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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도 윤리는 있다

번역은 내 주요 관심사다. 내가 처음 번역을 시작한 것은, 개인 홈페이지가 유행이던 시절인 1998년쯤(정확한 때는 기억이 안 난다) 엉겁결에 만든 '밑에서 본 세상'에 뭔가 채워 넣을 게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번역서들이 워낙 엉망이니 '내가 직접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밑에 깔려 있었고, 그렇게 몇번 하다보니 '번역이야말로 내가 공공을 위한 봉사 차원에서 할 적합한 일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10년이 넘었다. (책으로 내놓은 것은 2000년이 처음이니 공식적으로는 8년이 넘은 셈이다.) 지금은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훨씬 크지만 정말 하기 싫어질 때는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 팔자'려니 한다. (번역료를 생각하면 번역은 정말 봉사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못 할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번역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로, 아무리 마음에 들고 번역하고 싶은 책이어도 자신의 처지 또는 입지를 생각해서 손을 데서는 안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 같은 사람이 본격적인 철학책을 번역하겠다고 나서면 안된다. 소설을 번역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로 안 될 일이리라.

 

두번째로, 번역하는 자세에도 윤리가 필요하다. 이 문제는 조금 더 기술적이고 미묘한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읽기 편하게 이른바 '의역'을 하더라도 넘어서면 안 되는 선이 있다. 할 수 있는 한 원문을 최대한 충실히 옮기는 것이 번역자의 첫번째 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하나, 원 저작의 의미나 성격을 훼손하는 번역 출판에 번역자로 동원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심각하고 진지한 책을 논술 교재처럼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번역서의 성격이 애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진 것을 출판 직전에 알고 몇개월동안 고생한 결과를 허공으로 날린 경험이 있다.)

 

한국의 출판 현실에서 두번째 부분은 기대하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오역으로 가득한 번역물이 산처럼 쌓이는 게 현실인데, '원문에 충실하라.'거나 '원서의 의미를 훼손하지 말라.'는 것 따위는 사치스런 주장이다. 그저 눈에 띄는 오역이나 많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래도 첫번째 부분은 지켜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번역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관련 분야에 최소한의 지식은 있는 사람에게 번역을 맡겨야 한다. 그런데 이젠 이런 최소한의 윤리도 실종된 것 같다.

 

알라딘 서점에서 어떤 책의 저자와 역자 소개를 보고 나는 경악했다. 저자는 “루이 알튀세의 수제자”이고 “파리 8대학 철학교수”를 역임한 사람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것이다. 그러니 책은 철학서인 셈이고 원문은 프랑스어다. 번역하기 가장 까다로운 두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책이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어만큼 번역하기 어려운 분야가 없는데, 게다가 철학자이니 이건 정말 '최악'이다.

 

그런데 역자는 “1999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2001-2002년 OO증권에 근무했으며”, “2002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주식투자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알라딘 검색 결과로는 이번이 두번째 번역서다.)

 

이 번역자의 첫번째 번역서는 주식에 관한 것이었으니 적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맡지 않았어야 했다. 번역 경험도 많지 않은 사람이 프랑스 철학자가 쓴 책이라니, 이건 무모한 수준을 넘는다. 윤리 문제다. 이 번역자가 프랑스어를 잘 할 수도 있고, 주식투자를 연구하는 틈틈이 철학을 많이 공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보다 더 프랑스어 번역 경험이 많고 철학도 더 많이 공부했을 번역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정상이다. (외국어를 잘 하는 것과 그 외국어 번역을 잘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건, 번역을 해보면 절감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출판사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고 마땅한 번역자를 구하기 힘들다고 해도,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나도 한 1년전쯤 한국 출판 현실을 절감할 충격적인 경험을 했지만, 한국 출판사들의 의식이 이 정도까지 왔다니 참으로 걱정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배경 지식과 언어 실력을 갖춘 성실하되 소심한 번역자, 번역자의 글을 분별할 정도의 배경 지식과 언어 실력을 갖춘 꼼꼼한 편집자, 책과 번역 활동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예의를 갖춘 출판사, 이 3자의 결합은 한국에서는 정녕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꿈'인가?

2008/01/23 02:45 2008/01/23 02:45
7 댓글
  1. 自由魂 2008/01/23 08:32

    그 책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번역에 대해 말이 많더군요. 그렇다고 프랑스어 원서를 직접 읽을 능력은 애초에 갖고 있지도 않으니 선택은 번역서 뿐인데... 안타깝지만 오역 투성이일지라도 구입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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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8/01/23 09:34

    아무리 그래도 읽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이해가 잘 안될텐데요. 프랑스 학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문체를 즐기기 때문에 제대로 번역이 되어도 만만치 않잖아요? 정 읽으셔야겠다면 2007년 1월에 영국 버소에서 나온 영어판을 보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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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solidone 2008/01/24 14:31

    구구절절 공감가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된게 우리말로 된 번역서보다 원서를 볼때가 이해 잘되는 경우가 많으니 어처구니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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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8/01/24 19:23

    solidone님 반갑습니다. 한국 번역서의 수준은 참 그렇죠. 저도 뭐 대단히 내세울 만한 수준은 못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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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신예슬 2011/03/04 07:55

    저는 지금까지 보니까 언어 배우는 것에 가장 관심이 많은데요, 번역가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다른 더 좋아하는 분야가 있어서 그 과를 준비하고 있어요. 글쓴이님을 보고 번역가의 미음가짐이 어떤건지 알 수 있었어요. 곧은 신념을 가지고 우리 나라 문화에 도움이 되시고자 하는 모습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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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ㄱㄹㄷ 2016/03/05 06:13

    ㅋㅋㅋ 공감합니다.
    철학서 번역본을 읽을 테면, 역자 프로필부터 우선 보는 사람인지라, 하시는 말에 크게 공감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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