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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에 대한 메모

니체가 자서전 격인 <이 사람을 보라>에서 ‘영원회귀’에 대한 책이라고 말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의 영원한 돌아옴’으로 규정된 이 영원회귀 개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또 돌아온다면, 이 지긋지긋한 삶을 한 번 더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것이 될 것인가? 그것이 과연 기독교적이고 근대적인 직선적 시간론의 허무주의를 극복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마주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중력의 악령은 “곧은 것은 한결같이 속인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으며, 시간 자체도 일종의 둥근 고리다.”라고 그의 영원회귀 개념의 난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원회귀는 <차라투스트라…>의 다른 장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원칙과 맞닿아 있다.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제 내가 발을 담군 강과 오늘 내가 발을 담구고 있는 강은 다르다는 만물유전설과, 동일한 것이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그러나 여기에 영원회귀 개념의 혁신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의 4부에 이르러 니체는 영원회귀 개념을 절대적 긍정의 시간개념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명정의 노래」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그대들이 어떤 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소망한 일이 있었다면, 그대들은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영원한,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고, 실로 묶여 있고 사랑으로 이어져 있는,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 돌아오는 세계는 하나의 의미나 표상으로 축소되지 않은, 그야말로 선악 저편의 세계 ‘전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쾌락을 향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또한 “온갖 고통에 대해서도 좋다고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영원회귀의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초월적인 탈출구가 없는 이 세계 자체를 긍정하고 향유하도록 이끌게 된다. 삶은 하나의 주사위 놀이가 된다. 우리가 동일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조차도 사실은 계속해서 주사위를 던지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오직 자신을 몰락시킨 사람만이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몰락하는 시간, 위버멘쉬가 등장하는 시간은 척도를 갖지 않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그러므로 매 찰나의 순간 속에 계속하여 도래한다. 따라서 위버멘쉬는 어떤 고정된 실체를 갖는 구원자의 상일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변신의 계기로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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