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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맥스라는 회사 조심하자

요즘 블로그를 달구는 '티맥스'라는 회사가 있다. 주목을 받는 이유는 “엠에스 윈도와 완벽하게 호환되는 토종 운영체제를 내놓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 되면 정말 엄청난 일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먼저, 소송부터 줄을 이을 것이다. 엠에스가 어떤 회산데, 가만히 눈뜨고 보겠는가? 피해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미 엠에스가 등록상표 문제를 걸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회사, 기본이 없다. “만수 아저씨”까지 불러다 놓고 대규모 발표회를 했는데, 알맹이는 없고 심지어 마우스 커서 모양조차 기본을 어겼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 불러놓은 이른바 “발표회”에서, 파일 관리 시스템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쉽게 말해 '탐색기' 기능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대충 비슷하다.) 이런 걸 “오에스 발표회”라고 하고 또 기자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발표회”로 인정하는 나라? 이게 21세기의 한국이다. 이런 건 “제품 발표회”가 아니고 잘봐줘서 “컨셉 발표회”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면서 10월인가, 11월인가에 공개적으로 시험판을 내놓겠다느니, 판매를 하겠다느니 한다. (관계자들의 말이 서로 달라서 정확한 일정조차 불분명하다.) 이 사람들은 운영체제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운영체제의 첫번째 생명은 안정성이다. 응용프로그램들과 달라서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운영체제는 쓸 수 없다.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어떻게 내 소중한 자료들을 맡기나? 그래서 운영체제는 파일 관리 시스템의 안정성부터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기본의 기본이다.

 

이런 엉터리가 아직도 통하는( 또는 통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가 한국이다. 나는 이것부터 개탄스럽다. 도대체 기본이 안됐다.

 

티맥스, 뭔가 일을 벌이기는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으니, 한동안 조심해서 관찰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글들을 꼼꼼히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 운영체제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자는 차원에서 쓴 것이다. (나는 1991년인가 92년인가, 386컴퓨터에 플로피디스켓 수십장 바꿔가며 아이비엠의 오에스2라는 운영체제를 설치해서 써본 사람이니, 운영체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믿으셔도 된다.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운영체제가 어떤 건지, 어느 정도로 작동해야 하는 건지, 사용자 측면에서는 누구 못지 않게 잘 안다.^^)

 

2009/07/10 11:23 2009/07/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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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칼날 같은 글

아래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글, “글이 아니라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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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만큼은 던지고 싶다. “현재 한국작가들이 취하는 이중적 태도(국민을 학살하고 이 땅을 아우슈비츠로 만든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급진적 태도’와 그런 정부를 옹호한 선배작가에 대한 ‘관대한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만약 오늘날 한국의 작가들이 함께 해결해가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순 자체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런 문제에 눈을 감은 채로 이루어지는 반(反)이명박(그리고 친(親)노무현)적 발언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는 기회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결코 문학적으로 올바른 행위라 할 수 없다.

 

필자는 최근 책에서 현재 중요한 것은 ‘문학과 혁명’이 아니라 ‘문학과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문학인들에 대한 공적지원금을 제도화한 황석영을 ‘한국문학의 총체적인 보수화’를 이끈 인물로 비판한 바 있다.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해 문단의 반응은 시큰둥한 것 같다. 이는 진보적인 작가나 문학권력을 비판하는 비평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국가의 지원금이 없이는 문학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까놓고 말해,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어떻게 보면 국가는 ‘소수예술’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어, 전통예술과 같은 경우는 국가의 지원마저 없다면 명맥이 완전히 끊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부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과 소통가능성이 존재하며 스스로도 그것을 강조하는 데에 열심인 문학가들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일에 앞장서거나 또는 그 결과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도 상업성과 무관하게 보호되어야 할 영역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본 적이 있었던가? “왜 그 보호주체는 항상 국가여야만 하는가?” 최근 인구에 회자되는 말 중에 ‘승자독식사회’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말이 가장 극단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문단이다. 한국의 문학출판시장은 지독한 ‘선택과 집중’에 의해 굴러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생긴 패자들은 국가의 지원금으로 그럭저럭 버티는 구조이다. 따라서 정권이 바뀐 후 생긴 여러 변화(주로 문학관련 예산축소)가 다수의 패자들에게 어떤 위기감을 고취시켰음은 자못 분명하다. 물론, 이런 해석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아니고서는 문학인들이 왜 노무현 정부 때는 시종 침묵을 지켰는지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출처] [이슈논쟁] 한국문학의 선언 (웬만하면 이렇게 많은 분량을 가져다 싣지 않지만 카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글이여서, 특별히 이렇게 했다.)

2009/06/19 10:21 2009/06/1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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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로잡은 한마디

“이 우파 정치학자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생각은 무엇인가? 가만히 읽으면 <자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절제력 없는 무식한 다수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만 잘났다는 것이다. 이 자기만 잘나고 또는 자기만 옳다는 독단, 혹은 터무니 없는 자부심이 아마 우파의 정신적 근원처럼 보인다. 무식하고 힘없는 우리도 좀 잘나면 안 되겠니.
[출처] 우리 시대 우파 학자 하나 (강조는 인용자가 덧붙임.)

2009/06/19 09:32 2009/06/1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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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