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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가 운동인 까닭

채식주의가 운동이 아니고 취향이라는 문제제기(EM님의 글 '채식(주의)')를 계기로 진보블로그에서 한동안 논란이 벌어졌다. 모두 꼼꼼히 읽지는 않았는데, 논쟁의 곁가지까지 모두 보기 귀찮기도 하거니와 사실 이 문제는 아주 간명한 논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제기의 논리 전개는 이렇다. 1. 운동은 대의와 명분이 있기 마련이다. 2. 채식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대의 또는 명분은 대강 '육식 반대' 또는 '자본주의 반대'인 것 같다. 3. '육식 반대'나 '자본주의 반대'는 일관성 또는 설득력이 없다, 또는 말이 안된다. 4. '육식 반대'가 채식이어야 하는 필연성이 없다. 5. '육식자본'(축산업자)만큼이나 '채식자본'(채소업자)도 자본이기에 채식이 '자본주의 반대'라는 것은 모순된다. 6. 채식주의는 제대로 된 대의와 명분이 없기에 운동이 아니다. 7.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개인의 취향 또는 선호 또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미세한 부분이 빠져나가거나 곡해될 여지가 있지만, 논의의 정리를 위해 이 정도는 양해해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주장을 반박하려면 대체로 두가지 방법이 있다. 1. 다른 많은 운동들도 대의와 명분의 일관성 또는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2. 채식주의의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대의와 명분을 정리해 보여주는 것이다.

 

1. 다른 운동들도 대의와 명분의 일관성 또는 설득력이 없는가?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반세계화운동'이다. 반세계화운동은 기업 권력의 전세계적인 지배에 반대한다는 점을 빼면 공통점이 없다. 그들이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극단적으로는 국수주의나 고립주의에서부터 전세계의 공평한 교류와 협력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그저 기업의 세계화 반대일 뿐이다. 채식주의가 '육식 반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듯, 반세계화운동도 기업 지배 반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반자본주의 운동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다. EM님의 논리를 적용하면, 무엇보다 반자본주의가 곧 사회주의라는 필연성은 없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위해 또는 공산주의를 위해 반자본주의 운동을 하는 건 운동일 수 없다. 다른 대안 세계를 꿈꾸는 반자본주의 운동도 마찬가지다. 어디에도 필연성은 없다!!

 

하지만 이걸로는 온전한 반박이 아니다. 주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2. 채식주의의 설득력 있는 대의와 명분은 있는가? 있다. 내가 보기에 가장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명분은 생명존중 사상이다. 휴머니즘이 아니라 존 산본마쓰가 말하는 '메타휴머니즘'이다. 생명의 개념을 인간에 국한하지 않고 동물들에게까지 확대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육식 반대는 그 어떤 이념보다 더 강력한 생명존중 사상이다. 너무 강력해서 '자기 절멸'까지 갈 수 있는 사상이다. 생명존중이라고 말하면 분명 코웃음을 치면서 식물은 생명이 없는 줄 아느냐고 말할 것이다. 왜 없겠는가? 당연히 있지. 그래서 '자기 절멸'까지 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식물의 생명까지 존중하게 되면 굶어죽는 길밖에 없다. 결국 생명존중을 위해 제 생명을 포기하는 '모순적' 사태가 발생한다.

 

채식주의에 담긴 생명존중 사상이 모순에 봉착하는 것은, 존재의 존립 근거를 묻는 데까지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절충적일 수밖에 없다. 생명존중을 위해 제 생명을 버려야 하는 상황과 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 조건 사이의 줄타기가 필연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고려한 타협책이 육식 반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명존중' 또는 '메타휴머니즘'이 무시되거나 해소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고 현실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이들은 한줌의 '환원주의자', 한줌의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들 뿐이다. 그리고 환원주의자와 근본주의자는 모든 운동의 적이다!!

 

환원주의나 근본주의의 폐해는, 반세계화운동을 생각하면 훨씬 잘 이해된다.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 자본의 세계화냐 아니면 자본이냐”라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반세계화운동의 정체성을 빼앗고 반자본주의운동의 '왜곡된' 변주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묘기를 연출한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환원주의' 또는 '근본주의'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덧붙임: 이 글에 대한 반론 가운데 일정한 조건이 충족된 것만 환영한다. 1번에 대해서는 논리 반박만 환영한다. 2번에 대해서는 절충적이거나 모순적이지 않은 사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반박만 환영한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나의 반응 또는 재반박을 기대하지 마시라.

 

덧붙임2: EM님을 비롯해 그 누구에게라도 무슨주의, 무슨주의 딱지 붙일 의도는 전혀 없다. 주장을 펴다보니 환원주의니 근본주의니 하는 문제를 고민하게 된 것일 뿐이다. 모두 오해없으시길...

2007/02/21 15:30 2007/02/21 15:30
14 댓글
  1. ㄱㅇ 2007/02/21 16:06

    1번은 알겠는데 2번은 이해가 안되네요. 좀 더 풀어서 설명해주시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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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7/02/21 16:16

    제 능력의 한계입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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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달군 2007/02/21 17:01

    와 너무 인상적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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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ScanPlease 2007/02/21 18:09

    2번에 대해서 조금 덧붙이자면, "네가 하고 있는 것이 운동이냐, 아니냐"라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남들의 정체성을 빼앗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글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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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marishin 2007/02/21 19:10

    달군님, 스캔플리즈님, 반갑습니다. 저는 고기 맛 때문에 채식 엄두도 못내는 사람이라서 채식을 실천하시는 분들이 너무 존경스럽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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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自由魂 2007/02/22 22:15

    여기서 이 논쟁을 처음 접했기에 맥락이 어떻게 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라도 자기 자신을 비롯한 사회의 일부분을 바꾸고자 하는 '행동'의 형태를 취한다면 그것은 '운동'이겠죠.

    글의 요지는 어쨌든 '채식주의'는 운동이다라는 것 같은데 저는 위의 이유에서 당연히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채식주의' 운동이 주장하는 바가 사회에서 갖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의 맥락도 모르면서 주제넘게 나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ps. 제 주변에 채식을 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채식주의'라고 할만한 사람은 몇 안됐는데 궂이 '반자본주의'에 연관시키는 사람은 보질 못했네요. 뭐 그쪽 주장에 문외한인 제 탓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서 한 동안 고기를 안 먹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는 고기에서 나는 비린내가 너무 심해서 한동안은 정말로 고기를 못먹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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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arishin 2007/02/23 00:04

    말은 운동이냐 여부 논란이지만, 핵심은 채식주의가 일관되거나 설득력있는 명분이 없다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천하는 사람들 가운데 반자본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 흐름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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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2/23 03:05

    '메타휴머니즘'이 '생명의 개념을 인간에서 동물로 확장시킨 개념'이라고 하셨는데, 잘 이해가 안갑니다. 휴머니즘에서 존중하는 생명은 '인간의 생명'뿐이었는데, 메타휴머니즘에선 중중하는 생명을 '동물의 생명'에로까지 확장시켰다는 이야기인가요? 그것은 왜 '모든 생명'에로 확장하지 않고 '동물의 생명'까지만 확장시켰는가요? 메타휴머니즘의 개념에 대해서 더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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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2/23 04:03

    문득 생각이 든건데, 생명존중 이라는 것이 '가치'의 차원인지, '의무'의 차원인지 명확히 하면 좋을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존중의 가치를 인정하지요. 어린애들이 병아리를 사서 육교에 떨어트리는 행위를 보면 대부분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이 한 예일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혹은 잔인하게 생명을 살해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지요. 하지만 이런 생명존중의 가치는, 먹기 위하여 동물/식물을 죽이는 것까지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같은 경우는 단지 가치 차원을 넘어서지요. 인간의 생명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 marishin 님께서 사용한 채식주의의 원리로서 생명존중 사상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던 의무를 모든 생명에게 부여한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단지 가치의 차원이라면 그것이 자기절멸까지 몰아갈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강한 의무로써 부과되는 생명존중. 이러한 강한 의무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우에만 회피할 수 있습니다. 가령, 자신이 강도에게 살해위협에 놓여있을 때 그걸 피하기 위해 살인을 한다면 정당방위겠지요. 마찬가지로 의무로 부과된 생명존중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회피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얻게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중요한건 '살 수 있기 위해서 가능한 최소한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지 동물이냐 식물이냐는 구분은 필요없지 않을까요? 최소한의 살생을 하는 잡식과 맛있는 채식을 위해 자신의 생존의 최소조건에서 과잉된 수많은 식물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꺼 같습니다.

    물론 동물은 식물을 먹으면서 자라는데, 그 동물이 죽이는 식물에 대한 책임까지 인간이 떠안아야 한다면, 꼭 채식이어야 하는 이유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은 동물이 식물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막아야하지 않나요? 의무로서 생명존중은 우리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듯이, 우리는 동물이 동물을 죽이는 것, 동물이 식물을 죽이는 것까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나요? 생명존중이 우리에게 의무로 던져진다면 말이에요.


    생명존중 때문에 이야기가 이상한 것까지 흘러왔네요. 생명존중을 의무로 파악하고 글을 전개해봤는데, 논리적으로 전개된 건지는 자신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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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2/26 06:24

    제가 쓸데 없는 이야기를 붙여서 정말 궁금한 점이 드러나지 않겠한거 같아요. 명료하게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생명존중을 위해 제 생명을 버려야 하는 상황과 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 조건 사이의 줄타기가 필연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고려한 타협책이 육식 반대다"

    라고 하셨는데, 왜 그것의 타협책이 육식 반대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살생'이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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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07/02/28 04:25

    '최소한의 살생'이라는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 채식이 선택된 이유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소한의 살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게 먹는 것이 중요하고, 소식에는 잡식이 좀 더 적합할텐데요.

    '최소한의 살생'을 하기 위해서 잡식이 아니라 채식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최소한의 살생'외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른 이유'가 채식의 진정한 대의명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생명존중이 채식의 가장 강력하고 설득력있는 대의명분이라는 marishin 님 견해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더불어 육식반대가 그 어떤 이념보다 더 강력한 생명존중 사상이라고 규정하신 것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적합한 것은 '최소한 적게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1) '생명존중의 가치'라는 대의명분을 가진 것은 (음식의 영역에선)'소식'이다. (2) '소식'의 실천방식으로 육식/잡식/채식이 있다. (3) '소식'을 위해 육식/잡식/채식을 선택케하는 특정한 이유가 있다. (4) '소식'을 위해 육식/잡식이 아닌 '채식'을 선택하게했던 '특정한 이유'가 채식의 근거이며 명분이다.(5) 따라서 marishin 님이 채식의 강력한 명분으로써 생명존중 사상을 거론한 것은 하나의 실천 방법으로써의 채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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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marishin 2007/02/28 09:36

    소식하는 이유가 뭔가요? 최소한의 살생을 위해서죠? 그럼 소식은 채식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식은 이미 최소한의 살생이 아닙니다. 그건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부연하면, 제 앞에 있는 음식 두가지 곧 고기와 채소가 있다면, 전자는 두번의 살생의 결과물이고 후자는 한번의 살생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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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07/03/01 03:02

    두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1) 고기와 채소를 생산함에 있어서 벌어지는 생명파괴를 생태계의 먹이사슬 관계로만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회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만평의 농지에서 한 작물만을 키우기 위해 숲을 갈아엎어 농토로 만들고 농약을 쳐 잡초가 자라지 않게 하고 해충을 박멸한다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명파괴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채식으로 이루어진 식단과 잡식으로 이루어진 식단을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 덜 생명파괴적인 과정을 거쳤는가는 따져보기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2) 생명존중 사상을 생태계의 먹이사슬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식물->동물->인간]이라는 먹이사슬 관계에서 [식물->인간]이라는 먹이사슬 관계로 변화시켜 살생을 줄이는 것이 '최소한의 살생'이며 생명존중의 가치라면, 이는 인간이 생태계의 먹이사슬 관계를 바꾸는데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살생'은 <인간의 행위>로 제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동물이 식물을 먹는 것을 근거로하여 '최소한의 살생'이 채식이어야 함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이같은 근거로, 저는 marishin님께서 '최소한의 살생'이 '채식이어야'하는 주장하시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였습니다. 님께서는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하셨지만, 위같은 이유로 그것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거 같습니다. 님의 주장에는 좀 더 많은 설명이 보충되어야 합니다. 이는 여전히 "marishin 님이 채식의 강력한 명분으로써 생명존중 사상을 거론한 것은 하나의 실천 방법으로써의 채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주장을 철회할 수 없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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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marishin 2007/03/01 13:49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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