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진보신당 말고 진보신당 당원들께

진보 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번 지방선거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정치는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뭔가를 보여줘서, 투표자들이 표를 주고 싶고 실제 표를 주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미 진보 정치는 패배한 거나 다름없다.

 

민주노동당은 진보 정치라는 의미에서 이미 논할 게 없는 당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진보신당이다. 그런데 나는 진보신당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별로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양비론’을 동원해 진보신당을 민주노동당과 동급으로 전락시킨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순결하신 당신에게라는 이 글처럼 말이다.

 

내가 하자는 말은 이런 차원의 것은 아니다. (그래 봐야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욕하면 군말 없이 욕을 먹겠다.) 나처럼 말만 나불거리는 ‘싸구려 먹물’에 비하면 진보신당의 당원들이 훨씬 더 순결하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직·간접적으로 아는 진보신당 당원들은 훌륭한 분들이다. 그 분들이 훌륭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당원들은 훌륭한데 왜 진보신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노회찬이나 심상정 같은 분들의 지지율이 형편없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야권 단일화를 시도하다가 진보신당은 떨어져 나왔지만, 그 와중에도 나머지 야권은 크고 작은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그러니 적당히 진보적인 유권자들로서는, 진보신당으로 ‘표현되는’ 진보 정치에 별 감흥도 기대도 갖기 힘들다.

 

나로선 이번 선거에서 실패하는 게 문제는 아니다. 선거 뒤에 사람들이 “진보 정치라는 것에 기대를 조금은 걸어봐도 되겠구나”라는 생각만 갖게 만들면, 진보신당은 승리자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건, 진보신당이 어떻게 해야 ‘진보 정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여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노회찬, 심상정에게 모두 맡기지 말고 평당원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결국 진보신당은 ‘야권 내에서 오락가락하는 노회찬과 심상정의 당’이라는 인상만 더 굳힐 뿐이다. 세세한 내막과 고민은, 먹고 살기 바쁜 일반 유권자들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단편적 인상만 가지고 말한다’고 탓하지 말라. 탓할 건 진보신당이지, 주의 깊지 않은 유권자가 아니다. 정치는 정책을 통해 보여주든, 행동을 통해 보여주든,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전혀 달라요, 정책집만 한번 읽어보세요”라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 걸 보여주는 게 당신들의 몫이다.

 

진보신당이 진보 정치의 희망을 보여주는 길은, 노회찬·심상정 말고 평당원들이 당을 장악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선거 뒤에 곧바로 ‘선거운동 평가를 위한 평당원 총회’를 조직하라. 그래서 평당원들이 진짜 진보신당의 주인이 되는 것을 보여달라! 그래야 우리 같은 외부인들이 진보 정치에 희망을 걸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게 진보신당도 사는 길 아니겠는가? 진보신당 당원들이 진짜 주인이 되면 진보 정치의 미래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이 믿음 때문에 어줍잖은 훈수를 늘어놓는다.

2010/05/19 12:28 2010/05/19 12:28
16 댓글
트랙백1 트랙백

경계도시2

<경계도시2>를 봤다. 이 영화 진짜 나쁘다. 아니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럽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지금은 감정이 앞서기에 정리해서 쓸 상황이 아니지만, 잊지 않으려 간단하게 기록해둔다.

 

1. 이 영화는 2003년 ‘송두율 사건’을 다루면서도 송두율 교수의 진짜 목소리는 전혀 전달하지 않는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은 고독한 ‘경계인’을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외면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2. 영화를 보고나서 많은 사람이 불편해하고, 괴로워하고, 반성하나본데, 당사자(또는 피해자)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하는 ‘반성’은 ‘음란하다’고 할 만큼 기괴한 짓 아닌가? (개인의 문제로 볼 게 아니라며, 운동을 생각해야 한다며 ‘전향’을 강요하는 이른바 진보 인사들의 기만에 충격을 받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모르던 바인가? 애써 보지 않으려 외면하던 진실은 아닌가?)

 

3. 나는 이 영화에서 딱 한가지를 보고 싶었다. 너무나 잘 아는 ‘송두율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말고, 경계인을 지향하다 실패한 인간 송두율의 고뇌를 말이다. 하지만 송 교수는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 대신 그의 부인이 단편적이나마 실마리를 던져준다. (경계인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내면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사회라니… 라고, 경계인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조금 더 기울게 되는 상황이라는 게 있다… 라고)

 

4. 그래도 남는 의문이 있다. 왜 송 교수는 마지막 대책회의에서도 입을 다물었나? 반면에 그의 부인은 어떤 힘 덕분에 말하고 저항할 수 있었던 걸까? 부인이 마지막까지 저항해 남편을 지켰는데,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모든 게 바뀌어 버렸는가? 그리고 ‘2003년 서울의 송두율’은 극악스럽게 몰아치는 좌·우파의 공세에 무방비로 당한 희생자일뿐인가? (도무지 이 영화는 이런 의문들은 따지려 들지 않는다. 게다가 감독은 송두율 교수의 말을 들을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뒤 그저 ‘레드 컴플렉스’라는 상투적인 틀에 ‘허깨비 송두율’을 풍경으로 끌어다 놓을 뿐이다.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분노가 치민다.)

 

5.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한가지를 깨달았다. 그건 한국이 송두율을 어떻게 ‘우리’로 받아들였는지(거부한 게 아니라!) 하는 것이다. 그 답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거리 기자회견장에서 항의성 질문을 던지는 어떤 남성이 잔인하리만치 실감나게 들려준다. “이 나라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살려준다.” ‘우리’로 받아들이는 행위, 그래서 “살려주는” 행위는 너무나 끔찍하고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행위다.

 

마지막으로 2003년 만들어진 <경계도시>에 대해 쓴 짧은 글의 맨 앞부분 세 단락을 덧붙인다.(2003년 3월에 영화도 보지 않은 채 청탁을 받아서 썼던 글인데, 뒷부분은 <경계도시2>가 나온 지금엔 무의미해서 생략한다.)

 

*-----*

<경계도시>가 던지는 질문

 

나는 송두율 교수를 잘 모른다. 영화 <경계도시>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어찌 하다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무슨 글을 써야할지 막막했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만큼은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인 셈이다.

 

<밥, 꽃, 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울산 현대자동차의 구내식당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이 정리해고된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지난 2001년 울산영화제에서 상영을 거부당했다. 감독들은 이 영화의 상영 거부가 울산 지역 운동단체들에 의한 검열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이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감독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밥꽃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고, 지난해 3월 서울에서 1천명정도의 관객을 모아 상영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나 또한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밥, 꽃, 양>과 영화 제작팀인 라넷을 지지한 것은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아주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지한 건 노조나 운동단체들의 편견과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할 권리, 침묵당하던 식당 여성노동자들이 자신들을 드러낼 권리, 이 사회 전체에 대한 성난 외침의 자유,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그 내용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하 생략)

 

2010/05/04 23:48 2010/05/04 23:48
43 댓글
트랙백0 트랙백

보드리야르 재발견의 의미

 철학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워낙 아는 게 없어서 철학을 공개적으로 논할 생각은 없다. 블로그로 복귀(?)하면서 ‘보드리야르 재발견’ 번역 작업을 하겠다고 한 것도 철학 이야기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게 ‘보드리야르 재발견’은, 현대 생활을 지배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비판적 이해 측면에서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내가 보드리야르를 재발견한 것은, 영국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윌리엄 메린(William Merrin)이 쓴 책 Baudrillard And the Media 덕분이다. 메린은 이 책에서 보드리야르의 미디어 이론을 집중 조명하는데, 기존 영어권의 보드리야르 이해와는 상당히 다르게 접근한다. 그건 보드리야르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보지 않고, ‘급진적 뒤르켐주의 전통’에 충실한 학자로 본다는 점이다. 이 책이 특히 매력적인 것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e, 허상) 개념을 그리스에서 시작하는 서구 철학의 맥락에서 설득력있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메린의 홈페이지, 구글에서 책 미리보기)

 

메린의 주장을 보면, 보드리야르가 복제의 시대니, 복제품이 원본을 대체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대중매체를 통해서 세상을 접하는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뒤르켐의 이론을 따라서 “성스러운 것(상징적 교환)의 상실”과 이를 대체하는 “안전하고, 세속적이며, 거짓된 형태의 교류”를 대비시킨다. 과거엔 ‘폭력적이고 위험하지만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인간이 실제현실(생각해보니 ‘실제’가 아니라 ‘실재’ 같기도... 쉬운 말로 변경)을 대면했으나, 20세기 대중매체는 이를 ‘폭력이 배제되어 안전한 가짜 이미지의 소비’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이 허상(시뮬라크르)을 실제진짜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이라크전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피 흘리고 죽어가는 진짜 사람이 배제된 <시엔엔>의 영상으로만 이라크전은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이야기고, ‘실제 전쟁’을 이미지가 대체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허상을 깨고 실제진짜 현실을 대면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 될 것이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장면, 신문 지면에 묘사되는 현실, 트위터의 타임라인에 뜨는 세상 이야기에 매몰된 우리는 ‘실제현실’과 대면하지 않고 대면할 수도 없는 ‘허상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라 ‘급진적인 미디어 이론가’로서의 보드리야르, 그것이 내가 재발견하려는 보드리야르다. (덧붙임: 보드리야르 이야기할 때 제발 매트릭스는 좀 뺍시다!)

2010/04/14 14:48 2010/04/14 14:48
6 댓글
2 트랙백

앞으로 뒤로

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