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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사상의 칼-냉정하게 전열을 가다듬고 전진하자!

사노련에 갔다가 펌글 재펌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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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전열을 가다듬고 전진하자!

 



1.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면 촛불은 꺼졌을까?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면 촛불은 꺼졌을까? 정의구현사제단은 마치 자신들이 ‘촛불의 수호자’, ‘촛불의 구세주’인가?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면 촛불이 꺼질 상황이었다면 정의구현사제단의 말은 정당하고 그들은 촛불의 수호자이자 구세주라는 칭송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의구현사제단의 주장은 오만이고 독선이다.
촛불은 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은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촛불의 역사성은 두 달간의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누적된 대중의 정권과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허무주의와 분노의 표현이다. 대중이 의식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다. 이 점에 대해서는 “격돌 소국면의 이해와 과제”와 다른 글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일시적인 행동, 즉흥적인 행동, 우연적인 행동이 아니라 역사적 행동이기 때문에 그 역사성에 포함된 내용이 충족되지 않으면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둘째, 두 달에 걸친 투쟁의 경험이다. 두 달에 걸친 집회와 시위는 시위대를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말을 빌리면 아마추어 시위꾼을 “프로 시위꾼”으로 바꾸었다. 집회와 시위의 경험, 동질성과 동지애는 시위대를 끈끈한 액체로 바꾸었다.

셋째, 6월 28일 이명박 정권의 야만적 탄압과 공포의 분위기가 흉흉하게 살아있던 6월 29일 시위대는 국민대책위와 그 어떤 지도부도 없이 스스로 경찰의 원천봉쇄와 저지 숲을 헤치고 시위를 조직하고 집회를 조직해 냈다. 반동적 탄압과 공포정치는 촛불투쟁을 압박하고 숨죽이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촛불투쟁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촛불투쟁의 위대함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면서 실상은 촛불투쟁을 역동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다. 과소평가하고 있다. 촛불이 꺼질 것이라는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두려움일 뿐 촛불에 담긴 대중의 투쟁의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정의구현사제단은 단순한 거짓말쟁이인가? 그렇지는 않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진실은 그 말자체에 있지 않고 그들의 말의 전체적 맥락과 행동에 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말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촛불집회와 시위는 사라졌을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말이 성립한다. 서울광장에서 부담없이 욕먹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평화롭게 촛불집회를 하는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명확하다. 하지만 거리에서 쫓기고 모이고 투쟁하면서 촛불집회와 거리시위는 이어졌을 것이다.


이것이 실체적 진실이다! 정의구현사제단과 전투적 시위대가 이야기하는 촛불집회와 시위는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서로다른 촛불집회와 시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투쟁을 이야기하고 이들은 평화로운 의사표현을 이야기하고 있다.

 


2. 법치주의와 합법정당의 굴레

 


답답하다! 미칠 것 같이 답답하다! 집회에서는 회개와 참회, 사랑과 용서, 생명사랑을 노래하고 거리시위에서는 침묵과 묵언이 강요되고 있다. TV토론에서는 불법논쟁과 의회민주주의(대의제도)가 계속 논쟁되고 있다.
악법도 법이라는 틀에 갇혀서, 대의민주주의라는 틀에 갇혀서 논쟁은 답답하고 소심한 말싸움 기술과 목소리 높이기 경연장으로 변했다. 법은 지켜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때도 있다든지, 누가 더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가나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직접민주주의의 보완물이 필요하다든지 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래가지고는 앞으로 전진 할 수 없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꼭 지켜야 할 가치이기 때문에 “이명박 퇴진!”은 법과 질서,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법과 질서 안에서 대중들의 요구를 수렴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 투쟁은 국한된다.


이것은 촛불투쟁의 요구가 아니다. 대중의 진정한 요구와 의지가 아니다. 쇠고기에서 5대의제, 5대의제를 넘어서 요구가 확장되고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의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국민적 저항의지를 대항의지로 변화발전시키고 정치적으로 관철시키는 것이 촛불투쟁의 요구이고 의지이다.
투쟁과 논쟁의 중심은 법과 원칙이나 법과 질서, 비폭력과 평화가 아니라 촛불투쟁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거대한 저항의지, 자발적인 정치의지이다. 이것이 정의이고 법이고 원칙이다! 이것에 어긋나고 이것을 가로막는 것은 폭로하고 부수고 전진해야 한다.
이런 현재의 대항질서와 의지는 아직 미약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이다. 기존의 정치질서와 사회질서에 대한 실망과 부정과 비판이지 곧 기존의 것에 대한 반정립이지 능동적인 대항의지가 아니다. 이 저항의지가 향하는 것이 기존의 정치와 사회질서라면 이것은 자본주의체제의 문제와 만날 수밖에 없다. 계급적 중심을 잡고 계급적 눈으로 바라보고 행동하지 않으면, 계급적 중심으로 모아지지 않으면, 국민적 의지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다 사라지는 일시적 충동이자 허무의 그림자를 짙게 남기고 사라지는 사랑의 열병 같은 것으로 끝날 것이다.
투쟁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잡는 것, 계급적 중심을 잡는 것 그리고 대담하게 전진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3. 국민대책위는 무엇을 하고 있나?

 


국면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반전과 반전이 계속된다. 역시 현실은 어떤 이론이나 예측이나 상상보다 풍부하고 복잡하고 가변적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르른 것은 생명의 나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론적 틀에 실천을 맞추지 말고 실천을 중심으로 이론을 적용하는 자세, 구체적 분석과 구체적 실천을 강조한 레닌의 자세가 새삼스럽게 소중하게 다가온다.


6월 28일 집회와 시위 이 후 국민대책위는 촛불투쟁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7월 2일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 촛불투쟁의 지도부는 종교단체가 되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탄압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탄압은 예상되었다. 물론 그 탄압의 강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하더라도 예상을 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 예상치를 넘는 것은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투쟁에 적극적으로 맞설 궁리를 하고 치열하게 행동해야지 탄압을 피해 종교단체의 뒤로 숨는 것은 스스로 지도력과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7월 2일 시국미사 후에 대책위 집회가 있고 행진이 있었다. 그 때 대책위 진행자는 오늘도 방송차량도 있으니까 방송차를 앞세우고 노래와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자는 취지의 말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이크는 김인국 신부(?)가 잡더니 침묵시위를 강요하고 평화와 비폭력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또 중요한 시험을 치르는 것이니까 잘하라는 말을 강조했다. 시위대는 수험생이 되었고 정의구현사제단은 시험감독관이 되었다.
대책위는 정의구현사제단에 무시당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월권을 자행하고 시위대를 어린아이 취급했다. 당시 폭력시위는 할 가능성이 없었다. 노래와 구호는 자유다. 늘 그랬다.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은 자신들의 도그마를 위해서 시위대에 재갈을 물리고 시위대의 권력 노릇을 하고 있다. 이것은 7월 4일 불교법회에서도 재연되었다. 비록 따뜻하고 부드러운 표정과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
대책위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못해서 아니 의지의 결핍 때문에 그 권리와 책임을 정의구현사제단과 종교단체에 양도한 결과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대책위!’다. 두려워서 숨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물밑판짜기를 할 시간을 벌기 위하여 잠시 후퇴한 것인가?
대책위, 종교계, 정당 3자로 형성된 비상시국국민회의 같은 연합집행기구를 만든다는 말이 있었다. 대책위 관계자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었다. 노동전선을 보니까 종교계는 반대했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계의 본질이고 책임의 한계이다. 종교계는 자신들의 순수성과 도덕적 명분(종교적 지위)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참여를 반대한 것이다. 촛불투쟁의 대의와 전진 보다 종교적 지위와 영향을 선택한 것이다. 종교계는 촛불투쟁의 판이 커지고 대립이 첨예화하는 것을 꺼린다. 여론의 지지를 받고 정치적 부담감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롭게 촛불집회를 하기 원할 뿐이다. 종교계는 촛불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손님이다. 이들에게 촛불투쟁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종교계가 빠지면 민주당은 당연히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계가 빠지면 정치적 영향력과 여론에서 별 볼 일 없고 오히려 제1야당으로써의 정치적 부담감만 커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적 효과를 말할 때 당시 실 보다 득이 많다고 말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대책위의 지도력 실종이 그 이유이다. 적들의 집중적이고 파상적인 무차별 공격 앞에서 지도부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을 종합적으로 ‘득’(得)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종교계에 지도력을 넘겨 두어서는 안된다. 종교계의 개입으로 촛불투쟁의 양(외연)은 늘어났지만 질은 퇴보했다. 그러나 여러차례 강조했던 것처럼 이 투쟁은 질적인 상승 없이 양적인 지속과 확장은 불가능하다.


촛불투쟁은 이 글의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발생적인 현존체제에 대한 불신과 반발에서 형성된 무정부적이고 무정형적인 저항의지의 흐름이다. 이 정항의지를 대항의지로 형성해 나가는 데 제도권 합법정당은 명백한 장애물이다.
대책위는 촛불이 꺼질까봐 겁먹고 적들의 탄압에 위축되지 말고 촛불의 잠재적인 거대한 힘과 거친 생명력과 끈끈한 연대감과 동지애를 믿고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 적들의 탄압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은 대중의 저항의지의 촛불이 아니라 지도부의 투쟁의지의 촛불이다. 지도부의 나약한 의지를 대중의 의지인 것처럼 말하지 말자.
대책위는 지도부의 외연을 넓히기에 앞서서 촛불투쟁의 목표와 방향을 명확하게 정립하라! 그 투쟁의 대의에 적합하고 동의하는 집단과 개인을 총망라하여 지도부를 구성하라. 종교계, 정당에 눈을 돌리지 말고 노동계와 학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라. 정 지도부구성이 안되고 지도부의 힘이 없다면 진보신당과 민노당까지는 지도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수배 때문에 불안정하면 수배자들은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기독교교회협의회등 안전한 장소에 투쟁의 거점을 확보하면 될 것 아닌가? 그리고 연락책을 신분이 자유로운 사람들로 구성하면 되는 것 아닌가? 휴대폰과 인터넷, 인터넷 방송이 있는 상황에서 소통은 어렵지않다. 집회와 시위가 원천봉쇄되면 몇 개의 지점으로 나누어 모이고 그 지역들은 단체들을 배분하고 개인들은 자유롭게 모이는 형태를 취하면 될 것이다. 다 막히면 각 배분된 단체와 연락책의 말을 통해, ‘거리자유통신’을 통해 흐름을 형성하고 파악하여 순발력을 발휘하면 된다.
현재 진정한 두려움은 이명박 정권의 미친 탄압이 아니라 촛불투쟁의 저항의지를 믿지 못하고 촛불이 꺼질 것을 두려워하는 하는 마음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적들에 맞서지 못하고 주변의 힘에 의지하려고 하는 주체적 투쟁의지의 결핍이다. 현재 최대의 적은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이다! 믿음이 부족한 자에게 화가 있을지니!!!


집회의 개최회수는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회수를 조절하는 것은 기세싸움에서 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횟수를 제한하려고 한다면 종교계가 집회를 한다면 종교행사에 참가하고 대책위는 몇 번의 대책위 이름으로 불법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든지 종교계가 집회를 하지 않으면 안전한 곳에서 집회만 몇 번하고 몇 번은 힘을 모아 집회와 시위투쟁을 조직하는 형태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면 금, 토, 일 같은 때나 공휴일 전날 아니 공휴일에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도 가능하면 저녁에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낮에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공휴일 같은 날 말이다.

 


4. 노동자에 대한 활동을 강화하고 노동자투쟁위원회를 구성하자.

 


이제 노동자는 집회와 시위에서 소수가 아니다. 어쩌면 가장 많은 구성원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자의 집단적 목소리와 행동은 너무 빈약하다. 집단적으로 집회와 시위에 참석해서 독자적 목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분위기가 매우 어색하다. 이제 최대한 집단적으로 참가하자. 노동자의 요구와 구호와 행동방침을 가지고 참석하자. 참석 전과 후에 토론하자. 그리고 현장에 알리자. 그러면 집회와 거리와 현장이 같은 내용의 끈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상호작용을 할 것이다.


노동해방을 바라는 세력들은 노동자에 대한 선전과 선동을 강화하자. 토론을 조직하자. 노동자의 행동을 조직하자. 노동자의 저항의지, 잠재력은 반동적 자본과 정권에 의해 반동적 조합주의를 통해 강하게 억압되고 결박되어 있다. 그래서 촛불투쟁에 대해서 관심도 낮고 참여도 낮고 어색하다. 특히, 대공장 노조의 경우 조합주의를 당연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대기업의 전반적인 경제상황이 나쁘지 않고 따라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나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끈질기고 집중된 정치활동과 경험을 통해 조합주의의 억압을 뚫고 굴레를 깨뜨리고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파업에 대한 당위적 요청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적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처절하고 첨예한 현장의 쟁점을 다시 힘을 모아 제기하고 다양한 투쟁을 완강하고 끈질기게 전개하자. 촛불투쟁의 우산 아래서 개별적 투쟁을 진행하고 촛불투쟁에 노동자전체의 이름으로 집중하자. 촛불투쟁의 손님이 아니라 당당한 주도자로 나서자 노동자여.

 


민주 대 반민주의 낡아빠진 범민주전선의 망령을 다시 살려서는 안된다. 김대중, 노무현은 민주주의 정권이라서 조용히 있었는데 이명박 보수수구정권(반동적 정권) 때문에 투쟁하는 것 즉, 김대중, 노무현 때 확장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이명박 정권과 투쟁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명박 정권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은 이명박 정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명박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보수적 투쟁이다.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권력, 노동자 민주주의,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소부르주아지의 미래, 해방된 삶, 해복한 삶은 노동자의 미래에 달려 있다는 것을 노동자는 현실의 투쟁, 촛불투쟁에서 힘으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김대중 때, 노무현 때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민중들의 생존권이 보장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요구와 투쟁이 수용되었는가? 부르주아와 소수의 가진자의 지배와 삶을 동의를 통해 보장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아래로부터 다수의 피착취대중의 투쟁과 요구를 통해 건설되는 다수의 대중의 민주주의인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서 또 향해서 이명박 정권의 반도적 부르주아 공세를 뚫고 전진하자!


7월 5일 오늘, 청와대로 진군하자. 적의 예봉을 피하는 것은 힘이 부족할 때 작전상 잠시 피하는 것이지 숨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힘이 있을 때는 예봉을 힘으로 꺾어서 일순간에 전세를 역전시켜야 한다. 오늘 모이고 또 모여서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의 무장을 무력화시키자. 소수의 가진자의 법과 질서를 다수 촛불의 대중의지로 무력화시키고 무엇이 살아있는 법이고 정의이고 도덕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자. 가자 시청으로! 가자 청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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