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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기 외환금융위기의 배경과 의의

이 글은 97년 12월 14일 본 연구소와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가 공동주최한 정세토론회 "한국경제의현황과 노동운동의 대응방향"에서 발표한 글임.


현시기 외환․금융위기의 배경과 의의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들어가면서


1.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관한 논의들


2. 위기의 원인과 배경


3. IMF 통제체제와 대응


들어가면서


11월 들어 폭발한 외환․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한국 경제는 지금 파국적인 상황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외환 부족으로 원화의 시세는 위기 폭발 이전인 약 2개월 전에 비해서 거의 절반으로 절하되고, 주식지수는 10년 전 80년대 후반의 소위 '3저 호황' 이전의 그것으로 폭락하였다. 신용연계의 파탄과 그에 따른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 또 그로 인한 화폐핍박으로 중소기업은 물론, 공룡과 같은 재벌로 불려 왔던 거대기업 그룹들조차 줄줄이 도산하고 있다.


'한국에서 은행은 파산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깨고 14개의 종합금융회사가 이미 도산 상태에 빠져 있고, 거대 증권회사들도 파산하거나 파산에 직면해 있다. 정부는 예금인출 사태의 표적이 된, 거대 일반은행인 제일은행과 신탁은행의 파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들 은행에 2조 원이 넘는 금액을 긴급 출자하였고, 거듭거듭 '금융 안정화 대책'을 밝히고 있지만, 곳곳에서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지는 등 금융공황은 속히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각 은행의 경영자들이 모여 기업어음의 만기일을 2개월 연장해주기로 합의하고, 한국은행은 일부 금융기관의 파산으로 부실채권화된 시중은행의 콜자금을 보전(補塡)하고 금융기관의 자금부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12월 12일에 11조 원이라는 거액을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에 긴급 공급하고 있지만, 이로써 사태가 호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사태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대외적으로는 극심한 외환부족으로 자칫 대외지급 불능사태가 예견되어 11월 21일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구제자금을 요청하기에 이르러, 12월 3일에는 아무튼 IMF와 한국정부 사이에 자금의 수수조건에 합의하여 자금의 일부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부족, 외환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IMF가 강요하고 한국정부가 수용한 자금지원 조건이 사실상 제국주의적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어서 자본측과 대중의 위기의식이 공히 높아져 있고, 극히 보수적인 국내의 제도언론들조차 '12․3 국치'니, '정축국치'니, '경제신탁통치'니, '경제식민지화'니 하는 등등의 언사를 크게 삼가지 않고 있다. 우호적인(?) 자금지원을 차단하고 사실상 IMF의 뒤에서 강압적 조건들을 주도한 미국의 정부 및 독점자본에 대한 대중의 분노도 높아가고 있다.


석유류 등 주요 생활필수품을 중심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있고, 연쇄적인 도산과 신규 노동인력의 취업난으로 실업이 증대하는 데에다,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이 현 위기상황을 '정리해고'를 단행할 호기로 삼음으로써 대량의 실업과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절실한 현실로 돼가고 있다. 그리하여 실업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짓누르고 있고, 민중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얼마나 그들의 생활을 옥죌 것인지 짙은 불안과 두려움에 감싸여 있다.


그런데 이 파국은 어떻게 온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따지고 보면 우리 정치인, 기업인, 관료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예측불가능'에서 기인"({조선일보}, 97. 12. 12, '만물상')한다는, 정말이지 상식적으로는 예측도 불가능했던 주장에서부터 국민사치․방탕론, 재벌책임론, 김영삼 정권 및 관료의 무능․직무유기론 등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논의들은 대개는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략적 의도에서, 혹은 대중을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킬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김영삼정권 책임론이 대통령선거 분위기와 얽혀 활발히 주장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사치․방탕론'이, 언제나처럼 권력과 독점자본의 나팔수의 노릇을 하는 교수․기자․기타 사회명망가 등 이데올로그들과 대중언론매체의 위력을 빌려 대중의 순진한 애국주의를 자극하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강화해가고 있다. 말하자면, "모두가 내 탓이요!" 하는 식의 일종의 종교적 참회를 대중에게 강요하면서, 그 '탓'을 보상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각종의 관변단체, 종교단체, 애국부녀회 등의 국수주의 단체, 어용노조, 초․중․고등 학생이 동원되어 '허리띠를 졸라맬 것'과 '이른바 노․사․정 합의와 합심으로 이 난국을 극복할 것' 등등이 결의되고 시위되는데, 거기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가 개재할 공간은 물론 거의 없다.


위기의 원인이나 배경, 그 의의 그리고 향후 전개 전망 등에 대한 이성적인 논의가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관한 논의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부르주아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에게서는 그들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진정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주장에 대해서 간단히 보기로 하자.



① 먼저,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국민사치․방탕론'이라고도 해야 할 주장은 기본적으로는 이성적인 원인 진단이기보다는 원시적 직관에 의존한 주장이고, (일부 순진한(?) 논자의 주관적 의도와 상관없이) 독점자본에 대한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종속과 경제적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주장은, 위기가 '외환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였다는 사실과 기왕에 대중에게 주입된 애국주의 및 '수출 = 애국'이라는 의식이 한데 어울리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보수언론의 주장은 제껴두자. 대신 그 매체가 갖는(혹은 갖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진보성 때문에 잘못된 논의가 더욱 혼란과 해악을 끼칠 수 있는 {한겨레}(이봉수, "한국 꼴 난다", {한겨레}, 97. 11. 26)에서의 논의를 보기로 하자.


{한겨레} 신문의 이봉수 부장은 최근의 위기의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요즘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일도 크게 보면 자만심에서 비롯한 자업자득이다. 집 사치, 옷 사치, 차 사치, 외식 사치, 해외여행 사치 등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이어졌다. 기업의 차입경영과 과잉투자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국민소득 만 달러 시대' 운운하던 정부의 치적 자랑도 너무 앞섰다."



결국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위기의 주원인이라는 것인데, 이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을 일삼은 자들은 그의 글의 앞뒤 맥락으로 당연히 '국민'이다. 그런데, 그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것은 노동자계급이니, 그는 결국 '노동자들의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위기의 주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같은 글에서 "국민도 정부와 재벌만 탓할 일이 아니다"라든가,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가계․기업․정부가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할 때, 그 설교의 주요 대상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이다.


이는 당연히, '임금 동결 = 임금 삭감'이나 '허리 졸라매기' 감수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다만 '보다 설득력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국민도 정부와 재벌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번에 들여오는 구제 금융은 국민저축의 부족분일 따름이다. 국민소득계정에서 경상수지 적자는 다른 나라 국민의 저축으로 메워진다. 국민들은 이제 3~4%의 저성장도 감내해야 한다. 경상수지적자와 인플레를 겪으면서 쉽게 이룩한 고도성장보다 그것이 값진 것일 수도 있다."



이를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한국 노동자계급의 과소비로 경상수지의 적자가 생긴 것이고, 그 부분을 다른 나라의 근검 절약한 노동자계급의 저축이 메우고 있으니 그만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마다 일본이나 미국의 (독점)자본을 배울 것을 설교하는 이봉수 부장다운 주장인데, 좀 다르긴 하지만 여기서도 아전인수격으로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여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려는 그의 가예(家藝)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멕시코는 지난 94년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뼈를 깎는 초긴축으로 95년에는 마이너스 6.2%로 성장률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멕시코가 악몽에서 깨어나는데는 1년밖에 안 걸렸다. 96년에 5.1%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5백억 달러를 받기로 했던 지원금은 절반 정도만 활용했고, 그것도 조기 상환해 나가고 있다. … 칠레 등 다른 중․남미 국가도 경제가 살아나는 곳이 많다."



결국 노동자계급이 '뼈를 깎는 초긴축'을 실행하면 곧 악몽에서 깨어난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가계․기업․정부가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이는 철저히 노동자계급의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고, 또 기업과 정부가 그러한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부장의 이러한 주장은 위기의 원인 진단에서부터 철저히 잘못된 것, 혹은 기만적인 것이고 선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집 사치, 옷 사치, 차 사치, 외식 사치, 해외여행 사치 등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이어졌다"라고 행위주체를 생략하고, 또 '국민'이라는 애매한 말의 뒤에 숨어 얘기할 때, 그는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분수를 모르는 짓'으로 표현했을 때 날아올 반박의 예봉을 피하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려는 아주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장이 "멕시코가 악몽에서 깨어나는데는 1년밖에 안 걸렸다" 운운할 때, 그의 안중에는 물신화된 '경제성장률'만 있을 뿐 대량의 실업과 장시간․저임금 노동, 자본의 횡포와 폭력, 생활의 파괴, 무권리 상태를 강요당하고 있는 멕시코의 노동자 대중은 없는 것이다.


그는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라는 자신의 주장을 장식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자신의 주장에 그럴 듯한 설득력을 주기 위해서, 엉뚱하게도 제1차 대전 후 영국에서의 '금본위제'의 부활(정확히 말하자면, '금지금본위제'(金地金本位制)로의 잉글랜드 은행권 태환제의 부활)을 끌어오는데, 그에 의하면 당시 처칠에 의한(?) '파운드'의 '과대평가', "판단력이 모자라는 결정"이 "한때 영국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유감스럽게도, 일정한 화폐명의 은행권에 법에 정한 금의 일정 분량을 대응시켜 은행권의 가치를 보증하는 태환제 하에서의 환평가와, 국가지폐화하여 그 가치(가격의 도량표준 혹은 지폐가 대표하는 금량)가 수시로 변하는 불환제 하에서의 환평가의 차이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태환제 하에서 외환시세의 변동이나 외환위기의 양태는 지금 이른바 '관리통화제'라고 불리는 불환제 하에서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결코 비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관리통화제를 채택하는 대신에 금본위제를 부활시킴으로써 영국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고 주장한다면, 혹시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지금 주장은 무지․무식을 과시하는 위에서의 선동밖에는 안 된다. 특히 태환제 ― 그가 말하는 '금본위제' ― 에서는 은행권의 가치를 입법에 의해서 일정한 금량과 직접적․고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통화의 '과대평가'라는 개념 자체가 허용될 수 없는 것임을 그가 알 리 없을 것이다.)


주제로 되돌아 와서, 위기의 원인을 '국민'의 '낭비', '사치', 혹은 '방탕' 등에서 찾는 주장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위기가 '외환위기'의 형태로 폭발하고, 또 그것을 수반하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근거를 찾을 것인데, 이는 몇 가지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의 '국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94년 이전의 멕시코의 '국민들', 그리고 지난 여름 이전의 태국․필리핀․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의 '국민들'이 '낭비․사치․방탕'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낮은 소득으로?


둘째, 결국 '낭비․사치․방탕' 등 때문에 국제수지가 적자를 누적하고 이 때문에 '외환위기 → 금융위기 → 경제위기'가 오고 있다는 논리일 터인데, 그렇다면 매년 천수백억 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누적시켜온 일본에서 지난 91년부터 전개되어 오고 있는 금융위기․경제위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는가?


셋째, 일본과 반대로 매년 천수백억 달러의 국제수지 적자를 누적해 오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되어 있는 미국에서 대략 지난 93년도부터 거대한 호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없더라도, 이상의 상반된 예들은 소위 '국민사치․방탕론'이 현시기 경제위기의 원인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② 현경제위기의 원인을 설명하는 두번째 주장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론", 특히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론"이라고도 해야 할 것으로, 이는 한국정부가 IMF에 제출한 "한국경제계획각서"의 제7항 및 제6항에도 표명되어 있는 주장이다. IMF(미국)의 '구조개혁'(restructuring) 강요를 합리화하는 서양 측의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러한 주장에 입각해 있고, 국내에서도 '구조개혁' 혹은 '구조조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논자들이 이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이른바'재벌책임론'도 기본적으로는 이 주장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해외의 이러한 논의는 사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우선 그 가운데 유서 깊고 대표적인 부르주아 기관지의 하나인 영국의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한국, 기적의 종말"(South Korea, The end of the miracle)이라는 특별기사(Nov. 29 - Dec. 5, 1997)를 보면, "문제의 진짜 원인들은 거의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1950 - 53년 후의 폐허에서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하는 데에는 국가 주도의(state-guided) 재벌 지배 경제체제가 아주 잘 기능을 했으나, 지금은 그 체질이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


또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경제학 및 경영학 교수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부르주아 기관지의 하나인 {비즈니스위크}(Business Week)의 컬럼니스트인 루디 돈부쉬(Rudi Dornbusch)도 이 잡지(Dec. 8, 1997)에 "한국에서 구제금융 효험이 없을 것"(A Bailout Won't Do The Trick in Korea)란 글을 쓰고 있는데, 그도 역시 유사한 그렇고 그런 말을 하고 있다. 한 번 인용해보자.



"현재의 은행 및 기업의 위기의 배후에는 한국경제의 몇 가지 근본적 문제점들이 놓여 있다. 국가 개입(Statism)이 생산성을 방해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국가는 일본에나 어울리는 방식으로 경제과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개입은 수십년 전 발전의 초기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획과 간섭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경제적 결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과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 금융 시스템이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중앙정부(Seoul)가 신용을 배정해 왔고, 금융 시스템은 금전등록기에 불과하였다. 오늘날 그 시스템이 완전히 파산하여, 그것을 치유하는 데에만 국내총생산의 15%가 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혹은 근본적 취약점 내지 결함'의 하나로 노동시장의 이른바 '비유연성'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예의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고도성장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또 다른 잔재 때문에도 필요한 구조개혁을 단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군부 지배 정권들은 대부분의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임금의 인상률을 생산성의 상승률 이하로 훌륭하게 억제해 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달래는 한 방식으로, 사용자들은 어떤 노동자가 실제로 도끼로 조장을 살해하지 않는 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법률로 금지되었다. 그 법률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것을 폐지하려는 작년의 시도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위협으로 연기되었다. 그 결과 공식 실업률은 3% 이하이지만, … 취업자 10명 중 한 명은 불필요한 잉여인력이다."



그리고 루디 돈부쉬도 같은 글에서, "민주화로 작업장의 상황이 바뀌어, 수년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으로 생산성에 뒤지는 임금을 받던 상황이 끝나고, 작업장마다 파업만 일어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들이 문제를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진단할 때 그들의 지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 및 금융시장의 전면 개방․자유화 및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강력히 실행해야 하는데,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차기 정권의 강력한 리더쉽에 의문을 표시함으로써 넌지시, 그리고 '미국의' 루디 돈부쉬는 노골적으로 이것이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루디 돈부쉬를 다시 인용해보자.



"한국은 쉽사리 위기를 탈출할 수 없다. 약간의 추가적인 통화절하, 개혁, 부실 은행 및 기업에 대한 보조금, 그리고 대출금을 떠받치는 외부의 구제금융으로는 되지 않는다. 지금의 불명예스러운 정권은 선거에서 패할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권이 극적인 타개책을 내놓아야 한다. 한국은 그 시장을 외부의 참여자들에게 완전히(fully) 열어야 한다. 외국의 투자자들이 혼란을 떠맡아서 오래 동안 미루어 온 기업 및 금융 구조개혁을 비타협적으로 해치워야 한다. 정부도 한국의 기업들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은 추상같아서, 그는 그 글을 "만일 한국이 듣지 않으면, 상업차관의 지불정지(moratorium)가 그 나라와 시장에 이미 배웠어야 할 교훈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가히 명치시대의 일본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나 뱉었음직한 안하무인의 협박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의 진보진영 일부에서 제기되는 '재벌 책임 → 재벌 해체'론도 큰 범주에서는 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론", 특히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론"에 든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IMF나 기타의 해외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그들과는 다른 동기와 목적의식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부는 민중주의적 시각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합리적 기업,' '윤리적 기업(?)' 등을 추구하고 있고, 일부는 '반독점' 전술이라는 문제의식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제국주의적 입장에 입각한 것이든, 민중주의적 혹은 반독점 전술적 입장에 입각한 것이든, 이들 입장들은 위기의 원인을 해명하는 데에 있어서 공통의 방법론적 오류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이 오류를 '한국경제'에 특수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현재 진행중인 동남아나 일본의 위기를 짐짓 외면하거나, 이들 세 부류의 경제유형간의 억지 유사성을 찾고 있다. 이들의 시각에서는 위기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들 세 부류의 경제구조, 특히 금융 및 기업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이 끝내 그렇게 주장하는대야 말릴 방법이 없지만, 결코 올바른 주장은 아니다.



③ 김영삼 정권 무능 및 경제관료 직무유기론에 대해서 말하자면, 중앙은행의 총재가 외환위기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요구하자, "내가 갱제를 뭐 아는가," "장관들에게 일임해 놓았다"며 태평한 대통령, "펀더멘탈(경제기초)은 튼튼하다"는 아집에만 집착한 경제부총리 등을 가진 국민은 확실히 불행하다. 그리고 어쩌면, 대자적 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한 왜소한 계급으로서의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해태와 무능, 그리고 직무유기는 사실상 위기의 양태 및 진행속도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구구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하자.



2. 위기의 원인과 배경



현재 진행중인 외환․금융위기, 경제위기의 원인을 '한국경제'에서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한국경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래야 겨우, '왜 위기가 외환․금융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였는가?' '왜 좀 더 빨리나 좀 더 늦게가 아니라 바로 지난 달에 폭발했는가?' 정도일 것이고, 그것도 자본주의 세계시장과의 관련하에서가 아니면 사실은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위기의 본질은 과잉생산 공황이고, 따라서 그 원인도 세계시장에서의 과잉생산․과잉축적이다.


한국에 한발 앞서서 '위기 = 공황' 상태에 들어간 동남아 국가들이나 91년의 이른바 '버블 파탄' 이후 장기적인 침체․저성장 상태에 있으면서 다시 새로운 '위기 = 공황'을 맞고 있는 이웃 일본 등을 잠시 제켜 두자.


그러면, 한국경제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제수지의 적자 누적과 몇몇 거대 기업군(재벌)의 도산에 따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증인데, 이 양쪽 모두 현시기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극대화된 생산과잉의 직접적 결과이다. 국제시장에서 거의 모든 상품이 과잉상태에 있고,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상품인 자동차, 철강, 메모리 반도체, 석유화학 원료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국내외 시장이 심각한 과잉상태에 있어서 판매 및 수출에 애로가 발생했고, 가격 등의 교역조건이 악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이 국제수지 적자, 이윤 압박으로 되면서 재무구조가 부실하여 이자부담이 큰 기업들을 파산시켜 왔다. 금년 정초부터 한보가 쓰러지기 시작하여 위기가 폭발하기 전까지 기아까지 쓰러지면서 위기를 준비해 왔는데, 이들 기업의 도산의 원인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주력 상품의 과잉생산, 이윤압박, 이자부담 과중이었다.


그런데 과잉생산은 그것이 심화될수록 경쟁을 격화시키고, 이것이 다시 과잉생산을 심화시키는 식으로, 원인이 결과를 낳고 다시 결과가 원인이 되는 파국적 과정을 밟고 있다. 사실 근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전개과정은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 해 온 것인데, 최근 수년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성립하여 전지구적 차원의 '자유무역'이 강화되고, 유럽연합,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등 각 지역의 경제통합이 가속화되는 등의 움직임도 과잉생산과 경쟁의 격화에 대한 독점자본의 대응이자 과잉생산과 경쟁을 격화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멕시코나 동남아, 한국 등의 외환․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 등이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전면적인 시장개방․자유화를 강요하는 것도 그러한 과잉생산과 격화된 경쟁을 반영한 '너죽고 나살기'(dog-eat-dog)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잠시 제켜 두었던 일본에 대해서 보자면, 한국과는 정반대로 매년 천수백억 달러씩의 국제수지 흑자를 누적시키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많은 중소기업이 이윤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기관은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고 신음하다가 속속 도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거대 산요증권(三洋證券)의 도산에 이어 전국 규모 10위의 호카이도타쿠쇼쿠은행(北海島拓殖銀行)이 도산하고, 지난 11월 24일에는 업계 4위의 야마이치증권(山一證券)이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야마이치증권의 도산은 일본자본주의 역사상 최대규모 회사의 도산인데, 그것이 관리하고 있던 투자는 약 1,880억 달러였다. 현재 일본경제가 겪고 있는 경제․금융위기는 참으로 엄청나서, 즉 일본경제의 과잉생산․과잉축적은 참으로 엄청나서, 어떤 경제학자들은 일본의 전체 은행 및 증권회사의 3분의 1이 조만간 야마이치처럼 쓰러지거나 합병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시아의 위기가 과잉생산 위기요 과잉축적 위기라는 라는 사실을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그들이나 그들의 매체는 좀처럼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드물게 그것을 인정하는 기사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지난 11월 10일자 {비즈니스위크}에 실린 "디플레이션의 위협"(The Threat of Deflation)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비록 과잉생산(overproduction)이라는 명확한 표현을 기피하고 대신에 과잉능력(overcapacity)라는 다소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또 불환제인 이른바 '관리통화제' 하에서의 물가와 태환제 하에서의 물가를 무차별적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현시기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과잉생산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결과는 더욱 위험스러운 것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를 인용하자면,



"아시아 전역에 걸친 건축 소동, 미국의 계속적인 경제확장, 그리고 유럽의 경제회복 때문에 모든 곳에서 생산은 소비를 앞서서 내달리고 있다. 소비자의 수요가 아직 강한 미국에서도 이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수년래 처음으로 반도체에서 자동차까지 여러 산업에 걸쳐서 세계적인 과잉능력이 있다. 그리고 아시아가 수출을 늘려 위기를 빠져 나오려 하기 때문에 과잉공급은 더욱더 악화될 것이다. … 결과는, 세계경제가 새로운 시대 -- 디플레이션의 시대를 맞이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점자본 이데올로그들이 제국주의적 야욕에 눈이 어두워, 현재 동남아와 동아시아에서 진행 중인 위기를 강 건너 불인 양하면서, 욕심을 채우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데에 비해서, 위 글의 필자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최대의 위험은 동아시아의 디플레이션(그는 위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채)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세계경제의 다른 지역에 염려가 되는 것은 디플레이션의 압력이 어떻게 확산되느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지적은 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도 정확히 이러한 악순환적 디플레이션이었다. 1929년에서 1933년까지 물가는 매년 10%씩 떨어졌다. 차입금이 과도하지 않았던 회사들도 도산했고, 실업은 격증했으며, 경제와 증권시장은 깊은 혼절상태에 빠졌는데, 그러한 상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서만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10일에는 로버트 사무엘슨(Robert J. Samuelson)이라는 한 칼럼니스트도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지에 "아시아 커넥션 -- 미국인들이 자기만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미국경제에 훨씬 더 위협적일 것"이라는 글에서,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상황과 (1930년대) 대공황의 초기 사이에 커다란 유사점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증시는 세계적으로 폭락했고, 금융위기가 생산과 고용을 위축시켰으며, 정부 관리들은 낙관론을 공언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지금 위기는, 우선 일부의 국가에서 폭발했지만, 세계적 성격․원인의 것이고, 미구에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을 강타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예컨대 지난 10월 27일에 홍콩 증시의 폭락에 자극받아 자본주의 세계의 주요 증시가 폭락하고,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공업지수가 사상 최대폭의 폭락을 기록했을 때, 자본주의 세계는 새로운 '대공황'의 악몽에 떨어야 했다.


10월 27일의 대소동 후 10월 29일에 미국의 연방준비이사회 그린스팬(Alan Greenspan) 의장은 미 하원에서 증언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짐짓 '그 대폭락은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투기를 억제하여 미국경제를 건강하게 하는 유익한 사건'이며 '공황의 근거는 아니다'는 요지의 답변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비즈니스위크}의 기자는, "그린스팬이 그 모두를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일년 내내 그는 '지금 증권시장에는 투기거품이 일어 있어서 결국은 터질 것 아니냐'는 질문 공세를 공개적으로 받아왔다"고 평하고 있다.


상품의 과잉생산 외에 지금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투기적인 화폐자본의 엄청난 과잉상태에 있는데, 주지하는 것처럼 이 점이야말로 동남아와 한국의 외환․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이나 한국은 최근에 여러 가지 이유로 급격히 단기외환차입을 증대시켜 왔는데, 세계시장의 포화 및 과잉생산으로 인한 수출증가율의 둔화로 이들 국가의 외환준비금이 줄어들자 이들 국가는 투기자본의 작전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파국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지금 세계시장의 투기적 자본의 총액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데, 한 추계에 의하면 94년 하반기 현재 약 20조 내지 35조 달러(약 3경5천조 내지 6경1,250조 원)이라고 한다. 당시 최대경제대국 미국의 연간 국내총생산은 약 6조 달러, 93년도 말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G7)의 외환준비가 약 3,600억 달러, OECD 국가 전체의 그것이 약 6,000억 달러, 그리고 세계 전체의 외환준비가 약 1조 달러에 '불과'한 사실로부터, 그들 투기자본의 규모와 위력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투기자본이 이렇게 거대해지는 것은 물론 이미 생산 및 유통 부면도 자본과잉․생산과잉 상태여서 새로운 화폐자본이 마땅히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투기자본의 비대화, 투기의 격화 역시 과잉생산․과잉축적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최근에야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의 은행이나 종금사 등 금융기관과 대기업 등도 동남아 등지에서 무턱대고 투기적 활동을 벌여 오다가 동남아의 외환․금융위기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현재의 외환․금융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데, 이 역시 작년에 특히 국내의 과잉생산으로 이윤율에 심한 압박을 받은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금사 등이 해외의 자금시장에서 상환기간 1년 짜리 단기 외채를 빌려 국내의 업체들에게 만기 5년 10년 짜리 대출을 하고, 리스자금으로 이용한 것 등도 그러한 상황에서의 일종의 투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는 지금 대략 92년경부터 시작된 장기호황으로 득의만면해 있지만, 그 역시 호황의 붕괴가 초읽기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년여만에 뉴욕의 주가지수는 4,000에서 8,000을 넘는 가히 '수직상승'을 한 후에 지금 불안정한 동요를 되풀이하고 있다. 주가의 폭등은 미국 시장이 극도의 포화상태 내지 과잉상태로서 자본의 이윤율이 급락해 있어서 소자본의 투기가 극심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황이 임박했음을 말하는 하나의 고전적 지표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의 미국경제의 비중에 비추어 그 대호황이 붕괴할 때 올 위기가 얼마나 위력적일 것인가는 우리의 안이한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간간이 1930년대를 반추하는 소리가 들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운위되는 것도 결코 예사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그 위기가 조만간 급격히 세계화될 조건의 하나도 투기자본화 되어 있는 일본의 외환 누적분이다. 일본은 80년대 후반 이후 일반적 과잉생산과 '0'에 가까운 초저금리로 은행자본을 포함한 대량의 화폐자본이 유망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식이나 부동산시장에 대량으로 흘러 들어가 이른바 '버블'을 생성시켰던 것인데, 90년대 들어와 버블의 붕괴로 타격을 받고, 많은 자본이 미국과 동남아에 투자되었다. 이른바 "엔이 둔갑한 달러"(円が化けた ドル": {日經ビジネス}, 97. 9. 15, ("過剩生産にあえぎ動搖する世界資本主義 -- 世界同時恐慌の足音が聞ごえる"에서 재인용) )인데, 지금 일본은행들의 해외 융자 잔고의 약 56%가 아시아 투자인데, 그 총액은 약 2,650억 달러이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의 통화폭락의 방아쇠가 되었던 타일랜드는 일본의 다국적기업이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나라의 하나이다. 게다가 타일랜드의 대외채무는 93년 말에 470억 달러였는데 96년 9월에는 770억 달러로 불어나 있었고, 그 증가분의 대부분이 일본은행의 융자여서, 타일랜드의 통화위기가 표면화되었을 때 융자 잔고는 375억 달러였다. 타이에서는 현재 금융기관의 부동산 담보 대출의 약 40%에 해당하는 대략 370억 달러가 불량채권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주요 대출자가 일본의 다이이치긴교은행(第一勸業銀行), 코교은행(興業銀行), 스미토모은행(住友銀行), 후지은행(富士銀行) 등 일본은행들이다.


일본 국내에서의 타격에 더해서 동남아에서 이들 은행이 받고 있는 타격은 조만간 미국 등 다른 곳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고, 이는 곧바로 아시아의 위기를 세계화하는 파이프라인이 될 공산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2월 11일․12일 일본은 또한 저락하는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보유 미 국채(재무성 증권)의 일부를 팔기 시작하고, 그에 때맞추어 세계의 증시는 또 한번 동반 하락하였는데, 그 귀추 또한 주목된다.


정말 과잉생산에 동요하는 세계자본주의의 동시공황의 발소리가 바로 문전에 들리는 것은 아닐까?



3. IMF 통제체제와 대응



위기에의 IMF 개입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상황에 우리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상세한 발제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자.


한국정부가 IMF에 제출한 의향서(Letter of Intent)나 '한국경제계획각서'(Korean- Memorandum on the Economic Program)는 현재의 위기의 근본원인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각서 제7항)이나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각서 제6항)에 있다는 전제하에 한국경제를 철저히 구조 개혁하는 데에서 위기의 극복방안을 찾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부분까지 미치는 지침을 담고 있고, 또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서 1998년 1월 말까지는 2주마다 IMF의 점검을 받고 1998년에는 2․4․7․11월 등 4번에 걸쳐서 분기별 심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각서 제41항). 그 주요 기조는, 긴축재정 및 금융, 부실 금융기관의 도태․정리, 금융․자본․상품시장의 전면적 개방․자유화, 기업의 지배구조의 개선 및 경영의 투명성 확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 등인데, 전형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의 것이다.


지침이 너무나 세부적이고 고압적이어서 한국정부의 '정책' 따위가 끼여들 여지가 추호도 없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다소 이 각서의 현실성을 훼손하는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협상 타결 이후 IMF나 국제 금융독점자본측이 공식․비공식적으로 한국정부의 '합의 이행 가능성' 여부를 문제삼으면서 한국정부와 대중을 길들이려 하는 것도 사실은 그 각서가 너무나 세부적인 데에서 오는 비현실성에 대한 저들의 왜곡된 인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각서가 담고 있는 내용의 문제점은 몇 가지 각도에서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긴축재정, 긴축금융, 고금리 정책, 그리고 노동시장의 유연성 등으로 사실상 대중의 소비수준을 하향 억제하고자 하는데, 현 위기가 사실은 여느 공황과 마찬가지로 과잉생산 위기라 할 때, 그러한 대중소비 억제정책은 오히려 공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긴축정책과 그에 따른 민생압박에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마련인 크고 작은 사회적 저항엔 어떤 대응책이 있는지?


둘째, 위기의 근본원인은 물론 과잉생산이지만, 그것이 현재와 같은 외환위기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데에는 다분히 한국경제 등이 국제적 투기자본에 무대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탓일 것인데, 각서가 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본 및 금융시장의 철저한 개방․자유화는 한국경제와 따라서 민중생활을 더욱더 깊숙이 국제투기자본의 자의에 노출시키는 것은 아닌지?


셋째, 각서 내용대로의 '금융부문 구조조정'이란 다수의 종금사, 은행의 폐쇄를 예정하고 있는 것인데, 결국 금융기관의 무차별 연쇄도산을 용인하던가 의도하는 것은 아닌지?


넷째, 외국인에 의한 종합금융회사(merchant bank)의 소유권의 100% 소유, 외국인의 국내 금융시장 자유 진입 및 금융기관의 자유 인수․합병(M&A), 은행을 포함한 외국 금융기관 자회사 및 현지법인의 자유 설립, 외국은행들의 국내 은행 주식의 자유 매입, 외국인 투자 한도 및 주식 소유 한도의 50 ~ 55%로의 확대 등등은 결국 외환․금융위기를 기화로 한국의 주요 기업 및 금융기관의 소유․지배권을 헐값에 탈취하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등등.


여기서 우리는 IMF의 성격과 임무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IMF는 세계은행으로 불리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더불어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협정의 사물이고, GATT와 더불어 제2차 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 통화․금융․무역질서의 핵심을 이루어 왔다. 그것은 1930년대의 적대적인 블록경제화와 제2차 대전으로 파괴된 국제통화제도와 무역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 지배하에 있었다. 그 내재적 모순 때문에 70년대 초에 붕괴되고 70년대 중반에 개정되기까지 IMF 협정은 일개 국민통화인 미국의 달러화를 금과 동일시하여 모든 가맹국가의 통화를 이 달러에 대해서 고정적으로 평가하도록 하고 있었는데(제4조 제1항), 그렇게 되기까지의 영국의 이익을 대표한 케인즈(Keynes案)와 미국의 이익을 대표한 화이트(White) 간의 첨예한 대립은 국제통화․금융사에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GATT 역시, 당시 물정에 어두웠던 미 의회의 비토로 애초의 국제무역기구(ITO)안에 훨씬 못 미치는 집행기구 없는 협정에 머물렀지만, 영국의 스털링 지역에서의 차별적 기득권을 지우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 철저한 미국 이해 위주의 것이었다).


IMF는 애초부터 그러한 성격의 기구였고, 따라서 이번의 '협상'이 사실상 미국 이익 위주의 프로그램의 강요였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 실제로 이번 '협상'을 사실상 미국이 배후에서 총지휘했고, 그 진행을 감독하기 위해서 재무성 차관보까지 '협상'이 진행되는 호텔에 파견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특히 미국 유학 출신의 경제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일부의 이데올로그, 일부의 지배층은 'IMF 통제체제야말로 미루어왔던 구조조정을 수행할 절호의 기회'라는 식의 발언을 해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특수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기의 부담이 그들에게 떨어지기보다는 고스란히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에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이고 전반적인 대응방안은 별도로 발제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커다란 원칙을 대략 내오는 것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의 대응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가장 충실한 방식과 방향"이어야 한다. 가장 노동자계급적인 대응만이 어려움을 헤치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이번 기회를, 그동안 별러 왔던 이른바 '정리해고', 즉 대량해고를 단행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는 독점자본의 노골적 움직임과 언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동안 별러 왔던 임금을 동결하고 삭감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는 독점자본의 노골적 움직임과 언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당장 대폭적인 기름 값을 올리는 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독점자본의 제1의 대응은 노동자계급과 기타 민중의 생활에 대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은, '경제'니 '국가경제'니 하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독점자본의 번영을 위해서나, 기타 그 어떤 것을 위해서 희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거꾸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경제'니 '국가경제'니 하는 것들이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누가 교활하게도, 혹은 어리석게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고 희생할 것을 설교할지 모른다. 노․사․정 합의 운운하는 어리석고 시대착오적인 설교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교활한 기만책동이요, 무지한 자기희생이다.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과잉생산․과잉축적'이라는 점을 망각해선 안된다.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그들 스스로 어쩔 수 없이 '과잉투자'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 자본주의적 위기의 시대에는 절대적으로, '소비야말로 미덕'이다. 물론 그 궁극적으로는 비극의 전쟁뿐인, 독점자본이 부추기는 '국가주의'․'(기만적) 애국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의 노동자가 연대하여 문제에 정식으로 맞대결해야 한다는 정신에서 말이다. 새로운 대공황의 발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점자본이 '소비의 미덕'을,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를 대대적인 전쟁의 파괴와 살육에서 찾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에서 찾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치열한 고용보장 투쟁, 임금인상 투쟁, (유사시의) 전쟁반대 투쟁이 필수적이다.


이미 보도되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IMF가 강제할 조치 중에는, 긴축재정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일반적인 공격에 더해서, 금융․자본시장에 대한 철저한 혹은 대폭 확대된 개방이 있다. (실제로도 멕시코는 95년의 위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지금 외국자본에 의한, 예컨대, 은행의 완전소유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한편에서는 해외 다국적자본과 한국의 독점자본 = 재벌간의 투쟁이면서 한국 노동자의 잉여노동 및 한국의 자원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권의 확대를 노리는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공세에 대해서 역시, 고용보장, 생활임금 보장을 동반한 노동시간 단축, 기타 노동자․민중의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치열한 투쟁만이 방패로 된다.


독점자본 =재벌과 그 이데올로그들은 노동자․민중을 그들에게 종속시키기 위해서 다국적자본에 민족적 이해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계급적 이해를 찾고, 그를 위해서 기만적인 애국주의를 선동한다.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동시에 민족적 이해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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