너지고 1940년 연립내각인 처칠 내각이 들어섰는데, 이 내각은 약간의 지식인의 지원을 받아 사회개혁을 시작했다. 비버리지 보고서에서 온정주의적 복지국가의 윤곽이 마련되었으며, 교육개혁이 시작되었다. 1945년 노동당은 총선거에서 대단한 승리를 거두어 의회에서 절대다수파가 되었다.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변천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았다. 영국은행이 국유화되고, 탄광 및 철도가 국유화되었다. 하지만 이 국유화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으며 소심한 노동당 지도부는 사회의 일정한 개량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 결과 빈익빈부익부는 50년대 들어 더욱 증가하는 추세였다. 다만 프랑스 정도만이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보여준 태도 때문에 나름대로의 영향력과 급진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공산당이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립정부에 참여한 이후로 영향력은 급속하게 삭감되었다.
Ⅱ. 세계 경제의 안정과 지속적 성장
1973년 선진 자본주의국들의 생산은 1950년보다 180%나 성장했다. 이는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성장이었다. 인간 역사상 25년 안에 이보다 성장이 빨랐던 적은 없으리라.
1. 지속적 성장의 요인
1차 세계대전의 상흔에서 벗어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달러 우산'의 안정 아래서 안정과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업생산 신장율은 1950년대 연평균 5.3%, 1960년대에는 연평균 5.9%로 순조롭게 확대되었고, 세계무역도 선진국의 수출 확대와 공업제품의 수출 확대를 주축으로 1960년대에는 연평균 10%에 가까운 신장율을 보였다. 이런 지속적 성장의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로 국가의 경제과정에 대한 개입이 전면화되었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전면적으로 확립되면서 도로나 항만, 건설 등 하부구조 부문, 사회자본 확충, 특정 전략부문의 유효수요 창출이나 직접 융자, 특정 산업의 국유화, 나아가서는 사회보장과 사회개량에 따른 소득재분배 실시 등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국가는 총수요 관리정책을 통해 경제과정 총체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각 국마다 국가의 재정지출의 기조는 조금씩 달랐는데, 미국의 경우 군사지출이 가장 컸다. 1950년대 미국의 군사지출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10%를 넘었고, 60년대에 들어와서는 군산관 복합체제가 미국경제의 기간부분이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산업의 국유화와 사회보장, 사회개량의 지출에 중점을 두었다. 이들 국가는 미국에 비해 변혁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비용을 많이 지출해야 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물적 기반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자원과 원료가 낮은 가격으로 공급되었다. 기술혁신은 항공기, 석유화학, 전자공업 등 새로운 산업분야와 내구소비재 분야, 철강으로 대표되는 중공업분야 등의 광범위한 부문에 걸쳐 진행되었고, 직접적 생산과정, 노동과정의 존재 방식이나 생활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원료와 자원에 대해서는 거의 일관되게 낮은 가격이 유지되었다. 곡물 가격은 턱없이 낮았고, 교역 조건도 공업제품에 비해 점점 악화되었다. 석유시장은 미국와 영국 등이 장악하면서 낮은 가격을 유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산업구조는 석탄 중심에서 석유 중심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기업의 이윤율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로 노동생산성이 크게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때는 노동력의 추가 흡수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던 때였다. 농업노동력이 배출되고, 여성 취업률이 상승하며, 외국인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대량생산 산업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의 고용 확대가 29% 정도 증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생산의 증가가 고용 증가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산 증대의 대부분은 노동자 1인당 생산성 증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1인당 생산성은 연 3.3%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러한 생산성 상승의 원인은 생산수단의 양과 질이 괄목할 만하게 성장했던 것에 있다. 생산수단의 스톡은 1952년에 비해 1973년에는 2.3배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생산수단이 확장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산수단의 대량 폐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을 찾기 힘들어진 자본가들은 낡은 생산수단을 폐기하고, 보다 생산성이 높은 생산수단을 들여놓아야 했다. 이 때는 노동자들의 임금도 크게 상승했는데, 이것은 소비를 촉진시키면서 대량생산된 상품이 창고에 쌓이는 것을 막았다.
2. 지속적 성장으로 인한 변화
이 시기의 성장은 각국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첫째, 안정적 성장과정을 통해 과점체계가 확대되었고, 초거대독점인 다국적기업이 형성되었고, 군산복합체가 중추적 경제지배체제로 등장했다. 록히드, 더글라스, 보잉, IBM, GM 등 거대 기업들은 군사기구와 생산, 기술, 시장, 계획을 결합함으로써 급속히 발전했다. 이것은 유럽으로 파급되어 세계적인 경쟁을 촉진해서 유럽에서도 기업의 집중과 합병이 계속되고, 군산복합체가 창출되었다. 두 번째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이 만성화되었다.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가격에 전이되었다. 국가는 관리통제 하에서 적자재정에 의한 공공투자정책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노동력 공급이나 자원과 원료 공급이 제대로 안되는 때에도 추가적인 성장통화를 공급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도 했다. 게다가 과점체제와 군산복합체들은 가격을 올리기는 하지만 내리지는 않는 하방경직성을 만들어내어 인플레이션 압력을 강화했다. 마지막으로 사회복지 또는 사회개량 정책이 실시되었다. 냉전의 유지와 변혁 세력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마하기 위해서는 사회개량이 필연적이었다. 복지국가는 전후 기간에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복지정책은 좌익정부의 전매특허는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복지지출은 우익 정부들에서도 수행되었다. 이 복지정책은 자본주의의 특성을 다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만들어내기도 하였으나, 복지국가는 결코 빈곤을 제거하지 못했다. 표준화된 빈곤숫자를 토대로 하면 1970년대 초 독일 인구의 3%, 영국 인구의 7.5%, 미국 인구의 13%, 프랑스 인구의 16%가 빈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비용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세금이었다. 복지정책은 호황에 기초해 자본주의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노동관리전략이었으므로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바로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에 대한 공격가 진행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일국적 경제구조의 변화는 자본주의 국가간의 불균등 발전을 낳았다. 호황의 과정에서 EC 통합으로 유럽과 일본의 지위가 상승하고, 미국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이것은 전후 자본주의 세계를 안정시켜온 국제 질서를 동요시켰다.
Ⅲ. 호황의 끝
지속적 성장이 계속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예찬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자본주의는 영속화할 것 같았고, 국가의 개입과 복지국가의 이념은 영원하리라 믿어졌다. 하지만 결국 그 끝이 왔다. 호황은 과잉축적을 낳았고, 그것은 세계대공황으로 연결된 것이다.
1. 경기과열 및 이윤율 하락
전후 자본주의에서 급속한 수요의 증가 및 생산수단의 수요 확대는 이윤율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과잉축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상승하던 이윤율이 1960년대 들어서서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윤율의 하락은 자본가들에게는 더 이상의 생산 확대를 막는 무서운 재난이었다. 이윤 압박의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 축적율이 절정에 달하면서 노동수요가 초고도로 올랐고, 이로 인해 노동자를 구하기가 어려워 임금이 상승하고, 이것이 이윤의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노동강도 강화와 공장 조직 재편은 노동자들의 저항에 의해 효과적으로 확대되지 못했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의 증가도 위축되었다. 또한 국제경쟁도 자본의 이윤율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비가동률도 하락하면서 이윤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료의 가격과 투자재의 가격도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이 이윤율을 압박했는데, 이것은 과잉생산이 현실화되면서 일어난 현상들이었다. 이런 이윤율의 하락과 함께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다.
2. 이윤율 하락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노동자들의 투쟁
정부는 이윤 압박에 대항해 디플레이션 정책과 소득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1963년에 통화정책에 긴축을 가해 1964년부터 경기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1963년 안정화계획으로 실업률이 증가했다. 독일도 긴축정책을 사용해 1966년에는 실업자가 구인수를 초과하기도 했다. 또한 정부에서는 임금을 감축하는 소득정책도 단행했는데, 프랑스는 1964년에 공공부문 임금을 삭감했다. 또한 사용자들은 작업 규율을 강화하고, 공장 단위 교섭에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산별 임금교섭 이후에 벌어지는 공장 단위의 보충교섭에서 보충임금을 삭감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그러면서 1968년과 70년 사이에 파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68년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5월 사태가 있었고, 이것은 3주간 총파업을 촉발했다. 다음 해에는 네덜란드와 독일이 파업에 가담했고,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도 1969년과 70년에 투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파업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높은 수준의 임금을 다시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파업은 대부분 노동조합의 체계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 파업이었다. 이런 파업투쟁의 물결은 자본주의에 균열의 조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완전고용, 사회복지 등으로 상이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결코 성공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3.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석유위기
유럽 각국의 긴축정책에 의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기후퇴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초에 자본주의 국가들이 긴축정책을 팽창정책으로 전환시키면서 1∼2년 간의 미니붐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한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잠깐의 호황이었을 뿐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의 국제 수지는 계속 악화되었다. 미국 기업이 해외에 투자하는 돈은 꾸준히 증가했고, 유럽과 일본의 기업이 미국 시장에 눈을 돌림에 따라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그들이 미국의 시장을 잠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무역적자로 돌아섰는데, 1969년 무역적자는 40억 달러에 달했다. 이미 마셜플랜이나 베트남 전쟁 등으로 달러는 남발되어 있었고, 이것은 금에 의해 달러가 영원히 가치가 고정될 수 없다는 불안감을 부추겼다. 그 결과 달러보다 금을 더 선호하게 되어 금시장에서 투기가 성행했다. 그에 따라 미국의 달러를 유지시켜줄 금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는 금태환제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물론 전후 호황기 국제통화제도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다. 달러가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세계가 그 달러를 획득하는 과정이 달러의 금보증 능력을 감소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달러를 금과 바꾸지 못하게 함으로써 금보유고가 줄어드는 것을 막았지만 이는 달러 부채가 늘어나게 만든 미봉책에 불과했다. 결국 미국은 1971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달러를 평가절하했다. 이제 브레튼우즈 체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73년 중동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이로 인해서 아랍 산유국들간의 연대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이 산유국들간의 카르텔인 OPEC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OPEC은 그동안 저유가 정책에 묶여 있었던 석유값을 인상시키는 데 성공해서 1973년에서 74년 동안 석유값은 4배나 인상되었다. 유가 폭등은 각 나라들이 긴축정책을 실시하는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써, 유가 상승은 수익성을 악화시켰고, 수요를 감소시켰다. 전세계의 구매력의 1.5%가 한꺼번에 OPEC로 넘어갔다. 하지만 OPEC이 이것을 한꺼번에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계의 수요는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OPEC이 1970년대 세계 대공황의 원흉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과잉축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서 유가 인상은 공황에 점화를 한 것 뿐이다. 1974년 여름, 마침내 세계 공황이 시작되었다.
Ⅳ. 마치며
자본주의 시대의 최대 호황과 그 끝을 보면서 우리는 몇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계급타협체제의 문제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에서 기능했던 복지국가의 이상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앤서니 기든스 등 '제3의 길' 주창자들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이념을 다시 꺼내 우리에게 가지고 온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복지국가의 이상이라는 것은 고도의 생산성 발달을 전제로 한 것이고, 이것은 노동의 과도한 착취에 기반한다. 이것은 부의 재분배라는 명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생산과정에서의 권력은 완전하게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으며, 분배 과정에서 약간의 떡고물로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약간의 이윤율 침해가 일어나는 순간 노동자들에게 제공되었던 떡고물은 바로 사라지고, 자본의 계급적 본성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계급타협체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두 번째로는 신식민지주의에 대한 것이다. 유럽의 안정화에 신식민지가 기여한 바는 참으로 크다. 신식민지 국가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압력과 더불어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민중운동을 탄압하면서 냉전 체제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초과 이윤을 실현해왔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오랜 기간 동안 군사쿠데타에 의해 기본적인 인권과 노동자의 권리는 철저하게 탄압되면서 과도하게 착취당해왔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상은 자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임을, 미국은 신식민지 국가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세 번째로 성장이란 노동자에 대한 착취 강화가 핵심이라는 점이다. 노동자의 생산성의 향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을 유지하는 기반이었다. 이 기반 위에서 자본주의는 생성해왔고, 이윤율도 성장해왔다. 자본가들은 노동력에 대한 통제가 이윤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에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생산성의 향상이 노동자 전체의 '삶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이에 대한 통제권과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사용되는가가 중요하다. 생산력 발전이 노동자 전체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생산에 대한 통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정치적 권력 장악이 중요하다.
호황은 길었다. 노동자들은 그만큼의 임금상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호황은 끝이 났다. 노동자들은 다시 이전 상태로 굴러떨어진다. 공황의 시기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성과를 챙겼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시지프스의 노동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공황이라는 파멸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 노동의 성과와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전 인류가 나누게 할 것인가는 우리 노동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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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회> 현대자본주의발전사 (9):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공황의 필연성을 내재하고 있는지, 그러한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이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그 결과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이르렀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사' 기획연재의 마지막으로 자본의 대응이 지금의 파국을 초래하고 있다면 과연 노동자계급의 대안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노동자들은 비록 여러 차례의 패배를 거쳤으나, 자본주의를 뒤흔들 거대한 힘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1. 위기에 대한 자본의 대응과정
자본은 태생적 감각을 가지고 위기에 대응해왔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언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자본은 건재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자본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위기에 대응해왔던 것이다. 물론 그 대응은 자본주의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거대한 힘으로 노동자계급을 짓누르면서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자본주의 성립 초기에 닥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자본은 독점자본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모면해왔다. 1930년대의 공황을 맞이하여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발전시켰고, 2차 세계대전의 생산력 파괴로 장기적인 안정기를 갖게 된다. 이 성장은 국가에 의해 경제과정이 총체적으로 관리되고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물적기반이 존재하고 노동생산성이 증가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안정적인 성장과정에서 과점체제가 확대되고 초거대독점이 형성되었으며 군산복합체가 경제지배 체제로 등장한다. 무기경쟁은 거대한 독점이윤을 창출해왔으며, 그것은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빈곤하게 만드는 국지전과 세계전쟁을 만들었으나, 그러한 전쟁은 거대한 군산복합체의 이윤창출로 귀결되어 지금도 자본주의의 이윤율 저하를 막는 하나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항상적으로 발생하고 사회복지와 사회개량 정책이 확대된다. 이 과정의 결과는 경기과열과 이윤율의 하락으로 나타났고 과잉축적으로 인한 위기가 다시 발생하게 된다. 국가독점자본주의시대에 누려온 장기적인 안정은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 모순들에 의해 또다시 위기를 가져온다. 그것이 1974년 공황이었다. 1973년에 석유위기로 시작된 공황은 만성적인 과잉축적과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의 결과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자본의 전지구화, 세계화이다. 시장의 논리, 경쟁의 논리를 세계 구석구석으로 침투시키고, 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를 항상적으로 만드는 자본의 세계화화 신자유주의 논리가 이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힘이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시키는커녕 점점 계속되는 불안정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목도하는 바 그대로이다.
2. 왜 자본주의는 스스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그렇지만 자본가들은 결코 문제의 해결방식을 찾을 수 없다. 하버드대의 석박사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자본주의의 유명한 이데올로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그들은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착취에 기초한 사회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로 인한 공황의 폭발이 필연적임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의 해결방법을 여전히 착취의 강화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의 대안은 임시방편이고 공황을 지연시키는 역할밖에 할 수가 없다. 그것이 자본의 불행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자본주의 초기에 인구론으로 유명한 맬더스는 공황이 필연적임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면 그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서 빈곤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해낸 대안은 바로 '지주들'이었다. 지주들에게 최대한의 특혜를 베풀고, 그들이 마음껏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굶어죽든 말든,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지주들의 소비를 엄청나게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주들은 부패한 계급이며,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계급이 아니어서 마음껏 소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맬더스의 바람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발전은 지주들을 몰아냈다. 자본가들은 지주들과 같이 부후한 소비계급을 저주하고, 이윤 창출을 위해 투자를 함으로써 생산력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로 인해서 과잉생산을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지주계급의 편에 서있던 맬더스의 바람은 역사적으로 볼 때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1930년대의 공황에서 자본가들은 케인즈주의적 방식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격찬하고, 그를 따랐다. 케인즈주의 정책이라고 하면 국가가 시장의 불완전한 기능을 보완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하고, 그 비용을 국가의 재정정책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항상적 개입을 요구하는 이런 정책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 위기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위기의 해결책은 바로 전쟁이었다. 서구 유럽의 오랜 호황은 2차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생산력을 다시 구축해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환은 국가가 노동력을 관리함과 동시에, 착취의 체계를 보다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70년대 케인즈주의의 파탄 이후 케인즈주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부터 출발한 통화주의-화폐적 금융공황이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을 화폐량의 변화가 경기순환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금융공황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화폐관리 정책을 강조한다. 이들은 통화량이 결국 핵심적이라고 보고, 경제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완전고용을 달성하면서도 물가안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최적의 통화량을 산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적의 통화량 산출은 마치 상상 속에서 완전함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권들은 자본의 이윤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인플레이션 정책을 의도적으로 펴왔고, 현재와 같이 금융시장이 실물경제와 거리를 두고 자가발전하는 상황에서 최적의 통화량 산출이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이론은 어떠한가? 말로는 '시장'의 기능을 회복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이윤창출이라는 자본주의 정언명령이며, 자본주의는 그 명령을 따라 모순을 확대하는 길로 달려간다. 특히 초국적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의 전횡이 세계적 수준에서 진행되는 이때 '시장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독점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모순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며 대안을 마련하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모순, 이윤율의 하락과 과잉생산, 그로 인한 공황의 폭발에는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며, 따라서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항상 헛다리를 짚고 있다. 그러나 방심하지는 말자. 이들이 헛다리를 짚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화살은 항상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거나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에 맞춰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들의 주장에 따라 충실하게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과 착취를 감행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책'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하고, '대안'의 이름으로 노동자계급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위기의 원인을 밝혀내고, 노동자계급의 대안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3. 노동자계급의 대안은 무엇인가?
지금의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더욱 강하게 요구한다. 그것은 자본이 생존해나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노동자들은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상황이 좋아지더라도 결코 그 성과가 노동자들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세계가 온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경제위기는 동일하게 지속되지만, 경제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대응과 자본의 대응에 따라 세계는 변화되어왔고, 지금의 상황은 이미 노동자들의 퇴출과 노동력에 대한 과도한 착취에 기반하지 않고는 더이상 유지가 불가능한 체제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의미에서도 결코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경제위기의 본질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개별로 떨어져 있는 노동자들은 고용위기가 심각해지면 그것이 곧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의 요구에 더 복종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자본의 입장과는 대립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자본주의 사회, 특히 공황 시기에서는 없다. 우리의 대안은 다음 외에는 없다.
- 근본적인 요구로서 생산의 사회화
우리는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던져야 한다. 그것을 '생산의 사회화' 또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로 표현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달은 인류의 부를 고도로 신장시켰다. 자본주의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생산기술을 혁신해왔고, 새로운 생산기술을 발전시켰다. 지금 노동력이 30%가 남는다고 자본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노동을 30%만큼 줄여도 전체 생산이 유지된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미 노동자들이 노동을 많이 하지 않아도 지금의 생활이 유지되고도 남음이 있을만큼 생산력이 발달해있다면, 당연히 그 성과는 인류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 생산력의 발달은 결국 노동자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사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생산력의 발달이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적 정언명령에 묶여있는 한 이 발달은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을 전체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노동력을 폐기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또한 이 정언명령은 '과잉생산'을 낳는데, 결국 발달한 생산력의 성과를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된 일부 생산수단을 폐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공황의 시기에 고용문제가 더욱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처럼 과잉 생산수단에 대한 폐기와 더불어, 공화 시기 자체가 자본으로 하여금 노동배제적 생산기술의 혁신에 더욱 매진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게다가 이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자본주의 정언명령은 직접적인 생산과 분리된 금융자본의 무한한 확장을 가능하게 만들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 전체에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적 경쟁은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광고, 독점 이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할 무기경쟁, 부르주아 정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적 장치들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게 만든다. 자본이 보기에는 이윤추구를 위해 필연적이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발달한 성과들을 비생산적인 곳으로 쏟아붓는 불합리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기에 상황은 더욱 모순투성이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한 이런 불합리는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것을 개선해나가는 대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투쟁의 힘으로 방향을 확 바꿔나가는 대안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산의 사회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이다. 그것은 과학기술 혁명의 성과를 직접 생산자 대중 전체의 재산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경쟁을 지양하고, 생산에 대해 계급대중에 의한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질 때만 발달한 생산력을 폐기처분하기도 하고, 노동의 주체들은 굶주리며, 비생산적인 부분에 무한정 이윤이 쏟아부어지는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 실질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 생산의 사회화가 경제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노동자의 입장을 강화하고, 문제제기를 던질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투쟁을 통해서 쟁취해야 할 요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실질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지금의 생산력의 발달이 노동의 축소를 가능하게 할만큼 발전했음을 자본주의 스스로가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개인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나머지 시간을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 의미 외에도, 현재 자본측이 대다수 노동자를 축출하고 일부 노동자의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제기하는 실천적 요구이다. 노동자들을 분할하려는 자본의 입장에 맞서 우리는 노동공유를 입장으로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 단축 자체로는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될 수 없다. '실질임금 삭감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에야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된다. 그리고 '노동강도 강화 반대'가 결합되어야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된다. 독일의 경우 노동시간이 꾸준히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공유라는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일 노동운동 지도부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철저하게 견지하지 못한 상태로 노동시간 단축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독일은 시간단축과 노동력 유연화를 맞바꾸기 했고, 시간 단축의 전제로 임금 삭감을 수용했다. 예를 들어 폭스바겐의 경우 주4일 근무제를 채택하면서 노동력 유연화를 맞바꾼 결과, 회사측에서 요구하는 작업교대제와 노동시간 유연화가 성사되었다. 그러다보니 규약상으로는 주 4일 근무이지만 실제로는 주 5일 근무를 넘어서게 되고, 직무불안정성이 증대되는 한편, 노동강도도 강화되었고, 임금은 임금대로 삭감되는 결과를 낳았다. 수요 변화에 따라 자본측이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는 시간을 임의로 조정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정규 노동자의 초과노동을 낳게 되고, 일자리 나누기는 것은 명분으로만 남게 된다.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삭감 반대' '노동강도 강화 반대'와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산노동을 축출하는 자본의 입장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노동자 분할 반대 실업자 및 반실업자의 존재는 자본주의 발전에 필연적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실업자 및 반실업자는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켜 고용조건과 임금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생산량에 맞춰 시기 적절하게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업과 반실업은 자신의 일자리를 상호 위협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생존을 파괴하는 조건이다. 고용된 노동자와 실업 및 반실업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를 형성하는 것은 자본주의 착취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저항이 된다. 실업 및 반실업자와의 연대와 투쟁은 고용조건 및 생존 조건을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실업자의 생계를 사회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반실업자와 고용된 노동자 사이의 실질적인 격차들을 없애나가야 한다. 자본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분할시키면서 경쟁을 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우리는 노동자들의 통일성을 확보해나가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실업과 반실업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때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발달한 생산력에 힘입어 최소한의 시간만 노동을 하고, 나머지는 인격의 발달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노동유연화 전략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이러한 반대투쟁은 전세계 노동자들의 연대에 기초해야만 한다. 자본은 이제 세계화되었으며, 한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서 임금이 싼 곳을 찾아서 세계를 휩쓸고 다닌다. 세계 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은 선진국과 후진국, 여성과 남성, 이주노동자와 원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 모두 다르며, 자본은 이러한 차별을 확대하여 노동자들의 경쟁을 세계화시키고 있다. 전세계 노동자들의 공통 이해에 기반한 연대와 단결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칫 자본가들의 경쟁에서 우리 노동자들이 총알받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의 이해와는 다른 전세계 노동자들의 공통의 이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 전세계 노동자 총단결은 그래서 아주 현실적인 구호이다.
4.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대안은 투쟁을 통해서만 현실화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모순에 차 있어도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치유할 능력이 없는데 물리적 힘과 각종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자본주의를 유지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기에 우리는 투쟁을 통해서만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갖는 모순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힘과 가능성을 발견해내며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대안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입장으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것은, 사회 곳곳에 침투해서 사회 전체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 있는 독점자본의 전략에 대한 반대를 포함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지배가 실현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영역들 모두에서 자본의 전략을 폭로하고,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대안을 구체화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각 영역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바로 '정치적 주체'이다. 우리의 투쟁은 당장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급적이며 정치적인 주체에 대한 문제로 발전한다. 우리가 만약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타파하고, 진정 노동자계급의 대안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계급적이고, 정치적인 주체로 세워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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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본주의발전사(7): 자본의 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면화
노동전선 기획단
<들어가며>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되던 선진국의 호황이 정지한 1974년 공황 이래 자본주의는 생산 증가가 둔화되고 있다. 이러한 저성장의 지속은 생산에 대한 투자를 축소시키고 금융체제를 기형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투자의 정체를 낳았고 시장의 성장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축적율을 잠식해서, 그 결과 실업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제상황은 독점자본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축적 경로를 찾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이다. 자본은 노동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이윤율 잠식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공세는 결국 자본의 불안정성을 더욱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뿐이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1974년 공황 이후에서부터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를 검토한다.
1. 1974년의 공황과 자본가계급의 대응
(1) 1974년의 공황과 계속되는 저성장
1)공황의 시작 1973년 겨울에 발생한 '석유위기'로 시작된 1974년 겨울의 공황은 자본주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석유위기는 30여 년에 이른 만성적 과잉축적과 이윤율의 계속적 하락이라는 자본주의 성장의 기본적인 모순을 증폭시킨 셈이다. 60년대 말부터 자본가들은 세계 경쟁이 격화되는 속에서 계속적인 임금인상과 노동자들과의 대립으로 인해서 타격을 입었다. 또한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는 미국 중심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자본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유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석유를 사느라고 산유국에 들어간 돈은 생산 시장에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산유국들은 그많은 석유 달러를 다 소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다른 부문의 상황도 좋지 못했는데, 생산은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은 증가하고 있었으며, 1차 상품가격은 치솟았고, 수익성은 1/3이나 감소했다. 생산에 대한 이윤 감소는 생산 감축과 더불어 자본가들이 생산적인 투자보다는 투기를 통한 이윤 획득으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세계은행체제도 균열되기 시작했는데, 1974년 6월 독일의 최대 민간은행인 헤어슈타트 은행이 외환투기에 따른 손실로 도산했고, 이 도산으로 인해 미국계 은행들을 비롯한 독일의 여러 은행이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 영향은 국제 금융계 전반에 미치게 되었는데, 외환거래량은 수직으로 떨어졌으며 전세계적으로 소규모 은행에서까지 화폐가 인출되었고, 자본의 유동성은 급격하게 커져갔다. 이때 이미 공황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투자의 급격한 감소, 생산의 감축 등 침체로 인해 많은 생산 설비의 가동이 중단되었다. 1975년 가을에 약 11%의 고정 자본에는 먼지만 쌓여 있었다. 선진국의 경우 등록된 실업은 1975년 봄에 1,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보다 실직상태에 놓인 노동자들은 훨씬 더 많았다. 그러한 실업의 고통은 20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현재까지도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을 괴롭히고 있다.
2) 공황의 특징
① 생산은 급속히 감소했으나 높은 인플레이션이 유지되었다. 1974년 5월에서 12월 말까지 광물가격과 금속가격이 30% 하락했고, 식품가격도 1974년 11월부터 1975년까지 33% 하락했다. 그러나 1974년 여름부터 인플레이션은 완만해졌지만 전체 물가는 깊은 침체기 동안 매년 10%씩 계속 상승했다. 즉, 경기의 침체(stagnation)와 물가상승(inflation)이 공존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세계대전 후 완전고용과 경제성장의 배경이 되었던 팽창 위주의 경제정책, 그리고 주로 독과점 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물가의 경직성―한번 오른 가격은 다시 내리지 않는 것, 그리고 자원공급의 불안정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유지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생산성 증가가 둔화되고, 통화량 증가가 둔화되면서 생산의 증가가 현격하게 둔화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를 스태그플레이션이라 하며, 70년대 이후의 공황은 이런 형태로 지속되었다.
② 공공부문에 거대한 적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로 인해 세수가 줄어들어 정부 수입은 감소한 반면, 실업수당이 증가해 정부 지출은 증가했다. 만일 정부가 이러한 적자를 감수하지 않았다면 침체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에서 오일달러를 저축하면서 세계적으로 투자는 급속히 감소했고, 이로 인한 수요의 급속한 감소를 선진국 정부의 적자운영으로 부분적이나마 상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공공부문에 대한 예산 적자가 커짐에 따라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29년 대공황의 극복과정에서 일반화된 공공부문의 확대와 사회복지의 확대는 재정 적자폭을 늘려놓았다. 그런데 1974년의 공황을 거치면서 대규모의 정부 적자를 통해 수요의 급속한 감소를 메꾸는 것은 한계에 봉착한다. 국가는 더 이상의 적자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부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와 공공부문의 확대를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었다.
3) 공황의 결과
공황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이윤의 급속한 감소였다. 중요한 생산 투입 요소인 석유의 대폭적인 가격상승과 뒤이은 공황의 심각함으로 인해 이윤율의 즉각적인 하락은 불가피했다. 주로 유가상승으로 선진국의 교역 조건은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이윤과 임금으로 귀속될 수 있는 재원 중 0.5% 가량이 감소했다. 공황은 또한 생산성을 약간 하락시켰다. 이윤 몫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1973년에서 1975년까지 연간 1% 가량의 실질임금 하락이 필요했다. 결국 높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으로 인해 과거 5년에 비해 실질임금 성장률은 반감했다. 또한 공황으로 인해 초과설비가 늘어남에 따라 생산/자본 비율도 평균 1/10정도 하락했는데 이 상황들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가 이윤율 폭락이었다.
(2) 선진국의 구조조정
1) 산업구조의 전환
자본은 새로운 위기를 맞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을 모색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제조업생산이 축소되는데 제조업은 1973년 이후 타부문 생산 증가율의 반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제조업 고용이 매년 2%씩 떨어지면서 실업증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탈공업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로, 서비스업의 급속한 성장이 일어나게 된다. 투자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소비의 창출을 위해 상대적으로 서비스업의 고용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서비스업 고용의 성장은 노동시장에서 물러났던 기혼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다시 인입시키면서 노동시장의 유연화(파트타임)를 강제하는 힘이기도 했다. 셋째, 선진국을 중심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계속적인 이윤율 하락을 경험한 독점자본은 새로운 산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게 된다. 제조업은 노동비용(임금)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이전시키면서 중요한 기술력은 여전히 소유한 채 적절히 개도국들을 통제하고, 선진자본은 첨단산업, 이른바 우주항공산업이나 정보통신산업 등의 고부가치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게 된다.
2) 생산방식의 변화(포디즘에서 도요티즘으로)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 보면 노동자들은 콘베이어벨트에 서서 전체 작업 공정 중에 한 부분만을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이러한 기계적인 체계를 일컬어 포디즘이라 한다. 그러나 60년대 말 이후 산업예비군이 고갈되고, 이렇게 노동자에 대한 소외가 극도로 강화된 작업조직체계에 대한 노동자의 반발이 커지기 시작한다. 1972년 제너럴 모터스사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70년대 초반 작업조직에 대한 통제권을 쟁취하기 위한 이탈리아 피아트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70년대 이후 작업장의 변화가 찾아온다. 그것은 일명 도요티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생산방식이다. 하지만 이 생산방식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서 우수하게 노동자를 쥐어짤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도입된 것이다. 이러한 도요티즘의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포디즘은 표준화된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체계이다. 하지만 도요티즘은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이다.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관련된 수많은 모델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적기생산 방식이 도입되면서 노동자들은 노동강도 강화를 경험하게 된다. 일하는 과정에서의 유휴시간을 없애고, 노동자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서 자동생산 라인의 효율성에 기여하도록 만들었다. 도요타는 "이미 다 짜낸 레몬으로부터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교묘하게 짜내는 세계에서 첫 번째 가는 기업이다"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생산방식은 우리 나라에도 '신경영전략'의 이름으로 도입되어 기업문화전략, 임금체계 개편과 함께 노동력에 대한 과도한 착취와 노동자분할 통제라는 실체를 드러낸 바 있다.
(3) 초국적 금융자본의 발흥과 제3세계의 성장
1)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확대
초국적 금융자본은 석유위기로 인해, 그리고 1973년 들어 선진자본주의 사이에 당시까지 통하던 고정환율제도의 붕괴, 즉 브레튼우즈체제가 몰락하면서부터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 후 약 30여 년에 걸쳐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온 기업들과 거대한 은행들은 각국 정부와 국제협약(브레튼우즈협정)을 장애물로 느끼게 되었다. 그로 인해 미국, 서독, 캐나다, 스위스 등에서 이미 1970년부터 국제적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지 않았다. 자본의 국제 흐름을 통제하고자 하던 나라들은 매우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고 이들 나라의 독점대기업들은 이자율이 낮은 다른 나라 자본을 쉽사리 빌려올 수 없었다. 마침내 영국은 1979년 자본이동의 제한을 철폐했고, 일본은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제 변동환율제의 도입으로 자유로워진 금융자본은 국가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오일달러의 유입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자금력을 더욱 확대했다. OPEC 국가들은 확대된 수입의 대부분을 미국 및 선진국의 은행에 저축했다. 그리하여 초국적 금융자본은 자본이동의 제한도 철폐되고, 자금 운용력도 크게 높아지면서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중요한 힘으로 자리잡았다.
2) 제3세계의 성장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 이후 달러의 급격한 절하와 변동환율제의 도입으로 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을 비롯한 유럽선진국으로부터 빠져나온 자본들이 금융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금융적 흐름의 형성은 선진국의 산업구조조정과 맞물리면서 새로 개척되는 고부가가치 산업에 투입된다. 동시에 산업구조조정의 결과로 3세계가 제조업의 투자처로 각광을 받게 된다. 60년대에 선진국들과 저개발국들은 축적속도가 거의 비슷했다. 1960년과 1973년 사이에 투자는 각각 연간 6.2%와 7.6%씩 성장했다. 1973년 이후부터 70년대 말까지 이 패턴은 변모하게 되었다. 즉 선진국에서는 1973년에서 1979년까지 투자 성장률이 정체해 있었던 반면에 저개발국의 경우에는 연간 10.7%로 뛰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총투자 중 저개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3년 16.5%에서 1979년 23.3%로 상승했다. 70년대 초반에 저개발국이 이룩한 축적률은 선진국들에 비해 엄청나게 빨랐다. 또한 신흥공업국들 중 OPEC은 수출 소득의 엄청난 증가를 통해, 그리고 NICs는 급속한 축적을 통해 수출을 증가시켰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로 지칭되는 동아시아 4개국의 급속한 축적은 선진국의 산업구조조정에 의해 제조업이 제3세계로 이전한 결과이다. 오일달러가 유입되면서 엄청난 양의 자본이 남게 되고, 이 금융자본이 제조업부문의 새로운 생산기지로서 임금비용이 엄청나게 싼―당시 한국의 임금비용은 미국의 5%에 불과했다―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새로운 투자처로 제3세계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 1980년대 이후
공황을 지나면서 더욱 강력해진 다국적 기업(독점자본)과 초국적 금융자본은 이제 한 국가의 범위를 넘나들 뿐 아니라, 세계 체제 전반을 자신의 활동에 알맞게 재편하고자 한다. '케인즈주의'의 한계를 주장하고, '시장'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이윤율 하락에 대응하여 노동력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통해 독점자본의 살 길을 모색하려는 새로운 자본의 전략인 셈이다. 이 장에서는 '독점자본의 탈조절, 노동조합과 임금공격, 과학 기술혁명의 가속과 생산의 유연화, 자본 자유화'로 이야기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 살펴보고, 그 신자유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신자유주의의 등장
전후 호황기에 확보되었던 노동자들의 권리는 70년대 말부터 침탈당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독점자본의 요구에 따라 더 이상 고용, 생활수준, 복지 서비스를 기존의 수준으로 유지하기를 거부했다. 정부와 노조 모두는 시장 매카니즘의 자유롭고 효율적인 작동을 방해해 위기를 불러오는 주범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와 노조의 역할을 축소하자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러한 대표적 사례가 영국의 대처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의 정책이다. 1979년과 1980년에 각각 등장한 보수당의 대처와 레이건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요 기조로 내걸고 당선되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노동력 유연화, 자본 자유화, 규제 완화 등을 기치로 내걸었으며, 그런 정책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현실화시켰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본래 이론적인 의미에서 1930년대 독일에서 W.오이켄에 의해 발전하여 2차대전 종전 후 구서독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론으로 발전한 경제사상을 지칭한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 경제, 정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흐름을 주요하게 살펴볼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사회적 관계를 재편하고 그에 종속시켜 자본운동의 자유(=자본 축적의 자유)를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총체적인 이념이자 운동을 말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경제개입과 사회복지 등의 재분배는 오히려 경쟁을 통한 자본운동을 저해하는 요인이며, 또한 통화의 증발 등으로 인해 물가상승과 비효율구조를 낳게 한 원인이라고 본다. 따라서 시장경제원리를 최대한 살려 그속에서 자본운동을 활발히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사회적 관계를 재편, 종속시킨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공격은 물론 환경, 여성, 교육 등 모든 부문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한다는 의미이다.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주창자들로는 미세스, 하이예크, 프리드먼 등이 있는데 이 중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에 있어 위대한(?)공헌을 한 사람이다. 프리드먼은 케인즈적 정책에 의한 통화의 증발은 물가의 상승만을 야기할 뿐이라는 견해를 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하였다. 이로써 케인즈주의적 견해에 따르는 정책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불균형만을 심화시킬 뿐이라는 결론을 제시하였으며 시장의 원리에 따르는 자본의 운동이 그 대안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하였다.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원리에 따라 국가에 의한 경제개입행위와 규제가 혁파되어야 하며 공기업을 시장경제의 원리에 맞게 민영화해야 하고, 저효율구조를 재생산하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기타 시장의 원리에 위배되는 모든 요소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시장경제원리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자본운동의 자유화, 이윤축적 구조의 자유화를 의미하며 이를 위해 국가의 경제개입은 없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국가의 경제개입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짚어야 한다. 과연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는 결코 시장경제 혹은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재생산과정에 대한 국가 개입의 형태와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국가가 노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며, 자본운동의 자유와 안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2) 노동자들의 패배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전일적 관철
신자유주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노동조합은 큰 도전에 직면했다. 자본이 추진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노동에 대한 공격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과 정부·자본과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대량실업이 시작되면서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떨어지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노조원들이 꾸준히감소했는데, 미국은 1970년의 31%에서 1985년에는 18%가량만이 조직 노동자였다.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매년 1% 가량의 비율로 노조원이 감소했다. 노동조합은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래의 표에서 보듯 미국과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파업일수가 증가하였다.
*공업 및 수송 분야의 노동자 100명당 연간 평균 파업일수 (1935년-1987년){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재인용
정부와 자본의 입장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자들의 저항을 깨뜨리고 힘의 우위를 장악해야 했다. 결국 노동자를 한편으로 하고, 정부와 자본을 한편으로 하는 한판 승부는 필연적이었다. 이 한판 승부처가 된 곳은 이탈리아 피아트사 파업, 미국의 항공관제관 파업, 영국의 광부 파업 등이었다. 이 승부처에서 자본가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서 노동조합 측은 임금협상과, 노동력 유연화, 작업장에서의 권한 등에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탈리아 노동운동에서 규모나 상징성 때문에 피아트사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79년 가을 피아트사는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피아트사는 십장을 모욕하고 태업을 했다는 이유로 61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작업장에서의 권한이 노동조합에서 십장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정리해고의 전초전이었다. 노동조합은 1980년 8월에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에 돌입했는데, 33일간의 파업에서 패배하고 2만3천명의 해고와 잉여노동자 전출을 수락해야 했다. 파업 과정에서 그동안 조합원들로부터 모욕을 많이 당해왔던 십장들과 공장 경영자들이 파업 반대행진을 조직했는데, 예상을 뒤엎고 일반 조합원을 포함한 4만여 명이 노동조합의 노선에 반대해 행진에 동참했다. 피아트사의 이번 일은 피렐리, 알파 로메오, 이탈사이더 등과 같은 다른 큰 회사의 노동자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항공관제관 노조(PATCO)의 투쟁이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 때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입후보할 때만 해도 전문 항공 관제관 노조와 친근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선된 후 10개월 만인 1981년 8월 3일에 레이건은 이 조합의 노조원 1만1천명을 모두 해고했다. 그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새로운 직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노조 지도자들은 수갑을 찬 채로 수감되었다. 노조 지도자들에게 적용된 법은 바로 국가반란죄였다. 파업기금도 몰수되었고, 노조에 파업기간 동안 매일 백만 달러씩을 물어내도록 명령했다. 연방노동부는 조합의 패쇄 결정을 공표했다. 미국의 항공사들은 50% 가량의 초과설비와 신생 할인 항공사의 가격 인하 경쟁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 감축 계획을 세우고 손실을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노조원들에 대한 해고를 감행한 것이다. 파업에서 패배하고 나서, 새로 고용된 항공 관제관들은 노동 쟁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조항에 서명을 해야 했다. 파업 중인 항공관제관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항공과 항공기제조산업 노동조합은 운송을 중단하고, 정기항공편의 운행을 중지하고, 승객의 출입관리업무를 중지하며, 전국적인 1시간 작업거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노조인 AFL-CIO의 지도자들은 그들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항공관제관들의 파업과 연대파업은 깨지고 말았다. 자본가들은 파업파괴자 조직을 만들어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했고, 미국 정부는 이러한 파업파괴자들을 공인했다. 미 정부는 PATCO를 처리했던 방식대로 다른 공공 노동자들을 위협했다. 이에 편승해서 일반 사기업 부문의 자본가들도 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임금이 삭감되고, 작업규칙이 강화되었다. 또한 신기술 도입 뒤 작업 시간 조절과 인원 배치에 있어 정부가 주도력을 발휘하면서 노동자들은 작업속도의 증가에 시달려야 했다. 1981년에서 85년 사이에 미국에서 임금은 3.5%나 감소했다. 이처럼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항공관제관 노조의 파업을 철저하게 깸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재편전략을 거침 없이 추구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영국에서도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1984년에 수지가 맞지 않는 5개의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석탄산업의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영국석탄공사(BC)는 재정손실을 계속 만드는 갱을 폐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역 전체가 갱에 의존해있기 때문에 갱을 폐쇄할 경우 지역사회는 필연적으로 황폐화한다.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될 경우 지역의 다른 곳에 취업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파업을 통해 필사적으로 갱 폐쇄를 저지하고자 했다. 영국 정부는 이 탄광 파업을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를 진행했다. 보수당 정부는 먼저 석탄 재고량을 확보하고, 화력발전소가 석유를 사용하도록 개조를 했다. 그리고 갱 폐쇄의 가능성이 낮은 노팅엄 탄광을 중심으로 작업이 계속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파업이 시작되자 효과적인 피켓팅을 저지하기 위해 전례 없는 경찰력을 동원했고, 결국 1만1천명 이상의 광부들을 체포했다. 새로운 고용법을 만들어 노조재산도 압류했다. 그 결과 노조는 파업에 돌입한지 1년만에 패배하고 작업에 복귀했다. 그 여파는 참혹했다. 노조의 교섭력은 약화되었고, 파업종결 이후 4년 동안 갱의 반 정도가 폐쇄되었고, 신기술 도입에 따라 11만 5천명이 직장을 잃었으며, 생산성이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보수당 정부는 반노동조합법을 도입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정부에게 노조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폭넓은 권한을 주었다. 이렇게 대표적인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잇달아 패배하면서 정부와 자본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거침없이 시행하기 시작했다. 유럽 곳곳에서 신기술 도입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해고가 지속되었다. 독일의 경우 6주간 파업이 지속되었던 철강 산업에서 자본가들은 자동차 부속품 생산공장의 파업에 대해 다른 공장 노동자들까지 해고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력의 유연화가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고실업과 노동강도 강화, 그리고 노동조합의 약화 속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3) 신자유주의의 내용과 특징
1) 신자유주의의 특징
신자유주의는 영국에서의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이들 나라에서 전면화된다. 여기에서는 영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본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전술은 지배계급의 보수화로 나타났으며 이를 반영하여 1979년 영국에서 보수파의 당수 대처가 집권을 하게 된다. 대처의 집권은 1970년대 후반 집권한 노동당의 분열과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른 IMF 구제금융의 도입, 1978년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 실패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대처리즘은 정부개입을 축소하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성격을 강화하였으며, 정책적으로 긴축재정, 민영화 정책, 노동조합 활동 규제를 실시했다. 특히나 노사관계에 대해 강력한 노동조합의 힘이 경제침체의 주요인이라고 인식하여 노동조합법을 개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던 런던대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대의회를 분할하였으며, 포클렌드 전쟁을 일으키는 등 제국주의적 성격을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주요 내용과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① 노동에 대한 공격 : 노동시장의 유연화 신자유주의는 우선적으로 노동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통해 그동안 계급타협으로 인해 일정하게 유지되어왔던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과 사회.정치적 위상을 파괴하고 격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한 시도들은 다양한 부문에 걸쳐 행해지게 되는데 먼저 노동자배제전략을 들 수 있다. 대처는 영국병의 원인을 노동조합에 돌리며 노조를 공적(공공이익의 적-사실상 자본의 이윤축적의 적)으로 규정, 초토화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영국의 경우 73년 스웨덴의 노동시장정책을 본따서 만든 노사정 3자참여의 '인력관리위원회'가 있는데, 1987년에는 노동조합을 배제하고 지방경영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지방훈련위원회'로 이 조직을 개편한다. 뿐만 아니라 고용정책에서도 노동조합을 배제하는 등 모든 정책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참여를 배제하여 일방적인 노사관계를 안정화시킨다. 이것은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활용하여 대중적이고 합법적인 토대를 형성하면서 진행된다. 또한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하기 위한 법.제도적 개악은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난다. 대처는 우선 단체행동권을 제약하고 연대파업과 같은 2차 단체행동을 금지하고, 조합원의 파업거부권을 법으로 명시하였다. 또한 93년에는 단체행동에 의해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노동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제정하고 법개정을 통해 단체행동에 돌입하기 1주일 전에 사용자에게 단체행동의 범위와 기간을 통보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한다. 또한 노동조합의 유니온 샾의 폐지와 노동조합비 원천공제체계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 정규노동의 최소화와 파견제, 시간제, 정리해고제를 도입한다. 이를 토대로 대처정권기인 80년대 중반 '브리티시텔레콤'이 민영화되면서 6만여 명의 해고자를 양산하고 90년대 들어 80년대 말 30만 명의 규모이던 것을 10만 명 규모로 축소하기도 하였다.
② 규제완화, 개방화, 민영화 : 독점의 강화 및 초국적자본의 활성화 노동에 대한 공격의 전면화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각종의 규제를 완화하고 자본운동을 자유화한다. 이러한 자유화와 규제완화는 시장의 완전경쟁을 통해 인위적인 독점을 규제하는 반면에 시장질서(약육강식)에 의한 세계적인 독점을 조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그동안 미미하나마 독점자본의 운동을 저해했던 모든 법적, 제도적 장치를 일소해나가게 된다. 즉 이윤을 축소시킬 수 있는 모든 것―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고용안정을 이룩해야 한다거나 하는―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의 연장선에 자본시장의 개방화가 있다. 이는 80년대 중.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해 각종의 상품, 자본, 용역의 국가간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는 이유로 전세계적으로 강요되고 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등등의 국제기구들은 이를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기구들은 각종의 압력수단과 제3세계의 외환자금 필요를 악용하여 개방화를 강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초국적 독점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개방화의 특징과 함께 신자유주의는 국.공유기업의 민영화를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앞서 예를 든 영국의 브리티시텔레콤과 같이 국.공유기업에 대한 민영화를 통해 자본의 운동을 더욱 활성화한다. 국.공유기업에 대한 민영화에 있어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국.공유기업이 가진 저효율구조를 없애고 경쟁을 통한 합리화,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민영화의 목적은 효율성이나 비합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세금을 재원으로 하여 키워왔으며 산업구조의 변화로 고수익 사업으로 변한 국.공유기업과 그 수익을 독점자본이 사유화하는 데 있으며 이는 곧 독점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개방화나 민영화는 기존의 규제를 완화하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결국 독점자본의 강화 및 초국적자본의 활성화를 위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③ 모든 복지부분의 공격과 파괴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식의 복지국가형에 반대한다. 복지국가라는 것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임금수준을 상당 정도 높게 유지하게 되고 그만큼 자본의 이윤을 압박하게 된다. 전후 자본주의는 복지국가의 틀로 안정적인 소비 수준을 확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시켜왔다. 하지만 이윤율 압박이 가중되면서, 노동자계급에게 돌아가는 이윤손실분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동안의 사회복지적 요소들을 공격하고 파괴하게 된다. 계급타협에 기반한 것이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것이든 그 성과물들은 모두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실업보험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감축되며, 공공고용 창출을 위한 정책도 저임금 일자리를 의무화하면서 자본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복지부분의 공격과 파괴는 노동자계급의 임금수준을 대폭 삭감시키고 사회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임금 외 부분의 소득을 사라지게 한다.
2) 신자유주의의 결과
이와같이 신자유주의는 계급타협을 부정하고 강제적으로 계급운동에 대한 파괴를 통해 계급운동을 소멸시켜 나간다. 이는 자본운동의 자유화를 통한 이윤축적 구조의 안정화라는 독점자본의 옹호와 강화라는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경제위기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노동자계급에게 떠안기고 있는 것이다. 계급운동의 소멸이라는 것은 실제로 영국에서 신자유주의정책 이후 노동조합운동의 상황을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우선 노동조합 조직률을 보면 1979년 1,350만 명으로 최고수준이었던 조합원 수가 1995년에는 620만 명이 감소, 730만명에 머물고 있다. 조직률 53%에서 32%로 하락한 것이다. 유니온 샾 적용의 감소를 보면 1980년 520만 명에서 1990년에는 30∼50만 명으로 감소하였고 1990년 이후에는 제도 자체가 폐쇄되었다. 또한 단체교섭에서 사용자가 노동조합을 단체교섭 상대로 인정하는 비율은 1980년 64%에서 1990년에는 53%로 하락하였고, 단체교섭 적용률도 1975년 77%에서 1994년에는 42%로 하락하였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노동시장의 경우 시간제가 1971년 330만 명에서 1994년에 590만 명으로 증가해 전체 고용인구의 28%를 차지하였고, 임시고용은 1984년 110만 명 중에서 1994년에 14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정리해고제에 대하여도 계속적으로 그 요건이 완화되고 있는데 사업의 중단과 필요성의 감소를 사유로 규정하고 그 입증책임을 사용자에게 지울뿐만 아니라 공장폐쇄시 폐쇄 동기는 사용자의 경영권이므로 법원이 심사할 사항이 아니며, 이 때 자행된 정리해고 역시 폐쇄 사실만으로도 충족된다고 보고 있다. 그밖에 해고절차는 해고사유 통지만으로 가능하며, 정리해고 방침 결정 후 해당자에게 공식 통보하기 전까지의 기간 중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정리해고수당 수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로 인한 노동에 대한 공격은 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을 압박하고, 자본의 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의 투쟁 조건을 확대하며, 자본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마치며>
이 시기의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커다란 이데올로기로 다가와 있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국가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야 하고, 그 위기 극복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세계는 자본주의의 연쇄 고리 속에서 하나의 체제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 나라와 같은 신식민지 국가들은 그 연쇄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한 채 세계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초국적 자본 및 다국적 독점자본의 힘에 의해 강제당할 수밖에 없다. 위기는 일국으로 그치지 않고, 일국적 위기를 일국의 힘으로 극복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을 전제할 때 '국가경쟁력 강화'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등의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를 전일화하기 위한 '한국 안에 들어와있는 국내외 독점자본 내지는 그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노동자계급이 놀아나서는 안된다. 이미 자본주의 자체가 경제위기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음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지금의 경우 초국적 금융자본 및 독점자본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주범이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인 신자유주의, 즉 독점자본의 이윤 추구 논리에 불과한 신자유주의는 결코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무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서구의 경우에서 너무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대적인 고용파괴와 독점의 강화에 대한 노동의 대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미 서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폭로되고 쇠락의 길로 접어 들고 있다. 더 이상 자본은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여기서 자본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은 또다른 노동의 생존권 말살과 파탄만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노동자계급은 대안세력으로 대안사회의 상을 제시해 나가야 한다. 서구의 경우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항공관제관 노조의 파업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과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처참하게 선도적인 노동조합을 짓밟았다. 그러나 노동운동 진영은 총체적 연대전선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개량주의적 지도부들은 연대투쟁을 오히려 가로막았다. 그 투쟁의 결과는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로 나타났다. 우리는 그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 신자유주의적 전략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은 계급적 단결과 강력한 투쟁전선 구축이라는 사실 말이다. |
이 글은 97년 12월 14일 본 연구소와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가 공동주최한 정세토론회 "한국경제의현황과 노동운동의 대응방향"에서 발표한 글임.
현시기 외환․금융위기의 배경과 의의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들어가면서
1.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관한 논의들
2. 위기의 원인과 배경
3. IMF 통제체제와 대응
들어가면서
11월 들어 폭발한 외환․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한국 경제는 지금 파국적인 상황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외환 부족으로 원화의 시세는 위기 폭발 이전인 약 2개월 전에 비해서 거의 절반으로 절하되고, 주식지수는 10년 전 80년대 후반의 소위 '3저 호황' 이전의 그것으로 폭락하였다. 신용연계의 파탄과 그에 따른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 또 그로 인한 화폐핍박으로 중소기업은 물론, 공룡과 같은 재벌로 불려 왔던 거대기업 그룹들조차 줄줄이 도산하고 있다.
'한국에서 은행은 파산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깨고 14개의 종합금융회사가 이미 도산 상태에 빠져 있고, 거대 증권회사들도 파산하거나 파산에 직면해 있다. 정부는 예금인출 사태의 표적이 된, 거대 일반은행인 제일은행과 신탁은행의 파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들 은행에 2조 원이 넘는 금액을 긴급 출자하였고, 거듭거듭 '금융 안정화 대책'을 밝히고 있지만, 곳곳에서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지는 등 금융공황은 속히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각 은행의 경영자들이 모여 기업어음의 만기일을 2개월 연장해주기로 합의하고, 한국은행은 일부 금융기관의 파산으로 부실채권화된 시중은행의 콜자금을 보전(補塡)하고 금융기관의 자금부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12월 12일에 11조 원이라는 거액을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에 긴급 공급하고 있지만, 이로써 사태가 호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사태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대외적으로는 극심한 외환부족으로 자칫 대외지급 불능사태가 예견되어 11월 21일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구제자금을 요청하기에 이르러, 12월 3일에는 아무튼 IMF와 한국정부 사이에 자금의 수수조건에 합의하여 자금의 일부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부족, 외환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IMF가 강요하고 한국정부가 수용한 자금지원 조건이 사실상 제국주의적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어서 자본측과 대중의 위기의식이 공히 높아져 있고, 극히 보수적인 국내의 제도언론들조차 '12․3 국치'니, '정축국치'니, '경제신탁통치'니, '경제식민지화'니 하는 등등의 언사를 크게 삼가지 않고 있다. 우호적인(?) 자금지원을 차단하고 사실상 IMF의 뒤에서 강압적 조건들을 주도한 미국의 정부 및 독점자본에 대한 대중의 분노도 높아가고 있다.
석유류 등 주요 생활필수품을 중심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있고, 연쇄적인 도산과 신규 노동인력의 취업난으로 실업이 증대하는 데에다,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이 현 위기상황을 '정리해고'를 단행할 호기로 삼음으로써 대량의 실업과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절실한 현실로 돼가고 있다. 그리하여 실업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짓누르고 있고, 민중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얼마나 그들의 생활을 옥죌 것인지 짙은 불안과 두려움에 감싸여 있다.
그런데 이 파국은 어떻게 온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따지고 보면 우리 정치인, 기업인, 관료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예측불가능'에서 기인"({조선일보}, 97. 12. 12, '만물상')한다는, 정말이지 상식적으로는 예측도 불가능했던 주장에서부터 국민사치․방탕론, 재벌책임론, 김영삼 정권 및 관료의 무능․직무유기론 등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논의들은 대개는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략적 의도에서, 혹은 대중을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킬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김영삼정권 책임론이 대통령선거 분위기와 얽혀 활발히 주장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사치․방탕론'이, 언제나처럼 권력과 독점자본의 나팔수의 노릇을 하는 교수․기자․기타 사회명망가 등 이데올로그들과 대중언론매체의 위력을 빌려 대중의 순진한 애국주의를 자극하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강화해가고 있다. 말하자면, "모두가 내 탓이요!" 하는 식의 일종의 종교적 참회를 대중에게 강요하면서, 그 '탓'을 보상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각종의 관변단체, 종교단체, 애국부녀회 등의 국수주의 단체, 어용노조, 초․중․고등 학생이 동원되어 '허리띠를 졸라맬 것'과 '이른바 노․사․정 합의와 합심으로 이 난국을 극복할 것' 등등이 결의되고 시위되는데, 거기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가 개재할 공간은 물론 거의 없다.
위기의 원인이나 배경, 그 의의 그리고 향후 전개 전망 등에 대한 이성적인 논의가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관한 논의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부르주아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에게서는 그들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진정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주장에 대해서 간단히 보기로 하자.
① 먼저,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국민사치․방탕론'이라고도 해야 할 주장은 기본적으로는 이성적인 원인 진단이기보다는 원시적 직관에 의존한 주장이고, (일부 순진한(?) 논자의 주관적 의도와 상관없이) 독점자본에 대한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종속과 경제적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주장은, 위기가 '외환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였다는 사실과 기왕에 대중에게 주입된 애국주의 및 '수출 = 애국'이라는 의식이 한데 어울리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보수언론의 주장은 제껴두자. 대신 그 매체가 갖는(혹은 갖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진보성 때문에 잘못된 논의가 더욱 혼란과 해악을 끼칠 수 있는 {한겨레}(이봉수, "한국 꼴 난다", {한겨레}, 97. 11. 26)에서의 논의를 보기로 하자.
{한겨레} 신문의 이봉수 부장은 최근의 위기의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요즘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일도 크게 보면 자만심에서 비롯한 자업자득이다. 집 사치, 옷 사치, 차 사치, 외식 사치, 해외여행 사치 등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이어졌다. 기업의 차입경영과 과잉투자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국민소득 만 달러 시대' 운운하던 정부의 치적 자랑도 너무 앞섰다."
결국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위기의 주원인이라는 것인데, 이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을 일삼은 자들은 그의 글의 앞뒤 맥락으로 당연히 '국민'이다. 그런데, 그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것은 노동자계급이니, 그는 결국 '노동자들의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위기의 주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같은 글에서 "국민도 정부와 재벌만 탓할 일이 아니다"라든가,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가계․기업․정부가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할 때, 그 설교의 주요 대상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이다.
이는 당연히, '임금 동결 = 임금 삭감'이나 '허리 졸라매기' 감수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다만 '보다 설득력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국민도 정부와 재벌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번에 들여오는 구제 금융은 국민저축의 부족분일 따름이다. 국민소득계정에서 경상수지 적자는 다른 나라 국민의 저축으로 메워진다. 국민들은 이제 3~4%의 저성장도 감내해야 한다. 경상수지적자와 인플레를 겪으면서 쉽게 이룩한 고도성장보다 그것이 값진 것일 수도 있다."
이를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한국 노동자계급의 과소비로 경상수지의 적자가 생긴 것이고, 그 부분을 다른 나라의 근검 절약한 노동자계급의 저축이 메우고 있으니 그만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마다 일본이나 미국의 (독점)자본을 배울 것을 설교하는 이봉수 부장다운 주장인데, 좀 다르긴 하지만 여기서도 아전인수격으로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여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려는 그의 가예(家藝)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멕시코는 지난 94년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뼈를 깎는 초긴축으로 95년에는 마이너스 6.2%로 성장률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멕시코가 악몽에서 깨어나는데는 1년밖에 안 걸렸다. 96년에 5.1%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5백억 달러를 받기로 했던 지원금은 절반 정도만 활용했고, 그것도 조기 상환해 나가고 있다. … 칠레 등 다른 중․남미 국가도 경제가 살아나는 곳이 많다."
결국 노동자계급이 '뼈를 깎는 초긴축'을 실행하면 곧 악몽에서 깨어난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가계․기업․정부가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이는 철저히 노동자계급의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고, 또 기업과 정부가 그러한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부장의 이러한 주장은 위기의 원인 진단에서부터 철저히 잘못된 것, 혹은 기만적인 것이고 선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집 사치, 옷 사치, 차 사치, 외식 사치, 해외여행 사치 등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이어졌다"라고 행위주체를 생략하고, 또 '국민'이라는 애매한 말의 뒤에 숨어 얘기할 때, 그는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분수를 모르는 짓'으로 표현했을 때 날아올 반박의 예봉을 피하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려는 아주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장이 "멕시코가 악몽에서 깨어나는데는 1년밖에 안 걸렸다" 운운할 때, 그의 안중에는 물신화된 '경제성장률'만 있을 뿐 대량의 실업과 장시간․저임금 노동, 자본의 횡포와 폭력, 생활의 파괴, 무권리 상태를 강요당하고 있는 멕시코의 노동자 대중은 없는 것이다.
그는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라는 자신의 주장을 장식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자신의 주장에 그럴 듯한 설득력을 주기 위해서, 엉뚱하게도 제1차 대전 후 영국에서의 '금본위제'의 부활(정확히 말하자면, '금지금본위제'(金地金本位制)로의 잉글랜드 은행권 태환제의 부활)을 끌어오는데, 그에 의하면 당시 처칠에 의한(?) '파운드'의 '과대평가', "판단력이 모자라는 결정"이 "한때 영국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유감스럽게도, 일정한 화폐명의 은행권에 법에 정한 금의 일정 분량을 대응시켜 은행권의 가치를 보증하는 태환제 하에서의 환평가와, 국가지폐화하여 그 가치(가격의 도량표준 혹은 지폐가 대표하는 금량)가 수시로 변하는 불환제 하에서의 환평가의 차이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태환제 하에서 외환시세의 변동이나 외환위기의 양태는 지금 이른바 '관리통화제'라고 불리는 불환제 하에서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결코 비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관리통화제를 채택하는 대신에 금본위제를 부활시킴으로써 영국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고 주장한다면, 혹시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지금 주장은 무지․무식을 과시하는 위에서의 선동밖에는 안 된다. 특히 태환제 ― 그가 말하는 '금본위제' ― 에서는 은행권의 가치를 입법에 의해서 일정한 금량과 직접적․고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통화의 '과대평가'라는 개념 자체가 허용될 수 없는 것임을 그가 알 리 없을 것이다.)
주제로 되돌아 와서, 위기의 원인을 '국민'의 '낭비', '사치', 혹은 '방탕' 등에서 찾는 주장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위기가 '외환위기'의 형태로 폭발하고, 또 그것을 수반하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근거를 찾을 것인데, 이는 몇 가지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의 '국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94년 이전의 멕시코의 '국민들', 그리고 지난 여름 이전의 태국․필리핀․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의 '국민들'이 '낭비․사치․방탕'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낮은 소득으로?
둘째, 결국 '낭비․사치․방탕' 등 때문에 국제수지가 적자를 누적하고 이 때문에 '외환위기 → 금융위기 → 경제위기'가 오고 있다는 논리일 터인데, 그렇다면 매년 천수백억 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누적시켜온 일본에서 지난 91년부터 전개되어 오고 있는 금융위기․경제위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는가?
셋째, 일본과 반대로 매년 천수백억 달러의 국제수지 적자를 누적해 오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되어 있는 미국에서 대략 지난 93년도부터 거대한 호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없더라도, 이상의 상반된 예들은 소위 '국민사치․방탕론'이 현시기 경제위기의 원인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② 현경제위기의 원인을 설명하는 두번째 주장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론", 특히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론"이라고도 해야 할 것으로, 이는 한국정부가 IMF에 제출한 "한국경제계획각서"의 제7항 및 제6항에도 표명되어 있는 주장이다. IMF(미국)의 '구조개혁'(restructuring) 강요를 합리화하는 서양 측의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러한 주장에 입각해 있고, 국내에서도 '구조개혁' 혹은 '구조조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논자들이 이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이른바'재벌책임론'도 기본적으로는 이 주장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해외의 이러한 논의는 사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우선 그 가운데 유서 깊고 대표적인 부르주아 기관지의 하나인 영국의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한국, 기적의 종말"(South Korea, The end of the miracle)이라는 특별기사(Nov. 29 - Dec. 5, 1997)를 보면, "문제의 진짜 원인들은 거의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1950 - 53년 후의 폐허에서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하는 데에는 국가 주도의(state-guided) 재벌 지배 경제체제가 아주 잘 기능을 했으나, 지금은 그 체질이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
또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경제학 및 경영학 교수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부르주아 기관지의 하나인 {비즈니스위크}(Business Week)의 컬럼니스트인 루디 돈부쉬(Rudi Dornbusch)도 이 잡지(Dec. 8, 1997)에 "한국에서 구제금융 효험이 없을 것"(A Bailout Won't Do The Trick in Korea)란 글을 쓰고 있는데, 그도 역시 유사한 그렇고 그런 말을 하고 있다. 한 번 인용해보자.
"현재의 은행 및 기업의 위기의 배후에는 한국경제의 몇 가지 근본적 문제점들이 놓여 있다. 국가 개입(Statism)이 생산성을 방해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국가는 일본에나 어울리는 방식으로 경제과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개입은 수십년 전 발전의 초기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획과 간섭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경제적 결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과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 금융 시스템이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중앙정부(Seoul)가 신용을 배정해 왔고, 금융 시스템은 금전등록기에 불과하였다. 오늘날 그 시스템이 완전히 파산하여, 그것을 치유하는 데에만 국내총생산의 15%가 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혹은 근본적 취약점 내지 결함'의 하나로 노동시장의 이른바 '비유연성'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예의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고도성장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또 다른 잔재 때문에도 필요한 구조개혁을 단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군부 지배 정권들은 대부분의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임금의 인상률을 생산성의 상승률 이하로 훌륭하게 억제해 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달래는 한 방식으로, 사용자들은 어떤 노동자가 실제로 도끼로 조장을 살해하지 않는 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법률로 금지되었다. 그 법률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것을 폐지하려는 작년의 시도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위협으로 연기되었다. 그 결과 공식 실업률은 3% 이하이지만, … 취업자 10명 중 한 명은 불필요한 잉여인력이다."
그리고 루디 돈부쉬도 같은 글에서, "민주화로 작업장의 상황이 바뀌어, 수년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으로 생산성에 뒤지는 임금을 받던 상황이 끝나고, 작업장마다 파업만 일어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들이 문제를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진단할 때 그들의 지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 및 금융시장의 전면 개방․자유화 및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강력히 실행해야 하는데,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차기 정권의 강력한 리더쉽에 의문을 표시함으로써 넌지시, 그리고 '미국의' 루디 돈부쉬는 노골적으로 이것이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루디 돈부쉬를 다시 인용해보자.
"한국은 쉽사리 위기를 탈출할 수 없다. 약간의 추가적인 통화절하, 개혁, 부실 은행 및 기업에 대한 보조금, 그리고 대출금을 떠받치는 외부의 구제금융으로는 되지 않는다. 지금의 불명예스러운 정권은 선거에서 패할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권이 극적인 타개책을 내놓아야 한다. 한국은 그 시장을 외부의 참여자들에게 완전히(fully) 열어야 한다. 외국의 투자자들이 혼란을 떠맡아서 오래 동안 미루어 온 기업 및 금융 구조개혁을 비타협적으로 해치워야 한다. 정부도 한국의 기업들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은 추상같아서, 그는 그 글을 "만일 한국이 듣지 않으면, 상업차관의 지불정지(moratorium)가 그 나라와 시장에 이미 배웠어야 할 교훈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가히 명치시대의 일본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나 뱉었음직한 안하무인의 협박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의 진보진영 일부에서 제기되는 '재벌 책임 → 재벌 해체'론도 큰 범주에서는 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론", 특히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론"에 든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IMF나 기타의 해외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그들과는 다른 동기와 목적의식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부는 민중주의적 시각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합리적 기업,' '윤리적 기업(?)' 등을 추구하고 있고, 일부는 '반독점' 전술이라는 문제의식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제국주의적 입장에 입각한 것이든, 민중주의적 혹은 반독점 전술적 입장에 입각한 것이든, 이들 입장들은 위기의 원인을 해명하는 데에 있어서 공통의 방법론적 오류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이 오류를 '한국경제'에 특수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현재 진행중인 동남아나 일본의 위기를 짐짓 외면하거나, 이들 세 부류의 경제유형간의 억지 유사성을 찾고 있다. 이들의 시각에서는 위기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들 세 부류의 경제구조, 특히 금융 및 기업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이 끝내 그렇게 주장하는대야 말릴 방법이 없지만, 결코 올바른 주장은 아니다.
③ 김영삼 정권 무능 및 경제관료 직무유기론에 대해서 말하자면, 중앙은행의 총재가 외환위기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요구하자, "내가 갱제를 뭐 아는가," "장관들에게 일임해 놓았다"며 태평한 대통령, "펀더멘탈(경제기초)은 튼튼하다"는 아집에만 집착한 경제부총리 등을 가진 국민은 확실히 불행하다. 그리고 어쩌면, 대자적 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한 왜소한 계급으로서의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해태와 무능, 그리고 직무유기는 사실상 위기의 양태 및 진행속도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구구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하자.
2. 위기의 원인과 배경
현재 진행중인 외환․금융위기, 경제위기의 원인을 '한국경제'에서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한국경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래야 겨우, '왜 위기가 외환․금융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였는가?' '왜 좀 더 빨리나 좀 더 늦게가 아니라 바로 지난 달에 폭발했는가?' 정도일 것이고, 그것도 자본주의 세계시장과의 관련하에서가 아니면 사실은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위기의 본질은 과잉생산 공황이고, 따라서 그 원인도 세계시장에서의 과잉생산․과잉축적이다.
한국에 한발 앞서서 '위기 = 공황' 상태에 들어간 동남아 국가들이나 91년의 이른바 '버블 파탄' 이후 장기적인 침체․저성장 상태에 있으면서 다시 새로운 '위기 = 공황'을 맞고 있는 이웃 일본 등을 잠시 제켜 두자.
그러면, 한국경제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제수지의 적자 누적과 몇몇 거대 기업군(재벌)의 도산에 따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증인데, 이 양쪽 모두 현시기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극대화된 생산과잉의 직접적 결과이다. 국제시장에서 거의 모든 상품이 과잉상태에 있고,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상품인 자동차, 철강, 메모리 반도체, 석유화학 원료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국내외 시장이 심각한 과잉상태에 있어서 판매 및 수출에 애로가 발생했고, 가격 등의 교역조건이 악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이 국제수지 적자, 이윤 압박으로 되면서 재무구조가 부실하여 이자부담이 큰 기업들을 파산시켜 왔다. 금년 정초부터 한보가 쓰러지기 시작하여 위기가 폭발하기 전까지 기아까지 쓰러지면서 위기를 준비해 왔는데, 이들 기업의 도산의 원인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주력 상품의 과잉생산, 이윤압박, 이자부담 과중이었다.
그런데 과잉생산은 그것이 심화될수록 경쟁을 격화시키고, 이것이 다시 과잉생산을 심화시키는 식으로, 원인이 결과를 낳고 다시 결과가 원인이 되는 파국적 과정을 밟고 있다. 사실 근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전개과정은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 해 온 것인데, 최근 수년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성립하여 전지구적 차원의 '자유무역'이 강화되고, 유럽연합,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등 각 지역의 경제통합이 가속화되는 등의 움직임도 과잉생산과 경쟁의 격화에 대한 독점자본의 대응이자 과잉생산과 경쟁을 격화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멕시코나 동남아, 한국 등의 외환․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 등이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전면적인 시장개방․자유화를 강요하는 것도 그러한 과잉생산과 격화된 경쟁을 반영한 '너죽고 나살기'(dog-eat-dog)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잠시 제켜 두었던 일본에 대해서 보자면, 한국과는 정반대로 매년 천수백억 달러씩의 국제수지 흑자를 누적시키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많은 중소기업이 이윤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기관은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고 신음하다가 속속 도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거대 산요증권(三洋證券)의 도산에 이어 전국 규모 10위의 호카이도타쿠쇼쿠은행(北海島拓殖銀行)이 도산하고, 지난 11월 24일에는 업계 4위의 야마이치증권(山一證券)이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야마이치증권의 도산은 일본자본주의 역사상 최대규모 회사의 도산인데, 그것이 관리하고 있던 투자는 약 1,880억 달러였다. 현재 일본경제가 겪고 있는 경제․금융위기는 참으로 엄청나서, 즉 일본경제의 과잉생산․과잉축적은 참으로 엄청나서, 어떤 경제학자들은 일본의 전체 은행 및 증권회사의 3분의 1이 조만간 야마이치처럼 쓰러지거나 합병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시아의 위기가 과잉생산 위기요 과잉축적 위기라는 라는 사실을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그들이나 그들의 매체는 좀처럼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드물게 그것을 인정하는 기사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지난 11월 10일자 {비즈니스위크}에 실린 "디플레이션의 위협"(The Threat of Deflation)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비록 과잉생산(overproduction)이라는 명확한 표현을 기피하고 대신에 과잉능력(overcapacity)라는 다소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또 불환제인 이른바 '관리통화제' 하에서의 물가와 태환제 하에서의 물가를 무차별적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현시기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과잉생산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결과는 더욱 위험스러운 것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를 인용하자면,
"아시아 전역에 걸친 건축 소동, 미국의 계속적인 경제확장, 그리고 유럽의 경제회복 때문에 모든 곳에서 생산은 소비를 앞서서 내달리고 있다. 소비자의 수요가 아직 강한 미국에서도 이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수년래 처음으로 반도체에서 자동차까지 여러 산업에 걸쳐서 세계적인 과잉능력이 있다. 그리고 아시아가 수출을 늘려 위기를 빠져 나오려 하기 때문에 과잉공급은 더욱더 악화될 것이다. … 결과는, 세계경제가 새로운 시대 -- 디플레이션의 시대를 맞이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점자본 이데올로그들이 제국주의적 야욕에 눈이 어두워, 현재 동남아와 동아시아에서 진행 중인 위기를 강 건너 불인 양하면서, 욕심을 채우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데에 비해서, 위 글의 필자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최대의 위험은 동아시아의 디플레이션(그는 위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채)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세계경제의 다른 지역에 염려가 되는 것은 디플레이션의 압력이 어떻게 확산되느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지적은 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도 정확히 이러한 악순환적 디플레이션이었다. 1929년에서 1933년까지 물가는 매년 10%씩 떨어졌다. 차입금이 과도하지 않았던 회사들도 도산했고, 실업은 격증했으며, 경제와 증권시장은 깊은 혼절상태에 빠졌는데, 그러한 상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서만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10일에는 로버트 사무엘슨(Robert J. Samuelson)이라는 한 칼럼니스트도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지에 "아시아 커넥션 -- 미국인들이 자기만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미국경제에 훨씬 더 위협적일 것"이라는 글에서,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상황과 (1930년대) 대공황의 초기 사이에 커다란 유사점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증시는 세계적으로 폭락했고, 금융위기가 생산과 고용을 위축시켰으며, 정부 관리들은 낙관론을 공언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지금 위기는, 우선 일부의 국가에서 폭발했지만, 세계적 성격․원인의 것이고, 미구에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을 강타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예컨대 지난 10월 27일에 홍콩 증시의 폭락에 자극받아 자본주의 세계의 주요 증시가 폭락하고,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공업지수가 사상 최대폭의 폭락을 기록했을 때, 자본주의 세계는 새로운 '대공황'의 악몽에 떨어야 했다.
10월 27일의 대소동 후 10월 29일에 미국의 연방준비이사회 그린스팬(Alan Greenspan) 의장은 미 하원에서 증언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짐짓 '그 대폭락은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투기를 억제하여 미국경제를 건강하게 하는 유익한 사건'이며 '공황의 근거는 아니다'는 요지의 답변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비즈니스위크}의 기자는, "그린스팬이 그 모두를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일년 내내 그는 '지금 증권시장에는 투기거품이 일어 있어서 결국은 터질 것 아니냐'는 질문 공세를 공개적으로 받아왔다"고 평하고 있다.
상품의 과잉생산 외에 지금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투기적인 화폐자본의 엄청난 과잉상태에 있는데, 주지하는 것처럼 이 점이야말로 동남아와 한국의 외환․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이나 한국은 최근에 여러 가지 이유로 급격히 단기외환차입을 증대시켜 왔는데, 세계시장의 포화 및 과잉생산으로 인한 수출증가율의 둔화로 이들 국가의 외환준비금이 줄어들자 이들 국가는 투기자본의 작전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파국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지금 세계시장의 투기적 자본의 총액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데, 한 추계에 의하면 94년 하반기 현재 약 20조 내지 35조 달러(약 3경5천조 내지 6경1,250조 원)이라고 한다. 당시 최대경제대국 미국의 연간 국내총생산은 약 6조 달러, 93년도 말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G7)의 외환준비가 약 3,600억 달러, OECD 국가 전체의 그것이 약 6,000억 달러, 그리고 세계 전체의 외환준비가 약 1조 달러에 '불과'한 사실로부터, 그들 투기자본의 규모와 위력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투기자본이 이렇게 거대해지는 것은 물론 이미 생산 및 유통 부면도 자본과잉․생산과잉 상태여서 새로운 화폐자본이 마땅히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투기자본의 비대화, 투기의 격화 역시 과잉생산․과잉축적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최근에야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의 은행이나 종금사 등 금융기관과 대기업 등도 동남아 등지에서 무턱대고 투기적 활동을 벌여 오다가 동남아의 외환․금융위기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현재의 외환․금융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데, 이 역시 작년에 특히 국내의 과잉생산으로 이윤율에 심한 압박을 받은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금사 등이 해외의 자금시장에서 상환기간 1년 짜리 단기 외채를 빌려 국내의 업체들에게 만기 5년 10년 짜리 대출을 하고, 리스자금으로 이용한 것 등도 그러한 상황에서의 일종의 투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는 지금 대략 92년경부터 시작된 장기호황으로 득의만면해 있지만, 그 역시 호황의 붕괴가 초읽기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년여만에 뉴욕의 주가지수는 4,000에서 8,000을 넘는 가히 '수직상승'을 한 후에 지금 불안정한 동요를 되풀이하고 있다. 주가의 폭등은 미국 시장이 극도의 포화상태 내지 과잉상태로서 자본의 이윤율이 급락해 있어서 소자본의 투기가 극심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황이 임박했음을 말하는 하나의 고전적 지표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의 미국경제의 비중에 비추어 그 대호황이 붕괴할 때 올 위기가 얼마나 위력적일 것인가는 우리의 안이한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간간이 1930년대를 반추하는 소리가 들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운위되는 것도 결코 예사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그 위기가 조만간 급격히 세계화될 조건의 하나도 투기자본화 되어 있는 일본의 외환 누적분이다. 일본은 80년대 후반 이후 일반적 과잉생산과 '0'에 가까운 초저금리로 은행자본을 포함한 대량의 화폐자본이 유망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식이나 부동산시장에 대량으로 흘러 들어가 이른바 '버블'을 생성시켰던 것인데, 90년대 들어와 버블의 붕괴로 타격을 받고, 많은 자본이 미국과 동남아에 투자되었다. 이른바 "엔이 둔갑한 달러"(円が化けた ドル": {日經ビジネス}, 97. 9. 15, ("過剩生産にあえぎ動搖する世界資本主義 -- 世界同時恐慌の足音が聞ごえる"에서 재인용) )인데, 지금 일본은행들의 해외 융자 잔고의 약 56%가 아시아 투자인데, 그 총액은 약 2,650억 달러이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의 통화폭락의 방아쇠가 되었던 타일랜드는 일본의 다국적기업이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나라의 하나이다. 게다가 타일랜드의 대외채무는 93년 말에 470억 달러였는데 96년 9월에는 770억 달러로 불어나 있었고, 그 증가분의 대부분이 일본은행의 융자여서, 타일랜드의 통화위기가 표면화되었을 때 융자 잔고는 375억 달러였다. 타이에서는 현재 금융기관의 부동산 담보 대출의 약 40%에 해당하는 대략 370억 달러가 불량채권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주요 대출자가 일본의 다이이치긴교은행(第一勸業銀行), 코교은행(興業銀行), 스미토모은행(住友銀行), 후지은행(富士銀行) 등 일본은행들이다.
일본 국내에서의 타격에 더해서 동남아에서 이들 은행이 받고 있는 타격은 조만간 미국 등 다른 곳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고, 이는 곧바로 아시아의 위기를 세계화하는 파이프라인이 될 공산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2월 11일․12일 일본은 또한 저락하는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보유 미 국채(재무성 증권)의 일부를 팔기 시작하고, 그에 때맞추어 세계의 증시는 또 한번 동반 하락하였는데, 그 귀추 또한 주목된다.
정말 과잉생산에 동요하는 세계자본주의의 동시공황의 발소리가 바로 문전에 들리는 것은 아닐까?
3. IMF 통제체제와 대응
위기에의 IMF 개입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상황에 우리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상세한 발제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자.
한국정부가 IMF에 제출한 의향서(Letter of Intent)나 '한국경제계획각서'(Korean- Memorandum on the Economic Program)는 현재의 위기의 근본원인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각서 제7항)이나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각서 제6항)에 있다는 전제하에 한국경제를 철저히 구조 개혁하는 데에서 위기의 극복방안을 찾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부분까지 미치는 지침을 담고 있고, 또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서 1998년 1월 말까지는 2주마다 IMF의 점검을 받고 1998년에는 2․4․7․11월 등 4번에 걸쳐서 분기별 심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각서 제41항). 그 주요 기조는, 긴축재정 및 금융, 부실 금융기관의 도태․정리, 금융․자본․상품시장의 전면적 개방․자유화, 기업의 지배구조의 개선 및 경영의 투명성 확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 등인데, 전형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의 것이다.
지침이 너무나 세부적이고 고압적이어서 한국정부의 '정책' 따위가 끼여들 여지가 추호도 없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다소 이 각서의 현실성을 훼손하는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협상 타결 이후 IMF나 국제 금융독점자본측이 공식․비공식적으로 한국정부의 '합의 이행 가능성' 여부를 문제삼으면서 한국정부와 대중을 길들이려 하는 것도 사실은 그 각서가 너무나 세부적인 데에서 오는 비현실성에 대한 저들의 왜곡된 인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각서가 담고 있는 내용의 문제점은 몇 가지 각도에서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긴축재정, 긴축금융, 고금리 정책, 그리고 노동시장의 유연성 등으로 사실상 대중의 소비수준을 하향 억제하고자 하는데, 현 위기가 사실은 여느 공황과 마찬가지로 과잉생산 위기라 할 때, 그러한 대중소비 억제정책은 오히려 공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긴축정책과 그에 따른 민생압박에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마련인 크고 작은 사회적 저항엔 어떤 대응책이 있는지?
둘째, 위기의 근본원인은 물론 과잉생산이지만, 그것이 현재와 같은 외환위기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데에는 다분히 한국경제 등이 국제적 투기자본에 무대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탓일 것인데, 각서가 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본 및 금융시장의 철저한 개방․자유화는 한국경제와 따라서 민중생활을 더욱더 깊숙이 국제투기자본의 자의에 노출시키는 것은 아닌지?
셋째, 각서 내용대로의 '금융부문 구조조정'이란 다수의 종금사, 은행의 폐쇄를 예정하고 있는 것인데, 결국 금융기관의 무차별 연쇄도산을 용인하던가 의도하는 것은 아닌지?
넷째, 외국인에 의한 종합금융회사(merchant bank)의 소유권의 100% 소유, 외국인의 국내 금융시장 자유 진입 및 금융기관의 자유 인수․합병(M&A), 은행을 포함한 외국 금융기관 자회사 및 현지법인의 자유 설립, 외국은행들의 국내 은행 주식의 자유 매입, 외국인 투자 한도 및 주식 소유 한도의 50 ~ 55%로의 확대 등등은 결국 외환․금융위기를 기화로 한국의 주요 기업 및 금융기관의 소유․지배권을 헐값에 탈취하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등등.
여기서 우리는 IMF의 성격과 임무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IMF는 세계은행으로 불리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더불어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협정의 사물이고, GATT와 더불어 제2차 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 통화․금융․무역질서의 핵심을 이루어 왔다. 그것은 1930년대의 적대적인 블록경제화와 제2차 대전으로 파괴된 국제통화제도와 무역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 지배하에 있었다. 그 내재적 모순 때문에 70년대 초에 붕괴되고 70년대 중반에 개정되기까지 IMF 협정은 일개 국민통화인 미국의 달러화를 금과 동일시하여 모든 가맹국가의 통화를 이 달러에 대해서 고정적으로 평가하도록 하고 있었는데(제4조 제1항), 그렇게 되기까지의 영국의 이익을 대표한 케인즈(Keynes案)와 미국의 이익을 대표한 화이트(White) 간의 첨예한 대립은 국제통화․금융사에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GATT 역시, 당시 물정에 어두웠던 미 의회의 비토로 애초의 국제무역기구(ITO)안에 훨씬 못 미치는 집행기구 없는 협정에 머물렀지만, 영국의 스털링 지역에서의 차별적 기득권을 지우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 철저한 미국 이해 위주의 것이었다).
IMF는 애초부터 그러한 성격의 기구였고, 따라서 이번의 '협상'이 사실상 미국 이익 위주의 프로그램의 강요였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 실제로 이번 '협상'을 사실상 미국이 배후에서 총지휘했고, 그 진행을 감독하기 위해서 재무성 차관보까지 '협상'이 진행되는 호텔에 파견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특히 미국 유학 출신의 경제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일부의 이데올로그, 일부의 지배층은 'IMF 통제체제야말로 미루어왔던 구조조정을 수행할 절호의 기회'라는 식의 발언을 해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특수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기의 부담이 그들에게 떨어지기보다는 고스란히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에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이고 전반적인 대응방안은 별도로 발제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커다란 원칙을 대략 내오는 것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의 대응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가장 충실한 방식과 방향"이어야 한다. 가장 노동자계급적인 대응만이 어려움을 헤치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이번 기회를, 그동안 별러 왔던 이른바 '정리해고', 즉 대량해고를 단행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는 독점자본의 노골적 움직임과 언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동안 별러 왔던 임금을 동결하고 삭감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는 독점자본의 노골적 움직임과 언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당장 대폭적인 기름 값을 올리는 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독점자본의 제1의 대응은 노동자계급과 기타 민중의 생활에 대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은, '경제'니 '국가경제'니 하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독점자본의 번영을 위해서나, 기타 그 어떤 것을 위해서 희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거꾸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경제'니 '국가경제'니 하는 것들이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누가 교활하게도, 혹은 어리석게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고 희생할 것을 설교할지 모른다. 노․사․정 합의 운운하는 어리석고 시대착오적인 설교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교활한 기만책동이요, 무지한 자기희생이다.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과잉생산․과잉축적'이라는 점을 망각해선 안된다.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그들 스스로 어쩔 수 없이 '과잉투자'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 자본주의적 위기의 시대에는 절대적으로, '소비야말로 미덕'이다. 물론 그 궁극적으로는 비극의 전쟁뿐인, 독점자본이 부추기는 '국가주의'․'(기만적) 애국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의 노동자가 연대하여 문제에 정식으로 맞대결해야 한다는 정신에서 말이다. 새로운 대공황의 발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점자본이 '소비의 미덕'을,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를 대대적인 전쟁의 파괴와 살육에서 찾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에서 찾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치열한 고용보장 투쟁, 임금인상 투쟁, (유사시의) 전쟁반대 투쟁이 필수적이다.
이미 보도되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IMF가 강제할 조치 중에는, 긴축재정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일반적인 공격에 더해서, 금융․자본시장에 대한 철저한 혹은 대폭 확대된 개방이 있다. (실제로도 멕시코는 95년의 위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지금 외국자본에 의한, 예컨대, 은행의 완전소유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한편에서는 해외 다국적자본과 한국의 독점자본 = 재벌간의 투쟁이면서 한국 노동자의 잉여노동 및 한국의 자원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권의 확대를 노리는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공세에 대해서 역시, 고용보장, 생활임금 보장을 동반한 노동시간 단축, 기타 노동자․민중의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치열한 투쟁만이 방패로 된다.
독점자본 =재벌과 그 이데올로그들은 노동자․민중을 그들에게 종속시키기 위해서 다국적자본에 민족적 이해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계급적 이해를 찾고, 그를 위해서 기만적인 애국주의를 선동한다.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동시에 민족적 이해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비자금과 정경유착
노태우의 수천 억 비자금 사건이 폭로된 이래 제도정치권의 각 정파는 서로 간에 '너 죽 고 나 살자'는 식의 비난과 폭로로 가히 진흙탕에서 뒹굴며 싸우는 개들의 모습 그대로 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든 은폐된 사실들이 밝혀 지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리고 다 른 한편 에서는 " 이번 기회를 정격유착의 구조를 뿌리뽑아 깨끗한 정치를 실현해 가는 전 화위 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언제나 들리는 유행가도 어김 없이 들린다. 그리하여 '경실 련 ' 같은, 귀에 달콤한 '대안'으로 대중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저지하는 것을 그 사회적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몇몇 시민단체들은 발도 빠르게 토론회, 공청회 등을 열고 있고, 거기에서는 심지어 불과 수개 월 전까 지 권력 의 그늘에 숨 어서 민중을 능멸하던 검사 출신 의 변호사들까지 나서서 추 상 같은 어조 로 '정경유 착'을 질타하 면 서 '깨끗한 정치'를 위한 방략들을 제시 하 고 있다.
비 난 폭로 도 좋고, 질타도 좋다. 그 리고 '정격유착을 뿌리 뽑자 '는 다짐은 더 욱 좋다. 문 제는 과연 그러한 비난과 폭로, 질타 그리고 다짐으로 정말 정격 유 착을 뿌리뽑을 수 있는가이다.
유감 스럽지만, 저들의 요 란한 비난, 폭로, 질타, 다 짐 에도 불구하고, 현 재와 같은 한 국 정치 가 그 명맥을 유지 하는 한 정경유착 이 뿌 리뽑힐 가능 성은 전 혀 없다. 저들이 질타 해 마지 않는 바의 자 본과 의 '검은 유착'이야말로 한 국정치 의 풍토 자체이고 영양분 이기 때 문이다. 그리하 여 자본과 의 '검은 유착'없이는 한국정치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다.
일반적 으로 ' 썩은 정치인' 혹은 ' 구정치 인'으로 치부되는 사람들 은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 다. 자타가 '양심적인 정치인 ', '개혁적 인 세력'으로 공인하 는, 주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 의 행태를 보자. 그들은 오늘날 민자 당으 로, 민주당으 로, 국민회의로, 그리고 극소수이지만 심지어는 ' 유신본 당'을 자처하는 자민련으 로까지 나뉘어져서, 상대방 의 두목들을 비난하 는 방식으로 사실상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아니, 갖은 현실적인 힘과 연합의 논리를 동원하면서, '썩은 정치인', ' 구정치인' 에 불 과 한 스 스로들의 두목의 정치적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사(戰 士)로 나서 고 있다.
민자 당의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누구보다도 앞장서 김영삼 대통 령이야말 로 가장 개혁적 이라 고 주 장하면서 '세대교체', '3김 청산'을 외친다. 김영삼 씨의 대선자금을 밝 히라는 요 구 가 그들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다. '노태우한테서 대선자금을 한 푼 도 받은 바 없 고', '내 임기 중 에는 정치자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 령 의 정치적 주장 이 그들이 딛 고 서 서 상대를 비난하고 새로운 개 혁적 정치를 다짐 하는 발판이다. 그러 한 발판 위에 서의 다짐 이 과연 진실성을 가질 수 있는 것 일까? 심 지어 노태우까지도 현직에 있 는 동안은, 아니 이 번에 용뺄래야 용뺄 수 없는 상황에 처하 기 전까지는 ' 누 구한테 정치자 금을 받았으며, 정 치자금을 받겠다 '고 말한 사 실이 없으며, 오늘 날의 김영삼 대통 령이나 마찬가지 로 ' 그런 일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 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된다'며 '깨끗한 정치'를 다 짐했었다 는 사실을 새삼 상 기시켜야 하는 것이 서글프다.
국민회의 의 운동권 출신 인사 들은 어떤가? "김대중 총재께서 다른 사람도 아닌 광주학살 의 주 범 노태 우한테 서 20억 원 을 받았 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정말 당혹스럽고 고 통 스러웠 다. 그러나 정치생명 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러한 사실 을 고해할 수 있는 선생이야 말로 가장 솔직하고 신 뢰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라는 생각을 이제 갖게 됐다." 이 것이 오늘날 그들이 내 뱉는 말이 다. 그들이 얼마나 황 폐해져 있는 가를 알 수 있게 한 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누구보 다도 열심히 '김대 중 죽이기'에 대항하여 '김영삼 대통 령의 대 선자금 폭 로' 를 위해서 분전하 고 있다.
노 태우 비자금을 폭로하 는 데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민주당쪽의 인 사들은 어떤 가? 그들은 지난 두 차례의 대선과 무관하다고 말한 다. 따라서 그들은 가장 깨끗 하고 떳떳하 다 고 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가장 단호 하게 '3김 정 치'의 청산을 외치면서 '개혁정 치'의 깃발을 높이고 있다. 그 러나 우리 는 그들에게 그들이 소속된 당은 어떤 자금으 로 유지되 고 있는 지를 물을 것까지 도 없이, 그들 스스로가 지난 총선을 어떤 자 금으로 치루었는 지를 물 어보 고 싶 다. '깨끗한' 그들 일수록 치부하지 않고 검은 돈을 받지 않 았기 때 문에 더욱더 ' 중앙당의 지원'에 힘입어서 지난 총선을 치루고 금뺏 지를 달 지 않았던가? 그러면 '중앙당이 지원'한 그 돈 은 어 떤 돈인가? 진정 그 돈, 즉 중앙 당의 그 재 원(財源) 은 '검은 돈'이 아니 란 말인가?
다 아는 사실이지 만, 이전투구에서 분당의 악감정도 있 고 하여 민주당 쪽이 김대중 씨의 20억 원 수수 를 비난하고 나서자 국민 회의 쪽은 김대 중 씨측이 분당 전 민 주 당의 누구에게는 몇 억 을, 누구에게는 몇 억 을 하는 식으로 돈을 주 었다고 폭로했고, 이에 거 론된 당사자들은 명예훼손이라며 길길 이 뛴 적이 있다. 과 연 그 들에게 정치자금과 관련하 여 훼손될 만한 변변한 명 예가 있는 것일까? 그들의 주장인 즉, 국민회의 쪽이 노태우로부 터 받 은 자금을 분배한 것처럼 말하지만, 자기들 은 그 돈, 즉 노태우로부터 흘러나온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 일 것 이다. 실제 그들이 노태우로부 터 흘러나온 돈을 받지는 않 았 을지 모른다. 또 김대중 씨 쪽으로부터 사선(私線)을 통해서 가 아니라 '중앙당' 을 통해서 '지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벌로부터 정치자금 을 안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는", 그리하여 " 가장 솔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인 김대중 씨나 그 진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지금 길 길 이 뛰고 있는 민주당 측의 인사들이 지난 총선 등에서 '중앙 당의 지원'을 받은 이상, 그 돈 은 노태우한테서 받은 것이든 다른 재벌한테서 받은 것이든 차별성이 없는 것 이다. 또 실 제로도 거기에 무슨 차별성이 있겠는 가? 그리하여 '나 만은 깨끗 하다'는 그 들 의 외침이 야 말로 사실은 위선과 거짓 그것이고, 위선과 거짓을 가지고는 위 선과 거 짓의 성밖에는 쌓을 수 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는 한국정치에서 무엇 이 정 치인 들 을 여와 야로, 각 정파로, 각 계보로 나누고 있는가를 볼 필 요가 있다. 그 것은 다 름 아닌 출신 지역과 정치 자금이다. 그 리고 오늘날 제도정치권에서 가장 선진적 이고 양 심적이라는 사람 들조 차 이 지역과 정치자금 에 따른 정 파, 계보로의 분열에 서 자 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 다. '지역할거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 그들의 논 리조 차 사실 은 '지역 할거주의'에 그것도 음험하게 근거 하고 있 고, 지연과 학연 등을 인연으 로 한 정치자금의 수수관계로 계보들 이 맺어져 있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어 떻 게 '정경유 착'이 근절될 수 있겠는가?
그 런데 한국정치에서 의 정경유착에 대해서 말해 왔지만, 한국정 치 에서의 그것은 가 장 저 급하고 저열한 형태일 뿐, 현 대 자본주의 부르조아 정치란, 지역성으로부터 는 몰 라도, 정치 자금로부터는 본래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이른바 정경유착으로부터 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정치제도 자체가 비용이 많이 드는 그것인데다가, 국가권력은 잉여가 치 실현의 중 요 한 기 구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금이 필요한 정치인과 이권이 필요한 자 본의 이해가 서로 맞아 떨어지 면서, 합법적인 형태이건 불법적인 형태이건, 정치자금 의 수수가 이루어 지 고 있는 것이 다.
요즘 미국에서도 '돈 안드는 정치제도'로의 개혁 운동이 한편 에서 벌어 지고 있 는데, 이를 추구하는 미국의 한 의원은 최근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 캠페인(유세)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호텔 방에 돌아오면 으레 연락을 바라 는 20 여 통 의 전갈이 기다리고 있다. 명단을 죽 훑어보면 대개는 누가 누군지 기억할 수 없는 유권자들 이고, 한두 명 만 이 아는 사람인데 그들에게만 전화 연락을 하게 된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들 이란 바로 대개는 재정 후원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의 정치고, 미국의 정치 인들은 그 재정후원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미국 에서 는 정치 자금이 많은 부분 대중적 모금에 의해서 조달되어서 상당히 투명한 것으로 평 가되고 있 고, 우리 정치계에서도 요즘은 그것을 모델로 '후원회'를 조직하는 것 이 유 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위 미 국 정치인의 고백은 그것이 그만큼 투명하지 만 은 않고, 결국 정치 인들은 (은밀하 게 거래되는 '재정후원인'은 문제삼지 않더라도, ' 후원 회' 의) 큰손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 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저급하고 저열한 형태인 정치자금의 불법적인 수수가 문제의 표적 이다 보니 정치 자금 그 자체 의 본 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서 는, "재 벌들이 노태우 한테 갖다 바친 수백억 수천억이 땅에서 솟고 하늘 에서 떨어진 것 이 아닌 바에야 이 것은 결국 우리 노동자들 의 피땀을 착취한 것"이라던, 지난 11월 12일 노동자대 회에서의 이소선 어머님의 말씀을 곰곰히 새겨보아야 한 다. 은밀하고 불 법적인 형 태를 취하건, 선관위 '(지정) 기탁금'이라는 합법적인 형태 를 취하건, 자본으로부터의 정 치자금은 결국은 부불(不拂)의 잉여노동이 자 본의 이익과 이 권을 위해서 건네지는 것이 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아가 정경유착 도 "재벌 등 독점자본과 정치 인 과의 '(불법 적인) 정치자금 ' 수수를 통한 유착"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되어서는 안된 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이러한 정경유착은 그 가장 저급하고 저열한 형태일 뿐이고, 현대자본주의 국가와 정치 그 자체가 정경유착 그 자체라는 점을 상기하여야 한다. 현대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의 모든 정책이 사실상 자본의 이익을 위해 서 기안되고 집행 되고 있으며, 국가 그것이 자본의 이익을 지키고 증 진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정경유착의 근절은 결국 자본에 의한 국가 지배의 극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 고, 그 첫 걸 음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활동을 법률상 그리고 사실상 자유화하는 것 이다. 그 런 데 오 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 활 동은 법률에 의해서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 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 정경 유착의 근절'을 외쳐보았 자 그 외침은 앞 에서 본 것 처 럼 위선과 거짓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 서 '정경 유착의 근절'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 위선의 탈이라도 벗기 위해서 는 자기들의 정치, 자기들의 정당이 있지도 않은 이른바 '국민을 위한 정치'나 ' 국민정당'이 아니라 '자본 가 계급 정치'이고 ' 자본가 계급정당'이 라는 점을 인정하면 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활 동 을 자유화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혹 은, 그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힘이 성장 하지 않 으면 안된다.
현대자본주의의 물가와 임금
1. 임금 인상은 물가 인상의 원인이 아니다.
2. 현대의 시지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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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전 올해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애초의 억제 목표치에 훨씬 못 미치는 4.7%에 머물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통계 당국의 그러한 발 표를 그 대로 믿자면, 금년에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상당히 상승하 는 것으로 된 다. 과연 정말 그럴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통 계 당 국 의 발표를 검 증할 만한 실증적 자료들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 한 실 증적 자료야말로 통 계 당 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들을 포괄적으로 확 보할 수 있는 위치 조건에 있지 않 다. 나아 가, 물 가 경제 현상이라 는 것은 무척 광범위한 것이고 또 다양하게 변 형되고 왜곡 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통계 당국조차도 사실은 그 자료들을 수집하 고 분석하 는 데에 일정한 기 술적 한 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술적 한계는 그렇 다 하더라도, 발 표되는 통계라는 것이 통계 당국에 의해서 얼마 나 왜곡 조작되는 것인가를 대강 가늠하게 하는 흥미로운 일화 가 있다. 지난 90 년이 었 던가, 집값과 땅값의 폭등으 로 사회적 분위기 가 흉 흉했을 때의 일 이다. 당시 감사원의 감사 관이 었던 이문옥씨가 재벌들의 부동 산 투기 소 유 자료를 폭로하여 그 흉흉한 분 위 기에 기 름을 끼얹은 적이 있었 는 데, 그때 대통령이었던 노태우가 "어떻게 ' 통계적 여과과정'도 거치 지 않은 자료를 유출할 수 있느냐"며 대노(大 怒)했 다는 보도가 있었다. ' 통계적 여과과 정' - -- 이 말 속에 통 계 당국이 자 료들을 어떻게 처리 혹은 왜곡하고 있는 가가 함축되 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는 물가 상승률에 대한, 혹은 실질 임금의 상승률 에 대한 통계 당 국의 발표는 무언가 '통계적 여과 과정' 을 거친 것으로 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 라고 판단할 수 있다. (대통령의 한 마디가 그 럴 만한 근거가 될 수 있느냐 는 반론을 예 상할 수 있으나, 대 통령의 이 말 은 그것이 보도되기까지 청와대 의 참모 진들, 즉 전문가들에 의 해서 역시 '여과' 되었거나, 아니면 대통 령이 그렇게 발언하도록 그 전문 가들에 의해서 주입된 것이어서, 통계 당국의 자 료처리 관행을 반영하고 있 다고 보지 않으면 안될 것 이 다.)
이렇게 현대자본주의에서 물가와 임금 간의 상 관관계는 국가의 통계에 대한 신 뢰성의 문제 때문에 그것을 실 증 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근거를 잃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임금의 크 기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간의 투쟁이 격렬해 질 때마 다 자본측은 통 계 당 국의 그러한 '통 계'에 근거해서 노동자들의 임 금 투쟁을 공격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그들의 공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 인가를 보기 위해 서 현 대 자본주의에서 임금과 물가간에 몇 가지 관계를 고찰 해 보기로 하 자.
1. 임금 인상은 물가 인상의 원인이 아니 다.
자본주의 경제는 그 자체의 운동법칙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위기(공황)를 맞 는다. 예를 들면 한국 경제에는 최근만 해도 79 - 83년에 이어 89 - 93 년 에 다시 심각한 공황이 엄습했 고, 격심한 정치 사회적인 격동이 그에 수 반하 였다. 79년에 시작된 공황은 부-마항쟁, 박정 희의 피살, 12 12, 사북 광산 노동자들의 항쟁, 5월의 대투쟁과 5.17, 5.18 광주항쟁과 학살 등등으로 이어 지 는 격 동 의 경제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고, 89년 이래의 공황으로 노태 우 민 자당 정 권은 마침내 '총체적 위기'를 선언하고 공안정국을 조성 해 갔던 것이 다.
79년 이래의 공황에서는 부-마항쟁 이후에 전 개된 정치적 격변이 워낙 충격 적인 것이었 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 적 혼 란을 권력 장악 의 지렛대 로 이용하고 있던 전두환 일당의 대중 심리전 으로, 당시 광대 놀음을 하고 있던 신문 방송 TV 등은 "박 대통령 서거 이후의 정 치적 혼란으로 바이 어의 방한이 줄어 드 는 등 경 제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 댔다. 완전히 전도(顚 倒) 된 설명이다. 이에 비해서 89년 이 후의 공황 국면에 서는 경제위기의 원인 이 온통 노 동자 계급에 전가되었 다. 자본측 이데올로 그들의 선전은 임금 인상 을 요 구하 는 노동자들의 파 업과 '과도한 임금 인 상'으로 경제위기를 넘 어 ' 총체적 위기 '가 조성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장에 의하면, 당시 경제위기의 직 접적 원인은 '과도한 임금 인 상'에 의한 인플레이션에 있고 노 동자들의 계속 적인 임금 인상 요 구 와 투 쟁으로 총체적 위 기로 심화되고 있 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노동 운동 진영의 시급한 임무 중의 하나는 노 동자 임금의 인 상이 물 가 상 승의 원인 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품의 가 치구성에 관한 자본측의 통 계를 인용하여 "상품가치 중에 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8% 정도에 불과하므로, 임금이 평균 10% 올 라 도 그로 인한 물가 상 승은 0.8%에 불과하고, 설령 임금이 20% 오른다 하더 라도 그로 인한 물가 상 승은 1.6%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실 의 물가 상 승 은 그 몇 배 몇 십 배에 이르 고 있다. 이러한 물가 상승의 책임이 어 떻게 노동 자들에게 있느냐?"하는 식의 항 변이 노 동자 진영 의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이러한 항변은 과연 타당한 것 일까? 전혀 그렇지 않 다. 위 항 변대로라면, 임금이 오르면, 그것이 0.8%이든 혹은 그보다 더 적 든, 임 금 인상이 원인 이 되어 물가는 오르는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역시 당연히, 물론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물가 상승의 책 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위 항변의 오류는 노동자들도 물가 상승에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을 부인하는 데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인상은 절대로 물가 상승의 원인 이 되지 않는데도, 극히 적은 비율이긴 하지만, 그것을 물가 상 승 의 원 인으로 돌 리는 데에 있다. 임금 인상은 절대로 물가 상승의 원 인이 되지 않 는다.
위의 항변이나 자본측 이데올로그들의 공격은 모두 ' 상품의 가 치 혹은 그 화폐적 표현인 상품의 가격은 고정자 본의 마모 분이나 소 비된 원료 등 불변 자 본의 가치(가격)와 임금 그리 고 이윤의 합으로 이 루어져 있어서 그 세 구 성요 소 중의 어느 하나 의 증감은 상품 가치(가 격) 의 증감으 로 나타난다'고 하 는 잘 못된 이 론에 기초하고 있 다. 이러한 이 론에서는 노 동자 가 임금을 올리 면 상 품가격은 그만큼 상 승하고, 자본가가 이윤을 증 대시키면 역시 가격은 그 증가 분만큼 올라 가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는 상품의 가치 혹은 가격에 대한 철 저히 잘못된 이해이다.
상품의 가치 혹은 가격은 그렇게 노동자 혹은 자본가가 임의로 상 승 과 하 락 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는 것처럼, 상 품의 가치 혹 은 가 격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 한 사회적 노동시간 의 크기에 의 해서 객 관적으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품을 생산 하 는 데에 현재 의 지배적 인 기술적 조 건에서 10시간 의 노동이 필 요하고 한다면, 그 상품의 가 치는 10 시간으로 결정 되어 있고, 그것이 화폐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가격 이다. 그리하 여 그 10시간 중 5시간 이 불변자본, 즉 그것을 생산하는 데 에 들어간 과거 의 죽은 노동을 대 표한 다면 (이것은 주어진 시점에서는 이 미 과거의 것으로 주어져 있다), 너머 지 5시간에 해당하 는 가치가 이번의 생산을 통해서 새로 생산 된 가치, 즉 가치 생산물로서 그것 이 임금 과 이윤 (잉 여가치)으로 분열된다. 여기에서 만일 현재 의 임금과 이윤의 비율이 2 : 3, 즉 노동자 의 임 금 이 2시간 노동에 해당하는 가치이고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이윤이 3시 간의 노동 에 해당 하는 가치인데, 노 동자가 임금 인상 투 쟁을 통해서 임 금의 몫 을 3시 간으로 증대시킨다면, 상품 의 생산물가치 와 불변자본은 주 어져 있는 크기이 고, 가치생산물, 즉 5시간의 노 동에 해 당하는 가 치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몫으로서, 즉 임금과 이윤으로 분열하 는 것 이기 때문에 임금은 2시간 크기 의 가치였던 것이 3시간 크기의 가 치로 증대하고 자본가의 이윤은 3시간 크기의 가치였던 것이 2시 간 크기 의 것으로 줄어든다. 즉, 임금이 오른다고 해서 상품의 가 치가 증대하 는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임 금 의 상승은 상품가 격의 상승 을 유발하는 것 이 아니 라 자본 가 몫 인 이 윤을 감소시킬 뿐인 것 이 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즉 임금이 오르 면 상품의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의 몫인 이윤이 삭감 당 하 기 때문에 자 본가들은 기를 쓰고 임 금의 상승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이 다.
이는 물론 임금 인상이 상품 가 격 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가장 추 상적으로, 그리고 평균 적으로 기 술한 것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는 자본의 유기 적 구성 도의 차이에 따라서 그 영 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맑스가 [임금 의 일반적 변동 이 생산가격에 미치 는 영 향]의 장({자본 론} 제3부 제11 장) 에서 분석적으 로 밝 힌 것의 결 론만 요약 하자면, 그 영향은 이렇 다. 임 금 이 오르면, (1) 사회적 평 균 구성의 자본 에서는 상품의 생산가격은 원 래대로 변화가 없고, 이윤은 임 금의 증가분만큼 줄어든 다. (2) 구 성이 보다 낮은 자본에서는 상품의 생산가격 은, 이윤이 내 려간 것 과 같은 비율로는 아니지만, 올라간다. (3) 구성이 보다 높은 자 본에 서는 상품가격은, 역시 이윤이 내려가는 것과 같은 비율은 아니지 만, 내려간 다. "평균 자본의 상 품의 생산가격은 전과 같이 생산물 의 가치와 같기 때 문에 모든 자본의 생산물의 생 산가격 의 총계도 역시 전과 같아서 총 자본 에 의해서 생산되 는 가치의 총계는 같다. 한편에서의 인 상과 다른 편에서 의 인하가 총자본 에서는 상 쇄되어 사 회 적 평균 자본의 수중으로 낙착되는 것 이다." (이 상의 설 명은, 지면 사정으로 중간의 논리 전개가 생략되어 있어서 이 해에 어 려 움 이 있을 것이다. {자본론} 제3부 제11장을 읽어 주기 바란다.)
이렇 게 임금의 상승은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89 - 90년의 위기와 투 쟁의 시 절에 이러한 견해는 많은 논쟁 끝에 결국 당시 의 한 지도적 인 노 동 운동 단체에 의해서 원 칙적으로 수용되었 다. 그러나 그들도 끝 내 오 류를 다 버리지는 못했다. 왜냐 하면, 그들 은 위와 같은 상품가 격 과 임 금의 관 계는 " 원리적으로 그리고 자본주의의 '자유경쟁 시대 '에 는 타당 하나 독점 자본주의 시대에 는 임금이 오르면 독점자본은 그 것을 가격에 전가한다"고 주 장했 기 때 문이다.
물론 임금이 오르면 독점자본은 그 시장 지배 력을 이용하여 임금의 상 승 분 을 가격에 전 가하고 그들의 이윤 이 줄어드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 앞의 노 동운동 단체가 본 것은 바로 이 측면이고 그러한 한에서 타 당 성 이 있다. 그러 나 물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적 평균가 격 혹은, 같은 말이지 만, 사 회적 총 가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회적 평균가격 혹은 총가 격은 당연 히 사회적 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이 기 때문에 독점자 본이라 고 하 더라도 임금이 오르내린다고 하여 이를 증감시킬 수는 없다. 독 점자본이 가격 에 전가 하는 부분 은 결국 비독점자 본의 상품가격의 인하로서 나타나고, 결국 은 사회적 총잉여가치 의 독점 자본과 비독점자본간 의 분배 비 율만이 바뀔 뿐이 다. 즉, 임금이 올라가면 그만큼 사 회적 총잉 여가치는 줄어 드는데, 독점 자본이 차지 하는 잉여가 치의 크기가 독점의 힘 으로 변 하지 않 는다면, 비독점자본측의 잉여가치는 그만큼 더 줄어드는 것이 다.
그리하여, 독점자본주의 시 대에도 임금의 인상이 물가 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그 이전의 시대에 서나 마찬가지이다.
2. 현대의 시지포스
이상에서 우리는 '임 금의 인상' 혹은 '상승'이라는 개념을 사용했 는데, 현대 자본주의에서 임금 은 정말 상승 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매년 되풀이하고 있는 '임금 인상'은 정 말 임금을 인상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의 한 신화를 생각하게 된다. 그 신화에 보면 시지포스는 신들의 비위 를 거슬렀다 는 이유로 하데 스 (저 승 의 신)에게서 비탈에 바위를 밀어 올리라는 형벌을 받는데, 그 바위 는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 내려와서 시지포스는 계속 해서 그것을 밀어 올리지 않으면 안된 다. 현대의 노동자들이 바로 정확히 그 시 지프스의 운명에 있 다. 노동 자들은 매년 임금을 올려놓는 다. 그러면 그 임 금은 어느새 다시 굴러 내려 와 있고, 그것을 다시 굴려 올 리기를 거듭하고 있다. 그 때문에 노동자 임 금은 인상 혹은 상승되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 승과 하 락의 진 동 운동을 매 년 되풀이하고 있 는 것이다.
노동자 임 금의 이러한 진동 운 동은 애초에 는 산업순환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었 다. 즉, 경 기의 호황과 번영 국면에서는 노 동력에 대한 수요가 강해짐 에 따라서 임금이 상승 하 다가 공황이 엄 습하 면 산업예비군이 급증하여 그 때문 에 임금 은 하락하 고, 다시 호황 국면에 접 어들면서 서서히 상승 한다고 하는 운 동을 계속하였 다. 여기에서 는 임금의 상승 과 하락은 그 명 목의 화폐임 금에 표 시된다. 예 를 들 면, 호황 국면에 월 80 딸라를 받던 노동 자는 번영 국 면에서 는 월 100딸라를 받다가 공황이 닥치 면 실직하 던가 직을 유지한다고 하더 라도 그 임 금은 50딸라로 떨어진 다.
그런데 현대자본주의에서는 노 동자 임금의 이러한 진동 혹 은 순환 운 동 은 은폐된 형태로 나타나고, 더구나 산업순환의 주기에 따른 진동으 로보 다는 매 년의 진동 으로 나타난다. 즉 매년 임투를 통해서 임금을 올려놓 으면, 그 하락 이 명목적으로는 표시되지 않으면서도 임금 은 실질적 으로 하 락해 버려 그 다 음 해 임투가 임박한 시기의 실질임금은 생계비 즉 노 동 력의 생산비 이하로 내려와 있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의 시지프 스는 그것 을 다 시 밀어 올리 지 않으 면 안되는 것이다.
노동자 임금의 이러한 은폐된 하락을 유발하 는 것은, 주지하는 것처 럼, 현 대자본주의의 체질로 되어 버 린 인플레이션이고, 이 인플레이션은 ' 관리통 화제 '라고 이름 붙여 진 태환정지 하의 현대의 통화제도 즉, 현대 의 불환통 화제에 기초하고 있 다. 총자본의 이익을 대표하는 국가의 경제 사회 정책에 따른 불 환 통화의 증발이 현대자본주의의 물가 상승의 주 요 형태 인 인플 레 이션을 유 발하고, 그에 비례해서 노동자의 임금은 비탈 아래로 굴 러 떨 어지 는 것 이다. 그리고 그 비율, 즉 임금이 떨어지는 비율, 물가가 상승하는 비율의 실체는, 그 것을 측정하는 방법론상의 기술적 한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인 의도에 의해서도 왜곡되고 은폐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과거 역사에서 (금과 신용화폐인 은행권과의) 태환정지나 불환국 가지폐의 발 행 같은 불환통화제는 자본주의가 전쟁이나 극심한 천 재 지 변 혹 은 격렬한 공황에 빠졌을 때에 긴급피난적 조치로서 취 했던 것이 다. 그 런데, 1929년에 발발한 대공황 때문에 1930년 대 초에 자본주의 각국 은 태환 을 정지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현대자 본주의 에서는 이 불 환통화 제가 '관 리통화제' 라는 이름으로 이론화되고 합리화 되면서 일상적 인 것으 로 되어 있 다. 60년대 초부터 자본주의 국제통 화제도를 위기로 몰아넣으 면서 거듭되다 가 70년대 초 에 는 결 국 당시 의 국제통화제도였 던 본래의 IMF체제를 붕괴 시킨 '골드 러시 '(gold rush)는 물 론, 92년 의 유럽연합의 통화위기, 작년 말 에 발발한 후 잠 시 잠잠하다가 최근 재발하고 있 는 멕시코의 페소 화 위기, 딸라와 엔 화간의 상대 적 가치의 급격한 변화 등등 거 듭되는 통화 금융상의 위 기 를 거치면서도 제도 로서 의 금본위제로의 복귀 는 꿈도 꿀 수 없는 조 건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말 할 것도 없이 현대자 본 주의가 항상적으로 위 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 을 의미 한 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 ‘민중탄핵’ 논쟁의 재검토, 그리고 확인해야 할 전술 원칙 ―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소장)
I. 남구현․이해영․최형익
1. ‘민중탄핵론’과 남구현 등의 비판
지난 3월 당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 야 3당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를 결의함으로써 촉발된 소위 ‘탄핵정국’은, 주지하는 것처럼, ‘대통령 탄핵’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혹은 “탄핵반대”를 외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소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른바 ‘좌파 진영’1) 내부에도 논쟁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주로 인터넷상의 Another0415(www.another0415.net) 싸이트를 통해서 진행된 ‘민중탄핵론’ 논쟁이 그것이다.
우선, 당시 ‘민중탄핵론’으로 지칭되던 입장은, 물론 논자에 따라서 그 견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1) ‘탄핵정국’은 4월 15일로 예정되어 있는 국회의원 총선거를 겨냥한 여․야의 선거전략으로서 기획된 것이라는 것,
2) 이른바 ‘수구반동 세력’이 주축이 되어 발의․가결된 것이긴 하지만, 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고려할 때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도 그 탄핵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
3) ‘탄핵정국’의 본질이 의회권력을 둘러싼 독점부르주아 정파간의 권력투쟁임을 고려할 때,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는 TV 등의 ‘공영방송’이나 “한겨레”․“오마이뉴스” 등 이른바 ‘진보언론’과 ‘진보적인 시민운동단체들’ 등,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동원되고 있는 ‘탄핵무효’․‘탄핵반대’ 기치 하의 ‘촛불집회’ 등이 자칫 신자유주의 개혁의 주체인 노무현 정권에 의한 절대적인 권력 독점, 즉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
4) 따라서, ‘수구반동 세력’에 대한 규탄이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정책에 “면죄부”를 주지 않도록, 그리고 ‘탄핵무효’․‘탄핵반대’를 외치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대중선동․대중동원이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불러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
5) 그를 위해서는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대중적으로 선전․부각시켜야 한다는 것,2) 등등.
그런데 이러한 ‘민중탄핵론’에 대해서는 이른바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언필칭 ‘좌파 진영’의 일부로부터도 강력한, 아니 적대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교수의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2004. 3. 23.)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전에도 지적한 것처럼,3) 남구현 교수 등은 이 글에서 ‘민중탄핵론’을, 그리고 누가 보기에도 특히 ‘탄핵정국’에 대한 나의 태도를 염두에 두고, “좌익공론적”이니, “정치적으로 유해하고 무책임한 것”이니, “좌익소아병적”이니, “양비론”이니, “이론적으로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이니, “좌파이론의 퇴보”니, “노동자 운동을 협소한 노동자주의에 가두는 몰계급적 관점”이니, “반동적 사회주의”니 등등,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적대적 규정들을 다 동원하여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이란 것이 사실은 당시 제출된 대로의 ‘민중탄핵론’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들 세 교수가 그것을 왜곡․곡해하여 ‘비판의 적(的)’으로서 주관적으로 설정한 그것에 대한 그것이었고, 더구나 그 행론(行論)도 당구풍월(堂狗風月), 즉 서당개 풍월에 불과한 지식과 야마시(山師) 기질, 즉 사기꾼 기질까지 발휘한 그것이었다. 즉, 그 ‘비판’은 기껏 돈키호테의 돌진에 불과했다.4) 그들의 그러한 사고와 ‘비판’은 물론 그들의 소부르주아적 존재조건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었다.5)
2.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 혹은, 사기
그들의 행론․지식이 왜 당구풍월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대략 논한 바 있기 때문에,6) 여기에서는 내가 왜 그들이 “야마시 기질, 즉 사기꾼 기질까지 발휘”하고 있다고 규정하는지에 대해서 예를 들면서 언급해야겠다.
전에도 지적한 것처럼, 남구현 등은 ‘탄핵정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켜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 전후 맥락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보다 길게 인용해보자.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은 라쌀레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7) 맑스의 언급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타 소부르주아계급의 투쟁 역시 혁명적일 때가 있다. 참정권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그것이다.8)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주창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 사회의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9)
이제 명확해졌다. 그들이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고 할 때, “이러한 경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바로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그리하여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뒷 부분의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는 “지배계급의 가장 반동적 분파의 이해”로 그 서술이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그들이 ““가장 반동적 계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말하자면 ‘반동적 부르주아지’는 서로 별개의 계급이 아니고 동일한 (독점)부르주아지의 두 분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는, 혹은 맑스나 엥겔스는,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정치학 박사님들께서 말씀하시는 그러한 경우를 가리켜, 즉 그러한 의미로, ‘반동적 사회주의’를 말한 적이 있는가?
혹시 누가 있어 나의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그러한 적이 없다.
맑스와 엥겔스가 어떠한 형태로든 ‘반동적 사회주의’에 대해서 논급하고 있는 것은, 공산당 선언(맑스․엥겔스, 1848)을 위시하여 독일의 이데올로기(맑스․엥겔스, 1845-46), “독일의 현상”(엥겔스, 1847), “공산주의의 원리”(엥겔스, 1847), “국가 폐지라는 슬로건과 독일의 ‘무정부의 벗’에 관하여”(엥겔스, 1850) 등, 5편의 글이다. 그런데 이들 글의 어디에서도, 그리고 물론 다른 어디에서도, 맑스와 엥겔스는 ‘반동적 사회주의’라는 규정을 저들 세 분 교수님들이 주장하는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는 저들의 주장은 순전히 자신들의 소부르주아적 주장에 맑스주의적 의상을 입히고, 거기에 거짓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사기일 뿐인 것이다.10)
3. 개혁
한편, 내가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저들 세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원문대로!)는 이유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 ‘개혁성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그 개혁의 반노동자성․반민중성․친독점자본성․친제국주의성 때문에 비판하고, 반대하고, 규탄하는 것이다.
‘개혁성의 한계’ 운운하는 저들의 발언은 ‘맑스주의자’, 즉 유물론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사실은 그들 자신이 주관적․관념론적 사고의 소유자임에 불과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민중탄핵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풍차를 향해서 돌진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지금 ‘개혁’이라는 구호․규정 하에 현실적․객관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보는 대신에, ‘개혁’이라는 어휘의 주관적․사전적 의미에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집행자로서의 노무현 정권, 독점자본의 선전도구, 여론 조작도구로서의 ‘언론’ 등이 요구하는 대로 말이다.
이른바 ‘개혁’과 관련하여, ‘탄핵정국’에서의 발언만을 예로 들더라도, 나는, 저들처럼 ‘개혁성의 한계’ 운운하는 대신에, 그것을 “몰계급적 선동”, “오늘날 민중의 생존권을 파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구현”으로 규정했다.11) 뿐만 아니라, 3월 16일자 ‘민주노총 단위노조 대표자 결의대회 참가자 일동’ 명의의 한 ‘결의문’12)이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 승리만을 추구하고 개혁정책을 외면해 온 결과는 노동자 민중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민생파탄으로 이어져 왔다”고 쓰고 있는 데에 대해서, 밑줄까지 그어가며 명확히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었다.
즉, “이는 완전히 현실에 대한 도착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고,” “진실은, 노무현 정권이 ‘개혁정책을 외면해 온 결과’로”, 즉 남구현 교수 등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개혁성의 한계’ 때문에, “노동자 민중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민생파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이 바로 개혁정책을 강행해 왔기 때문에, 김영삼 정권 이래, 특히 김대중 정권 이래 신자유주의 개혁 정책을 강행해 왔기 때문에 노동자 민중은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 민생파탄이 벌어지고 있는 것”13)이라고!
이른바 ‘개혁’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과 비판은 물론 남구현 교수 등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글들 속에서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개혁’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여 ‘개혁성의 한계’ 운운하는 자신들의 “현실에 대한 도착된 인식”을 드러내면서, 마치 그것이 우리의 인식인 양 도착된 제시를 하고 있다. 저들이 돈키호테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도착된 저들의 사고방식 때문이지만, 이렇게 명백히 제시된 나의 비판조차 보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그것은 그들의 불성실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적대’하고자 하는 계급적 열정 때문에 자신들이 적대․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읽어보는 성실성은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실성 대신에 들어서는 것이 왜곡․곡해․날조․모략, 그리고 자가당착과 주관적 환상이다.
4.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저들의 그러한 왜곡․곡해․날조․모략, 그리고 자가당착은 지난 6월 하순에 발표된 남구현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민주주의 문제와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탄핵․선거국면을 지나면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마치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제기되었으며, 전체 좌파진영은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상실하였다.
일부에서는 독재가 사라졌으므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으나, 민주주의 문제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갖추어지는 것으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14)
참으로 가증스러운 왜곡․날조․모략이자 자가당착이다. 그리고 “전체 좌파진영”이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상실하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략일 뿐만 아니라 “전체 좌파진영”(물론 자신들은 제외시키고 있겠지만)에 대한 모욕이다.
도대체 자신의 ‘비판’의 대상으로 되었던 누가 “독재가 사라졌으므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으”며, 누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마치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제기”하였단 말인가? 집시법이나 테러방지법 및 NEIS 파동, 그리고 부안사태 등의 소동을 예를 들면서 노무현 정권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고 규정한 것은 물론이고,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고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제기한 것 아닌가!
“민주주의 문제만 제기하는 정치주의적 관점이나 신자유주의 문제로만 몰아가는 경제주의적 관점” 운운이라든가, “탄핵 국면에서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 필자와 같은 이론가” 운운하고 있는 데에서도15) 짐작할 수 있듯이, 자신들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마치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제기’했고, 제기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상실”하였고, 또 상실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민주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회 권력까지 거머쥐게 되면 민주주의가 치명적으로 침해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반면, 즉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 반면, 저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 하의 상황을 ‘독재가 사라진’ 민주주의로 파악하고, 그리하여 오로지 그러한 주관적 환상에 근거해 움직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선동에 놀아나던 정치적 광기를 가리켜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혁명적인” “운동” 운운했던 것 아닌가! 즉, ‘민중탄핵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 그리하여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반노동자적으로 규정한 반면에, 남구현 교수 등은,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탄핵 반대’를 외친 사람들은 그 신자유주의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이 민주적이기 때문에 그 정권을 지켜야 한다고 했던 것 아닌가!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과 그 아래에서의 상황을 그들은 그렇게 민주적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에 ‘민중탄핵론’을 “좌익공론적”이니, “좌익소아병적”이니 “반동적 사회주의”니 하면서 그토록 적대했던 것이고,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 필자와 같은 이론가” 운운하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아닌가!16)
5. 대중
‘탄핵정국’에서 ‘민중탄핵론’이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론’에 대한 비판자들이 들고 나오던 전가의 보도의 하나는 ‘대중’이다. 그것은 지난 3월 17일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 등의 주최로 열렸던 “탄핵관련 긴급토론회: 탄핵정국과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에 발제자․토론자로 참석했던 교수․변호사․시민운동단체 지도자들이 그랬고,17)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가 그랬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형태로 그것을 표출한 것은 남구현 교수의 다음과 같은 가소로운 ‘야유’이다. 즉,
일부에서는 4․15 총선 이후 의회와 대통령 권력을 집권당이 장악하게 되어 사실상 파시즘적 권력을 휘두를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불어 노동자 민중운동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렇게 된 원인으로 탄핵 국면에 민주주의를 제기한 필자와 같은 이론가와 신자유주의 전선을 이탈한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기도 하였다.(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함)18)
4․15 총선으로 형성된 제도정치 구도도, 노동운동의 상태도 결코, 남 교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어해 갈 수 있는 최대의 힘은, 남 교수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민중의 대중 투쟁’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봐라! 대중투쟁이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의기양양하면서, “일부에서는”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기도 하였다”고, 가소로운 야유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우선,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탄핵 국면에서 제기한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대중’에의 굴종 혹은 추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과거 같았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을 의회쿠데타[으-하!하!하!하! 이 망상!: 인용자]는 이제 의회소동으로, 탄핵정국은 탄핵 게이트로 넘어가고 있다. 쿠데타가 해프닝으로 변질되게 하도록 한 결정적 주역은 수십만 대중들의 단호한 직접행동이었음을 명백하다[원문대로!: 인용자] 한마디로, 대중들의 직접 정치행동이 빈사에 빠진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해낸 게 현 사태의 규정적 핵심이다.
... 보다 심각한 문제는 여전히 이러한 사태에 대해 좌파의 무능함이 여실히 증명되었다는 점일 것이다[그러니,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고 ‘탄핵무효’를 외쳐라! 대중에게서 배워라!: 인용자]19)
그런데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대중’은 누구인가? 남구현 교수가 오늘날 입에 달고 사는 ‘노동자․민중’의 대중인가? 아니면, 천둥벌거숭이의 소부르주아 대중인가? 다시, 세 분 교수님들의 그 유명한 말씀을 인용해 보자.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은 라쌀레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맑스의 언급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타 소부르주아계급의 투쟁 역시 혁명적일 때가 있다. 참정권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그것이다.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주창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아이쿠, 고맙기도 해라!: 인용자] 우리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자, 명확하지 않은가? 그가 “지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혁명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규정한 대중이 ‘노동자․민중’의 대중, 보다 정확하게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아니고, ‘소부르주아계급’이고, 그 ‘소부르주아 대중’인 것이! 그가 그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을 따라 배움으로써 ‘좌파의 무능함’을 치유 혹은 극복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즉, ‘좌파’로 불린 노동자계급의 선진부대에게 ‘소부르주아 대중’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타계급과의 동맹/연대/연합”20)이라는 혁명적인 언사로 말이다!
자, 그렇게 그들은 ‘탄핵국면’에서는 ‘좌파’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소부르주아 대중’을 상찬하고, 그들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지금은? “타원크레인 노동자, 병원 노동자, 궤도 노동자, 사내 하청 노동자” 운운하면서,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기도 하였다”며, 정말 환멸스러운 야유를 내뱉고 있다.
지금 그가 입에 달고 있는 ‘노동자․민중’으로서의 ‘대중’이, ‘탄핵국면’ 당시 그들이 그토록 상찬하면서 따라 배우라고 했던 ‘소부르주아 대중’의 동태나 ‘탄핵무효․반핵반대’ 소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겠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좌파적’이지도, ‘맑스주의적’이지도 않은 디지털말의 5월 7일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그 대강을 시사할 것이다.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없다.’ 대체로 냉랭한 반응이었다. 원래 이 기사는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에 바라는 각계의 목소리를 들어 봄으로써 40여 년만에 의회권력마저 교체한 명실상부한 ‘개혁여당’의 과제를 환기시켜 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가한’ 생각이었다. 직접 들어본 각계의 ‘기대치’는 결코 높지 않았다. 특히 민중운동진영[물론 세 분 맑스주의 교수님들은 빼놓고!: 인용자]의 ‘냉소’는 짐작을 훨씬 뛰어 넘었다. 이는 곧 지난 노무현 정부에 대해 민중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큰가 보여주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읽으셨소, 교수님들? 그리고 왜 내가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당신들을 그토록 경멸하고, 당신들이 치켜세우는 그 ‘대중’을 ‘천둥벌거숭이의 소부르주아 대중’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정치적 광기에서 ‘파시즘의 망령’을 보았는지 아시겠소?
II. 이광일
한편, 나는 뒤늦게 진보평론 제20호(2004년 여름)에서 ‘민중탄핵론’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과 맞닥뜨려야 했다. “[특집] 한국사회 진보적 사회운동”의 한 꼭지로 실린, 이광일 성균관대 강사의 “신자유주의 시대 진보적 정치운동 노선의 방향 모색”이 그것이다.
이광일 씨의 이 글은 물론 남구현 교수 등의 글처럼 파렴치한 왜곡․날조․모략, 그리고 맹목적인 적대감으로 채워진 글도 아니고, “대통령 탄핵은 ‘헌정위기’,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는 아니었다”21)는 서술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가결을 저들처럼 터무니없이 ‘의회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민중탄핵론’을 비판하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모종의 강한 당파성에 기초하고 있고, 바로 그 강한 당파성 때문에 그 당파성의 성격을 밝히면서 강하게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글이다. 또한, 중요한 논점을 둘러싸고 오해와 전후당착, 그리고 개념 규정상의 동요 혹은 일관성 상실이나 그릇된 전제를 보여주고 있고, ‘민중탄핵론’에 대한 그의 비판 역시 다분히 그러한 오해와 당착, 그리고 동요와 그릇된 전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 또한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1. 노무현 정권의 성격, 그리고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위상이나 성격’과 관련한 논의부터 보기로 하자.
우선, 이광일 씨가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을 “‘진정 자유주의’(true liberalism)를 지향하는”22) 정치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 규정은, ‘진정 자유주의’라는 사유 자체가 대단히 사변적일 뿐만 아니라, 그가 노무현 정권을 기본적으로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무장한 세계화의 화신”23)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순전한 형식논리를 빌어서 ‘주관적인 지향’과 ‘객관적인 성격’은 다를 수 있다고 반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또한 그들의 무엇보다도 강한 지향이다.
이광일 씨가 쓰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의 ‘역사적 위상이나 성격’은 그야말로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무장한 세계화의 화신”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자유주의’와 구별․혹은 병치(倂置)되는 “‘무장한’ 세계화”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 양자(兩者)는 병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장한) 세계화’야말로 신자유주의의 한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른바 ‘세계화’ 그것이 ‘무장했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그것은 본질적․경향적으로 ‘무장한 세계화’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신자유주의의 이른바 ‘세계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현대 제국주의, 즉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이고, 그 주요한 주체의 하나인 다국적독점자본, 다국적독점금융자본의 잉여노동․잉여가치 착취 활동과 영역의 확대․심화이고, 제국주의 열강의 제3세계에 대한 지배․착취의 강화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배․착취의 확대․강화 자체가 어떤 형태로든 힘, 즉 폭력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착취 및 지배의 강화는 “노동자 분신”이나 “농민 자살”24)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급적․민족적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폭력, 즉 무장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여기에서 이 문제를 특히 제기하는 것은, “무장된 세계화에는 반대하는 ‘개혁시민운동’”25),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는 반대하지 않는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의 위선과 정치적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광일 씨는 쓰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노무현 정권에 의해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에 대한 적극적 지지는 진보정치운동이 나가야 할 노선의 방향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원문대로!]. ... 무장한 세계화에 대해서는 시민운동진영에서조차 광범위하게 반대하고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조차도 한국사회의 ‘지체된 민주화’ 효과에 눌려 아직 명확한 반대의사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 즉,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시장)합리성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과잉평가하는 오류를 방치하며 수정하지 않고 있다.26)
이러한 서술, 혹은 이른바 ‘세계화’에 대한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의 그러한 대응에서 우선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장한 세계화’와 ‘(무장하지 않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기계적․절대적 구별․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그렇게 구별․분리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이 소위 ‘무장한 세계화’에는 반대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화’(?)에는 반대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그 양자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분리․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일 뿐이다.
하나는, 그 양자를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적 능력, 그 양자의 필연적 연관을 파악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의 결여.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들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과 열린우리당 혹은 노무현 정권간에 ‘경향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정치적 커넥션’!27) ― 이 ‘정치적 커넥션’은 물론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그들 단체를 주도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물질적 이해관계와도 불가분리하게 결합되어 있다.28)
참고로,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 그리하여 그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서 “아직 명확한 반대의사를 제출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소위 “한국사회의 ‘지체된 민주화’ 효과에 눌려” 그렇다고 파악하는 것은, 그들이 주관적․환상적으로 그렇게 사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어쩌면 그 때문에 예컨대 ‘민주 대 반민주’라는 환상적 전선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다시,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시장)합리성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과잉평가하는 오류를 방치하며 수정하지 않고 있다”고 파악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파악하는 데에는 저들의 “과잉평가하는 오류” 이전에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시장)합리성의 효과”의 존재를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광일 씨 자신이 이렇게 쓰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을 확대하면 할수록 모든 사회관계들을 파편화시키고 분절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사는 삶이라는 발상 자체를 부정한다.29)
신자유주의에는, 부산물로서든, 무어든, “합리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독점)자본의 탐욕뿐이다. 더구나 ‘시장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것은 경제과학의 그야말로 ‘자유주의’ 혹은 ‘고전파적’ 사고로의 퇴행이다. 시장에 존재하는 것은 합리성이 아니라 탐욕, 경쟁, 그리고 무정부성일 뿐이다. ‘시장합리성’이란 자본의 이데올로그들이 창조한 신화이고 선전일 뿐이다.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과 관련하여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나는 이광일 씨가 노무현 정권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는 데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1) 군부독재 하에서의 자유주의적 정치세력, 특히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자유주의 좌파, 혹은 ‘민중지향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2) “이 정치세력들은 군부, 수구파시스트세력들과 정치적으로 대결해 왔음에도 한국사회의 발전방향 등에 있어서는 그들과 근본적으로 대립하지 않았”고,
3) “물론 정책 수준에서 이들 사이에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였던 핵심요인은 권력에의 접근가능성이었다”고 파악하는 점.30)
4) 그리고, 한국사회의 “지배엘리트들은 그들이 파시스트이든,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든 항상 [미 제국주의와의 : 인용자] ‘초민족적 계급동맹’의 일원”31)이었으며, “70년대 이후 파시스트 ‘개발독재세력’과 ... ‘민중지향적 자유주의 정치세력’ 사이에 조성된 오랜 대립은 신자유주의로 수렴, 해소되었”으며, “노무현 정권은 자유주의세력이 걸어온 이러한 역사적 궤적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32)고 파악하고 있는 점, 등등.
대립하는 양대 정치세력 사이에 ‘한국사회의 발전방향 등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대립하지 않았으며, 대립과 갈등의 핵심요인은 권력에의 접근 가능성’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대립이 “신자유주의로 수렴, 해소되었다”는 것은, 그 양대 세력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노무현 정권을 가리켜서 ‘좌파 정권’이니 ‘친북 세력’이니 하며 각을 세우고 있는 “수구정치세력들 또한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가속에 의한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면 될수록”, 즉 반노동자․반민중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강행되면서 노․자간, 독점자본과 인민간의 대립과 갈등, 투쟁이 증폭되면 될수록,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가 ‘진정 자유주의세력’의”, 즉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의 “행보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33)고 전망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그러한 계급적 이해의 동일성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이른바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서로간에 ‘연좌제’니 뭐니 하면서 벌이고 있는 희극성 이전투구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역사적으로 계급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34)
여기에서 ‘그 양대 세력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점은, 예컨대 이번의 ‘탄핵정국’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운동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개혁
다음엔 이른바 ‘개혁’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 보자.
이광일 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법개정을 둘러싼 [1996년 말-97년 초의: 인용자]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개혁 프로그램’의 실체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35)
그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통해서 확인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개혁 프로그램’의 실체”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반노동자성․반민중성 그것이다. 또한, 이광일 씨는, 어떠한 동기에서든, 이렇게 쓰고 있다.
...은 오히려 다가올 수도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으로의 전화를 경계하고 막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36)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당연히 ‘개혁’을 주관적․환상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만 파악하는 대신에 그 객관적 ‘실체’와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효과․영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하는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개혁’에 관한 이광일 씨의 인식은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가당찮게도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 운운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그러나 이광일 씨의 경우, 이러한 객관적 인식이 시종 여일하게 유지되지 못하면서 심한 동요와 전후당착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자.
노무현정권은 수구파시스트정치세력들과 타협하며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수행해 온 ‘개혁 실패’의 산물일 뿐이다. 한국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의 실패는 진보정치세력의 급진성과 전투성 때문이라기보다 권력의 독점 혹은 분점을 위해 파시스트 정치세력들과 타협을 반복해 왔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그 오랜 ‘조합주의’ 때문인데 ....37)
그 개혁은 ... (정치)부패청산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38)
이번 ‘탄핵정국’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대결’, 정확히 이야기하면 [한나라당이나 자민련 등의 : 인용자] 파시즘에 대항해 모든 민주세력들이 벌인 ‘반파시즘투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반개혁’, ‘민주 대 반민주’라는 성격이 부각되었던 것은 ...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집권과 그들의 개혁실패가 가져온, 이른바 ‘지체된 민주주의’(creeping democracy)의 정치적 효과이다. ... 이들[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등: 인용자]이 ‘개혁과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으로 다시 부각되었다....39)
자, 서술이 이렇게 되면, 여기서의 ‘개혁’은 (노동자․인민의 입장에서도) 무언가 이루어야 할 ‘바람직한 무엇’, 남구현 교수 등이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 운운할 때의 ‘개혁’과 사실상 같은 의미가 된다. 그 ‘개혁’이 갖는 객관적인 성격, 그 친독점자본적․반노동자적․반민중적 계급적 성격은 탈각되어 버리고, 주관적 환상만 남는다.
물론, 이때의 ‘개혁’의 의미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실패”라든가, “지체된 민주주의”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로 ‘정치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고, 그 ‘실패’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항변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객관성․계급성을 잃은 ‘주관적 환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저들이 떠들어 온 ‘정치개혁’을 ‘더 많은 민주주의’의 보장이나 “(정치)부패청산”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저들의 선전과 자신의 주관적 소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치개혁’의 실제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1961년 5월의 군사 쿠데타 이후 권력의 주체가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어 온 ‘구악 일소’니, ‘사회정의 구현’이니, ‘사정’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던 소동이 결국 무엇이었는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패의 청산’이 아니라 ‘부패구조의 개편’이었고, ‘불법적’ 정치자금 배분구조의 변경이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고백에 의하더라도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은 결코 ‘깨끗한 손’이 아니다. 철면피하게도 “한나라당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는 말을 당당히 내뱉고 있다. 그런 ‘도덕성’ 위에서 벌이는 ‘정치개혁’이라면, “10분의 1 대신에 10분의 9”를 차지하기 위한 소동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일 것이다.
나는 ‘탄핵정국’의 한 가운데에서 쓴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는 글에서 이미 이러한 판단을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수십억․수백억의 뇌물․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들에 대한 검찰의 ‘처벌’을 보면서, 다른 글에서 나는 이러한 판단을, ‘바다에 내던져지는 잔혹한 극형을 선고받는 상어’의 우화를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했었다.
그들 ‘정치개혁’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적에 대한 탄압이었고, 새로운 권력집단 중심의 ‘정치자금 배분구조의 재편’, 즉 ‘부패구조의 재편’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개혁’도 그러한 것으로서 ‘10분의 1’ 대신에 ‘10분의 9’를 점하기 위한 ‘개혁’에 불과하다.
설마?
그렇게 순진하다면, 저 서슬 퍼렇던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가 수백억․수십억의 불법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들을 어떻게 처벌했는가를 보라. 그들을 구속 처벌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뇌물죄 등에 비해서 너무나 관대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잉여노동착취에 고통받도록 잔인하게 처벌하지 않았는가! 바로 상어를 바다에 내던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잔혹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5월 25일 청와대에서 삼성그룹 회장, LG그룹 회장, 현대자동차 회장 등 재벌총수 15명을 비롯한 대기업 대표 18명과 간담회를 갖고, “기존 思考의 틀, 예컨대 형평성이나 특혜와 같은 시비, 이런 사고의 틀을 근본적으로 깨고,” 규제개혁을 위한 정부․경제단체 간 협의사항을 직접 점검하여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를 개별적으로 검토, “적극적으로 풀어나가겠다”는 처벌을 추가하였다!40)
또한,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는 글에서는 나아가, “게다가 사실은,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민중으로부터의 착취 그 자체이지, 그 착취된 잉여가치가 이건희의 주머니로 들어가든, 노무현이나 이회창의 주머니로 들어가든 중요하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문제이고 그들의 투쟁이고,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개혁’”이라는 말로, 이른바 ‘정치개혁’에 대한 소부르주아적 관점을 비판한 바 있다.41) 좀 더 명확히 얘기하자면, ‘정치개혁’이란 것이 설령 ‘부패청산’ 작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이고, 따라서 그 강화이지, 결코 노동자․민중적 프로젝트는 아니다. 그것이 ‘개혁’이란 이름으로 마치 ‘전국민적’ 프로젝트인 것처럼 선전되는 것은, ‘전국민적’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노동자․민중에 대한 부르주아지 및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이데오로기적 지배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견해가 이미 명확히 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광일 씨가 사실상 아무런 사실상의, 그리고 논리적 근거도 없이 ‘(정치)개혁’이라는 선전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3.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론’
‘탄핵정국’에서 “탄핵무효”를 외치던 ‘정치적 광기’를 가리켜서 “소부르주아계급의” ‘혁명적 투쟁’으로서의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라고 규정한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가 그 전형적인 인간들이겠지만, 아무튼 노무현 정권과 그 아래에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민주주의’라고 파악하던 사람들은, 동일한 현상을 내가 “파시즘의 망령”, “소름끼치는 정치적 광기”42)로 규정하고, 또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가능성을 제기했을 때, ‘파시즘’이라는 말에 놀라 그것을 상당한 충격, 아니면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망발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하는가를 차분히 파악하지도 않은 채, 그토록 자기 멋대로의 반응을 보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예컨대, 왜곡과 모략이 그들의 장기이긴 하지만,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는 다음과 같이 초들고 나섰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중들의 탄핵반대 시위는 민주주의와 계급투쟁을 예비하는 중요한 정치학교의 성격을 지닌다. ... 그런데 좌파 일각의 대응은 그러한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탄핵반대가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에 자리를 내주는 것 내지 몰계급적 입장이라고 비판하였다.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 역시 현실의 복잡한 제 관계들을 가리는 극히 단순화되고 과장된 도식일 뿐이다. ....
... 현 노정권과 그 지지세력을 한 움큼으로 싸잡아서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론적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
나아가 민중탄핵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노무현정권=파시즘이라는 도식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마치 구체적 현실인 것으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나아가 만의 하나 노정권이 파시즘화될 경우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대중운동의 역할과 가능성을 아예 원천적으로 부정한다.43)
이들에 의하면, 탄핵국면에서의 논쟁에서 나는, 그 당시의 사태를 보면서 ‘소부르주아 대중’의 그러한 정치적 광기가 자칫 불러올지도 모를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에 기초하여, “노무현정권=파시즘이라는 도식” 아래 “노정권과 그 지지세력을 한 움큼으로 싸잡아서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단정”한 것이 된다! 다시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마치 구체적 현실인 것으로 상정” 혹은 “단정”한 것으로 된다! 그런 터무니없이 미친놈이 된다. ― 명백한 왜곡․날조․모략 아닌가?!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 운운하면서 그들은 혹시 내가 노동자 교양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면서 주요하게 “파쇼국가화”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44)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파쇼국가화”란, 다름 아니라, 신자주의의 이른바 ‘세계화’, ‘지구화’, ‘경제적 재생산 과정에서의 국가 배제’, ‘규제완화’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함께 일부에서 횡행하는 ‘국가약화론’에 대한 비판이었고, 신자유주의, 즉 착취와 빈곤의 강화 혹은 심화에 따른 대중의 저항과 그에 대한 독점자본으로서의 대응으로서 ‘계급지배도구로서의 국가’45)의 기능이 어떻게, 얼마나 강화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나는 거기에서 미국에서의 수감자 수의 증대, 일본의 군국주의화, 김대중 정권 하에서의 국가보안법 구속자 수의 증대, 그리고 ‘지적재산권’ 보장을 위한 경찰과 사법기구 등 국가의 억압기능의 증대 등등을 예로 들면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물론, 국가의 이러한 억압기능의 강화 및 증대를 ‘파쇼화’로 규정하는 것이 ‘파시즘’의 개념과 관련하여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서 간단히 보기로 하자.)
‘파시즘’과 관련한 이광일 씨의 논의로 가 보자.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문제, 혹은 그 ‘경계론’에 대한 이광일 씨의 태도는 남구현 교수 등보다는 훨씬 개방적이자 유보적이지만, 역시 상당히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또 이중적이다.
우선 그는 ‘파시즘’이라는 술어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을 들어 사실상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주지하듯이 파시즘은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을 기반으로 할뿐만 아니라, 흔히 언급하듯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개적 테러독재’이다. 파시즘의 지배는 ‘일반민주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민주, 진보세력들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혹은 선험적으로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탄핵정권을 단지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로, ‘민주세력 대 수구정치세력’의 대결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인식만큼이나 커다란 실천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46)
이 인용문의 전반부의 명제, 즉 “파시즘은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을 기반으로 할 뿐만 아니라, 흔히 언급하듯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개적 테러독재’”이며, 따라서 “파시즘의 지배는 ‘일반민주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민주, 진보세력들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이, 후반부의 판단의 전제이다. 그리고 이 명제는 타당하면서도, 동시에 부족하고,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타당한 이유는 ‘파시즘’의 개념을 그렇게 협소하게 파악하는 것이 (부르주아) 아카데미즘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명제는 그러한 전통 위에서 전적으로 타당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엄격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적 전통에 의하면, ‘파시즘은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을 기반으로 한다’는 추상적 조건 규정만으로는 부족하고 “독점자본의”라는 주체가 명시되어야 하고, 또한 거기에 다시 “그 위기”라는 구체적 조건이 명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부족한 것은 “선전․선동을 통한 소부르주아지 혹은 ‘중간계급’ 대중의 포섭과 동원”이라는 핵심적인 조건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위 명제는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아카데미즘의 전통에 따라서 ‘파시즘’의 개념을 그렇게 협소하게 파악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흔히 언급하듯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따위의 엄격하지도, 과히 아카데미즘적이지도 않은 개념을 혼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다. 즉, 일상의 정치생활에서 ‘파시즘’ 혹은 ‘파시즘화’, 그리고 그 위험을 얘기할 때, 우리는 통상 ‘엄격하고 협소한 아카데미즘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흔히 언급하듯’ 하는 개념을 염두에 두는 것이라고. 더구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이나 제3세계의 ‘군사파쇼’ 등처럼, 앞에 형용어가 붙는 ‘파시즘’의 개념은 특히 그렇다. 즉, 그것은 억압적 정치체제를 가리키고, 그러면서도 ‘선전․선동에 의한 소부르주아지의 대중의 포섭과 동원’을 그 요건으로 염두에 두는 것이다.
사실 같은 글에서 이광일 씨도 ‘수구정치세력’이라는 용어와 ‘수구파시스트 정치세력’이라는 용어를 사실상 동일한 세력을 지칭하기 위해서 동원하고 있다. ‘파시즘’의 개념을 그렇게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그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용어법이다. ‘파시즘’ 없는 두려운 ‘수구파시스트 정치세력’의 존재를 말하는 당착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론 내가 지금이나 ‘탄핵국면’ 당시나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혹은 선험적으로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협소한 ‘파시즘’ 개념을 가지고 제기된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혹은 ‘그 경계론’을 재단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또한, “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과 ‘파시스트화 경향’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47)라든가, “‘파시즘화 경향’과 ‘체제로서의 파시즘’ 사이의 정치적 간극을 명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48)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서는 타당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혹은 ‘그 경계론’을 제기한 나나 ‘민중탄핵론’을 비판하는 데에는 동원될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 혹은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해를 야기하는 부정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문면에서 명확한 것처럼, 우리가 제기했던 것은 당시의 소동, 당시의 정치적 광기가 노무현 정권의 권력 독점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으로 발전․전화될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일 씨가 극히 추상적으로나마 그 ‘가능성’을 제기한 의도야 우리와 다르지만, 아무튼 “다가올 수도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의 전화를 경계”49) 운운한, 바로 그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고로, 남구현 교수 같은 이는 예컨대, “[탄핵정국과 4․15총선을 통해서: 인용자] 변화된 정치지형 속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전선은 무너지지 않았다”거나, ‘탄핵 반대’를 내세웠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 대표자회의’니, ‘사회적 합의주의’니 하면서 노동운동이 심각한 위기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 노사정위원회․사회적 합의주의 역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운운하고 태평하게 지껄여대고 있다.50) 하지만, ‘탄핵정국’의 연장선상에서 4․15총선을 통해서 형성된 제도정치구도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이제 권력 내부의 암투와 노동자․민중의 저항 이외에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이는 데에 더 이상 어떤 장애도 없게 되었다”51)는 게 나의 판단이다.
4. 대중
‘민중탄핵론’에 대한 이광일 씨의 평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좌편향을 범했다’는 것이다. “‘민중탄핵론’을 둘러싼 논쟁의 뒤에 어른거리는, 과거 대중운동과 격리된 진보정치세력들이 노정하곤 했던 ‘좌우편향의 그림자’를 정확히 보는 것이 필요하다”52)라는 서술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평가는 전혀 잘못된 전제와 ‘민중탄핵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 차리리 그에 대한 선입관에 근거해서 내려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내가 앞에서 “‘민중탄핵론’을 비판하는 데에는 동원될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 혹은 오해를 야기하는 부정적인 요소”라고 지적했던 명제들, 즉 “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과 ‘파시스트화 경향’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라든가, “‘파시즘화 경향’과 ‘체제로서의 파시즘’ 사이의 정치적 간극을 명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등의 발언이 결코 그냥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중탄핵론’ 혹은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론’에 대한 일정한 선입관을 반영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선입관 위에서 이와 같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53)
다음에는, 그 평가에는 이른바 ‘대중’의 문제가 주요하게 개재되어 있는데, ‘파시즘’ 문제와도 어울리면서 이 ‘대중’의 문제가 전혀 그릇되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의 정치의식이 어떤 계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상승하는가, 노동자 계급 운동이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정세 속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의식이 없거나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광일 씨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진보적 역할’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신자유주의시대에 변화하고 있는 국민국가의 위상 및 역할에 조응하여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더 이상 대중이 직면한 삶의 고통을 자기문제화 할 수 없”고, “따라서 ‘진보’라는 담론을 더 이상 내세울 수 없”다며, “‘진보’로 표현될 수 있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역사적 임무’는 이제 마감되었다”54)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그렇게 그 ‘역사적 임무’를 끝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고통받고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농민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합리성[이것이 신화․선전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다: 인용자]으로 스스로의 개혁성을 극대화시키려 하지만, 기존의 비대칭적,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을 자본이 압도하는 것으로 재편하는데서 그 존재이유를 찾기 때문에, 이미 그것은 ‘정치적인 것’ 혹은 ‘’정치‘이다. 따라서 시장의 전제에 맡겨진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그들 가운데 다수는 여성이다―와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할 의미 있는 정치적 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할 뿐이다.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시대 노동자 분신의, 농민 자살의 근본 이유이다.55)
그리하여 정당하게도 이렇게 주장한다. 즉,
지금 글로벌 신자유주의, 무장된 세계화로 고통받는 대중의 삶을 생각할 때, 그것을 강제하는 사회관계들, 그것의 정치적 응집체인 노무현 정권의 해소 및 극복은 한시도 간과할 수 없는 핵심사안임이 분명하다.56)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정말 절실한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문제에 이르면,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대중’을 거론하면서, “좌우편향의 그림자”를 거론하면서,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에게 ‘소부르주아 대중’의 꽁무니를 따르고, ‘탄핵반대’의 촛불을 들고 신자유주의의 집행자, 신자유주의 정권을 보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가 어떠한 수법을 써서, 보다 정확하게는 어떤 궤변적 논리를 동원해서, 전진하려는 노동자 계급 운동을 그렇게 소부르주아 대중의 꽁무니에 묶어두고, 신자유주의 권력의 지지대열로 편재시키려 하는지를 보자. 그는 말한다.
내용적으로 ‘민중탄핵론’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에 대한 반대를 핵심 내용으로 하기 있기에, 그리고 이미 살펴본 것처럼 노무현정권이 그 정점에 있기에 구조적으로 항상 유효한 전술이다.57)
‘민중탄핵론’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항상 유효한 전술”이었다면, 그의 언설은 여기에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적 존재조건이 강제하는 열정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언설은 그리하여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주장은 하나의 화두와 같은 것이다”라고. “화두와 같은 것”이라니?! ― 쉽게 말하자면, 그냥 스쳐가듯 발설할 수는 있겠지만, 진지하게 제기하고 실천적으로 추구하지는 말라는 뜻일 게다.58)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민중탄핵론’을 “신자유주의와 그 집행자로서의 노무현 정권이라는 구체적 정세 속에서 유효한 전술”로 규정하는 대신에 시쳇말로 뜬금없이 “구조적으로”라고 규정하고, 게다가 “항상” ‘유효한 전술’이라고 규정했을 때, 사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글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이것은 ‘민중탄핵론’을 구체화할 경우, 현재의 정치지형, 사회관계들의 배치 등을 충분히 고려함을 의미한다. 명료하지는 않지만, ‘민중탄핵론’에는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러한 성격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발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자, 얼마나 흥미로운가! “‘하일 노무현’을 저지해야” 한다거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명백히, 당시의 언필칭 ‘진보적 언론’, ‘진보적 지식인’과 그 단체들,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 게다가, 오늘날 ‘사회적 합의주의’에 집착하는 이수호 민주노총 집행부와 민주노동당 등까지 나서서 소부르주아 대중을 동원하여 벌이던 정치적 광기를 보면서,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었다. 민주노총․민주노동당 등조차 전도된 현실인식에 기초해서 ‘개혁!’, ‘개혁!’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을 옹호․보위하고 있는 현실이 초래할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문면에서 다툼의 여지가 없이 명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광일 씨는 자신의 당파적 선입관을 개입시켜서 우리가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러한 성격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더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극히 협소하고 불충분하게 규정된 ‘파시즘’ 개념을 동원하면서, 그리고 그것도 “명료하지도 않은” 판단을 내세워, ‘민중탄핵론’을 좌편향으로 단죄하고 있다.
이른바 좌편향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가 제기하는 또 다른 논점은 ‘대중’, ‘진보정치세력들의 정치적 역량’, 혹은 전술의 ‘현실적합성’이다. 그는 말한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검증할 수 없었던 진보정치세력의 현존재와 그들의 과소한 정치적 영향력이었다”라고.59)
대략 맞는 말이다. ‘진보정치세력’이 아니라 ‘혁명적인 노동자 정치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 과소하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검증할 수 없었”다는 말은 부정직한 레토릭이다. 인터넷상의 정치공간을 위시해서 여러 대중적 정치공간에서, 그리고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진보적 지식인’ 등이 소부르주아 대중을 선동하여 벌이는 일대 신자유주의 정권 보위소동을 냉소하고, ‘민중탄핵론’으로 그와 싸우고 있었던 것을 이광일 씨 자신 명확히 확인․검증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위 인용문 가운데 ‘...’로 생략한 부분. 그 부분은 이렇다. “그 대중의 촛불 속”! ― 말하자면, 그의 소망은 ‘진보적인 노동자세력’을 그 소부르주아 대중의 촛불 속에서 검증하고 싶었다는 것이고, 그런데 그걸 검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그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좌익소아병’이라고 적대했던 것처럼!60)
‘정치적 역량’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광일 씨는 말한다.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기’는 지금 그러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작 그 위기를 해소,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이, 헤게모니가 누구의 손에 있는가에 따라 그 성격과 깊이를 달리한다.
지금 글로벌 신자유주의, 무장된 세계화로 고통받는 대중의 삶을 생각할 때, 그것을 강제하는 사회관계들, 그것의 정치적 응집체인 노무현정권의 해소 및 극복은 한시도 간과할 수 없는 핵심사항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민중탄핵론’에서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에 대한 규범적 정당성을 넘어서는, 현실정합성을 보장하는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수구파시스트세력은 물론 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 그리고 경향적으로 이들과 ‘정치적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는[이를 인정하는 한에서 정직하다: 인용자], 하지만 무장된 세계화는 반대하는 ‘개혁시민운동’을 포함,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들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진보정치운동세력들의 역량을 고려할 때,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61)
이광일 씨는 지금, “노무현정권의 해소 및 극복은 한시도 간과할[정확하게 말하면, ”지체할“: 인용자] 수 없는 핵심사항”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규범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민중탄핵론’에서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이 ‘현실정합성’이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진보정치운동세력들의 역량을 고려할 때,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는 표현으로 그 ‘현실정합성’을 완곡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민중탄핵론’으로 상징되는 선진적인 노동자․민중조차 “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 그리고 경향적으로 이들과 ‘정치적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는, ‘개혁시민운동’”, 즉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꽁무니에 묶어두고, 그 지지자의 대열에 세우려 하고 있다.
‘정치적 역량’과 ‘현실정합성’ 여부를 묻는 그의 화법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민중탄핵론’에서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을 은연중에 마치 조직과 ‘세력’의 당장의 생사를 건 봉기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하여 제시하기 때문이다.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터무니없게도 “과거 같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을 의회쿠데타” 운운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은 그렇게 당장이 생사를 건 봉기․반란을 일으키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제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노동자 대중의 정치의식의 고양, 정치적 조직의 확대를 위해 그러한 전선을 치자는 것이다.
이 교수의 소설(所說)에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상승하고, 확대․강화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조차 없다. 있는 것은, “선거는 정치의 전부일 수 없지만, 대중이 지배세력, 지배권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62) 따위의 정태적인 진단밖에 없다. 게다가, 각종의 잡다한 ‘포스트주의’에 안달하는 요즘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유행어를 빌려서 얘기하자면, 여기에서 ‘대중’이라고 ‘호명’된 사람들은 천둥벌거숭이의 소부르주아 대중과, 그들 및 자본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일부 노동자․민중이다.
‘민중탄핵론’ 등이 당장의 목표로 삼는 것은 ‘반신자유주의 봉기’나 ‘반란’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낙후된 대중의 정치의식을 개발․상승시키고, 그들을, 어쩔 수 없는 노예의 언어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적인 정치적 대오’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지금 중요한 작업의 하나가 바로 독점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전달 벨트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결이다.
5. 기타
이광일 씨의 ‘비판’ 혹은 ‘진보적 정치운동 노선의 방향 모색’과 관련해서는, 이상에서 논의한 문제점 외에 진보평론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민주노동당 강령 논쟁’63)에 관한 인식이나, 특히 “향후 진보적 정치운동노선을 생각할 때, 첫 번째 관심은 이들 논의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긴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간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64)라는 등의 인식에 관해서 상세히 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면상의 문제와 내 자신의 시간상의 문제로 결론만을 말하는 식으로 간단히 처리하자.
우선, 이광일 씨가 ‘진보진영’ 혹은 ‘진보적 정치운동’ 등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운동의 현 상황을 보면, 더구나 이광일 씨처럼 거기에 ‘시민운동’의 일부까지를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한 그릇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광일 씨와 같은 ‘진보적 지식인’에게 절실한 문제의식은 ‘진보적 정치운동’이겠지만, 지금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절실한 문제의식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운동’이다.
한편 그는 ‘민주노동당의 강령 논의’까지를 언급하면서, “총노선에 대해 민주노동당, 사회당 그리고 ‘노동자의 힘’ 등 진보진영 내부에서의 이견은 보이지 않는다”며,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획득하기 위한 방식과 대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65) 그러나 그의 판단이 객관적 상황과 합치하기 위해서는 그 ‘총노선’의 외연과 내용이 사실상 무의미할 만큼 넓어지고 희석되어야 하고, 그 ‘총노선’이 의미 있는 내용을 가진다면, 거기에는 엄청난, 많은 면에서 화해할 수 없는 이견이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기저에 흐르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긴장’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간이 관계를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정치노선, 사상․이념상의 차이이다. 예를 들면, 표현된 강령을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 또 그것이 올바른 판단 기준일 것이다 ―, 민주노동당의 기본노선은, 본인들이 주관적으로는 어떻게 인식하든,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 사적소유에 기초한 ‘소부르주아 평등주의’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 여러 단체는 이와 전혀 다르고, 그 차이는 결정적이다.
한가지만 더 얘기하자. 이광일 씨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 구조적으로 위협받고 있다”66)고 쓰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이 민주주의 핵심인 셈이다. 그러나 계급사회에 그러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선전이고, 관념론적 사고의 소산일 뿐이다.
계급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민주주의든, 아니든, 단지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인가’(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니면 ‘다수에 의한 소수의 지배인가’(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일 뿐이다.
III.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이제 결론을 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치열했던 논쟁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진한 적대의식으로 사기를 쳐서라도 관찰시키려 했던 것의 바탕에는 도대체 어떤 문제가 놓여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문제이다. 저들이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사기를 치면서까지, “중간계급에 대한 정교한 계급론적 문제설정을 망실”했느니 어쩌니,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진보적 정세분석론의 원칙과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했느니 어쩌니 하면서,67) 그토록 집착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노동자 계급 운동을 그들이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이라고 부르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운동에 종속시키려는 것이었다.
‘탄핵정국’이라는 ‘구체적 상황’은 바로 엊그제 우리가 경험한 대로이고, 또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논쟁의 세세한 문제점이 무엇이었는가는 명확해졌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문제, 즉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는지를, 저들 세 분 ‘맑스주의’ 교수님들의 사기적 언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 자신의 발언으로 들어보기로 하자. 물론 “맑스는” 어쩌구 운운하는 저들의 사기적 언설을 상기하면서.
그런데 예비적으로 얘기해두자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관계,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19세기 중엽 독일의 ‘노동자 계급 운동’에서도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고, 이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좌․우 편향, 기회주의가 발생하곤 하였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반동세력들과 권력을 다투고 있던 1848년 혁명 이후의 수년간에는 그러한 혼란은 더욱 심각했다.
그리하여 맑스와 엥겔스도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1850년 3월에 동맹원들에게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호소”(Karl Marx/Friedrich Engels, "Ansprache der Zentralbeho"rde an den Bund vom Ma"rz 1850", MEW, Bd. 7, SS. 244-254)라는 짧은 글이다.
시대와 국가, 그리고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이 다르고, 또 정치세력의 성격과 그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특히 전술 운용의 주체인 노동자 정치조직의 상태와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 그들이 제시하는 전술 원칙이 현재의 우리 상황에 그대로 대입될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글은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일반적인, 극히 중요한 전술 원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체적 상황의 차이 등 이런저런 요소를 고려하면서 읽는다면, 예컨대 지난 ‘탄핵정국’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68)
우리의 전술 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부분을 보기로 하자.
우선 당시 논란의 대상으로 되었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혹은 그 정당의 구성은 이러하였다.
독일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1848년에 인민에 대해서 연출한 역할, 이 그토록 배반적인 역할은 다가올 혁명에서는, 오늘날 반대파 속에서 1848년 이전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동일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에 의해서 계승될 것이다.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이전의 자유당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이 당, 민주당은 세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I. 대부르주아지 가운데 봉건주의와 절대주의를 즉각적으로 완전히 타도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가장 진보적인 부분. ...
II. 민주주의적-입헌주의적 소부르주아...
III. 공화주의적 소부르주아. 그들의 이상은 스위스 류의 독일 연방공화국이며, 그들은 지금 스스로 적색 혹은 사회민주적이라고 자칭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압박, 소부르주아에 대한 대부르주아의 압박을 폐지하려고 하는 경건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69)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이들 집단은 그 구성원의 성분과 정치적 지향에서 열린우리당이나 노무현 정권의 주요 인사들보다 훨씬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열린우리당이나 노무현 정권보다는 민주노동당 쪽에 더 가까운 집단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을 가리켜서 맑스와 엥겔스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1848년에 인민에 대해서 연출한 역할, 이 그토록 배반적인 역할은 다가올 혁명에서는, 오늘날 반대파 속에서 1848년 이전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동일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에 의해서 계승될 것”이며,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이전의 자유당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다고 판단․규정하고 있다. “맑스는” 운운하는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과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판단․규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반동적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라면,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의 정치적 정책 성격은 무척 ‘진보적’이지만, 동시에 특유의 계급적 성격으로 각인되어 있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 전체 사회를 변혁하려는 것과는 아주 멀고, 그들에게 현존의 사회가 최대한 견딜 수 있고 편안하게 되는, 그러한 사회상태의 변화를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엇보다도 관료제도의 제한에 의한 국가지출의 축소, 그리고 주요 세금의 대토지소유자 및 대부르주아에게의 부과를 요구한다. 그들은 나아가 공공신용기관의 설립과 고리대 단속법(Gesetze gegen den Wucher)을 통해서 그들 자신과 농민이 자본가로부터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유리한 조건으로 대부를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압박을 제거할 것, 나아가 봉건제의 완전한 일소를 통해서 농촌에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 모두를 실시하기 위해서, 그들은, 입헌주의적이든 공화주의적이든, 그들과 그들의 동맹자인 농민을 다수이게 하는 민주적인 국가체제를, 그리고 현재는 관료에 의해서 집행되고 있는, 자치제 재산 및 일련의 기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자신의 수중에 주는 민주적인 자치체제를 필요로 한다.
자본의 지배와 그 급속한 증대는 부분적으로는 상속권의 제한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는 가능한 한 많은 일을 국가에 이관함으로써 억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에 관해서는 그들이 앞으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임금노동자로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확고히 하고 있는데, 다만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보다 나은 임금과 보다 안정된 생존을 원하고, 국가에 의한 부분적 고용과 자선적 조치를 통해서 이를 달성하기를 원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많건 적건 은폐된 적선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매수하고자 하고, 그들의 상태를 당분간 견딜 수 있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혁명적 힘을 분쇄하려고 한다.70)
그리하여 이들 소부르주아 정치세력에 대한 노동자 계급 운동의 기본적 태도에 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에 대한 혁명적 노동자당의 관계는 이렇다. 즉, 혁명적 노동자당은 자기가 타도하려고 하는 분파에 대항해서는 그들과 함께 한다. 그들이 자신들을 강화하려고 하는 모든 경우에는 그들에 반대한다.71)
구체적 상황에 따라서 시기별로 다를 수밖에 없는 전술 원칙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혁명이 더욱 발전하는 동안에 소부르주아 민주당이 독일에서 일시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특히 동맹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1.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억압을 받고 있는 현재와 같은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2. 그들에게 우위를 가져다 줄 그 다음의 혁명 투쟁에서,
3. 이 투쟁 후에, 타도된 계급 및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시기.72)
그리고 이제 피억압 상태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가 도처에서 억압을 받고 있는 지금,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동단결(allgemeine Einigung)과 화해를 설교하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손을 내밀어 민주당 내의 모든 색조를 포괄하는 거대한 반대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특유한 이해를 뒤에 숨기고 일반적인 사회민주주의적인 미사여구가 만연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정한 요구들은 사랑스러운 평화를 위하여 분출되어서는 안 되는 당조직 속으로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통합(Vereinigung)은 단지 그들에게 유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전적으로 불리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힘들여 획득한 자신의 모든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다시 공식적인 부르주아 정당의 추종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그리하여 결연하게 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다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에게 갈채를 보내는 합창단으로 복무하도록 저자세를 취하는 대신에, 노동자들, 무엇보다도 동맹은 공식적인 민주당과 나란히 독자적인 노동자당의 비밀 및 공개적인 조직을 만들고, 각 단위조직(jede Gemeinde)을 부르주아적 영향을 받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와 이해가 토론되는 노동자협회의 중심, 중핵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우는 경우 결코 특별한 통합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적과 직접 싸워야 되게 되자마자 양당의 이해는 일시적으로 일치하게 되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장래에도 이러한 단지 일시적이고 타산적인 연합은 저절로 회복될 것이다.73)
요지는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우는 경우에도 조직적․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반동적 세력과의 투쟁에서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양태와 그 투쟁의 승리 후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그 성과의 독점, 그리고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 원칙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1987년 우리 사회에서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흥미 있을 것이다.
소부르주아 대중은 ...[투쟁에서는 주저하고 우유부단하고 빈둥거리지만: 인용자]... 승리가 결정되자마자 그것을 스스로 독점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진정하고 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소위 지나침을 방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승리의 과실로부터 배제한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이를 못하게 할 힘은 노동자들에게 없지만, 그러나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지배가 처음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나중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에 의해서 그들을 축출하는 것을 현저하게 용이하게 할 조건을 강요할 힘은 있다. 노동자들은 충돌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투쟁 직후에도 무엇보다도 우선 진정시키려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기도를 최대한 저지해야 하고, 그들의 현재의 테러리스트적인 미사여구를 실행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혁명적인 흥분이 승리 직후에 다시 억압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투쟁 후에도 노동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요구와 나란히 자신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는 민주주의적 부르주아가 정부를 그 수중에 장악할 준비에 착수하자마자 노동자들을 위한 보장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꼭 필요한 경우에는 이 보증을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일반적으로 새로운 지배자로 하여금 가능한 한 모든 양보와 약속을 확약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는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74)
다음엔, 공동투쟁에서의 승리 후의 대응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특히 투쟁의 방향이 이제는 과거의 동맹자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냉정하고 침착한 사태 파악과 새로운 정부에 대하여 숨김없는 불신을 통해서, 시가전의 승리 후마다 나타나는 승리에의 도취와 새로운 사태에의 열광을 가능한 한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공식적인 정부들과 나란히 자신의 혁명적인 노동자 정부들을 ― 그것이 자치체 협의회나 자치체 의회의 형태로든, 노동자 클럽이나 노동자위원회를 통해서든 ― 창설하여,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도록 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전체 노동자 대중이 뒤에 서 있는 단체들(Beho"rden)에 의해서 감시받고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하자면, 승리의 첫 순간부터 불신은 더 이상 패배한 반동당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동맹자에게, 공동의 승리를 독식하려고 하는 정당에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75)
다음에는, 직접적으로는 비록 선거와 관련한 것이지만, 노동자 계급 운동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꽁무니에 묶어두고, 노동자들을 그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하는 ‘진보적 지식인’, ‘민주주의자들’의 기만적 언설에 농락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특히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도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후보를 내세우는 것.... 당선의 전망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힘을 타산하고, 자신들의 혁명적 태도와 당의 입장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이 경우에, 예컨대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반동파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준다고 하는 식의 민주당의 허튼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 성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진전은 몇몇 반동분자의 대의기관 출석이 초래할지 모르는 불이익보다 한없이 중요하다. 민주당이 처음부터 반동분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고 위협적으로 행동한다면, 선거에 있어서의 그들의 영향력은 이미 사전에 없어졌을 것이다.76)
그렇다. 맑스와 엥겔스는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 성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진전은 몇몇 반동분자의 대의기관 출석이 초래할지 모르는 불이익보다 한없이 중요하다”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후보와 대항할 것을 요구하면서 “노동자들은 이 경우에, 예컨대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반동파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준다고 하는 식의 민주당의 허튼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한 모든 공문구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맑스주의자’ 교수에 의하면,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 좌익공론적․좌익소아병적임은 물론이고!
자, 남구현․이해영․최형익 세 분 교수님들!
대답해 보시지요.
아니,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였다” 운운하시면서 맘껏 야유해 보시지요.
그리고, 만일 이러한 나의 비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발 ‘좌고우면’하지 마시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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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한국이고 그렇게 국제적으로 인정을받고 우리나라는 Republic of Korea라는 국호를 쓰는데 이세상 어느나라가 우리를 그렇게 부르나? south Korea(남한)이라하지.최고의 우방이라며 짝사랑하는 미국도 남한이라하는데? 우리정부는 다른데 돈쓰지말고 국제적으로 남한이 아닌 대한민국이라 홍보하고 확실히 나라이름을 바로하라.그것도 옳게 못하면서 뭐한다고?뭘해? 왜 UN회의에 대통령이가서 "ROK"라 하라.막가잔 말인가? 함해보겠단 말이가라고 고함쳐보지.나라이름도 옳게 못하는 대통령이 뭘한다고 쯧쩟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