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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본주의발전사 - 노동전선기획단회의
<전 체 목 차>
1.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내며
2. 자본주의 사회와 공황
3. 자본주의, 위기 극복과 모순 심화의 역사
(1) 자본주의는 어떻게 성립되었나?
(2) 독점자본주의 형성과 제국주의
(3) 국가독점자본주의 형성과 제2차 세계대전
(4) 전후 자본주의의 부활 ―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
(5) 1970년대 위기 ―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다극화시대
(6) 신자유주의 시대
4. 자본주의 위기를 둘러싼 논쟁
5. 노동자와 민중은 경제위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현대자본주의발전사(1)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내며
노동전선 기획단회의
역시 경제위기의 영향력은 메가톤급이라 온나라를 덮쳤던 수해보다 더 극심하게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진영을 강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정도 도움의 손길도 없다. 이제 노동자와 민중은 스스로를 도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현대자동차 자본가는 계급적 직관을 가지고 단 한 명이라도 '정리해고'하기 위해 버텼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다. 자본가들은 여기에 더 보태어 한 목소리를 낸다. 노동조합이 버티는 바람에 손실이 컸다고, 이렇게 고용조정을 마음대로 못해서야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나 노동진영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용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아무튼 우리나라가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는게 우선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위의 주장을 적나라하게 하지는 않지만 "원칙과 현실은 다르다"면서 현실가능한 요구를 들이밀자고 하는데, 그 요구란 것은 보통 노동자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상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되면 자본가들은 그 요구를 일부 수용해서 조직된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어느정도 보장하면서 그렇지 않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담시키게 된다. 그래서 결국 사회적 총량으로 보면 노동자들의 고통의 크기는 커지기만 한다.
'경제위기만 극복되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을 갖고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럴 경우에는 '꿈 깨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 논리는 결국 노동자들이 기껏 쌓아올린 권리를 위기 때마다 다시 허물어뜨리는 시지프스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경제위기가 일시적이며, 노동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극복 가능하고, 또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그 때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 힘이 생기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착각이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일시적이지도 않고, 허리띠를 졸라매서 극복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자본의 구조조정은 노동자의 권리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힘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을 가능성은 없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이제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도 지불유예 선언을 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위기는 이제 동유럽을 거쳐 곧 남미로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위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자본주의 전 과정에 걸쳐 계속되어 왔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가지 대안을 만들어왔으나, 그것은 한편으로 위기를 심화시켜왔을 뿐이다.
게다가 최근에 득세하고 있는 초국적 금융자본은 자본가들도 불안해할 만큼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한층 심화시키고 있는데,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들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처럼,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달려가지만 결국 넘어지고 말 것이다.
왜 이런 위기가 발생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위기의 극복 대안도 경쟁력 강화나 허리띠 졸라매기, 고통 전담에 있지 않고 자본주의 극복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야 눈에 잡히는 대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며,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계급적인 관점에 입각하기 위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발현하는 과정을 지켜보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계급적 관점이야말로 현실적 관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모순은 어떻게 심화되어 왔는지, 자본주의는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왔는지, 그 시도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극복하면서도 다시 심화시켜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기획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계급적 관점을 갖는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현대자본주의 발전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본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한 기본설명이 있어야 현실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동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공황이란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공황이라는 폭발적 계기를 통해 드러나는지 그 매카니즘을 살펴본다.
그리고나서 현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자본주의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개의 시기로 나누어보려고 한다. "모든 구멍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자본을 창출하고 노동자계급을 창출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민중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과정을 수반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성장하고, 자본주의는 자신의 원리에 따라 경쟁해가면서 모순을 발현시킨다. 자본주의 발생 이후 독점의 진전과 제국주의화, 그리고 제1, 2차 세계대전, 공황과 전후 황금기(케인즈주의와 사민주의의 결합기), 그리고 1970년대 이후의 위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과정을 차근히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경제위기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나타난 여러가지 논쟁점을 소개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진보진영의 논쟁, 그리고 진보진영 내부의 여러 논쟁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에서 비롯했는지, 그리고 초국적 금융자본과 초국적 기업의 움직임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를 판단한다. 그 마지막은 어디에서부터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인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 노동자계급은 모름지기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움직여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은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노동자계급의 위치에서 행동하는 것임을. 그래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은 노동자계급의 힘과 의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움이 된다. 그래서 위기의 극복 대안도 경쟁력 강화나 허리띠 졸라매기, 고통 전담에 있지 않고 자본주의 극복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야 눈에 잡히는 대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며,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계급적인 관점에 입각하기 위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발현하는 과정을 지켜보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계급적 관점이야말로 현실적 관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모순은 어떻게 심화되어 왔는지, 자본주의는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왔는지, 그 시도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극복하면서도 다시 심화시켜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기획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계급적 관점을 갖는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현대자본주의 발전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본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한 기본설명이 있어야 현실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동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공황이란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공황이라는 폭발적 계기를 통해 드러나는지 그 매카니즘을 살펴본다.
그리고나서 현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자본주의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개의 시기로 나누어보려고 한다. "모든 구멍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자본을 창출하고 노동자계급을 창출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민중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과정을 수반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성장하고, 자본주의는 자신의 원리에 따라 경쟁해가면서 모순을 발현시킨다. 자본주의 발생 이후 독점의 진전과 제국주의화, 그리고 제1, 2차 세계대전, 공황과 전후 황금기(케인즈주의와 사민주의의 결합기), 그리고 1970년대 이후의 위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과정을 차근히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경제위기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나타난 여러가지 논쟁점을 소개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진보진영의 논쟁, 그리고 진보진영 내부의 여러 논쟁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에서 비롯했는지, 그리고 초국적 금융자본과 초국적 기업의 움직임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를 판단한다. 그 마지막은 어디에서부터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인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 노동자계급은 모름지기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움직여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은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노동자계급의 위치에서 행동하는 것임을. 그래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은 노동자계급의 힘과 의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대자본주의발전사(3): 자본주의는 어떻게 성립되었나?
노동전선 기획단
자본주의는 '시작'이 있었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태초부터 있었던 제도가 아니며, 따라서 영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종종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회는 진보해왔고, 자본주의 역시 그 과정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기에 그 진보의 역사를 믿는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머물지 않고 더욱 진보된 사회를 그려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다른 체제와는 다른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구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이 주인인 사회이다.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또 노동력을 사서 생산수단에 결합해 상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상품을 팔아서 다시 자본을 축적한다. 이 '자본축적'이라는 동기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품경제'가 발달해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갑돌이가 공장에 나가서 열심히 자동차를 만든다고 할 때 그는 자기가 타기 위해 그것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갑돌이에게는 그것이 자동차이든, 볼펜이든 상관이 없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갑돌이에게 일을 시키는 자본가가 타려고 그 자동차를 만들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자본가 역시 그것을 자기가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상품으로 팔기 위해 만든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쓰기 위해 물건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갑돌이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는 달랐다. 그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처럼 내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이 먹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어부가 배를 만든다면 그것이 자신이 타고 바다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와 그 전 사회가 다른 점은 '상품경제'에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물건을 만들 수 있지는 않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요하고, 공장이 필요하며, 또 토지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자본이 많이 든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산수단을 갖고 팔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취직을 해서 물건을 만드는데 이용될 뿐이다. 그래서 갑돌이는 그 할아버지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생긴 상품은 결코 갑돌이의 것이 되지 못한다. 다만 갑돌이는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그의 사장으로부터 받을 뿐이다.
다만 갑돌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처럼 토지에 묶여 있지 않다. 봉건영주가 하라는 대로 강제로 일을 하지도 않는다. 갑돌이는 자유스럽게 출퇴근하고, 선거 때도 사장과는 다른 사람에게 투표할 수 있다. 그는 회사에 나가서는 사장 앞에 약자일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는 사장과 똑같은 인격체로 대접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생산, 상품교환 관계가 인간 노동력의 상품화로까지 발전한다. 자본가는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자본주의에서 이윤은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에서 생겨난다.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력을 재생산 하는데 필요한 생활자료들의 가치가 된다. 하지만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의미가 있는데, 자신에게 필요한 생활자료의 가치 이상의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자신보다 더 많은 가치들을 충분히 생산해낼 수 있다.
자본가들은 일반적 상품 교환의 원칙에 따라 노동력 상품을 구입하는데, 그 가치에 기초한 가격을 임금으로 지불한다. 구입한 노동력 상품은 생산 과정에서 소비된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생산물 속에 자신의 노동력 가치 이상의 상품 가치를 형성해낸다. 하지만 그는 생존에 필요한 노동시간 부분에 대해서만 임금을 지급받는다. 그것을 넘는 잉여노동 시간에 생산된 가치는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고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이고, 노동자가 노동력 가치 만큼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일부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가치 이상으로 임금을 받아 축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가치만큼 돌려준다면 자본가들의 이윤증식은 불가능할 것이고, 노동자들이 모두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지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를 만들어내어서 그들이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들의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전유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증식해나간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더 늘리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리거나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또 생산수단을 발전시켜서 일정한 양의 생산물을 만드는데 드는 노동시간을 더욱 축소한다.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일이야말로 계급사회로서의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본질이지만, 이 계급대립과 착취의 본질은 노동력 상품의 매매가 상품 교환의 일반적 원칙에 따라 행해진다는 형식적 합리성의 외관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2. 자본주의로의 이행
우리는 조선시대 말기에 자본주의 싹이 트고 있었건 아니건 간에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이식당했다. 독점자본주의 국가간의 식민지 경쟁으로 세계가 자본주의화하는 과정에서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펴보려면 우리나라와 같이 외부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가 아닌, 자생적으로 자본주의화한 나라를 대상으로 고찰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생형태는 저마다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의 모습을 일반화해서 살펴본다.
1) 봉건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 본원적 축적
자본주의 이전의 사람들은 자기 토지와 자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기 가족의 노동력으로 생산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은 이들 봉건농민에게서 생산수단, 특히 토지를 빼앗아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자연적 결합'을 파괴한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빼앗긴 노동력을 임노동자로 전환시키며,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이 장악해서 임노동 착취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생겨나려면 농민에게서 토지를 빼앗아야 하고, 이로 인해서 분해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자본'과 '임노동력'으로 만들어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통일시켜야 한다. 이 과정을 일컬어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이라고 한다.
본원적 축적 과정은 봉건제 하에서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가능했던 것인데, 생산력 발달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축적, 이런 잉여생산물을 사고 파는 상품 경제의 발달,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화폐경제의 발달, 그리고 화폐를 얻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출발한다.
노동자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은 토지를 가지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토지를 빼앗기는 데서 시작한다. 농민에게서 토지를 수탈하는 과정은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자본가들은 농민들이 확보하고 있었던 토지보유권을 빼앗아 그 토지를 자신의 사유지로 선언하고, 농민들을 땅에서 마구잡이로 쫓아내었다. 14세기 후반에 시작된 1차 엔클로저 운동은 '양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프랑드르 지방의 양모공업 발전과 가격 등귀에 자극을 받아 농촌에서는 봉건영주들이 양 목장을 만들기 위해 농민들의 공동지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이 바람에 쫓겨난 농민들은 외부의 토지로 이주를 하든가 도시에서 빈털털이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토아스 모어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영국의 양은 원래 조금밖에 먹지 못했지만 이제는 매우 대식가가 되고 난폭해졌으며 인간까지 먹으려 든다.……국내에서 가장 질이 좋고 값이 비싼 양모가 산출되는 지방에서는 어디를 가나 귀족이나 신사층, 더우기 승려까지 경작을 위한 땅은 조금도 남겨 놓지 않았다"
엔클로저 운동은 1차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18세기 중엽의 2차 엔클로저 운동은 지주들이 땅을 근대적 대규모 농업용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 '물권'과 같은 토지 보유권을 갖고 있었던 봉건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완전히 빼앗긴 채 말 그대로 무산자가 되어서 임노동자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산자들이 흘러넘친다고 해서 그들이 바로 임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임노동자가 되려면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경영이 발달해야 한다. 봉건제 하에서 무산자들이 할 일은 빌어먹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경영에서는 무산자들이 오히려 생산의 주역이 된다.
봉건제 말기 영국에서는 농촌의 국지적 시장권이 발달함에 따라 재산을 모아 부유해져서 땅을 모아 지주가 되는 사람도 생기고(근대적 지주), 지주와 봉건영주로부터 땅을 빌려 땅이 없거나 적은 농업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사를 짓는 자본가적 차지농(농업자본가)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공업에서도 모직공업을 중심으로 16세기부터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가 전개된다. 이들이 시민계급(부르주아)을 이루게 되는데, 이들은 영국의 국제적 우위에 기초한 식민지 착취 및 국내적 보호정책(소위 중상주의 정책)의 원조 아래 발전하여 18세기 후반부터 공장제 공업으로 약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가 마련되고, 이제 축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과정은 2차 엔클로저 운동의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땅에서 분리된 노동력은 자본에 고용된 임노동력으로 전환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햇빛을 받으며 자신의 생산수단으로 자유롭게 노동하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남녀노소가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14시간 이상의 지옥같은 노동을 하는 공장생활에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공장노동은 천한 것이었고, 농민들은 비록 땅에서 쫓겨났지만 그런 노동형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기도했던 것이다.
이런 노동력을 공장의 임노동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강제'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고 무서운 강제가. 그래서 소위 구빈법(poor law)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말은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이 법으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가 잡힌 사람을 본보기로 사형을 시키거나, 귀를 자르거나 고문을 하고, 낙인을 찍었으며, 강제 수용소에 들여보냈다. {장발쟝}을 읽어본 사람이면 기억할 것이다. 단지 빵 하나를 훔친 죄로 3년간이나 강제 노역을 하게 한 것은 그당시 구빈법이 얼마나 끔찍한 법이었는지 알게 한다. 강제수용소와 감옥이야말로 농민들을 노동자로 훈련시키는 좋은 곳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일정한 시간에 맞춰 일을 하게 하고, 규율에 길들여지도록 만드는 혹독한 과정을 배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따사롭고 인정 많던, 그리고 자유롭게 노동하고 신앙심 깊던 봉건 농민들은 '근대적 노동자계급'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는 그 탄생에서부터 모든 구멍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그만큼 비참함을 동반하면서 만들어져왔던 것이다.
땅을 수탈당하고, 가혹하게 훈련된 임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피 위에서 착취의 준비를 마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는 이제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무대에 오른다.
2) 절대왕정(16세기-18세기)의 형성과 시민혁명
부르주아가 진정하게 역사의 주인이 되려면 정치권력을 잡아야 한다. 자본주의를 유지·온존시키는 정치권력이 없다면 결코 그들의 지배는 계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봉건제의 지배계급인 봉건영주들은 자신의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그런 봉건영주와 부르주아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한판승부는 필연적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필연적으로 봉건제를 누르고 승리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오랜 싸움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결국 부르주아는 봉건영주들을 누르고 권력의 주체가 되어 자본주의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부르주아의 정치권력 장악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절대왕정' 시기를 짚어보아야 한다.
봉건제에서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 때는 '민족국가'라는 개념도 없었다. 유럽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었고, 각 나라의 왕은 실질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당시 수공업생산물이나 원격지 상품을 판매하던 도시의 상인들이 이제 조금씩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도시들은 스스로 무장을 해서 봉건영주로부터 독립하고, 자체적으로 힘을 키워나갔다. 반면 농민들은 봉건영주의 착취에 대항하여 투쟁을 해왔다.
화폐지대의 도입은 봉건영주의 권력을 후퇴시켰고, 농민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농업도 한층 발달하고, 농민들은 봉건적 속박에서 차츰 자유로와졌다. 그러나 봉건영주는 농민들이 자유를 확대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억누르려고 했다. 농민들은 이에 맞서서 봉건영주를 적으로 하는 전쟁을 벌였고, 대표적인 것이 1525년에 있었던 독일의 '농민전쟁'이다. 그러나 도시민들은 봉건영주의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 편에 서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가 루터도 농민들을 억압하는 글을 썼다. 결국 이 전쟁에서 봉건영주들은 승리했다.
이처럼 농민들의 힘은 차츰 자라났고, 봉건영주들은 이렇게 자라나는 농민들을 억압하기 위해 '왕'을 상징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힘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상인들의 경우 상업독점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영주들의 힘에 대항해서 더 많은 부를 늘리거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보호막이 필요했다. 또 상인들은 전 국토를 통일하여 통행세가 없이도 자유롭게 왕래하기를 바랬으며 화폐가 통일되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절대적인 왕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라나는 농민들의 힘에 대응하기 위해 봉건영주들이 후원하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상인들이 왕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15, 16세기가 되면 이런 왕의 권력은 아주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절대왕정은 이처럼 무너져가는 봉건제국의 마지막 권력으로서 봉건영주들과 자라나는 반봉건세력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었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절대왕정은 자본축적의 기틀을 마련했다. 절대왕정의 출발에서도 그랬지만 이후의 진행에서도 상인들은 절대적인 힘이었다. 절대왕정은 왕의 군대를 유지하고 관리들을 부리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의 충당은 당연 상인들의 몫이었는데 상인들은 국내에서는 금과 은의 확보에 한계를 느끼고 해외 식민지로 눈을 돌린다. 그래서 국가는 상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국가 최대의 목표인 '국부(國富)'는 국가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으로 규정된다'는 원칙에 따라 중상주의 정책을 편 것이다. 상인들은 절대왕정의 비호 아래 식민지 지배를 전제로 상인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절대왕정의 중상주의 정책은 모직물 수출을 강화시켜 이것이 엔클로저 운동으로 연결되어 임노동자를 창출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업자본이 농업자본으로 투자되어 농민층의 분열을 가속화했고, 상업자본이 소생산자들과 결탁하여 후에 자본주의로의 발전에 핵심인 산업자본의 창출을 도왔다.
이처럼 절대왕정은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 역할을 충분히 함으로써 스스로 창출한 산업자본가에 의해 무너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시민혁명'이다. 부르주아는 봉건영주들과의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하게 반봉건혁명을 수행하기를 원했다. 이 목표는 부패와 사치로 점철되어 있었던 절대왕정 타도 투쟁으로 자리잡혔다.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통해 중상주의 지주였던 절대왕정을 타도함에 따라 영국의회를 장악한 시민계급(부르주아)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민계급은 상인을 위해 봉사하던 각종 규제가 절대왕정과 더불어 사라지자 자유무역의 기치 아래 착실히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산업자본의 축적 과정이다. 뒤이어 18세기가 되자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도 영국을 본받아 시민혁명은 불꽃처럼 퍼져나갔다. 프랑스 혁명에서 국왕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교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늦고 지방영주가 난립해 있던 독일은 프랑스군이 독일의 봉건영주를 분쇄함으로써 시민계층의 발전을 도왔다.
이 투쟁의 주요 담당자는 농민, 수공업자, 그리고 아직은 소수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시민계급의 지도 아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성과는 결코 이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부르주아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이들을 다시 속박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만 투표를 할 수 있었고,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고만 했다. 반면 노동자와 수공업자, 농민들 사이에는 급속하게 '민주주의'의 이념이 퍼져나갔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정치권력을 민중에게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었다.
민중들의 이런 투쟁에 다급해진 부르주아는 타협책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서구 자본주의의 일반적 정치형태로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결코 융합될 수 없을 것 같은 이념을 부르주아는 '대의제'를 통해 융합시켰다. 민중들의 정치를 인정하되,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민중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지 부르주아가 그냥 던져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자신의 기치로 내건 부르주아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절차적 형식'으로 만들어버리고, 내용에서는 완전한 부르주아의 지배를 실현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지배권을 완전히 확립하면서 절차상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지배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리잡혔다.
3)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전 - 산업혁명
자본주의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업혁명'이다. 자본과 임노동층의 생성, 그리고 부르주아의 권력 장악 등 자본주의의 특성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산업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완전한 '자본주의'로 갖춰지게 된 셈이다.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의 위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마와 면의 혼직 직물업이 대두되면서 면직업 중심으로 먼저 변화가 일어난다. 면직업은 방추 8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니(Jenny) 방적기'의 발명에서 시작하여 방적기가 대형화하면서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를 이룩한다. '제니 방적기'의 도입에 따른 생산력 증대는 국민경제 전체제를 뿌리로부터 뒤흔든다. 제니를 도입한 소생산자와 그렇지 않은 생산자 간에 격차를 불러일으켜 한축은 산업자본가로 성장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다른 쪽은 산업노동자로 전락하는 소생산자층의 양극분해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방적기의 발명이 계속되어 1790년대에 이르면 와트의 증기기관을 이용한 '뮬 방적기'가 만들어진다. 뮬 방적기를 가동하는 공장들은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 대규모 공장으로 발전하여 공장제도를 확립시켰고, 공장의 도시 집중을 초래한다. 또 동력의 사용은 기계체제를 성립시켜 노동자는 기계체제에 편입되고, 전 노동과정이 협업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또한 1811년에는 뮬 방적기가 전 영국 방추수의 90%를 점하게 됨으로써 제니 방적기에 의존하고 있던 소생산자층을 남김없이 분해시켜 버린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그들에게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죽은 기구인 기계에 대하여 살아있는 부속물로 합체되고 종속되기에 이르른다. 이상과 같은 면직업에서의 생산양식의 변화는 다른 산업부문에서도 변혁을 일으키는 선도적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영국은 선진자본주의로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공업혁명과 병행해서 18세기와 19세기 중엽에 걸쳐 진행된 농업혁명에 대해서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서 영국은 증대하는 공업인구를 먹이기 위해 곡물수입을 늘렸다. 이에 즈음하여 농업의 기술적 개량과 보급에 전력을 다했고 노우포크 농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농업기술체계가 실현되었다. 이 노우포크 농법은 비료의 대량 사용, 합리적인 사륜작 체계, 마차의 사용, 가축 축사와 사육의 유기적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삼포제도에 근거한 경지의 공동 이용 및 공동 방목을 특징으로 하는 경지제도와는 모순되는 것이다. 그래서 삼포제의 폐기가 요구되고, 이 방법을 실현하고자 대농이나 차지농이 주체가 되어 대규모 엔클로저 운동을 진행한다(2차 엔클로저 운동). 이 운동은 의회의 청원과 그 허가에 기초해서 국가권력의 도움을 얻어 행해졌다. 농업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했던 2차 엔클로저 운동은 농업에서 자본제적 요소를 탄생시킨다. 실시 과정에서 거액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대부분의 농민은 몰락하고 농업경영과 토지소유가 분리되어 지주―자본가적 차지농―농업노동자라는 근대적 소유관계가 확립된다.
이처럼 산업혁명은 자본의 형성, 임노동자의 형성, 부르주아의 정치권력의 장악 과정과 맞물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사회의 주도적인 생산양식으로 만들어놓았다.
앞에서 자본주의는 '진보'의 역사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고 했다.
정말로 자본주의는 진보한 체제이다. 자본주의의 진보는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으로 표현되며, 한편으로는 모든 민중들의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다. 비록 그것이 형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 진보를 이끈 부르주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냈다.
한마디로 해서 부르주아는 자신의 모습을 닮은 세계를 창조한다.
부르주아는 농촌을 도회지의 주도권 하에 종속시켰다. 그는 거대한 도시들을 창출하였으며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의 수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그리하여 우매한 농촌생활로부터 상당수의 인구를 구출하였다. 그는 농촌이 도회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마찬가지로 야만국가나 반야만국가가 문명국가에, 농민이 부르주아지에, 그리고 동양이 서양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의 분산과 소유권의 분산, 그리고 인구의 분산을 계속해서 제거하였다. 그는 인구를 밀집시키고 생산수단을 집중하였으며 재산을 소수의 손에 집적하였다. 이것의 필연적 결과는 정치의 집중이었다. 대체로 느슨한 연방제 하에서 상이한 이해관계, 법률, 정부 그리고 조세체계를 가지고 있던 독립된 영방들이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부, 하나의 국가적 계급 이해, 하나의 관세로 압축되었다.
부르주아는 겨우 백년밖에 되지 않은 상층계급으로서의 지배를 통해서,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달성한 것보다 더 육중하고 거대한 생산력을 창출하였다. 자연력의 정복, 기계, 공업 및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증기선 항해, 철도, 전신, 지구표면의 방대한 지역의 개간, 운하공사, 땅으로부터 많은 인구의 호출 등과 같은 이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태내에 잠들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 세기에는 꿈이나 꾸었겠는가?
우리는 지금 그보다 더 발달한 상황을 목도한다. 부르주아는 이제 전세계를 단일한 시장으로 통합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서 국가의 장벽을 없앤다. 발전된 정보통신 수단은 전세계 시장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이런 통합은 영토의 통합, 주권의 통합으로까지 이어져 유럽은 통합을 준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신체 정복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라는 동기가 제공한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성과이다. 그러기에 자본주의는 참으로 진보한 사회이며, 이러한 진보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자본주의가 더욱 성숙하면 스스로 이런 진보 자체를 가로막게 된다. 그 모순이 표현된 것이 지난 달에 이야기했던 '공황'이다. 이제 역사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3.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팔 자를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세계는 완전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되었다. 자본가는 이제 세계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한가지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태내에 자신의 무덤을 팔 자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앞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거니와 초기의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임금수준을 낮추었고, 여자와 아이들을 고용했다. 노동시간은 한없이 길었고, 노동자를 위한 문화적 배려는 손톱만큼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 비참함의 단면을 잠깐만 들여다보자.
1835년 영국 면직물 공업의 고용상태
* 여기에서 소년은 13세부터 18세까지
(A reduction of hours, an increase of wages, A documentary history of American industrial society)
의학아카데미 회원인 비에르메는 그당시 프랑스 노동자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들이 매일 아침이면 도시로 흘러들어와서 저녁이 되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 다수는 부인들로서 그들은 창백하고 굶주리고 진흙 속에서도 맨발 상태였으며, 부인들보다 좀 더 많은 수의 어린애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더럽고 여위었으며, 직기 옆에서 일을 할 때 기름을 덮어 써 두터워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G.D.H.Cole, Studies in class structure, London, 1955)
많은 아이들이 노동을 했는데, 부모들은 자기 자신들이 낮은 임금을 받는데다 또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위협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애들을 일터로 보냈다. 아이들 역시 생계의 반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하루 14시간이 넘도록 일을 했다. 이런 아동노동에 대해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에 대해 자본가들이 어떻게 반박했는지 들어보라.
"일할 만한 충분한 힘도 없고 만족할만큼의 일감을 찾지 못한 부모들이 지금도 여전히 많이 있다. 그들을 위해 애들이 생계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부모들로부터 자기 애들의 노동능력을 사용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또한 밥벌이 할 사람이 전혀 없는 가족이나,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힘으로 부양하기 불가능한 애들밖에 없는 과부도 많이 있다. 그 과부에게 "당신은 애들을 공장에 보내서도 안되며 애들이 일해서 당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만일 국가가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국가는 또한 실업자에게 일감을 주고 또 일할 수 없는 자를 도울 의무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국가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The economic status of the New York Cith negroes 1850-1863)
저임금의 아동노동을 통해 성인 남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초과착취하면서 늘어놓는 자본가들의 궤변은 단지 초기의 자본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또한 선배 노동자들은 한없이 긴 노동시간 속에서 초과착취를 당하며 자신을 위한 시간을 전혀 갖지 못했다.
공장감독관인 산더스의 부인노동에 관한 1844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 노동자 중에는 며칠을 제외한 수 주간 동안 계속해서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식사시간을 포함하여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기 때문에, 주당 5일동안은 집에 오가거나 침대에서 휴식하기 위한 시간을 6시간밖에 갖기 못하는 부인들이 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이 객관적인 증거로 우리 앞에 있는데, 누가 도대체 자본 축적이 자본가들의 근면의 결과라고 주장하는가!
그러나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했을지라도 선배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계급'으로 여겼고, 투쟁을 통해 그 의식을 단련했다.
노동자들은 엄격한 노동규율 하에서 공통된 노동을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처지를 철저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 간의 경쟁은 노동자 서로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생산조건과 그에 따른 전반적인 생활 상태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계급으로 스스로를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계급의식'으로 발전하려면 조직되어야 하고, 새로운 사회의 성격과 그 원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미래의 전망을 공유하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배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루어나갔다. 노동조합, 공제조합이나 협동조합, 노동계급기구, 신문, 선동을 통해서였다.
여기에서 자본주의 초기 선배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8세기 말 노동조합은 지방동업자모임이라는 형태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초기의 지방동업자모임은 대부분 사교적 성격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모임은 1792년부터 새로운 공장노동자 중심 부문인 랭카셔 면방적공들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교적 성격을 벗어나 노동자들의 '조직'이 되기 시작했다. 1799∼1800년 영국의회에서 악명 높은 결사금지법을 서둘러 통과시킨 것은 이러한 조직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과 1871년 사이에 있었던 혁명의 시기에 비밀결사나 공제조합, 직인조합과 같은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투쟁도 계속되었는데, 초기에는 조직되지 않은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811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 즉 기계의 도입으로 일을 빼앗긴 수공직인들이 들고 일어났던 투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즉자적인 투쟁은 노동자들의 조직이 활발해지면서 곧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가장 많이 고용되어 있던 여성들도 투쟁에 동참했다. 1836년 로웰에서의 파업은 여성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1806년에서 1815년 사이에 필라델피아, 뉴욕, 발티모어, 피츠버그의 제화공들은 여섯번이나 법정에 소환되었으며 '범죄적 공모'라는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모든 투쟁에는 현재 세계에 대한 혐오와 적극적인 수단 및 자신의 힘에 의해 지상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욕구가 들어있다. 이전의 피지배계급과는 완전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투쟁은 정치적인 운동으로도 발전했고, 정치적인 운동과 경제적인 운동은 상호 결합되었다.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과정에서 있었던 1939년 8월 5일 집회에서는 총파업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영국에서는 1848년에 10시간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1789년과 1871년 사이에 정치적인 조직을 활발하게 결성했다. 그리고 {노동자 잡지} {인민} {수공업자} 등과 생시몽의 {지구}, 푸리에의 {신세계}, 카베의 {민중} 등 실로 많은 노동자 잡지가 발행되었다. 이런 조직과 선동에 힘입어 1832년 6월과 1834년에 파리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고, 1831년과 1834년에는 리용노동자의 반란이 있었다. 1839년 블랑키주의자의 투쟁, 1833년과 1845년의 파리의 목수와 가구장인에 의한 파업, 1846년 광부파업도 큰 투쟁에 속한다. 이들은 이 투쟁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를 옹호했다.
이 투쟁의 절정은 1871년의 '파리코뮌'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내부의 모순을 대외정책으로 해소하려고 하였고 그것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나타났다. 이 전쟁 결과 프랑스가 패배하자, 파리 민중이 떨쳐 일어나 보나파르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공화파와 왕당파는 파리의 노동자가 봉기할 것을 우려하여 각 지구의 무장해제를 시도했다. 파리 민중들은 이에 봉기하여 '국민군 중앙위원회'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임시 권력기관으로 '코뮌 평의회'를 선출하고 노동자 권력을 세웠다. 대표적인 강령을 보면, 상비군을 폐지하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하는 것, 시의 각 국에서 코뮌 의원을 보통선거로 선출하여 시민에게 책임을 지고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시의원들로 구성되는 것, 코뮌은 행정부인 동시에 입법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 코뮌 임금 수준을 노동자의 임금수준과 비슷하게 조정하는 것 등이다. 이처럼 코뮌은 이전의 정치형태를 대신하여 노동자계급의 자기 지배력을 확립하고자 했다.
코뮌은 경험 부족과 노동자정부에 두려움을 느낀 세계 자본가들의 공동전선에 의해 72일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계급은 성숙된 의식을 갖추고 정치투쟁의 경험을 한 것이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자계급은 숫자가 증가하고 더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성장하고, 그 힘을 자각하게 된다. 노동자들이 자신을 노동자계급으로 자각하고 스스로를 조직할 때, 그리고 투쟁할 때 진정한 '노동자계급'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의 승리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최후의 승리자는 조직된 노동자계급이 될 것이다.
마치며
자본주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항구불변한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봉건제의 산물이었듯이 우리는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보다 발전하고 만인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의 꿈을 꿀 수 있다. 아니 그 꿈을 실현시켜야 한다.
둘째, 자본의 축적은 결코 검소함의 산물도 아니고, 신의 은총도 아니며 오로지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혹독한 억압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계속된 축적은 노동자에 대한 엄청난 수탈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 어떤 찬양도 이러한 수탈을 가리지는 못한다.
셋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일화는 자본가들의 정치권력 장악과 결합되어 있다. 부르주아의 정치권력 장악 과정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권력을 독점했다. 그동안의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는 이런 권력독점에 대항해서 투쟁한 역사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권력이며, 우리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할 때에는 새로운 주체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 필수적임을 인식해야 한다.
넷째, 자본주의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생산력의 무한 확장을 이루었다. 생산력의 확대는 전세계 민중들의 풍요를 가능하게 할 정도이지만 결코 그 생산력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오히려 '공황'을 통해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다. 전세계 민중의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한 생산력의 확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진보를 가로막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극복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자본주의의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는 스스로를 '계급'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투쟁 속에서 새 사회의 전망을 구체화한다. "투쟁의 과정에서 잃는 것은 쇠사슬이요얻는 것은 전세계"인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암울한 자본주의 전망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현대자본주의발전사 (4): 독점자본주의 형성과 제국주의
노동전선 기획단
자본주의가 세계화하면서 이제 자본주의는 완전하게 승리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커다란 결함을 안고 있었으니, 그 결함의 폭발이 바로 공황이다. 자본주의는 초기부터 많은 공황을 겪어왔다. 여기에서는 자본주의가 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독점으로 전환하고, 그것이 제국주의 쟁탈전인 세계대전을 낳게 되는 경과를 살펴볼 것이다. 이 기간은 대략 1875년에서 1918년까지의 기간인데, 흔히 제국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는 우리에게도 고통스러운 역사로 기록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로 착취당하던 우리 선친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 혁명의 시대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하는 각국 민중들의 투쟁이 피의 흔적으로 남아있으며, 또는 영광의 상처로 남아있다.
이제 그 흔적을 찾아 떠나기로 하자.
Ⅰ. 독점과 제국주의에 대하여
1. 독점이란?
(1) 자본의 축적
자본은 가치의 유일한 창조자인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노동의 산물인 잉여가치, 즉 잉여생산물을 획득하여 자신의 부를 쌓아간다. 또한 이 쌓여진 잉여가치의 일부를 생산과정에 다시 투자하여 잉여가치를 더욱 많이 남기고자 한다. 이처럼 자본은 생산의 확대를 위하여 잉여가치의 일부를 남겨서 다음 생산과정에 추가로 투하해서 자본의 투자분을 더욱 높이는데, 이것을 자본의 축적이라 한다.
자본축적은 필연적으로 생산규모의 확대를 낳게 되며, 또한 생산규모의 확대로 인해 기업간의 경쟁은 더욱 격화된다. 자본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해당기업은 생산기술을 향상시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고, 상품의 원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에 상품을 시장가격 이하로 판매해도 초과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한 자본이 다른 자본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를 유지하게 되며, 그 자본은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축적은 집적과 집중을 통해서 더욱 확대된다. 자본의 집적이란 개별자본이 잉여가치의 축적을 통해 그 총액을 증가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과정은 개별 자본의 근면함의 산물은 아니다. 노동을 최대한 착취하고, 다른 곳에서 자본을 끌어다댐으로써 집적을 한다. 자본의 집중이란 몇 개의 비교적 작은 자본을 합병하여 하나의 큰 자본으로 만드는 것이다. 합병은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삼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온갖 협잡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초기에는 집중의 형태가 소자본간의 결합, 합병을 통한 대기업화로 나타나지만 독점이 발전하면서는 대기업간의 합병이 비일비재한 일이 된다.
집적과 집중을 통해 만들어진 큰 자본, 대기업은 기계사용을 통해 분업과 전문화를 실행할 수 있으며, 설비이용율을 극대화해 절약과 절감의 효과까지도 보게 된다. 또한 대기업은 생산조건, 판매조건 등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며 은행의 대부도 유리하여 그 독점적 지위를 확고히 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독점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2) 독점을 가속화하는 주식회사제도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기업은 거대한 자본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자본은 이제 더 이상 개별 기업에서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커진다. 이에 따라 자금을 사회적으로 집중시켜 조달하는 주식회사제도가 도입된다. 주식회사제도는 19세기 초부터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였던 영국보다도 오히려 19세기 중반부터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진 독일이나 영국에서 선을 보였다.
주식회사제도는 그 기업에 필요한 자본을 다수의 주식으로 분할하여 그것을 증권시장에 매각함으로써 자금을 획득하여 기업의 경영을 도모하는 형태이다. 이렇게 하여 거대한 고정자본을 필요로 하는 산업에서도 개인적 기업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생산과정의 거대한 기계화ㆍ근대화ㆍ고도화가 추진될 수 있었으며 생산력은 한층 발전하였다. 은행대출의 경우 상환기간이 있어 그 기한에 갚지 않으면 안되지만, 주식발행에 의해 조달된 자금은 상환할 필요가 없는 무기한의 채무이기 때문에, 고정자본을 대규모로 필요로 하는 중화학공업에서 주식회사가 발달하게 된다. 주식회사제도를 통해 사회적 자금의 획득과 이용은 이전 자본주의 단계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며 생산력의 확대ㆍ자본의 집중이 촉진된다. 여기서 주식회사는 산업자본의 고정자본 필요액이 크게 상승하고 또한 신용제도가 발달한 시기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주식회사제도는 자본과 생산의 집중을 실질적인 소유권(=지배권)의 집중으로 만든다. 예를 들면, 섬유공업에 10개의 주식회사(주식발행액은 각각 1천 원이라고 가정한다)가 활동하고 있으며, 주식발행액의 30%만 소유하면 주주총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각 회사의 주식발행액의 30%인 합계 3천 원을 소유한 대주주는 10개 회사(주식발행액 합계 1만 원)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10개 회사의 자본과 생산을 자기의 지배, 통제 아래 둘 수 있게 되고, 하나의 운영방침에 따라 독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우리사주 제도나 소액주주 운동을 통해서 소유권자의 전횡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식회사제도는 자본의 집중을 위한 제도이며, 일부 주식소유자들이 소유권을 독점하도록 되어 있다. 주식회사제도는 본질적으로 독점자본주의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제도인 것이다.
주식회사제도의 성립ㆍ발전에 따라 대기업은 경쟁기업 주식의 매점을 통해서도 자본과 생산의 집중을 촉진하게 된다. 자본의 집중은 자본주의 단계에서도 간간히 나타났지만 생산력의 발전과 주식회사제도의 보급으로 각 자본에 의한 자본과 생산의 집중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흡수ㆍ합병되거나 대기업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은행에 의해 촉진되기도 했다.
(3) 독점의 동반자 금융자본
독점을 촉진하는 요소에는 주식회사제도 이외에 은행의 역할도 있다. 은행은 대부자본의 수요와 공급을 매개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은행자본은 산업자본에게 화폐자본을 공급하여 잉여가치의 일부를 나눠받는다. 그러나 은행업의 발전, 즉 화폐소득의 증가, 은행망의 확대, 거대은행의 형성 등 속도가 가속화되면서 은행은 중개 역할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산업계의 생산자본의 집적ㆍ집중과 함께 은행업에 있어서도 자본의 집적ㆍ집중이 고도화된다. 중소은행은 거대은행에 합병ㆍ흡수ㆍ계열화되고 거대독점은행이 성립된다. 이 과정에서 은행은 나중에는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고 수익도를 결정하여 그들을 파산시키든가 또는 자본을 늘려 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독점자본으로서의 은행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규모로 지배하게 되며, 그들은 또한 서로의 경쟁에서 상대를 파산시키고 융자를 통해서 상대를 정복하며, 주식을 매점하고 자유협정의 방법과 독점적 결합의 조직으로 신용체계 내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기업이 거대화되면서 거액의 자본이 필요해지자, 기업들은 그만큼 은행의 융자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대출을 해주는 은행자본의 규모가 커질 뿐만 아니라 위험도 그만큼 큰 까닭에, 가능한 은행은 많은 기업을 끌어 들여 그 위험을 분산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은행은 기업과 기업간의 합병, 인수 즉 기업결합까지도 유도한다.
증대하는 은행의 집적, 거대은행의 결합 등은 자유경쟁 시기의 은행과 산업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은 더욱 강하게 융합되고, 생산과 자본의 집적과 그에 따른 독점의 발달을 기초로 해서 금융자본이 완성된다. 이러한 금융자본은 다종다양한 산업부분을 통제하고 지휘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산업에 대한 권력을 획득하고 지배를 행사하는 은행은 이미 단순한 은행자본이 아니라,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통일적 독점체인 금융자본의 한 기관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 은행의 '새로운 역할(활동)'이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이 언제인가라는 물음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새로운 내용ㆍ형태ㆍ기관에 의한 은행과 산업기업 사이의 연관, 달리 말해 집중적인 동시에 비집중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대은행은 1890년대 이전만 해도 전혀 특징적인 경제현상이 아니었다.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그 출발점은, 중요한 '기업활동'들이 일어나고, 은행의 산업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비집중적 조직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1897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출발은 좀 더 늦은 1900년의 공황기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황에 의해 비로소 산업 및 은행에서의 집적과정은 엄청나게 가속화·격화되고 한층 강력해졌으며, 산업과의 연관을 처음으로 대은행의 실질적인 독점으로 전화시킴으로써 훨씬 밀접하고 능동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4) 독점조직 형태
1870년대(즉 1873년 대불황) 이후 독점을 형성·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독점조직의 형태들이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독점조직의 형태는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콘쩨른이 기본 골격을 이룬다.
카르텔이란 같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이 생산물 가격, 판매시장, 생산규모, 특허권의 교환, 노동력의 고용조건 등에 관한 협정을 맺는 것을 말한다. 카르텔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우선 카르텔의 참가 기업들이 자기들의 생산물의 가격을 일정 수준에 고정시키기로 협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각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생산을 확대한다면 협정된 가격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생산량에 대한 또다른 협정, 즉 생산 카르텔을 만든다. 또한 참가 기업들 사이의 판매 조건이 다르다면, 각 기업은 협정가격, 생산량 유지에 곤란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새롭게 판매조건 카르텔을 형성하며 나중에는 시장분할 협정까지
맺게 되는 것이다. 카르텔은 해당 대기업이 협정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생산상의 문제, 사업상, 법률상으로는 독립되어 있다.
독일의 경우 카르텔의 숫자는 1896년에 약 250개였고 1905년에는 385개로 대략 1만2천 개의 기업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카르텔은 특정 산업부문 전체 생산의 70∼80%를 자신의 수중에 집적시킨다.
신디케이트는 동일 생산부문의 소수 대기업이 상품의 통일적 판매나 원료 매입에 관한 협정을 맺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는 카르텔과 달리 협정의 수준에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총사무소를 설치해서 기업의 상품판매, 원료 구입을 통일적으로 처리한다. 신디케이트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은 생산상, 법률상으로는 카르텔과 같이 독립되어 있으나 상업상에서의 독립성은 잃는다.
트러스트는 기업간 합병을 말하는데 이는 상업상 독립성이나 생산상, 법률상으로 독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철강트러스트의 경우 그 산출량은 1901년 미국 총 철강 생산고의 66.3%를, 1908년에 56.1%를 차지했으며, 철광석 산출량은 1901년과 1908년에 각각 43.9%, 46.3%를 차지했다. 이렇게 트러스트의 경우는 각기업의 독립성을 완전히 폐지하고 이것을 새로운 단일기업으로 합병하며 그들의 생산성을 대규모화한다. 이렇게 해서 트러스트는 독점의 최고 발전단계를 나타내게 된다.
콘쩨른은 하나의 대금융자본가 집단에게 공동으로 의존하고 있는 경제부문이 다른 대기업, 대회사, 은행이 연합하여 편성한 독점조직이다. 독점의 형성은 새로운 자본의 형성과 진입을 곤란하게 하는 요인들, 기존의 거대기업들 사이의 경쟁을 인위적으로 배제시키려는 결합들(독점조직의 형성과 같이), 그리고 산업자본의 독점적 결합을 추진하는 은행자본의 발달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독점적 단계'를 이루는 제국주의로 넘어가 보자.
2. 제국주의란?
17·18세기에 일어난 식민지쟁탈전쟁은 시장 확보와 원료산지 확보를 위한 유럽 열강들의 싸움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제국주의는 존재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형성 전의 제국주의와 이후의 제국주의는 그 규모와 형성 과정, 발전의 양태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주요한 특징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첫째 특징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자본축적의 심화, 곧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과정이다. 두 번째의 특징은 금융자본의 거대화와 그에 따른 지배이다. 이를 금융과두제라 하는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으로 탄생한 금융자본은 그 스스로가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며 그에 따라 전체 경제체제를 이 거대해진 금융자본이 지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독점의 심화에 따라 형성된 과잉자본을 타국에 수출하는 것, 곧 자본 수출을 특징으로 한다. 네 번째의 특징은 자본가 집단(단체)에 의한 세계분할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열강에 의한 영토적 분할을 제국주의의 그 특징으로 한다.
강대국에 의한 타국 영토의 군사적 침략이라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의 제국주의는 과거 제국주의와 형태상으로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제국주의는 그것이 독점자본의 형성,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한 금융과두제가 세계 경제를 분할 지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특징 중 첫째와 둘째의 특징은 앞의 독점에 대한 부분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세 번째의 특징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자본수출
전적으로 자유경쟁이 지배적이었던 구 자본주의의 전형은 상품의 수출이었다. 그러나 독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최근 단계의 전형은 자본 수출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유형의 독점이 형성되는데 자본주의가 발전한 모든 나라에서 자본가의 독점단체들이 형성되었으며, 자본의 축적이 엄청난 규모에 달한 소수의 극히 부유한 나라들이 독점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선진국에서는 막대한 '과잉자본'이 생겨난다.
이 과잉자본은 그 나라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후진국에 자본을 수출함으로써 이윤을 높이는데 이용된다. 일반적으로 이들 후진국에서는 자본이 희소하고 토지가격이 비교적 낮으며, 임금이 낮고, 원료가 싸기 때문에 이윤이 높다. 이것이 자본수출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자본 수출은 그것을 수입하는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그 발전을 크게 가속화시킨다. 그러므로 자본 수출이 자본 수출국의 발전을 어느정도 정체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동시에 전세계에 걸친 자본주의의 발전을 더욱 확대ㆍ심화하는 것이다.
자본 수출은 대부자본의 수출과 산업자본의 수출이라는 두가지 형태를 취한다. 대부자본의 수출은 먼저 어떤 국가의 자본가나 정부가 다른 나라에 대한 외채응모의 형태로 실현된다. 나아가 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을 다른 나라에 직접 수출함으로써 그곳에 자기 은행을 설립하거나 또는 토착은행을 종속시켜 협정을 맺든가 결합할 수도 있다. 또한 자본 수출은 비단 후진국에 국한되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가 그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자본 수출국들은 자기들끼리 세계를 분할하게 된다.
(2) 세계의 분할
- 자본가 단체들간의 세계분할
독점자본가의 단체인 카르텔ㆍ트러스트는 먼저 국내시장을 자기들끼리 분할함으로써 자기나라의 산업을 완전히 장악해 간다. 자본 수출이 늘어나고 대독점 연합체들의 대외적ㆍ식민지적 관계망과 '세력권'이 확립됨에 따라 점차 이전 단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된 단계, 국제 독점체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이들 독점체들에 의해서 세계시장은 분할된다. 이것을 자본가 단체들 간의 경제적 분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국주의적 관계들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열강에 의한 영토적 분할
제국주의의 또하나의 특질로 열강에 의한 영토적 분할을 들 수 있다. 현대는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단계' 즉 '금융자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적 식민지 정책의 독특한 시대이다. 물론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 이전에도, 아니 자본주의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노예제를 기초로 했던 로마도 식민지정책을 추구했으며 제국주의를 실시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 시기는 금융자본의 식민지정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정책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금융자본과 그 대외정책―이는 곧 세계의 경제적ㆍ정치적 분할을 위한 열강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이 국가 종속의 수많은 과도적 형태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라는 두 개의 주요 집단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금융적ㆍ외교적 종속의 그물에 갇혀있는 다양한 형태의 종속국들이 있는 것이다.
Ⅱ. 독점 형성과 제국주의 전개과정
-제1차 세계대전까지
1. 1987년 대공황과 독점의 형성
(1) 자본주의 초기부터 지속된 공황
영국을 선두로 시작된 자본주의 세계의 발달로 이제 전세계는 자본주의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나라마다 달랐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미발달한 후진국에 남는 자본을 수출하거나, 군사적 침략을 감행했다. 그런데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과잉자본 수출은 결국 공황으로 이어지곤 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어났던 공황은 과잉자본의 투기에 의한 공황이었다.
1808년 에스파니아 및 외국령 서인도제도의 문호가 영국에 개방되면서 남미 경제도 개방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영국의 자본은 과잉투기를 시작했는데, 그 결과 1811년에 공황이 한차례 있었다. 1822년의 호황을 맞이하여서는 실존하지 않은 남미의 공화국 차관이 영국에서 모집될 정도로 불건전한 투기가 성행했다. 이렇게 사기적 투기가 성행하고, 은행에서 이를 조장하면서 마침내 영국 내부에서는 자본이 궁핍한 상황을 맞게 되었고, 결국 1825년에 또다시 공황을 맞게 되었다. 영국은 1832년부터는 어느정도 상승기에 접어들었지만 36년에 또다시 공황에 직면했고, 이것은 4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의 공황이 과잉생산 공황이 아닐 수 있었던 것은 과잉자본이 주로 철도나 금광개발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는 직접적인 생산물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과, 생산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것이며, 결국 자본주의 시장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투자는 이후 과잉생산 공황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50년대에 들어서서는 공황이 성격이 달라진다. 자본주의 본래적 의미의 과잉생산 공황이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연결이 확대되어 한 국가에서의 공황은 세계 공황으로 심각하게 파급되었다. 이 때는 이미 세계 주요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확립했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급속도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이었다.
1857년에 미국에서 개시된 공황, 그리고 1866년 금생산의 증대로 인한 공황 등은 이전과는 다르게 과잉생산으로 인한 공황이었고, 이것은 세계로 파급되었다. 그런데 이 공황이 아주 큰 파괴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제국간에 교역이 활발해진 데다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국내시장이 확대되면서 수요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870년대의 공황은 달랐다. 1973년의 공황은 오스트리아에서 폭발하여 차츰 유럽 전체를 휩쓸고 런던의 거래소 공황을 야기하여 마침내 세계에 만연했다. 게다가 이 공황은 80년대 초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호경기와, 89∼90년의 극히 단기적인 호경기를 제외하고는 22년간이나 유럽의 경제를 주름지게 했다는 점에서 큰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다. 이 공황은 농업공황으로 출발했다. 이 때 이미 농업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깊숙하게 편입되어 있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농업기술이 발달했고, 이로 인해서 과잉생산은 필연적이었다. 세계는 자급자족을 할만큼의 식량생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생산물의 과잉은 농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농업인들은 급격하게 몰락해갔다. 농업인구의 구매력이 급속하게 감소하자 이것은 곧 공산품의 과잉을 초래했다. 이것이 1870년의 공황을 근 20년이 넘게 지속되도록 만든 요인이다.
영국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온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1870년대의 공황을 맞이하여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 공황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 자본은 독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 축은 영국에서 미국과 독일로 이전되었고, 산업구조 역시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국가 간의 새로운 대립과 항쟁이 시작되면서 제국주의 쟁탈전의 막이 올랐다.
(2) 독점을 가능하게 한 기술혁신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19세기 말의 대공황에서 탈출하고자 찾은 길은 기술개발이었다.
제철업에서는 이미 1850년대 말부터 1860년대에 걸쳐 등장한 '벳세머의 전로'와 지멘스의 '마르땡의 평로'에 의해서 철강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19세기 말에는 이들 장치의 보급으로 철강산업은 연철에서 강철로 교체되었다. 화학공업에서 1861년 솔베이법이 발명되고, 18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유기화학공업이 새롭게 발흥하였다. 20세기에는 독일의 하버와 보쉬가 공중질소의 고정화를 통한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해서 대량생산형 화학공업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혁신기술을 기초로 해서 전기, 통신, 전자기술이 발전했고, 내연기관이 개발되면서 자동차공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1892년 디젤 증유기관이 발명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석유가 새로운 연료로 등장하고 이것이 자동차 엔진으로 이용되어 대규모적인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이런 기술변혁은 사회 전체의 기술체계를 전환시켰다. 전기와 석유가 동력원으로 새롭게 이용되고, 철강이 각종 기계나 건물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그러면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기술혁신에 의한 중화학공업으로의 발전은 대량생산을 실현할 조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은 생산과정에도 변화를 일으키는데, 기업활동 과정의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연속된 생산단계를 결합시키고, 원료와 부품의 조달이나 판매, 제품 개발 등 업무의 내부통합을 진행시킨다. 노동대상의 흐름이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기업이 이를 가능한 한 계획하고 제어하는 것이 대량생산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기업들은 거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거대기업은 대량생산과 수직적 통합기업이라는 구조적인 특징을 구비해가며 성장하게 된다. 그런 거대기업이 바로 독점자본이다.
독점형성의 선두 주자는 영국이 아니라 독일과 미국이었다. 그러면서 세계 자본주의의 판도는 현격하게 달라지게 된다. 독일과 미국의 독점형성 과정을 살펴보고, 왜 영국에서는 독점형성이 늦었는지 알아보자.
(3) 독점 진행과정
- 독일에서의 독점 형성
독일은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러 제국으로 갈라진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다. 17세기 '30년 전쟁'의 여파로 독일에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은 중단되고, 거꾸로 봉건체제가 재편되어 수백개의 영방국가가 난립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독일은 1871년 보불전쟁의 승리로 알사스와 로렌 지방을 획득하고, 오랜 숙원이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함과 동시에 금본위에 기초한 통일적 통화·신용제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의 선봉에 선 것은 비스마르크였다. 정치적 통일을 통해 강력한 권한을 구축한 비스마르크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생산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1873년의 공황을 맞이해서는 보호관세제도를 강화하고, 은행의 원조 아래 대규모 설비투자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독일 자본주의는 20∼30년 안에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60∼70년대의 기술혁신도 이러한 배경 아래서 촉진되었고, 이와 동시에 은행자본의 집중도 추진해서 금융독점의 맹아가 싹텄으며, 특히 근대적 주식회사제도도 확립되었다.
이제, 기술혁신, 금융독점, 중화학공업의 발전, 국가의 강력한 지원, 그리고 보불전쟁에서의 승리로 획득한 50억 프랑의 배상금은 독일이 선진적으로 독점형성을 할 수 있는 커다란 조건이 되었다. 독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주로 카르텔의 형태로 독점을 형성했는데, 1911년에 카르텔이 600개가 될 정도로 모든 중요 산업이 카르텔화했다. 그리고 이 카르텔은 마침내 공동의 판매망인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면서 발전했다.
독일에는 1870년대에 이미 석탄과 철강기업에 의한 탄전 및 광산의 매점 경쟁, 생산제한 협정 등이 등장했지만,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893년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 1896년 라인·베스트팔렌 선철 신디케이트, 1904년 독일 제강연합의 결성 등이 그것이다. 전기기계공업에서도 1890년대에 A.E.G나 지멘스 등 대규모 종합전기 기계산업이 창설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합병과 집중이 더욱 강화되었다.
독일은 카르텔의 형태로 독점자본을 성립시키는데 주식회사제도를 이용했다. 은행이 독점체의 주주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중역을 파견하면서 은행이 산업자본을 지배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은 금융독점의 형태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들의 독점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예를 들어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의 경우 루르 지방 탄전의 산탄량 86.7%, 전독일의 45.4%를 지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독점력을 바탕으로 대외경쟁에서 덤핑판매를 통해 가격 우위를 점하고, 국내 시장에서는 고가판매를 자행했다. 그런 독점 이윤은 독점기업의 성장을 더욱 촉진했다.
- 미국의 독점 진행과정
"자유경쟁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며, 우리는 과점과 사적집산주의가 루울인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갈브레이드의 이러한 주장은 독점 형성기의 미국 사회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 독점이 진행된 것도 역시 1873년의 공황을 기점으로 해서였다. 미국은 독일과는 다르게 트러스트의 형태로 독점이 발달했는데, 그 구체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국 중상주의의 독점적 무역구조 속에서 이윤을 흡수당하여 근대자본주의의 발전이 억제되어 온 미국 식민지는 식민지인의 이익을 옹호하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식민지 독립전쟁이라는 사회적 변혁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의 승리로 해방된 미국에서도 자본주의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었으니, 그것은 남부의 대농장제도였다.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은 거대한 노동자군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부의 노예들은 묶여있는 존재였고, 그들이 근대적 노동자로 전환하려면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도의 폐지를 선언한 링컨은 북부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한 것이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하면서 거대한 노예들은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산업의 노동자로 전환되었다.
남북전쟁은 또한 은행에서의 독점을 발전시켰다. 전쟁을 하기 위해 정부는 돈이 필요했다. 정부는 은행업자들의 신용을 담보로 해서 제조업자들에게 전쟁물품을 구입했다. 그러면서 은행업자들의 힘은 커졌고, 이들은 급격하게 은행독점으로 발전했다.
1873년의 공황을 맞이하여 미국의 일부 자본은 급격하게 독점화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882년 스탠다드 석유 트러스트이다. 스탠다드 석유 트러스트는 록펠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사회사업가로 이름이 높은 록펠러는 천사의 얼굴 이면에 또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록펠러가 독점을 완성시키기 위해 저지른 온갖 추잡한 사기와 협잡은 독점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지만, 그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는 초기에 작은 석유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때는 석유가 많이 나는 곳에 시추공만 꽂으면 되는 때라 작은 석유 회사들이 난립해 있었다. 석유는 술통과 같은 나무통으로 운반했는데, 록펠러는 운반업자를 매수하여 경쟁사의 석유를 수송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서 경쟁사를 몰락시키거나 흡수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나머지 경쟁사들이 모여서 수송관을 설치하는 새로운 수송방법을 개발하자, 이것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기 위한 공작을 벌였고,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록펠러의 Ohio Standard 석유회사는 1879년에 30개 사와 트러스트 협정을 하여 약 250개의 경쟁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유의 90%를 독점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1882년에 다시 14개 사의 전 주식과 26개 사의 주식 대부분을 록펠러를 비롯한 9명이 수탁하여 일체의 권리를 행사하는 형태의 트러스트로 재편했다. 이런 방식의 트러스트는 이후 트러스트의 전형이 되었다.
그런데 이 트러스트는 관습법과 주법에 저촉되어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는 해산된다. 1890대의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트러스트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서부 농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연방정부에서 입법한 것이다. 이런 반트러스트 전통은 미국에서 오래동안 지속되었지만, 그것이 독점의 형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록펠러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는 해산되었어도, 이후 그는 록펠러 재단이라는 콘쩨른을 형성하여 오히려 보다 강력한 독점체를 구성했으며, 많은 산업부분의 독점체가 이에 따라 콘쩨른으로 전환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강력한 금융독점체이다.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의 예에서 본 것처럼 미국에서의 독점 형성은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1898년에서 1902년에는 대합동 붐이 일어나 1901년에는 세계최대의 기업 U.S.스틸이 설립되었다. 또 전기기계공업에서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G.E, 웨스팅하우스 등 거대기업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대은행들에 의해 자금이 조달되었다. 대표적으로 U.S.스틸의 경우 공장 800개를 합병하고 자본 720,000,000$를 통합했다. 이들 거대한 트러스트와 주식회사들, 기업연합 등은 노동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그들의 강화된 힘을 행사하면서 자본의 지배력을 집중시켰다.
레닌에 의하면 1904년의 미국에서는 전체의 1% 정도로서 100만 달러의 생산고를 가진 대규모 기업들이 전체 노동자의 25% 이상을 고용하였으며 총생산량의 38%를 생산하였다. 5년밖에 지나지 않은 1909년의 숫자를 보면 이들의 지배력은 노동자들의 30%를 차지하고 생산량의 44%를 차지할만큼 증가하였다.
- 영국은 왜 독점형성이 늦었는가.
한편 영국은 자유무역체제 하에서 형성된 사업구조와 축적구조가 강력한 생명력을 갖고 있었기에 독점형성에서는 뒤질 수밖에 없었다. 면공업 중심의 축적구조 지속, 세계은행으로서의 역할, 높은 무역이윤과 상업이윤 등이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집중적 투자를 지연시키고 독점형성을 방해한 것이다.
광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광산업에 있어서 영국은 19세기 말에 세계 최대의 산출국이며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1870년의 대공황을 맞으면서 영국도 국내적 국제적 시장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은 독점을 형성하여 대응하고자 했으나 생산자 수가 너무 많았고 생산과 판매의 조건이 각양각색이었다. 예컨대 1925년까지도 영국의 중요한 경쟁상대인 유럽 Wesfulia 지방의 경우 불과 70개의 기업이 연간 1억 톤을 생산하는데 반해 영국은 약 2,500개의 광산을 약 1,400의 기업이 소유한 채 연간 2억 6천만 톤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산된 상태로는 기업 집중을 위한 자산평가도 잘 안되는데다 기업주들의 이해관계
를 조정하기가 힘들어서 사실상 독점 형성은 불가능했다. 그러면서 1인당 채탄량은 계속 떨어져 1883년 333톤에서 1913년 243톤으로 떨어졌다. 독점형성이 안되면 경쟁에서 밀린다는 절박한 위기감 때문에 국가에서는 1926년에 합동촉진(탄광업법) 및 국가에 의한 독점보강법(1930년의 석탄광업법)을 만들어 독점을 재촉했으나 독점 형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936년 이후에 가서야 보상지불에 의한 국유화 방안을 제출하게 되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서야 광산을 전면적으로 국유화하면서 독점이 가능해졌다.
이런 형편이니만큼 영국의 산업적 독점은 1870년대를 기점으로 그 힘이 상실되어버린 것이다.
(4) 국제 독점체의 형성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경쟁장에 뒤늦게 참여한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은 보다 발전된 기술과 보다 근대적인 공장이라는 이점으로 독점을 형성하며 세계시장을 넘보기 시작했다. 독일과 미국의 이상과 같은 독점 형성은 차츰 산업과 은행의 결합을 필연화했다. 이는 거대기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생산기구가 거대화하고,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고정자본에 투자를 많이 해야 하므로, 부동자금을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설비투자금을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1901년 U.S.스틸 설립 당시 투자은행업자 모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실, 1904년 독일 철강연합 결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것이 베를린 대은행이었다는 사실 등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금융자본'은 독점의 형성과 확립 과정에서 그 중핵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금융자본과 결합한 독점자본은 이제 자신의 범위를 세계로 넓히고자 한다. 자본수출은 그 중요한 추진력이었다. 이는 유리한 직접투자시장을 구하는 것뿐 아니라, 판매시장, 원료자원 및 기타 이권의 확보와 결부되어 독점의 세력범위, 즉 식민지의 확대를 촉구하는 것인데, 이로 인해서 국제적 독점간 투쟁이 전개된다. 또한 국제 독점은 세계시장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국제 카르텔을 형성해서 시장을 분할 지배한다.
국제 독점을 살펴보면 미국의 G.E사와 독일의 A.E.G사가 상호협정을 맺고 서로가 시장을 할당하며, 또한 각국 가입 기업의 주식을 최대한 소유함으로써 국제적 지배권을 완전히 확장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G.E사 하나만 하더라도 각국에 분신을 가진 전기공업에서의 전세계적인 트러스트이다. 그리고 석유를 보면 미국의 스탠다스 석유 트러스트나 영국의 더취 쉘 콤바인이 이미 국제 트러스트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국제적 독점 카르텔만 해도 1897년의 40개에서 1910년에는 100개, 1931년에는 320개로 각각 증가했다.
국제적 독점에 의한 세계의 경제적 분할과 그 투쟁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의 영토 분할 및 재분할을 위한 투쟁, 즉 제국주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2. 제국주의 쟁탈전
자본주의에서 과잉생산은 필연적이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과잉생산품을 팔아먹기 위한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탈하고 수탈하는 것은 세계 역사상 항상 있었던 일이지만 자본주의에서의 제국주의적 침탈은 그런 침탈과는 달리 상품을 팔아먹을 시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제국주의는 직접적 영토지배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그 과정은 피와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1) 제국주의
1880년과 1914년 사이에 유럽과 아메리카 바깥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세계는 몇몇 국가들의 공식적인 통치나 비공식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 이 지배를 담당했던 나라들은 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일본이었다. 대공황을 불러일으킨 과잉생산은 수출을 통해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기에 제국주의 국가들 내의 독점 기업가들은 엄청난 수의 잠재적인 소비자들을 가진 세계무역 지도상의 빈공간을 찾아 그곳을 자신들의 색깔로 채우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내부에 가중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시야를 바깥으로 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정치가들에 의해 제국주의적 침략은 더욱 활발해졌다. 나중에는 다른 영토를 도둑질하는 것이 그 나라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까지 인정될 정도였다.
이런 식민지 침략의 선두에 선 것은 역시 영국이었다. 영국은 16세기부터 이미 무역에서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상선과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였다. 16세기의 무역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실어오고, 미국에 담배와 원면을 실어간 다음, 값싼 공산품을 아프리카의 항구까지 실어 나르는 노예무역이었다. 1792년에서 1815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값싼 노동력으로 최저의 비용만을 들여서 원료 산지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로 노예무역에 의존했던 시기와는 달리 제국주의 정책은 1870년대 대공황을 맞이해서는 국내의 상품들을 판매할 시장을 찾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영국은 특히 대공황기에 세계경제에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실업이 증대하며, 노동운동이 고양되는 등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면서 1870년대 중반에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1875년에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사들여 운하 지배권을 손에 넣은 것을 비롯하여 1876년에는 발루지스탄을, 1878년에는 동지중해 키프로스섬을 확보하고, 1882년에는 이집트를 점령했다. 영국은 이후 10년 정도 사이에 아프리카 북단에서 남단까지 식민지화하는 소위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완료했다. 살기 위해서 영국은 다른 영토를 침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자본 수출도 했는데, 영국의 자본가들은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자본을 국외로 빌려주거나 해외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영국 내부에서 투자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수출은 영국 상품의 수출만큼이나 영국 경제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해외 투자는 영국 총 국가 자산의 1/4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국이 이렇게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동안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놀고 있었을 리는 없다. 프랑스와 독일, 벨기에, 포르투갈, 이탈리아, 미국 등도 다투어 식민지 획득에 나섰다. 그러나 그 때는 세계의 영토분할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 서로 식민지를 놓고 다투기보다는 아직 식민지가 되지 않은 땅을 찾아 깃발을 먼저 꽂는 방식이었다.
미국은 먼저 인디언, 멕시코인, 스페인 및 영국인들을 희생시키면서 협소하고 인구가 산재되어 있는 동부의 연안으로부터 태평양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군사적 팽창 정책에 착수하였다.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의 노골적인 인수, 사실상의 쿠바 인수, 중앙아메리카 전체에 걸친 세력권 확대, 카리브해의 전략적 지배,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에 있었던 남미 전체 지역에 대한 미국 투자 허용 등의 이익을 챙기면서 제국주의적 노정에 착수했다.
제국주의자들이 새로운 땅을 침략할 때는 갖가지 명분이 뒤따랐다. 종교의 이름으로, 또는 개화의 이름으로 새로운 땅에 들어간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땅과 인간과 문화에 대한 도둑질을 자행했다. 대중선교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진행된 개종활동은 식민지 지배의 길을 터놓았고, 서양의 문화적 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소수에 의한 지구의 정복은 강제와 제도에 의해 식민지 사회를 변화시켰고, 식민지의 지배자들은 서구화를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하면서 민중들의 고통을 버려두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의 경제적 종속은 매우 심하게 된다. 각종 초과착취가 횡행하고, 비싼 지배국의 상품을 사야 하는 식민지 국가의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식민지 경제는 왜곡된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제1차 세계대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가속화하면서 세계는 전쟁의 가능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세계의 영토 분할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서 이제는 새로운 땅을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식민지가 된 땅을 두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경쟁을 해야 할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세계는 제국주의적 세계 전쟁의 전면화라는 피할 수 없는 길을 향해 있었다.
이미 1880년대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세계전쟁의 가능성을 분석한 바 있으며, 1890년대에는 전쟁에 대한 우려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평화를 위한 형식적인 모임을 계속하였다. 세계(범)평화회의와 노벨평화상 제정(1897), 그리고 최초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등 각국 정부의 이상적인 평화 공약 선언이 계속된 것은 그만큼 세계대전의 위험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반의 산업화 과정에서 소화기와 포탄의 화력과 속도가 혁명적으로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훨씬 효율적인 터보엔진을 장착하고 훨씬 효과적인 부장력과 더 많은 포를 탑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함을 만드는 등 1880년대 살상기술은 급격하게 발전했고, 각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확장했다. 제국주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전쟁준비에 많은 돈을 들이도록 요구하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화학과 제철분야에서 커다란 산업을 만들어냈다. 1892년 엥겔스가 관찰한 것처럼 "전쟁준비가 거대산업의 한 부분이 되면서 거대산업은 정치적 필수품이 되었"던 까닭에, 전쟁과 군수품 생산의 공생은 불가피하게 정부와 산업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군수회사들은 대부분이 독점 거대산업이었는데, 이 군수물자들은 국가에 의해 소비되어야 했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간의 식민지 획득경쟁이 심화되자 각국간에 경제적 이해관계는 정치 군사적 관계로 비화하여 갖가지 외교 군사상의 대립과 협조, 결합과 분열이 되풀이되었다.
1880년대 초에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협조관계가 형성되었으나(1881 삼제협상, 1882 삼국동맹), 1890년에는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영국에 대한 대항을 의식해 서로 접근했다.(1894년 러불동맹) 영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는 대립적인 입장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이미 산업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 된 독일의 팽창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정치적 협상을 했다. 또한 일본이 러시아를 침략함으로써 그 크기에 비해 힘이 없음이 판명되자,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게 되었다.(1904 영불협상, 1907년 영러협상). 이리하여 1900년대 후반에는 점차 영국과 독일의 각축이라는 대립구도가 선명히 그려지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의 각축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삼국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협상 사이의 정치 군사적 대립의 심화로 현실화되었으며, 1914년 6월 28일 마침내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1890년 이래 민족간의 합병과 투쟁이 계속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민족문제 때문에 분열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여기에 대해 독일이 명백하게 지지를 표명했다. 이미 세계대전의 기운이 넘쳐흐르던 유럽은 사라예보의 작은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전쟁으로 빠져들어갔다. 이 전쟁은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4년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영국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승리하고 독일을 맹주로 한 동맹국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 결과적으로 참전국 모두는 패배자나 마찬가지였다. 이 전쟁으로 전 유럽에서 2천만 명이 사망하고, 참전국의 경제구조는 황폐화되었다.
독일은 해외 영토를 모두 잃고, 국내 생산력도 파괴되었다. 또한 막대한 양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면서 정치 사회적 위기가 가속화되었고, 바이마르 체제가 성립된다. 영국은 승전국이었으나 군수물자 및 생필품을 수입해야 했고, 파운드화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심각한 경제불황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는 철도와 도로가 파괴되고, 부채가 많아졌다. 이처럼 유럽 모두는 전쟁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반면 이 전쟁으로 커다란 이득을 얻은 국가도 있었다. 미국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까닭에 유럽 각국에 거액의 수출을 할 수 있었고, 연합국에 차관을 공여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일약 150억 달러 이상의 채권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제 미국은 자본주의의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이어받을 만큼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간다. 또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1차 대전 이후 영국 중심의 세계 체제는 무너졌다.
또한 이 당시 각국의 민중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인한 민족주의적 동원으로 인해 각국 민중들은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서게 되고, 각국의 혁명운동은 억압당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의 와중에 제국주의 일각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국가를 성립시킨 러시아 혁명에 의해 각국의 혁명운동은 고양되고,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3. 세계 노동자들의 반제국주의·반독점 투쟁과 러시아 혁명
제국주의와 독점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투쟁 역시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투쟁만큼 격렬했다. 식민지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선진국들의 혁명투쟁의 결절점이 바로 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었다.
(1) 식민지 국가들의 반제국주의 투쟁
이미 18세기 말부터 민족해방투쟁의 움직임이 있었다.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인 '시오의 학살'에서 볼 수 있듯이 1820년대 그리스 민중들은 터키의 지배에 대항했고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반면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상인과 지식인들이 독립운동에 가세하면서 그리스는 독립하게 된다.
이집트와 아랍지방에서도 마호메트의 직계를 자처하는 하심족(후의 이라크, 요르단), 이슬람 세계의 혁신파를 자처하는 사우드족(후의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나폴레옹의 원정 아래 근대화한 이집트의 메헤메트 알리 등이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또한 발칸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세르비아의 두 왕조는 농민 투쟁을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유럽에 근접해 있었던 까닭에 유럽 강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정당할 수밖에 없었다. 발칸반도는 아직도 민족문제로 인해 투쟁이 계속되고 있어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린다.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인도와 중국에서도 투쟁은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초기 식민지들의 반제국주의투쟁은 대부분 종교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는데, 1840년대 아편전쟁 후 중국에서의 평영탄, 그리고 1850년에 시작된 태평천국운동 등 외국세력에 대항하는 인민의 직접적인 운동이나, 1857년의 인도의 세포이 반란, 우리나라의 갑오농민전쟁, 중국의 의화단의 난 등은 종교적 색채에 극단적인 배외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 투쟁이었다. 또한 어느 정도 근대적인 군사력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이집트의 아라비 대령의 반란(1882), 터키의 청년터키당의 혁명(1908)에서 보듯이 군인의 역할이 컸다.
자본주의의 국제적 발전은 식민지 종속적 민족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식민지 지역의 발전을 왜곡시켰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해서 이들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적 발전은 두드러지게 촉진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식민지의 희생 위에서 치러졌으며, 식민지 민중들의 고통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고통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이집트의 와프드당 결성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민족자결 원칙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선진국들만의 것으로 귀결된 것에 대한 분노를 포함하는 것이다.
또 이 시기에는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이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비쳤다. 손문의 연소용공(聯蘇容共) 등 국공합작의 방침이나 케말의 터키 해방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2) 노동자 투쟁
식민지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해짐과 함께 선진 제국주의 국가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물결쳤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노동자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했고, 이들은 거대한 계급으로 등장했다. 1867년에서 1875년 사이에 노동조합들은 법적인 지위와 특권을 상당정도 획득하고 작업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는데, 선거권을 확장하는 것도 투쟁을 통해서였다. 그 전만 해도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참가할 수 있었다. 만약 노동자들을 선거에 참여시킨다면 수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패배가 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르주아지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그리고 자본력이 형식적 평등을 보장하더라도 부르주아지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나서야 그들의 두려움은 조금씩 가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인정받는 것은 투쟁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는데, 벨기에에서는 1893년과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스웨덴은 1902년에, 그리고 핀란드에서는 1905년에 참정권을 위한 총파업이 있었다. 이런 투쟁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보통선거권도 확립된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1910년의 경우 프랑스는 철도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15만 명의 철도원을 징집해서, 즉 이들을 군법 하에 둠으로써 철도 총파업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대에는 전국적인 운수노동자들과 광산노동자들이 전국적 범위의 집단적인 협약을 파업을 통해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큰 힘을 갖고 있는 금속산업의 노동자들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자들의 정당은 이미 강력했다. 민주적이고 선거에 의한 정치가 허용되었던 곳은 어디나 혁명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고무되었다. 1875년에 통합되어 이미 선거에 참여할 역량을 갖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1880년까지도 이러한 정당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나 1906년에는 사민당의 존재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동안의 노동운동의 성장, 노동계급 정당의 건설 및 대중적 기반 강화, 마르크스주의의 확산은 제2차 인터내셔널(1880년대 말∼1890년대 초)로 이어졌다. 조직적인 면에서는 제2차 인터내셔널은 당과 노동조합의 방만한 동맹이었으며, 4차 총회(1900년 파리)에 와서야 기술적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사회주의 사무국]이 설치될 정도로 느슨한 조직이었다.
이 2차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하고 일관된 투쟁은 반전(反戰)투쟁이었다.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에 노동자들이 총알받이로 나서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1891년 제2차 총회의 결의문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는 것을 이야기한 이래 전쟁 반대는 지속적으로 논의된 주제이다. 특히 1907년 제7차 총회(슈트트가르트)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촉구한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특히 발칸 반도에서 군사적 위기가 발생한 1912년 제9차 총회의 [바젤 결의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혁명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때의 인터내셔널은 23개국, 27개 정당, 378만 7천 명의 당원이 있었으며, 이들에게 우호적인 1천만 노동조합원이 있었다. 그러나 2차 인터내셔널의 주축이었던 수정주의자들 및 사회주의 정당의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은 총회의 결의를 실천할 행동을 취하지 않고 2년 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전쟁 지지를 선포하고 제국주의의 품에 안겼다. 결국 제2차 인터내셔널은 붕괴하는데, 1919년 레닌이 제3차 인터내셔널을 결정하고, 사민주의자들이 1920년에 2차 인터내셔널을 재건하면서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의 이념적 분화가 분명해진다.
결국 노동운동을 제대로 지도할 힘이 없음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혁명의 기운은 왜곡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섭되었다.
(3) 러시아 혁명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러시아 혁명'으로 최초의 결실을 맺었다. 레닌을 지도자로 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세비키)의 지도 아래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빈농과 동맹하여 1917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러시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다른 선진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발전의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섰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러시아에는 150개가 넘는 독점체들이 주요 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업의 독점화와 은행자본의 집중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는 귀족들이 토지 소유의 61.9%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을 구성하는 100개 넘는 민족들은 짜리즘에 의해 가혹하게 수탈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모순과 빈농의 고통이 이들을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참여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2월 짜르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광범한 혁명적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 아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와 농민대표 소비에트 병사위원회 등을 도처에서 조직한다. 한편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3월 2일에 수립된다. 이런 이중권력 상태에서 볼세비키 정당은 임시정부의 반혁명적 본질과 민중에 대한 배신행위를 폭로하고 민중들을 획득하기에 힘을 기울인다.
6월 11일 임시정부는 서방 제국주의 진영의 요구에 따라 독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한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7월 3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전쟁을 즉각 중지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에 들어간다. 이 시위에 대한 임시정부의 탄압으로 56명이 사망하고, 650명이 부상했으며, 볼세비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리고 노동자는 무장해제되어 혁명적인 군부대는 해체되거나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러면서 권력은 반혁명적인 임시정부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러나 볼세비키는 대중의 지지를 업고, 혁명을 수호할 것을 호소하며, 노동자, 병사, 농민들을 조직한다. 그 결과 볼세비키의 지도 아래 적위대와 혁명적 병사들은 수도의 주요 지점을 장악함과 동시에 1917년 10월 새벽 2시, 동궁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체포하면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었다.
새로운 노동자 정부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무장을 재건하고, 힘을 비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18년 2월 협상은 결렬되고, 독일은 모든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한다. 하지만 적위대와 새로운 혁명군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페트로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는 저지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형성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으며 각국의 혁명 투쟁은 고무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정책의 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자본주의 발전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지난 호부터 계속 강조해왔던 바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황은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공황국면에서 팔짱을 끼고 있지는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데, 그 노력이란 것은 대부분 일부(독점자본)를 제외한 나머지를 고통에 몰아넣는 것이다. 1870년대의 공황을 맞아서 자본은 독점을 형성했고, 대다수의 노동자와 나머지 민중들을 소외시켰다.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본의 노력은 식민지 민중을 수탈하는 데에 이르고, 이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 전쟁으로까지 이어진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민중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그런데 그렇게 자본이 몸부림쳐서 일시적으로 위기가 모면되는 것 같아도, 그것은 결국 더 큰 위기를 부른다. 이처럼 위기는 지속되고, 그 위기 극복책은 민중들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이 부패한 자본주의를 어찌할 것인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둘째, 독점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미 자유경쟁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토록 당연한 이야기가 요즘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일명 '신자유주의'는 '자유 시장 경제'만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기에 국가가 개입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너무나 우습게도 자유시장 경제는 그 논리를 주장하는 독점자본에 의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또한 국가의 개입이라는 것도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이루어졌음을 애써 외면하는 발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독점자본의 권력을, 지금도 강하지만 국가의 틀을 완전히 뛰어넘을 정도로 더할나위 없이 강화하겠다는 표현에 다름아니다.
셋째, 계속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식민지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독점자본의 수탈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노동자들의 힘의 강화는 모두 어려움을 딛고 발전해온 것이다. 경제위기라고 해서 움추러들고, 경제위기라고 해서 그 동안의 투쟁의 성과들을 모두 내어주고 후퇴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자본의 위기나 경제의 부침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투쟁을 통해 권리를 증진시키고, 발전을 해나갈 뿐이다. 그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넷째, 왜곡된 민족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자의 대표라고 하는 제2차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하고, 노동자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명분은 왜곡된 '민족주의'였다. 지금 이런 민족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판치고 있음을 본다. '국민경제'라는 논리, '국가경쟁력 강화'의 논리를 수용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회주의적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태도이다. 이런 논리로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쟁탈전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노동자에게는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국제주의'가 있을 뿐이다. 만약 민족주의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식민지(영토적 지배를 하든, 아니든) 지배를 강화하려는 제국주의에 맞선 경우 뿐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식민지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철저하게 다르다.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입각한 제국주의 반대, 그리고 전세계 노동자의 총단결만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관점이다. 그렇지 않은 어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도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현대자본주의발전사 (5):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형성과 제2차 세계대전
노동전선 기획단
1. 국가독점자본주의란 무엇인가?
(1)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발생 및 개념
자본주의 단계에서 상부구조로서 국가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의 이익―비록 자신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본질적으로―을 옹호한다. 즉, 사유재산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데에는 사유재산을 자본으로 전환하여 그 가치를 증식시켜 가는 행위, 다시 말해 자본가 계급의 이윤추구 과정을 보호하고 육성시켜 간다. 그러한 이윤추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황이나 불황시기에 이 자본주의 국가는 새로운 자본축적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직·간접적인 역할까지도 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가 갖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기관에 의한 직접적인 경제개입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국가기관이 독점조직과 융합하고 독점조직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가는 독점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독점조직은 국가기관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이용하여 국가의 경제활동에 전면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기의 지배를 강화해가며 이것을 통해 고액의 독점이윤의 획득을 보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의 과정은 자연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은 아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모순에서 기인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인 것이다. 즉,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더욱 심해지는 노동자계급의 빈곤, 국내시장이 상대적으로 축소되면서 나타나는 시장형성의 어려움 등이 그 원인인 것이다. 또한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나타나는 종속국의 민족해방운동의 성장, 제국주의 국가간의 시장쟁탈을 둘러싼 투쟁의 격화 등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모순의 극복과 자본주의의 위기관리의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징 및 국가개입의 형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자본간의 경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획득의 어려움을 국가의 개입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속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면 우선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모든 정책들에 있어 독점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국유화정책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국가가 직접적으로 생산부문을 장악하여 자본축적 과정을 원활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일부문에 난립하고 있는 비능률적인 기업들을 통폐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국영기업으로 육성하기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적 총자본에 원료, 반제품, 서비스를 값싸게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도 한다. 또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통하여 새로운 산업,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상품의 개발을 촉진하고 그 연구개발의 성과를 값싸게 민간기업에 이전시키는 과정들이 모두 이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국가의 역할 속에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로 사회보장제도를 특징으로 한다. 국가가 모든 국민들에게 교육, 보건, 주택, 후생 면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을 사회보장제도라고 부른다. 교육과 보건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거나, 서민용 주택을 국가가 건설 관리하여 저소득층에게 낮은 임대료를 받고, 소득보조금을 저소득층에게 지급하며, 실업자에게는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노후에는 연금을 국가가 지급한다. 또한 탁아소를 설치, 운영하여 부녀자의 직장생활을 보호하며, 노인과 병약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을 돌보는 사회봉사자를 보조 유지한다.
이런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의 노동력 관리의 일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일정하게 산업예비군을 유지해야 자본의 이윤추구가 가능해지므로 국가는 산업예비군을 유지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것이 사회보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또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드는 비용의 일부를 자본이 아닌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담당하여 자본의 이윤추구를 원활하게 한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을 자신의 세금으로 일부 받는 셈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회보장제도는 독점자본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하는 한 수단이기도 하다.
세번째로는 국민경제의 군사화를 촉진시킨다. 국민경제의 군사화는 제국주의 시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나타난 경제현상이다.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 시기에는 전쟁기간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국가의 군사비지출과 군수공업은 국민경제 있어서 일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았다. 독점자본주의의 시기에 들어와서 제국주의 각국은 모두 잇달아 국민경제를 군사화의 길로 추진해 온 것이다.
이 군사화를 통해 독점자본은 막대한 양의 이윤을 가져갈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국가의 군수발주 완성을 구실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 정도를 크게 강화할 뿐만 아니
라, 나아가 그들이 국가를 통해 독점자본에게 유리하게 국민소득의 재분배를 행하게 하여 많은 이익을 더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독점자본가에게 이윤이 풍부한 대량의 군사발주를 하는 것과 그들에게 대부금과 보조금을 무한정 제공하는 것은 물론 원료 및 재료 내지 기술력과 기술정보 및 연구 실험 경비들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이 아닌 일상시기에서도 군수생산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독점자본은 지속적인 생산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군수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인 군산복합체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 독점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독점을 더욱 심화시키며 노동자계급과의 대립을 첨예화하게 된다.
(3)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계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와는 다른 특징을 갖는 것은 국가의 경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독점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발생하는 여러 가지의 모순에서 기인하고 있다. 즉, 독점자본의 이윤획득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와 모순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자본의 위기극복을 위한 또 다른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과연 독점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는 국가가 자본주의 경제 및 사회의 재생산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국가의 재정지출이 크게 증가한다. 사회적인 기초설비―도로, 항만, 철도, 통신, 전력―를 확충하며, 국영기업을 운영하고 팽창하는 관료와 공공부문의 취업자를 유지하며, 국방과 치안유지를 위하여 국가의 재정지출은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국가의 재정수입은 조세수입과 국영기업 이익금이다. 이중에서도 조세수입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다. 이는 납세자들이 조세저항 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재정지출의 증가와 그로 인한 재정위기는 공황기나 불황기에 더욱 확대된다. 국가는 이러한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시도들을 하게 된다.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한다거나 물가와 임금의 상승을 억제하여 국가의 재정지출의 증가를 규제한다거나 국방비와 치안유지비를 감축하는 방안이 있으나 사실상 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반독점세력이 더욱 증가하게 된다. 자본과 생산의 집적과 집중이 만들어 놓은 노동자군의 형성은 독점적 대기업에 맞먹는 대규모 노동조합의 결성을 가능하게 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대규모 노동조합과 노동자계급의 조직화된 반발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비독점기업 및 일반 소비자들과도 대립하게 된다. 결국 독점자본에 반대하는 세력들, 곧 노동자계급, 비독점자본, 일반소비자들이 일종의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자본에 대한 투쟁을 넘어서서 국가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국가의 경제개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는 자본의 운동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독점세력들을 강화시키고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2.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형성 (1) 1929년 세계대공황 -대공황의 서막 첫 번째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는 다시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며 변하지 않을 번영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았다. 전 세계의 식민지 민중들은 제국주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눈부신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혼란에 빠졌던 세계경제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영국을 중심으로 한 금본위체제가 회복되었다. 특히 30억 달러의 대외 채무를 지고 있다가 1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하여 일약 1백 5십억 달러의 채권국으로 변신한 미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전후 경제부흥을 계기로 돈을 벌었다. 세계경제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는 데 따라 신흥 부국인 미국의 뉴욕 '월가' 증권거래소는 날마다 오르기만 하는 증권을 사기 위해 모여든 투자가들로 북적거렸다. 1929년 10월 24일은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날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의해 희생당한 11명의 주식투자자들의 자살은 24일을 기존의 날과 다른 날로 만들었다. 월가의 주식값이 최초로 큰 폭의 하락세를 기록한 날로, 전대미문의 파멸적 타격을 인류에게 가한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날을 일컬어 '암흑의 목요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닷새 뒤에 다시 한번 주가의 대폭락이 일어났다. 이날 월가의 주식값은 무려 43%나 떨어졌다. 그리하여 11월에는 9월의 절반을 밑도는 수준으로, 그리고 다음해 7월에는 29년 9월의 8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 여파로 미국에서는 5천여 개의 은행이 부도를 냈고 수만 개의 기업이 파산했는가 하면 9백만 명의 저금통장이 쓸모 없는 종이쪼가리로 변하고 말았다. 뒤이어 베를린, 파리, 런던, 동경의 증권거래소에도 주가 폭락의 풍파가 몰아닥쳤다. 월가를 덮친 '목요일의 암흑'은 이미 서로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던 세계경제의 흐름을 타고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공장, 모든 가정에 빠짐없이 찾아들어 음울한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경과 1920년대에는 식민지와 후진국들의 각종 농산물과 원료생산이 증가했고, 선진공업국의 경우에는 눈부신 기술발전에 의해 최신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러한 생산력의 증가는 고용을 줄어들게 하면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팔아야 할 상품은 많아졌지만 이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줄어들었다. 과잉생산은 먼저 농업부문의 공황을 불러왔고 공업생산에 있어서도 서서히 공황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1925년에 정점에 이른 건축업이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1929년 6월을 고비로 공업생산지수도 하락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매년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려 그 돈을 유럽과 세계 곳곳에 투자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경제의 불황은 곧장 전세계로 파급되었다. 미국은 불황이 시작되자 투자를 줄이기 시작했고 유럽의 국가들은 보호무역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각 국가들은 시장을 폐쇄하거나 관세를 높였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시장 개방을 요구하였다. 모든 국가들은 국제적 무역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방법을 구사하였지만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것은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당시 불황의 심각성은 몇 가지 통계수치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923년부터 25년 사이의 평균 지수를 100으로 잡을 때 1933년의 공업은 60, 건축은 14, 고용은 61, 노동자의 임금은 38 수준으로 하락했다. 실업자는 1930년에 3백만, 33년에 1천5백만으로 늘어났다. GNP는 1928년의 8백50억 달러에서 30년 6백80억, 32년에는 3백70억 달러로 떨어졌다. 미국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공업생산액의 1925∼29년 평균을 100으로 할 때, 29년 2/4분기에는 113.1이었으나 32년 3/4분기에는 65.9에 불과했다. 29∼32년 사이에 세계무역량은 70.8%나 감소했고 실업자는 5천만 명을 훨씬 넘어설 정도였다.
그러면, 대공황의 구체적인 상황을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 공황이 도래하기 바로 전, 1920년대 중반까지 산업에 있어서는 생산성이 급속도로 향상되어 가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것은 상위 5%의 고소득자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20년의 22%에서 1929년 26%로 높아졌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수에게로 부가 쏠리게 되었던 것이다. 자본가들은 겉으로 보이는 경제번영에 주목했고 주식을 포함한 금융자본의 축적에 열을 올렸으며 금융투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 속에서 주식시장의 붕괴는 경제 전반에 걸쳐 파급되었다. 실업자는 1933년에 전체 노동력의 1/4인 1,300만 명으로 늘어났고 산업의 생산력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될 조건을 만들었다. 자본에게는 공황이라는 위기를 탈출할 계기를 만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경우,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체결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은 경제를 혼란시키고 화폐가치를 하락시켜 1923년 인플레이션은 절정에 다다랐다. 인플레이션은 소수의 거대한 자본과, 다수 노동자의 빈익빈 상태를 가져왔고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민중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독일은 화학, 전기, 그리고 기계의 제 산업이 근대화되어 다시 세계시장의 경쟁에 참가하였고 인플레이션은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안정일 뿐이었다. 미국의 경제 공황이 독일에 미친 영향은 치명적이었다. 전후 독일의 경제 재건이 미국의 단기 신용에 의존하였으므로 미국의 단기 대여 환수는 독일 경제를 빠른 속도로 파국적 사태로 인도하였다. 농산물 가격 폭락, 생산의 저하, 소득 저하, 실업증가, 수출부진, 회사의 파산이라고 하는 어두운 연쇄 반응은 독일 경제의 파국적 전조였다. 1931년 독일은 경제 파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국은행 금리를 7%로 인상하였으나 닥쳐오는 경제위기는 막을 수 없었다. 1931년 7월 초 외환의 고갈로 독일에서 가장 큰 은행인 다름슈태테르은행이 파산하였다. 이에 독일 정부는 모든 외환 지출과 은행 통제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모든 산업이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독일에서 실업자가 200만을 넘었다. 경제 공황이 심각해지면서 1932년에는 독일에서 실업자가 6백만 명에 도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또 독일의 독점자본은 세금으로 저소득층과 실업자의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국가"에 등을 돌리고 독재 정치의 수립을 바랬다. 독점자본은 지속적인 사회위기 속에서 증대하는 공산주의 운동으로 인한 사회혁명에 두려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상황의 전개는 바로 정치의 장에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독점자본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하고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잠재울 자, 바로 히틀러라는 전대미문의 독재자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대공황은 생산력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자본주의 세계를 지배해온 '영원한 번영'을 기대하는 낙관적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어버렸다. 시장의 논리(자본의 무정부성)의 허구성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시장의 논리는 자본주의적 경쟁을 통해 생산을 극대화하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당시까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실업이나 상품의 과잉생산으로 인해 경제공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궁핍화와 생산력의 빠른 발전으로 인해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난다'고 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에 불과하다고 비웃었으며, 실업은 기껏해야 일시적이거나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실업자란 게으른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과잉생산에 의한 공황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대공황은 창고에 상품을 가득 쌓아두고도 민중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하였으며 바쁘게 돌아가던 공장과 기계를 멈추게 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황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부자는 더 부유해졌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경쟁기업을 헐값으로 인수하고 떨어진 주식을 휴지값으로 긁어모았다. 공황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자본가들은 더 큰 독점자본가들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해 각지에서 실업자들의 항의시위가 일어났고 1932년에는 1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같은 절망적인 시위는 그때마다 군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결과 공황이 전세계로 번져나가자 각국은 해외에 투자한 자본을 속속 철수시키는 한편, 자국이 보유한 외화를 금으로 바꾸어 국내로 반입했다. 당시의 금본위제 아래서는 은행에서 화폐를 금으로 교환해주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국제적인 중금주의 무역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 1931년 9월, 영국이 금의 태환을 중단함으로써 금본위제는 다시 무너졌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의 양이 부족해짐으로써 세계 무역량은 더욱 줄어들었고 열강들은 경기회복을 위한 통제경제를 실시했다. 1932년 영연방 국가들이 오타와에서 회의를 열어 연방과 식민지를 외국에 대해 봉쇄하고 높은 수입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하자 다른 강대국들도 앞다투어 블록경제를 형성했다. 세계는 이제 파운드, 달러, 엔, 마르크, 프랑 등 같은 화폐를 사용하는 제국주의 강대국과 그 연방 및 식민지를 한데 묶은 몇 개의 블록으로 분할되었다. 다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과 독일 등에서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말살하고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파쇼체제, 즉 나찌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탄생했고, 미국과 영국의 경우에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수정을 통한 강력한 국가통제 하에 독점을 강화시키는 체제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은 경쟁을 넘어서는 시도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이다. 기존의 식민지만으로는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고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점자본은 공황이라는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전략을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통해 실현하기 시작했고, 다수의 노동자와 민중을 전쟁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2)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전략
독점자본은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 생산과 시장간의 무계획성, 발전의 불균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권한을 국가에게 부여하였다. 둘째, 시장의 논리(자본주의의 무정부성)에 의한 상품생산을 법·제도적으로 규제할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셋째, 공황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노동계급의 저항투쟁에 대응할 경제·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넷째, 노동운동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및 의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쇄를 진행하였다. 다섯째, 공황의 상황을 전시경제와 전쟁 준비로 전환하였다. 이를 통해 독점자본의 축적을 더욱 공고히 할 새로운 단계, 즉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국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전략은 뉴딜정책으로 대표될 수 있다. 뉴딜정책을 금융정책, 농업정책, 산업부흥정책과 공공사업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 금융정책 1933년 3월 초에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국적인 은행 휴업을 선포하고 자금의 해외 유출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그는 곧 의회에 요청하여 긴급금융법을 통과시키도록 하였다. 긴급금융법에 따라 대통령은 융자, 통화, 금, 은, 외환거래를 규제할 긴급조치권을 얻었다. 그리고 재무장관은 모든 금과 금 증서의 예치를 요구할 권한을 얻었다. 또한 연방지불준비제도의 회원이 된 전국 은행과 주 은행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 문을 열도록 규정하였다. 그 결과로 1929년에 2만 5,568개였던 은행이 이제는 1만 4,771개로 줄었다. 대공황이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것은 금융통화 문제였다. 그에 따라 뉴딜은 인플레이션, 금융개혁, 중권거래 감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금융정책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단계로 루즈벨트는 신용부문에 역점을 두었다. 신용을 확대하기 위한 기구로서 이미 후버 행정부에 의해 재건금융공사가 설립되었고 이후 루즈벨트 행정부는 그것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긴급금융법을 제정하였다. 이를 통해 자본가들에게 대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화폐와 신용에 대한 연방정부의 권한을 더욱 확대시켰다. 결국 긴급금융법을 비롯한 금융제도의 변화는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통해, 독점자본의 축적을 정부의 통제 하에서 보다 용이하도록 만들어내고 자본의 무정부성을 극복해내고자 했다.
- 농업정책 정부는 면화 재배자들에게 경작지 면적을 적어도 30% 줄이도록 하였고 이는 농업조정청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과잉생산된 면화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한 정책은 면화뿐만 아니라 밀, 옥수수, 돼지, 담배, 소, 땅콩, 호밀, 보리, 아마, 사탕수수, 사탕무우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가격을 유지하고 생산을 제한하기 위한 독점행위인데, 이로 인해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자 수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떠나 빈민이 되었다. 정부는 1935년에 귀농청을 설립을 통해 빈농, 소작농, 농업노동자에게 영농 자금을 주어 농경지에 재정착하도록 하려 하였으나 실은 이것은 계속적인 농업노동자들의 시위를 잠재우지 않으면 안 되는 연방정부가 내놓은 고육책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소수의 부농을 중심으로 보호나 특혜를 정부로부터 부여받게 되었고 그 비용은 납세자들이 부담했다. 결국 뉴딜의 농업정책은 정부가 농산물의 생산과 가격을 결정하는 동시에 토양 자원을 유지하고 농민의 신용 자원 대부분을 관리할 책임을 지면서 국가 통제를 강화해나가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규모의 농업자본뿐이었다.
-산업부흥과 공공사업 연방정부는 전국산업부흥법을 시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전국산업부흥청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우선 노동시간과 임금에 관한 총괄적인 규약을 만들었는데 이 총괄 규약은 소년노동을 금지하고 산업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의 주당 작업시간을 각각 35시간과 40시간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산업노동자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40%로 정하였다. 그후 정식 규약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에 관한 통일된 규약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규약이 준수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국민들과 중소기업가들은 규약 제정 과정에서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특히 규약의 제정과 운영이 대기업 위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점을 더욱 강화시켜나갔다. 그러자 비난의 소리들이 높아졌다. 연방정부는 독점을 규제하고 경쟁을 유지하려는 제스츄어를 보였지만 그러한 조치들도 당시 더욱더 강화되어 가고 있던 정부와 독점자본의 협력 추세를 가로막지 못했다. 정부와 독점자본의 밀착, 더 정확하게는 국가의 개입과 통제에 의한 독점자본의 축적은 전력산업에 대한 규제에서도 잘 나타났다. 1936년에 12개의 지주회사가 전국에서 생산되는 전력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전력산업은 19세기 후반의 철도산업처럼 독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철도회사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여 무질서가 나타나고 그 때문에 연방정부의 규제를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전력회사들도 그와 같은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테네시계곡 개발공사도 마찬가지의 형태였다. 개발공사를 창설하면서 모든 권한은 개발공사에 위임되었으며 제품을 제조하는 것 이외에도 부동산을 획득하고, 댐을 건설하고, 수력 발전소를 세우고, 홍수 관리사업을 추진하고, 토양침식을 막고, 식목활동을 지원하는 등의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이렇듯 정부 권력의 강화와 확대는 대중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독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모든 산업은 정부에 의한 보호와 자금정책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의회는 1933년에 철도긴급법을 제정하여 철도의 곤경을 완화해 주었으며 이에 따라 연방철도조정위원회가 구성되어 철도측 대표들의 자문을 받아 낭비를 줄이고 운임을 적정 수준으로 내리고 철도회사의 신용을 개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철도회사들에게 트러스트 금지법의 적용을 면제시킬 수 있게 하였다. 결국 기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투자는 자본 스스로가 투자하기 버거운 산업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었으며 향후 기간산업은 모두 민영화되었다. 여기에서 공공사업을 통한 실업의 감소와 고용의 창출은 그 일환이었을 뿐이며 생산된 상품을 구매할 최소비용의 지출이었을 따름이다.
-소결 자본들이 대공황에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본주의 체제를 회생시킬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되자 국가를 개입시켜 스스로를 구출하려 했던 시기가 바로 1929년 대공황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이다. 독점자본들은 루즈벨트와 뉴딜의 개혁을 통해 국가를 통한 독점을 강화하면서 공황을 극복하고 노동자·농민들의 거센 저항을 분쇄하는 도구의 역할을 충실히 진행한 것이다. 뉴딜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1929년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진 국민총생산고롤 올림으로써 저항하는 국민을 옛날의 익숙한 생활방식대로 되돌아가게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독점자본의 위기를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물건을 살 능력이 있는 국민이 필요했고, 이것을 자유로운 경쟁이 아닌 국가의 통제와 계획 속에서 진행시킴으로써 독점자본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노동시간의 단축도,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제도 법으로 관철시켰다.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대규모 공공사업들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보수주의자들과의 약간의 마찰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계획 속에서 독점자본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결국 실현해냈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개혁조치들 마저도 1939년 9백만 명의 실업자들을 남긴 채 중단되었다.
(3) 독일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전략
정부는 우선적으로 은행제도를 인수하고 가능한 한 자본이동, 외환시장, 국내신용구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계획(New Plan) 하에 구축되었는데 민간은행과 금융기관은 공공규제 및 통제체제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수입은 오직 허가에 의해서만 가능해졌다. 국가의 강력한 규제와 통제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대규모 공공투자 및 재정지출 정책을 단행하였는데 자동차산업과 건설업의 고도성장은 재정지출 정책을 통한 정부의 특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자동차 산업 및 건설업 자체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사회간접시설, 특히 도로를 비롯한 기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투자로 이어졌다. 따라서 독점자본은 세금혜택, 보조금, 직접투자 등을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었고 두 산업 이외의 중요한 산업에까지 독점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로 통화공급의 확대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유럽시장에서 고립화된 조건 속에서 수출을 통한 경제회복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생산과 시장의 통제와 규제를 보다 용이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측면으로 고려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가격, 임금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재정지출 정책, 통화확대 정책은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나치정부의 이해와 일치되었으며 강력한 독재자를 원한 독점자본의 이해와 일치되었음은 물론이다. 1930년대 초반의 공황이라는 위기적 상황 하에서 독점자본과 그들의 경제관료는 경제 성장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를 할 수 있는 나치정부의 정책 체제를 지지하였다. 핵심적인 경제계획 외에 몇가지 추가적인 통제가 있었는데, 이러한 추가적인 통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가와 임금, 그리고 해외무역에 대한 통제였다. 물가와 임금에 대한 통제는 경제회복기에 비전통적인 자금조달 방식을 보완하려는 정부의 통화정책에 대해 보수주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임금통제는 또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자본가가 노동비용의 감소를 계기로 독점을 더욱 강화하고 다른 산업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조건을 창 출할 핵심적 정책이었다. 따라서 경제회복기에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성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의 위기 극복은 핵심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에 있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나치정부의 최우선 정책은 전쟁 준비였으며 전시경제체제 구축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여러 물자들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이 속에서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개입은 독점자본의 자본축적을 공고히 하였던 것이다.
3. 제2차 세계대전
(1) 성격과 특징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1차 세계대전과 같이 독점자본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 소련이 참가하면서 전선은 보다 복잡해졌다. 파쇼체제에 대항하는 반파시즘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는데,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 전쟁을 통해 소련과 독일이라는 두 적을 무너뜨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선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대립관계, 파시즘과 다른 국가들간의 대립관계,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을 제외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차츰 몰락해갔으며, 이에 따라 식민지 제 민족의 저항이 활발해졌다. 제국주의 내부에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는 투쟁이 활발했다.
(2) 전개과정
① 전운이 다시 감돌다
-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 1919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조인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으로 독일은 식민지를 모두 상실했고, 프랑스에게 알사스-로렌 지방을 반환했으며, 거액의 배상금도 부담해야 했다. 이 조약은 1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임에도 불구하고, 패자인 독일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서 독일 국민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러한 조약은 주로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각각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한 데다가 인구와 공업 면에서도 열세였기 때문에 독일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서 자국의 안전을 보호받고자 했다. 영국은 독일이 너무 약화되면 상품시장을 상실하는 데다 프랑스의 헤게모니가 강화될 것을 우려하여 조정자로 행동했다. 미국은 식민지의 입장에 근거한 민족자결주의 요구들을 내세웠으나, 이것은 새로운 식민지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의 영토를 계속 지배했으며, 민족자결의 원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족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동유럽 국가들만이 독립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패전국에 대한 압력과 소련에 대한 간섭을 위한 것으로서 반사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한가지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베르사이유 체제도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군비축소와 배상 문제를 둘러싼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이해조정 과정에서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사기술과 무기가 크게 발전했다. 전쟁의 파괴력을 경험한 세계는 군비축소 교섭을 시작했다. 제일 진전을 보인 것은 해군력 제한이었다. 해군력 제한은 1922년의 워싱턴 회의, 1930년 런던회의에서 합의되었다. 그러나 해군력은 이미 사멸해가는 단계였고, 공군과 육군의 강화가 오히려 큰 문제였다. 하지만 국제연맹에서 군비축소에 대한 교섭은 진행되지 않았다. 실제적인 군비축소 교섭이 지체되었다 하더라도 평화를 위한 선언과 조약들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928년에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파리에서 조인되어 "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국제적인 분쟁해결을 위해 전쟁에 호소하는 것을 부정하고, 또한 그 상호관계에 국가의 정책수단으로 전쟁 포기를 각자 인민의 이름으로 엄숙히 선언한다. 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상호간에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체의 분쟁 또는 의견 차이는 그 성질 또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막론하고 평화적인 수단 이외의 수단으로 처리 또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약속한다"고 했다. 이 조약은 15개국이 참가하여 1929년까지 15개국 모두가 비준하고 발효하여 1938년까지 독립국의 90%가 조인한 주요 조약이었다. 1932년 2월 소련, 미국이 참가한 제네바 일반군비 제한회의에서 독일의 군비평등권을 인정하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4개국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독일의 군사력을 제한했던 베르사이유 체제의 사실상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1933년 7월에는 소련의 제창으로 '침략과 정의에 관한 조약'이 소련,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 이스토니아, 라트비아,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처럼 평화에 관한 의지는 드높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의지는 현실의 전쟁 기운을 막지 못했다. 특히 1933년 세계경제회의 실패로 세계경제의 위기를 세계의 협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함이 판명되었다. 세계 경제위기는 생산력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전쟁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실은 베르사이유 체제를 붕괴시키고, 전쟁의 흐름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 파시즘의 득세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가속화되면서 사회적 갈등과 긴장은 증대되었고 노동자들의 운동은 고양되었다. 그러자 독점자본은 이제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파시즘이다. 192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국민 파시스트 당의 권력 장악, 1933년 독일에서의 나치당의 정권 장악, 그리고 1937년 일본에서의 근위 내각 성립에 따른 파시즘 체제의 성립 등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파시즘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파시즘 국가들은 스스로를 '가지지 못한(have nots) 국가'로 규정하고 자원 확보 등을 중심으로 광역경제권을 형성하려고 했다. 예컨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독일의 대생활권 등이다. 그들은 이를 위해 주변의 국가들을 침략하고 타민족을 억압 수탈하는 정책을 공세적으로 펼치고자 했다. 그 과정 중의 하나로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를 침략했고, 일본은 만주를 침략해서 1932년 3월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웠다.
- 파시스트들의 전쟁 시도에 대한 서방의 태도 파시스트들의 움직임이 빨라진 1938년에도 서방은 유화정책을 계속하고 있었다. 독일은 1938년 동방진출 정책을 시작했고, 3월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그리고 4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했다. 9월 29일 히틀러, 체임버린, 달라디에, 무솔리니로 구성된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수뇌는 뮌헨회의를 열어 수데텐을 독일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체임버린 등은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간섭과 유화는 왜 가능했는가? 소련의 존재는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었다. 1930년대 세계 각국이 극심한 공황을 겪으면서 실업률이 고조되었을 때 소련에는 실업이 없었을 뿐더러 활발한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 국가들은 전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독일로 하여금 암묵적으로 소련을 침공하게 하고, 소련의 힘을 약화시킨 후 독일과 소련을 모두 무너뜨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상원의원이었던 트루만은 "만약 독일이 승리하고 있다면 러시아를 도와야 하며,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독일을 도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으로 가능한 한 양자가 서로를 많이 죽이도록 해야 한다"(New York Times, July 24th, 1941)고 주장한 바 있다. 스탈린은 서방의 전략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6개월 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불간섭 정책은 다음과 같은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 침략국의 흉악한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일본이 중국이나 더 나아가 소련과의 전쟁에 휩쓸려드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독일이 유럽의 분쟁에 얽혀들고 소련과의 전쟁에 휩쓸려드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모든 교전국들을 전쟁의 수렁 속에 깊이 빠지도록 내버려두며 이를 은밀하게 조장한다. 교전국들이 서로를 약화시키고 기진맥진하게 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약해졌을 때 새로운 왕성한 힘을 가지고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전쟁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는 약화된 교전국들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값싸고 쉽게!"(스탈린, 소련공산당 제18차 당대회 개막연설(1939. 3) 소련은 고립을 피하고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1939년 4월부터 영국, 프랑스와 제휴를 추진했으나 교섭은 순조롭지 않았다. 스탈린은 군사산업을 강화하고 숙청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다. 독일은 폴란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소련과의 평화를 유지하여 양쪽으로부터의 정면작전을 피하려고 했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독일과 소련은 1939년 8월 23일에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해 세계 반파시스트 운동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동안 대부분의 공산진영은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파시즘의 수괴라고 할만한 독일과 세계 반파시즘 운동의 선두라고 생각되었던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결국 각국의 반파시스트 운동은 고립되고 말았다.
② 전쟁의 전개과정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직후인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입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폴란드는 독일의 진격전으로 며칠만에 서부지역의 절반이 점령되었고, 9월 17일에는 소련의 적군이 동부지역 반을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독일 선전포고를 해놓고도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아 '이상한 전쟁'이라고 불리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1940년 4월 독일은 덴마크, 노르웨이, 뒤이어 5월에 중립국 오스트리아, 벨기에를 공격하고 6월에 파리를 점령했다. 프랑스의 페탕 내각은 독일군에 항복, 비시에게 정권이 넘어갔지만, 드골이 런던에서 조직한 망명정부의 저항과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이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도 5월에 수상이 된 처칠의 지도 아래 공습을 버텨 히틀러의 단기결전 기도를 좌절시켰다. 이 사이에 소련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병합했다. 1940년 9월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체결했는데, 이탈리아는 이미 6월에 독일측에 가담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히틀러는 1940년 12월에 러시아의 영토를 독일의 생존권역으로 한 발파라이소 작전명령을 내렸고, 1941년 4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발칸반도에 침입하여 대소련관계가 긴장되자 6월에 소련을 침공했다. 초기에 독일은 소련을 진격하여 밀어 부쳤으나 곧 적군(赤軍)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 과정에서 1941년 8월 미국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이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여 나치 타도와 소련 원조를 선언하고 세계기구 창설 구상을 제시하면서 반파시즘 연합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원은 많지 않았다. 1941년 12월에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제2전선을 형성할 때까지 소련의 적군은 그야말로 단독으로 독일군과 싸웠는데, 제국주의 열강이 바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독일이 더 이상 동부 진격을 피할 수 없도록 밀어 부쳐 소련과 전쟁을 하도록 하고, 그 속에서 소련과 독일 모두의 약화를 바란 것이다. 소련의 적군은 이 싸움이 소련의 장래를 결정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스탈린에 의한 집단농장화, 대숙청이 자행되면서 사회주의 소련에 대한 회의가 광범위해지고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붉은 군대는 열심히 싸워서 독일군을 물리쳤다. 1990년에 출판된 소련 고등학교 교과서 <소련사> 11장은 '대조국전쟁의 승리자는 인민'이라고 제목을 붙인 요약 부분에서 "역사의 비극적인 파라독스는 1917년에 선언된 자유와 정의의 이념을 굳게 믿은 소비에트 인민이, 동시에 수백만 명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스탈린의 전제정치 아래서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1941년 6월에 인민이 선택한 것은 결코 스탈린 체제의 수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국과 혁명이념을 방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승리의 무기를 단련하고 조국을 부양할 경제를 만든 것은 전 인민의 헌신적인 노동, 영웅주의, 자기 희생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소련의 적군은 승리했다. 이 승리로 전세는 근본적으로 전환되어 이후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경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후 적군은 전략적인 기선을 빼앗아 전쟁 종결까지 그 기선을 잃지 않았다. 적군은 이후 베를린까지 한 발 한 발 일방적으로 그리고 착실하게 독일군의 공격을 물리쳐갔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섬멸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6월에 연합국은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독일을 마지막으로 공격했다. 그 결과 1945년 5월 7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그해 8월 15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도 항복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3) 2차 세계대전의 결과
첫째, 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은 세계광공업 생산의 60% 이상을 차지했고, 다른 연합국에 거액의 채권을 가진 세계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은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 재편에 착수했고,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에 편승해 신식민지적 지배질서를 구축했다. 그래서 이후의 세계는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라고 할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 아래서 흘러갔던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권이 성립되었다. 중국의 사회주의화, 동유럽의 사회주의화로 그동안 소련을 고립시켜왔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책은 실패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의 발언권이 세지면서 소련을 정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형성과 소련의 인정은 세계를 사회주의국가와 자본주의국가로 나누어 냉전 시대를 열었다. 셋째로 구식민지 체제가 붕괴하고, 신식민지주의 시대가 열렸다.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군사를 동원했다. 영국은 병사의 50%인 약 250만 명을 인도에서 동원했다. 인도 국민회의파는 이에 대한 협력조건으로 독립을 요구했으며, 1942년에는 인도의 영국군 철수를 요구했기 때문에 비합법화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디오피아와 소말리아를 점령한 이탈리아와의 전투에 케냐 등에서 징용된 30만 명에 가까운 아프리카인이 가담했고, 서아프리카에서도 영국, 프랑스에 의해 30만 명이 동원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이 종식된 후, 식민지에서는 전쟁을 통해 훈련받은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발언권도 커졌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상이 약해짐에 따라 구식민지체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방식의 신식민지로 재편되는 운명에 처한다. 신식민지는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위가 약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또 식민지 체제가 붕괴해가는 제 조건 하에서 만들어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제 정책의 총체이다. 이들 조치는 경제발전에서 뒤떨어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유지 및 확장을 위한 것이다.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해방과정에 있는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 대한 신제국주의 정책의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은 이들 국가들에서 반공정책을 취하는 조건으로 각종 원조를 행했다.
4. 이 시기의 투쟁들
(1) 중국 혁명
중국은 러시아 혁명에 고무되어 민족해방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1921년에는 진독수를 서기장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노동운동은 1922년 이래 고양기를 맞아 1년 동안 3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파업이 100회 이상 일어났다. 국민당을 재건한 손문은 1923년 연소용공의 방침을 결정해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반제국주의 운동은 고양되어 1925년 일본자본 공장에서 중국인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에 항의하는 투쟁이 전개되었고, 상해총공회는 6월 1일부터 노동자총파업 지령을 내렸다. 이후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7월 광동성에서 국민정부 수립이 선언되고,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이 조직되어 북벌을 시작했다.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장개석은 1927년 상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장개석은 1928년에 북경을 함락하고, 동북지방의 군벌 장학량도 이에 가담하여 중국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1927년 국공합작 붕괴 이후 중국공산당은 무장봉기 노선을 취해 3대 규율와 6항주의를 지키며 민중과 공고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혁명 농촌에 의한 도시의 포위라는 전략을 세워 혁명근거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가족 수에 따라 분배하는 정책을 취했다. 공산당은 계속되는 토벌작전에도 세력을 굳건히 하여 1931년 11월 서금에서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장개석은 일본과 싸우지 않고 서금을 공격하여 1934년에 이를 점령했다. 중국공산당은 7월에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 1935년 10월에 대장정을 마치고 근거지를 섬서성 북부의 연안으로 정했다. 1935년에는 일본의 화북 분리정책이 구체화되고, 이에 따라 대규모의 항일민중운동이 폭발했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은 오히려 이러한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전국적인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광범위한 항일운동에 고무되어 국민당도 내분이 일어나 장학량이 내전 정지와 항일통일전선을 원해 1936년 장개석을 감금하고 공산당에 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이 사건이 서안사건인데, 이로 인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멈추지 않았고, 민주적 개혁 세력을 억압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일본군이 점령한 광대한 지역에서 항일 유격전을 조직하고, 해방구를 확장하면서 그 지역에서 항일투쟁과 민주주의의 결합, 계급투쟁과 계급연합의 결합을 강조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실천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국공합작은 1946년 전면적으로 깨지고 내전으로 전환되었다. 공산당이 이 내전에서 승리해서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갔고,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국민 30만 명의 민중 앞에서 주석이 된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2) 프랑스와 스페인의 인민전선
1934년 2월 6일, 프랑스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정부를 강제 퇴진시키려고 국회를 공격하여, 13명이 죽고, 300명이 넘게 부상당했다. 이에 따라 대규모 반파시스트 공동 시위가 일어났다. 불황으로 프랑스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프랑스의 민중들은 우익을 선거에서 패퇴시키고, 경제 회복과 동시에 파업과 공장점거로 답했다. 6월에 6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직장통제, 국유화 등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투쟁을 지도해야 할 프랑스 공산당은 결정적인 순간에 파업을 끝내도록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서 민중정권의 희망은 사라지고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 라발 정권에게 권력을 넘기고 말았다. 스페인에서도 내전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국제적인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의 장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서곡이었다. 스페인에서는 1936년 온건한 진보세력과 사회당에 공산당, 무정부주의자가 가세한 인민전선이 결정되었으며, 인민전선은 2월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인민전선 정부를 조직하고 정치범 석방과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부르주아 정당 출신 각료들로 구성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조직했고, 6월에는 100만 명이 넘게 파업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7월 모로코에서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인민전선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고,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 도착함과 동시에 스페인의 몇몇 도시에서도 군대가 쿠데타에 가담해서 파시즘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 쿠데타의 대부분은 자발적인 노동자계급의 봉기로 패퇴했다. 그러나 프랑코는 스페인 남부의 몇몇 지역을 확보하여 대지주와 자본가 귀족을 모았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과 영국은 불간섭정책을 취했으나, 소련은 이에 인민전선정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그러나 피카소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1937년 4월 게르니카에 대한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힘을 모은 반란군은 방어선을 돌파하여 1939년 3월 결국 마드리드를 함락시키고 말았다. 스페인 노동계급은 프랑코에게 패배했다.
(3)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해방 운동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의 5.4운동, 터키의 근대화운동, 이집트의 와프트 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은 종교적 운동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는 공산당이 지도하는 해방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인도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불복종 대중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집트에서도 반영운동이 시작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0개국 이상이 혁명을 일으켰다. 1930년에는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1921∼37년에 활동)의 지지로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세계흑인노동자대회가 열려 민족해방투쟁의 역군이 된 노동자의 조직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1935년 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 침략과 이듬해 병합에 대한 이디오피아의 저항운동은 국제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1941년에는 이디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가 이끄는 군대가 아디스 아바바에 입성하여 같은 해 전 국토를 해방시켰다.
(4)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
1944년 적군은 소련 영토를 완전 회복하고, 독일군을 뒤쫓아 국경을 넘었다. 폴란드에서는 1944월 7월에 성립한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에 런던 망명 정부의 미코바이티크가 합류하여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2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합당하여 통일노동자당을 결성하여 정권을 확립했다. 불가리아는 독일측에 가담하고 있다가 1944년 전선 이탈과 중립을 선언했다. 9월 대중적인 저항운동을 조직한 조국전선이 소련의 대 불가리아 선전포고와 침입과 동시에 봉기하여 정부를 수립했다. 1945년 11월에 조국전선이 총선거에서 압승하고, 1947년에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런던 망명정부와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 세력이 1945년에 신정부를 조직해서 5월 프라하 해방 후 국민전선이 결성되었고, 1946년에 공산당에 총선거에서 대승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1941년 티토가 총사령관인 인민해방 빨치산 부대 총사령부가 조직되어 독일군 점령에 대항했고, 1943년 11월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회의에서 형성된 유고슬라비아 해방 전국위원회가 전국을 해방시켰다. 1945년 11월 헌법제정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이 압승했다. 알바니아는 1939년 이탈리아 병합 이후 레지스탕스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43년 창설된 최고인민해방평의회, 1944년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회의가 설립되었다. 이것이 임시민주정부의 역할을 맡아 1946년에 인민공화국 성립을 선언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인민운동이 약화되어, 적군해방지구에서 신 정권이 수립되었다. 헝가리는 1944년 데브레첸에서 민족독립전선정부가 수립되어 1949년 2월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루마니아는 1945년 3월 농민전선의 페트르 그루자를 수반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어 1947년 왕정을 폐지하고 사회당 공산당의 합작에 의한 노동자당이 중심이 된 농민전선 등으로 이루어진 인민민주주의전선이 1948년 4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정권을 확립했다.
4. 마치며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를 살펴보면서 몇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이제 우리의 투쟁 대상이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독점자본과 그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이다. 국가는 결코 중립적인 기관이 아니며, 독점자본의 이윤추구를 최대한 보장하고, 그를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고, 그 자체로 독점자본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투쟁이 필연적으로 국가를 향한 것일 수밖에 없고, 최종적으로 권력의 장악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국가'라는 것이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조직하는 완결적 기관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파시즘은 자본주의 과정에서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파시즘을 히틀러의 광신으로 인한 일종의 희극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파시즘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의 극단적인 정치형태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 이탈리아와 일본, 독일에서는 파시즘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파쇼 정권은 오래동안 유지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파시즘 권력 아래 오랫동안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정권이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지 못하면, 독점자본은 위협을 느낄 때 언제나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존하려 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노골적인 테러지배인 파시즘으로 옮아갈 수 있다. 세번째는 케인즈주의가 결코 우리의 대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운동진영 일부에서는 케인즈주의가 우리의 대안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케인즈주의의 핵심은 국가독점자본주의 형성이다. 일자리 창출이라든가, 사회복지제도의 확충은 그 속에서 노동력관리를 위한 부수적인 시책일 따름이다. 그나마 이것도 자본가들의 반발에 부딪쳐 좌절되기 일쑤였다.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환도 자본의 위기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자본가들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지금 신자유주의 공세로 독점자본의 살 길을 모색하고 있는 현 정권에게 케인즈주의적 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독점의 강화를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케인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굶거나 길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일자리 확충이나,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요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주요 요구가 될 수는 없다. 공황의 시기에는 더욱더 공세적일 필요가 있다. 지금 독점자본이 이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강하게 문제제기를 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사회적 통제와 노동시간 단축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공세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일자리 창출이나 사회보장 제도 확충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정권이 모르거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정권의 문제해결 방향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방향으로 문제틀을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케인즈주의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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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본주의발전사(6): 전후 자본주의의 부활
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과정
인류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전쟁은 드디어 끝났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민중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유럽의 가난한 도시 주민들은, 아마도 유럽의 4억 인구 중 1/4 가량은 올 겨울에 굶주리게끔 운명지워져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굶어죽을 것이다. 재앙의 중심지는 여러 곳이다. UNRRA의 책임자인 레만 씨의 말에 의하면, 바르샤바에서 1만 명의 주민이 굶어죽을 것이라고 한다. 헝가리, 특히 부다페스트에서는 기근으로 인한 사망이 거의 100만에 달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특히 비엔나와 오스트리아 북동부에서는 칼로리 섭취율이 하루 1천 칼로리를 밑돌고 있으며, 몇몇 소도시들 예컨대 비네노이쉬타트 같은 곳에서는 주민들이 거의 아사상태를 헤매고 있다. " - 이코노미스트. 1946. 1. 26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재인용)
이 전쟁으로 인해 민중들은 죽고, 다치고, 굶주렸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였던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었던 1930년대의 공황은 자취를 감추고, 미국은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제는 미국의 압도적인 지위 아래 세계경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만이 남은 과제였다.
1.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변화
(1) 선진국들의 세력관계 재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의 세력관계는 완전히 재편되었다.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자신의 이전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프랑스는 전쟁의 피해를 아주 심하게 입지 않아서 강대국으로 인정되었고,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은 자신의 패권을 미국에 완전히 넘겨주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보호하는 상인선단을 잃었고, 미국에서 전시물자를 많이 공급받았기에 그 대가로 해외 재산의 대부분을 넘기고 상당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 전쟁 이후 식량 공급도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유럽은 1946년 40억 달러의 대미 무역적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1938년의 8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대미 무역적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식량과 공산품(특히 수송차량)이었으며, 원료수입은 전전에 비해 1/3정도가 많았다. 이러한 유럽의 상황과는 다르게 미국은 완전한 패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참전국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이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모든 나라들이 독일의 점령으로 크게 파손되고 있을 때에 미국은 모든 산업을 현대화하고 확장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산업생산은 전전보다 50%나 확장되었다. 미국은 전시계약으로 과학적 기술적 연구를 증진시켜 원자폭탄을 생산했고, 자동화를 통하여, 그리고 원자에너지를 이용하여 생산성 증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군사강국임을 입증하고 세계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2) 냉전의 개시
소련은 전쟁 때문에 극심한 타격을 입었는데, 2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전사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소련의 영향은 상당히 확장되었으며, 동유럽에 사회주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소련은 세계에서 주요국으로 부상하였다. 소련과 미국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러시아로 하여금 전쟁을 통해 힘을 가지도록 만든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영국은 히틀러가 등장하도록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다…독일 국민은 민주주의 하에서 러시아보다는 훨씬 나은 동맹자가 되었을 것이다…미국과 러시아는 이데올로기가 너무 달라 장기의 협력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재인용
이 말은 미 국무장관 바이런이 1945년 여름 사석에서 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이 소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3월 12일에 있었던 의회 연설에서 냉전의 개시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촉구했고,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이야기했다. 즉 '극소수 무장세력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한 전복 행위에 저항하는 자유민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체제의 논리는 소련의 팽창주의적 침략이 체제 위기를 불러오는 근원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측면에서 소련을 봉쇄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전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적 재건이 추진되었다.
(3) 신식민지주의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은 제국주의 식민지체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시즘의 주요 부대가 궤멸되면서 식민지체제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 식민지는 정치적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제국주의 국가들은 군사적 방법으로 인도네시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정책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제국주의자들은 새로운 식민지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새로운 전략을 일컬어 신식민지주의라고 한다. 신식민지주의 전략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①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주권국가를 제국주의에 우호적인 군사, 정치적 동맹국으로 바꾸는 것 ②민족해방혁명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 즉 구식민지국의 대부분에 있어 제국주의의 직접 정치지배를 유지하는 것 ③민족해방혁명을 향한 발전과 심화, 그 사회경제적 변혁으로의 성장 전화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신식민지주의적 조치는 경제발전에 뒤떨어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정책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신식민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은 반공정책과 경제지원이라는 무기로 이들 국가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만약 한 구식민지 국가가 대외정책상 중립주의를 표방한다면 그 국가는 즉시 '신용할 수 없는' 국가의 부류에 들어가 미국의 증여와 차관의 축소, 정지 등 여러 가지 제재가 가해졌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 이들 중립국은 미국이 구식민지 및 반식민지에 제공한 경제원조 총액의 10% 미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미국은 군사원조의 100%와 경제원조의 약 90%를 반민중적 대외정권을 지지하고, 장개석, 이승만, 고 딘 디엠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또한 미국은 이들 신식민지를 군사블록으로 끌어들여 동남아시아조약기구와 바그다드조약을 만들어내었다. 미국은 이들 블록에 들어온 아시아국가의 영토 안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그 곳에 그들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들 조약 가맹국이 사회주의국의 남부 국경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방어하는 주요 방어선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구식민지국가에 대리정권을 육성하고, 극우적인 반민중세력을 키우는 것은 신식민지전략의 중요한 요소였다. 구제국주의자들은 여러 가지로 자신의 지배를 신식민지 내에서 강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가능하다면 직접지배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비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베트남, 말레이시아, 알제리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기타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과 지역에서 있었던 유혈의 식민지 전쟁과 토벌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대리인에게 정권을 넘겨주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예를 들어 베트남에서 물러나야 했던 프랑스는 남베트남에 그들의 대리인인 바오다이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는데, 그는 미국의 대리인인 고 딘 디엠에 의해 경질되었다.
2. 세계 경제질서 재편
전후 세계경제 질서는 미국에 의해 재편되었다. 미국은 전쟁에 의한 번영을 전후에도 유지하기 위해 환율을 안정시키고, 자유통상제도를 확립하며, 유럽의 부흥을 꾀했다. 그것은 각각 브레튼우즈 체제와 GATT, 그리고 마셜플랜으로 구체화되었다.
(1) 브레튼우즈 체제의 성립
연합국은 전후 세계의 통화와 금융을 재건하기 위해 1944년 7월에 브레튼우즈에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다. 이 회의 결과 7월 22일 연합국통화회의의 최종 의정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설립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943년 영국의 케인즈안(국제청산동맹안)과 미국의 화이트안(연합국환안정기금안), 그리고 이 두 안의 타협을 위해 캐나다가 발표한 '국제환동맹안' 등 3안을 중심으로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의 성립 과정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대립과 타협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영국의 패배로 귀착되었다. 당시 미국은 37.5억 달러의 차관공여를 내용으로 하는 미·영 금융협정을 체결하는 대가로 영국측의 양보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협정의 결과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도가 채택되었다.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각국의 환율은 이 달러를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환율을 조정하지 않도록 했다. 이 속에서 자유·무차별무역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채무국에 고정 환율과 자유로운 무역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외화를 공급하기 위한 기관인 IMF가 만들어졌다. IMF는 1947년 3월에 발족되었다. 당초 가맹국은 40개국이었다. 당시에는 달러가 원하는 재화를 구입하는 유일한 통화였기 때문에 모든 국가들은 달러를 갖기 원했다. 영국에서 제출한 케인즈 안에서는 미국이 230억 달러 어치의 수출품을 출자하고 그대신 230억 달러의 IMF예금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장기원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통화기금의 규모를 90억 달러로 줄이고, 이 재원은 '회원국의 국제수지상의 불균형 기간을 단축하고 불균형의 정도를 줄이는' 목적에만 허용하게 되었다. 고정된 환율은 일반적으로 유럽 나라들을 미국과의 관계에서 경쟁적이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게 하였다. 그러나 재건 수요를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 초과가 불가피했던 시기에는 이러한 과대평가된 환율은 유럽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미국 공급품들을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국의 부흥과 후진국 개발에 필요한 자본재와 수입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IBRD가 만들어졌다. 이 기관의 자금원은 가맹국의 납입자본금과 세계은행채 발행, 대출증서 매각, 대출회수금 및 이익금으로 이루어지며 대출은 상대국의 개발계획과 채무능력을 엄격히 심사한 이후 결정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30년대 세계시장이 블록주의에 의해 분할·파괴되었던 것을 반성하고 세계경제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이것은 광대한 영국의 지배영역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고, 외환관리를 축으로 한 무역장벽을 철폐하려는 미국의 이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2) GATT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는 국제무역을 자유·무차별체제로 확립하기 위해 형성된 것으로 1947년 봄에 타결되었다. 원래 미국이 제안한 자유무역기구는 미국으로서는 영국의 영향권인 파운드 지역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미국의 제안은 1947년 ITO(국제무역기구)헌장을 통해 국제무역고용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특혜관세의 폐지, 수입관세의 인하를 기본 선으로 하는 이 헌장은 미국 내부의 대립, 영국의 저항, 신흥 독립국의 비판에 의해 유산되었다. 이 때문에 ITO의 하부기관이었던 GATT가 무역 문제의 국제협의기관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GATT는 ITO헌장을 작성했던 제네바 회의에 참석한 23개국 상호간의 관세인하 교섭의 효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규정들과, 관세 인하의 결과 국내생산자가 입을 손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규정들을 ITO의 헌장으로부터 발췌하여 하나의 협정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GATT는 당초 체결국 대외무역총액의 85%를 점하는 국가들이 협정을 수락했을 때 확정적인 효력을 발생하는 것인데, 협정을 수락한 체결국이 하나도 없으므로 GATT는 자신과 함께 작성된 '잠정적 적용에 관한 의정서'에 기초하여 현재까지 잠정적으로 실시되고 있는데 불과하다.
(3) 마셜플랜
마셜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 16개국에 대해 행해진 대외원조계획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행해진 미국의 개별적인 각국별 원조를 유럽의 종합적 부흥계획에 대한 원조로 단일화한 것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RP)이지만, 이 계획을 최초로 공식 제안한 미국 국무장관 마셜의 이름을 따서 마셜플랜이라고 부른다. 마셜은 1947년 6월 하버드대학에서의 연설에서 대유럽 경제원조 계획의 구상을 밝히는 가운데, 이 계획은 '특정 국가나 주의(主義)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아, 빈곤, 절망 및 혼란에 맞서려는 것'이며 '유럽이라는 말에는 영국도 소련도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이 계획이 유럽을 미국자본주의의 이익에 예속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거부했으므로 대상국은 서유럽 16개국으로 확정되었다. 1948년 4월에 미국은 대유럽 경제원조를 실시하기 위한 기관으로 경제협력국(ECA)을 설치하고, 그로써 마셜플랜은 정식 발족되었다. 이로부터 1952년 6월까지 4년 3개월동안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 원조자금의 유입에 의해 달러 부족을 보충하는 동시에 수입달러자금 및 수입원조물자에 해당하는 액을 자국통화로서 특별계정에 적립하여 소위 대충자금을 설정하고, 이 대충자금을 미국과의 협정에 의해 미국의 지시를 받으면서 산업경제부흥에 이용했다. 이 기간동안 마셜플랜에 의한 대유럽 자금공여는 128억 달러에 달한다. 대충자금이란 피원조국 정부가 원조의 증여분에 맞춰 그 달러액과 같은 액수의 자국통화를 특별계정에 적립한 것이다. 피원조국인 마셜플랜 참가국들은 적립액 중 5%(미국정부의 파견기관의 비용으로 충당됨)를 제외한 나머지 95%를 미국 정부의 동의 하에 자국통화의 안정과 경제재건을 위한 용도로 사용해야 했다. 이 적립액은 형식적으로는 적립국의 소유이나 원조국의 동의없이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증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편 마셜플랜에 의한 경제원조와 병행해서 1949년 9월 제정된 '상호방위법'에 의거한 소규모 군사원조가 미 국방성에 의해 행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직접적 군사원조의 증대 뿐만 아니라 경제원조도 전략목적에 종속되었다. 마셜플랜은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으로부터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각국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조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미국상품 특히 잉여농산물에 유럽시장을 보장해주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또한 이 계획의 실시 과정에서 서유럽경제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이후 EEC로 이어지는 유럽자본주의의 통합 계기인 구주경제협력기구의 조직도 마련되었다. 전후 일본의 자본주의 재건도 같은 의미이다. 당초 비군사화, 민주화라는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은 변화하여 1948년 1월 "일본을 반공의 방벽으로"라는 로얄성명에 의해 일본은 냉전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마셜플랜의 결과 서구 각국의 공업생산은 1948∼1950년 사이에 전전 수준을 회복했다. 또한 서구에서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현저하게 후퇴했다.
3. 유럽 좌익의 사민주의 정당으로의 노선 변화
전쟁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많은 희생을 치뤘기에 그만큼 발언력이 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기회주의적 지도부들은 이 힘을 자신들의 정치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고자 했다. 냉전 개시와 더불어 대부분의 공산당은 몰락하고, 노동자의 정당은 사민주의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독일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노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살해되었고, 추방당한 자들도 귀국이 지체되었다. 특히 반쪽이 스탈린 하에서 독일 민주주의공화국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연방공화국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독 노동자들은 1948년 11월의 대파업을 통해 사회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1949년에 열린 독일노동조합동맹의 창립회의는 경제계획, 주요산업의 국유화 및 노동자들을 위한 완전한 자영체제 등을 요구하였는데 1951년에야 파업의 위협으로 광업, 철강업에 대한 공동결정법을 쟁취한다. 그러나 1952년 경영조직에 관한 법률을 위한 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사회구조의 변혁은 무너진다. 그러나 임금인상, 조업시간 단축 및 사회적 향상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사회민주당에 의해 채색된 계급동반자 이념이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의 저항 의지는 사라졌다. 1953년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국민의 정당으로 탈바꿈하겠다고 노선을 전환했다. 패배한 독일뿐 아니라, 영국도 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결국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멀어져갔다. 영국의 경우 체임벌린 내각이 무너지고 1940년 연립내각인 처칠 내각이 들어섰는데, 이 내각은 약간의 지식인의 지원을 받아 사회개혁을 시작했다. 비버리지 보고서에서 온정주의적 복지국가의 윤곽이 마련되었으며, 교육개혁이 시작되었다. 1945년 노동당은 총선거에서 대단한 승리를 거두어 의회에서 절대다수파가 되었다.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변천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았다. 영국은행이 국유화되고, 탄광 및 철도가 국유화되었다. 하지만 이 국유화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으며 소심한 노동당 지도부는 사회의 일정한 개량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 결과 빈익빈부익부는 50년대 들어 더욱 증가하는 추세였다. 다만 프랑스 정도만이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보여준 태도 때문에 나름대로의 영향력과 급진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공산당이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립정부에 참여한 이후로 영향력은 급속하게 삭감되었다.
Ⅱ. 세계 경제의 안정과 지속적 성장
1973년 선진 자본주의국들의 생산은 1950년보다 180%나 성장했다. 이는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성장이었다. 인간 역사상 25년 안에 이보다 성장이 빨랐던 적은 없으리라.
1. 지속적 성장의 요인
1차 세계대전의 상흔에서 벗어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달러 우산'의 안정 아래서 안정과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업생산 신장율은 1950년대 연평균 5.3%, 1960년대에는 연평균 5.9%로 순조롭게 확대되었고, 세계무역도 선진국의 수출 확대와 공업제품의 수출 확대를 주축으로 1960년대에는 연평균 10%에 가까운 신장율을 보였다. 이런 지속적 성장의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로 국가의 경제과정에 대한 개입이 전면화되었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전면적으로 확립되면서 도로나 항만, 건설 등 하부구조 부문, 사회자본 확충, 특정 전략부문의 유효수요 창출이나 직접 융자, 특정 산업의 국유화, 나아가서는 사회보장과 사회개량에 따른 소득재분배 실시 등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국가는 총수요 관리정책을 통해 경제과정 총체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각 국마다 국가의 재정지출의 기조는 조금씩 달랐는데, 미국의 경우 군사지출이 가장 컸다. 1950년대 미국의 군사지출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10%를 넘었고, 60년대에 들어와서는 군산관 복합체제가 미국경제의 기간부분이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산업의 국유화와 사회보장, 사회개량의 지출에 중점을 두었다. 이들 국가는 미국에 비해 변혁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비용을 많이 지출해야 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물적 기반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자원과 원료가 낮은 가격으로 공급되었다. 기술혁신은 항공기, 석유화학, 전자공업 등 새로운 산업분야와 내구소비재 분야, 철강으로 대표되는 중공업분야 등의 광범위한 부문에 걸쳐 진행되었고, 직접적 생산과정, 노동과정의 존재 방식이나 생활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원료와 자원에 대해서는 거의 일관되게 낮은 가격이 유지되었다. 곡물 가격은 턱없이 낮았고, 교역 조건도 공업제품에 비해 점점 악화되었다. 석유시장은 미국와 영국 등이 장악하면서 낮은 가격을 유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산업구조는 석탄 중심에서 석유 중심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기업의 이윤율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로 노동생산성이 크게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때는 노동력의 추가 흡수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던 때였다. 농업노동력이 배출되고, 여성 취업률이 상승하며, 외국인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대량생산 산업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의 고용 확대가 29% 정도 증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생산의 증가가 고용 증가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산 증대의 대부분은 노동자 1인당 생산성 증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1인당 생산성은 연 3.3%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러한 생산성 상승의 원인은 생산수단의 양과 질이 괄목할 만하게 성장했던 것에 있다. 생산수단의 스톡은 1952년에 비해 1973년에는 2.3배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생산수단이 확장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산수단의 대량 폐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을 찾기 힘들어진 자본가들은 낡은 생산수단을 폐기하고, 보다 생산성이 높은 생산수단을 들여놓아야 했다. 이 때는 노동자들의 임금도 크게 상승했는데, 이것은 소비를 촉진시키면서 대량생산된 상품이 창고에 쌓이는 것을 막았다.
2. 지속적 성장으로 인한 변화
이 시기의 성장은 각국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첫째, 안정적 성장과정을 통해 과점체계가 확대되었고, 초거대독점인 다국적기업이 형성되었고, 군산복합체가 중추적 경제지배체제로 등장했다. 록히드, 더글라스, 보잉, IBM, GM 등 거대 기업들은 군사기구와 생산, 기술, 시장, 계획을 결합함으로써 급속히 발전했다. 이것은 유럽으로 파급되어 세계적인 경쟁을 촉진해서 유럽에서도 기업의 집중과 합병이 계속되고, 군산복합체가 창출되었다. 두 번째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이 만성화되었다.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가격에 전이되었다. 국가는 관리통제 하에서 적자재정에 의한 공공투자정책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노동력 공급이나 자원과 원료 공급이 제대로 안되는 때에도 추가적인 성장통화를 공급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도 했다. 게다가 과점체제와 군산복합체들은 가격을 올리기는 하지만 내리지는 않는 하방경직성을 만들어내어 인플레이션 압력을 강화했다. 마지막으로 사회복지 또는 사회개량 정책이 실시되었다. 냉전의 유지와 변혁 세력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마하기 위해서는 사회개량이 필연적이었다. 복지국가는 전후 기간에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복지정책은 좌익정부의 전매특허는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복지지출은 우익 정부들에서도 수행되었다. 이 복지정책은 자본주의의 특성을 다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만들어내기도 하였으나, 복지국가는 결코 빈곤을 제거하지 못했다. 표준화된 빈곤숫자를 토대로 하면 1970년대 초 독일 인구의 3%, 영국 인구의 7.5%, 미국 인구의 13%, 프랑스 인구의 16%가 빈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비용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세금이었다. 복지정책은 호황에 기초해 자본주의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노동관리전략이었으므로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바로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에 대한 공격가 진행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일국적 경제구조의 변화는 자본주의 국가간의 불균등 발전을 낳았다. 호황의 과정에서 EC 통합으로 유럽과 일본의 지위가 상승하고, 미국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이것은 전후 자본주의 세계를 안정시켜온 국제 질서를 동요시켰다.
Ⅲ. 호황의 끝
지속적 성장이 계속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예찬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자본주의는 영속화할 것 같았고, 국가의 개입과 복지국가의 이념은 영원하리라 믿어졌다. 하지만 결국 그 끝이 왔다. 호황은 과잉축적을 낳았고, 그것은 세계대공황으로 연결된 것이다.
1. 경기과열 및 이윤율 하락
전후 자본주의에서 급속한 수요의 증가 및 생산수단의 수요 확대는 이윤율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과잉축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상승하던 이윤율이 1960년대 들어서서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윤율의 하락은 자본가들에게는 더 이상의 생산 확대를 막는 무서운 재난이었다. 이윤 압박의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 축적율이 절정에 달하면서 노동수요가 초고도로 올랐고, 이로 인해 노동자를 구하기가 어려워 임금이 상승하고, 이것이 이윤의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노동강도 강화와 공장 조직 재편은 노동자들의 저항에 의해 효과적으로 확대되지 못했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의 증가도 위축되었다. 또한 국제경쟁도 자본의 이윤율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비가동률도 하락하면서 이윤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료의 가격과 투자재의 가격도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이 이윤율을 압박했는데, 이것은 과잉생산이 현실화되면서 일어난 현상들이었다. 이런 이윤율의 하락과 함께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다.
2. 이윤율 하락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노동자들의 투쟁
정부는 이윤 압박에 대항해 디플레이션 정책과 소득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1963년에 통화정책에 긴축을 가해 1964년부터 경기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1963년 안정화계획으로 실업률이 증가했다. 독일도 긴축정책을 사용해 1966년에는 실업자가 구인수를 초과하기도 했다. 또한 정부에서는 임금을 감축하는 소득정책도 단행했는데, 프랑스는 1964년에 공공부문 임금을 삭감했다. 또한 사용자들은 작업 규율을 강화하고, 공장 단위 교섭에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산별 임금교섭 이후에 벌어지는 공장 단위의 보충교섭에서 보충임금을 삭감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그러면서 1968년과 70년 사이에 파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68년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5월 사태가 있었고, 이것은 3주간 총파업을 촉발했다. 다음 해에는 네덜란드와 독일이 파업에 가담했고,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도 1969년과 70년에 투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파업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높은 수준의 임금을 다시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파업은 대부분 노동조합의 체계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 파업이었다. 이런 파업투쟁의 물결은 자본주의에 균열의 조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완전고용, 사회복지 등으로 상이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결코 성공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3.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석유위기
유럽 각국의 긴축정책에 의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기후퇴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초에 자본주의 국가들이 긴축정책을 팽창정책으로 전환시키면서 1∼2년 간의 미니붐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한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잠깐의 호황이었을 뿐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의 국제 수지는 계속 악화되었다. 미국 기업이 해외에 투자하는 돈은 꾸준히 증가했고, 유럽과 일본의 기업이 미국 시장에 눈을 돌림에 따라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그들이 미국의 시장을 잠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무역적자로 돌아섰는데, 1969년 무역적자는 40억 달러에 달했다. 이미 마셜플랜이나 베트남 전쟁 등으로 달러는 남발되어 있었고, 이것은 금에 의해 달러가 영원히 가치가 고정될 수 없다는 불안감을 부추겼다. 그 결과 달러보다 금을 더 선호하게 되어 금시장에서 투기가 성행했다. 그에 따라 미국의 달러를 유지시켜줄 금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는 금태환제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물론 전후 호황기 국제통화제도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다. 달러가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세계가 그 달러를 획득하는 과정이 달러의 금보증 능력을 감소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달러를 금과 바꾸지 못하게 함으로써 금보유고가 줄어드는 것을 막았지만 이는 달러 부채가 늘어나게 만든 미봉책에 불과했다. 결국 미국은 1971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달러를 평가절하했다. 이제 브레튼우즈 체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73년 중동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이로 인해서 아랍 산유국들간의 연대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이 산유국들간의 카르텔인 OPEC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OPEC은 그동안 저유가 정책에 묶여 있었던 석유값을 인상시키는 데 성공해서 1973년에서 74년 동안 석유값은 4배나 인상되었다. 유가 폭등은 각 나라들이 긴축정책을 실시하는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써, 유가 상승은 수익성을 악화시켰고, 수요를 감소시켰다. 전세계의 구매력의 1.5%가 한꺼번에 OPEC로 넘어갔다. 하지만 OPEC이 이것을 한꺼번에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계의 수요는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OPEC이 1970년대 세계 대공황의 원흉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과잉축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서 유가 인상은 공황에 점화를 한 것 뿐이다. 1974년 여름, 마침내 세계 공황이 시작되었다.
Ⅳ. 마치며
자본주의 시대의 최대 호황과 그 끝을 보면서 우리는 몇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계급타협체제의 문제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에서 기능했던 복지국가의 이상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앤서니 기든스 등 '제3의 길' 주창자들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이념을 다시 꺼내 우리에게 가지고 온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복지국가의 이상이라는 것은 고도의 생산성 발달을 전제로 한 것이고, 이것은 노동의 과도한 착취에 기반한다. 이것은 부의 재분배라는 명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생산과정에서의 권력은 완전하게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으며, 분배 과정에서 약간의 떡고물로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약간의 이윤율 침해가 일어나는 순간 노동자들에게 제공되었던 떡고물은 바로 사라지고, 자본의 계급적 본성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계급타협체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두 번째로는 신식민지주의에 대한 것이다. 유럽의 안정화에 신식민지가 기여한 바는 참으로 크다. 신식민지 국가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압력과 더불어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민중운동을 탄압하면서 냉전 체제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초과 이윤을 실현해왔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오랜 기간 동안 군사쿠데타에 의해 기본적인 인권과 노동자의 권리는 철저하게 탄압되면서 과도하게 착취당해왔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상은 자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임을, 미국은 신식민지 국가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세 번째로 성장이란 노동자에 대한 착취 강화가 핵심이라는 점이다. 노동자의 생산성의 향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을 유지하는 기반이었다. 이 기반 위에서 자본주의는 생성해왔고, 이윤율도 성장해왔다. 자본가들은 노동력에 대한 통제가 이윤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에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생산성의 향상이 노동자 전체의 '삶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이에 대한 통제권과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사용되는가가 중요하다. 생산력 발전이 노동자 전체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생산에 대한 통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정치적 권력 장악이 중요하다.
호황은 길었다. 노동자들은 그만큼의 임금상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호황은 끝이 났다. 노동자들은 다시 이전 상태로 굴러떨어진다. 공황의 시기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성과를 챙겼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시지프스의 노동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공황이라는 파멸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 노동의 성과와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전 인류가 나누게 할 것인가는 우리 노동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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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회> 현대자본주의발전사 (9):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공황의 필연성을 내재하고 있는지, 그러한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이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그 결과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이르렀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사' 기획연재의 마지막으로 자본의 대응이 지금의 파국을 초래하고 있다면 과연 노동자계급의 대안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노동자들은 비록 여러 차례의 패배를 거쳤으나, 자본주의를 뒤흔들 거대한 힘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1. 위기에 대한 자본의 대응과정
자본은 태생적 감각을 가지고 위기에 대응해왔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언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자본은 건재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자본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위기에 대응해왔던 것이다. 물론 그 대응은 자본주의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거대한 힘으로 노동자계급을 짓누르면서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자본주의 성립 초기에 닥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자본은 독점자본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모면해왔다. 1930년대의 공황을 맞이하여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발전시켰고, 2차 세계대전의 생산력 파괴로 장기적인 안정기를 갖게 된다. 이 성장은 국가에 의해 경제과정이 총체적으로 관리되고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물적기반이 존재하고 노동생산성이 증가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안정적인 성장과정에서 과점체제가 확대되고 초거대독점이 형성되었으며 군산복합체가 경제지배 체제로 등장한다. 무기경쟁은 거대한 독점이윤을 창출해왔으며, 그것은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빈곤하게 만드는 국지전과 세계전쟁을 만들었으나, 그러한 전쟁은 거대한 군산복합체의 이윤창출로 귀결되어 지금도 자본주의의 이윤율 저하를 막는 하나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항상적으로 발생하고 사회복지와 사회개량 정책이 확대된다. 이 과정의 결과는 경기과열과 이윤율의 하락으로 나타났고 과잉축적으로 인한 위기가 다시 발생하게 된다. 국가독점자본주의시대에 누려온 장기적인 안정은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 모순들에 의해 또다시 위기를 가져온다. 그것이 1974년 공황이었다. 1973년에 석유위기로 시작된 공황은 만성적인 과잉축적과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의 결과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자본의 전지구화, 세계화이다. 시장의 논리, 경쟁의 논리를 세계 구석구석으로 침투시키고, 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를 항상적으로 만드는 자본의 세계화화 신자유주의 논리가 이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힘이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시키는커녕 점점 계속되는 불안정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목도하는 바 그대로이다.
2. 왜 자본주의는 스스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그렇지만 자본가들은 결코 문제의 해결방식을 찾을 수 없다. 하버드대의 석박사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자본주의의 유명한 이데올로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그들은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착취에 기초한 사회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로 인한 공황의 폭발이 필연적임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의 해결방법을 여전히 착취의 강화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의 대안은 임시방편이고 공황을 지연시키는 역할밖에 할 수가 없다. 그것이 자본의 불행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자본주의 초기에 인구론으로 유명한 맬더스는 공황이 필연적임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면 그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서 빈곤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해낸 대안은 바로 '지주들'이었다. 지주들에게 최대한의 특혜를 베풀고, 그들이 마음껏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굶어죽든 말든,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지주들의 소비를 엄청나게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주들은 부패한 계급이며,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계급이 아니어서 마음껏 소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맬더스의 바람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발전은 지주들을 몰아냈다. 자본가들은 지주들과 같이 부후한 소비계급을 저주하고, 이윤 창출을 위해 투자를 함으로써 생산력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로 인해서 과잉생산을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지주계급의 편에 서있던 맬더스의 바람은 역사적으로 볼 때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1930년대의 공황에서 자본가들은 케인즈주의적 방식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격찬하고, 그를 따랐다. 케인즈주의 정책이라고 하면 국가가 시장의 불완전한 기능을 보완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하고, 그 비용을 국가의 재정정책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항상적 개입을 요구하는 이런 정책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 위기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위기의 해결책은 바로 전쟁이었다. 서구 유럽의 오랜 호황은 2차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생산력을 다시 구축해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환은 국가가 노동력을 관리함과 동시에, 착취의 체계를 보다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70년대 케인즈주의의 파탄 이후 케인즈주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부터 출발한 통화주의-화폐적 금융공황이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을 화폐량의 변화가 경기순환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금융공황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화폐관리 정책을 강조한다. 이들은 통화량이 결국 핵심적이라고 보고, 경제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완전고용을 달성하면서도 물가안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최적의 통화량을 산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적의 통화량 산출은 마치 상상 속에서 완전함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권들은 자본의 이윤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인플레이션 정책을 의도적으로 펴왔고, 현재와 같이 금융시장이 실물경제와 거리를 두고 자가발전하는 상황에서 최적의 통화량 산출이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이론은 어떠한가? 말로는 '시장'의 기능을 회복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이윤창출이라는 자본주의 정언명령이며, 자본주의는 그 명령을 따라 모순을 확대하는 길로 달려간다. 특히 초국적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의 전횡이 세계적 수준에서 진행되는 이때 '시장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독점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모순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며 대안을 마련하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모순, 이윤율의 하락과 과잉생산, 그로 인한 공황의 폭발에는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며, 따라서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항상 헛다리를 짚고 있다. 그러나 방심하지는 말자. 이들이 헛다리를 짚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화살은 항상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거나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에 맞춰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들의 주장에 따라 충실하게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과 착취를 감행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책'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하고, '대안'의 이름으로 노동자계급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위기의 원인을 밝혀내고, 노동자계급의 대안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3. 노동자계급의 대안은 무엇인가?
지금의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더욱 강하게 요구한다. 그것은 자본이 생존해나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노동자들은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상황이 좋아지더라도 결코 그 성과가 노동자들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세계가 온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경제위기는 동일하게 지속되지만, 경제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대응과 자본의 대응에 따라 세계는 변화되어왔고, 지금의 상황은 이미 노동자들의 퇴출과 노동력에 대한 과도한 착취에 기반하지 않고는 더이상 유지가 불가능한 체제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의미에서도 결코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경제위기의 본질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개별로 떨어져 있는 노동자들은 고용위기가 심각해지면 그것이 곧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의 요구에 더 복종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자본의 입장과는 대립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자본주의 사회, 특히 공황 시기에서는 없다. 우리의 대안은 다음 외에는 없다.
- 근본적인 요구로서 생산의 사회화
우리는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던져야 한다. 그것을 '생산의 사회화' 또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로 표현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달은 인류의 부를 고도로 신장시켰다. 자본주의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생산기술을 혁신해왔고, 새로운 생산기술을 발전시켰다. 지금 노동력이 30%가 남는다고 자본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노동을 30%만큼 줄여도 전체 생산이 유지된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미 노동자들이 노동을 많이 하지 않아도 지금의 생활이 유지되고도 남음이 있을만큼 생산력이 발달해있다면, 당연히 그 성과는 인류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 생산력의 발달은 결국 노동자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사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생산력의 발달이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적 정언명령에 묶여있는 한 이 발달은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을 전체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노동력을 폐기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또한 이 정언명령은 '과잉생산'을 낳는데, 결국 발달한 생산력의 성과를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된 일부 생산수단을 폐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공황의 시기에 고용문제가 더욱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처럼 과잉 생산수단에 대한 폐기와 더불어, 공화 시기 자체가 자본으로 하여금 노동배제적 생산기술의 혁신에 더욱 매진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게다가 이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자본주의 정언명령은 직접적인 생산과 분리된 금융자본의 무한한 확장을 가능하게 만들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 전체에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적 경쟁은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광고, 독점 이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할 무기경쟁, 부르주아 정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적 장치들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게 만든다. 자본이 보기에는 이윤추구를 위해 필연적이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발달한 성과들을 비생산적인 곳으로 쏟아붓는 불합리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기에 상황은 더욱 모순투성이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한 이런 불합리는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것을 개선해나가는 대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투쟁의 힘으로 방향을 확 바꿔나가는 대안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산의 사회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이다. 그것은 과학기술 혁명의 성과를 직접 생산자 대중 전체의 재산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경쟁을 지양하고, 생산에 대해 계급대중에 의한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질 때만 발달한 생산력을 폐기처분하기도 하고, 노동의 주체들은 굶주리며, 비생산적인 부분에 무한정 이윤이 쏟아부어지는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 실질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 생산의 사회화가 경제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노동자의 입장을 강화하고, 문제제기를 던질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투쟁을 통해서 쟁취해야 할 요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실질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지금의 생산력의 발달이 노동의 축소를 가능하게 할만큼 발전했음을 자본주의 스스로가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개인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나머지 시간을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 의미 외에도, 현재 자본측이 대다수 노동자를 축출하고 일부 노동자의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제기하는 실천적 요구이다. 노동자들을 분할하려는 자본의 입장에 맞서 우리는 노동공유를 입장으로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 단축 자체로는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될 수 없다. '실질임금 삭감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에야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된다. 그리고 '노동강도 강화 반대'가 결합되어야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된다. 독일의 경우 노동시간이 꾸준히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공유라는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일 노동운동 지도부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철저하게 견지하지 못한 상태로 노동시간 단축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독일은 시간단축과 노동력 유연화를 맞바꾸기 했고, 시간 단축의 전제로 임금 삭감을 수용했다. 예를 들어 폭스바겐의 경우 주4일 근무제를 채택하면서 노동력 유연화를 맞바꾼 결과, 회사측에서 요구하는 작업교대제와 노동시간 유연화가 성사되었다. 그러다보니 규약상으로는 주 4일 근무이지만 실제로는 주 5일 근무를 넘어서게 되고, 직무불안정성이 증대되는 한편, 노동강도도 강화되었고, 임금은 임금대로 삭감되는 결과를 낳았다. 수요 변화에 따라 자본측이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는 시간을 임의로 조정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정규 노동자의 초과노동을 낳게 되고, 일자리 나누기는 것은 명분으로만 남게 된다.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삭감 반대' '노동강도 강화 반대'와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산노동을 축출하는 자본의 입장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노동자 분할 반대 실업자 및 반실업자의 존재는 자본주의 발전에 필연적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실업자 및 반실업자는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켜 고용조건과 임금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생산량에 맞춰 시기 적절하게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업과 반실업은 자신의 일자리를 상호 위협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생존을 파괴하는 조건이다. 고용된 노동자와 실업 및 반실업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를 형성하는 것은 자본주의 착취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저항이 된다. 실업 및 반실업자와의 연대와 투쟁은 고용조건 및 생존 조건을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실업자의 생계를 사회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반실업자와 고용된 노동자 사이의 실질적인 격차들을 없애나가야 한다. 자본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분할시키면서 경쟁을 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우리는 노동자들의 통일성을 확보해나가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실업과 반실업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때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발달한 생산력에 힘입어 최소한의 시간만 노동을 하고, 나머지는 인격의 발달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노동유연화 전략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이러한 반대투쟁은 전세계 노동자들의 연대에 기초해야만 한다. 자본은 이제 세계화되었으며, 한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서 임금이 싼 곳을 찾아서 세계를 휩쓸고 다닌다. 세계 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은 선진국과 후진국, 여성과 남성, 이주노동자와 원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 모두 다르며, 자본은 이러한 차별을 확대하여 노동자들의 경쟁을 세계화시키고 있다. 전세계 노동자들의 공통 이해에 기반한 연대와 단결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칫 자본가들의 경쟁에서 우리 노동자들이 총알받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의 이해와는 다른 전세계 노동자들의 공통의 이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 전세계 노동자 총단결은 그래서 아주 현실적인 구호이다.
4.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대안은 투쟁을 통해서만 현실화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모순에 차 있어도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치유할 능력이 없는데 물리적 힘과 각종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자본주의를 유지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기에 우리는 투쟁을 통해서만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갖는 모순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힘과 가능성을 발견해내며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대안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입장으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것은, 사회 곳곳에 침투해서 사회 전체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 있는 독점자본의 전략에 대한 반대를 포함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지배가 실현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영역들 모두에서 자본의 전략을 폭로하고,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대안을 구체화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각 영역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바로 '정치적 주체'이다. 우리의 투쟁은 당장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급적이며 정치적인 주체에 대한 문제로 발전한다. 우리가 만약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타파하고, 진정 노동자계급의 대안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계급적이고, 정치적인 주체로 세워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
현대자본주의발전사(7): 자본의 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면화
노동전선 기획단
<들어가며>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되던 선진국의 호황이 정지한 1974년 공황 이래 자본주의는 생산 증가가 둔화되고 있다. 이러한 저성장의 지속은 생산에 대한 투자를 축소시키고 금융체제를 기형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투자의 정체를 낳았고 시장의 성장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축적율을 잠식해서, 그 결과 실업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제상황은 독점자본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축적 경로를 찾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이다. 자본은 노동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이윤율 잠식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공세는 결국 자본의 불안정성을 더욱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뿐이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1974년 공황 이후에서부터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를 검토한다.
1. 1974년의 공황과 자본가계급의 대응
(1) 1974년의 공황과 계속되는 저성장
1)공황의 시작 1973년 겨울에 발생한 '석유위기'로 시작된 1974년 겨울의 공황은 자본주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석유위기는 30여 년에 이른 만성적 과잉축적과 이윤율의 계속적 하락이라는 자본주의 성장의 기본적인 모순을 증폭시킨 셈이다. 60년대 말부터 자본가들은 세계 경쟁이 격화되는 속에서 계속적인 임금인상과 노동자들과의 대립으로 인해서 타격을 입었다. 또한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는 미국 중심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자본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유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석유를 사느라고 산유국에 들어간 돈은 생산 시장에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산유국들은 그많은 석유 달러를 다 소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다른 부문의 상황도 좋지 못했는데, 생산은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은 증가하고 있었으며, 1차 상품가격은 치솟았고, 수익성은 1/3이나 감소했다. 생산에 대한 이윤 감소는 생산 감축과 더불어 자본가들이 생산적인 투자보다는 투기를 통한 이윤 획득으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세계은행체제도 균열되기 시작했는데, 1974년 6월 독일의 최대 민간은행인 헤어슈타트 은행이 외환투기에 따른 손실로 도산했고, 이 도산으로 인해 미국계 은행들을 비롯한 독일의 여러 은행이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 영향은 국제 금융계 전반에 미치게 되었는데, 외환거래량은 수직으로 떨어졌으며 전세계적으로 소규모 은행에서까지 화폐가 인출되었고, 자본의 유동성은 급격하게 커져갔다. 이때 이미 공황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투자의 급격한 감소, 생산의 감축 등 침체로 인해 많은 생산 설비의 가동이 중단되었다. 1975년 가을에 약 11%의 고정 자본에는 먼지만 쌓여 있었다. 선진국의 경우 등록된 실업은 1975년 봄에 1,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보다 실직상태에 놓인 노동자들은 훨씬 더 많았다. 그러한 실업의 고통은 20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현재까지도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을 괴롭히고 있다.
2) 공황의 특징
① 생산은 급속히 감소했으나 높은 인플레이션이 유지되었다. 1974년 5월에서 12월 말까지 광물가격과 금속가격이 30% 하락했고, 식품가격도 1974년 11월부터 1975년까지 33% 하락했다. 그러나 1974년 여름부터 인플레이션은 완만해졌지만 전체 물가는 깊은 침체기 동안 매년 10%씩 계속 상승했다. 즉, 경기의 침체(stagnation)와 물가상승(inflation)이 공존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세계대전 후 완전고용과 경제성장의 배경이 되었던 팽창 위주의 경제정책, 그리고 주로 독과점 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물가의 경직성―한번 오른 가격은 다시 내리지 않는 것, 그리고 자원공급의 불안정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유지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생산성 증가가 둔화되고, 통화량 증가가 둔화되면서 생산의 증가가 현격하게 둔화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를 스태그플레이션이라 하며, 70년대 이후의 공황은 이런 형태로 지속되었다.
② 공공부문에 거대한 적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로 인해 세수가 줄어들어 정부 수입은 감소한 반면, 실업수당이 증가해 정부 지출은 증가했다. 만일 정부가 이러한 적자를 감수하지 않았다면 침체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에서 오일달러를 저축하면서 세계적으로 투자는 급속히 감소했고, 이로 인한 수요의 급속한 감소를 선진국 정부의 적자운영으로 부분적이나마 상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공공부문에 대한 예산 적자가 커짐에 따라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29년 대공황의 극복과정에서 일반화된 공공부문의 확대와 사회복지의 확대는 재정 적자폭을 늘려놓았다. 그런데 1974년의 공황을 거치면서 대규모의 정부 적자를 통해 수요의 급속한 감소를 메꾸는 것은 한계에 봉착한다. 국가는 더 이상의 적자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부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와 공공부문의 확대를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었다.
3) 공황의 결과
공황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이윤의 급속한 감소였다. 중요한 생산 투입 요소인 석유의 대폭적인 가격상승과 뒤이은 공황의 심각함으로 인해 이윤율의 즉각적인 하락은 불가피했다. 주로 유가상승으로 선진국의 교역 조건은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이윤과 임금으로 귀속될 수 있는 재원 중 0.5% 가량이 감소했다. 공황은 또한 생산성을 약간 하락시켰다. 이윤 몫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1973년에서 1975년까지 연간 1% 가량의 실질임금 하락이 필요했다. 결국 높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으로 인해 과거 5년에 비해 실질임금 성장률은 반감했다. 또한 공황으로 인해 초과설비가 늘어남에 따라 생산/자본 비율도 평균 1/10정도 하락했는데 이 상황들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가 이윤율 폭락이었다.
(2) 선진국의 구조조정
1) 산업구조의 전환
자본은 새로운 위기를 맞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을 모색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제조업생산이 축소되는데 제조업은 1973년 이후 타부문 생산 증가율의 반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제조업 고용이 매년 2%씩 떨어지면서 실업증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탈공업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로, 서비스업의 급속한 성장이 일어나게 된다. 투자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소비의 창출을 위해 상대적으로 서비스업의 고용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서비스업 고용의 성장은 노동시장에서 물러났던 기혼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다시 인입시키면서 노동시장의 유연화(파트타임)를 강제하는 힘이기도 했다. 셋째, 선진국을 중심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계속적인 이윤율 하락을 경험한 독점자본은 새로운 산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게 된다. 제조업은 노동비용(임금)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이전시키면서 중요한 기술력은 여전히 소유한 채 적절히 개도국들을 통제하고, 선진자본은 첨단산업, 이른바 우주항공산업이나 정보통신산업 등의 고부가치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게 된다.
2) 생산방식의 변화(포디즘에서 도요티즘으로)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 보면 노동자들은 콘베이어벨트에 서서 전체 작업 공정 중에 한 부분만을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이러한 기계적인 체계를 일컬어 포디즘이라 한다. 그러나 60년대 말 이후 산업예비군이 고갈되고, 이렇게 노동자에 대한 소외가 극도로 강화된 작업조직체계에 대한 노동자의 반발이 커지기 시작한다. 1972년 제너럴 모터스사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70년대 초반 작업조직에 대한 통제권을 쟁취하기 위한 이탈리아 피아트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70년대 이후 작업장의 변화가 찾아온다. 그것은 일명 도요티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생산방식이다. 하지만 이 생산방식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서 우수하게 노동자를 쥐어짤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도입된 것이다. 이러한 도요티즘의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포디즘은 표준화된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체계이다. 하지만 도요티즘은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이다.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관련된 수많은 모델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적기생산 방식이 도입되면서 노동자들은 노동강도 강화를 경험하게 된다. 일하는 과정에서의 유휴시간을 없애고, 노동자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서 자동생산 라인의 효율성에 기여하도록 만들었다. 도요타는 "이미 다 짜낸 레몬으로부터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교묘하게 짜내는 세계에서 첫 번째 가는 기업이다"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생산방식은 우리 나라에도 '신경영전략'의 이름으로 도입되어 기업문화전략, 임금체계 개편과 함께 노동력에 대한 과도한 착취와 노동자분할 통제라는 실체를 드러낸 바 있다.
(3) 초국적 금융자본의 발흥과 제3세계의 성장
1)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확대
초국적 금융자본은 석유위기로 인해, 그리고 1973년 들어 선진자본주의 사이에 당시까지 통하던 고정환율제도의 붕괴, 즉 브레튼우즈체제가 몰락하면서부터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 후 약 30여 년에 걸쳐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온 기업들과 거대한 은행들은 각국 정부와 국제협약(브레튼우즈협정)을 장애물로 느끼게 되었다. 그로 인해 미국, 서독, 캐나다, 스위스 등에서 이미 1970년부터 국제적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지 않았다. 자본의 국제 흐름을 통제하고자 하던 나라들은 매우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고 이들 나라의 독점대기업들은 이자율이 낮은 다른 나라 자본을 쉽사리 빌려올 수 없었다. 마침내 영국은 1979년 자본이동의 제한을 철폐했고, 일본은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제 변동환율제의 도입으로 자유로워진 금융자본은 국가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오일달러의 유입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자금력을 더욱 확대했다. OPEC 국가들은 확대된 수입의 대부분을 미국 및 선진국의 은행에 저축했다. 그리하여 초국적 금융자본은 자본이동의 제한도 철폐되고, 자금 운용력도 크게 높아지면서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중요한 힘으로 자리잡았다.
2) 제3세계의 성장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 이후 달러의 급격한 절하와 변동환율제의 도입으로 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을 비롯한 유럽선진국으로부터 빠져나온 자본들이 금융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금융적 흐름의 형성은 선진국의 산업구조조정과 맞물리면서 새로 개척되는 고부가가치 산업에 투입된다. 동시에 산업구조조정의 결과로 3세계가 제조업의 투자처로 각광을 받게 된다. 60년대에 선진국들과 저개발국들은 축적속도가 거의 비슷했다. 1960년과 1973년 사이에 투자는 각각 연간 6.2%와 7.6%씩 성장했다. 1973년 이후부터 70년대 말까지 이 패턴은 변모하게 되었다. 즉 선진국에서는 1973년에서 1979년까지 투자 성장률이 정체해 있었던 반면에 저개발국의 경우에는 연간 10.7%로 뛰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총투자 중 저개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3년 16.5%에서 1979년 23.3%로 상승했다. 70년대 초반에 저개발국이 이룩한 축적률은 선진국들에 비해 엄청나게 빨랐다. 또한 신흥공업국들 중 OPEC은 수출 소득의 엄청난 증가를 통해, 그리고 NICs는 급속한 축적을 통해 수출을 증가시켰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로 지칭되는 동아시아 4개국의 급속한 축적은 선진국의 산업구조조정에 의해 제조업이 제3세계로 이전한 결과이다. 오일달러가 유입되면서 엄청난 양의 자본이 남게 되고, 이 금융자본이 제조업부문의 새로운 생산기지로서 임금비용이 엄청나게 싼―당시 한국의 임금비용은 미국의 5%에 불과했다―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새로운 투자처로 제3세계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 1980년대 이후
공황을 지나면서 더욱 강력해진 다국적 기업(독점자본)과 초국적 금융자본은 이제 한 국가의 범위를 넘나들 뿐 아니라, 세계 체제 전반을 자신의 활동에 알맞게 재편하고자 한다. '케인즈주의'의 한계를 주장하고, '시장'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이윤율 하락에 대응하여 노동력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통해 독점자본의 살 길을 모색하려는 새로운 자본의 전략인 셈이다. 이 장에서는 '독점자본의 탈조절, 노동조합과 임금공격, 과학 기술혁명의 가속과 생산의 유연화, 자본 자유화'로 이야기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 살펴보고, 그 신자유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신자유주의의 등장
전후 호황기에 확보되었던 노동자들의 권리는 70년대 말부터 침탈당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독점자본의 요구에 따라 더 이상 고용, 생활수준, 복지 서비스를 기존의 수준으로 유지하기를 거부했다. 정부와 노조 모두는 시장 매카니즘의 자유롭고 효율적인 작동을 방해해 위기를 불러오는 주범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와 노조의 역할을 축소하자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러한 대표적 사례가 영국의 대처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의 정책이다. 1979년과 1980년에 각각 등장한 보수당의 대처와 레이건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요 기조로 내걸고 당선되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노동력 유연화, 자본 자유화, 규제 완화 등을 기치로 내걸었으며, 그런 정책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현실화시켰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본래 이론적인 의미에서 1930년대 독일에서 W.오이켄에 의해 발전하여 2차대전 종전 후 구서독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론으로 발전한 경제사상을 지칭한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 경제, 정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흐름을 주요하게 살펴볼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사회적 관계를 재편하고 그에 종속시켜 자본운동의 자유(=자본 축적의 자유)를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총체적인 이념이자 운동을 말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경제개입과 사회복지 등의 재분배는 오히려 경쟁을 통한 자본운동을 저해하는 요인이며, 또한 통화의 증발 등으로 인해 물가상승과 비효율구조를 낳게 한 원인이라고 본다. 따라서 시장경제원리를 최대한 살려 그속에서 자본운동을 활발히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사회적 관계를 재편, 종속시킨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공격은 물론 환경, 여성, 교육 등 모든 부문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한다는 의미이다.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주창자들로는 미세스, 하이예크, 프리드먼 등이 있는데 이 중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에 있어 위대한(?)공헌을 한 사람이다. 프리드먼은 케인즈적 정책에 의한 통화의 증발은 물가의 상승만을 야기할 뿐이라는 견해를 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하였다. 이로써 케인즈주의적 견해에 따르는 정책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불균형만을 심화시킬 뿐이라는 결론을 제시하였으며 시장의 원리에 따르는 자본의 운동이 그 대안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하였다.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원리에 따라 국가에 의한 경제개입행위와 규제가 혁파되어야 하며 공기업을 시장경제의 원리에 맞게 민영화해야 하고, 저효율구조를 재생산하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기타 시장의 원리에 위배되는 모든 요소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시장경제원리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자본운동의 자유화, 이윤축적 구조의 자유화를 의미하며 이를 위해 국가의 경제개입은 없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국가의 경제개입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짚어야 한다. 과연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는 결코 시장경제 혹은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재생산과정에 대한 국가 개입의 형태와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국가가 노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며, 자본운동의 자유와 안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2) 노동자들의 패배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전일적 관철
신자유주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노동조합은 큰 도전에 직면했다. 자본이 추진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노동에 대한 공격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과 정부·자본과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대량실업이 시작되면서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떨어지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노조원들이 꾸준히감소했는데, 미국은 1970년의 31%에서 1985년에는 18%가량만이 조직 노동자였다.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매년 1% 가량의 비율로 노조원이 감소했다. 노동조합은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래의 표에서 보듯 미국과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파업일수가 증가하였다.
*공업 및 수송 분야의 노동자 100명당 연간 평균 파업일수 (1935년-1987년){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재인용
정부와 자본의 입장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자들의 저항을 깨뜨리고 힘의 우위를 장악해야 했다. 결국 노동자를 한편으로 하고, 정부와 자본을 한편으로 하는 한판 승부는 필연적이었다. 이 한판 승부처가 된 곳은 이탈리아 피아트사 파업, 미국의 항공관제관 파업, 영국의 광부 파업 등이었다. 이 승부처에서 자본가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서 노동조합 측은 임금협상과, 노동력 유연화, 작업장에서의 권한 등에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탈리아 노동운동에서 규모나 상징성 때문에 피아트사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79년 가을 피아트사는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피아트사는 십장을 모욕하고 태업을 했다는 이유로 61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작업장에서의 권한이 노동조합에서 십장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정리해고의 전초전이었다. 노동조합은 1980년 8월에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에 돌입했는데, 33일간의 파업에서 패배하고 2만3천명의 해고와 잉여노동자 전출을 수락해야 했다. 파업 과정에서 그동안 조합원들로부터 모욕을 많이 당해왔던 십장들과 공장 경영자들이 파업 반대행진을 조직했는데, 예상을 뒤엎고 일반 조합원을 포함한 4만여 명이 노동조합의 노선에 반대해 행진에 동참했다. 피아트사의 이번 일은 피렐리, 알파 로메오, 이탈사이더 등과 같은 다른 큰 회사의 노동자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항공관제관 노조(PATCO)의 투쟁이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 때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입후보할 때만 해도 전문 항공 관제관 노조와 친근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선된 후 10개월 만인 1981년 8월 3일에 레이건은 이 조합의 노조원 1만1천명을 모두 해고했다. 그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새로운 직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노조 지도자들은 수갑을 찬 채로 수감되었다. 노조 지도자들에게 적용된 법은 바로 국가반란죄였다. 파업기금도 몰수되었고, 노조에 파업기간 동안 매일 백만 달러씩을 물어내도록 명령했다. 연방노동부는 조합의 패쇄 결정을 공표했다. 미국의 항공사들은 50% 가량의 초과설비와 신생 할인 항공사의 가격 인하 경쟁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 감축 계획을 세우고 손실을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노조원들에 대한 해고를 감행한 것이다. 파업에서 패배하고 나서, 새로 고용된 항공 관제관들은 노동 쟁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조항에 서명을 해야 했다. 파업 중인 항공관제관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항공과 항공기제조산업 노동조합은 운송을 중단하고, 정기항공편의 운행을 중지하고, 승객의 출입관리업무를 중지하며, 전국적인 1시간 작업거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노조인 AFL-CIO의 지도자들은 그들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항공관제관들의 파업과 연대파업은 깨지고 말았다. 자본가들은 파업파괴자 조직을 만들어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했고, 미국 정부는 이러한 파업파괴자들을 공인했다. 미 정부는 PATCO를 처리했던 방식대로 다른 공공 노동자들을 위협했다. 이에 편승해서 일반 사기업 부문의 자본가들도 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임금이 삭감되고, 작업규칙이 강화되었다. 또한 신기술 도입 뒤 작업 시간 조절과 인원 배치에 있어 정부가 주도력을 발휘하면서 노동자들은 작업속도의 증가에 시달려야 했다. 1981년에서 85년 사이에 미국에서 임금은 3.5%나 감소했다. 이처럼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항공관제관 노조의 파업을 철저하게 깸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재편전략을 거침 없이 추구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영국에서도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1984년에 수지가 맞지 않는 5개의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석탄산업의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영국석탄공사(BC)는 재정손실을 계속 만드는 갱을 폐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역 전체가 갱에 의존해있기 때문에 갱을 폐쇄할 경우 지역사회는 필연적으로 황폐화한다.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될 경우 지역의 다른 곳에 취업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파업을 통해 필사적으로 갱 폐쇄를 저지하고자 했다. 영국 정부는 이 탄광 파업을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를 진행했다. 보수당 정부는 먼저 석탄 재고량을 확보하고, 화력발전소가 석유를 사용하도록 개조를 했다. 그리고 갱 폐쇄의 가능성이 낮은 노팅엄 탄광을 중심으로 작업이 계속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파업이 시작되자 효과적인 피켓팅을 저지하기 위해 전례 없는 경찰력을 동원했고, 결국 1만1천명 이상의 광부들을 체포했다. 새로운 고용법을 만들어 노조재산도 압류했다. 그 결과 노조는 파업에 돌입한지 1년만에 패배하고 작업에 복귀했다. 그 여파는 참혹했다. 노조의 교섭력은 약화되었고, 파업종결 이후 4년 동안 갱의 반 정도가 폐쇄되었고, 신기술 도입에 따라 11만 5천명이 직장을 잃었으며, 생산성이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보수당 정부는 반노동조합법을 도입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정부에게 노조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폭넓은 권한을 주었다. 이렇게 대표적인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잇달아 패배하면서 정부와 자본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거침없이 시행하기 시작했다. 유럽 곳곳에서 신기술 도입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해고가 지속되었다. 독일의 경우 6주간 파업이 지속되었던 철강 산업에서 자본가들은 자동차 부속품 생산공장의 파업에 대해 다른 공장 노동자들까지 해고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력의 유연화가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고실업과 노동강도 강화, 그리고 노동조합의 약화 속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3) 신자유주의의 내용과 특징
1) 신자유주의의 특징
신자유주의는 영국에서의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이들 나라에서 전면화된다. 여기에서는 영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본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전술은 지배계급의 보수화로 나타났으며 이를 반영하여 1979년 영국에서 보수파의 당수 대처가 집권을 하게 된다. 대처의 집권은 1970년대 후반 집권한 노동당의 분열과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른 IMF 구제금융의 도입, 1978년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 실패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대처리즘은 정부개입을 축소하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성격을 강화하였으며, 정책적으로 긴축재정, 민영화 정책, 노동조합 활동 규제를 실시했다. 특히나 노사관계에 대해 강력한 노동조합의 힘이 경제침체의 주요인이라고 인식하여 노동조합법을 개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던 런던대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대의회를 분할하였으며, 포클렌드 전쟁을 일으키는 등 제국주의적 성격을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주요 내용과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① 노동에 대한 공격 : 노동시장의 유연화 신자유주의는 우선적으로 노동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통해 그동안 계급타협으로 인해 일정하게 유지되어왔던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과 사회.정치적 위상을 파괴하고 격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한 시도들은 다양한 부문에 걸쳐 행해지게 되는데 먼저 노동자배제전략을 들 수 있다. 대처는 영국병의 원인을 노동조합에 돌리며 노조를 공적(공공이익의 적-사실상 자본의 이윤축적의 적)으로 규정, 초토화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영국의 경우 73년 스웨덴의 노동시장정책을 본따서 만든 노사정 3자참여의 '인력관리위원회'가 있는데, 1987년에는 노동조합을 배제하고 지방경영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지방훈련위원회'로 이 조직을 개편한다. 뿐만 아니라 고용정책에서도 노동조합을 배제하는 등 모든 정책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참여를 배제하여 일방적인 노사관계를 안정화시킨다. 이것은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활용하여 대중적이고 합법적인 토대를 형성하면서 진행된다. 또한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하기 위한 법.제도적 개악은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난다. 대처는 우선 단체행동권을 제약하고 연대파업과 같은 2차 단체행동을 금지하고, 조합원의 파업거부권을 법으로 명시하였다. 또한 93년에는 단체행동에 의해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노동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제정하고 법개정을 통해 단체행동에 돌입하기 1주일 전에 사용자에게 단체행동의 범위와 기간을 통보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한다. 또한 노동조합의 유니온 샾의 폐지와 노동조합비 원천공제체계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 정규노동의 최소화와 파견제, 시간제, 정리해고제를 도입한다. 이를 토대로 대처정권기인 80년대 중반 '브리티시텔레콤'이 민영화되면서 6만여 명의 해고자를 양산하고 90년대 들어 80년대 말 30만 명의 규모이던 것을 10만 명 규모로 축소하기도 하였다.
② 규제완화, 개방화, 민영화 : 독점의 강화 및 초국적자본의 활성화 노동에 대한 공격의 전면화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각종의 규제를 완화하고 자본운동을 자유화한다. 이러한 자유화와 규제완화는 시장의 완전경쟁을 통해 인위적인 독점을 규제하는 반면에 시장질서(약육강식)에 의한 세계적인 독점을 조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그동안 미미하나마 독점자본의 운동을 저해했던 모든 법적, 제도적 장치를 일소해나가게 된다. 즉 이윤을 축소시킬 수 있는 모든 것―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고용안정을 이룩해야 한다거나 하는―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의 연장선에 자본시장의 개방화가 있다. 이는 80년대 중.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해 각종의 상품, 자본, 용역의 국가간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는 이유로 전세계적으로 강요되고 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등등의 국제기구들은 이를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기구들은 각종의 압력수단과 제3세계의 외환자금 필요를 악용하여 개방화를 강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초국적 독점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개방화의 특징과 함께 신자유주의는 국.공유기업의 민영화를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앞서 예를 든 영국의 브리티시텔레콤과 같이 국.공유기업에 대한 민영화를 통해 자본의 운동을 더욱 활성화한다. 국.공유기업에 대한 민영화에 있어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국.공유기업이 가진 저효율구조를 없애고 경쟁을 통한 합리화,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민영화의 목적은 효율성이나 비합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세금을 재원으로 하여 키워왔으며 산업구조의 변화로 고수익 사업으로 변한 국.공유기업과 그 수익을 독점자본이 사유화하는 데 있으며 이는 곧 독점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개방화나 민영화는 기존의 규제를 완화하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결국 독점자본의 강화 및 초국적자본의 활성화를 위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③ 모든 복지부분의 공격과 파괴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식의 복지국가형에 반대한다. 복지국가라는 것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임금수준을 상당 정도 높게 유지하게 되고 그만큼 자본의 이윤을 압박하게 된다. 전후 자본주의는 복지국가의 틀로 안정적인 소비 수준을 확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시켜왔다. 하지만 이윤율 압박이 가중되면서, 노동자계급에게 돌아가는 이윤손실분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동안의 사회복지적 요소들을 공격하고 파괴하게 된다. 계급타협에 기반한 것이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것이든 그 성과물들은 모두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실업보험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감축되며, 공공고용 창출을 위한 정책도 저임금 일자리를 의무화하면서 자본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복지부분의 공격과 파괴는 노동자계급의 임금수준을 대폭 삭감시키고 사회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임금 외 부분의 소득을 사라지게 한다.
2) 신자유주의의 결과
이와같이 신자유주의는 계급타협을 부정하고 강제적으로 계급운동에 대한 파괴를 통해 계급운동을 소멸시켜 나간다. 이는 자본운동의 자유화를 통한 이윤축적 구조의 안정화라는 독점자본의 옹호와 강화라는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경제위기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노동자계급에게 떠안기고 있는 것이다. 계급운동의 소멸이라는 것은 실제로 영국에서 신자유주의정책 이후 노동조합운동의 상황을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우선 노동조합 조직률을 보면 1979년 1,350만 명으로 최고수준이었던 조합원 수가 1995년에는 620만 명이 감소, 730만명에 머물고 있다. 조직률 53%에서 32%로 하락한 것이다. 유니온 샾 적용의 감소를 보면 1980년 520만 명에서 1990년에는 30∼50만 명으로 감소하였고 1990년 이후에는 제도 자체가 폐쇄되었다. 또한 단체교섭에서 사용자가 노동조합을 단체교섭 상대로 인정하는 비율은 1980년 64%에서 1990년에는 53%로 하락하였고, 단체교섭 적용률도 1975년 77%에서 1994년에는 42%로 하락하였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노동시장의 경우 시간제가 1971년 330만 명에서 1994년에 590만 명으로 증가해 전체 고용인구의 28%를 차지하였고, 임시고용은 1984년 110만 명 중에서 1994년에 14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정리해고제에 대하여도 계속적으로 그 요건이 완화되고 있는데 사업의 중단과 필요성의 감소를 사유로 규정하고 그 입증책임을 사용자에게 지울뿐만 아니라 공장폐쇄시 폐쇄 동기는 사용자의 경영권이므로 법원이 심사할 사항이 아니며, 이 때 자행된 정리해고 역시 폐쇄 사실만으로도 충족된다고 보고 있다. 그밖에 해고절차는 해고사유 통지만으로 가능하며, 정리해고 방침 결정 후 해당자에게 공식 통보하기 전까지의 기간 중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정리해고수당 수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로 인한 노동에 대한 공격은 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을 압박하고, 자본의 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의 투쟁 조건을 확대하며, 자본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마치며>
이 시기의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커다란 이데올로기로 다가와 있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국가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야 하고, 그 위기 극복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세계는 자본주의의 연쇄 고리 속에서 하나의 체제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 나라와 같은 신식민지 국가들은 그 연쇄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한 채 세계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초국적 자본 및 다국적 독점자본의 힘에 의해 강제당할 수밖에 없다. 위기는 일국으로 그치지 않고, 일국적 위기를 일국의 힘으로 극복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을 전제할 때 '국가경쟁력 강화'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등의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를 전일화하기 위한 '한국 안에 들어와있는 국내외 독점자본 내지는 그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노동자계급이 놀아나서는 안된다. 이미 자본주의 자체가 경제위기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음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지금의 경우 초국적 금융자본 및 독점자본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주범이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인 신자유주의, 즉 독점자본의 이윤 추구 논리에 불과한 신자유주의는 결코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무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서구의 경우에서 너무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대적인 고용파괴와 독점의 강화에 대한 노동의 대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미 서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폭로되고 쇠락의 길로 접어 들고 있다. 더 이상 자본은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여기서 자본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은 또다른 노동의 생존권 말살과 파탄만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노동자계급은 대안세력으로 대안사회의 상을 제시해 나가야 한다. 서구의 경우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항공관제관 노조의 파업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과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처참하게 선도적인 노동조합을 짓밟았다. 그러나 노동운동 진영은 총체적 연대전선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개량주의적 지도부들은 연대투쟁을 오히려 가로막았다. 그 투쟁의 결과는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로 나타났다. 우리는 그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 신자유주의적 전략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은 계급적 단결과 강력한 투쟁전선 구축이라는 사실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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