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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역사소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제까지 읽은 것은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민음사)이다.
소설 내용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대목들이 있어서 남겨본다.
- 허균이 호가 '여인'인 친구 이재영과의 독백 같은 이야기.
<<(여인) "백성들을 위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허균) "...... 꼭 그것만은 아니지. 자넨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 나는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갖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배고픔과도 같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걸세. 젊었을 때에는 세상에 반대하는 것으로 희망의 근거를 찾았지만, 이제는 누구를 반대하거나 누구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어서라면 이해하겠나?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배불리 먹고도 허기가 지는 것처럼. 쭉 그렇게 지내 왔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나의 이 지독한 배고픔이 모두 해결되는 순간을 보고 싶네."
여인!
자네도 그렇지 않나? 깊은 밤 홀로 깨어 나의 몸과 마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늙고 병든 사내가 오들오들 떨며 엎드려 있다네. 세상의 온갖 불행이란 불행이 사내의 두 어깨에 얹혔고, 사내에게는 그 무게를 지탱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고나 할까? 그럴 때 자넨 그 사내에게 무슨 이야길 하겠는가? 어떤 시가 그 사내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 밤,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네. 세 치 혀가 만들어 내는 넋두리조차 사내에겐 또 다른 짐일 테니까. 다만 나는 사내에게 두꺼운 이불과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고 싶었을 뿐이야. 하룻밤이라도 사내에게, 이 순간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선물하고 싶었거든. 여인! 우린 그 사내보다도 훨씬 가여운 족속이라네. 배가 고픈데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사지가 바들바들 떨리는데도 추위를 염려하지 않는 족속이지. 나는 그들에게, 하여 나 자신에게 삶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고 싶다네. 눈부시게 행복한 순간으로부터 처참한 지난날을 돌이키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순간이 올까?"
"올 걸세. 점점 그 순간을 향해 가고 있어."
"도대체 자네가 만들고픈 세상은 어떤 건가?"
허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의 풍경이 떠오르는군. 서당에서 함께 서책을 읽고, 그 서책에 적힌 대로 이 세상이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아이들! 동틀 무렵 들판으로 나가 황혼이 찾아들 때까지 땀 흘려 일하는 어른들! 죄수를 가두는 감옥은 텅 비었으되 곡식을 쌓아 두는 곳간은 차고 넘치는 나라! 누구나 창고로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의 곡식을 꺼내 올 수 있으며, 태어난 곳이 북삼도나 전라도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첩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는 나라!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외침을 받기 전에 군법을 철저히 시행하는 나라! 밤에는 들일에 지친 몸을 편리 누이고 휘영청 둥근 달을 바라보거나, 청주 한잔을 곁들인 노래가락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좋겠지."
"참담한 현재를 견디려는 기만책은 아닌가?"
"기만책이라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차근차근 옮기자는 게 어떻게 기만책이겠는가?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면 알려 주게. 자넬 따를 테니."
이재영은 허균의 확고한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의 가슴 한 켠도 천천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 불, 범, 표범보다 두렵기는 더 한데, 위에 있는 자가 한창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림은 무엇인가. 대저 이룩된 것만 함께 즐거워하면서, 항상 보는 것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자는 항민(恒民)이다. 항민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뼛골이 뽑혀지며, 집에 들어온 것과 당에서 나온 것을 다 내어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면서(응하면서), 시름하고 탄식하며 윗사람을 탓하는 자는 원민(怨民)이다. 그러나 원민은 반드시 두렵지 않다. 자취를 고깃간에 숨기고 남 모르게 딴마음을 쌓아서, 천지간을 곁눈질하다가 혹시 그때에 사고라도 있으면 그 소원을 부리고자 하는 자는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은 크게 두렵다. 호민은 나라의 사단을 엿보다가 탈 만한 사시(事機)를 노려서,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 번 호창(呼唱)하면 저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이며, 모의하지 않아도 외치는 것은 같아진다. 항민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호미와 고무래, 창자루를 가지고 따라사서 무도한 자를 죽이게 된다.] - 허균, <호민론(豪民論)>
- [왕융이 일곱 살 때 일찍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길 옆 오얏나무를 보았는데, 열매가 많이 열려 가지가 꺾일 정도였다. 아이들이 다투어 달려가서 그것을 땄지만, 왕융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왕융이 대답하기를, "나무가 길 옆에 있는데도 열매가 많이 달려 있으니 이는 틀림없이 쓴 오얏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따서 맛을 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 유의경, <<세설신어(世說新語)>>, <아량편(雅量篇)>
~** 메모 11 **
- “예를 들어 주자학은 천을 초월자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태극(공)으로 보지만, 이는 별로 모순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주자학에서 천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태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변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천이 인격적으로 표상된다고 해도,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태극이다. 이리하여 주자학에서 태극에 이르는 길, 즉 수양으로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은, 동시에 ‘천명’을 인식하는 일인 것이다. 자기 내부의 ‘이’와 세계의 ‘이’는 이렇게 상호 변환 가능한 관계에 있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초월=내재라는 사고이다. 초월=내재라는 것은 결국 내재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음’이나 의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사상가들은 진사이나 소라이가 ‘천’의 초월성을 강조했음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천의 초월성은 주자학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월=내재와 같은 ‘내부’에서 출발하는 일, 또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즉 고립된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을 거절하는 일인 것이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공자만을 성인으로 본 것은, 공자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흔해빠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어디에나 있는 인간의 초월성을,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 그가 『논어』에서 발견한 것은 ‘심원’한 언어나 초월적인 의미가 아니라 ‘평명(平明)’한 언어의 심원함과 초월성(외재성)인 것이다.” (같은 책 243쪽)
- “하지만 그(진사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을 감각이나 성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통된 ‘마음’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개개인이 서로 타자라는 것이다.” (같은 책, 244쪽)
- “주자학에서 각 개인은 이른바 초월론적 자기(훗설)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성(性)’이 다양하다고 할 때, 진사이는 그러한 초월론적 자기를 해체하는 것이다. [……] 이와 똑같이 진사이에게 주자학은 타자와의 관계(윤리적 영역)를 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도덕을 과시해도, 본질적으로는 ‘격물치지’, 즉 ‘지에 도달하는’ 일이 과제인 것이다. [……] 그리고 이 동정을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때, 진사이는 ‘성선설’이나 ‘생득설(生得說)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영역이 지에 의해 기초 부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같은 책 246~247쪽)
- “인간의 본래적인 동일성, 진리나 완전한 해방에 도달할 가능성이라는 이념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잔인 각박’으로 전화한다. 만인이 동일하므로, 진리에 도달한 자는 진리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당연히 절대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주자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사이의 숙(塾)에 권력관계가 없는 것은, 진사이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이 관계 없이 인간의 보편적인 동일성 등이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사이는 일반적인 타자에게 강의할 수 있는 교의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그의 주석에 완결 따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책 250~1쪽)
- “그 어떤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형식적·구조론적으로 등가라고 보는 견해는 결코 서양 중심주의를 전복시키지 않는다. “이 민족중심주의는 역으로 자기는 반=민족중심주의라고 생각하는, 해방적 진보주의의 민족중심주의인 것이다.”” (같은 책 255쪽)
~** 메모 9 **
- “히코하치의 신분은, 역시 다른 조건과 결부되어 있기는 했지만, 눈앞의 봉건적 신분 질서 관계를 명백하게 초과하여 부정하는 곳까지 그를 ‘개(個)’로서 밀어붙였다.” “주어진 신분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한, 거기에서 ‘개’는 나타나지 않는다. ‘개’는 이 질서와의 마찰, 충돌을 통해 나타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202쪽)
- “나카노 시게하루가 ‘개’를 ‘신분 질서와의 마찰, 충돌’ 안에서 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쿠라하라 코레히토처럼 ‘개’를 계급 안에 종속시키는 것도 아니며, 히라노 켄처럼 ‘개’를 집단과 마주 세우는 것도 아니다.” (같은 책, 202쪽)
- “요컨대 나카노가 말하는 ‘개’는 집단에 맞서는 ‘개’라든지, 자기의식으로서의 ‘개’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관계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다. ‘실재로서의 개’는 물론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갈등·알력·투쟁으로만 존재한다. ‘개’를 내세우는 것은 관계이지 ‘근대적 자기의식’이 아니다.” (같은 책 203쪽)
- “‘개’는 어딘가 일정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네덜란드에 망명하고 있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개’이지만, 프랑스에 받아들여진 그것은 이미 ‘근대적 자의식’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를 보지 않는다면, 근대의 비판이나 근대의 초극이라는 공소한 말을 가지고 놀게 된다. 맑스에 대해서도 똑같다. ‘집단과 개’, ‘지식인과 대중’, ‘서양과 일본’ 등의 대립 개념은 끊임없이 변용되는 다수적(多數的)인 여러 관계의 알력과 관계해서만 ‘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회적인 다수성을 이원적 대립으로 바꾸며, 역사적인 것을 비역사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것’을 내면화하고 소거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계를 지워버릴 수 없으며, 그 관계에서 탄생되는 ‘개’를 전혀 지울 수 없다.” (같은 책, 204쪽)
** 경험론에 대한 메모 **
경험론은 앎과 관련하여 항상 외부(객관)로부터의 감각 데이터의 수용을 우선시한다.
이를 정치적으로 볼 때, 개별자들은 항상 자기 외부를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즉 자신의 외부로부터의 외적인 욕망에 지배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때 개별자는 계약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이러한 경험론의 정치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결국 부르주아 독재가 될 수밖에 없다.
**** “그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식인과 대중’이라는 이원적 대립 안에 있다. 그리고 이 대립은 동일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인이란 원래 대중이며, 대중으로부터의 소외이자 대중으로 귀착해야 하는 존재 운운하는 원환 속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책, 200쪽)
***** “‘다수’라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개인도 서로 다른 관계에 속해 있으며, 오직 그렇게만 ‘개(個)’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끄럽고 한결같은 공간이 아니라 여러 관계가 다수의 결절점에서 ‘개’를 낳은 다양체(多樣體)이다.” (같은 책, 201쪽)
* 인간의 자유는 타자의 타자성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도덕(모럴)을 뛰어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모럴)은 타자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때 도덕(모럴)은 특정한 시·공간의 집단의 도덕(모럴)이다. 이 집단에 대립하여 이 집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개인'이다. '사회성'은 '타자의 타자성'을 지향하며, 따라서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사회적'이며, 자유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예술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개인은 '물 자체'이다. 또한 '초월론적'이다(단독자로서의 코기토와 마찬가지로).
** "모럴이 없다는 것 자체가 모럴이라는 것과 똑같이, 구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에서, 198-9쪽)
*** "이렇게 사용된 '생활자', '서민', '대중', '국민' 등의 개념이야말로, 지식인의 자의식, 즉 자의식 그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자의식이 낳은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가 말하듯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여러 조건과 여러 전제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의식 자체를 '떼어놓는' 것이다." (같은 책, 199쪽)
* "사회적 편성과 국가란 항상 특정한 여러 개인의 생활과정이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러 개인이라는 것은, 자기나 타인 안에 등장하는 여러 개인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 즉 노동하여 물질적으로 생산하는 여러 개인, 따라서 일정한 물질적인 조건, 또 그들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 여러 제한, 여러 전제, 여러 조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여러 개인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 "맑스가 이를 하나의 '환멸'과 함께, 다시 말해 자기의 사념이나 언어가 그 자체로 폐쇄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러운 자기 인식과 함께 말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체가 그저 흔한 이론이 되어 버린다. 맑스의 경우,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그 무엇, 달리 말해 초월할 수 없는 '타자'와의 만남 이외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이를테면 그것을 소거하는 사고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에서, 193쪽)
* "관계의 외면성이란 다른 것과의 관계의 외면성이며, 달리 말해 타자의 타자성이다. 즉 자기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타자성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라이프니츠 증후군>, 147쪽)
** "우리는 '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차이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대립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 173쪽)
*** 무엇인가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항상 이원론적인 대립구조를 정식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은 늘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길들여져 있는 존재이며, 선은 권력이고 악은 비권력임을 이 구조 속에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확실히 나카노는 '알기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 '느낌'으로 파악되고, 그 느낌에서부터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히라노 켄은 그것을 '정치와 문학'뿐 아니라, '조직과 개인', '예술과 실생활', '표현자와 실천자'라는 식으로 정식화했다. 이는 알기 쉽다. 이 이원적 도식 안에서 나카노는 아주 애매하게 보인다. 히라노는 나카노를 파악하고자 필사적으로 시도했으나, 결국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나카노의 저항은 이 이원적 대립 그 자체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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