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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둥이와 바지런이

창립둥이와 바지런이

 

그는 창립둥이다. 회사 문을 열 때부터 회사밥을 먹어왔다. 올해로 열네살박이가 된 회사니 녹록하지 않는 짬밥이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왕고참이다. 그는 회사의 산 증인이자 숨 쉬는 역사인 셈이다.

14년 전만 해도 그는 날고 기었다.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돈도 많이 벌고, 일도 덜 힘들었다. ‘좋은 회사’를 다니는 그에게 사람들은 부러운 시선을 한 눈에 받았다. 그럴수록 회사에 대한 자긍심도 강해졌고, 괜스레 어깨가 으쓱여지는 듯 했다.

하지만, 14년이 흐른 지금. 그는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그 옆에 함께 앉아있는 이는 바지런이다. 과장이 섞였겠지만, 1년 365일을 일한다고 한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바지런이는 한 시간이 넘게 술자리를 했지만, 도통 입을 열지 않는다. 술자리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과묵함과 성실함이 잘 버무려진 전형적인 바지런이다.

그런 그 바지런이가 요즘엔 전에 없던 일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이다. 무려 열흘 넘게 연차휴가를 사용했다. 아픈 것도 아니다. 집안 문제나 개인 사정 때문도 아니다.  

창립둥이와 바지런이가 함께 술을 기울이게 만든 건 ‘괘씸한 회사’ 탓이다.

창립둥이는 그동안 받아왔던 부러운 시선을 되갚고 있는 중이다. 지난 14년간 회사는 그의 임금을 조금씩 깎았다. 그를 부러워했던 사람들의 눈빛은 측은함으로 바뀐 듯하다. 그의 회사는 더 이상 ‘좋은 회사’가 아니다. 그는 지난 14년간 ‘빼앗기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바지런이가 휴가를 사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의 삶은 더욱 팍팍해진다. 남들이 인정해 줄 정도로 1년 365일을 꼬박 일했는데, 월급봉투는 갈수록 가벼워지니 말이 없는 그 조차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는 노동조합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휴가를 사용한 것이다.

회사가 ‘위기’ 상황인 것도 아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벌어들이는 돈이 늘어나고 있다. 회사 홈페이지는 2004년 81억의 매출을 올렸다고 자랑하고 있다.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우량기업이다.
여기에 이 회사 대표이사는 주변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사람으로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작년에는 대표이사가 저축의 날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에게 표창을 받기도 했다. 대표이사는 5년간 소년소녀가정 세대를 위한 결연 사업을 추진하고, 어려운 농가마을에 연간 4억 원에 상당하는 12만여 톤의 재생순환골재를 무상공급하기도 하는 등 ‘모범 한국인’이다.

그런 회사가 도를 넘어선 못된 짓을 하고 있다.  회사는 노조 조합원보다 비조합원들이 ‘집회’를 훨씬 많이 하고 높은 단결력을 과시한다. 조합원보다 5배 정도 많은 비조합원들의 자발적인 ‘노조탄압 집회’가 끊이지 않는다. 조합원들이 한두 명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비조합원들의 집회가 개최된다. 노골적인 집단 왕따 결의대회다.

회사는 노조가 창립하자 전례에 없던 신규채용을 실시했다. 회사의 채용기준은 ‘입이 걸고 험상궂은 인상’이었던 모양이다. 회사는 지금 면접을 무사통과 한, 조합원들의 조카뻘 정도의 ‘앳된 청년들’이 활개치고 다닌다. 급기야 그들이 노조 위원장을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회사니 14년간을, 1년 365일을 ‘빼앗기는 삶’을 살아온 노동자들이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이들은 노조를 만들고 ‘못된 회사’와 싸움을 각오했다.
노조는 최근 결사항전을 각오하는 한편 회사에 마지막 입장을 전달했다. 회사가 입장을 수용하지 않으면 11명의 조합원들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예정이다.

하지만, 부담감도 없지 않다. 사내 집회를 하면 비조합원들의 ‘맞불집회’대오가 전 조합원의 5배에 달하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노조 간부는 민주노총의 연대를 믿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노조간부가 발언하는 동안 우리를 주시하는 묵묵한 눈빛이 느껴졌다. ‘바지런이’ 조합원의 눈빛이다. 그는 한 번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 해 줄 것을 눈빛에 담아 보내고 있었다. ‘못된 회사’에 맞서 노동자권리를 찾기에 민주노총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서 말이다.

이 회사가 바로 얼마 전 직원 명단에도 없는, 문신을 두른 정체모를 거구의 ‘직원’이 노조위원장을 폭행했던 ‘우진환경’이다. 이제 설 연휴가 지나면 이들의 투쟁은 본격화될 예정이다.

14년간 ‘빼앗기는 삶’을 살아온 창립둥이가 ‘다시 찾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구호를 외치며 무거운 입술을 떨어뜨리는 ‘바지런이’ 조합원은 제 값을 받고 365일을 일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창립둥이’와 ‘바지런이’의 투쟁에, 그리로 어깨걸기를 주저하지 않는 동지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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