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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출판사와 번역자의 괴로운 현실

이전 글 오역 냉정하게 보기에서도 썼지만 번역의 질이 떨어지는 건 충분한 시간의 여유 없이 번역과 편집 작업이 이뤄지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 빨리 해치우는 건 대체로 돈 때문이라고 본다. 출판 과정이 길어지면 비용이 는다. 이는 번역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전업 번역자가 한 권의 책을 오래 잡고 있으면 그만큼 돈벌이가 준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판사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하고 번역자도 충분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관건은 어떻게 이걸 확보하느냐는 것인데, 열악한 현실을 생각하면 절망감만 깊어진다. 특히 인기 없는 책을 내는 작은 출판사와 번역가들의 상황은 말도 못한다. 내가 겪은 사례 4가지의 손익을 한번 따져봄으로써, 현실이 얼마나 힘든지 살펴보려고 한다. (글을 쓰려고 지난 자료들을 찾아 구체적으로 따져보니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표를 보기 전에 일러두기

1) 이 사례는 내가 번역하는 분야 곧 이른바 ‘사회과학’의 경우일 뿐이다. 다른 분야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다.
2) 출판사 실제 매출액: 책이 팔리면 출판사에 실제로 들어오는 돈은 책 정가의 60% 정도다. (요즘은 더 떨어졌다는 소리도 들리지만 정확한 건 모른다.) 나머지 40%는 유통·판매자 몫이다.
3) 번역료: 번역료 계산 방식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고지 당 일정 액수를 계산해주는 방식(이른바 매절)이다. 이 경우는 책이 많이 팔려도 번역자가 추가로 받는 돈은 없다. (나에게 제안이 들어오는 액수는 보통 원고지 당 3500원이다.) 또 하나는 책 정가의 일정 부분을 번역료로 주는 방식이다. 계산법은, “(초판 1쇄 인쇄분)X(책 정가의 몇%)=번역료”로 한다. 관례는 정가의 5%이며, 초판 1쇄 인세분에 한해서는 팔리지 않더라도 모두 계산해서 주는 것이다. (내가 주로 함께 일한 출판사는 형편이 나빠지면서 초판 1쇄 인쇄분의 절반에 대해서만 5%의 번역료를 주고 나머지는 책이 팔리면 주는 방식을 도입했다.) 그리고 2000년대 초에는 인세가 보통 6%였으나 요즘은 4-5%까지 떨어졌다.
4) 원 저자 인세: 천차만별이지만, 외국 좌파 출판사의 경우 사정을 잘 설명하면 1천달러 선으로도 계약을 해준다.
5) 편집·교정·영업 인건비, 인쇄와 종이 비용: 이 부분은 내가 전혀 모르는 영역이다. 그저 추정을 위해 편집·교정, 영업의 인건비를 책 한권당 100만원으로 설정하고 계산해봤다.

 

 

번역서의 출판사 실제 매출과 번역료
항목 사례1 사례2 사례3 사례4
비고
정가(원)
초판 인쇄량
12,000
2000권
12,000
1900권
16,000
1500권
18,000
1000권
 
실제 매출(원)
(판매량)
540만
(750권)
1360만
(판매량 모름. 모두 팔린 걸로 계산)
893만
(930권)
756만
(700권 추정)
총판에 넘기는 값을 정가의 60%로 계산
번역료(인세)
 
 
(번역기간)
150만
(보너스 30만 포함)
(4개월)
114만
 
 
(5개월)
60만
 
 
(10개월)
45만
 
 
(9개월)
인세=(초판 인쇄 권수)X(정가의 5%).
단 사례 3, 4는 절반만 받음
실제 매출 중
번역료 비중
27.8% 8.3% 6.7%
(13.4%)
5.9%
(11.9%)
괄호안은 제대로 받았을 경우
원저자 인세 150만 100만~
150만
100만~
150만
100만~
150만
 
번역+저자 비중 56% 16~19% 18~23%
(25~30%)
19~26%
(25~32%)
 
이 아래 부분은 단순 추정치
번역+저자+편집·교정 비중 74% 23~27% 29~35% 32~39% 편집·교정 인건비
100만원 설정
번역+저자+편집·교정+영업 비중 93% 30~34% 40~46% 46~52% 영업 인건비
100만원 설정
실제 매출 중
인건비 뺀 나머지
40만원 896만~
946만
483만~
533만
361만~
411만
 

 

 

위에 내가 겪은 4가지 사례를 보면 알듯이, 사례1은 완전히 망한 경우다. 사례3, 4도 형편없다. (사례2가 그나마 괜찮은데, 이 경우는 판매량을 모르기 때문에 실제 사례로 보기 어렵다. 그저 초판 1900권을 모두 팔았을 때 수지가 어떻게 되는지 예시한 걸로 이해하면 된다.)

 

주목할 부분은, 번역료가 실제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정상적인 경우 8.3%에서 13.4%까지 나왔다는 사실이다.(사례1의 27.8%은 정말 최악의 경우다.) 책 한 권을 5~10개월 동안 번역한 대가로 기껏 100만원 정도 지불했는데도 이렇게 높은 비중이 나오니, 책 판매량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한 번역료가 획기적으로 오르길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번역료가 책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바로 이 부분이 글을 쓴 핵심 취지이다. 나머지는 모두 그냥 추정해본 것에 불과하다. 출판사의 순익 문제에 대해서는 댓글에 경험자들이 알려주신 자세한 내용들이 있으니 참고하시면 된다.)

 

그러니 나처럼 직업이 따로 있으면서 가끔 ‘재미 또는 의무감’으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면 아예 번역 일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상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수많은 번역자들이 지금도 온갖 고생하며 번역을 하고 있고 이를 외면하는 건 곤란하다.

 

노동자로서는 출판사의 지불 능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이유가 없다. 최저 수준의 생계비 보장을 요구하는 건 더없이 정당한 일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관철할 것인가? 답은 나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그 속에서 구조적 해결 방안을 고민하는 게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2010/08/20 18:40 2010/08/2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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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권리 찾기에 대해

 오역 문제를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자는 취지로 글을 썼는데, 알고 보니 최근 출판노동자협의회에서 외주출판 노동자(편집자, 디자이너, 번역가, 대필가, 글작가, 그림작가) 권리찾기 운동을 본격화했다. 반가운 일이다.

 

이 운동과 관련해 어떤 번역가가  대리 번역에서 번역료 착취까지라는 글을 썼다. (링크는 진보넷에 있는 블로그 글이지만, 실제로는 레디앙에 연재되는 글의 하나다.) 이 글을 보면 번역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힘겹게 일하는지 잘 알 수 있다. 기자라는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이름 걸고 번역서를 낸 나같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고통과 착취가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다만 저 글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번역과 번역가를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앞의 글에서도 썼듯이 ‘구조적인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 번역가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지 구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거다.

 

번역가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영세한 출판사들이 지불 능력이 없다는 점도 분명 그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제대로 대접하라”고 외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 측면이다. 물론 번역가의 권리찾기 운동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 운동이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데도 동의한다. 다만 왜 번역가가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지, 구조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더 기울이면 좋겠다는 뜻이다. (내가 보는 구조적인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나중에 기회있을 때 쓰겠다.)

 

 

2010/08/15 11:55 2010/08/1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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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 냉정하게 보기

(내가 아는 한) 한동안 뜸했던 번역서 오역 문제가 최근 다시 불거졌다. 번역자가 신망을 얻는 사람이고 오역을 지적한 사람도 나름 유명인이어서, 더 관심이 갈 법한 사건이다. 나도 관심 있게 지켜봤다. 보면서 든 첫번째 생각은, 사람들 특히 ‘관중’들이 오역 문제를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오역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 자체로 큰 불명예는 아니다. 오역 지적을 번역자 공격 행위로 보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보면 좋지 않을까?

 

이번에 오역을 제기한 이의 말대로 번역서의 오역 지적은 ‘소비자 운동’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공개적인 지적은 각성 촉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때로는 오역 때문에 독자들이 꺼려해서 괜찮은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일도 생길 수 있으나, 그래도 길게 보면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오역 지적에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시도가 이 땅에 별로 없다는 점이다. (물론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독자를 위해서건, 출판계와 번역자를 위해서건,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오역이 가득한 번역서들이 왜 계속 나오는가?”

 

이 질문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오역은 번역자의 자질 문제다”라는 태도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이는 엉터리 진단이다. 오역은 대체로 번역자의 자질과 큰 상관 없다.

 

1) 많은 오역은 시간이 촉박해서 생긴다.

나는 기한이 촉박한 번역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초 계약한 마감을 넘겨도 양해될 것 같아야만 일을 맡는다. 번역에 들어가기 전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짐작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나는 적당한 단어 하나 또는 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아 두, 세시간씩 끙끙거리는 일이 흔하다. 외국인 이름 표기 때문에 몇시간씩 인터넷을 뒤지는 일도 있다. (어느나라 사람인지라도 알아야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표기할 수 있으니까.) 물론 도저히 해석이 안되어서 한 문장을 몇시간씩 붙들고 있는 일도 흔하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찾으려 논문 뒤지는 일도 가끔은 있다.

 

내가 성실한 번역자라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집착이 조금 심하긴 한데, 내가 번역하는 책들이 잘 팔리지 않는 탓이 크다. 잘못을 고쳐 새로 출판할 기회조차 없는 번역자가 덜 욕 먹는 길은 한번이라도 더 보는 것뿐이다. 인기 없는 번역자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는 번역자란, 재미 또는 사명감 비슷한 것 때문에 돈이나 시간 생각하지 않고 번역하는 사람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대부분의 전업 번역자는 이렇게 하면 굶어죽기 십상이다. 이런 식으로 일하면 한달에 200만~300만원 벌기도 힘들다. 게다가 느려터진 번역자한테는 번역 의뢰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2) 많은 오역은 출판사 편집자 또는 교정자가 잡아낼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성실한 편집자는 번역자가 대충 넘어간 대목을 꼭 찝어낸다. 문제가 있는 번역문은 책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면서 꼼꼼히 읽으면 얼마든지 구별해낼 수 있다. 그래서 성실한 편집자나 교정자를 만나면 오역을 많이 줄일 수 있다.

 

3) 어떤 오역은 속수무책이다.

인문·사회과학 번역서의 경우, 번역자가 책 내용을 완벽히 소화해서 번역하기는 좀처럼 힘들다. 비록 관련 분야 전공자라고 할지라도, 책 전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또한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학문 수준 전반과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것들은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내 경험을 덧붙이자면, 어려운 책을 고생해서 번역했더니 독자들이 “내용이 너무 어렵다”며 번역의 질을 탓할 때 가장 답답하다. 6개월 정도 붙들고 있으면서, 원문과 번역문을 합쳐 5번에서 10번 정도 읽어도 이해가 안되는 책을 무슨 수로 독자들이 단번에 이해하게 번역한단 말인가? 이런 심정이 들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은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아래는 <진실 말하기>에 실린 헝가리 학자, 가슈파르 미클로시 터마시(G.M. Tamas)의 글 ‘계급에 얽힌 진실 말하기’의 43번 주석 번역문이다.)

 

이것은 앤드루 러빈이 그의 흥미로운 책, A Future for Marxism? Althusser, the Analytical Turn and the Revival of Socialist Theory, London: Pluto, 2003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존 로머 등에 나타나듯) 평등주의와 (나중에 G. A. 코언에게서 보이듯) ‘규범적인’ 정치 철학을 크게 법석을 떨지 않으면서 골치 아픈 맑스주의의 출구로 받아들인 러빈의 이 책에서, 1970년대에 초기 좌파 이론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 두 명의 저자 곧 루이 알튀세와 G. A. 코언이 러빈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중략) 분석적 맑스주의에서 남는 분석적인 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지, 추천할 만한 것인 명료화 시도를 빼면 ‘시대물’의 느낌, 옥스퍼드의 경박함과 케임브리지의 속물근성의 결합일 뿐이다.

 

This is what Andrew Levine fails to see in his interesting book, A Future for Marxism? Althusser, the Analytical Turn and the Revival of Socialist Theory, London: Pluto, 2003. It is quite ironical that the two authors who in the nineteen-seventies tried to recreate a pristine left theory, Louis Althusser and G.A. Cohen, should be Mr Levine’s heroes in a book which accepts egalitarianism (in John Roemer and others) and ‘normative’ political philosophy (in the later G.A. Cohen) as an egress for wayward Marxism without any further ado. (중략) Whatever analytical remains from analytical Marxism is rather the ‘period piece’ feel, a combination of Oxford flippancy and Cambridge philistinism, besides a commendable striving for clarity.

 

도대체 한국에서 앤드루 러빈이란 학자를 아는 사람이 몇이고, 2003년에 나온 그의 책을 읽어본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난 누군지도 모르면서 번역했다. 빼먹을 순 없으니까. 그래서 엉망이다!) 게다가 “시대물의 느낌(period piece feel)”은 도대체 뭐고, “옥스퍼드의 경박함과 케임브리지의 속물근성”을 아는 사람은 있을까? (내가 내놓고도 낯 뜨거운 번역문이니, 누가 멋지고 이해하기 쉽게 새로 번역해주면 정말 고맙겠다.) 그러니 독자들이 조금 더 너그러워지면 좋겠다.

 

물론 오역의 원인은 이밖에도 많을 것이다. 최소한의 언어 실력도 없으면서 성의마저 없는 번역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 제기한 1번과 2번 문제만 해결해도 우리의 번역 수준이 크게 나아질 거라고 본다. 이게 내 경험으로부터 얻은 결론이다.

 

이 두가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다. 다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접근해야 하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것이 내 문제 제기의 핵심이다.

2010/08/09 18:22 2010/08/0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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