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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비껴간 세습 비판

북한의 3대 세습을 둘러싼 논란으로 남한의 이른바 “진보” 세력이 또다시 본 실력을 폭로하고 있다. 스스로 제 정체를 폭로하는 건, 환상을 깨고 현실을 직시할 기회를 주니 꼭 나쁜 일은 아니다. 아무튼 글 좀 쓴다는 사람은 거의 빠짐없이 한마디씩 하고 있다. (북한 문제는 아예 거론을 회피하는 나 또한 이렇게 쓰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1. 내가 주목하거나 읽은 글들

 

발표된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1) 좌파 학자 손호철(남한 진보여,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라)

2) 논란을 촉발한 경향신문 사설(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3) 경향신문 이대근(북한 3대 세습비판이 내정간섭? 오리엔탈리즘?)

4) 민주노동당 대표 이정희(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한 마디만 해 보라고?)

5) 언론인 홍세화(진보의 경박성에 관해)

6) 언론운동가 유영주(분에 넘치는 민주노동당 비판 경향 사설)

7) 언론인 정일용(자기 잣대로 북을 재단 말라)

 

또 하나 어떤 역사학자가 세습이 절대악이 아니라고 주장한 글이 있는데, 이 학자는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싶지 않다.

 

제목만 봐도 내용은 대강 알 수 있다. 서로 의견들이 충돌하고 있는데, 공통점도 하나 있다. “권력 세습은 나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것 같다. 세습이 절대악이 아니라고 부르짖는 어떤 역사학자를 빼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문제삼으려고 한다. 급진적인 접근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전제로 삼는 것의 정당성을 따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때도 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나는 자주파니 주사파니 하는 사람들한테 지독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자주파나 주사파가 이 글을 읽더라도 나를 우호세력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건 큰 착각이다.)

 

이 글은 “권력 세습은 나쁜가?”라고 묻되, 정확하게는 “권력 세습은 누구에게 나쁘고 왜 나쁜가?”라고 묻고 그 답을 찾아보려는 글이다.

 

2. 권력 세습은 나쁜가?

 

이 문장은 모호하다. ‘나쁘다’는 건 주체가 명백하게 있을 때만 성립하는 ‘가치 판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밑도 끝도 없이 “저 산은 나쁘다”는 문장을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산이 나쁘고 말 게 뭐 있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아침 한시간쯤 산을 넘어 일터에 가는 장애인이 이 말을 했다면 뜻이 분명하다. 분명 저 산은 장애인한테는 나쁜 존재다. (보편적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흔히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관점에서지, “동물” 또는 “자연”의 관점에서도 그렇다는 근거는 없다. 가치 판단에 있어서는 판단의 주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권력 세습은 나쁜가?”라는 질문은 “권력 세습은 누구에게 나쁜가?”라고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왜 나쁜가?”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3. “북한 권력 세습은 누구에게 나쁜가?”

 

남한 사람 또는 미국 사람에게 나쁠까? 일단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이모저모 좀더 따져보면 나쁠 수도 있다. 인류 전체한테 나쁜가? 이건 거의 무관한 문제라고 봐도 그만이다. 아무튼 이는 모두 곁가지고 결국 문제의 핵심은 북한 사람이다.

 

1) 북한 권력 세습은 북한 사람에게 나쁜가?

주체를 조금 더 나눠야 답이 나올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정치 문제이니 지배권력과 민중으로 나눠보자.

 

1-1) 지배권력에게 나쁜가? 권력 세습이 지배권력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면 나쁠 건 없다. 지배권력 일부, 그러니까 권력을 노리고 있었는데 김정일 위원장의 아들이 아니어서 기회를 잃은 사람에겐 분명 나쁘겠다. 하지만 이건 사소한 문제다. 김일성 주석의 권위가 아직 유효하다고 볼 수 있기에 이 권위를 동원한 세습이 지배권력 전체를 강화하는 데 득이 될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배권력에겐 권력 세습이 크게 나쁠 건 없다. (지배권력 내부 문제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문제다.)

 

1-2) 북한 민중에게 권력 세습은 나쁜가?

두가지 측면으로 나눠 따지면 답이 조금 더 쉬울 것 같다. (1) 정치적 권리 측면 (2) 경제·사회 등 기타 권리 측면.

 

(1) 정치적 권리:

북한 민중의 권력 선택권이 박탈된다는 점에서는 나쁘다. 그런데 선택권 박탈의 근본 원인은 세습 결정이 아니라 북한 정치 체제의 비민주성이다. 세습 결정은 비민주적 체제이기에 가능했을 뿐이다.

(1-1) 선택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선택권 박탈이 “나쁜 것”이라는 판단은 별 의미가 없다. 최고지도자로 선택할 후보들이 여럿 있지 않으면 선택권이 없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기권을 선택할 여지만 남게 된다.

(1-2) 비민주성의 상징으로서 권력 세습은 북한 민중의 선택권을 박탈했다는 점에선 분명 나쁘지만, 현실에 있어선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엔 ‘현 지배세력’ 이외의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택지가 없는 건 북한 체제의 비민주성 때문이고. 결국 북한 민중이 선택권을 박탈당한 건, 권력 세습 결정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이다.(물론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의 공식 이념인 “인민민주주의”)

(1의 결론) “권력 세습이 북한 민중의 선택권을 박탈하기에 나쁘다”고 하는 건 부정확할 뿐 아니라 위험한 주장이다. 이는 선택권 박탈의 진짜 원인 곧 체제의 비민주성을 감출 위험이 크다. 자칫하다간 북한 지배세력이 모여 앉아 형식상 투표로 지도자를 뽑으면 충분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경제·사회 등 기타 권리:

기타 권리를 “행복의 증진 권리”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보면 질문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북한의 권력 세습은 북한 민중의 행복 증진을 가로막기 때문에 나쁜가?” 권력 세습이 행복 증진을 가로막는지 여부는 지금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김정은 대장”이 순조롭게 권력을 승계한 뒤 “계몽·혁신의 군주”가 될지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 못한 “폭군”이 될지, 당장은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1-2의 결론) 북한의 권력 세습으로 상징되는 정치·국가 체제 문제는, 민중의 정치 권리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민중의 행복을 돕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이냐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그래도 남는 것은 “현실적으로 지배권력이 흔들리지 않고 순조롭게 권력 승계가 이뤄지는 게 민중의 행복에 이롭다면 당장은 민중의 정치 권리 박탈을 용인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이 문제에 답은 여러가지 요인에 대한 검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 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거론한 글들 가운데에 이런 내 주장과 거의 같은 주장을 펴는 이가 있었다. 언론운동가 유영주다. 그는 “분에 넘치는 민주노동당 비판 경향 사설”이라는 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북이 특정 국가, 특정 체제여서 문제라면 그것은 오직 북 인민의 삶이 행복한가 그렇지 않는가로 접근해 논평할 일이지, 세습 여부를 판단의 절대치로 삼을 게 아니다. … 지금 북 인민의 삶이 행복한가 여부로 접근하면 세습은 사소한 문제로 평가될 수도 있다.” (유영주의 주장을 고려할 때 글의 제목은 조금 과하다. 편집자의 입김이 들어간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4. 북한 민주화의 주체는 누구인가?

 

또 하나 거론할 글이 있다. 손호철 교수의 글 “남한 진보여,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라”다. 나로선 이 글의 전체적인 논지를 이미 반박한 셈이지만, 마지막 부분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글의 마지막에서 “'진보적인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진보적인 북한 민주화운동은 일차적으로 이의 진정한 주체인 북한 민중 스스로가 민주적 역량을 육성하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주장은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진보적인 북한민주화운동’이 뉴라이트류의 운동처럼 내정 간섭적인 형태가 되지 않으려면, 북한 민중 가운데 민주화 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전제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 민중 스스로가 민주적 역량을 육성하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는 자칫 “반 정부 세력을 외세가 인위적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에 타격을 주려는 “제국주의적 공작 활동”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필요한 것은 “북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 민주화 지원운동”이며, 이는 북한 민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지원을 요청할 때나 본격화할 수 있는 일이다.

 

덧붙임) 북한 권력 세습이 대다수 남한 사람들에게 우습고 한심해 보이는 게 분명하다. 남한 여론이 북한을 무지몽매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면, 남북 관계 개선에 나쁘게 작용할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을 지적하는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그렇다고 이른바 남한 “진보” 세력이 “세습 비판”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이 문제점을 완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한내 “진보세력간 세습 비판 논란”은 “남한 내부용”에 불과하다.

 

덧붙임2) 글을 쓴 지 한참만에 처음 댓글을 접하면서 느낀 건데, 내 의도가 분명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겠다 싶다. 그래서 추가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마디 요약문을 덧붙인다. “문제는 권력세습이 아니라 북한 정권의 비민주성, 독재다.

2010/10/15 20:11 2010/10/1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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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세습 이야기를 피하기 어려울까

북한의 권력 세습을 놓고 말들이 많다. 특히 경향신문과 민주노동당이 갈등을 빚는 지경까지 왔다. 경향신문 절독 이야기까지 나온다. (뻥구라닷컴의 이 글 참고-글 자체도 재미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피하고 싶은 이야기다. 이른바 ‘좌파적인’ 시각이 조금은 순진한 데다가, 별로 근본적(본래적 의미의 래디컬)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오해만 사기 십상이어서 조심스럽다. 그러던 중 나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사람의 글을 발견했다. (북한의 이른바 “권력 세습”에 대한 메모) 부분적으로는 내 생각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소개한다. (내 이야기는 과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견적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2010/10/08 18:42 2010/10/0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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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딴에는 열심히 쓴 서평

청탁 때문에 이른바 ‘경제/경영’(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계발/(자기)경영’) 서적 한권을 읽고 서평을 썼다. 나는 자기계발서라는 게 하등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사서 읽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계발서가 꾸준히 팔리는 현상에 대한 관심과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내 딴에는 열심히 썼다.

 

인간사를 ‘원인-결과’ 분석만으로 풀어낸다고? (프레시안북스 기고 서평)

2010/10/03 13:57 2010/10/0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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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