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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 - 귄터 그라스 대담

<뉴레프트 리뷰> 2002년 3-4월

 

유럽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인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와 독일의 작가 그라스가 1999년 나눈 대담입니다. 부르디외가 숨진 지난해 그를 기리기 위해 영국 <뉴레프트 리뷰>가 이 대담을 실었습니다. 4년이 지났지만, 유럽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정치, 사상을 왜곡시켰는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두 사람은 구체적인 대응방안이나 현실에 대한 진단에서는 약간 차이를 보이지만, 계몽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은 한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퇴보를 사회 진보의 표준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고 유럽연합을 이끄는 두 나라의 문화풍토에서 계몽의 운명에 대한 프랑스 사회학자와 독일 소설가의 대담.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1930~2002): 피에르 부르디외가 숨짐으로써, 세계는 가장 유명한 사회학자를 잃었으며 유럽의 좌파들은 지난 10년 동안 가장 열정적이며 권위 있던 목소리를 잃었다. 프랑스 남서부 외딴 곳에서 태어난 부르디외는 젊은 시절 철학자로 훈련받았으나ㅡ그는 알제리 수도 알제의 고등학교에서 한동안 가르쳤다ㅡ알제리 전쟁을 겪은 뒤 사회과학자로 탈바꿈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으며 제4공화국이 전복된 해에 출판된 그의 첫번째 책은 <알제리 사회학>(Sociologie d'Algérie 1958)이다. 60년대 중반부터 그는 경험적 연구와 이론적 야심을 훌륭히 결합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일련의 연구서를 내놨다. 그의 전 생애동안 중심 사상은 불평등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형태와 기제(메커니즘)들에 대한 장기간의 연구로 볼 수 있다. 1968년 5-6월의 봉기 훨씬 전에 그는 학생조직(<후계자들> Les Héritiers 1964)에 초점을 뒀으며 이 중요한 연구는 나중에 가르침(<재생산> La Reproduction 1970)과 교수집단(<호모 아카데미쿠스> Homo Academicus 1984)으로 확장됐다. 교육에 관한 논문들과 동시에 예술의 ‘문화의 장’에 대한 중요한 논문들도 나왔다. 이 논문들은 사진에서 출발해 박물관(<예술의 사랑: 유럽의 미술관과 대중> L'Amour de l'art 1966), 기호(<차이> La Distinction 1979), 그리고 19세기의 새로운 문학개념 생성(<예술의 규칙> Les Règles de l'art 1992)으로 확장됐다.

정치적으로 부르디외는 언제나 좌파였다. 미테랑 집권 시절 사회당 정권에 질린 그는 1990년대 들어 날로 더 급진적인 글을 썼다. 1993년 프랑스 사회당이 도입한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인간에 끼친 여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인 <세상의 비참>은 이런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1995년 그는 쥐페 정부에 맞선 대규모 파업투쟁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앞장섰으며, 그 이후 조스팽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대세력을 조직하고 대변했다. 그는 조스팽 개인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이었다. ‘저격수’ 방식 개입 연대망을 구축한 사람이며 행동하는 지성인 동시에, ‘좌파의 좌파’ 운동가이며 유럽 사회운동의 옹호자인 그는, 말년에 프랑스 언론의 부패상과 지식인들의 타협주의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큰 미움을 샀다. <행동하는 지성> 시리즈의 하나로 발간된 세르지 알리미(Serge Halimi)의 <새로운 감시견들>이 바로 이것이다.

<뉴레프트 리뷰> 독자들은 그와 테리 이글턴의 대담과, 그의 생각을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생각과 나란히 비교한 알렉스 칼리니코스(Alex Callinicos)의 글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정치적 비타협 정신이 잘 드러나는 1999년 그와 귄터 그라스의 대담을 소개함으로써 그를 기린다. 그는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에밀 졸라와 장폴 사르트르를 계승했다.

 


 

그라스: 독일에서는 사회학자와 작가가 얼굴을 맞대는 것이 흔치 않습니다. 한쪽엔 철학자들이 자리잡고 그 반대편에는 사회학자들이 앉으며, 작가들은 뒷방에 모여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죠. 우리가 이렇게 대담을 나누는 것 같은 일은 참 드뭅니다. 그러나 당신의 책 <세계의 비참>이나 제가 최근 쓴 책 <나의 세기>를 생각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밑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둘 다 사람들 머리 위에 떠드는 것도, 승리자의 위치에서 떠드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일에서 패배자와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 경계에 선 이들 쪽에 서 있기로 악명 높죠.

 

<세계의 비참>에서 당신을 포함한 저자들은 각자의 개성을 억누르고, 프랑스의 사회 조건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보다는 그에 대한 이해에 집중했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분명히 다른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겠죠. 작가인 저는 당신의 이야기들을 기초 자료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3세대 금속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어 사회에서 격리되는 ‘종킬(Jonquil) 거리’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농촌을 떠나 파리로 와서는 밤 근무를 하면서 편지를 분류하는 젊은 여성 이야기도 있습니다. 몇년만 지나면 꿈을 이뤄서 고향으로 돌아가 우편배달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모집에 응한 다른 젊은 여성들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끝내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영원히 우편물 분류원으로 남죠. 이런 일터에 대한 묘사 속에서 사회 문제가 슬로건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이런 것이 전 아주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 관계에 대해 이렇게 쓴 책이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어느 나라에나 이런 책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이제는 완전히 경제에 의해 대체된 정치의 실패의 결과에 대한 세밀한 연구들을 모아놓은 전집이 있던가요. 제 마음 속에는 사회학의 질서 일반에 대한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에는 유머가 없어요. 제 이야기에서는 중요한 구실을 하는 실패의 코미디 말입니다. 어떤 대립에서 나타나는 모순이라고 할까요. 왜 이런 게 없는 걸까요?

 

부르디외: 실제 삶을 겪은 이들로부터 경험을 직접 얻어내 기록하는 것에 압도되어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너무 가슴 저미고 고통이나 아픔으로 가득 찬 몇몇 이야기는 책에서 빼야하는 게 아닌가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라스: 제가 유머를 거론한 것은, 비극과 코미디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둘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뜻에서 입니다.

 

부르디외: 우리가 원한 건, 독자들이 이 모순들을 꾸밈 없는 본디 모습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한가지 지침은 문학적인 것을 피하자는 겁니다.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드라마들을 접하게 되면 잘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원칙은 가능한 한 혹독하리 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이고 거의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죠.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통해 문학성을 달성하려고 비문학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었기 때문에, 책은 과학적이었으며 제가 보기엔 문학적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낸 폭력이 너무나 심해서, 순전히 개념적인 분석으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정책 비판들이 정책의 결과에 대해서는 똑같이 적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라스: 그건 책에도 나타나더군요. 종종 인터뷰 진행자들이 대답에 충격을 받아서 말문이 막히고, 그래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생각의 흐름을 잃어버리더군요. 내부의 강력한 고통이 표현되기 때문이겠죠. 인터뷰 진행자들이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을 강요하는 식으로 개입하지 않는 게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한 질문을 좀더 진행해보죠. 사회학자인 당신이나 작가인 저는 계몽의 후예들입니다. 이 전통은 적어도 현재 독일과 프랑스에서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계몽 과정이 실패했거나 뭔가 미비했다거나, 아니면 이제는 계몽이 필요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계몽 과정에 결함이 있고 이 과정이 완성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이성을 순수히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인 양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계몽이 처음 제시됐을 때 지녔던 상상력의 다양한 방식이 몇세기를 거치면서 사라졌고, 그렇게 사라진 것 가운데 하나가 유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 몽테뉴인데요. 그리고 볼테르의 <캉디드(Candide)>나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Jacques le fataliste)>에 보면 당시의 주변 상황이 오싹할 지경입니다만, 고통과 실패 속에서도 코믹하고 의기양양한 인물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저는 계몽의 일탈을 보여주는 증표는 웃는 법, 고통 속에서도 웃는 법을 잊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패배했으나 승리자처럼 웃는 사람이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부르디외: 그러나 계몽의 전통을 잃었다는 느낌과 신자유주의 전망의 전지구적 승리 사이에는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를 보수 혁명으로 봅니다. 이 용어는 과거를 복구하려는 것이지만 외관은 진보적이고, 퇴보를 진보의 모습으로 치장하는 이상한 혁명을 두고 독일에서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쓴 용어죠. 이 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을 반동적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우리 두사람 모두 겪은 거잖아요. 우리는 쉽사리 구식이며 “답습하는 이들”이며 “퇴보하려는 이들”로 취급되니 말이에요.

 

그라스: 공룡...

 

부르디외: 그렇죠. ‘진보적인’ 복고를 위한 강력한 보수혁명입니다. 오늘 당신이 한 말 일부에도 이 영향이 나타납니다. 유머가 부족하다는 말 같은 경우요. 그러나 시절이 재미라고는 없어요! 진정 웃을 일은 없습니다.

 

그라스: 우리가 즐거운 시절을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문학이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웃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또 다른 항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보수 혁명을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지금 신자유주의라고 팔고 다니는 것은, 역사는 되돌아간다는 믿음을 지닌 19세기 맨체스터 자유주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50년대에도, 60년대에도, 심지어 70년대에도, 자본주의를 문명화하려는 시도가 유럽에서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계몽시대의 독창적이고 제멋대로인 후예라고 한다면, 서로를 어느정도씩 견제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종류의 책임을 떠안을 의무가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를 사회적 시장 경제라고 부르며, 심지어 기민당(독일 최대의 우파 정당: 옮긴이) 안에서도 바이마르 공화국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감대가 80년대 초반에 깨졌죠. 그리고 공산주의 위계질서가 무너진 이후, 신자유주의라고 이름을 바꿔 단 자본주의는 통제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폭동을 일으켜도 된다고 느끼게 됩니다. 더는 균형을 맞출 세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엔 심지어 책임의식 있는 일부 자본가들까지 경고의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구가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며, 자유시장의 대안은 없으며 신자유주의는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 신자유주의가 주장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공산국가 중앙위원회의 관료들이 이전에 그랬듯이 가톨릭도 도그마에 빠져서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구요.

 

부르디외: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힘은 적어도 유럽의 경우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정착시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슈뢰더(독일 총리), 블레어(영국 총리), 조스팽(프랑스 총리)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려고 사회주의를 운운했습니다. 이 때문에 비판적인 분석이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논쟁의 용어가 모두 뒤집어졌으니까요.

 

그라스: 경제에 대한 투항이 나타나고 있죠.

 

부르디외: 동시에, 사민주의 정부의 왼쪽에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1995년 총파업은 광범한 노동 대중과 지식인을 결집했습니다. 그 이후 실업자들이 조직한 유럽 전역의 행진, ‘이주 미등록자’(sans-papiers) 운동 같은 일련의 운동이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영구적인 소요 상태가 나타났고 그래서 권력을 쥔 사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논의 시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비판적 운동은 여전히 약합니다. 여전히 개별 국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주요 정치 문제 하나는, 사민주의 정권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좌파적 자세를 어떻게 국제적인 수준에서 형성하느냐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 사회 운동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아직까지 잠정적인 수준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우리 지식인들이 이 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입니다. 이는 아주 필수적인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전망과는 정반대로,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사회적 이익은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 얻어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야기하듯 우리가 ‘사회적인 유럽’(Social Europe)을 원한다면, 유럽 사회운동을 조직해야 합니다. 저는 이 운동이 나타나도록 돕는 게 지식인들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지배질서의 힘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에 존재하는 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토피아적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회복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신자유주의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말살하거나 낡아빠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라스: 아마도 사회주의적 또는 사민주의적 정당들이, 공산주의의 종말은 곧 사회주의의 종말이라고 부분적으로 믿게 된 탓도 있을 겁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보다 훨씬 역사가 긴 유럽 노동운동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전통과 결별하는 건 일종의 투항이죠. 이 결별은 스스로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동거하는 것으로 이어지구요. 1995년 프랑스 총파업을 말씀하셨는데, 독일에서도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작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금방 잊혀졌습니다. 몇년동안 저는 노동조합에 “일자리를 갖고 있는 노동자만 돌봐서는 안된다. 그들이 일단 실업자가 되면 바닥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고 만다. 유럽 차원의 실업자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하려 애를 썼습니다. 유럽 통합이 경제적 측면에서만 이뤄졌다고 우리가 불평 합니다만, 개별 국가 틀을 깨고 국경을 넘나드는 조직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그동안 없었습니다. 지구화 슬로건에 대한 즉각적인 맞대응이 결여되어 있는 거죠. 우리는 여전히 일개 국가 틀에 갇혀 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에서조차, (독일이) 프랑스의 성공적인 실험을 채택할 처지가 못됩니다. 게다가 독일을 비롯한 어디서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비슷한 시도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편 많은 지식인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킵니다. 그러니 소화불량만 생기죠. 지식인은 소리를 내야 합니다. 지식인들에게만 의지하는 걸 제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이겁니다.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지식인’을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독일내 제 경험으로는 지식인을 자동적으로 좌파로 연결시키는 것은 실수인 것 같습니다. 20세기 역사는 몇가지 반대 사례를 보여줍니다. 예컨대 괴벨스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질을 보장하는 것이 못됩니다. 프랑스 상황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지만, 독일에서는 1968년에 저보다 훨씬 왼쪽에 있던 이들을 지금 찾아보려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비틀어야할 지경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극단적 우파쪽으로요. 당시 학생 지도자였던 버른트 라벨(Bernd Rabehl)은 지금 이 진영으로 옮긴 상태입니다. 제가 ‘지식인’이라는 말을 비판적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죠. 사실 <세계의 비참>은 전체 삶을 노조에 헌신한 이들이 지식인들보다 훨씬 놀라운 사회 경험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그들은 실업자이거나 은퇴했으며 누구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힘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부르디외: <세계의 비참>에서 저는 지식인들이 익히 아는 것보다 훨씬 온건하지만 유용한 구실을 그들에게 부과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 있을 때 제가 본 바로는 대중적인 글쟁이는 어떤 사안을 잘 아는 사람들을 대신해 그 사안을 표현해주려 글을 쓰거나 기술을 그들에게 빌려주는 사람입니다. 사회학자들이 바로 이런 이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지식인들과 다릅니다. 그들 대부분은 대체로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해석할 줄 알며, 글로 적어서 전달할 줄도 압니다. 어쩌면 이 말이, 일종의 길드를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생각하고 글을 쓸 시간이 있는 지식인들이 이런 일에 참여한다면 좋다고 봅니다. 물론 이 작업은 지식인에게는 아주 드믄 능력 곧 통상적인 이기심과 자기도취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만.

 

그라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어야 하잖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영역에서 의심을 하는 부류가 하나 또는 둘 정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그런 부류거나 계몽 사상 전통 속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런 부류인데,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광기 곧 돈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전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도 되는지 약간 의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분별하게 또는 별다른 목적도 없이 2천, 3천 또는 1만명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합병 따위에 대한 의심이죠. 증권시장은 이익의 극대화만을 반영한다는 생각도 하죠. 우린 이런 의심하는 이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부르디외: 불행하게도, 문제는 보편적인 지혜라도 되는 양 우쭐대는 주류 논의에 맞서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비판적인 논의를 확신시키고 대중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또 당신도 그러시겠지만, 제 경우는 지식인 세계 밖의 대중들에 다가가기 위해 텔레비전에도 나갑니다.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침묵의 벽에 일종의 구멍을 내고 싶습니다. 이는 돈의 벽,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아주 모호합니다. 우리에게 말할 자리를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우리를 침묵시키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우린 주류 논의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포위되지요. 언론인 절대 다수는 이런 논의의 무의식적인 공범이 되곤 합니다. 일치된 목소리에 파열을 내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프랑스에선, 아주 유명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공공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아주 존경받는 인물이나 이 떼거리 집단을 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이들은 자족하고 침묵하고 그래서 계속 침묵할 거라는 점 때문에 존경받는 것이 거든요. 아주 극소수만 명성 때문에 얻은 상징 자본 곧 떠들 수 있는 지위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남들에게 전할 수 있는 지위를 활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라스: 제가 이해하는 이야기체 소설은 언제나, 정확하게 말하면 <양철북> 이후부터지만요, 역사를 만들지 못하지만 역사의 영향을 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피해자, 범죄인, 기회주의자, 동조자 같은 이들이요. 저는 이를 독일 문학 전통에서 얻었습니다. 만약 그림멜스하우젠(Grimmelshausen 17세기 독일 바로크문학 시대의 작가: 옮긴이)의 <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가 아니었다면 30년전쟁 기간의 일상 생활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프랑스에도 여기에 비견될 예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역사학자들의 글에 의존하면, 승리자에 대해서는 많은 걸 알게 되죠. 그러나 패배자들 이야기는 있다 하더라도 정확하지 못합니다. 문학은 여기서 일종의 메우기 기능을 하죠.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 개입함으로써요. 이 지점이 당신 책의 시발점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텔레비전을 말씀하셨는데, 다른 거대 기구들과 똑같이 텔레비전도 스스로의 미신을 키웁니다. 절대로 복종해야 하는 시청률이라는 미신요. 이런 대화가 주요 채널에 거의 등장하기 않고 <아테>(ARTE) 같은 방송에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심지어 <노르드도이체 룬트푼크>(Norddeutscher Rundfunk)조차 이 대화의 방송을 거부했습니다. 우스운 측면이지만 작은 곳일수록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나중에 <브레멘라디오>가 들어와서 제 스튜디오의 책상에 모여앉게 된거구요.

 

50년대, 60년대의 패널토론에서 토크쇼가 생겨났습니다. 저는 토크쇼에 전혀 나가지 않는데요. 이런 형식은 가망이 없고, 생산해내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그런 쇼에서 이기는 사람은 가장 오래 이야기한 사람이거나 상대를 가장 심하게 무시한 사람이기 마련입니다. 대체로 주목할 말이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뭔가 재미있는 순간이나 쟁점이 드러나는 순간에 앵커가 주제를 바꿔버리거든요. 우리 두 사람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논쟁 전통의 후예들입니다. 두사람, 두가지 다른 생각, 두가지 경험이 서로를 보완하죠. 우리가 뭔가 진정 노력을 한다면 뭔가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 곧 토론에서 하듯이 특정 주제를 다루는 중요한 대화의 양식으로 돌아갈 것을 텔레비전에 대해 권할 수 있을 겁니다.

 

부르디외: 당신의 목표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논의의 생산자들 곧 저술가, 예술가, 연구자들이 '생산 수단'을 다시 획득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겁니다. 약간은 구식인 마르크스의 용어를 일부러 썼습니다. 역설적으로, 저술가와 사상가들은 오늘날 생산 수단과 전송 수단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이것들을 통제하지 못하며 온갖 요령과 협잡을 이용해 짧은 프로그램에서나 주장을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인 방송에 그것도 밤 11시에 방송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을 대중적인 방송채널에서 말하려고 하면, 당신이 지적하셨듯이 사회자가 즉각 제지하고 나설 겁니다. 이건 사실상 검열입니다.

 

그라스: 하지만 우린 불평에만 빠져서는 안되죠. 우린 언제나 소수였고 역사의 과정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소수가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전략과 책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시민의 자격으로 `스스로를 반복하지 말라!'는 문학의 기본법칙을 깨도록 강요받음을 느낍니다. 정치 영역에서는 옳은 것임을 우리가 알고 또 옳음이 증명된 것을 앵무새처럼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를 계속 듣게 되고 정말 자기 스스로에게도 앵무새처럼 들리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분명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말에 경청하는 이들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의 일부입니다.

 

부르디외: 당신의 작업, 예컨대 <나의 세기> 같은 작품에서 제가 존경스럽게 느끼는 것은, 많은 청중들에게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다양한 표현 수단을 탐구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계몽 시대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백과사전은 계몽 반대론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소통 도구를 이용한 일종의 무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혀 새로운 계몽 반대론에 맞서 싸워야할 처지입니다.

 

그라스: 그러나 여전히 소수로서요.

 

부르디외: 이 새로운 계몽 반대론은 계몽시대에 활개 친 반대론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강력합니다. 우리는 강력한 거대 다국적 언론 기업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들은 극히 일부 영역을 뺀 전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출판계에서조차 비판적인 책을 만들기가 날로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전혀 다른 방식의 연구를 수행하는 국제 저술가 또는 작가 단체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 영역에서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런 방식은 현재 상태에서 효과가 없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당신과 나누는 이 대화가 아주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우리가 메시지를 구성해 전달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만들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입니다. 텔레비전의 도구가 되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통하는 수단을 만들어내야 하는 겁니다.

 

그라스: 예 물론, 그런데 일을 벌일 공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놀랍다고 느끼는 일이 제게서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국가의 기능 확대를 요구하게 되는 때가 오리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는 언제가 정부가 너무 과했으며 모두 위에 군림해 질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정부의 영향력을 민주적인 통제 아래 둘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반대의 극단에 이르고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가장 깊은 야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한치도 닮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국가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는 생각 말입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벗어나자. 우리가 이제부터 접수하겠다'는 겁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무엇보다 필수적인 개혁이 있다 하더라도, 제가 말하는 건 혁명적 수단이 아니라 개혁인데, 사기업의 세금인하 요구가 관철되고 경제가 승인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성사되지 못합니다. 이건 무정부주의자들이나 꿈꾸는 정부 권력의 박탈입니다. 또 당신도 저와 마찬가지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정부가 다시 책임을 지고 사회를 다시 규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제가 하게 됐습니다.

 

부르디외: 이건 제가 먼저 말씀드린 것들을 뒤집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정부'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족할까요? 보수 혁명이 쳐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라스: 서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신자유주의는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정부 활동만을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정부는 경찰을 소집해서 공공 질서를 유지해야 하고, 이는 신자유주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부가 사회 영역을 규제할 권한을 빼앗기고 장애인, 어린이, 노약자 뿐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소외됐거나 아직 참여하지도 못한 모든 계층을 책임질 힘을 빼앗기면, 또 지구화로 도피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경제형태가 퍼지게 되면, 그 때는 사회가 정부를 통해 복지와 사회적 공급을 회복하기 위해 개입해야 합니다. 무책임은 신자유주의 전망의 조직 원리입니다.

 

부르디외: <나의 세기>에서 당신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몇가지가 제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Liebknecht)가 연설하는 모임에 갔다가 자기 아버지의 목에다 오줌을 싼 어린 소년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사적인 회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주의를 발견하는 아주 독창적인 방식인 것은 분명합니다... 윙거와 레마르크에 대해 당신이 할 수밖에 없었던 말들도 참 좋더군요. 행간에서 당신은 지식인들이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비판적일 때조차 그런 사건의 공범이 되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에 대한 당신의 견해도 좋습니다. 이건 우리가 통하는 어떤 것이죠. 저도 하이데거의 수사(레토릭)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수사는 아주 최근까지도 프랑스에서 대 혼란을 유발했죠.

 

그라스: 프랑스 지식인들이 윙거(Jünger) [옮긴이의 인물 소개] 와 하이데거에 매혹당하는 건, 저를 즐겁게 만드는 일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와 독일이 상대에 대해 품고 있는 상투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치명적인 결과를 유발한 모호한 사상을 프랑스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는 건 정말 바보스런 일입니다.

 

부르디외: 제 경우는 새로운 하이데거 숭배에 분명히 반대했기 때문에 완전히 고립당했습니다. 근대적 반계몽주의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나라에서 여전히 계몽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프랑스인으로 사는 건 즐거운 것이 못됩니다. 제 눈에는 프랑스공화국의 대통령이 윙거에게 훈장을 주는 건 소름끼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파리에서 윙거를 보수 혁명주의자로 묘사하면, 저는 그의 이른바 '이론적' 글들과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시절 일상생활을 묘사한 일기를 분석했습니다만, 고루한 국수주의자 등으로 의심받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어떤 형태의 국제주의조차 의심받는 시절입니다.

 

그라스: 리프크네히트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군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가족은, 아들을 함께 데려가는 것이 전통입니다. 이 전통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사민주의노동자당 창당 주역: 옮긴이) 때부터 시작돼 칼 리프크네히트 때에도 계속됐죠. 아들은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아 대중 연설을 들은 거죠. 제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리프크네히트가 어려서부터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진보 운동에 나서도록 자극받았다는 것이고, 이와 동시에 집회에 열중한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어깨에서 내려오고 싶어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자신의 목에 오줌을 싸자 아버지는 리프크네히트가 연설중인데도 아들을 때립니다.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이런 권위주의적 행동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아들이 입대하게 만듭니다. 그리곤 이 아들은 리프크네히트가 하지 말라고 한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의도적으로 비튼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저에게 말이죠. 윙거와 하이데거가 프랑스에서 명백하게 얻고 있는 명성으로 돌아가자면, 아마 프랑스 지식인들은 독일 계몽 사상가들에 주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프랑스에 디드로와 볼테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레싱(Lessing 18세기 독일의 극작가: 옮긴이)과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18세기 독일의 물리학자 겸 계몽사상가: 옮긴이)가 있습니다. 리히텐베르크는 게다가 위트도 넘치는 인물인데, 그의 풍자(boutades)는 아마 윙거의 어떤 글보다 프랑스인들에게 호소력이 클 겁니다.

 

부르디외: 좀더 가까운 예를 들자면,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신칸트학파 출신의 20세기 철학자: 옮긴이)가 계몽 사상 전통의 위대한 후예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는 프랑스에서 기껏 그저그런 호응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그의 큰 적수인 하이데거가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지위가 이렇게 뒤바뀌는 것은 언제나 저를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두 나라가 각자의 가장 매력 없는 측면들을 단순히 합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에 의해서 프랑스인들은 독일의 최악을 취하고 독일인들은 프랑스에서 최악을 취한다는 인상을 종종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라스: <나의 세기>에서 저는, 학생 시절이던 1966~68년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30년 뒤 수요일의 세미나에서 되돌아보는 교수를 묘사했습니다. 30년전에 그는 하이데거의 글을 따르는 거창한 철학에서 시작했고 30년만에 다시 이 철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급진주의의 파도에 직면했고 아도르노(Adorno)를 공개적으로 내놓고 공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절, 그러니까 이제는 1968로 약칭되는 시절의 아주 전형적인 인생 여정입니다. 저는 이 모든 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학생시위는 정당화됐으며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의 가짜 혁명 대변인들이 허용하고 싶어 한 것 이상을 성취했습니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혁명의 기반도 없었지만 사회는 변화했습니다. 진보는 달팽이 같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제가 얼마나 조롱을 당했는지는 <달팽이의 일기장에서>에 묘사해 놨습니다. 물론 말로 큰 도약을 이루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마오주의자들이죠. 그러나 당신이 뛰어넘은 단계를, 당신 밑바닥에 놓여있는 사회는 재빨리 따라오지 않습니다. 사회를 훌쩍 뛰어넘은 뒤에 사회조건의 역풍을 맞게 되면 놀라서는 반혁명이라고 부르죠. 이 말은 공산주의가 상습적으로 쓰는 말인데, 이 말을 쓸 때는 공산주의 자체도 동요하곤 합니다. 이 전체에 대해 제대로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부르디외: 당시 저는 <후계자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노동계급, 프티부르주아, 부르주아 출신 학생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부르주아 학생들이 가장 급진적이었고 프티부르주아 학생들은 더 개량주의적이었습니다. 더 '보수적'으로 보인거죠.

 

그라스: 일반적으로 부유한 가정의 아들들은 감히 드러낼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사회에 투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마찰을 빚으면 돈이 바닥나니까, 감히 엄두를 못 냈던 거구요.

 

부르디외: 이런 이중성은 68 운동에서 아주 분명했습니다. 다른 봉기들과 다름없이 말이죠. 그래서 실제로는 여러가지 혁명이 그 안에 공존했습니다. 아주 선명히 드러난 화려한 혁명이 있었죠. 이 혁명은 상당히 상징적이며 예술적인 성격을 띄었는데 외견상 아주 급진적이었고, 이 혁명을 이끈 이들은 나중에 상당히 보수적인 이들이 됐습니다. 이보다 더 아래에는 당시에는 우습고 개량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요구조건을 내건 다른 혁명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온건했지만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한 그들이 요구한 것은, 강의법 변경, 고등교육 기회 확대 같은 것이었고, 이들의 요구는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이 된 당시의 급진적인 이들에게 조롱거리였습니다.

 

그라스: 70년대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경제가 계속 천연자원을 착취하도록 그냥 두면 결국 환경이 파괴될 것이라는 인식이 자라났습니다. 생태운동이 등장한 거죠. 그러나 사회주의 정당과 사민주의 정당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사회 문제에 집중하면서 생태 문제를 완전히 지나쳤거나, 생태 문제를 자신들의 요구에 적대적인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는 진보적인 좌파 노조운동가들은 생태 문제가 부각되면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우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이 지성을 발휘하고 양식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면, 좌파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생태 문제는 노동, 고용 문제와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하며, 모든 결정 사항은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부르디외: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생태주의자와 관련해서 한 말은 사민주의자들 경우에도 맞는 것입니다. 사회적 자유주의, 블레어주의, 제3의 길, 이런 가짜들은 지배당하는 계층에게 지배권력의 시각을 내면화하는 과정들입니다. 유럽인들은 내심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더 이상 전통을 옹호할 엄두를 못냅니다. 이 과정은 경제 영역에서 시작되어서 점차로 문화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전통을 부끄러워 하고, 영화나 문학 등 온갖 영역에서 고리타분하다고 비난하는 그 전통을 옹호할 때는 자주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라스: 우리나라에서 사민당의 슈뢰더 진영은 자신들을 뺀 나머지를 전통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면서 스스로는 근대화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광적인 환원주의죠. 신자유주의자들은 독일과 다른나라의 사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무의미한 정의에 부닥쳐 좌초하는 걸 봐야만 흡족해 할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 문화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저는 당신이 노벨상을 탔을 때 아주 기뻤습니다. 아주 훌륭한 작가가 제대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신은 다른 이들이 구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예술의 과정을 옹호하고 소리높여 주장할 채비를 갖춘 유럽 작가라는 점 때문에도 아주 기뻤습니다. 당신의 소설 <너무나 멀리 떨어진>에 대한 반대 운동은, 이 소설이 문학적으로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등장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표준이 뒤바뀌면서 문학이나 영화, 미술의 전위적 형식실험이 구닥다리로 치부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위선적인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것이 날로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전형적으로 영-미 국가에서 출발한 것인데, 모든 낡은 형식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자처하지만 사실은 20세기의 어떤 예술혁명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입니다.

 

그라스: 노벨상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지금까지 그 상 없이도 잘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상과 함께도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침내 받았군!'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너무 늦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로서는 70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 그 상이 내게 왔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더 젊은 작가, 한 35살의 작가가 그 상을 받는다면 상당히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너무 많을 테니까요. 나는 역설적이게 노벨상과 관계를 맺게 됐으며 그럼에도 행복합니다. 내가 신경쓰게 되면 그것이 주제를 소진시킬 것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제안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거대 텔레비전 방송사들조차 잘못된 쪽으로 흐르고 있는 시청률 숭배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나라는 서로 싸워서 상대의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모두 쏟아내게 했습니다.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번의 전쟁과 그 전쟁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화해를 위해 온갖 수사를 지금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가르는 것은 단지 언어 장벽뿐이 아니며 우리가 덜 인식하고 있는 다른 차원들도 우리를 가르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하나를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유럽의 공통적인 계몽의 과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 말입니다. 민족국가가 지배하기 전에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았고,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괴테가 디드로의 작품을 번역했고, 두나라에서 검열에 맞서 계몽 사상을 확산시키려고 싸우던 소수 계층간에 일정한 의사소통이 이뤄졌습니다.

 

이 관계를 복원할 때입니다. 우리가 전해줘야 할 것은, 유럽의 계몽 사상이 우리에게 남겨준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계몽 사상이 추가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그 상태인 것이지만요. 계몽의 방법을 통해서 계몽 사상을 개혁하는 것 곧 필요성이 있는 모든 곳에서 계몽 사상을 수정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 지배와 신자유주의의 무책임한 부분을 비판하는 것은 옳은 것이지만, 유럽의 계몽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가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형식과 사회주의의 초기 형식은 공히 계몽 사상의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아무튼 둘은 다시 한 탁자에 마주 앉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르디외: 당신이 조금은 과도하게 낙관적이라고 느껴지는군요. 불행하게도, 저는 이런 용어들로 문제가 제시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현재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정치 세력들의 양상이 계몽 사상의 유산을 진정한 위험에 처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다니엘 로체(Daniel Roche)는 바로 얼마전 계몽 사상 전통의 의미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아주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책을 내놨습니다. '아우프클래룽(Aufklärung)'과 '루미에레(Lumières)'가 독일과 프랑스가 완전히 공유하는 어떤 한가지 같아 보였을지라도 실제로는 서로 다른 뜻이라는 내용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좀더 폭넓게 봐서 계몽과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러니까 과학 및 기술 진보와 이 진보에 대한 통제력이 파괴되는 걸 막으려면 분명히 극복해야 하는 큰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 세력에 뿌리를 둔 새로운 이상주의를 창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비록 구시대의 정치 비전으로 돌아가도록 부추긴다는 인상을 줄지라도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현재의 노조는 낡은 조직 형태입니다. 개혁과 변신, 스스로를 재설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스스로 국제화 해야하며 합리적이 되어야 합니다. 또 사회과학의 업적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면 말이죠.

 

그라스: 당신이 제시하는 것이 유토피아군요. 그렇게 하려면 노조운동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 모두 잘 압니다.

 

부르디외: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우리가 일정한 구실을 하는 유토피아입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사회운동은 몇십년전보다 훨씬 힘이 약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운동은 강력한 '노동자 중심주의적' 전망을 지녔고 지식인들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럴만했구요. 오늘날 위기에 처한 사회운동은 전반적으로 볼 때 비판에 대해 좀더 개방적이며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훨씬 더 사려깊어졌습니다. 갑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새로운 유형의 비판을 훨씬 더 환영하게 됐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런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사회운동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라스: 저는 이를 좀더 비관적으로 봅니다. 우리 두사람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 나이가 됐습니다. 비록 시간은 제한적이지만요. 저는 프랑스의 상황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독일의 젊은세대 작가들은 계속 목소리를 내고 개입하는 계몽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경향도, 관심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뜻에서 우리의 짐을 덜어줄 이들이 더 이상 없다면, 유럽의 훌륭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사라지고 말 겁니다.

 

 

[윙거 소개] 에른스트 윙거(1895~1998)는 하이델베르크 출생의 독일 작가이다. 1, 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1920-30년대는 군국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으나 1939년 <대리석 절벽 위에서>라는 우화적인 작품을 통해 나치 이념 곧 독일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1940년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군 장교로 주둔하면서 파블로 피카소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류한 생활을 적은 일기 <정원과 거리들>을 발표했다. 이 때의 글들에 대해서 “유럽의 낡은 계급질서의 병폐를 보고 횡행하는 폭력에 맞서 평화와 자유를 역설하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대담에서도 언급되지만, 나치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철학자 하이데거와 절친한 친구이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 대해, 부르디외는 “정치적-형이상학적 쓰레기”라고 평했다. 부르디외가 본문에서 말하는 그에게 훈장을 준 프랑스 대통령은 미테랑 대통령인 것으로 보인다. 95년 그의 100회 생일을 즈음해 미테랑은 '여기 자유로운 인간이 있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그를 한껏 칭찬했다.

 

원문: newleftreview.org/A2379

번역: 신기섭

2004/07/11 17:55 2004/07/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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