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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 2주

아버지와 병원에 다녀왔다.

 

방사선 치료가 끝났는데도 상태가 안좋아져서 원래 한두달 정도 있다가 찍을 예정이었던 MRI를 오늘 찍을 수도 있다고 했다. 스테로이드 때문에 반짝효과를 봐서 좋아졌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어쨌든 호전은 되었으니 2주정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의사나 나나 모두 악성 뇌종양일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아직 결정적으로 뭐가 나온 것은 아니기에 마음의 준비를 2주간은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기를 벌써 몇 번째인가?

뇌종양인 것을 안 다음부터 양성이니 악성이니 의사들도 의견이 많았고, 뇌수술 후 별거 아니라는 말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 회복하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다시 악화되서 뇌사진을 또 찍고, 그 새 또 자라난 걸 봐서는 악성같다고 하고... 아버지는 병원을 못믿겠다고 하고... 그러다 별 수 없이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고... 점점 좋아지는 것을 보니 방사선치료가 효과있는 걸로 믿기도 했다가... 다시 안좋아져서 거의 다 줄였던 약을 왕창 늘리고...

어쨌든 조직검사에서 악성판정이 난 적이 없고, 아직은 뇌사진을 찍지 않았으니 말그대로 '아직'은 악성이란 판정이 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하지만 사형수가 자신의 사형집행일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아무 차이가 없을까?

 


 

아래글은 아버지가 아주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써놓은 글이다.

나중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내 스스로가 딴소리 할까봐 적어놓은 것이다.



당사자 되기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아주대 병원에서의 치료 방법중에는 수술이 없었다.
너무 위험한 부위라고 극히 일부 조직만 떼어내서 암덩어리인지 단순한 양성혹인지 알아보고 방사선 치료하자는 거다. 그런데 조직을 떼어내기 위해서도 마취를 하고 바늘로 두개골을 뚫고 세포를 떼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반신불수가 된다고 한다.

어차피 위험한 것이라면 그나마 완치의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금은 잘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만 몹시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별의별 생각이 다들고 말이다.

광기형을 통해서 영동세브란스 병원의 실력 있는 권위자에게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할 환자들이 워낙 많이 밀려있는데, 아는 사람의 부탁이니 그 스케줄 사이에 아버지를 끼워넣어 주기로 했다. 한국사회의 커다란 병폐중의 하나인 '연줄'을 우리도 동원한 것이다. 연줄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뒤로 밀려나겠지. 원칙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있나? 아니, 못한다. 이 죄를 앞으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병원에서 파업을 하고 있다. 모든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
아직은 식사가 제대로 안나오고 하루 세끼 똑같은 도시락이 나오는 정도의 불편이지만 장기화되면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어 무지 불안하다.
주5일제를 요구하고,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을 100% 지지한다. 하지만 당장 피해를 입게될 내가 어디까지 이성적일 수 있을까? 벌써부터 TV에서는 평소의 60%밖에는 수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 아버지의 수술도 그만큼 늦어지겠지.
노사간에 타결이 안되면 난 물론 사측을 더 원망하겠지만 같은 노동자로서 그들을 계속 지지할 수 있을까?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천지인-열사가 전사에게전(연주곡)

200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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