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답변- '가사노동과 계급의식' 문제에 대해
얼마전에 제가, 이재유, '계급의식의 형성과 보편화에 관하여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2006에 대해 촌평을 한 바 있습니다. 가사노동과 계급의식입니다. 이 글에 대해 논문 저자인 이재유님이 상세한 답변을 보내주셨습니다. 본인의 동의를 거쳐서 답변 글을 올립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충분하게 논의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논평과 의견 제시를 통한 토론 활성화를 기대하면서 글을 올립니다. (일주일만에 덧붙임: 토론 자리가 생기더라도 그 자리가 '밑에서 본 세상'은 아닐 게 확실하다. 민망해라.^^)
먼저 이재유 박사학위 논문의 축약본에 해당하는 진보평론 기고글, 그리고 제가 쓴 촌평('가사노동과 계급의식')과 이 글에 달려있는 미류님의 코멘트를 읽으시면, 논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련 글 목록: 1. 계급의식과 노동자 계급의 자기 생산, 그리고 여성의 조직화 (이재유 논문의 축약본 격인 <진보평론> 기고 글) 2. 가사노동과 계급의식 (신기섭의 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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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신 님과 미류 님의 의문점에 대한 답변>
먼저 제 학위 논문 내용에 대한 논평을 블로그에 올려 주신 마리신 님과 덧글을 달아 주신 미류 님께 너무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마리신 님과 미류 님이 제기하신 의문점에 대해 미흡하나마 답 글을 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께서 제기하신 의문점은 크게 3가지인 것 같습니다.
- 1.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 2. ‘가사노동을 떠넘기기’ 위한 ‘가사노동 띄워주기’로 가사노동을 기술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점이 든다.
- 3. ‘가족 관계’가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데 의문이 든다. 덧붙이자면 가사노동이 임노동과 달리 (단순히) 상품화되지 않은 노동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실마리를 열어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본다.
위의 3가지 의문에 대해 답변을 하기 전에 먼저 제 논문의 의도와 맥락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그래야만 3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변을 좀더 잘 이해하실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마리신 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제 논문은 노동자 계급 대중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적 상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 대중이 왜 계급의식을 가지지 못하는가, 그런데 계급의식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제 논문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과 계급의식 사이의 모순(괴리)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을 지양(해소,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계급-계급의식 사이의 모순. 이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서 기존의 맑스주의는 계급에 중심을 두거나(경제 결정론) 아니면 계급의식(경제 결정론을 비판하는 루카치, 알튀세 등)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맑스주의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첫째, 계급에 중심을 두고자 한 맑스주의는 자본의 모순에 따라 노동자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며 노동자 계급의 존재 조건이 점점 더 열악하게 되어 노동자 계급이 필연적으로 계급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서구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자 계급이 혁명적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보수화되어 가고 있으며,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직면한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동력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하며, 따라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계급의식에 중심을 두고자 했던 맑스주의는 노동자 계급 자체 내에서는 계급의식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 자체 외부에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전위 당 또는 지식인이 노동자 계급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노동자 계급을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며 역사적으로도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아니면 알튀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계급 없는 계급투쟁”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맑스주의의 주장은 맞기도 하고 틀린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대상으로서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자본을 통제하고 자본을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러 가는 주체의 측면이 있는 모순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맑스주의는 노동자의 대상적 측면만 보았지, 주체적인 측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첫 번째 맑스주의는 지금 민주노총이 자본의 상황에 따라 끌려 다니는 것처럼 자본의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노동자가 그 모순의 정도에 따르는 계급의식을 가진다고 봄으로써 노동자를 대상의 측면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맑스주의는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계급의식의 계몽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동자의 주체적인 측면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순적인 존재인 노동자 계급의 두 측면 중에서 주체적인 장소가 어디이고, 이 장소를 전 사회적으로(보편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장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모순적 존재 그 자체인 노동자 계급을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노동자 계급은 ‘임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와 ‘비 임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라는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임금 노동자로’서의 영역은 노동자가 자본의 대상이 되며, 자본을 위해서 노동하고, 자본에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강제의 장소입니다. 저는 이 장소를 <공장 안>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장 안>에 있는 임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개별적이고 원자화되어 있으며, 자본의 경쟁 논리에 따라서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자입니다. 또한 이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이미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가 자신을 스스로 조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 임금 노동자’로서의 영역은 자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을 생산하는 영역입니다. 즉 노동자 자기 생산 영역입니다. 노동자 자기 생산 영역은 자본의 전제이며, 동시에 노동 과정 생산의 과정이기 때문에 자본의 생산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생산 영역, 즉 경제(토대) 영역이자, 자본의 생산 외부에 있는 상부구조의 영역입니다. 저는 이 장소를 <공장 밖>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장 밖>에서 노동자는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으며,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반자본성)과 보편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공장 안>을 공적인 영역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공적’이라는 말에는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 사회적 관계를 자본이 조직하고 있으며, 자본은 공공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공장 밖>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고 있는데, 이 영역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에 의해 조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조를 포함한 좌파들은 자꾸 <공장 안>의 임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만을 조직하고자 합니다. 이는 매우 난망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노조를 포함한 좌파들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조를 포함한 좌파들이 이 <공장 안>의 노동자에게 <공장 밖>의 전망을 가지고 조직하고자 한다면, 이는 <공장 안>의 노동자에게는 이미 환상적인 얘기이고 사실상 씨알이 먹히지 않는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노조를 포함한 좌파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고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공장 안>의 노동자를 노동자 계급의 주류 또는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공장 밖>을 사적이고 부차적이며 주변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때문에 페미니즘에 의해 비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들은 페미니즘을 좀더 공부한 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계급으로서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장소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곳은 <공장 밖>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공장 밖>이 계급-계급의식 사이의 모순이 지양(해소, 해결)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적인 장소는 그람시의 시민사회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람시의 시민사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람시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시민사회는 강제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의는 상품 유통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동의와는 확연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상품 유통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동의는 가치(자본)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동의입니다. 그리하여 이 동의는 결국 가치(자본)라는 보편자로서의 물신(物神)에 의해 종속당하고 지배당하는 관계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동의입니다.
이에 반해서 그람시에게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의는 가치(자본)를 매개로 한 동의가 아니라 생산자(노동자) 자신의 직접적인 필요욕구에 의해 필요한 만큼 이루어지는 동의입니다(맑스는 고차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필요한 만큼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를 노동자 스스로가 기획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은 현재 남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직접적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의는 가치(자본)를 매개로 한 양적 교환 관계에서 딱 임금만큼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동의가 아닙니다. 필요한 만큼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욕구에 바탕을 둔 질적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동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장 밖>, 즉 시민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자본의 생산처럼 양적인 발전이 아니라 질적인 발전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적 발전은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끊임없이 실현시켜 나가는 발전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동의의 과정에서는 질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맑스가 말했듯이 자본주의 시대의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이전의 가축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이 받는 임금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즉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시킬 수 없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서로의 질적 발전이라는 동의의 관계를 자기 자신 안에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산을 통해 노동자는 자기의식인 계급의식의 최초 형태(맹아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자의 자기 생산이 이루어지는 시민사회의 기초는 노동자 계급 가족 형태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사노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 가족 관계는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들 간의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암묵적으로 서로의 질적 발전을 위해 결합된 관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는 오늘날 노동자가 개별적인 노동자 계급 가족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이러한 이유로는 부르주아의 가족 이데올로기에 노동자들이 물들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노동자들을 단지 자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데올로기는 자본이 만들어 낸 것이지 노동자 자신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유는 자신의 유적 존재성을 가족 이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동조합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노동조합은 또한 “여러 지역 투쟁을 하나의 민족적인 투쟁으로,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시키기 위한 결합체”로서 정치적 투쟁을 이끌 당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하여 투쟁의 진지가 없는 외롭고 고독한 섬이기 때문에 결국엔 자본에 투항하거나 해체됩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지양되어야 할 개별적인 노동자로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유적 존재성을 가족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 이와 관련하여 더 얘기해 보자면 자본의 논리가 관철될 수밖에 없는 <공장 안>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백날 외쳐 봐도 그것은 공염불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자신의 유적 존재성을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노동자 계급 가족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해질 수밖에 없으며, 노동조합은 이러한 조합원의 이해에 따라서 자신들의 임금인상만을 외치는 경제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좋게 봐 주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품 유통 영역에서의 동의의 관계, 즉 손해 보지 않을 만큼의 딱 고만큼의 관계(예를 들어 민주노총이 이전에 실업자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한 것)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가족이 개별적 가족에 머물게 될 때 이 가족의 개별성은 자본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으로 지양(해소, 해체)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개별적 가족이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개별적 가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회화시키고 공공적인 것으로 현실화시켜 진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개별 가족의 보편성이 자본의 보편성 속으로 해소되지 않고 이 자본의 보편성을 노동자 계급의 필요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특수한 사용가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의 자기 생산 과정에서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특수한 사용가치, 수단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족이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사회화시키고 공공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가사노동의 특성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사노동은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가사노동은 일단 가족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의 가치 전체를 표현해 줄 수 있는 등가형태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들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가사노동이 행해지는 과정 이후에 가사노동은, 욕구를 실현시킴으로써 새롭게 생산된 가족 구성원들 자체를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 주는 등가형태로서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누구나와 직접적인 사회적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보편적인 것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를 자유로운 개인으로 만들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렇게 해서 가족 구성원들은 가사노동을 통해 상호 의존적인 통일적 관계, 다시 말해서 직접적이고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별적인 가족 안에서는 여전히 맹아적인 형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가족에 머무는 한, 가사노동은 개별적 가족 형태 안에서만 머물기 때문에 보편자이기는 하지만 개별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개별적인 것들을 자기 안으로 지양하는 (절대적 보편자의 역할을 하는) 자본에 직간접적으로 종속됩니다(이러한 형태는 노조의 경우 관료화·보수화로 귀결되며, 가족 형태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가부장적 형태로 귀결됩니다). 그리하여 가사노동의 담당자인 여성은 보편자로서의 등가형태의 자리에 있긴 하지만 그것이 개별적인 가족 형태 안에 머무는 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소외의 장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소외의 장소에 있는 여성은 단지 자본이 바라는 노동력의 재생산만을 담당함으로써 자본의 이해에 종속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마리신 님과 미류 님께서 제기하신 문제에 답을 하는 것으로 제 논문의 거친 개괄적 설명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가사노동의 사회화(계급의식의 형성과 보편화의 출발점)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사노동의 담당자인 여성(노동자 계급 가족의 여성은 거의 대부분 노동자 계급의 일원입니다)의 연대와 정치적 세력화의 장소 확보라고 생각합니다(이로부터 여성은 진실로 주체로 태어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제 논문에서는 <여성의 조직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가사노동이 개별 여성의 수준으로 머무르게 된다면, 즉 부차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머무르게 된다면, 가사노동은 여전히 기존 노동력의 재생산 수준(이는 자본에 종속되는 임금 노동자의 측면(딱 임금만큼에 해당되는))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기존 노동력의 재생산과 관련된 가사노동 부분은 상품화로 이어지게 되며, 이런 상황은 확대·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노동자는 임금 노동자와 비 임금 노동자라는 모순된 두 측면의 통일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자기 생산의 토대인 가사노동 역시도 이러한 모순된 두 측면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비 임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의 자기 생산(유적 존재로서의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것은 새로운 세대의 생산뿐만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질적 발전으로서의 생산입니다))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여성 역시도 새로운 인간을 등가형태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이 가사노동 부분을 여성 전체에 떠넘기려는 음모일 수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반문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이는 질적으로 발전된 새로운 인간으로서(보편적/유적 인간으로서) 노동자는 꿈도 꾸지 못할 뿐더러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여성은 보편적이고 유적인 존재(인간)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부차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서의 가사노동에 종속되어 있는 개별자(개별적 여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반드시 분쇄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노동자의 탄생은 필수적으로 가사노동의 사회화, 즉 여성의 연대와 정치적 세력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사노동의 사회화, 즉 여성의 연대와 정치적 세력화의 장소 확보는 전 계급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계급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선결되지 않는 한 계급과 계급의식의 형성은, 그래서 혁명의 진지화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가사노동을 떠넘기기’ 위한 ‘가사노동 띄워주기’로 가사노동을 기술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점이 든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가사노동에는 현실적으로 혁명을 진지화시킬 수 있는 맹아 형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노동자의 모순된 두 측면 중 비 임금 노동자로서의 측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사노동을 띄워 주어서’ 전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지배를 더 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것은 제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3. ‘가족 관계’가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데 의문이 든다. 덧붙이자면 가사노동이 임노동과 달리 (단순히) 상품화되지 않은 노동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실마리를 열어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본다.
이 물음에 대한 답도 1번의 답에서 어느 정도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가사노동이 단순히 상품화가 되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지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과 관련된 가사노동의 많은 부분들은 상품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질적으로(이 말이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내는 일(이 일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가사노동의 사회화 부분입니다)은 자본이 관여할 수도 없고 관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은 노동자를 짐승이나 가축만도 못하는 존재로 여기고, 딱 그만큼만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만을 지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본은 이 부분을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가사노동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단지 기존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즉 임금노동자로서의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보편적/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산이라는 측면(즉 비 임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의 새로운 자기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측면이 바로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들을 원자화되고 개별화된 개인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지배를 공고화하려는 자본의 의도에 반대하여 사회적이고 보편적이며 유적인 개인을 지향하려는 반(反)자본의 싹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싹이 잘 자라서 거대한 새로운 사회의 숲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연대와 정치 세력화를 통한 여성 주체화의 장소 마련이 선결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재유 2006/05/23 15:06
마리신 님, 고맙습니다^^!!!
marishin 2006/05/23 17:05
이재유님, 고맙긴요, 뭐. 아무튼 이런 문제의식이 좀더 깊이있게 논의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