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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0
    그 시절, 그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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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7/01
    나에게 폭력이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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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현장을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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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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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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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12/03
    버림받은 타워크레인 위에서-크레인 동지들의 호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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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11/17
    어느 공무원 노동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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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날들

그 시절만 생각나면 눈물만 주룩주룩이다.

상처가 깊긴 깊었나 보다.

 

어째 이리 상처주고 상처받아왔던 나날이었는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남아 있던 열정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날들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런 상황이 또다시 닥친다면 주저없이 나 자신을 위해 변호할 듯.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산뜻함으로 채울 수 있었던 지난 주말.

뭔가 보신을 하고 온 듯한 기분이다.

 

랄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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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폭력이란..

무화과님의 [겁쟁이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렸다. ] 에 관련된 글.

 

사실은 간단하게 댓글을 달았던 것 뿐인데 졸지에 자본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 처음엔 어이없고 나중엔 얼굴이 달아올라 그냥 대꾸 안 하기엔 머시기한 것이 되어 부렀다. -_-;;

그저 댓글로 쓰다 보니 너무나 길어져 괜스레 무화과님 블로그에 실례를 범할 듯 하여 댓글 쓰던 걸 걍 내 블로그로 가져와 버렸다.

참고로 어젯 밤에 쓰던 건데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진보넷 블로그 안 들어가졌다.

그리고 그 시간 광화문은 열라 싸우고 있었다. -_-;;

아, 어쨌든 간만에 블질 적응 안 된다. -_-;;

 

============

 

조커//

위의 제 댓글은 자본가에 대항한 투쟁에서 물리력(폭력적 수단)은 불가피하게 동원될 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올린 것인데 너무 간단하게 쓴 나머지 자본가가 부럽다고 읽혔다면 그건 머 저의 탓이겠죠. -_-;; 

함에도 저의 글에서(제가 보기엔 그렇게 읽힐 소지가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ㅠ) 자본가가 부럽다는 맥락을 '추측'하시다니 님의 추측이 저는 다소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어쨌든 비폭력을 대안적 행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님은 폭력 그 자체는 이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폭력적 수단을 포함한 모든! 물리력은 투쟁에 불가피한 요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구요.

여기서 후자의 폭력은 자본가정권의 손에 들려 있는 폭력적 수단(모든 영역에서의 법과 그 집행체계 등)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항하는 우리의 모든 수단, 즉 선전과 선동 그리고 조직의 영역을 포함하는 가운데 ‘일부’를 말하겠지요.

그것을 폭력이라는 단어로 압축하는 것은 범주가 좀 맞지 않은 듯 합니다.

함에도 저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폭력의 개념은 누가 그 수단을 틀어쥐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님에 대한 댓글이라기 보다 제가 생각하는 폭력을 다시 이야기하면 뭐 이렇습니다.

촛불집회가 두달이 다 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일단 가진 놈들의 정권이 일방적으로(전 이걸 “폭력적으로”으로 쓰고 싶습니다만) 정책(쇠고기, 민영화, 대운하, 교육정책)을 입안/결정(혹은 시도)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가 이번 한 번뿐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0년 전 노동법 날치기도 그랬고, 그 여파로 닥친 대규모 구조조정도 그랬고, 온갖 FTA체결도 그랬고, 모두 다 가진 자들의 법으로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법과 정책이 마련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비정규직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취업 걱정에 어깨 쳐진 20대와 실업자들, 망해가는 중산층들은 거의 태반이 넘는 지경에까지 와 있죠.

전 이러한 것이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한 가진 자들의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에 어떻게 무슨 대응을 했나 등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칩시다요)


그들의 폭력은 반드시 합법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틀어 쥐고 있는 자들은 결코 폭력과 합법을 혼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합법이라는 미명 아래 마음껏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에 하나, 합법적이라 우겨댔던 것이 불법이라 판정이 된다 한들, 그 법은 결코 가지지 못한 자들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결국 지금 이 곳의 법이라는 것 자체가 권력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법적이라는 말은 투쟁에서 불필요합니다.

제가 노랫말(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불법으로 투쟁하리라~)을 적었던 것은 우리의 싸움이 아무리 저들이 노래하는 합법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더라도 그들을 그것을 결코 우리 싸움을 합법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므로 우리가 합법을 운운하며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합법적 영역의 투쟁이 그렇지 않지만 합법의 영역에 굳이 우리를 가둔다면 투쟁은 체제 내에 갇혀 버릴 가능성이 커지게 되고 그건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이라기 보다 지배계급과 협조하는 수준에서 마감되는 싸움이 될 여지가 커지게 됩니다.

하기에 저는 일상에서 자행되는 우리에 대한 그들의 폭력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그래서, 합법은 투쟁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적'들에겐 언제나 불법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전혀 보호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폭력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 문제가 남을 테지요.

그것은 결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되지 못함은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할 터.

현재의 촛불집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저로서는 아직 풀리지 않는 문제이긴 하지만, 일단 여지껏 그런 폭력들에 노출되어 왔던 개인들의 불만이 ‘쇠고기’라는 사안을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쇠고기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여러 가지 현안의 싸움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말입니다.


잠깐 개인적 경험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촛불집회에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평화롭고 자유로운, 축제 분위기의 집회가 "합법적 영역에서" 정권의 일방적 정책에 제동을 걸고 전면 재협상의 성과를 얻어 온다면 그야 말로 “즐거고 기쁜 승리”겠다라고.

하지만 저에게 고민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것’만으로’ 가능할까 였고 동시에 가진 자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런 싸움의 성과가 모든 영역에서 어떤 형태로 남을 지 말입니다.


제가 폭력적 수단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첫번째 고민으로부터 였습니다.

싸움의 과정에서 비폭력이냐 폭력이냐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논리가 아니라, 여러가지 싸움의 수단 중 하나라는 것이지요.

저는 도로를 점거하고 전경차를 끄집어 내고 청와대에 진출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폭력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가진 자들은 그것을 불법을 거론하며 폭력이라고 명명하지요.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이미 폭력적입니다.”

여대생의 머리가 군홧발에 짓이겨지고 殺수차에 부상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끝까지 비폭력을 외쳐야 할까, 분노하는 사람들 앞에서 분노하지 말고 참자라고 말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조금 더 확대하면 이런 것이죠. 일방적 구조조정에 나와 나의 동료가 해고되고 노조활동을 할라치면, 혹은 확대될라치면 식칼테러에 집단구타, 방화는 기본에 온갖 참주선동을 일삼는 살인적 테러 앞에 “저들의 폭력에 휘둘리지 말고 비폭력 저항을 조직하자”라고 전, 절대! 말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똑같이 우리도 식칼 테러하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가진 자들의 권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따라서 그들의 목줄을 죄는 모든 투쟁의 방법과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항상 “진격~앞으로!”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 때에 따라 후퇴하는 것도 하나의 전술이겠지요.

그러나 불붙은 싸움 앞에 싸움을 자제하자는 것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조커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저 그냥 저의 썰을 풀고 있을 뿐. )

혹여, 아직 싸움이 불붙지 않았다고 해서 폭력적 수단(공장점거와 라인중단, 파업을 포함한 모두)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외려, 그것이 곧 대중투쟁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전 싸움은 곧 물리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물리력은 말 그래도 물리적 힘의 행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선전과 선동, 조직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것을 말합니다.

저항을 만들 때 우리의 '적'들은 그것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시 삼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하더라도 그 집단의 성격을 협조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집단의 존재 자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협조적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교육과 선전/선동(회사에 충성을 다하게 하기 위한)을 아끼지 않죠.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교육과 선전/선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영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항을 위한 조직과 계획이 있고 그것을 실천하고 집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저의 미천한 경험에 근거하면 가진 자들은 개인의 불만을 문제시 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의 불만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론을 동원해 진실을 왜곡한 이데올로기를 유표하기도 하고 합법이라는 미명 하에 폭력적수단으로 싸움을 개박살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불만을 넘어설 수 없을 때, 불만의 응집체로서의 조직과 그 모든 양식들을 자신의 날개 밑으로 포섭하기에 급급해 합니다.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은, 곧 계급적 자각을 명확히 인지하는 것은 바로 자본가 계급, 가진 자들과 그 정권이지요.

전 최근까지 대한민국에서(대한민국을 넘어 자본주의에서) 가장 계급적인 부대는 바로 자본가 계급이라고 말해오곤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부러워서가 절대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목도할 때 우리가 그만큼 계급적이지도 원칙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비꼬아 말한 것입니다.   

그런 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겨누는 화살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 우리의 행동방침은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는 것이구요.

전, 그런 가운데 폭력적 수단을 우리의 싸움에서 미리 배제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열라 졸립니다. ㅠ

두번째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써야 겠습니다.

너무 두서없이 늘어놓은 듯 합니다. 지금 정신도 제 정신이 아닌데 말입니다요.

여기서 줄여야겠습니다. 졸립니다.

다음에 기회되면 다시 올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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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현장을 사수하라!

mms://bijeonju.jinbo.net/media/pa711.wmv

 

: 현자전주 비정규직지회 전면파업돌입 영상 편집본 

  

  

  

  

--- 들불도 단 한점 불꽃으로부터 

  

비정규직 투쟁이 절정을 치닫던 4년 전.  

이후 투쟁의 급속한 썰물을 타면서 등장했던 대공장 사내하청투쟁.  

그러나 그마저도 이렇다할 싸움이 전개되지 못했던 2년 전. 

그리고 지금.  

  

투쟁의 절정에서마저 옥쇄는 부정당하기 일쑤였건만.  

그러기에 전주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은 과감한 일보다.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또다시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결정적 순간에 옥쇄를 접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과감한 일보는 분명 이미 성과로 남을게다.   

  

단협체결과 해고자복직이 요구건만.  

그조차도 듣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는 노조, 거부당하는 활동가/해고자.  

두려워하는게다.  

그 요구조차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옥쇄를 감행한 '노예들'이 더 큰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운게다. 

  

끝까지 투쟁해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단협체결! 해고자 원직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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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 미래연대에서 펌

야코프 스베르들로프(上)



이 글은 1925년 3월 13일자로 발표된 레온 트로츠키의 짧은 기록이다. 여기에서 트로츠키는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라는 한 인물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우리에게 스베르들로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짧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볼셰비키 전통이 얼마나 위대하고 투철한 노동해방 투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영역본 해설


러시아 혁명 2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비할 바 없이 위대한 볼셰비키 조직가 스베르들로프에 관한 트로츠키의 간략한 기록을 재발간한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독자들은 저 영웅적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1917년 혁명과 뒤이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혁명가의 유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는 1885년 6월 3일 니즈니-노브고로드 시에서 태어났다. 조판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짜르 치하 러시아의 노동자계급 가족들이 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열 살이 된 어린 소년 야코프는 김나지움(고등학교와 같은 등급의 교육기관)에 등록했고, 거기에서 5년 동안 공부했다.

열다섯 살이 되자 그는 잡화점에서 일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 다음 해인 1901년, 니즈니-노브고르드에서 최초로 혁명적인 비합법조직이 만들어졌다. 같은 해에 스베르들로프는 16세의 나이로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대단히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는 빠르게 최선두로 나아갔다. 비합법활동의 시기에 그는 사실상 러시아 전역에서 지도적 인물로서 투쟁에 복무했다.

1903년 러시아 노동운동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이 일어났다. 그 무렵 스베르들로프는 볼셰비키 파에 합류했고, 죽는 날까지 볼셰비키 대열에 남아 있었다.

1905년 혁명기에 그는 우랄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노동자대표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그 시절 비합법활동을 했던 모든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감옥과 유형생활을 했다. 그가 처음으로 체포된 것은 1903년이었다. 1905년 혁명 패배 이후인 1906년부터 그는 18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2년간의 감화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되풀이되는 체포, 감금, 유형, 탈출이 이어졌다.

1913년 가을 포로닌에서 볼셰비키 협의회가 열렸다. 당시 그는 유형 중이었기 때문에 협의회에 참가할 수 없었음에도, 당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시베리아 극지방에서 유형 중이던 그는 당장 페트로그라드로 갔다. 1917년 4월 협의회에서 그는 중앙위원회에 또다시 선출되었다.

두 번째 소비에트 총회에서 그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소비에트공화국 의장으로서의 업무와, 볼셰비키 당 ‘조직책임자’로서의 번거로운 책무들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나갔다. 서른네 살의 나이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렇게 활동했다.

볼셰비키 운동이 보유한 이 최상의 조직가에 관해서 지금은 아주 조금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겹겹이 싸인 스탈린주의적 왜곡과 날조가 그의 명성을 뒤덮어버렸다. 소련 당국의 공식 신화는 10월 혁명과 내전 시기에 스베르들로프가 수행했던 역할의 대부분을 스탈린의 업적인 것처럼 치장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스베르들로프를 묘사할 때조차도 스탈린의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변조하려 애썼다. 그러나 조직가로서 스베르들로프는 스탈린과는 정반대의 유형에 속했다. 1927년 트로츠키는 ‘조직가의 유형’이라는 측면에서 스베르들로프와 스탈린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대조해서 보여주었다.

1919년 봄까지 당의 최고 조직가는 스베르들로프였다. 그는 [스탈린과는 달리] 서기장이라는 직함을 갖지 않았다. 그런 명칭은 당시에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그런 역할을 해냈다. 1919년 3월, 이른바 스페인 열병에 걸린 스베르들로프는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내전과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도처에서 사람들이 쓰러져갔고, 당은 이러한 손실의 무게를 고통스럽게 실감했다. 레닌은 스베르들로프를 치하하는 두 번의 장례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이후 스탈린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도 우회적이지만 매우 선명한 빛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혁명과 승리의 과정에서, 노동자혁명의 정수를 보다 완전하고 보다 포괄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베르들로프였다.” 스베르들로프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조직가였다.” “이론가도 문필가도 아니며 비합법활동을 하던 한 겸손한 노동자가 단숨에 비할 바 없는 권위를 획득한 조직가로 성장했다. 그는 러시아 전체 소비에트 권력의 조직가였다. 또한 그는 놀랄 만큼 뛰어난 실력으로 당 활동을 체계화했다.” 레닌은 기념일에서든 장례식에서든 과장법을 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그의 찬사는 동시에 조직가의 임무에 대한 성격 규정이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거론할 만한 단 한 건의 갈등도 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스베르들로프와 같은 조직가가 있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 시절 레닌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 주요 조건들 중 하나에 관하여 적어도 한 차례 이상, 그것도 늘 새롭게 만족감을 느끼면서 서로 이야기한바 있다. 그것은 곧 지도그룹 내의 통일성과 연대였다. 여러 사건들과 장애물들이 가공할만한 압력을 가했고,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들이 등장했으며, 날카로운 실천적 불일치가 때때로 발생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작업은 대단히 순조롭고, 우호적이며, 중단 없이 진척되었다.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우리는 지난 혁명의 단면들을 회상할 수 있다. “지도그룹의 통일과 연대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승리를 보증한다.”

중앙기구의 결속은 볼셰비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준비되어 왔으며, 그 지도자들 특히 레닌의 의심할 수 없는 권위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 없는 일치단결에서 가장 주요한 전문가는 스베르들로프였다. 그의 기예가 갖는 비밀은 간단했다 : 대의라고 하는 단 하나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 당에 속한 노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당 간부층으로부터 음모가 자행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게 되었다. 스베르들로프가 가진 이러한 권위의 토대는 그의 성심(誠心)이었다.

마음속으로 모든 당 지도자들을 비교해보면서, 레닌은 그의 장례연설에서 실천적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한 자질을 겸비하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가정해볼 때, 스베르들로프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그가 혼자 해냈던 작업은, 이제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고 그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단 전체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말들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라, 엄밀하게 실천적인 제안이었다. 그 제안은 실행에 옮겨졌다. 한 사람의 서기 대신에 세 명으로 이루어진 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볼셰비키 당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레닌의 언급으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스베르들로프의 생애 전체에 걸쳐 스탈린은 당 조직 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시기든, 소비에트 국가의 토대와 성곽을 구축하는 시기든 이 점은 동일했다. 스탈린은 또한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해서 만들어진 첫 번째 서기국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스베르들로프에 관한 다음의 추모 기사는 1925년 레온 트로츠키가 쓴 것이다. 이 글은 1926년 당사 연보를 통해 소련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존 라이트(John G. Wright)가 러시아어 원본으로부터 번역했다.

* * *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1917년 제1차 소비에트 총회 중 열린 볼셰비키 당 회합에서 나는 처음으로 스베르들로프를 알게 되었다. 스베르들로프가 회합을 주재하고 있었다. 당시 당 내에서는 이 비범한 인물의 진정한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만에 그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펼쳐보이게 된다.

혁명 이후 초기를 거치는 동안 망명가들, 즉 해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과 ‘국내의’, ‘본국의’ 볼셰비키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망명가들은 상당한 강점을 가졌다. 그것은 그들의 유럽에서의 경험, 그 경험과 연결된 넓은 시야, 그리고 과거 분파투쟁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하고 있었다는 데 기인한다. 당연하게도, 망명가와 비망명가 사이의 이러한 분할은 순전히 일시적인 것이었고, 모든 구별들은 오래지 않아 제거되었다. 그러나 1917년과 1918년에 이러한 구별들은 많은 경우 상당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렇지만 그런 시절에조차 스베르들로프에게서는 아무런 ‘지역감정’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조직적으로, 겉보기에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수많은 사건들 및 레닌과의 긴밀한 접촉과 협력 속에서 성장했고, 강고해졌다.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스베르들로프가 처음부터 최상급의 완성된 혁명적 ‘정치가’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혁명이 제기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그는 위로부터, 즉 일반적인 이론적 검토라는 견지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 조직들을 통해 전달된 삶의 직접적인 맥박을 느끼며 아래로부터 문제에 접근했다. 새로운 정치문제가 논의되고 있을 때, 가끔 스베르들로프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특히 그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갈팡질팡하고 있거나 또는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토론을 진행하면서 의견의 평행선을 따라 문제를 풀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 ‘누가 그 일에 적합할까?’ ‘그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우리의 다른 임무들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공동의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곧바로 그 문제의 조직적 측면과 역량 배치의 문제로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거의 언제나 스베르들로프는 광범위한 실천적 제안들을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백과사전과도 같은 기억력과, 사람들에 대해 면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초기 형성단계에서 소비에트의 모든 부서들과 기구들은 역량 배치에 관한 한 그에게 의존했다. 최초로 그리고 대략적으로 당 간부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작업은 유례없이 비상한 수완과 창의성을 필요로 했다. 기존의 기구, 서류, 기록 등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직업혁명가 아무개 씨가 특정한 소비에트 기구(구성되었지만 여전히 단지 이름만 붙여졌을 뿐인 기구)를 이끄는 데 어느 정도로나 적격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심리적 직관이 요구되었다. 때로는 아무개 씨의 경력에서 두세 가지의 문제점들을 발견해내고, 그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곤 했다. 게다가 이러한 교체작업은 인민대표위원, 이즈베스챠[과거 소련의 정부 기관지] 인쇄공장 관리인,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성원, 정부 지도자, 기타 등등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이러한 조직적 문제들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논리적 맥락 없이 발생했다. 즉 최상층으로부터 기층으로라거나 또는 그 반대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형태로, 우연적이고 혼란스럽게 발생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조사를 하고, 인물에 관한 세부 자료를 모으거나 기억을 되새기고, 전화연락을 하며, 사람을 추천하고, 업무를 할당하고, 약속을 잡아나갔다. 이 모든 일들을 그가 어떻게 해낼 수 있었는지, 즉 그의 능력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지금에 와서 정확히 말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이러한 작업의 상당 부분은 그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남겨져야 했다. 물론 레닌의 도움이 컸다. 누구도 그런 역할을 시도해보지 못했으며, 당시 상황은 늘 그렇게 긴박하게 돌아갔다.

다양한 직책과 특별한 역할을 위해 집행위원회 성원들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스베르들로프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으로서 조직적 작업의 상당 부분을 완수했다. 특별한 문제를 들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레닌은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와 의논해 보십시오.”

새로 부임한 ‘고위 간부’들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와 상담해보는 게 필요하겠어.” ‘스베르들로프와 의논하는 것’은 비중 있는 실천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물론 스베르들로프 자신은 이처럼 상당히 개인적인 방법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반대로, 당과 소비에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그의 활동 전체는 보다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해결의 조건을 준비하는 데 바쳐졌다.

따를 만한 선례도 없고, 아무런 법령이나 규칙도 없었던 그 시절에는 모든 영역에서 ‘개척자들’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거대한 혼돈의 한복판에서 자기 두 발로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 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있을 수 있는 모든 긴박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그러한 개척자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인물들에 대한 세부 사항들, 가령 어떤 사람이 이런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했었는지를 떠올리고, 이로부터 몇몇 후보자들이 과연 적합하겠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곤 했다.

거기에는 물론 많은 실책이 뒤따랐다. 그러나 놀랄 만한 일은, 그러한 실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놀랄 만한 일은, 뒤죽박죽이 된 과제들, 엉켜있는 난관, 최소치의 인적 자원이라는 상황에 직면해서도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스베르들로프가 어떻게 찾아나갔는가 하는 점이다. [실천적이고 주체적으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적 관점 대신에 추상적 원리나 정치적 편의의 관점에서 각각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물론 훨씬 더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이러한 양상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시기의 본질 그 자체에 의해 바로 지금 우리들 내에서 늘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명백한 목표’와 ‘물질적 인적 자원의 결여’라는 불일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격심하게 느껴졌다. 문제의 실천적 해결이라는 핵심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들 중의 다수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머리를 휘젓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스베르들로프 씨,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러고 나면 스베르들로프는 자신의 해법을 내놓곤 했다. 그의 견해는 이랬다. “이 시도는 충분히 실현 가능합니다.” 주의 깊게 선발된 볼셰비키 그룹이 파견되고, 이들은 정확한 요점을 보고받는다. 적절하게 연결이 이루어지고,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필수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러한 길을 따라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떠한 임무라도 해낼 수 있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고취되어야 했다.

일을 하는 데에서 지치지 않는 낙관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스베르들로프의 작업에 든든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당연하게도 이 말은 각각의 문제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100퍼센트 해결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10퍼센트만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만족할만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10퍼센트의 해결만으로도 구제수단이 되었다. 그것을 통해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바로 이것이 저 전례 없이 고난에 찬 세월 동안 해야 했던 모든 작업의 관건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수송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전염병에 대항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혁명의 미래는 보장되어야만 했다.



 

가장 뛰어난 유형의 볼셰비키 활동가


 

스베르들로프의 자질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잘 드러났다. 예를 들어 반동군대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우리 당을 분쇄했던 1917년 7월의 나날들이 그렇다. 사회혁명당 좌파당원들이 반란을 꾀했던 1918년 7월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에 모두 조직을 재건하는 것, 관계들을 재개하거나 거듭 새로 만들어내는 것, 커다란 시련을 겪은 동지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두 경우에 모두 스베르들로프는 혁명적 냉정함, 원대한 시야, 지혜로움에서 누구보다 출중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스베르들로프가 소비에트 대회 장소인 볼쇼이극장으로부터 레닌의 회의실로 어떻게 왔는지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미소 지으며 우리와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 우리는 인민대표위원회에서 다시 군사혁명위원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늘 그랬듯이, 스베르들로프는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고난의 시절을 거치면서 우리는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잘 알 수 있게 된다.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는 진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확신, 용기, 단호함, 지혜 등 모든 점에서 그는 가장 뛰어난 유형의 볼셰비키였다. 레닌이 스베르들로프를 제대로 알고 진가를 인정하게 된 시기도 정확히 이 무렵이었다. 스베르들로프에게 특별한 긴급조치를 제안하기 위해 레닌은 자주 그에게 전화를 걸곤 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레닌은 이런 답변을 들었다. “이미 했습니다.” 이는 염두에 두었던 조치가 이미 채택되었음을 뜻했다. 이 일을 두고 우리는 종종 “아마도 스베르들로프가 다 처리했을 거야.” 하며 농담을 했다.

언젠가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처음에 스베르들로프를 중앙위원회에 참가시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람을 한참 잘못 봤던 것이죠! 상당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대회에서 평당원들이 우리를 교정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조직체계를 뒤섞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결코 거론된 적이 없었음에도,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연합 상태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 당 활동가들의 행동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향을 띠었다. 다음의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상당히 많은 수의 활동가들을 동부전선으로 파견하면서, 무라비예프를 그 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수십 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볼셰비키였던 이 집단의 간사로 한 사회혁명당 좌파 당원이 선출되었다. 다양한 기구와 부서들에서는 우리 당의 신규당원들의 숫자가 더 많았으며, 더욱이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당원들 간의 관계는 불분명했다. 여전히 갓 만들어졌을 뿐인 국가기구에 최근 투입된 당 성원들 사이에는 느슨함이 있었고, 신중함과 응집력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요인 때문에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났다. 즉 군사조직의 기초단위들이 사회혁명당 좌파조직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2, 3일 만에 바람직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이 진행되던 시기, 즉 모든 개별적 관계들이 의심스럽게 되고, 국가기구의 실무진이 술렁이기 시작했을 때에 가장 헌신적인 최상의 공산주의자들은 신속히 서로 밀접하게 결합하며 사회혁명당 좌파와 인연을 끊고 그들과 맞섰다. 공산주의 중핵들은 공장들과 군 조직에 연결선을 대었다. 당과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이는 특히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광범한 영역에 걸쳐 부문별로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 정형화되지도 않은 국가기구들 속에 흩어져 있던 당의 요소들이 즉시 전면에 등장하여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 앞에 일꾼들을 하나로 용접시켰다.

공산주의 중핵들은 어디서든 각 기관들에서 필요한 그 시기의 실제 지도력을 구체화시켰다. 이 시기는 엄밀히 말해 지도적 정당으로서, 노동자국가의 지도자로서, 노동자권력의 정당으로서,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조직적 관점에까지 당원들이 그 구체적인 임무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바로 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스베르들로프의 지도하에 당은 소비에트 국가기구 내에, 소비에트연방의 집행위원회에서든지 인민위원회의 수송창고에서든지, 당조직의 결정적 힘을 형성해 내었다. 10월 혁명의 역사가들은 당과 국가의 상호관계의 발전에 전무후무한 각인을 찍은 이 결정적 시기를 추출하여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역사가들은 이 중요한 전환의 시기에 조직가 스베르들로프의 중요한 역할을 꾸밈없이 이야기했다. 모든 실제적인 결합의 연결망이 그의 손에 있었다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니즈니노브고로드를 침공했을 때, 레닌은 두 사회혁명당원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9월 1일 스비야쥐스크에서 나는 스베르들로프의 전보를 받았다. “즉각 귀환할 것. 일리치 부상. 부상정도는 모름. 정적뿐임. 스베르들로프. 1918년 8월 31일.” 나는 즉각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스크바의 당 회합들은 엄숙하고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동요는 없었다.

스베르들로프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 시기에 책임감과 역할 때문에 주름살이 늘었다. 높은 긴장감을 그의 과민한 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과민한 긴장은 신경과민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바쁜 듯해 보이는 경계심일 뿐이다. 이런 순간에 스베르들로프는 그의 능력이 완전해지는 것을 느낀다.

의사의 진단은 희망적이었다. 방문자들은 그 누구도 레닌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스비야쥐스크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9월 8일자 스베르들로프의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다비도비치(트로츠키), 이 편지를 빌어 몇 자 적겠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상태는 좋아졌습니다. 저는 아마 3~4일 안에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천적 문제들에 대해 다룬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여기에서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레닌이 부상으로부터 회복 중이던 고르키의 작은 마을을 방문한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심각하게 어려운 조건이었음에도 변화들이 강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결정적인 전투였던 동부전선에서 우리는 카잔과 심비르스크를 탈환했다. 레닌에 대한 암살기도 때문에 당은 정치적으로 더욱 정밀한 검사를 진행했고, 경계와 방어를 더욱 강화했다. 레닌은 빠르게 회복했고 업무의 재개를 준비했다. 이 모든 것은 힘과 확신에 찬 분위기를 형성했다. “당이 지금까지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쭉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르키를 방문했을 때의 분위기였다.

도중에 스베르들로프는 내가 모스코바를 떠난 후 일어났던 일을 알려주었다. 창조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는 훌륭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보고는 항상 가장 중요한 것과 조직적으로 특히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간간히 개인들의 간략한 특징들도 동반했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스베르들로프가 해오던 일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그 아래 조용하지만 강력한 확신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우리는 해낼 것이다!”


 

전제적인 의장


 

스베르들로프는 많은 일을 관장했다. 그는 많은 단체와 회합들의 의장이었다. 그는 전제적인 의장이었다. 토론을 중지시키고 발언자의 입을 막는 등의 의미에서가 절대 아니다. 반대로 그는 모호한 말을 하지 않으며 형식적 절차를 강요하지 않는다. 의장으로서 그로부터 전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있다. 그는 항상 실천적 결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는 누가 무슨 말을 할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크고 복잡한 문제들에 항상 존재하는 숨겨진 뒷면들에 대해 정통했다. 그는 발언자가 원할 때 적절한 시기에 능숙하게 발언권을 주었다. 어떻게 때늦지 않게 투표를 제안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의장으로서의 이런 특징은 실제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자질, 인물을 생생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조직적-인적 배합에 있어서의 무한한 창의성 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격동의 시기동안 그는 집회가 소란스럽고 열기를 뿜도록 만들어 놓고선, 적절한 시점에 단단한 손과 날카로운 목소리로 조정하여 질서를 잡곤 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중간키에 검은 얼굴, 마르고 수척했다. 얼굴은 뾰족하고 이목구비는 각져 있었다. 그의 힘 있고 우렁찬 목소리는 그의 체격과는 조화롭지 못해 보였다. 이 또한 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상은 곧 없어진다. 신체적 이미지가 정신적인 것과 융합된다. 수척한 체격에 은근한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강력하고 꿋꿋한 목소리는 최종적 이미지로 부각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레닌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가 특유의 저음으로 얘기할 것이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여기에는 애정 어린 반어법이 있었다.

알고 있다시피, 혁명이전 시기 공산주의자들은 입고 다니는 의상 때문에 적들에 의해 ‘가죽족’이라고 불렸다. 내 기억으로 스베르들로프는 가죽을 제복화하는 데 공이 있다. 행사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죽 모자와 가죽신발로 무장했다. 당시의 상황과도 어느 정도 연관 있는 이런 복장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하활동 시기 그를 알았던 동지들은 조금 다른 스베르들로프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스베르들로프는 내전 첫해의 풍랑 속에 검은 갑옷과도 같은 가죽옷을 입은 모습으로 떠오른다.

정치국이 시작되고 우리가 모였을 때 스베르들로프의 열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중앙위원회 서기 E. D. 스타소바가 참가했는데, 그녀는 스베르들로프의 집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야코프 미하일로비치가 위독하다”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우리는 회의를 짧게 마쳤다. 레닌이 스베르들로프의 집으로 갔고, 나는 전선으로 시급히 갈 채비를 하느라 병참부에 남았다. 15분 후에 레닌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레닌은 극히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죽었어. 그가 죽었어. 그가 죽었어.” 잠시 동안 우리 둘은 수화기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침묵을 듣고 있었다. 그런 후에 수화기를 놓았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야코프 미하일로비치가 죽었다. 스베르들로프가 우리 곁을 떠났다.[1925년 3월 13일.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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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조합주의적 정치에서 변혁정치로

조합주의적 정치에서 변혁정치로

문국진


(본 칼럼은 nodong.net 칼럼난에 연재중입니다)

 

 


1. 조합주의 정치의 폐해

개량주의는 나쁘지만, 개량투쟁은 필요한 것처럼, 조합주의는 나쁘지만, 조합 중심의 활동은 필요하다.

적대적 계급관계로 유지되고 지탱되는 자본주의사회 하에서 노동조합운동은 필연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 계급투쟁의 유의미한 표출이다. 그러나 조합 활동에만 매몰되는 것으로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꿀 수 없다. 조합주의운동의 한계는 곧 노동조건을 일부 개선함으로써 --임노동자의 고통스런 상태를 조금 더 버틸 수 있도록 함으로써--임금노예화에 기초한 사회질서 전체의 유지에 오히려 기여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레닌의 지적에 따라) ‘노동조합적 정치’의 개량주의적 한계라고 부른다.

노동조합은 이처럼 체제내적-개량주의적 일상활동체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자본가에게서 일정한 양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결코 반체제나 반자본의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그러면 노동조합운동은 덧없고 무익한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절충과 타협, 제도개선투쟁에 머무는 노동조합적 정치나, 자본주의 틀 내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오는 실리주의적-사민주의적 정치를 현재의 노동운동 및 노동정치운동은 과연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가?

그러나 맑스는 이와 같이 비록 체제내적 개선투쟁에 주로 몰두하게 되는 노동조합 자체를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학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학교는 학교일 뿐이다. 학교 과정을 다 마치면 졸업을 해야 한다.
즉 투쟁 속에서 사회비판적 계급의식화나 자본/국가의 본질에 대한 계급적 각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맑스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고, 노동조합조직이 미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정치적 훈련과 체제비판적 의식화를 위한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파악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만일 현실의 노동조합운동들이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의 구실을 다하지 않고, 자본/국가와의 무익한 공방전으로 소일한다면, 그리고 대중에게 개량주의적 허위의식만을 갖게 한다면, 그리하여 임노동제 전체의 폐지를 위한 반자본의 총노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동운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노조는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한 학교’로 전락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철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2. 변혁정치로의 전환

노동조합의 협소한 형식(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활동이나 정치의식의 면에서 그 이상의 발전, 즉 정치의식적 혹은 사회주의정치적 발전을 실현할 가능성은 현재로 보아 1차적으로는 현장조직 활동가, 해고자, 노동정치운동단체 활동가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만일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현재의 일진일퇴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운동과 그 조직적 표현인 노동조합적 정치활동은 계급의식화된 선진 사회주의노동활동가들에 의해 ‘변혁적 노동운동’과 그 일상적 활동으로 완전히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운동의 부문운동으로의 전락이나 생래적인 한계를 이유로 비노조적인 또 다른 조직체를 추구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이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추후 별도로 다시 검토하기로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투쟁의 일상기에는 (레닌이 ꡔ공산주의와 좌익소아병ꡕ에서 극히 올바르게 강조했듯이) “노조라는 진흙탕에 우리는 발을 디뎌야만 한다”는 점이다. 즉 사회주의자는 노동조합 속에서 변혁적 흐름을 만드는 대중사업에 주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적 정치를 비판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조합 속에서의 활동 전체를 무시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혁적 노동운동가는 노동조합과 그 내부의 대중들을 올바로 지도하고 견인하며, 투쟁의 발전 속에서 그들이 체제변혁적 의식화를 성취할 수 있도록, 그리고 투쟁 속에서 성장한 활동가들을 더욱 사상무장화되고 변혁이념화된 ‘사회주의전위’로 이끌어야만 한다.---한 마디로 변혁운동가는 노동조합 속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모든 측면들을 올바로 지도하는 당적-혁명적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계급적 좌파” 혹은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진영”,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 등으로 불리우는 ‘변혁지향적 노동운동가’들은 자신의 변혁적 노선의 관철을 위해 현실의 무엇에 대해 싸워야 하는가?

---체제에 포섭당하는 절충적 노동정치, 경제주의적 투쟁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시종일관하는 노동조합적 정치활동, 노동운동의 목표를 “노동해방주의적-반자본주의적 체제변혁”에 두기 보다는 정치-경제적 개량의 획득에 가두는 개량주의적 노동조합활동---이러한 것이 변혁지향적 노동운동가가 싸워야 할 대상이고, 바로 이러한 투쟁에 전선을 확정하고 몰두함으로써 ‘변혁적 노동운동정치’가 발전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글을 작성하기 시작할 때는 구체적인 ‘행동강령’까지 정리하려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구체적인 활동의 기획과 아이디어, 현실적인 활동양식과 실천사업 등에 관해서는 오히려 동지들이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변혁이념의 구체화를 위한 현 단계 활동계획에 관해서는 동지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다만 두 가지만 지적한다.

현 시점의 우리 운동에서는 경제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저널은 지천에 깔려 있으나, 사회주의적 저널이 부족하고, 뛰어난 필자들이 부족한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문필활동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다. 따라서 인터넷이나 오프라인 저널의 지면에서 사회주의적 필자들이 왕성하게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펼쳐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울러 토론과 논쟁, 비판과 논평 등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적-변혁적 정치운동이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한 까닭에 논의의 수준이 지극히 조합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사상적 사업과 실천적 노력의 축적은 이후 민노당이나 사회당이 아닌 새로운 변혁적 계급정당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중대한 역할과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사상과 실천의 결합--이 중에서 특히 사상작업은 일상적 실천의 하중에 눌려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보다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이 아쉽다.

 

 



(추신: ꡔ무엇을 할 것인가ꡕ를 비롯한 레닌의 저작집을 권한다. 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의 부재는 곧바로 당 건설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사민주의의 반대물로서 구성된 것이 레닌주의이며, 맑스에만 머물지 않고 더욱 (특히 정치학적으로) 그것을 발전시킨 사상이 레닌주의라고 한다면, 선진 노동자계급에게 필수적인 학습 중 하나는 바로 레닌에게서 도움을 얻는 작업이라고 본다.)//0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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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타워크레인 위에서-크레인 동지들의 호소

" 결국 이렇게 마지막 밤을 보낸다.
하지만 잃은 것이 얻은 것이 된다.
상처가 새로운 결의가 되고 아픔이 다시 원동력이 된다.
아흔 아홉 번의 패배를 겪으며 살아 남으라.
단, 그저 살아 남지만은 말라.
아흔 아홉번의 패배가 주는 패배감과 배신감과 모든 상처와 아픔을
심장에 새겨라.
절대 잊지 말라."

                                                             - 김주익 동지의 글 중에서

 

일주일간의 고공농성을 마무리하기 위해 짐을 쌌던 동지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50m 꼭대기에서 한걸음 계단을 내딪을 때마다 저려오는 가슴을 어찌 달랬을까...

그 분노를 어찌 주체했을까...

동지들의 투쟁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 가슴에 올곧이 아로 새겨 남을 것이다.

투쟁이다! 투쟁!

 

 

 

<현대자동차아산사내하청지회 김기식 조합원의 글>

사랑하는 하청지회 조합원 및 원하청 노동자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이번 농성투쟁에 들어가면서 많은 걱정을 끼쳐드린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곳 국회 안 타워크레인에 오르게 된 이유야 여러 동지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찾은 현장이 비록 정문 앞이지만
너무 참담할 뿐이었습니다.
노동자가 현장에서 쫓겨나 아침마다 출퇴근하는 동지들을 보며 힘없이
피켓하나 들고 절규해야 하는 현실, 노동현장이 마치 무슨 군대와도 같이
아니 그보다 더한 감시와 사찰에 통제되어 가는 모습이, 겨울바람을
맞으며 새파랗게 어린 구사대 경비가 두려워 정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피다만 담배꽁초를 씹으며 눈치를 보는 나이 많으신 공장의 주인이신
형님들의 비참한 모습들, 참으로 절망의 모습들뿐이었습니다.
동지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동지들 그래서 국회 안으로 50M 상공의 타워크레인 위로 아산동지들의
얼굴들 하나 하나를 눈물로 되삼키며 크레인 계단을 한 걸음씩
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의 피묻은 눈물과 땀의 철의 노동자 깃발을 국회 의사당을
향해 단단히 조여 맨 후에야 비로소 떨리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만약 적들이 침탈을 해올 경우를 생각해 크레인 가장 끝에 깃발과 함께
동지들의 피와 땀을 가슴에 품고 뛰어내릴 결심으로 최후의 지점에
깃발을 올렸습니다. 동지들, 이제 이러한 투쟁의 결의를 두 주먹 가득
채워 지상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비록 비정규직 개악안 폐기와 비정규보호 입법안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땅의 비정규 노동자들의 절규를 담아내는 그리고
주춤거리고 있는 민주노총과 각 연맹 및 단위 사업장 노동자들의 피를
다시 한번 투쟁의 결의로 타오르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내하청지회 신흥기업 동지들의 가열 찬 투쟁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동지들,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상의 모든 차별에 저항하라.
끝으로 사랑하는 우리 여보 뚱땡이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긴 싸움이 된다해도 평생을 차별 받으며 살아갈 자신은 없다.
선희야, 앞으로 조금만 더 이해해 주라. 사랑한다.

2004. 12. 2. 국회 고공농성장에서
아산노동자들과 사랑하는 우리 여보에게....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김주익동지의 글>

그들은 경험이라 부르고
우리는 타협이라 말한다.
그들은 현실이 그렇다고 하고
우리는 현실을 바꾸내자고 한다.
그들은 성과를 논하고
우리는 정신을 얘기한다.
그들이 세 치의 혀로 운동을 얘기할 때
우리는 목숨을 건다.
노사협조주의 분쇄!
사회적 합의주의 박살!
노동해방 쟁취하자!
- 총파업승리 11.27 타워 -

한강은 유유히 흐른다.
우리는 언제쯤 이 패배감에서 벗어날까
적들에게 느끼는 분노보다 '이중의 적'으로부터 느끼는 분노가 더 크다.

배신과 타협이 동지들의 심장을 짓누른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겠지만
지금의 고통은 충분히 느껴야 한다.
그래서 이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입으로 주저리는 것들이 언제는 그렇지 않았더냐
다 모두다 나의 짐이다.
참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같이 고통을 느끼는 동지들이 있어서 좋다.
동지들이 희망이다. 같이 웃을 수 있는 동지들이 같이 아파하고 있다니!
그래도 한강은 유유히 지랄 맞게 흐른다.
- 버림받은 타워크레인 위에서 12월 첫날 -

결국 이렇게 마지막 밤을 보낸다.
하지만 잃은 것이 얻은 것이 된다.
상처가 새로운 결의가 되고 아픔이 다시 원동력이 된다.
아흔 아홉 번의 패배를 겪으며 살아 남으라.
단, 그저 살아 남지만은 말라.
아흔 아홉번의 패배가 주는 패배감과 배신감과 모든 상처와 아픔을
심장에 새겨라.
절대 잊지 말라.
오늘 밤 역시, 이 밤과 촛불과 지랄같은 서울의 야경과 동지의 아픔과
나의 분노를 심장에 아로새긴다.
- 12. 1 타워의 마지막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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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무원 노동자

언론에서는 공무원 노조의 파업이 사실상 무산되었다고 떠들석하다.

이제는 낯설지도 않은 저들의 호들갑, 왜곡, 그리고 탄압...

그러나 행동하는 이들이 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다시 일어서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그렇게 승리를 향한 진군은 시작한다.

"가장 무서운 적은 주저하는 것이다.
모든 싸움은 자기 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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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무원 노동자


11월 14일...
공직생활 10여 년 동안 오늘같이 출근길이 고통스러운 적이 없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따라 나서며 안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마저 부담스럽다.
평소 월요일 아침 출근시간이면 술렁거렸던 구청 앞도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참 멀리로 달려왔지”
순간 그동안 공직생활을 뒤돌아보며 한숨 같은 독백이 흘러 나왔다.

공무원노조의 총파업 D-1.
나는 오늘도 예전처럼 처자식이 있다는 변명을 내세워 책상 앞에 앉았다.
“처자식 있는 것이 벼슬도 아닌데”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물었다.
동료들도 삼삼오오 모여 총파업투쟁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노조원들과 노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 나와 친하게 지냈던 동료도 총파업 투쟁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고 빈 책상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 친구의 용기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나서지 않은 내 자신이 다행이라며 위안하고 있었다.
구청 분위기가 술렁여서 인지 아니면 내 자신이 심난해서 인지 오전 내내 좌불안석 이었다.

“김 선배 안 올라 가셨어요”
깔깔한 입을 달래며 점심을 먹으려는 찰라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감사과 직원이 정색을 하며 물어 본다.
“왜?”
순간 그의 질문에 불쾌감을 느낀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총파업에 참가한 OOO선배와 언제나 함께 다녀서 김선배도 함께 올라 간줄 알았죠”
“올라가면 안되나?”
가뜩이나 불편 나의 심기를 건드려 더 이상 밥을 먹으면 체 할 것만 같았다.
“왜 벌써 식사 다하셨어요. 김선배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닌데...”
변명을 늘어놓는 그를 뒤로 한 채 휑하니 식당을 나와 버렸다.

거리의 차가운 바람은 어느새 속옷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추울텐데...”
서울로 올라간 친구가 걱정이 됐다.
“정부에선 벌써부터 총파업 참가자 전원을 중징계 한다며 야단들인데...”
그러나 어제 밤부터 내 마음 한편엔 죄책감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발령을 받은 이후 7년 동안 형제처럼 동고동락하던 친구가 총파업에 동참해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 앞에 순간순간 나의 추한 모습이 투영되었다.

책상을 지키고 앉아있던 오후 내내 나는 그저께 밤일을 생각했다.
“니가 나선다고 말단 공무원이 하루 아침에 기피고 살겄나”
동네 맥주 집에서 설전은 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쓰잘떼 없는 일에 마음 두지 말고 적당히 몇일만 참으면 되는데 뭐할라꼬 니가 나서나”
“니 집사람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아나. 어제 밤에 애 엄마한테 전화해서 너 짤리면 어떻게 하냐고 울더란다”
“이 문둥이 자슥아 쬐만 참으면 된다. 니가 독립투사도 아니고...”

술이 건하하게 취했을까. 나의 거침없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그 친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슥아 니가 공무원이가. 니가 진짜 국민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생각든 적 있나. 공무원생활 15년 동안 니가 한게 뭔데...”
술잔을 비우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오히려 나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다.
“나는 처자식 걱정 안 되는 줄 아나. 난 니같은 인간이 제일 경멸 스럽데이. 동료들 눈치 때문에 공무원노조에 이름만 걸어 놓고 적당히 윗사람들 눈치나 살피는 너같은 공무원 때문에 공직개혁도 안되고 국민들로부터 공무원하면 비리의 온상인양 손가락질 당하는 것 아니가”

소주를 어지간히 마셨는데도 그의 눈은 오히려 반짝이고 있었다.
“난 내일 올라 간데이. 처자식을 위해서라도 올라 간데이. 썩어빠진 공직사회 바꾸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서 올라 간데이. 너 같이 비겁한 공무원들을 양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올라 간데이”

내 자신이 창피해 나는 탁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소주잔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떨림은 공무원노조 총파업을 앞둔 그의 열정과 정부와 싸워야 한다는 두려움이 교차된 심정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아이고 피곤하다. 이제 퇴근 합시다”
과장의 목소리가 나의 생각을 깨웠다.
난 7년만에 처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과장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공무원노조의 총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최근 일주일 동안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과장의 모습을 볼 때 마다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기회주의자...”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 과장의 뒷통수를 보며 입속으로 그를 비난해 본다.

순간 또 다시 내 마음 한편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죄책감이 꿈틀거렸다.
“과장만 기회주의자 인가. 나도 기회주의자 아닌가. 친구가 어떻게 되던, 공무원노조가 파업을 하던 하루 종일 책상을 지키고 있었던 나야 말로 기회주의자 아닌가. 눈치 살피며 공무원노조 조끼를 입고 책상을 지켰던 나야말로 기회주의자이다”
갑자기 목이 탔다. 냉수라도 벌컥벌컥 들이 키고 싶었다.

“식사안하면 과일 깎아 드려요”
아내의 물음이 귓전에서 윙윙거렸다.
“전국공무원노조가 사상 첫 불법 파업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정부는 파업 참가자를 대상으로 곧바로 직위해제 절차를 밟은 뒤 3~4일 내에 지방자치단체별로 징계위원회를 열어 중징계를 요청할 방침입니다...”
9시 뉴스를 보는 순간 화면 속에서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연세대 앞을 달려가고 있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그 친구는 무엇을 위해 낯선 서울의 밤길을 내달리고 있었을까. 어깨에 조그만 가방을 들러 매고 조합원들과 함께 연세대학교를 내닫는 모습을 보며 따뜻한 안방에서 텔fp비전을 보고 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잠깐이지만 친구의 얼굴엔 근심보다 확신에 찬 의지로 빛이 났다. 아니 마치 연세대학교가 해방구인 듯이 기쁨으로 가득한 얼굴 이었다.

“여보 나도 밤 열차타고 서울에 가야겠어”
나의 말에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요. 당신이 왜요”
아내는 애써 내말의 의미를 피하려 했다.
“아니. 나같은 사람들 때문에 서울에서 투쟁하고 있는 동료들이 십자가를 매고 있어. 이 추운날 서울에선 동료들이 상경투쟁을 하며 길거리를 헤메고 있어. 똑같이 월급을 받고 똑같은 일을 하는데 내 약한 의지 때문에 그들의 가슴에 한과 불신이라는 대못을 박아 버릴 순 없어... 두툼한 점퍼랑 모자 좀 챙겨 줘”
아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녀올께”
나는 아내의 눈물을 애써 못 본 채 하며 역전으로 향했다.

“어! 김선배님”
노조 지부에서 나를 따르던 후배도 대합실에 나와 있었다.
“자네는 웬일이야”
“아버님이 어제 대장암 수술을 하셔서 상경 투쟁을 못했어요. 뒤 늦게라도 동참하려고 부랴부랴 나왔는데 선배님은 웬일 이세여. 이 야심한 밤중에”
“나... 공직생활이 이제 지겨워서 한번 짤려 보려구”

열차가 깊은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서울을 향해 내 닫고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어둠을 가르며 내닫는 열차와 같이 14만 공무원노동자가 하나 되어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어둠을 뚫고 전진해 나간다면 반드시 승리하리라”
가장 무서운 적은 주저하는 것이다. 모든 싸움은 자기 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며 핑게를 대는 것은 영원히 패자가 되는 것이자 굴종의 길에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결단과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에서 찬바람을 뚫고 정부의 억압에 맞서 가열찬 투쟁을 하고 있는 동지들이여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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