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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26
- 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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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26
- 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4.
이토(Itoh)역시도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에서 고전 정치경제학의 잔재를 확인하고 있다. 그는 고전정치경제학의 잔재를 무엇보다도 우선 맑스가 두 상품의 직접적인 교환으로부터 출발하고 두 상품의 공통적인 속성을 그 상품들에 포함되어 있는 추상 노동 속에서 보았을 것이라는 사실로 고정시킨다. 본래의 맑스 이론은 비로소 가치 형태 분석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일 텐데, 왜냐하면 맑스가 가치 형태 분석 이후에 더 이상 직접적 교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상품들의 공통적인 속성을 이제 상품의 화폐 형태에서 찾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을 통한 가치관계의 규정은 비로소 자본주의 상품 생산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가치형태는 가치실체보다 앞서서 그리고 가치실체와는 독립적으로 나타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Itoh 1976). 그러나 맑스는,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교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가치법칙이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 비로소 관철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정당하고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의 형태로서 상품을 처음부터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가 추상 노동을 가치실체와 동일시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 “자연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사실이 고전경제학의 잔재를 이루는 것이다.
추상 노동에 대한 상반된 두 개의 규정이 양립하고 있다는 것 속에는 이 저작(자본-옮긴이)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문제, 즉 추상 노동이 모든 생산양식에 존재했는지 아닌지 또는 추상 노동이 상품생산에서 특수한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에 대한 근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추상 노동을 생리학적으로 노동력의 지출로서만 파악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는 사람들이 추상 노동을 서로 다른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연관으로 파악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즉 그러한 노동들을 교환 속에서 동등한 것으로 파악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의 사실에 달려 있다. 첫 번째 의미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노동을 구체적인 노동으로뿐만 아니라 추상 노동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두 번째 의미에서의 추상 노동은 부르주아 사회에 한정되어 있다.
추상 노동을 순수하게 생리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서도, 디터 볼프(Dieter Wolf)는 사회적 총노동이 개별적인 영역으로 배분될 수밖에 없고 거기서 개별적인 노동들이 서로 동등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한에서 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추상 노동에도 사회적인 의미가 부합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주32-) 그러나 그는 동시에 사회적 총노동의 단순한 배분이 결코 개별적인 구체적 노동의 동등성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못보고 있다 :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농촌의 가족이 일상적으로 2시간의 경작 노동 이외에 1시간의 재단 노동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은 결코 (질적으로 서로 다른 구체적인 노동을-옮긴이) 동등하게 만드는 것(일반적으로 어떠한 양적 비율로 가능한가? 또는 각각의 모든 노동이 동등한 단순 노동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체적 노동을 가족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에게 배분하는 것이다. 여기서 “동등하게 만드는 것”은 연구하는 이론가들의 행위이다.
루빈(Rubin)은 이미 20년대에 세분화된 다른 입장을 전개시켰다. 그는 3가지 형태의 “동등한” 노동을 구별하고 있다 : 생리학적으로 동등한 노동, 사회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된 노동, 추상 노동. 루빈은 이후 볼프와 유사하게 서로 다른 노동들이 동등하게 되고 배분될 수 있는 한에서,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이 각각의 노동분업화된 생산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러나 루빈은 추상 노동을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으로 환원시키지 않고(그리고 이미 생리학적으로 동등한 노동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오히려 추상 노동을 특수한 형태의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으로 파악한다 : 여기서 “동등하게 만드는 것”은 노동생산물의 가치특성을 넘어서 물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루빈은 추상 노동의 이러한 고유한 의미가 제1장의 3절과 4절에서 비로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것 속에서 맑스의 서술의 비일관성 또는 모순의 양립을 결코 보지 못했다 : 즉 제1장의 첫 번째 두 개의 절에서 추상 노동이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 또는 게다가 생리학적으로 동등한 노동의 의미로 더욱 변화되었다는 것 속에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로부터 노동으로의 분석적 환원에 대하여 이러한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비로소 추상 노동의 고유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한다(Rubin 1973, S.91-109). 그러나 이것은 제1장의 첫 번째 두 개의 절에서 고전 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필요가 결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치에 들어 있는 특수한 사회적인 것은 거기에서(제1장의 첫 번째 두 개의 절에서-옮긴이) 필요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게다가 『자본』에서 맑스는 추상 노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맑스가 노동과정의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계기를 고찰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인 5장에서도 추상 노동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맑스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
“이러저러한 형태로 자연적인 것을 자기화하고자 하는 합목적적인 활동으로서 노동은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자연조건, 즉 모든 사회적 형태와 무관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조건이다. 이에 반해서 교환가치를 정립시키는 노동은 노동의 특수한 형태이다. 예를 들어 특수한 생산적 활동으로서 물적 규정성을 지니고 있는 재단사의 노동은 저고리를 생산하지만 저고리의 교환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재단사의 노동은 저고리의 교환가치를 재단사의 노동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으로서 생산하며 또한 이러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은 재단사가 실로 꿰맬 수 없는 사회적 연관 속에 속하게 된다.” (Ⅱ.2/115; 13/23f, Herv. von mir)
물론 이미 추상 노동의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서술에서 특정한 모순적인 것의 양립(추상노동과 구체노동-옮긴이)이 발견된다.(주2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자본』 제1판에서 맑스는 여전히 가능한 한 추상노동을 단순하고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노동과 동일시한다.(주26-)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상품은 교환가치로서 “가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단순하고 동일한 형태를 지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온다.(Ⅱ.2/109; 13/17) 게다가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기 위해서, 서로 상이한 노동들 그 자체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형태를 띠는 단순한 노동, 요컨대 질적으로 동일하며 오로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환원은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추상은 사회적인 생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추상이다.(……) 보편적 인간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은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행할 수 있는 평균노동 속에 존재하며 인간 근육, 신경, 두뇌 등의 특정한 생산적 지출이다.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적응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단순한 노동이다…… 이 단순한 노동은 사람들이 모든 통계를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한 한 모든 노동을 형성한다.”(Ⅱ.2/110; 13/18)
맑스는 여기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추상들을 서로 동일시한다 : 한편으로는 항상 좀더 기계화된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추상으로서 노동력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추상, 특수한 성질을 지닌 노동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대체, 따라서 특정한 한 종류의 노동지출과 다른 한편으로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 노동”, 즉 특정한 종류의 노동지출이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노동.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결코 추상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실체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본』 제1판에서도,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도 동시에 단순한 평균노동으로 측정된다(Ⅱ.5/19f). “추상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가치형태의 고찰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Ⅱ.5/31). 그러고 나서 우선 제2판에서 단순노동과 추상노동이 엄밀하게 구분되었고 처음부터 가치실체로서의 추상 노동으로 시작하였다.(주27-) 물론 두 개의 첫 소절에서 추상 노동을 규정하는 데에 “자연주의적인” 것을 많이 연상하게 한다. 생산적 활동의 특정한 성격이 추상되고 난 후에 그 추상 안에 오로지 생산적 활동이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지출”(Ⅱ.5/24; 23/58)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미 나타난 후에, 맑스는 (제1판과 대비되어 새롭게 파악된)두 번째 소절의 끝에서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며, 또한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또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속성 안에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Ⅱ.6/79; 23/61)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치 “추상 노동”이 노동의 자연적 속성에 해당하고, 노동의 가장 보편적인 생리학적 규정들, 즉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품 생산에서만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규정들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의 추상성이 결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속성이라는 사실, 즉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질적인) 상이함에 대한 추상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자본』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 안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주29-)
이러한 것은 나에게 물론 하나의 정식화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맑스는 자신의 담론을 고전 정치경제학에 반대하여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으로 자신의 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서 맑스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주30-) 여기에서 우선 고전 정치경제학이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를 구별했지만 상품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추상 노동의 생리학적 파악은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 없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수행되지 못한 구별이 보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파악된 구별을 통하여서는 노동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비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주31-) 추상 노동이 사실상 노동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규정으로 파악될 때에 비로소 고전 정치경제학을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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