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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역사
지난번에 “노동자와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지난번 공부한 내용을 다시금 복습하는 의미에서 역사발전에 몇 가지 원칙을 재확인합니다.
1. 역사를 인식하기 위한 몇 가지 원칙
☞ 변화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변화하여 다른 어떤 것이 된다.
☞ 변증법
사물의 본질은 운동이며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광범위하게 승인된 방식들 중 하나가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본래 그리스의 대화술․문답법으로부터 출발했다. 대화할 때 서로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합의를 이루는 과정
☞ 모순
모(矛)는 창이고 순(盾)은 방패다. 이렇게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모순이라고 한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변화가 바로 운동이다. 운동이란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사회운동이 올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과제를 올바로 설정하고 활동 계획을 세우고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효과적인 실천할 수 있다. 모순은 사물의 내부에도 있고(내적 모순), 외부에도 있다(외적 모순).
☞ 대립
모순된 관계는 서로 대립한다. 우리는 사물에 존재하는 대립을 냉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대립을 그냥 인정하고 가만히 있다면 아무 발전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물은 대립을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
☞ 부정과 지양
낡은 것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변증법적 부정의 과정을 ‘지양’이라 한다.
☞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① 양질 전화의 법칙 (변화의 형태에 관한 법칙)
: 작은 양적 변화가 점차 쌓이면 결국 한계를 무너뜨리고 근본적인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법칙이다. 물을 예로 들면, 열을 가해 온도를 높이면 점차 분산력이 높아지는 현상이 축적되다가(양적 변화) 그 변화가 계속되어 온도가 100도에 이르면 그때는 액체와 전혀 다른 성질의 기체(수증기)가 돼버리는 것(질적 변화)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양적인 변화만을 생각하면 조합주의나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발전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활동 경험이 싸이면 그때는 노동운동을 정치 세력화한다든가 하는 새로운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 반대로 성실한 노력을 꾸준히 하지도 않으면서 질적인 변화에만 집착하면 한 방에 모든 일을 해치우려는 조급증에 빠지게 된다. 질적인 변화를 내다보면서 꾸준히 양적인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태도와 함께, 양적인 변화가 어느 수준에 달했을 때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질적인 변화로 바꾸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② 대립물 통일의 법칙 (변화의 원인에 관한 법칙)
: 모든 사물은 내부에 서로 다른 요소가 상호연관과 상호부정의 상태에 있다는 법칙이다. 사물은 그 내부에 대립물 사이의 갈등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갖추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자기 혼자 독단적(獨斷的)으로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자기에 반대되는 것, 반대되는 현상과 대립하거나 때로는 서로 섞이기도 한다.
다시 물을 예로 들면, 응집력과 분산력이 서로 갈등하면서 평형을 이루고 있다가 분산력이 응집력보다 훨씬 커지면 수증기로 변화하고, 온도가 낮아져 응집력이 분산력보다 훨씬 커지면 얼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세력과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진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배/피재배계급, 자본가/노동자계급, 보수세력/진보세력으로 나누어진 어느 집단에 소속되기 마련이다.
③ 부정의 부정 법칙 (변화의 과정에 관한 법칙)
: 전 단계를 뛰어넘는 질적인 변화는 단순히 전 단계를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 단계보다 더욱 우수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복귀한다는 법칙이다. 한번 부정하고 나서 또 한 번 부정하면 다시 원래의 것으로 돌아간다. 수학을 예로 들면 아주 쉽다. +1을 부정하면 -1이 되는데, 여기서 한 번 더 부정하면 다시 +1이 된다. 다만, 이때의 부정의 부정 단계는 최초의 시작보다 훨씬 풍부해진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원리이다.
보리를 예로 들면, 보리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썩어서 보리줄기가 된다. 보리줄기는 씨앗의 ‘부정’이다. 그 보리줄기는 더 많은 보리 씨앗을 맺으면서 죽음으로써 다시 한 번 ‘부정’의 과정을 밟는다.
2. 인간의 역사 - 사회란 무엇인가?
☞ 생산력과 생산관계
생산은 자연을 대상으로 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생산은 한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생산관계가 형성된다. 생산관계란 생산물의 생산에서 교환․분배․소비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관계이다.
이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즉 생산에 필요한 건물․도구․기계․원료․땅․공장 등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했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땅이나 기계, 공장 같은 것을 사회의 성원 전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사회적 소유가 하나이고, 이 생산수단을 소수 개인들이 소유하는 개인 소유가 다른 하나이다.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하는 경우 : 생산하여 만들어진 생산물이 모두의 것이 되고, 이것이 분배․교환되는 것도 평등하게 이루어진다.
생산수단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경우 :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이 생산물도 소유하고 생산한 사람의 노동의 성과를 빼앗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생겨나고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노동의 성과를 뺏고 뺏기는 적대적 관계가 생겨난다.
여러 다른 생산관계가 나타나게 되는 기초는 그 사회의 생산력이다. 생산력이란 글자를 풀면 생산하는 힘이다. 이 생산력은 사람이 생산에서 자연과 맺게 되는 관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나무를 톱으로 잘랐는데 지금은 기계톱으로 많은 나무를 순식간에 잘라낸다. 그러니까 사람의 육체적․정신적 힘과 노동 수단이 결합해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힘이 곧 생산력이다. 생산력은 인류 사회가 시작된 이래 꾸준히 발전해 왔다.
한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통일되어 생산의 형태를 이루는 데 이것을 생산양식이라고 한다. 이 생산양식이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 사회의 구조
사회에는 생산-경제적 관계 이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사회에는 정치적․법적․종교적․문화적․교육적 관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정치활동, 법, 국가, 학교, 교회, 언론 등에서 펼쳐지는 관계다. 또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도 사회를 이루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여러 관계와 의식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관계로부터 나온다. 복잡한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사회적 관계의 전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경제적 관계를 그 사회의 경제적 토대라고 한다. 즉 그 사회의 토대란 물질적 생산관계에서 인간 간에 형성된 경제적 관계 즉 생산관계이다. 그 외의 정치․교육․종교․문화적 관계와 사회의식 등을 상부구조라고 한다. 경제적 토대가 정신적․의식적 관계인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 노동 : 물질적 부를 생산하기 위한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 노동은 인간에게만 유일한 것이며, 인간 그 자체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 생산수단 :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으로 구성 ○ 노동수단 : 생산에 필요한 도구, 기계 설비와 건물, 수송수단, 운하, 전기 송신망 등 ○ 노동대상 : 인간의 노동력을 투여하는 대상으로 자연 또는 어느 정도 가공된 대상. 목재, 광석, 동식물, 수자원, 합성수지 등 ○ 생산력 :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힘과 노동수단이 결합하여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힘으로 생산력은 인류사회가 시작된 이래 꾸준히 발전해 옴 ○ 생산관계 : 물질적 부의 생산, 교환, 분배, 소비되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 생산양식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결합관계 ○ 토대 : 사회의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사회적 생산관계의 총체,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 수준과 관련된 관계 ○ 상부구조 : 정치, 철학, 법, 예술, 종교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사회관,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제도들로 구성 ○ 사회구성체 : 인류 역사상 다섯 가지의 사회 - 원시공동체,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공산주의(그 첫 번째 국면인 사회주의)는 각기 역사적으로 규정된 고유한 경제적 토대와 그에 조응한 상부구조의 유기적 통일체로 이들 각각의 사회를 사회구성체라고 한다. |
3. 인류 역사의 발자취 - 역사의 발전 법칙
원시공산제 사회 => [노예제 사회 => 봉건제 사회 => 자본제 사회] => ?
1) 원시 공산제 사회
인간이 처음에 만든 세계는 계급도 분열도 없는 사회였다. 그 당시의 생산력은 아주 낮았고, 무리를 지어 집단적으로 사냥하고, 열매를 주워오는 것이 일반적인 생산방식이었다. 이런 생산력 아래서의 생산관계는 공동소유였다. 연령별, 성별로 분업이 발생했다. 성별분업을 보면 불을 지킨다든가 아이를 낳고 생활을 꾸리는 등 사회생활에서 여자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여자들이 존중되는 모권 제도를 가진 사회였다.
당시에는 사람이 자연을 지배하기보다는 자연의 힘이 인간의 삶과 생활을 오히려 지배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힘센 동물이나 신령스러운 나무, 돌 같은 것을 섬기고 믿는 신앙(토템사상, 애니미즘)이 생겨났다. 이처럼 상부구조인 사람들의 의식, 종교 등은 토대인 경제에 의해 규정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시사회 내부에서 생산력이 발전한다. 동물을 길들여 기르면서 목축업이 생기고 식물을 재배하면서 농업이 발생했다. 목축업을 하는 종족과 농업을 하는 종족이 발생하여 사회적 분업도 발생했다. 이렇게 생산력이 발전하고 분업이 이루어지자 종족끼리 남는 생산물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노동 도구가 발전되어가면서 이 도구를 만드는 일도 전문화되어 수공업자가 생겨났다.
여기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모순이 발생하였다.
노동도구가 발전하여 청동이나 철로 만든 금속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반드시 씨족전체가 공동으로 일할 필요는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한 가족이 따로 떨어져서 일하는 것이 편리하고 더 능률을 올릴 수가 있었다. 또 각각 다른 조건에서 일하여 얻는 생산물을 다 모아 놓고 평균적으로 분배하는 것은 각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공동소유, 공동생산이라는 원시 공산제 사회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원시 공산제 시기에는 없었던 가족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가족들이 모여 농촌 공동체가 만들어 졌다. 농촌 공동체에서는 토지가 공동소유로 남아 있었으나 각 가족들은 노동도구를 개별적으로 갖고 개인경지를 운영하였으며, 생산물도 공동으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가족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것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개인 소유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유재산 제도가 생긴 다음부터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원시 공산제 사회의 우두머리나 장로들은 자신들의 지도적 지위를 이용해서 교환해 온 물품이나 남는 물품을 자기 소유로 하거나, 공동체의 재산을 여러 가지 수단으로 약탈해서 개인 소유로 만들었다. 이들은 더욱 부유해져 귀족이 생겨났다.
이때 생산력은 더욱 발전하여 잉여생산물이 생겨났다. 옛날에는 예를 들어 20명이 일해도 겨우 먹고 살았는데, 이제는 20명이 일하면 23명이 먹고 살만큼 생산력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3명분의 생산물을 잉여생산물이라 한다. 잉여생산물이 생산되자 전쟁에서 잡아 온 포로를 죽이는 대신에 그들을 부려먹는 것이 더 유리하게 되었다. 부유한 특권귀족들은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더 많이 자기의 노예로 사용하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인류사회 최초의 계급인 노예와 노예소유주가 발생한 것이다.
2) 노예제 사회
노예제 사회로 넘어오면서 국가가 발생했다. 국가는 옛날부터 항상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계급사회가 나타나면서 생긴 것이다. 노예가 생기자 노예들은 당연히 반항하게 된다. 이에 따라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착취자들은 피착취자들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권력기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치, 정치권력이라는 상부구조를 변화시킨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였다.
노예제 사회의 생산관계는 농업, 목축업이 분화되어 발전한 생산력에 기초한 것이었는데, 땅과 노동도구-생산수단을 가진 노예주와 이들에 의해 착취되는 노예계급으로 분열하여 적대적인 생산관계가 발생한다.
노동도구(노예)의 발전 없이 생산력의 발전이 일어나기는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억압과 착취에 견디다 못한 노예들의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스파르타쿠스는 9만 여명의 노예들을 이끌고 3년간이나 싸웠다.
또 노예제 국가의 군사력의 기초는 소생산자들, 즉 농민과 수공업자들이었다. 노예가 일찍 죽고 자식을 낳지도 못했는데 날이 갈수록 노예가 더 많이 필요하게 되자 전쟁은 더욱 심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에 차출되고 늘어나는 세금의 부담에 짓눌려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몰락했다. 그리하여 노예제 국가의 군사력이 약해지고 노예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노예가격이 치솟고, 값싼 노예노동에 의해 얻어지던 경제적 이익은 사라져 갔다.
이렇게 노예제의 생산관계가 더 이상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되자,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유농민이나 노예에게 땅을 조금씩 나누어주고 농사를 짓게 하여 수확의 일부를 거둬들이고, 그 대신 자유농민과 노예에게 각종 의무를 부과하는 방법이었다. 새로운 생산관계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땅과 노예를 완전히 소유한 노예주라는 계급이 지배하던 노예제 사회는 몰락했다. 노예제사회 몰락의 원인은 당시의 노예 - 노예주라는 생산관계가 더 이상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기초해있으며, 노예들의 저항과 계급투쟁이 사회를 뒤흔든 것이었다.
3) 봉건제 사회
봉건제 생산양식은 노예제 사회가 무너져 가는 와중에서 농민, 노예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그 수확물을 대가로 받아가는 과정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토지라는 생산수단이 개인적으로 소유되어 농업공동체 안에 불평등이 심해지고, 점차 몇 명의 귀족들 손에 토지가 집중되었다. 이들은 농민대중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왕이 되었다. 왕은 측근 귀족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눠줬는데 이 땅을 봉토라 한다. 봉토를 받은 사람들을 영주라고 했는데 봉건영주의 땅은 농노들에 의해 경작되었다. 농노란 봉건영주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노라고 불려진다.
봉건제 사회의 생산관계는 대규모의 봉건적 토지소유와 봉건영주에 대한 농노의 인격적 예속에 기초한다. 모든 토지는 영주의 것인데, 일부는 자신의 직영지로 하고 나머지는 농노들에게 나누어주어 경작하게 했다. 농노는 땅의 사용권을 받는 대신 영주의 직영지에서 일주일에 사흘씩 노동해야 했고 자신의 땅을 떠날 권리도 없었다. 영주가 농노에게 부역노동을 강제할 수 있었던 것은 농노가 영주에게 인격적,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예속은 영주가 농노에게 행사할 수 있었던 물리적 폭력, 신분법, 관습 등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영주는 ‘초야권’까지 갖고 있었다.
또한 영주는 자체의 무장력으로 기사단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여 형성된 봉건제 하의 계급들은 영주, 농노, 기사계급과 도시의 수공업자, 상인들이었다. 농노들은 노예에 비해 생산에 의욕을 갖게 되었고 생산력은 점점 발전해 나갔다. 이런 다양한 생산물을 교환하는 일도 더욱 활발해져서 상인계급이 늘어갔으며 또한 수공업 역시 발전하였다. 그리고 철을 가공하는 방법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 용광로가 등장했으며 나침반, 지도가 발명되어 조선과 항해술에도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의 분업은 더욱 발전했고, 생산의 발전은 세계로 넓어져 갔다. 그러자 그때까지의 수공업 방식으로는 늘어나는 상품의 수요에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용노동에 기초한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즉 도시의 수공업자 중 몇몇 소수 장인들은 자본주의적 기업가가 되고, 다른 많은 수공업자들은 생산수단을 잃어버리고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적 관계가 봉건제 내에서 점차 형성되어 갔다.
자본주의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발전했다. 상인으로 대변되는 상업자본이 농민과 수공업자의 생산을 직접적으로 종속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 상인은 상품교환의 중개자였으나, 후에는 소생산자들에게 원료를 제공하거나 돈을 대여해주었다. 따라서 소생산자들을 경제적으로 상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상업자본은 다음 단계로 고립된 수공업자를 하나의 건물로 모아 임금 노동자로 일하게 했다. 상업자본은 산업자본으로, 상인은 산업자본가로 전화하였다.
자본주의는 또한 지방에서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상품 생산이 발전하자 농노들이 부역노동으로 영주의 땅을 경작하던 노동지대는 교역이 발달하면서 생산물을 바치는 현물지대로, 다시 화폐지대로 바뀌어 갔다. 화폐관계의 발전은 농민을 도시 부르주아와 무산농민으로 계층화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봉건제 내부에서 성장했다. 봉건제의 종말은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발전해 가고 부유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활기를 띠면서 영주들의 농민에 대한 수탈은 더욱 극심해 졌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봉건제의 뿌리를 뒤흔들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홍경래의 난이나 전봉준의 동학농민전쟁 같은 것들도 봉건적인 착취와 억압에 대한 농민들의 투쟁이었다.
봉건영주들은 농민봉기가 점차 확산되어 지방으로 전국적 규모로 일어나게 되자 보다 강력한 중앙집중 권력인 절대왕정을 이루어 갔다. 강력한 중앙 집중 권력으로, 농업과 상공업에서 권력을 유지해야만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절대 왕정의 권력에 힘입어 농민들을 토지에서 내쫒아 노동자로 만들고, 식민지를 약탈하여 돈을 모은 것은 신흥자본가들이었다.
결국 생산력의 발전에 더 이상 걸맞지 않게 된 봉건제의 생산관계는 무너져 갔다. 봉건적 착취에 대항한 농민봉기는 봉건제를 뒤흔들었고 결국 붕괴시켰다. 봉건 영주에 대한 투쟁은 부르조아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그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지배 계급이 되기 위해서 봉건 영주에 대항하여 일어난 농노의 봉기를 이용하였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시킨 시민혁명이었다.
♠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비밀 “자본의 원시적 축적” ♠ 봉건제사회의 태내에서 성장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더욱 급속히 발전시킨 것은 소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대량의 노동력이 존재하고, 둘째는 자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액의 화폐가 소수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란 이 두 가지 조건을 국가권력의 손을 빌어 일거에 폭력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첫째 조건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강제로 추방하여 도시의 거리로 내모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엔클로져 운동’이라고 한다. 엔클로져라는 말은 울타리치기라는 뜻이다. 엔클로져 운동은 2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두 번째 조건은 식민지에 대한 약탈, 식민지 무역과 노예무역, 국제 고리대금업, 각종 국채발행 등의 방법으로 달성되었다. 소위 원시적 축적과정은 폭력과 강제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탄생에 얼마나 커다란 역할을 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생산수단을 완전히 박탈당한 거대한 부랑자 집단의 발생과 몇몇 개인의 손에 축적된 막대한 자금은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창출되었던 것이며, 이것들은 “피에 물들고 불에 타는 문자로 인류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탄생의 비밀이 있다.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의 털구멍으로부터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 세상에 탄생한 것”이다. |
4) 자본주의 사회
봉건제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은 역사적 진보였다. 신흥 자본가계급은 공장제 생산방식을 도입하여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대규모 생산을 주도했으며, 차츰 새로운 생산 기술과 기계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봉건제의 지배계급인 영주 계급의 특권이 자본가들의 경제적 진출을 가로막았다. 몰락을 앞둔 영주들의 가혹한 착취에 대항한 농노들의 반란에 자본가 계급이 가세했다. 이 자본가 계급은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결국 새로운 생산력에 장애가 되는 봉건 계급, 봉건제가 몰락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가?
먼저 생산수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전 봉건제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는 공장에 모여서 기계로 생산하게 되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개별적으로 소유했던 생산수단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집단적으로 모여서 생산수단을 운영하는 사회적 생산수단의 형태로 바뀌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봉건제 사회의 개인적 생산이 서로 연결되는 사회적으로 바뀌었다. 생산물도 개인의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바뀌었다. 이제는 공장에서 생산된 의류, 가전제품 등은 수많은 노동자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생산물이다. 따라서 노동자들 가운데 아무도 “이것은 내가 만들었으므로 나의 생산물이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을 생산의 사회화라고 말한다. 생산의 사회화는 이전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자본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며 여기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그 모든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기본 모순으로 인해 어떤 문제들이 생겨나는가?
첫째,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간의 대립이다. 생산의 직접적 담당자인 노동자는 생산수단과 분리되어 있고, 굴리면 굴릴수록 더 많은 자본이 자본가의 손에 집중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된다. 노동자들은 평생토록 노동을 하면서 자신이 생산해 낸 잉여생산물, 즉 잉여가치를 자본가에게 착취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대립과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이 발전해 간다.
둘째, 상품생산을 지배하는 법칙이 강화된다. 자본간의 경쟁은 걷잡을 수 없게 치닫고, 개별적인 각 공장, 회사의 치밀한 사회적 조직과 전체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이 모순을 일으킨다. 각각의 개별 공장에서는 정확한 계획에 입각해 작업 공정이 나뉘고 분업이 이루어져 생산한다. 그러나 사회 전체로 볼 때는 자본가들이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하기 때문에 생산이 무정부적으로 마구 행해지고 있다. 독점이 강화되어 몇 개의 독점체가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이 과잉생산 되어 생산과 소비의 모순인 공황, 생산력의 낭비, 자연의 파괴, 비생산적 부분으로의 자본 투자 등의 문제가 나타난다. 즉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자본가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생산력과의 모순이 심화되고, 자본주의의 발전이 진행됨에 따라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대립과 모순 역시 더욱 깊어진다.
“자본가계급이 싫든 좋든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생산의 진보는 경쟁에 의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에 연합에 의한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져온다. 이처럼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자본가 계급이 생산물을 생산하고 점유하는 기반 자체가 자본가 계급의 발밑에서 무너져 간다. 자본가 계급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을 생산하는 셈이다.”
5) 새로운 사회와 노동자 계급
지금까지 원시 공산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까지의 인류 사회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학습을 통해 자연만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도 변화․발전의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사시대를 빼고 실증적 기록이 남아있는 노예제부터 따지면 인류의 역사는 약 5천년쯤 된다고 한다. 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역사는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되어왔다.
인간의 역사가 흘러온 시간을 돌아보면, 최초의 인간사회인 원시공동체는 수 만년 동안 지속되었다. 노예제는 기원전 4,000년 이집트, 인도, 중국 등에 등장해 서기 5세기말 로마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봉건제는 중국에서는 2,00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서유럽에서는 5세기 로마제국의 붕괴 때부터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자본주의는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자본주의와 체제경쟁을 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사회계급은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기도 하지만 그 방향은 역사이래 바뀌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혹자는 역사의 종말을 말하며,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역사는 원시 공산제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화․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변화․발전해 나갈 것이다. 현재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인류역사 발전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부정되어질 것이다. 노예제도가 몰락한 것처럼, 똑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몰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투쟁과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이행과정에 노예들의 봉기와 투쟁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하는 과정에 자본가들과 농민의 투쟁이 있었다. 이렇듯 인간역사가 발전해 나가는 데는 역사 담당 주체들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노예제 사회의 노예가, 봉건제 사회의 농민투쟁이 낡은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교체시키는 원동력이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넘어 보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주체와 원동력은 노동자․민중인 것이다.
그럼 노동자계급이 지향하는 최고의 완성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아무도 독점적인 활동영역을 갖지 않으며,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어느 분야에서라도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고, 사회가 생산을 전반적으로 규제함으로써 내가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다른 것을 할 수 있게 하고, 아침에 사냥 가고 오후에 고기 잡으러 가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나는 사냥꾼이나 어부, 목자나 평론가와 같은 전문인이 되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6) 역사 담당 주체의 피나는 노력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는 역사 발전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가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의 강물을 밀고 가는 삶에 자신감을 준다.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끝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노동자의 인생을 보람 있게 만드는 것이다. 역사와 경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철학이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7) 노동운동의 합법칙성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것이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언제나 동일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비를 겪으면서, 마치 고개를 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발전한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불만과 요구는 언젠가 반드시 표출된다. 침체 가운데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쉼 없이 고양․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반드시 비약적 발전을 준비한다. 축적된 불만은 다음의 고양국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이다. “어려울 때는 버티는 쪽이 이긴다”거나 “노동자는 승리할 때까지 패배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침체국면을 지나 노동운동이 비약하고 고양되는 시기가 되면,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고, 투쟁전술이 광범위하게 구사되며, 정치적 투쟁의 수준이나 이념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87년, 88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96년말과 97년초를 뜨겁게 달군 총파업투쟁은 그 대표적 예다. 이와 같이 노동운동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끌고 가는 기관차의 역할을 하다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와 철학
1. 철학이란 무엇인가
가.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
‘철학’은 흔히 어렵고 골치 아픈것, 고상한 것,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을 많이 함.
그러나 철학은 현실과 동 떨어진 것이 아님. 즉 철학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특정 분야를 뛰어넘어 이 세상, 곧 자연과 사회, 인간에 대한 근본 인식과 태도를 뜻하는 것임.
한 마디로 세계관이다. ‘세계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 하는가’를 일컫는 말이다.
상식적 세계관 :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일상생활과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 => 경험 중심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임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까닭은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 곧 과학적인 세계관을 정립함으로써 상식적 세계관으로는 밝힐 수 없는 복잡한 이 세상의 본질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함.
철학은 구체적인 행동까지도 결정을 함
예) 지난 해 말 7명의 조합원이 정년퇴직으로 회사를 그만 두었다. 이 가운데 5명은 “노조가 아니었으면, 2년 전에 잘렸을 텐데 노조가 있어서 2년 더 버틸 수 있었다”면서 퇴직금에서 100만원씩을 떼서 노조에 기부했다. 그런데 다른 두 명은 노조에서 왜 지난 임단투 때 정년을 연장하지 않았느냐”며 되레 노조를 원망하고 나갔다.
예) 유명한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한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한다. 의아해하는 내가 들은 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봤다.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비키지 않느냐고. 그이들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 만든 건 아니잖아요.” 신영복 선생(강의)에서
* 철학(哲學, philosophy)은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혜(소피아)를 사랑한다(필로)는 뜻이다. 동양에서 철학과 유사한 말로는 도(道)가 있다. 道는 착(辵)과 수(首)의 회의문자로, 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고, 首는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면서(실천하며) 생각하는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
나.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사람의 처지와 생활환경에 따라 요구와 이해관계가 다르고, 이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난다. 따라서 철학은 크게 지배계급의 철학과 노동자 민중의 철학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당연하게 노동자 민중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왜 노동자 민중의 철학을 지녀야 할까?
단순히 노동자니까 노동자의 철학을 지녀야 하는 것일까? => 아니다.
우리가 노동자의 철학으로 무장해야 하는 까닭은 가장 올바르고 세계를 보고 역사발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중의 철학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일까 => 아니다.
지배계급의 철학이 국가권력, 언론, 교육,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녹아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 노동자 민중은 지배계급의 잘못된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쉽다.
노동자 민중의 철학은 목적의식적으로 학습하고 교육하지 않으면 안된다.
=> “골치 아프게 철학은 공부해서 뭐 하느냐? 실천만 잘 하면 되지”
=> “우리 조합원들이 문제야”
=> 일상생활속에서 잘못된 지배계급의 철학의 예
로또 복권이나 각종 도박, 투기 행위 등
2. 물질과 의식
철학의 근본 문제는 물질과 의식의 문제를 놓고 발전해 왔다.
유물론: 물질이 근원적이고 일차적이며 의식(관념)은 파생적이고 이차적이라는 주장이다.
관념론 : 반대로 의식이 근원적이고 일차적이며 물질은 파생적이고 이차적이라는 주장이다.
예1)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아니면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예2) 콜럼브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기 때문에 대륙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대륙이 있었기에 발견할수 있었던 것인가?
관념론 :
주관적 관념론 : 모든 사물은 인간의 관념과 의식에 의해서 결정(버클리), 일체의 사물은 마음에 달렸다(불교 교리)
객관적 관념론 : 세계를 초 자연적인 객관적 정신의 산물(초 자연적 총체) - 신, 하느님
* 관념론이 파급되는 이유 : 지배계급이 지지하고 옹호하는 철학으로서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고통과 불평등을 마음의 문제, 또는 신의 섭리로 생각케 하여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 모든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
물 - 구름 - 비 - 눈 / 육체 - 정신 / 동물 - 식물 / 삶 - 죽음 / 노동자 - 자본가 / 정규직 - 비정규직 / 스포츠 - 정치
그러나 지배계급의 철학은 사물의 관련성을 부정 => 모든 사물은 고립되고 분리 존재
플라톤 : ‘이상국가론’에서 인간을 이성적 인간, 기력적 인간, 정욕적 인간의 세 부류로 분류하고, 이성적 인간(귀족)이 정치를, 기력적 인간(평민)이 국방을, 정욕적 인간(노예)이 생산을 담당하는 것이 이상국가이며, 이성적 인간집단의 덕목은 지혜, 기력적 인간집단의 덕목은 용기, 정욕적 인간집단의 덕목은 절제라고 주장=> 노예제 질서 옹호
성리학 : ‘분수를 알고, 분수를 지키고, 분수에 만족하라’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4.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 없다(○)
예) 인류사회 : 원시공산제 사회 -> 노예제 사회 -> 봉건제 사회 -> 자본주의 사회
예)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다 => 지배계급의 논리
예) 정지 = 변화
변증법 : 모든 사물은 관련되어 있고 또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고 보는 철학적 견해 형 이상학 : 사물의 상호 관련성을 부인하여 사물을 고립적으로 보고 사물의 운동․변화 를 부인하여 사물을 고정적으로 보는 철학적 견해 |
5. 변화의 근본 원인은 내부에 있다 -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물 -> 끓이면 수증기 / 얼리면 얼음
변화의 원인이 온도의 변화인가?(×) 아니면 물 자체의 변화의 속성인가? (○)
물에는 응집력과 분산력이라는 두가지 속성이 내부에 존재함.
예) 사회의 변화 발전의 원인이 사회 이외의 자연의 조건때문인가 아니면 사회 내부의 조건때문인가?
사물은 내적모순(대립물의 통일투쟁)에 의해 변화 발전한다.
물 은 응집력과 분산력의 통일투쟁에 의해 변화 발전한다.
사회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통일투쟁에 의해 변화 발전한다.
* 사물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길은 내적모순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문제점을 밝혀내는 길이다. 외적요인은 2차적 원인이 된다.
예) 노동조합의 투쟁 : 한 사업장에서 자본이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착취하여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투쟁한다고 하자. 그 사업장의 근로조건을 변화시키려면 그 사업장 노동자들이 1차 주체가 되어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이 노동자들에게 외부에서 아무리 많은 지원을 한다고 해도 그 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력이 약하다면 이기기 힘들 것이다.
* 기본모순 : 사물이 존재하는 전 기간을 관통하며 사물의 변화 발전에 규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순을 기본모순이라 한다. 우리 사회의 기본 모순은?
* 주요모순 : 많은 모순 중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고, 이 모순을 해결하면 다른 모순도 해결되거나 또는 그 해결이 쉬워지는 모순. 예) 노조 민주화 투쟁, 현장 조직력 강화
*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 : 대립물의 관계가 적대적인 경우 그 모순을 적대적 모순이라 하고, 비적대적인 경우 비적대적인 모순이라 한다. 적대적 모순은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극복함으로써(투쟁을 통해) 해결되며, 비적대적 모순은 모순 그 자체를 실현함으로써(상호협력과 조화를 통해) 해결된다. 노동과 자본의 모순 / 노조 간부와 조합원의 모순
6. 양이 쌓여 질이 변한다 - 양질전화의 법칙
모든 변화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 양의 변화를 통해 질의 변화를 가져옴.(양질전화)
예) 실이 천으로 변화하는 과정 : 실을 날줄과 씨줄로 계속 엮어 나가면 천이 된다. 결국 실이 한 올 두 올 계속 겹쳐지는 양적 변화를 통해서 천이라는 새로운 질적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예)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과정 : 물에 열을 가하면 물의 온도는 점점 올라간다. 그리하여 물의 온도가 100도가 되면 수증기로 된다. 액체인 물이 기체라는 새로운 상태(질), 곧 수증기로 되는 것이다.
예) 조직력 : 개개인의 힘이 조직으로 모여 조직력으로 발휘가 되면 새로운 힘이 발생
7. 사물의 발전 과정 - 부정의 부정
모든 사물은 변화할 뿐만 아니라 발전한다.
발전 : 질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생기는 변화
예) 식물 : 씨앗 > 식물 > 씨앗 순환과정
식물은 씨앗의 부정, 새로운 씨앗은 식물의 부정, 기존의 씨앗과 새로운 씨앗은 다름 - 부정의 부정의 법칙
8.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가. 원인과 결과
원인 -> 결과(원인) -> 결과
나. 본질과 현상
‘현상’ :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상대적으로 가변적인 외적 측면을 뜻한다.
‘본질’ : 사물의 존재와 발전을 규정하는 비교적 공고한 내적 측면을 말한다.
다. 내용과 형식
내용 : 사물 내부에 포함된, 사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총화를 말한다.
형식 : 사물 내부의 구성 요소의 조직 및 구조, 즉 내용의 조직구조와 표현방식이다.
* 형식주의 : 일면적으로 형식을 과대평가하여 형식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 조직체계는 그럴듯하게 짜놓고 실제 하는 일은 없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라. 필연성과 우연성
필연성 : 원인이 파악된 결과
우연성 : 원인이 파악되지 않은 결과
예1) IMF 사태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들이 실업을 당하는 것은 필연성이지만 특정한 기업이 도산하고, 특정한 사람이 정리해고 당하는 것은 우연성.
예2) 주택복권에서 1등 당첨자가 나오는 것은 필연성이지만 로또 복권에서 1등이 나오는 것은 우연성.
마. 가능성과 현실성
가능성 :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장차 실현되어 현실로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현실성 : 가능성이 실현되어 현실로 존재하기에 이른 것을 말한다.
9. 인식과 실천
인식 :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감성적 인식 : 인간의 감각기관이 사물에 작용해서 이루어진 생생한 인식이고 사물의 외적 측면인 현상에 대한 인식으로서 단편적, 표면적이다.
이성적 인식 : 인간의 이해력으로써 획득하는 인식으로서 사물의 본질과 내적인 연관성 그리고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을 인식한다.
인식과 실천의 관계 : 인식은 실천에서 비롯되고, 실천을 통해서 발전한다. 자연에 관한 인식은 자연에 대한 대응, 곧 생산노동이라는 실천으로부터 시작하며, 사회에 관한 인식은 사회적인 실천으로부터 싹트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자연과 관계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을 한걸음 한걸음씩 확대․심화시킨다. 사회에 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노동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의 인식도 변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실천은 또한 인식의 본래 목적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적 요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 상대적 진리, 절대적 진리 : 절대적 진리란 어떤 조건에서나 타당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란 무조건부 진리하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 진리란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타당한 것을 말한다. 조건부 진리인 셈이다.
=>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는 것인가?
현실의 투쟁 과제로부터 시작하는 교육 운동. 미래를 책임진다.
김태균(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상임대표)
1+1 = 2
1+1 = 2+3+4+@
어느 것이 맞는 답일까?
인간의 아름다운 힘, 공동체
인간은 인간을 포함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세상을 상대로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고 넓히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동을 하면서 인간의 장엄한 역사를 이루어 왔다.
한사람의 힘보다는, 한사람과 또 한사람이 모여 단지 그 합인 두 사람의 힘보다는,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한사람의 힘과 또 한사람의 힘이 합쳐서 둘, 셋, 넷 이상의 사회적 힘을 발휘하면서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세상을 상대로 노동하면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그 위엄을 구축해 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 사회는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생산수단을, 그리고 과학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왔으며, 더욱 더 위대한 업적은 바로 후배들에게 이러한 사회의 힘을, 집단의 힘을,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상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 계획, 그리고 이를 책임지고 운영해 갈 주체인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을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해 왔다는 점이다.
계급의 출현과 함께 모든 것이 뒤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인간의 역사는 계급의 출현과 함께 모든 것이 뒤 바뀌어 버렸다. 인간사회가 생산하고 있는 모든 업적을 단지 지배계급을 위해, 피 지배계급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을 하면서 스스로의 생산력 발전의 제약으로 그리고 사회발전의 걸림돌로, 계급은 인간 사회의 재앙으로 등장을 했다.
이제 재앙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하는 주범으로서 계급이라는 체계는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계급이라는 사회적 토대는 그 동안 인간사회가 형성하고 생산했던 수많은 업적을 한 줌의 재로 만들고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세계를 상대로 한 인간의 노동의 역사 또한 계급 사회의 출현과 함께 인간과 세계를 상대로 한 노동에서 인간과 인간을 상대로 한 투쟁의 역사로 전환되면서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는 불운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교육 또한 여타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계급의 출현과 함께 지배와 피지배가 상존하는 사회 체제의 우월성 및 영구성에 대해, 그리고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로의 발전을 거세하고 계급 사회에서도 누구나 지배계급으로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등의 환상을 심어주는 이데올로그적 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인류 역사의 발전은 20세기 들어 쏘련이라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등장을 하면서 계급사회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회라는 양 사회 체제 속 에서 인류가 공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을 해 왔다.
물론 교육 또한 이러한 냉전의 시대에서 서로의 체제의 부당성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중심으로 작동을 했으며 특이나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서의 교육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현상 분석조차 거부를 하면서 현존하는 쏘련을 비롯한 새로운 사회 체제에 대해 온갖 비방과 비난을 서슴지 않고 이를 재생산하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을 설정하는, 체제유지를 위한 극단적 기능 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또한 형식적으로 의무교육 또는 무상교육의 이름으로 자본주의 사회체제도 인류 공동체의 역할 속에 교육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식의 형식상 평등교육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사회주의권의 변화 이후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체제에 대한 인류의 선택권이 없어진 상황에서 굳이 형식상이라도 평등교육을 취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비용을 지속적으로 지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아니,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체제 안정을 위한 교육에서, 자본주의 계급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기제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기 시작했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은 더 이상 형식적이나마 인류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공적 영역의 그 무엇도 아니며, 단순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영도성(?)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해 생산되고 육성되어야 하는 피 지배 계급의 생산기지로 전락했을 뿐이다.
이제 새롭게, 아니 완전히 다르게 시작을 해야 한다.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인간이 착취를 당하는 사회, 과학기술혁명의 성과가 전체 인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 지배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착취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사회, 인류 공동체가 책임지고 함께 모색해야 할 교육이 계급사회를 옹호하고 피 지배 계급을 생산하는 기지로 전락한 사회.
이제는 아주 새롭게 시작을 해야 한다.
기존의 사고와 관념을 다 버리고 아주 새롭게 상상을 시작하자.
인간의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돌아가기 힘들고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아 산을 뚫기 위해 만들었던 다이너마이트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용이한 수단으로 사용이 됨을 반성하면서 번 돈을 다 꼴아 박아 노벨 재단을 만들었다는 노벨의 오류를 이제는 더 이상 반복하지 말자.
인간의 착취를 위한 생산력 발전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지배수단으로서의 과학기술혁명이 아니라, 지배 - 피 지배가 완전한 것 인 양 치장하는 교육이 아니라 아주 새로운 상상을 통해 아주 새롭게 시작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그림과 상을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산력을,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계급이 없는 사회를 아름답게 그리는 교육을, 계급으로부터 역사발전이 신음하는 사회가 아닌 아주 새로운 세상 건설을 위해 투여해야 하며 인간사회가 생산한 수많은 업적을 이제 하나의 계급이 아닌 인간에게 되돌리는 새로운 역사를 건설하는 노동으로, 투쟁으로 일어서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의 교육은 계급이 없는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망상적 계급사회의 우월성을 교조적으로 주입시키고, 이러한 계급사회에서 몇 안 되는 지배계급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자본주의 사회의 주류 가치인 경쟁과 대립을 교육의 형식에서부터 내용까지 주입시킴으로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유지의 첨병의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자본주의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계급사회 그 자체가 극단적으로 달려가면서, 교육 또한 상술한 자본주의 교육 그 자체의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본 시장의 기능으로서의 역할 또한 강제적으로 부여 받게 된다.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한 교육의 변화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것에 부족하여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돈이 돈을 먹는 상업 은행 자본 중심으로 그 무개 중심이 이전되어 왔고, 이제는 돈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권리를 상품화 하여, 시골동네 뻥튀기 장수처럼, 또 다른 상품으로 수차례의 뻥을 튀겨 이윤을 획득하는 금융 투기 자본 중심으로 그 무개중심을 이전시켜 오면서 발전하였다.
결국 이러한 투기금융자본 중심의 자본주의는 이제 그 어느 자본의 권리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돌고 돌아 투기금융자본이 산업자본과는 무관한것인양 사회발전의 재앙으로 등장하면서 이놈의 자본주의 체제는 극을 달리고 있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발전과 함께 교육은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산업자본과 상업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은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의 우월성과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그의 기제로서 그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역할은 교육 내용뿐만이 아니라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다수의 피 지배계급의 운명처럼 1등을 위해 다수가 존재하는 평등을 가장한 냉엄한 계급사회의 논리를 교육현장의 형식적 체계로까지 강제 당해왔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의 교육이 투기금융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이제 이데올로그 기제로서의 교육현장, 1등을 위해 다수가 존재해야 하는 형식 논리적 교육현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품 그 자체로서의 교육현장을 요구받고 있다. 교육을 상품화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최소한의 평등권인 일국의 국민 자녀가 교육 받을 권리를 자본의 소유 여부에 따라 피 지배 계급 자녀의 교육권은 박탈하고 그나마 계급사회에서 형식적 중재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변했건 자본주의사회의 국가권력이 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정책은 그래도 좋았다.!?!?!?!
고교등급제, 기여 입학제, 본고사를 금지하는 3불 정책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은 그나마 좋았다. 라고 이야기 할 동지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4월15일 학교 자율화 조치로 표현되는 이명박 정권의 경쟁과 대립 중심의 교육 정책보다는 그래도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이 좋았던 것은 아니냐? 라고 반문하실 동지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웃긴 것은 노무현 정권 때도 그랬고 그 이전인 김대중 정권 때도 그랬고 지금 이명박 정권 때도 마찬가지로 경쟁과 대립의 학교 교육으로 인해 매년 우리들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슬픔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물론 노무현 정권 때는 그래도 고딩이 자살을 했고 이명박 정권 때는 초딩이 자살을 했으니까 노무현정권이 그나마 더 좋은 것 아니냐? 라고 반문 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소위 SKY 대학이라 불리는 특정한 대학 중심으로 한국 대학이 서열화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고교 평준화는 이름뿐이다. 더구나 고교 평준화라는 이름 속에 수많은 특수목적고와 외국어고등학교 신설은 그 이름과 무관하게 특정한 1등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입시학원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이렇게 서열화 되어 있는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사교육 현장을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중딩의 모습이 바로 노무현 식의 3불 정책일 뿐이었다.
물론 이명박 정권은 기왕 고교가 서열화 되어 있으니까 사문화된 고교 등급제를 폐지하고, 대학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공립대학 법인화를 통해 자본들에게 매각하고 대학의 원활한 돈벌이를 위해 기여 입학제를 그리고 학생선발권을 학교당국에게 주는 본고사를 부활하기 위해서 3불 금지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보다 더 발광하고 있음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아하, 참 그리고 무척 중요한 중학교 입시 부활을 위해 국제중학교 설립 및 초, 중, 고딩을 상대로 한 전국적 일제고사 실시 및 그 성적 공개로 전국의 아이들을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학교 또한 줄을 세우겠다는 원대한 꿈(?)은 분명 노무현 정권과는 다른 이명박 정권만의 교육 정책인 것을 틀림이 없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이나 이명박 정권의 그것이나 대학을 일부 대학 중심으로 줄을 세우고 이에 맞추어 초중고교를 줄을 세우기 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영원함을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그의 기제로서의 교육과 1등만을 위한 교육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단지 차이라면 특목고, 외국어 설립을 통해 고교의 실질적 서열화 및 고교 입시를 부활을 노무현 정권이 주창했다면 이명박 정권은 국제중 설립과 일제고사 실시를 통해 중학교 입시제도 부활 및 대 놓고 점수 공개를 통해 전체를 서열화 하고자 한다는 점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결국 50보 100보의 차이일 뿐 아닌가?
참, 굳이 또 다른 차이를 이야기 하라면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자본주의 체제가 유일무이한 사회 체제이며 영원히 발전할 것이라고 교육현장을 통해 내용을 강제한 점에서는 동일하나 제국주의 2차 대전 이후 한반도 정부수립의 과정에서 반민특위 활동을 미친 듯이 때려잡았던 이승만 정권을 놓고 한쪽은 부정을 또 다른 한쪽은 긍정을 하는 역사 교과서 시각에 대한 차이 수준일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과 한국 교육의 현실
이명박 정권은 취임식에서 “선진화를 위해서는 인재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교육정책의 방향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야 한다고 ” 주장을 하면서 이명박 정권 인수위에서 밝혔듯이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은 대학입시 자율화 정책과 고교다양화 300프로젝트, 그리고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으로 그 내용이 모아지고 있다. 경쟁과 자율, 선택과 집중,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구호아래 추진되고 있는 이몀박 정권의 교육 정책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결국 교육의 시장화이며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최적점에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정부(교과부)에서 관장했던 교육정책 관련한 권한을 대학교육의 경우 대학교육발전협의회 (대교협)로 초중고교 및 사회 교육은 시도 교육감 협의회로 이관하면서 기존의 교육부를 없애고 인재과학부와 교육과학기술부로 재편하였다.
대학의 경우 정부가 관장하는 국공립 대학의 경우 법인화를 통해 민영화 사업을 추진하고 대학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학생 선발권을 대학 당국(대교협)에게 이관을 함으로써 대학 입시제도의 살인적 경쟁의식을 더욱 더 부추지고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초중고교의 획일화된 일제고사 실시 및 그 성적의 공개로 인해 전체 학생과 학교의 점수로 인한 서열화 작업과 더불어 외고 및 특목고 확대 강화를 통해 고교 평준화를 실질적으로 해체하고 국제중 신설 등을 통해 중학교 입시, 고등학교 입시제도 부활까지 예견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학교 평준화 해체 작업은 일제고사 실시 및 특정한 학교 신설을 통한 작업과 동시에 학교 교육 노동자들의 평가를 통하여 학교와 학생 그리고 선생에 대한 전 방위적 서열화 작업을 추진이 되고 있다.
결국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의 일편적인 서열화 작업 및 입시제도 부활은 결국 지난 달 성적 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초등학생의 시신을 더욱 더 차디차게 만들 뿐이며 전 세계적으로 20조원이라는 최고의 액수를 사교육 시장에 쏟아 붇는 한국의 사교육 시장에 있어 노동자 민중의 살림살이는 더욱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금 더 삶과 밀접하게 이명박 정권의 교육 정책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정권 출범 이후 이명박 정권은 지난 4월 15일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의 커다란 그림을 “학교 자율화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노동자 민중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계급사회에서의 자본주의 체제 유지 및 지배계급의 재생산 기지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교육의 기제를 이제 이명박 정권은 대한민국이라는 주식회사의 CEO답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돈벌이의 장으로까지 활용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단 1명의 일등을 위해 모든 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웃긴 것은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경쟁과 대립이라는 구도에서 패배자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열심히 하면 1등이 될 수 있다는 환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된다. ‘개천에서 용난다’ 지금도 촌 동네 가면 동네 입구에 “00자녀 00대학교 입학 경축” 이라는 현수막이 그럴싸하게 걸려 있다.
그래 맞다. 맞아 그러나 이제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소위 SKY 대학 및 주요 수도권 소재 대학 의대, 치대, 한의대 입학생 부모들의 소득수준을 보면 2006년 월 400만 원 이상의 부모를 둔 입학생이 20%를 넘고 있으며, 200만 원대 미만의 월 소득을 둔 부모의 자녀는 4%초 채 안 되는 통계치를 보면 “개천에서 용이 아니라 지렁이도 나올 수 없는 상황”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어디 이뿐인가? 말 나온 김에 오랜쥐 이야기도 해보자
소위 조기유학이라 해서 어릴 때 몇 년 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아이들이 있다. 조기육학은 아니더라도 방학 때 되면 호주건 캐나다 미국등지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는 아이들이 있다. 물론 돈이 안 되어 미국 등은 못가더라도 동아시아권이라도 아이들 어학연수를 다녀온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노동자 민중의 이야기는 아니다.
노동자 민중은 살림살이가 조금 괜찮다면 영어전문학원이나 개인 또는 그룹별 과외 정도라고 시킨다. 이도 안 되면 재능, 대교, 빨간팬 등 방문학습지라도 시킨다. 영어 관련해서 말이다. 문제는 다수의 노동자 민중의 자녀는 영어 관련해서 별도의 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학교 근처 조그마한 보습학원에서 전 과목 대상으로 한 학원을 다니는 정도이며 이도 안 되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주는 CD나 TAPE가지고 집에서 영어 학습 하는 경우일 것이다. 물론 다수의 노동자 민중의 자녀들은 아예 영어공부를 포기하는 아이 또한 매우 많은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이렇게 사교육비 사용에 대해 계급적으로 확연하게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1/N으로 나누거나 총액으로 했을 때는 무지 많이 투여하는 듯한 통계치가 나오곤 한다. 실재로 지난 2007년 한국의 사교육비는 20조 400억 원에 이르며 이는 OECD가입 국가 중 최고의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는 나라라는 명예(?)로운 영광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아주 새롭게 시작을 하자
매년 11월만 되면 한국은 몇 가지 사건을 들썩 거린다. 전태일 열사를 기리며 그해의 투쟁의 과제와 1년 투쟁을 결산하는 전국 노동자 대회, 지난 12년 공교육 과정과 나머지 태교부터 시작된 20년 정도 되는 사교육 과정을 결판내는 대학 수능 시험, 그리고 시험에도 안 나오고 노조 소식지에도 안 나오는 수능 시험 전후로 해서 매년 평균 4-5명의 고딩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까지 한국은 11월만 되면 들썩 거린다.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을 보는 일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매년 20% 가까운 대학이 미달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20%에 가까운 입시생들이 입학을 포기하고 다시금 입시를 준비한다고 한다. 이중에 몇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대학이 부족하고 들어가려고 하는 입학생이 많으면 이를 선발하기 위한 선발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아니 입학생보다 대학이 부족하면 대학을 더 만들면 된다. 대학을 충분하게 만들어 모든 노동자 민중의 자녀들이 대학을 입학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시금 내년을 준비하고 대학은 대학대로 20% 이상의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일까?
이렇게 대학이 살인적인 입시의 한 복판에 있다 보니까 이를 준비하는 고등학교는 철저하게 대학 입시를 중심으로 편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 시키는 고등학교는 무조건 좋은 고등학교.
중학교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 많이 입학시키는 좋은 고등학교를 많이 보내는 중학교는 무조건 좋은 중학교다. 물론 이러한 좋은 중학교를 많이 입학시키는 초등학교가 좋은 초등학교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다.
결국 좋은 초등학교,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내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한국의 2가지 풍경중 하나인 밤 12시가 넘어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학원가로, 사교육시장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또 한 가지 풍경은 밤 12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술집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야기 한다. 공교육이 제대로 자기 역할을 못하니까 사교육을 시키는 것 아니냐? 라고 말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분명하게 사교육의 문제는 공교육의 자기역할 부재가 아니가 공교육이 어떻게 하던 그것과 무관하게 철저하게 체계화된 입시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대학입시로 인해 공교육 또한 입시 준비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며, 사교육 시장이 증대될 수밖에 없는 물적 토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투쟁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투기금융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미국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유럽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이 되면서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허둥지둥 구제금융 투입 및 은행 국유화 등을 통해 면해 보려고 하는 세계 자본가계급의 안타까움(?)은 있으나 결국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발상과 상상을 동원하지 않으면 80억 인구의 사회체제로부터의 고통은 해소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서 교육 투쟁의 기조는 당연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는 요구와 상을 제시하며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세상은 짜여 있는 체계가 아니고 만들어져 있는 상 또한 아니다. 현실의 투쟁 과제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며 현재 발 딛고 있는 우리의 투쟁 과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아름다운 세상인 것이다.
대학 입시로부터 모든 것이 규정되어져 있는 한국교육의 현실을 대학 입시제도는 그대로 둔채 예를 들어 노무현 식의 3불 정책을 유지한다고 그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인가? 한국의 대학 입시 제도를 건드리지 않고 초중고교의 서열화 저지 투쟁이 그 어떤 의미와 향후 과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대학 입시 제도를 건드리지 않고 20조가 넘는 사교육 시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물론 대학 입시 제도를 건드린다고 모든 것은 해결되지 않음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그 기제로서의 교육현장, 자본주의여 영원하라! 를 쉼 없이 외쳐대는 한국의 교육현장을 극복하는 투쟁은 대학입시제도 폐지 투쟁과는 어찌 보면 다른 영역의 투쟁 과제일수 있다.
문제는 모든 것은 해결할 수 없어도 최소한 현재 발생되고 있는 수많은 현실적 모순을 극복함에 있어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면 당연하게 한국의 교육 투쟁의 방향은 대학 입시제도의 전면적 폐지 투쟁으로 집중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입시제도 폐지 투쟁?
자녀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시기가 되면 대부분의 노동자 민중은 집에서 가까운 학교라는 물리적 거리라는 조건을 선택의 주요한 기준으로 판단을 할 것이다. 물론 중학교와 고등학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 우리 모두 두 눈을 꼭 감고 대학 선택의 기준이 집에서 수십, 수백km 떨어져 있는 관악산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을 그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자.
관악산에 없고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해서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다른 학교보다 학력이 떨어지나?, 아니면 쪽팔리나?
대학의 입시 제도를 어떻게 폐지 할 것인가? 대학의 입시제도가 폐지되려면 현재의 초중고교처럼 대학의 평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한국의 대학은 사회와 동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한국 사회의 주류계층이라 불리는 지배계층으로 진입하는 진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대학의 평준화는 사회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전에는 어렵다는 결론이 도달하며, 사회의 계급적 분화가 해소되기 전에는 쉽지만은 않은 과제이다.
그렇다고, 계급을 해소하고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근절하지 전까지, 매년 4-5명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수많은 사교육 시장에서 우리들의 아이들을 내 맡기고, 수십, 수백일간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임금 인상분을 고스란히 학원 원장에게 가져다 바쳐야 하는 악순환을 계속 할 것인가?
사회의 주류층의 진입구로의 대학, 그리고 이러한 대학의 서열화로 인해 초중고교의 서열화, 보다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바쳐야 하는 임금, 전 세계 어느 아이들보다도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잘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의 건강권, 이제 하나의 통으로 바꾸기 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
우선 의사, 판검사, 공무원, 교육노동자등 사회의 공적 노동을 담당하는 공적 노동자들은 동일 노동과 동일 임금의 원칙하에 전체 국가가 관리 운영하는 체계를 구축하자. 그리고 나서 이러한 공적 노동자를 육성하는 국공립 대학을 전국 단위에서 건설하자. 그리고 이러한 국공립 대학의 입시전형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입학하듯이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자. 쉽지 않은가?
최소한의 사회적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더라도 전체 사회공동체를 위한 노동을 행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하에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의무교육의 형태를 빌어 육성하자. 그리고 이러한 국공립 대학을 위해 국가와 사회의 교육 재정을 전면적으로 투입하고 지원하자.
결국 현실의 아픔으로부터 시작되는 교육 투쟁은 새로운 사회체계의 상과 그림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며 이러한 출발이 결국 새로운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의 교육의 상을 그려내는 준비운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인당 2만 불 시대라고 한다. 4인 1가족이라 하면 한가족당 8만 불이다. 지배계급처럼 넉넉하게 살지는 못해도 이렇게 죽지 못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가고 싶은 대학을 못가 매년 젊은이 4-5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노동자 임금의 40% 이상을 사교육비로 사용하는 이 야만스럽고 지긋지긋한 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끝장을 내야 한다.
아니 끝장을 못내도 최소한 죽은 이들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단지 먼저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의 투쟁 과제임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00지역노조도 생기고 여성노조도 생기고 일반노조도 생기고 있으며 투쟁을 한다. 한축에서는 실업자 노조 건설을 위한 깃발을 제작하고 있기도 하다. 학부모 노조는 어떨까?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교육 정책에 대해 조직의 이름으로 한판 동을 뜨는 싸움판을 그려보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반갑습니다. 학교 운영위원을 맡고 있으면서 큰딸이 1학년에 다니고 있는 김태균입니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학교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학교운영위원회에 구성원으로 당선 된지도 벌써 한 학기가 흘러가고 있는 상황인 듯합니다.
우선 제가 학교운영위원으로 출마하면서 여러 학부모님들 앞에서 약속했던 몇 가지에 대해 그리고 제가 생각하고 있던 학교 운영위원으로서의 학교 운영에 대해 몇 가지 저의 생각이 그럴듯한 성과와 결과도 없이 반년이 흘렀다는 점에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학기 초에 있었던 학교운영위원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학교운영위원으로서 활동을 하면서 최소한 산남중학교에서만은 이러한 점을 고쳐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가 학부모로서 내야 되는 각종 납부금을 내지 않는 학교로 만들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학교운영위원으로 당선되면 00만원씩 학교운영위원 회비로 납부를 해야 하며 우리의 아이가 학교에서 학생회장 등 학생회 간부로 당선이 되 던지 아니면 반에서 반장 등을 하게 되면 학부모는 당연하게 학교에 일정한 금액을 내야 한다든지 하는 식의 행위들은 없애겠다는 것이 저의 첫 번째 학부모님들에게 약속했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의무교육기관으로서 중학교 교육기관은 당연하게 무상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판 단하에 학부모님들이 4-5만 원 정도씩 되는 금액을 분기마다 학교에 납부하고 있는 즉 1년에 2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을 납부하고 있는 상황이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 하겠다고 여러 학부모님들 앞에서 선거 공약으로 약속한 바가 있는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이후 지난 4월 15일 새로운 정부인 이명박 대통령께서 그간 촌지 지급 등 여러 가지 학교 규제 조치 관련해서 '학교 자율'이라는 미명하게 규제조치를 푸는 정책을 발표하고 9시 이전에 정규수업이 진행될 수 있는 0교시 수업과 우등생 열등생을 별도의 반으로 운영하는 우열반 편성 건 등 다양한 교육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솔직히 산남중학교 학교운영위원으로서 과연 이러한 조건 속에서 여러 학부모님들에게 약속했던 내용들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또한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면서 가장 먼저 학교급식과 군부대 급식에 투입이 된다는 이야기부터 특목고, 자사고 신설 등을 통해 고등학교 평준화를 해체하여 실질적인 고교 입시 제도를 부활시키겠다는 이명박 대통령님과 경기교육청의 각종 정책내용 발표는 일개 산남중학교 학교운영위원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 하는 자괴감마저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학교운영위원으로 당선된 이후 의욕을 가지고 많은 일들을 하려고 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의 재정적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교복 공동구매 사업과 졸업앨범 공개입찰 사업은 비록 준비 여건이 만만치 않아 다음 기회로 넘기기는 했지만 부족하나마 열심히 하려고 스스로 자위하는 사업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 학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각 반별 학부모 모임 등을 통한 금전 거출 움직임이나 20만원이 넘는 학교운영지원금 관련한 대책 마련 등은 전혀 진행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물론 교장 선생님 이하 학교에서 많은 신경을 쓰시고는 계시지만 광우병 관련한 학교 급식 대책 및 한 여름 에어컨 등 난방 문제 등은 전혀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논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또한 (물론 이 부분은 학교운영위원회 내에서도 이견이 있었지만) 2학년 수학여행을 폐기하고 파주 영어마을로 연수를 결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결정은 있었지만 여전히 저는 이견을 가지고 있는 실례이기도 합니다.
경기도에서 말도 안 되는 근거로 파주, 안산, 양평 등 도내 영어마을을 개소하고 운영을 하다가 운영의 적자와 많은 시민사회 단체 및 학부모님들의 반대에 의해 일반 기업에게 파는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산남중학교를 비롯해서 다수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매년 갔던 수학여행을 폐기하고 영어마을로 연수를 가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적 측면보다 경기도라는 지자체의 정책적 오류로 인해 영어마을을 민영화 하는 과정에 민영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즉 영어마을의 적자폭을 해소해 주기 위한 '수학여행 대신 영어마을 연수' 과정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여전히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제 반년이라 흘렀네요.
아니 겨우 반년밖에 흐르지 않았네요. 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학교운영위원회와 학교운영위원으로서의 학부모의 입장에서 많이 부족하고 어려운 점들은 많았는데 그중 가장 큰 어려움은 제가 판단하고 있는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어려 학부모님들과 소통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도의 알림장을 각 가정으로 보내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며 그렇다고 직접 유선으로 의견을 청취하기도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 소통의 어려움은 저 뿐만 아니라 교장선생님 이하 많은 운영위원님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많은 학부모님들의 의견이 확인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저 또한 의견 청취를 위한 다양한 문제제기 또한 해야 되는 것은 분명하구요
날씨가 매우 덥네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우리들의 아이들은 찬물이 없으면 도저히 수업을 들을 수가 없고 선생님들 또한 수업을 할 수가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묵묵히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들과 우리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학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라는 고민을 쉼 없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많은 의견 주시고 저 또한 끊임없이 여러 학부모님들의 고견 청취하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7월 14일
산남중학교 학교운영위원회 위원 김태균(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가 출범하면서
김태균(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상임대표)
1.
지난 2008년 5월 15일은 제27주년을 맞는 스승의 날이었다. 이날 민주노총 1층 회의실에서는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바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창립대회였다.
기존의 학부모 행사나 교육단체 행사와는 달리 이날 창립대회는 민주노총, 노동전선, 노동자의 힘 등 노동운동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동지들과 함께 기존의 교육운동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동지들이 참여 했다.
노동자 민중이 이제 교육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서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이다.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는 지난 06년 11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중단과 교육양극화 해소 공교육 강화를 촉구하는 학부모 선언]을 시작으로 조직 건설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자본과 정권은 교원평가제, 차등성과급제 도입 등 교육현장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고, 이에 대해 전교조 동지 중 일부 활동가 동지들 중심으로 힘겹게 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였다.
전교조 동지들 이외 노동운동 진영은 교육 운동에 대해 기본적인 무관심과 함께 교육운동의 일 주체라 주장 하는 학부모 단체 또한 각각의 조건에서 교원평가제 도입 등 신자유주의 교육현장 재편에 대해 찬성 또는 조건부 반대 등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교육현장에 대한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해 혼란과 혼돈 의 역사 즉, 올바른 대응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교육현장을 중심에 놓고 벌어지고 있는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공세와 이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대응 투쟁이 진행이 되고는 있지만 전 계급적 사안으로 투쟁 전선을 배치하고 전개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00여명의 노동자 민중운동 활동가들이 학부모라는 이름으로 교원평가제, 차등성과급제 도입 반대 및 교육현장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반대를 선언하면서 2006년 11월 17일 학부모 선언을 조직하였다.
이후 학부모 선언을 조직했던 주체들은 현재의 교육현장을 둘러싼 신자유주의 공세에 전면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교육운동 주체 건설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 그 이듬해인 2007년 2월 28일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해 7월 23일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준비위원회” 출범식을 가지고 이제는 노동자 계급의 이름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하고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의 영역에서 계급적 전선을 확고하기 칠 것을 결의한 것이다.
180여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출범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준비위원회”는 출범과 동시에 한국 사회 공교육 파탄의 주범이 바로 대학 입시제도 및 대학 서열화에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입시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 건설을 제안하고 국민운동본부에 대표 및 집행력 배치와 함께 [입시폐지/대학평준화]의 깃발을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준비위원회” 본 조직 건설 사업에 주요 사업으로 배치하면서 조직 건설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후 준비위원회는 입시폐지 대학 평준화 학부모 선언을 조직했으며, 민중학부모회 지역조직 건설을 위한 지역조직 담당자 전국 회의 및 운영위원회 회의 등을 진행하였다.
2007년 12월 대선투쟁을 전후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준비위원회” 는 대선후보 교육 공약 검토 워크샵, 기자회견 등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각 정치세력의 교육 공약 비교 및 선전과 함께 대통령 선거라는 열린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입시폐지/대학평준화”의 깃발을 휘 날렸다.
이후 충남 아산, 천안, 강원, 대구, 안산, 과천, 수원, 충북,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교육운동 영역에 있어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힘차게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준비위원회” 각 지역조직 건설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논의와 함께 각 지역별 선전전, 서명운동 등 실천사업들이 전개되었다.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준비위원회”은 지역별 조직 건설 및 대선에 참여하고 있는 각 부르조아 정치세력이 제출하고 있는 교육 공약에 대한 분석 및 대안 마련, 그리고 “입시폐지 대학평준화”투쟁에 이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공공부문 시장화 저지 공동투쟁본부” 참여, 일제고사 부활 저지 투쟁 투쟁과 대학 등록금 관련 투쟁, 이명박 정권의 4-15 학교 자율화 정책 저지 투쟁을 위한 전국 1인 시위 등 조직의 역량에 비해 조금은 힘겹지만 힘 있게 투쟁들을 전개해 왔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비로서 지난 2008년 5월 15일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 준비위원회”의 깃발을 내리고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가 출범 한 것이다.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짧게는 2006년 11월 학부모 선언을 시작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길게는 지난 1987년 대 노동자 대 투쟁의 성과물을 이어 받은 것이며 좀 더 넓게는 1940년대 선배 노동자들의 교육운동의 넋을 이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 사회 학부모 운동을 지향하는 조직은 매우 많다. 그리고 교육 운동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조직 또한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를 건설한 것인가?, 또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우리 스스로 답을 구하지 못하면 결국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스스로 자기 존립 근거를 가지지 못하는 조직이 될 것이다.
인류는 노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자유의 영역을 넓혀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계급이 없던 시대는 인류가 자연을 대상으로 노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인류의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고 발전시켜 왔었다.
그러나 계급 출현 즉, 지배하는 인간과 지배를 받는 인간이 출현하면서 지배계급은 피 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자연 또한 그 수단으로 활동해 왔으며, 계급사회에서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인류의 역사는 자연이 아닌 지배계급을 상대로 한 피 지배계급의 계급투쟁의 역사였으며, 인간의 노동 또한 자연을 상대로 한 확장의 의미의 노동이 아닌 지배계급을 상대로 한 투쟁의 의미로서의 노동이 존재해 왔다.
자연만이 아니였다. 교육의 영역처럼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영역과 공간 또한 지배계급이 피 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계급사회이며 그 첨예함이 가장 치열한 사회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 구조이며 교육의 영역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영역이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영역이란 그 다른 영역과 다름없이 철저하게 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에 복무하며 활용이 되고 있는 영역이다. 아니 어찌 보면 그 어떤 영역보다 첨예하게 계급적 이해가 대립되고 있는 영역이 바로 교육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만이 모든 인류가 만든 사회체제에서 가장 탁월한 사회구조이며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영원할 것이다, 라는 광신적 믿음을 강요하고 요구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 영역인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교육의 내용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경쟁과 대립이라는 운영의 원리를 교육 현장에서 훈련시키며 이것이 선(善)인양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 또한 자본주의에서의 교육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면서 순응하고 종속적인 인류의 역사발전의 원동력인 노동(투쟁)력을 거세하는 공간 또한 바로 교육 영역인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교육 현장을 이제는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고자 할 뿐이다. 이명박 정권의 지난 4-15 학교 자율화 정책은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영삼 정권 시절 주창했던 신자유주의적 교육현장 재편 정책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 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에 복무한다는 교육영역의 자기 존재적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교육 재편 정책은 상술한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교육의 역할과 더불어 교육 현장 또한 이윤 추구의 장(교육 시장화)으로서의 교육현장의 재편이라는 의미에서 그 심각성의 노골화는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습은 교육의 영역조차 이윤추구의 장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지배계급 즉 부르조아 계급의 이윤추구의 영역의 축소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출범을 하였다.
즉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체제가 인류가 생산한 최고의 사회체제라고 주장하고 있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와 그 각종 아류에 대해 반대한다.
아니 반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이며 작금의 신자우주의 각종 정책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현재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각종 야만적인 반 인류적 행위에 대해 새로운 사회만이 그 대안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당장에는 자본주의 교육영역조차 이윤추구의 장으로 돌리려는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전면적으로 반대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장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자본주의 교육영역을 인간의 아름다움이 넘실거리는 인간애와 동지애 협동력으로 충만 되는 교육현장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새로운 사회만이 인간성을 발현하는 진정한 교육현장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하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에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매진할 것이다.
3.
이제 약 200여명의 동지들이 선언을 했다. 새로운 사회 건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분쇄를 위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건설이 이제는 전국 각지에서 희망찬 반란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아직은 시작이라 생각한다. “시작은 비록 미천하고 부족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어느 책 구절이 있지만 그 “창대”를 만드는 것 또한 몇 번의 기도가 아닌 결의에 찬 실천만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200여명의 동지들이 시작했다.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의 산술처럼 200명의 힘이 아닌 2,000명, 20,000명의 힘을 내는 것 또한 노동자 민중의 영웅적인 힘이라 믿고 있다.
아산을 시작으로 천안으로 이어지고 있는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각 지역조직 건설이 이제는 저 멀리 호남의 구례에서 영남의 포항까지 강원 고성에서 충청의 보령까지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붉은 깃발을 휘날리자.
4. 한마디 더
광우병에 미친 미국산 쇠고기 수입, 0교시, 우열반등 4-15 학원 자율화 정책, 대운하 정책, 가스 - 물 사유화 정책, 공기업 및 공공기관 민영화 정책, 금산법 및 자통법 개악을 통한 금융시장 개방화 정책, 전 산업에 걸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 국경과 국가간 차이를 무색해 하는 각종 FTA 협정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야만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치고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각 영역에서 기본적으로 대응을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각 영역별 대응 수준을 가지고는 자본과 정권이 그 스스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공세를 무력화 할 수는 없다.
모든 영역에 있어 신자유주의 분쇄! 민중생존권 쟁취! 투쟁의 이름으로 단일한 노동자 민중적 연합 전선을 확고히 치고 투쟁을 전개해야만이 가능한 일이다.
지역에서는 각 영역별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노동자조직, 농민조직, 지역주민, 시민 조직, 공기업, 공공기관 노동자 조직, 교육운동 주체,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지역조직 등 각 영역에서 모든 노동자 민중이 함께 단일한 요구로 공동의 투쟁 주체를 형성해야 한다.
중앙에서는 각 지역별 조직과 중앙단위 부문별 영역별 대응 조직이 하나로 묶여 신자유주의 반대! 민영화 반대! 개방화 반대! 등 다양한 영역의 요구를 하나로 모아 전국적 단일 투쟁체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조직 건설과 투쟁체 건설의 과정에서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건설을 위해 결집된 200여명의 동지들이 헌신하자 그리고 조직하자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각 지역별 조직 건설 사업을 바로 당면한 투쟁의 과정에서 지역조직 건설 사업으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중앙조직 또한 전국적 전선을 치고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 복무해야 하며 이러한 중앙조직의 활동과 역할이 각 지역별 조직 건설에 복무하는 길일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교육운동의 주체를 선언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당당한 그 한길에 전국의 동지들이 함께 했으면 한다.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만세”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만만세”
금융산업에 대한 이해와 계급 운동 진영의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한 제안적 메모
08/3/20김태균
- 산업자본 :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비 금융권 자본
- 금융자본 :
-> 협의로 정의된 상업은행 자본(은행자본)
-> 광의적 개념으로 비은행 금융권까지 포함
예) 한국의 소유규제는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는 규제되지만 소위 2차 금융권이라 할수 있는 비 은행 자본의 소유는 인정하는 형태
* 통계청에서는 광공업과 서비스업으로 산업을 구분하고 광공업은 제조업, 반도체및부품, 자동차, 영상음향통신, 화학제품으로 구분. 서비스업은 금융및 보험업,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운수업, 사업서비스업, 도소매업, 교육서비스업, 통신업, 오락문화 운동관련, 부동산 및임대업, 숙박 및 음식업, 기타 등으로 구분한다.
* 본 자료에서는 금융자본이라 함은 은행자본 뿐만이 아니라 증권 보험업 자본도 포괄하는 광의적 개념을 사용함
- 현재 한국의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관계
산업자본 <-----------------------> 금융자본
<-------소유 제한-------> 1차 금융권(은행자본)
<-------소유허용--------> 2차 금융권(증권,보험자본)
* 금산법 : 산업자본과 전체 금융자본간의 규제 관계를 대상으로 하며 현재 금산법상 산업자본이 2차 금융권의 소유를 인정하되 1차 금융권의 소유는 규제하고 있는 상황임. 금산법 완화 및 철폐를 주장하는 내용은 1차 금융권까지 소유 규제를 철폐하자는 내용임.
* 자통법 : 금융자본 중 은행업과 증권업간의 독자적 시장 규제를 철폐하자는 것이며 현재 적용되고 있는 상황임.
* 보험업법 : 금융자본 중 은행업과 보험업간의 독자적 시장 규제를 철폐하자는 것이며 현재 개악 논의 중
-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관계
1) 산업자본 :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의 전화 0% : 산업자본으로서의 이익창출의 기대치가 높음
2) 산업자본+금융자본 : 산업자본의 금융자본과의 관계 모호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의 전화?% : 산업자본의 일부만 금융자본으로의 투자
3) 금융자본 :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의 전화 100% : 금융자본으로서의 이익창출의 기대치가 높음
참조 : 금융자본의 지배구조와 대리인 관계
금융기관은 독자적 자본을 가지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본을 조달하여 이를 산업자본가에게 대출해 주는 역할을 하며 이때 대출의 공정성(?)으로 인해 즉 특정한 산업자본가에게만의 대출이라는 문제를 방지하고자 금융기관의 공적 개입과 통제의 필요성이 대두
예) 미국의 은행 지주회사법(BHCA)상 금지사항
-> 결과적으로 어떤 회사가 은행지주회사가 되도록 하는 행위
-> 결과적으로 은행이 어떤 은행지주회사의 자회사가 되도록 하는 행위
-> 어떤 은행지주회사가 임의의 은행에 대해 주식을 취득한 결과 해당 은행의 의결권 있는 주식의 5% 이상을 직접 혹은 간접의 방법으로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결과가 초래된 경우
-> 어떤 은행지주회사나 은행이 아닌 그 자회사가 어떤 은행의 자산ㅇ의 전부 혹은 거의 대부분을 취득하는 행위
-> 어떤 은행지주회사가 다른 은행지주회사와 합병하는 경우
- 한국 법상 금융자본과 산업자본간의 관계
1) 금융지주회사법
- 00년 12월 국회에서 금융지주회사법(미국의 BHCA과 비슷) 이 통과됨.
- 이법에 의해 00년 4월 한빛은행, 평화은행, 경남은행, 광주은행과 하나로 종금이 설립한 우리금융지주주식회사 출범(최초)
- 미국의 BHCA상 금융지주회사는 우수한 은행지주회사에 대해 주어지는 일종의 선물 개념이기 때문에 금융지주회사 출범 이후 영업과정으로 통해 사후에 부실화 될수는 있으나 출범 초기에는 부실할수는 없으나 한국의 금융지주회사법은 특례규정으로 ‘구조조정시 자회사등이 다른 자회사등에게 담보를 확보하지 않고도 신용공여 및 불량자산을 거래할수 있도록 되어 있어 한국의 금융지주회사는 설립 초기부터 부실한 경영 상태를 가질수 있게 허용되어 있음
- 미국과의 또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미국의 경우 은행을 지배하는 회사는 무조건 금융(은행)지주회사로 정의되어 감독당국의 관리체계에 놓이는 반면 한국의 경우 은행을 지배하는 회사뿐만이 아니라 감독당국의 인가를 받은 회사만이 금융(은행)지주회사로 규정이 됨으로 실질적으로 산업자본이 은행을 지배하더라도 감독당국에게 지주회사로서의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금융지주회사가 아니고 이 법에 적용도 받지 않는다.
2) 공정거래법
- 한국의 공정거래법상 금융지주회사는 일반지주회사(산업자본)의 주식을 취득할수 없게 되어 있으며 역으로 일반지주회사(산업자본)는 금융지주회사의 주식 또한 취득할수 없게 규정되어 있음.
* 공정거래법상 금융지주회사 : 금융업이나 보험업을 영위하는 회사를 지배하는 공정거래법상의 지주회사
- 그러나 일반지주회사가 아닌 계열회사(예를 들면 재벌 등)이 취득시 전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음.
* 금융자본과 산업자본간의 규제를 강화하자는 주장의 논거
- 계열 금융기관과 다른 계열 회사간의 부당내부 거래가 특별히 용이하기 때문
- 강력한 별도의 반독점 규제가 필요하기 때문
- 금융지배는 전체 자본시장을 지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추상적 차원에서 독점 저지를 위해
- 노무현 정권에 이어 이명박 정권의 금융허브화 정책
금융허브화 정책이란 국내 금융시장의 축을 자본시장(직접금융)이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국제 금융시장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함으로써 금융자본의 이익창출의 최대한 보장하고 초국적 금융자본의 국내 금융시장으로의 유입과 더불어 국내 산업자본의 금융시장 유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는 내용임.
* 직접금융과 간접금융
직접금융은 금융상품 구매자가 자신이 구매한 상품의 이동 경로를 확인할수 있는 것. 예를 들면 주식의 경우
간접금융은 금융상품 구매자가 자신이 구매한 상품의 이동 경로를 확인할수 없는 것. 예를 들면 예금 등 은행업
-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의 일반적 경로
1) 금리 자유화 정책 : 91년 11월 1단계 자유화에 이어 93년 11월 2단계 자유화 실시
2) 자본시장(은행)에 대한 규제완화 및 금융의 증권화 :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으로의 이동
3) 금융의 겸업화 및 대형화, 독점화 : 현재 금산법 완화 및 철폐와 자통법 개악 및 보험업법 개정 등을 통해 금융시장내 은행, 증권, 보험 영역의 장벽을 철폐
-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소유 현황
국내 대기업 금융업종의 시장 점유율을 05년 3월 총 자산 기준으로 보면 생보사 75.2%, 손보사 47.6%, 증권사 35.7%, 자산운용사 16.6% 신용카드사 63.9%임.
삼성 05년 총 자산 217조원중 132.8조원이 금융계열사 자산으로 58.6% 차지
- 금융 세계화 관련 현 정세
-> 지난 90년 초 금리자유화 이후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완화 및 금융의 증권화를 통해 금융자본의 극대화된 이윤 창출과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으로의 이전을 일정정도 완료한 한국의 금융시장이 이제는 금산법, 자통법, 보험업법 등 관련 법 개악을 통해 외국 금융자본뿐만이 아니라 한국 굴지의 산업자본의 적극적 유입을 제도화 하고 있는 실정임.
-> 이에 한국 산업자본은 해외로의 이전 및 부동산 투기자본으로의 전화와 맞물려 금융자본으로의 이동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면서 산업시장내 노동현장의 고용불안과 일거리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임.
-> 금융시장내 금융 노동자들 또한 금융자본의 독점화 과정에서의 고용불안과 임금의 압박등 생존권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것임.
->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장을 짓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기본적인 이윤창출의 시스템에서 부동산 투기와 증권시장에서의 투기(직접금융 중심)으로 인해 노동자 민중의 해방 투쟁에 대한 일념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성 문화가 정착되어 가고 있는 실정임.
-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가지고 투쟁할 것인가?
-> 첫 번째 우선적으로 전체 자본의 이동 경로에 대한 분석 작업이 계급운동 진영내에서 활발하게 고민되고 추적되어져야 함. 특이나 기업별 조직화의 역사라고 할수 있는 한국의 노동의 현실속에서 고용의 문제와 직결되는 자본의 이동 경로는 매우 유 의미한 추적 작업임.
-> 두 번째 자본과 정권의 금융 허브화 정책 등 금융시장 관련한 정책에 대한 적극적 고찰과 대응이 제조업 비 제조업 등 산업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 운동 진영에게 요구됨.
-> 발 빠르게 대응안을 내 놓고 있는 사민주의 진영의 대응 방안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계급운동 진영의 올바른 대안이 시급하게 생산될 필요가 있음
* 사회연대기금의 존재적 개념 / 외자유치를 위한 노조의 적극적 행보 / 산업공동화 저지 투쟁의 내용 / 금융공공성 쟁취 투쟁의 의미?!?!??!?!
- 또 다른 한축의 고민
-> 87년 그리고 90년과 00년 등 자본과 정권의 주요한 금융정책 변화에 따른 한국 산업자본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필요가 있음
-> 더불어 금융허브화 정책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속에서의 금융자본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자본과 정권의 금융산업 정책 일반에 대한 적극적 고찰이 요구됨.
-> 자본의 이동 경로와 연동되어 국가 단위의 자본 유치 정책이 아닌 일국에서의 산업을 뛰어넘는 연대의 기풍과 함께 국가를 뛰어넘어 제조업 단위의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적극적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음
진보신당(가칭)과 민주노동당, 노동자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김태균(전국축협노동조합 연대사업국장)
제17대 대선 결과에 따라 소위 진보정당 운동의 재편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당연하게 민주노조 운동을 한다면 민주노동당에게 당연한 지지와 지원을 해야 하며, 그러하지 못하고 있는 현장 조합원 대중들을 민주노동당으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바로 지난 달 까지의 현장 활동가 동지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대선 이후 자주파, 평등파등의 이름이 회자되면서 민주노동당내의 탈당파가 줄을 잇고 결국 지난 3월 2일 진보신당(가칭)이 출범하면서 활동가들을 포함한 현장 조합원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민주노동당에 잔류 할 것인가? 아니면 신당으로 갈 것인가? 그리고 현장 조합원 동지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매우 곤혹스러워 하는 활동가 동지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 것 또한 요즘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매번 현장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이번 기회에 아예 글로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되는데? 라는 질문에 본인은 ‘민주노동당도 아니고 진보신당도 아니도 동지가 바로 정치의 주체로서 어찌 할 것인가?를 고민해라’라는 말로 매번 답을 하고 있는 본인의 구두 답변을 부족하나마 글로써 동지들에게 답을 할까 한다.
이제 명실상부한 이명박 정권의 시대이다.
아예 노골적으로 재벌,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매진하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다짐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짜릿함을 느낄 만큼 공포 스러운 선전포고이다.
모든 것을 기업(자본)의 경쟁력 강화와 그에 따른 경제성장에 종속시키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노골적 재벌, 독점자본의 편향은 법인세 인하, 영어몰입교육, 교육 현장의 시장화, 공기업의 구조조정, 사유화, 대운하로 불리우는 거대화된 토목사업, 능동적 복지 정책 등은 노동자 민중의 삶을 한편에서 예측하고 되 돌아 볼수 있게 하는 궤변이다.
물론 이러한 정책기조는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권부터 시작된 세계화 전략이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재벌, 독점자본만을 위한 정책이었고 단지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 좀 더 노골화 되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자 민중의 주 수입원인 임금을 억제하고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엄정한 법집행과 규제 철폐 그리고 재벌과 독점자본만을 위한 교육 및 복지정책 구축은 결코 기존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조금 더 노골화 되었을 뿐임을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가 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술혁신과 신기술 개발 그리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원감축과 구조조정, 비정규직 중심의 무기계약 형태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일자리 창출 프로젝트는 결국 더 많은 실업의 양상과 질이 떨어지는 고용의 형태만을 나타낼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수 있는 것 아닌가?
웃기는 이야기로 숭례문의 관리 유지 인원조차 민영화(외주화)함으로써 홀라당 태워먹는 모습이 바로 현재의 재벌, 독점자본의 이해에 의해 움직이는 이명박 정권의 참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희망찬 21세기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재벌과 독점자본의 이해와 요구에 의해 5천만 노동자 민중의 삶을 포함한 모든 것을 종속시키는 야만의 21세기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야만의 질주 시대에서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야만’을 지켜보면서 해 깔려 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가칭)이라 불리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모습이다.
현장의 수많은 동지들은 야만의 이명박 정권의 시대에서 단 한줌의 희망이라도 찾고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가칭)으로 기웃거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가칭)이 우리의 희망이자, 대안인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속에 근 10여년을 연명한 민주노동당이 지난 대선 이후 대선 평가의 과정에서 분당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고 있고 지금의 조건을 보면 분당은 예고된 사태라 할수 있다.
친북,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노동자 민중의 정당, 운동권 정당이라는 모습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고 이에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및 노동자 민중의 정당, 운동권 정당이라는 성격을 벗어 던지고 명실상부한 국민의 정당으로 가야 한다고 민주노동당의 탈당파 즉 진보신당은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일정 부분 맞다.
조직 운영에 있어 패권적 모습은 결코 그 어느 진영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패권이라는 미명하에 그나마 민주노동당의 10년의 성과를 폄하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극우적 래드컴플랙스와 국가보안법이라는 파쇼적 탄압에서도 객관적으로 북한을 바라 보려고 하는 진보적 사상의 자유를 폄하해서는 결코 안된다.
소위 자주파 동지들의 친북, 종북주의는 바로 이러한 냉정적 사고를 거부하는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가 이루어 져야 하지만 문제는 자주파 동지들의 노동자 민중을 몰 계급적 민족주의, 몰계급적 애국 국가주의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를 비판하고 있는 소위 평등파 동지들에게도 여전히 자유로울수가 없다. 노동자 민중을 계급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자주파건 평등파건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진보신당(가칭)을 주장하는 동지들은 사실 민주노동당의 실패 원인인 자주파의 친북, 종북주의, 운동권 정당, 민주노총당 등 에서 그 원인을 찾고는 있지만 사실 민주노동당의 실패의 원인은 자주파건 평등파건 민주노동당을 구성했던 동지들이 노동자 민중을 계급으로서 바라보지 못하고 ‘국민’으로 바라보는 몰 계급적 국가주의에서 기인할 뿐이다.
이러한 저들의 시각은 진보신당(가칭)을 창당하는 3월 2일 조차 새롭게 건설되어지는 진보신당은 운동권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명실상부한 국민의 정당 타령을 하는 것으로 재차확인이 되고 있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민중의 정당, 보다 계급적 정당으로 우뚝 서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를 했고 또한 민주노동당의 친북, 종북주의를 비판하며 새롭게 출범하고 있는 진보정당(가칭)조차 이러한 몰 계급적 정당 건설이라는 환상에서 노동자 민중을 현혹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의 갈 길을 가자 저들에게는 저들의 길을 가라고 하면서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바로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지난 10년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되 돌아 보고 다시금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결코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로 전 세계 노동자들을 분리하고 분열하는 오류로부터 단결과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는 하나다 라는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도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제는 분명히 하자
이를 위해서는, 지난 10년의 잘못을 반성하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있는 민주노동당도 아니고 새롭게 건설되어지고 있는 진보신당(가칭) 또한 결코 아닌 것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허물을 벗고 당당하게 노동자 계급의 정당, 운동권 정당임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투쟁을 조직하자
무엇을 대안하고 있는가? 그리고 대안이라는 이름하에 방치되는 공교육의 아이들은?
김태균(노동자의 힘 회원)
“00 동지 혁명의 과정에서 저 놈의 신호등도 국가권력과 마찬가지고 단절하고 파괴해야 하는 대상일까?”
“그건 아닌지. 신호등을 비롯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는 노동자 계급에게 어떻게 환원 시킬 것인가? 라는 고민의 대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잡았을 때 과연 지금처럼 신호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질수 있을까? 이를 위해 저 신호등을 움직이는 주체들을 재 교육 시키고 이를 노동자 계급의 나라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강제해야 되는 것 아녀” 라고 나는 말을 하면서
“그렇다면 현재 소위 공교육이라고 불리우는 교육 시스템은 저 신호등과 같은 체계로 봐야 하는거야 아니면 단죄하고 끊어내야 하는 체계로 보아야 하는거야?”
언젠가 여러 동지들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뒷풀이 장소로 이동하면서 나눈 이야기 이다.
마침 빨간불이 켜져 신호등 앞에서 파란불이 켜지기를 건널목에서 기다리면서 말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어떠할까?
유일한 최종 종착역인 사회에서 지배계층에 진입하고자, 수많은 우리들의 아이들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어 태교 음악을 듣고, 보다 좋은 그리고 조기 교육에 알아준다는 유치원과 놀이방을 보내기 위해 부모들이 새벽잠을 설치며 입학원서를 들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대한민국. 평준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한반의 석차가 분명하게 들어나는 초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과, 이도 모자라 전국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석차로 구분하고자 실시한다는 전국 모의고사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학부모.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수보다 대학 입학생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가고자 하는 학교에 입학을 못해 매년 11월 12월이면 자신의 목숨을 끊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노동자 평균 년봉의 3배가 넘는 6-7천만원을 든다는 대한민국 한 아이의 사교육비, 놀 아이들을 찾아 학원을 가야하는 아이에서부터 보다 좋은 학교을 위한 선 교육을 받기 위해 학원에 가는 아이들까지 굳이 놀이터가 필요 없고 학원만이 장사가 된다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3인 1가족이 다 입주하고도 남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공사가 시작되는 신축 아파트가 있는 나라에서 전 국민의 채 10%도 안 되는 국민이 전체 주택의 90% 가까이 소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아이들을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 10%에 진입시키고자 매년 투쟁한 결과물인 임금인상분을 다 우리 아이들 교육비에 쏟아 붓고 있는 현실이 바로 내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즉 [태아교육 - 유아교육 - 초중등교육 - 고등교육] 모두가 유일하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10%도 채 안되는 지배계급으로 편입하고자 발광을 하는 미친 구조인 것이다.
그냥 꽉 도망이나 갈까?
아니 내가 못 가더라도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외국 유학을 보내 이러한 살인적인 교육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까?
아니면 그냥 집에서 내가 아이들과 함께 가르치며 놀까?
아니면 이렇게 생각하는 동지들과 함께 대안적 공간을 마련하여 이 미친짓의 질주에서 벗어나 볼까?
나는 우리 아이들을 결코 대안학교에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동지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낸다면 결사적으로 막을 생각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우선 첫 번째로 대안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혁명을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느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교육 시스템은 교육 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와 끈적하게 연동 되어 있다. 특이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재 생산하는 기제로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노동자 계급을 육성하는 단위로서의 교육 단위는 작동을 하고 있다. 물론 경쟁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편입 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환상에 의해 살인적인 경쟁을 조직하는 기제로서의 충실한 의미 또한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의 문제를 회피 한다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전반을 변혁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방기한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과도한 관념의 발상일까?
두 번째로는 우리 아이들을 공교육이 아닌 대안교육에 맡긴다면 교육 개혁과 사회 변혁의 역사적 책무에서 활동하는 이 땅 부모들의 참 모습인 노동자 계급의 모습을 우리 아이들에게 못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과 함께 공교육의 문제점을 논의하고 토론하고 이 과정에서 역사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참 부모로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역사 발전은 투쟁의 역사였고 변혁의 역사였음을 몸소 보여주고 함께 실천하는 모습이 진정한 참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세 번째로는 위에서 서술한 근거를 백보 양보하여 대안교육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안교육 시스템 상 결국 공교육 체계로 흡수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으며, 설사 교육 시스템이 완벽하다 하더라도 사회에서의 경쟁구도를 회피하긴 어려운 조건이기에 결국 부족한 대안이 아닐까 하는 판단이다.
태아교육부터 초중등교육 그리고 고등교육에 이어 사회 교육까지 연동되어 지는 자본주의 교육 시스템에서 특정한 부위의 대안 교육 도입은 결국 무언가 먹다 만 듯한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20세기와 21세기 혁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언젠가 이야기 했듯이 20세기 혁명의 과제는 전체 인민이 먹을 수 있는 빵을 생산하는 것이라면 21세기 혁명의 과정은 풍부하다 못해 넘치는 그러나 극소수 자본가들에 의해 독점 소유되고 있는 빵을 어떻게 하면 재 분배 할 것인가? 하는 점의 차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교육체계라 불리우고 있는 시스템은 그 누가 이야기 하고 있듯이 살인적인 경쟁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살인적인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자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갈 수 있음을 선전하는 선전의 장 인 것 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 하다.
무수히 많은 우리들의 아이들이 가고 싶은 학교 아니 지배계급의 진입구로서의 학교에 입학을 하기 위해 학습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에 좌절하면 목숨도 서슴 치 않고 버리는 현실이 바로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 현실이며 우리 아이들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나를 슬프고 분노하게 만드는 점은 바로 학교에 가고픈 아이들의 수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입학생의 수가 적다는 점이다.
3인 1가족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 갈 수 있는 대한민국의 아파트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70% 이상의 국민이 무주택으로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나 학교를 가야하는 학생수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입학생의 수가 적은 대한민국의 학교수나 별반 차이 없이 말이다.
문제는 풍부화 되어 있는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그리고 이속에서 경쟁이 아닌 협동과 단결을 어떻게 교육시켜낼 것인가 ? 하는 점이 대한민국 교육 개혁의 과제가 아닌 듯 싶다.
비켜가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삶의 원리가 다른 여타의 동물과의 차이이며 구상하고 계획한다는 점이 다른 동물의 노동과의 차이점이 아닌가?
대학입시 때문에 죽어간 아이들의 유서를 가지고 논술 공부를 한다는 웃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 하면 너무 빡빡하게 삶을 살아가는 태도라 손가락질 할 것인가?
장시간 노동에서도 노동해방을 노래하고 이야기 하고자 조합원 교육을 쉼 없이 다니는 동안에 나의 아이가, 우리들의 아이가 우리들의 파업 현장의 사진을 보면서 사회 불안 세력으로 규정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해 회피만 할 것인가?
충분히 다 입학하고도 남는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서열화 되어 있는 1순위 대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살인적인 경쟁을 치켜 세워주고 있는 사교육 시장에 내 몰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쓴 쇠주를 한잔 기울이는 우리네 학부모 노동자들의 모습을 외면할 것인가?
이명박씨 정말 고맙소이다.
김태균(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민중학부모회(준) 상임대표)
지난 10월 9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인 이명박씨가 교육 관련한 공약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 가난한 형평 때문에 누구보다 교육의 기회가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그리고 한번 한 약속은 분명하게 지키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교육 관련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공약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웃긴 것은 30조원이 넘는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한 이명박씨의 교육 관련한 공약이 그 누가 보아도 줄기는커녕 현재의 사교육비 규모가 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더욱 더 문제는 확실하게 가진 자들의 되물림을 교육을 통해 공고히 하겠다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OECD 가입 국가 중 국공립대학은 3위, 사립대는 5위라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는 한국의 아이들, 국공립 대학에 다니는 학생의 수가 최하위를 달리고 있으며 공교육 관련 비용 부담이 가장 높은 한국의 학부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의 대학 졸업생 실업자를 양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을 이명박씨는 고교 다양화 300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고등학교의 서열화를 통해, 영어중심의 공교육 완성을 통해, 3단계 대학 자율화를 통해, 기초학력 바른 인성 책임 교육제를 통해, 맞춤형 학교지원 시스템을 통해 현재의 교육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명박씨의 교육 관련한 공약에 대해 세밀하게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분들이 이명박씨의 교육 공약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월 300만원도 채 안 되는 임금을 가지고 200만원 가까이 교육비로 지출이 되고 있는 한국의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 이제는 어느 이름 모를 촌 동네 어귀에 뉘 집 자식 00대학 입학 했다고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볼 수 없는 부의 되물림이 교육을 통해 공고히 되고 있는 한국 교육의 현실의 한 복판에서 이명박씨 에게 정말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회에 나가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을 해서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아이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좋은 대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서면 좋은 중학교, 중학교에 들어가면 공부 많이 가리키는 고등학교 그리고 좋은 대학,
이를 위해 우리의 아이들은 새벽밥도 먹지 못하고 학교라고 불리는 죽음의 공간으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잔업하고 뒤 늦게 퇴근하면서 볼 수 있는 불야성 같이 라이트를 켜 논 학교 앞 학원 차에 녹초가 된 몸을 실고 퇴근을 한다.
87년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돌을 던지며 한국 민주화 진전에 이바지 했던 수많은 학부모들은 이제 겨우 300만원도 채 안 되는 임금에서 대 부분을 아이들 학원비와 교육비로 나가고 있는 볼썽사나운 학부모로 전락한 상황이다.
단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좋은 대학을 나와야지만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리들의 아이들을 그냥 그렇게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해결 할 것인가?
모든 대학이 국립대이며 어떻게 1등과 꼴등이 생길 수 있냐?“라고 반문하는 핀란드의 아이들처럼,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프랑스의 아이들처럼, 대학입시가 없고 누구나 원하면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의 아이들처럼, 고교 졸업자격증만 있으면 누구나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 간 전학도 자유로운 독일의 아이들처럼 왜 우리들의 아이들은 그렇게 뛰어 놀면서 청춘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단언컨대 작금의 한국의 교육 현실의 해결의 시작은 대학 입시 제도의 전면 폐지와 함께 그 누구나 가고 싶고 원한다면 가야될 수 있는 대학 평준화로부터 한국의 교육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밤늦게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애들아 밥 먹고 놀아라”라고 이야기 했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처럼 나 또한 우리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뿐이다.
이명박씨 정말로 고맙소이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올바른 교육 정책인양 떠들어 대고 있는 작금의 교육 관료들을 상대로 입시폐지 대학 평준화를 외쳐 되야 하는 현실에서 이명박씨는 고맙게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교육현실을 더욱 더 낭떠러지로 내 몰자고 이야기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오.
이제 이명박씨가 이야기 하는 확실한 대학의 서열화 이에 걸 맞는 초, 중, 고등 교육의 서열화와 함께 가진 자들 중심의 국가 교육 정책과 노무현식의 3불 정책 그리고 우리의 입시폐지 대학 평준화를 통한 교육 개혁 정책이 한판 붙어도 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더 이명박씨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제발 10월 9일 이야기 한대로 이명박씨는 약속을 지켰으면 한다. 가진 자들에 의한 교육정책과 전 민중이 누구나 누려야 할 민중의 교육정책이 한판 붙는 그 접점에서도 물러섬 없이 주장하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타협하고 어중간히 합의하는 과정에서 교육 문제가 풀릴 수는 없다. 양자가 죽을 때까지 주장하고 관철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일방이 소멸될게 비로소 제대로 된 교육정책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 부르주아적 교육 정책을 위한 전도사로서의 이명박씨의 모습을 계속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며 나 또한 노동자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이명박씨와 대립되기를 원하고 있소이다.
끝으로 다시금 이명박씨 고맙소이다. 대선 후보로서 어중간하게 표를 구걸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분명하게 계급적 입장을 가지고 당당하게(?) 부르주아적 입장에 서서 교육을 이야기 했기에 - - -
이명박씨에게 수원 산남 초등학교 학부모운영위원 김태균 이가
조직을 바로 세우는 것! 부당하게 해고된 조합원들을, 원직에 복직시키는 투쟁부터 시작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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