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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생(衛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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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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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6/01/28
    상대성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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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의 핑계가 되고 싶다.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혁명>>(김탁환 지음,  민음사, 2014) 중 제1권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발췌함(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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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방을 이번엔 유지하고 싶었다. ㅅ서책 한 권, 변볂변한 가구 하나 없는 방. 홀로 앉아 마으음을 비우고 뜰에 돋는 새싹들을 바라보는 방. 문지방을 넘어온 흰 구름이 창문으로 빠져나간 자리를 그윽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면 얼마나 근사할까.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가르는 기준은 결코 독파한 서책의 양에 있지 않다. 나무 상자 한 개와 열 개의 차이는 오십보백보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생각을 쌓아 올리기란 무척 어렵다. 죽은 이도 살리고, 전혀 만난 적도 없는 것들을 위아래 좌우로 잇고, 또 그 전부가 답을 내지 못하더라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여 무너뜨리고 다시 쌓는 마음의 방! 

방에 대한 생각을 살짝 흔들어 다시 닦는다. 이미 답이이 나왔다면 되돌아아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텅 빈 방에선 원칙조차 흩어지는구나.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섬에 홀로 들어갈 때 어떤 서책을 가지고 가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세 권을 고른다면? 아니 딱 한 권만? 이런저런 서책들을 혀 위에 올렸다. <<맹자>>를 가장 자주 짚었고, <<논어>>나 <<시경>> 혹은 <<사기>>와 <<역경>>을 언급하기도 했다. 지금 내게 묻는다면, 단 한 권의 서책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답하리라. 책을 펼쳐 글자를 읽는 대신, 팔베개를 하고 누워 다가왔다가 지나가는 구름을 구경하겠다. 그리고 그 구름의 모양과 크기와 움직임에 따라 과거를 추억했다가 지우고 현재를 살피다가 지우고 미래를 예상하다가 지우리라. 너무 낳이 채우고 쌓기만 했다. 흘러가는 물을 위해선 비우고 낮추고 부드러워져야 한다. 

이게 다 포은 탓이다다! 요렇게 적고 보니 은근히 흡족하여 한 번 더 적는다. 이게 다 포은 탓이다! 내 잘못은 없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목은 학당을 드나들 때부터 포은은 우리들의 핑계였다. 스승이 유난히 포은을 아낀 탓에 학당 서생들은 스승의 노여움을 살 때마다 포은에게 화살을 돌렸다. 황당할 뿐만 아니라 억울할 법도 한데 포은은 따지거나 반발하지 않고 그믐처럼 넘겼다. 나도 죽기 전에 포은의 핑계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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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국

시인 안도현은 <무생채와 들기름으로 볶은 뭇국을 좋아헀다>(안도현의 시 [안동](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에서)고 했다. 

나도 이 뭇국을 좋아한다. 

 

물과 기름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상극이다. 

그러나 물이 무우채로 새롭게 생산되고 

기름이 들기름으로 새롭게 생산되면, 

서로 잘 섞여서, 종합 통일돼서 

뭇국이라는 고차적인 새로운 것이 생산된다. 

물과 기름이 무우생채와 들기름이라는 새로운 생산력이 되면, 

무우생채와 들기름의 생산관계는

다시 뭇국이라는 보다 고차적인 생산력이 된다. 

 

이것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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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이산하 시

베로니카 

 

-이산하 

 

모든 게 그렇겠지. 

이제 패색이 짙은 낙엽처럼 다른 길은 없겠지. 

홀로 핀다는 게 얼마나 속절없이 아픈 일인데 

아름답기 전에는 아프고 아름다운 뒤에는 슬퍼지겠지. 

그대 뒤에서 그대를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세상 뒤에서 세상을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이기지 않고 짐으로써 세계를 물들이는 

그런 저녁노을 같은 것이겠지. 

어차피 질 줄 알면서도 좀더 잘 지기 위해 

잘 지기 위해 잘 써야지, 거듭 나를 치다가도 

이 난공불락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어 혼자 중얼거리겠지.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낙, 낙, 나킨스 헤븐스 도어...... 

 

모든 게 그렇겠지. 

아직 다른 길이 없으니 왔던 길 계속 가야겠지. 

케테 콜비츠 판화 같은 세상도 여전하고 

틀판에 하얀 목화꽃이 팡팡 터지는 꿈도 사라지고 

이젠 너무 멀리 이송되어 돌아갈 곳도 잊어버리고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아무 소용도 없어지겠지. 

어느날 내가 심해어처럼 베니스에 홀로 누워 

마지막 별빛의 조문이 끝날 때마다 

속눈섭 같은 물안개로 피어오르던 그대의 가슴에 묻혀 

폐사지의 바람처럼 다시 중얼거리겠지.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 이산하 시집 <악의 평범성>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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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처럼-이산하 시

대나무처럼 

 

-이산하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날카로운 창이 되고 

끝을 살짝 구부리면 

밭을 매는 호미가 되고 

몸통에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고 

바람 불어 흔들리면 

안을 비워 더욱 단단해지고 

그리하여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 번 꽃을 피운 다음 

숨을 딱 끊어버리는 

그런 대나무가 되고 싶다. 

 

-이산하 시집 <악의 평범성>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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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9.

생산자 즉 노동자와 생산물의 구별이 생산자와 생산물을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소외(자본, 화폐, 상품의 물신성)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맑스가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생산자와 생산물의 관계는 물자체와 현상 사이의 관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생산자는 생산물과의 관계에서 초월론적 존재이다. 

즉 노동자계급은 생산물의 주체로서 물 자체이다.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노동자의 생산물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노동자를 생산물로 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산 주체로 대하라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생산물의 소비와 소비를 위한 노동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자신을 생산하고 규정한다. 

노동자계급은 새롭게 생산되고 규정되어야 하는 물자체와 물자체의 관계, 

즉 실천적 주체와 실천적 주체의 관계이며 타자의 타자성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가 연대의 관계이다. 

이는 맑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환경을 변화시키지만

교육하는 자도 변화된다고 말한 것과 직접 연결된다. 

또한 이것이 거꾸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로 잡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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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8.

맑스에게서 소외의 극복은 관조를 넘어서서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을 규졍해야 함이라는 

실천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으로 만드는 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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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7.

부르주아 사회(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치 체제는 근본적으로 대의제이다. 대의제는 신적인 존재인 ‘국가’(그리고 이 국가는 추상적인 개별적 국민과 일치한다. 이는 근대 이후의 개별적 개인들이 신의 이성을 공유함으로써 신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신과 대등하게 독대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의 뜻과 의지를 대신할 매개자(또는 대리자, agent)로서의 ‘지배계급’의 신분을 호명하는 것이다.

 

대리자로서의 지배계급은 국가의 대리자이면서도 추상적인 국민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적인 국민은 ‘현실적으로’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사로잡혀서 아직 ‘신적인’ 보편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시민사회’의 일원일 뿐이다. 대의제에 의해 호명된 지배계급은 현실적인 국민을 신적인 존재의 의지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몽한다. 그런데 이 계몽은 이중적인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현실적인 국민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을 현실적인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 계몽을 통해 시민사회의 일원이었던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과 일치시키면서 시민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무화시키고 자신의 이익과 일치되는 한에서만 이러한 이익을 충족시킨다.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매몰돼 있는 현실적인 국민을 자신의 이익과 일치시키고 또한 이를 국가의 의지와 뜻으로 일치시키는 지배계급은 중세시대의 ‘사제’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선거를 통해 호명되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 사회에서 호명된다는 차이이다. 그러나 이 차이도 형식적인 요소인 선거를 빼고 나면 하등 다를 게 없다.

 

우리는 흔히 대의제에 기반한 대의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의미로, 또는 대체될 수 있는 것의 의미로 직접 민주주의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신적인 존재인 국가의 대리자를 ‘선거’를 통해 호명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라는 두 항을 넘어서는 것은 ‘만장일치’이다. 만장일치는 부르주아 식의 (보통)선거를 통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선거’ 자체에는 이미 ‘소수에 대한 배제’와 ‘소수에 대한 다수의 복종의 강요’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시민사회의 개별적인 집단적인 이해관계(집단적 이기주의)의 충돌의 장이며, 특수한 이해가 보편적인 이해로 세탁되는 장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개인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하게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개인을 근본적인 전제를 깔고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은 개별적 개인의 대립항으로서의 ‘집단적 또는 공동체적’ 개인이 아니라 이 대립된 두 항의 개인을 넘어서는 초월론적인 개인으로서의 ‘사회적’ 개인이다. 사회적 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개인이다.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다는 욕구는 단순히 감각적이고 즉자적인, 즉 개별적 개인 또는 집단적 개인의 이해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개별적인, 특수한 또는 일반적인 욕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인 욕구, 다시 말해서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결코 수단으로만 다루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도 다루라’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이다.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는 맑스에게서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사회”를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계급의식적’ 욕구이다. 이 욕구는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산하고자 하는 생산력을 총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만장일치이며, 이 만장일치를 ‘의식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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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6.

데카르트의 의심은 맑스의 계급투쟁과 연결되고, 데카르트의 생각은 계급의식과 연결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생각은 맑스의 생산 개념과 연결된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의심하는 나에 의한 실천활동(계급투쟁)의 생산물이며, 생산력이다.

그러므로 생산 또는 생산력은 기존의 경험론(유물론)-합리론(관념론)의 관계구조를 넘어섬(해체함)과 동시에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방식을 의식적으로 창조해내는(혁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은 해체와 창조를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 역시 규정되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관계구조(경험론-합리론)를 초월하는 것임과 동시에 억압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구조를 ‘의식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다.  

생산력에 의하여 기존의 생산관계(경험론-합리론 관계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수립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확립은 당연히 기존의 상부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상부구조를 생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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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랑 하나뿐인 선배 00형..

내 딸랑 하나뿐인 선배 00형이 코로나 돌파 감염으로 지난 주 목요일에 가셨다.. 

허망하고 원통하고 슬프다... 

 

이제 누가 있어 나와 같이 순대국밥을 먹을 것이며, 

소주잔을 토닥토닥 기울일까... 

이제 누가 있어 아픈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줄까... 

이제 누가 있어 내가 아플 때, 

"아.. 또 왜?"라며 내 아픔을 위로해줄까... 

이제 누가 있어 내가 외로울 때, 

"어이 당구 한판 어때? 오늘 넌 나의 밥이다" 하며, 

기꺼이 달려와 나를 위안하고 달래줄까... 

이제 누가 있어 나의 괴로울 때, 

나와 어깨동무 하며 같이 노래 한자락 해줄까... 

 

형이 힘들고 외롭고 아프고 외로울 때, 

형처럼 같이 살아야 했는데... 

그런데 울음도 안 나오고 눈물 한방울 안 나오는데... 

형은 단톡방에서 가시기 전에 

"날 위해 많이 울어주라" 했는데... 

 

이제 누가 있어 

내 딸랑 하나뿐인 형과 같이 살까... 

 

형!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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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백석 시

# 『시인 백석-백석 시 전집』 (송준 엮음, 흰당나귀, 2012) 중에서 #

 

- 백석 지음 -

 

[어린아이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바다의 주는 옷과 밥으로 잔뼈가 굴른 이 바다의 아이들께는 그들의 어버이가 바다으로 나가지 않는 날이 가장행복된 때입니다. 마음 놓고 모래장변으로 놀러 나올 수 잇는 까닭입니다.

굴 깝지 우에 낡은 돋대를 들보로 세운 집을 지키며 바다를 몰으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자라는 그들은 커서는 바다으로 나아가여야 합니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흐리고 풍낭 세인 날 집 안에서 여을의 노대를 원망하는 어버이들은 어젯날의 배ㅅ노리를 폭이 되엇다거나 아니 되엇다거나 그들에게는 이 바다에서는 서풍 끝이면 으레히 오는 소낙지가 와서 그들의 사랑하는 모래텀과 아끼는 옷을 적시지만 않으면 그만입니다.

 

밀물이 쎄는 모래장변에서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 바다에 싸움을 겁니다. 물결이 그들의 그 튼튼한 성을 허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더욱 승승하니 그 작은 조마구들로 바다에 모래를 뿌리고 조악돌을 던집니다. 바다를 씨멸식히고야 말듯이.

그러나 얼마 아니하야 두던의 작은 노리가 그들을 부르면 그들은 그렇게도 순하게 그렇게도 헐하게 성을 뷔이고 싸움을 버립니다.

해질무리에 그들이 다시 아부지를 따러 기슭에 몽당불을 놓으려 불가으로 나올 때면 들물이 성을 헐어버린 뒤이나 그때는 벌써 그들이 옛성과 옛 싸움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바다의 아이들은 바다에 놀래이지 아니합니다. 바다가 그 무서운 헤끝으로 그들의 발끝을 핧아도 그들은 다소곤이 장변에 앉어서 꼬누를 둡니다.

지렁이 같이 그들은 고요이 도랑츠고 밭가는 역사를 합니다. 손가락으로 많은 움물을 팟다가는 발뒤축으로 모다 메워버립니다. 바다물을 손으로 움켜내어서는 맛도 보지 않고 누가 바다에 소금을 두었다고 동무를 부릅니다. 바다에 놀래이지 않는 그들인 탓에 크면은 바다로 나아가여야 하는 바다의 작은 사람들입니다.

- 남이두시기해빈 南伊豆枾崎海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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