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6/05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6/05/26
    위생(衛生)
    곰탱이
  2. 2016/05/19
    혼이여 돌아가자!
    곰탱이

위생(衛生)

•<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했다.

 

=================================================================

 

매월당은 유자한이 고을살이를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 적마다 번번이 뒤따라나오는 아이 하나로 하여 으레 한번은 무르춤하기 마련이었다. 세상을 일찍 놓은 유자빈의 넷째이자 회의 아우인 우(藕)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이었다.

우가 찾아온 것은 회가 가을걷이를 하다가 지쳐서 달아나듯이 귀가한 지 며칠 안 되어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우가 저 먹을 것을 지고 온 것이 갸륵하여 쉽게 받아준 것은 아니었다. 우는 열다섯 살에 불과한 소년이었으나 유자한의 푸네기 중에서는 기중 속이 차서 보매에도 형과 아우가 바뀌어 된 것이 아닌가 싶게 듬쑥하고 의젓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는 공부를 맡기러 왔다고 인사를 하였다.

- 네 어디까지 했더냐?

육경(六經)의 진도를 물은 거였다.

- 보이지 않는 열매를 따려는데 장대의 길고 짦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 네 이놈, 그게 어디 글 읽는 놈의 말버릇이더란 말이냐.

매월당은 가볍게 꾸중을 하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나이가 있고 없고 간에 벌써 목침이 날아갔거나, 저 먼저 얼겁이 들어서 달아나는 바람에 문짝이 부서졌거나 했으련만, 우는 첫눈에 괴었던 터라 말만 듣고 말게 된 거였다.

우는 일어났다가 꿇으면서 발명을 하였다.

- 저는 젖니 때부터 늦되기로 일러온 둔물인 고로 경서는 어차피 읽는 것이 한정이오나, 다만 의술만큼은 급하기가 촉각장중(燭刻場中, 불을 켠 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글을 짓게 하는 과거장)에 진배 없는지라 선후를 정하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경학보다 먼저 익힐 것이 의술이라는 말이었다.

- 어인 까닭이더냐?

- 예, 제 어머님께서 천생일 약질이신고로 이날토록 불초의 근심이 늘 거미줄 같사온데, 아버님을 여의시고부터 종래 출면 못하시는 지가 오랜 터라, 이것이 공부가 뒷전이 된 이유입니다. 게다가 내력을 모을 줄을 모르는 집이라 약시시마저 잇고 끊기를 남의 집 인심에 의지하는 형세이고 보니, 이 노릇이 어찌 남의 자식이 되어서 사는 도리이겠습니까. 이런 불효는 전고에 없을 터입니다.

우는 눈물을 훔쳤다.

매월당은 싹이 보여서 흐뭇하면서도 전해 줄 의술이 없음에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네 말인즉 네가 잘못 찾아온 실상을 이르는구나. 필경 네 손은 쥠이 없고 내 손은 줌이 없을지니, 이른바 도로(徒勞)라 함이 이 아니겠느냐.

- 선생님께서는 저를 가련히 여기사 내치지 마옵소서. 듣잡건대 말씀은 가까워도 실상은 머시니 분부가 아닌 듯합니다.

- 아님이 아니니라. 네 아다시피 내 이날토록 약사여래(藥師如來)와 한집살이를 해오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고황(膏肓)이 삭아내리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주럽을 보태는 형국이니, 네 과연 무슨 얻음이 있겠느냐.

- 제 비록 어린 소견이오나 의견(이의)이 있사옵니다.

- 들어 보마.

-선생님께서는 수십 년 소금밥에도 위생(衛生, 삶의 보호)을 지탱하심은 도리어 육식자들을 눌러계시옵니다. 산곡과 산채는 악식(惡食)이라 고량진미의 종류와 다르건만 보건(保健)은 남의 모범이시니, 새는 기낭(氣囊)으로 뜨고, 물고기는 부레로 뜨듯이, 어찌 두어계신(지니신) 것이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그 동안 선생님께서 해오신 위생 가운데 항상 위주(爲主)해 오신 것을 약간 베푸신다면 더한 다행이 없겠사옵니다.

우는 일어나서 절을 하고 다시 곡좌하였다.

매월당은 위생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는 데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곡진한 태도에 흔들려서 전에 기록해 뒀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네 여겨들어라. 내 진작부터 내몸에 더부살이하는 고질에대 비춰보건데, 무릇 병이라 이름한 것들은 본래가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마음이 생기면 병도 생기는 이치가 있느니라. 네 생각해 보아라. 긴 것을 기라고 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분별이 어디 무심(無心)의 짓이겠느냐. 그런 까닭에 병은 미리 병을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죽음은 조섭을 하는 정도에 따라서 이르고 늦고가 갈리는 것을 이제 알았으리라. 내게 이런 얘기가 있으니 한번 들어 보거라.

매월당은 알아듣게 하느라고 예를 들어 말했다.

- 가다가 날이 저물어서 어떤 절에 찾아가 하룻밤 얻어자는 데 늙숙한 선승 하나가 있더구나. 이 중이 밤에 뒷간에 가는데 퇴를 내려서다가 어떤 생물 하나를 밟아죽였구나. 그런데 그놈이 밟힐 적에 짹 하고 비명을 질렀것다. 중은 낮에 웬 두꺼비 한 마리가 댓돌 옆에 움츠리고 있던 걸 봤던지라. 아뿔싸 필경 낮에 본 그 두꺼비를 밟아죽였구나 했느니라. 자, 비록 부지불식간의 실수일망정 딴데도 아닌 절간에서 감히 살생을 했으니 잠인들 오겠느냐. 그래 이리뒤척 저리뒤척 고뿔 없는 몸살을 하다가 어슴 새벽에야 어리마리하게 잠이 들었는데 시작이 바로 꿈이었구나. 꿈에 그 두꺼비가 나타나 염라국의 법에 발고(發告)를 하니, 사람 형상에 소대가리를 한 옥졸이 두말없이 자기를 잡아다가 시왕(十王) 전에 매놓고 바야흐로 단근질을 해서 아비지옥에다 던질 참이라, 이에 깜짝 놀라는 바람에 눈을 뜨니 꿈이었것다. 중은 깨고 나서도 긴가민가하여 마음을 볶고 줄이다가 날이 새기가 무섭게 나가서 댓돌께를 살펴보니, 두꺼비는커녕 저녁 반찬으로 따라오다가 흘렸던지 오이 하나가 밟혀서 으깨져 있더란다.

매월당은 접어놓았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 이것이 마음을 붙들어 다스리기에 스스로 늦춤이 있을 수 없는 이유의 첫째인 것이니, 다시 이르거니와 인류도 상고(上古) 적에는 새•짐승의 한무리로 둥지나 굴에서 살았던 까닭에 집과 구들이 없던 병을 만든 것이요, 상고 적에는 가죽을 걸치고 풀로 보금자리 하여 노루나 고라니와 한무리로 살았던 까닭에 베것•목것•깁것을 입으면서 옷이 병을 부른 것이요, 상고 적에는 범이나 승냥이의 무리로 짐승을 뜯고 피를 마시다가 곡식을 심어 고량의 맛, 태번(胎膰, 최상의 진미라는 곰의 발바닥과 표범의 태)의 맛을 알게 되면서 병으로 하여금 범과 승냥이의 기세로 덤비게 해놓은 이치를 깨달아야 할지니라.

매월당은 도가(道家)의 말로 말허리를 삼았다.  

- 어떤 위생서에 사람의 목숨을 늘이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는데, 왈 말을 삼가고, 왈 먹성을 삼가고, 왈 욕심을 덜고, 왈 잠을 덜 자고, 왈 기쁨과 노여움을 삼가라 운운했으니 한번 새겨볼 만한 것이니라. 대개 말에 정도를 잃으면 허물과 근심이 생기고, 음식에 때를 잃으면 탈과 피로가 생기고, 욕심이 많으면 위험과 변고가 생기고, 잠이 많으면 게으름이 생기고, 기쁨과 노여움에 절도를 잃으면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가 없느니, 네 어떠냐? 이 다섯 가지가 진원(眞元, 사람의 원기)일진대, 진원을 잃고 나면 그 다음에 비록 얻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얻는다는 것이 죽음 말고 뭣이 있겠느냐?

- 선생님 말씀은 추상의 설(說)이옵고, 제가 묻잡는 것은 술(術)이올시다.

- 더 들어라. 또 이르기를 '그 마음을 다 하면 성(性)을 알고,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고 했느니라. 네 어떠냐, 선도(仙道)를 그리워하는 자가 술(術)을 배워서 납이랑 수은을 단련하고, 솔씨와 잣을 먹고, 사람의 태를 처방하여, 부적을 차고 다니고 한다면, 곧 천지의 운행에 대들고 신비(神秘)를 훔치자는 것인데 그 구차스러움인즉 어떻다고 하겠느냐?

- 하오면 선생님께서는 선도를 멀리 하시고자 산인으로 머물어 계신 것이옵니까. 산인(山人)은 곧 선(仙)이온데 그것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는 서슴거리지 않고 바르집어 물었다.

매월당은 당돌함을 나무라지 않고 가볍게 응수하였다.

- 몸이란 것이 본래 마음의 부림을 받는 것이라 산인이 됐을 뿐이니라.

- 그렇다면 그 마음은 또 누구의 부림을 받는 것입니까?

- 마음은 부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림을 물리침으로써 제 있음을 스스로 다지는 몸의 주인인 것이니, 누구의 부림을 받는다면 그건 이미 마음이 아니니라. 오히려 제 아닌 것을 부리고 싶어하는 것이 마음의 본바탕인즉, 그런 까닭에 마음곳 부릴 것이 아니라 다스려야 할 것이니라.

- 그 마음이 난 곳은 어디라고 하십니까?

- 성기자연(性起自然)인 것을.

- 하오면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자연이며, 그 역시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것입니까?

- 마음은 저마다 제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저마다 제 마음이 유지되는 것이니, 태상노군(太上老君,노자)의 무위이화보다는 인위이화(人爲而化)에 가깝겠구나.

- 하오면 선생님께서는 대개 인위로써 작위(作爲)하시고, 작위로써 무위하시고, 무위로써 유위하시는 셈이온데, 그렇다면 선생님, 선생님의 실상은 대체 뉘시오니까?

- 네 이놈, 그런 말버릇이 어디 있더냐. 이놈.

- 선생님께서 이놈을 파격(破格)하여 가르치시는고로 이놈이 한번 파격하여 묻잡고자 했을 뿐이올시다.

- 네 이놈, 너는 대체 숫기가 좋은 놈이더냐, 비위가 좋은 놈이더냐?

- 깊은 산을 만나면 소매를 걷고 싶고, 맑은 물을 만나면 바지를 걷고 싶은 것이 아이들 마음입니다.

- 네가 장차 당나라 사람 이하(李賀)를 만나거드면 그 사람러 물어 보거라.

- 이하란 사람도 병에는 무위였습니까?

- 그것도 그 사람더러 물어 보거라.

- 제가 구하는 의술은 자연이 아니올시다.

- 의생이 묻고 의술이 답하는 것도 다 자연에 의지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 하오면 저의 친환은 장차 어떡하며 제 거미줄 같은 근심은 장차 어떡하리까?

- 네가 이르지 않았더냐. 새는 기낭으로 뜨고 물고기는 부레로 뜨는 것을 알았다면, 또한 네 속에 지닌 것으로써 처방할밖에 달리 무슨 신통이 있겠느냐?

- 저는 설보다 술이 먼저입니다. 술인즉 실(實)이 아니올지요.

- 그러게 너는 쥘 것도 없고 나는 줄 것이 없노라고 이르지 않았더냐. 괴이타, 나는 약사 여래 밑에서 약을 옫지 못하고, 너는 설을 듣고도 실을 얻지 못하니 실이야말로 여항의 부뚜막이니 굴뚝 같은 곳에서 사는 놈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너는 모름지기 저상하지 말아라. 이것이 책공부의 단서요, 글공부의 종장이란 것을 네 또한 알 날이 있으리라.

 

(310~315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혼이여 돌아가자!

<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했다.

 

=============================================================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은 오는 것이었다. 병이 깊어지고, 꿈이 얕아지고, 몸이 무거워지고, 생각이 가벼워진 것으로써, 그 동안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에 매달려서 온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다. 매월당 자신이 오고 와서 이만큼 늙어 버린 것이었고, 세월이 스스로 오고 와서 이만큼 낡아 버린 것이었다.

하늘에는 북녘으로 돌아가는 새들이 며칠째나 무리를 지어서 날아가고 있었다.

덧없이 그새 이월로 접어들어 벌써 초엿새라나 초이레라고 하니, 그러고 보면 새들이 가고 싶어할 때가 되기도 한 것이었다.

매월당은 하늘의 새소리가 아녀자들이 먼 데서 앙살거리는 소리처럼 들리거나, 새들의 그림자가 눈앞을 한꺼풀 걷어가듯이 후딱 가로질러 갈 때마다 얼른 고개를 들어 새 떼를 쫓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고니인지, 물오리인지, 기러기인지, 두루미인지는 번번이 넋을 놓고 바라보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새들이 줄을 지어서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약간 비슷하기는 해도 매월당이 언뜻 떠올렸었던 것처럼 겅그레나, 쳇다리나, 가새나, 곱자 따위와 같이 굽거나 가지를 친 어떤 물건의 모양이 아니었다. 새들은 사람들이 살림살이에 만들어서 쓰는 그런 도구의 형상을 시늉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새들은 산의 능선을 그리거나, 굽어도는 들길을 그리거나, 휘어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매월당은 오늘도 가벼운 생각에 잠기어 있었다.

들앉으나 나앉으나 그렇게 묵은 일들을 되새기고 곰새기고 하는 것이 요즈음의 소일이었다.

생각하면 그 동안 걸어온 길은 아득하도록 길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내일 모레가 이순(耳順)인 것을.

매월당은 이제 몇 달만 더하면 나이가 육순이라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것이 이 봄에 들면서 새로 붙은 습관이었다.

오늘은 느닷없이 울릉도를 생각하였다. 그러자 자연히 삼십여 년 전에 떠나간 천석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 곁들여서 시도 한 수 떠올랐다.

 

삼신산 이야기 들을 만큼 들은 터라                            玄洲篷島飽曾耳

신선놀음이나 하면서 한세상 잊자 하니                        思欲仙遊謝世氛

마침 울릉도가 알맞다는 말 있어                                人說羽陵?避隱

높이 올라 바라보니 아득하기 구름일레.                       登高試望渺如雲

 

금오산에 살면서 한동안 동해로 나와 노닐 적에, 선사의 성류굴(聖留窟)을 거쳐서 평해의 월송정(越松亭)과 망양정(望洋亭)을 노래하던 끝에 <우릉도를 바라보며(望羽陵島)>로 제하여 천석이의 일을 잠깐 생각해 봤던 시였다. 천석이는 그 후로 아무 소리가 없었다. 뜻을 이루었기에 다른 말이 없으려니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러나 심기가 마냥 흐뭇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천석이의 일만 보더라도 신선이 정녕 따로 없지 않은가 싶을 때마다, 유문(儒門)을 열지 않았으니 유가(儒家)도 아닌 듯하고, 불문을 열지 않았으니 불가도 아닌 듯하고, 도문을 열지 않았으니 도가도 아닌 듯하고, 그 셋이 뒤범벅이 되어 두루뭉실한 무엇인가 하면 그도 아닌 듯하고, 아닌 듯하면서도 아닌 것이 아닌 듯하고, 그렇게 듯하고 듯해서 듯하고 듯한 몰골로 그럭저럭 나이 육십의 턱밑에 다다른 현실을 느낄 때마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심사가 되는 것이었다.

무릇 육십줄에 바짝 다가선 나이란 대자로 재거나, 줄자로 재거나, 곱자로 재거나 간에 앞날은 더이상 재기가 어려울 뿐더러, 마땅히 계한(界限)은 있을지언정 기약이란 없는 나이인 것이었다. 그 아무 무엇도 아닌 몰골로 그렇게 이르렀다고 한다면, 앞으로 그 무엇이 기어이 되리라거나, 그 무엇에 영 못 미치리라거나, 그 무엇에서 오히려 지나치리라거나 하는 따위의 앞날에 대한 어떤 기약도 막연해지는 나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은 대체 무엇이더란 말인가.

매월당은 그에 대한 답도 생각하고 있었다.

다된 미완성.

아직까지는 그것이 답이었다.

그러나 매월당은 또 물었다. 그리고 또 답을 하였다.

그러면 다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해서,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한다고 한들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할 수 있는 날은 또 얼마나 된다는 것인가.

이날토록 걷는다고 걸어왔지만, 그 걷다가 미끄러졌던 길이 바로 이 길이 아니었던가.

걷는 사람들이 이른바 산행야숙(山行野宿)을 꺼렸던 것은, 산길을 가던 이가 날이 저물었다고 하여 산에서 가까운 곳에다 잠자리를 정할 경우, 네 발가지 짐승들에게 사냥감이 되어 주기가 십상인 까닭이었다.

매월당 자신도 그것을 경계해 왔다. 가다가 때로 자리를 잡고 쉬더라도 반드시 도회에서 쉴자리를 찾지 않았으니, 머리 검은 짐승들의 사냥감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머리 검은 짐승들이 먹이감이 되는 꼴 그 한 가지만은 마침내 면한 셈이 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다음은 또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 있으며, 앞으로는 무엇이 더 있을 것이란 말인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할 수 있는 날마저 얼마 안 되리라는 것이, 그것도 짐작만으로 겨우 하나 있다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찍이 웃으면서 지하로 돌아갔던 사람들과, 울면서도 굳이 늦도록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과의 차이였더란 말인가.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魂?歸來無四方)'.

매월당은 그 귓글을 자주 되뇌었다. 소쩍새는 으레 돌아감만 못하다고 이르고, 그 자신은 으레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곳이 없다고 읊었다.

그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은 언제나 옛임금의 혼이었지 매월당 자신의 혼은 아니었다.

어이하여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산이 있지 않은가. 강이 있지 않은가. 구렁텅이가 있지 않은가. 바다 밖이 있지 않은가. 어이하여 이 내 한몸 버려 둘 곳이 없을 것인가. 소쩍새는 또 으레 서쪽을 부르면서 울부짖었지만, 옛임금의 혼이 아닌 바에야 구태여 서쪽만을 찾을 것도 없는 일인 것 같았다.

혼이여 돌아가자.

매월당은 어느덧 설악산에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을 혼자서 키우고 있었다. 겨우내 몸져 누워 자리보전을 하는 동안에 슬며시 움텄던 생각이었다.

다시는 못일어나게 할 줄 알았던 병이 설을 쇠면서부터 누꿈해지더니, 이제는 뜰에 나와서 볕을 쪼이며 돌아가는 새 떼를 여겨볼 만한 여유까지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매월당은 그 여유를 전에 없이 귀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틈만 나면 설악산에서 떠나보고 싶은 마음을 더욱 도스르게 된 거였고, 들앉으나 나앉으나 묵은 일들을 되새기며 가벼운 생각으로 소일을 하는 것도, 그렇게 마음으로 하고 있는 떠날 채비 가운데의 하나인 것이었다.

 

(298~301쪽에서 발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