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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은 점진이다

 

찰리채플린 [모던타임즈]

 

 

"야, 선동하지마"

"난 파란마음이야, 붉게 물들이지 말라고"

 '선동'이라는 단어가 내 싸다구를 날린다.

 

교재에 '선동'이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부정적인 반응이 예상되어 주춤했다. 활동가조차도 선동이라는 단어에 질색한다.

 

진보그룹에서조차 선동은 어느새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전제한 버림받은 자식이 되어 버린 셈이다.

선동이 도대체 왜 나쁜가. 

 

선동은 잠재된 가능성,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일깨우고 참여하게 하는 동기유발의 의미를 포함한다. 주로 그 방식은 문건(성명서, 논평), 혹은 연설을 통한 것이었다. 한명씩 앉혀놓고 일대일로 관계맺기 하는 조직화를 선동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뭐랄까 집단적인 움직임을 추동하는 의미랄까.

 

신념을 교환하고 움직이게 하는 '선동'은 왜 나쁘게 받아들여질까. 상당부분 진보그룹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보는 나는 나름 생각을 정리해봤다.

 

선동은 자기인식이 작동하기 전에 감정을 울리는 측면이 있다. 가슴 깊숙히 자리잡은 분노를 끌어올려 울컥하게 만드는 연설을 들어보라. 당장 옆에 있는 돌멩이라도 주워 저항하고싶은 맘이 절로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그 저항이 아무런 해결책(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을 내놓지 못할 때, 아니면, 흠모에 마지 않던 선동가가 엉뚱한 선택을 해서 지탄을 받을 경우, 선동에 온전히 가슴을 내어 준 대중은 차갑게 돌아서기 마련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과를 책임지는 자발성의 결여다.

 

'선동'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람을 모을 수는 있었지만, 대중이 선동가 혹은 선동한 그룹에 대리책임을 묻는 의존적인 운동문화를 만들어 온 주범이기도 하다.

 

결국, 선동은 급진주의자에게 필요한 방식이었다고 본다.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은 마찬가지지만, 온건 개량주의를 부정하는 급진주의 말이다. 한국사회는 급진주의가 대세였다. 발등에 불은 반사적으로 비벼 꺼야 했기 때문이다. 행동하고 성찰할 새도 없이 숨가쁘게 행동과 행동을 거듭해야 했던 지난 몇십년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한국의 질적 진보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내가 만나는 친구, 가족, 이웃은  시민권에 있어서 법이나 제도를 근거삼아 권리주장에는 강해졌지만, 세상에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변화는 질문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술자리에서 민증을 까는 것부터 시작하고,  무엇을 전공했는지 묻는가(전공과목을 열심히 하지 않은 운동권이면서). 질문의 수준이 고작, 나이, 대학, 직장, 급여수준... 그 다음부터는 질문과 상관없이 나이많은 사람이 어린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다 그런건 아니지 물론)

 

흥분을 가라앉히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건, 자의식이 부족하다는 뜻일게다. 운동권도 교양에 젖어 질문하지 않는 이가 많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슨 진보란 말인가.

 

우리는 그간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예민하게 살펴야 할 것들을 놓쳐왔다. 선동은 KTX를 타는 티켓이었고 민주주의라는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했지만 대중 인식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의 대안은 조직화다.

한명 한명이 변화하고 그들이 모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화 운동이 한때는 온건 개량주의라고 비난을 받던 때도 있었다. 그동안 급진은 소수 엘리트였고 그들만 티켓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지에 내리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 탓을 운동권에 푸념하기도 했다. 적대시하기도 했다. 뭔가 너흰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시간개념상 빠르다 느리다를 본다면 조직화 운동은 온건이다.

하지만, 누구나 급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조직화 운동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점진적인 조직화 운동이 급진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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