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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시간표

노년의 시간표


현대 사회의 노년은 그 자체로 ‘문제’시 된다. 노인이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가 ‘구차함과 촌스러움’을 투사하는 기호가 되어간다.


정진웅ㅣ성공회대 강사·문화인류학. (강재훈 기자)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난 이담에 크면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하는 식의 꿈을 키운다. 그런 꿈들은 물론 현실에 부딪히면서 점차 ‘하향조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청년이나 중년이 되어 지닐 모습에 대한 꿈꾸기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런데 그런 우리 대부분이 노년의 삶에 대해서는 문득 꿈꾸기를 멈춘다. 아니, 꿈꾸기를 멈춘다기보다는 노년의 삶에 관해 도무지 어떤 꿈을 키울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아 차라리 노년에 관한 생각 자체를 회피해버린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자신의 앞길에는 노년이 없는 것처럼.


청소년 문제? 노인 문제?


우리에게 삶의 청사진을 제시해주고 또 이에 대한 꿈꾸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다. 따라서 문화가 노년의 삶에 관한 매력적인 밑그림을 제시하지 못하면 각 개인들이 노년에 관해 키울 수 있는 꿈의 내용도 그만큼 부실해지기 쉽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문화가 제시하는 삶의 청사진은 노년에 이르면 갑자기 증발해버린다는 점이다. 평균수명이 40살을 겨우 웃돌던 시대에도 삶에 대한 공자의 지침은 70살을 포함한 반면, 이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령화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노년에 대한 지침은 기껏해야 ‘끝없이 중년을 연장하기’와 같은 공상적인 각본 외에는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노년은 추구할 만한 삶의 목표나 의미가 남아 있지 않은 문화적 황무지가 되었다.


젊음에 대한 집착이 극대화한 풍토에서 이제 우리도 늙음이 나 자신의 일로 다가올 때까지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 보기를 회피한다. 또한 ‘청소년을 옥죄는 현실의 문제’를 ‘청소년들의 문제’로 둔갑시키는 희한한 연금술은 노년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현대 사회의 노년은 이제 그 자체로 ‘문제’시 된다. 이와 더불어, 노년에 추구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그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노력에 대한 성찰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에 막상 노인이라는 용어는 점점 서구적인 ‘풍요로움과 세련됨’에 대한 강박에 휩싸인 우리 사회가 ‘구차함과 촌스러움’을 투사하는 기호가 되어간다.


대중매체는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 예컨대 얼마 전에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방영된 〈장수퀴즈〉 같은 프로그램에는 영어로 된 특정 상품명을 묻는 것과 같은 질문들을 출연자들에게 한다. 이에 대한 출연자들의 엉뚱한 답이나 서투른 발음은 곧 자막을 통해 강조되며 시청자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이 코너 질문의 대부분은 제도교육을 받고 근대적 부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하지만 농촌의 노인들에게는 생소한 단편적 지식에 관한 것들이다. 출연자들의 답이 좀 엉뚱할 경우 과장된 몸짓으로 배를 잡고 뒹구는 사회자의 몸짓도 농촌 노인들을 희화화하는 데 한몫한다. 또 우리는 이런 연출이 유발하는 웃음에 참여함으로써 이 과정에 동참한다.


노년의 실험을 존중하라


물론 노년을 다루는 이런 TV 프로그램이나 최근에 개봉된 〈집으로…〉와 같은 영화들은 한편으로 노년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또 훼손되지 않은 순박함에 대한 향수를 고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노인들은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과거에 고착된 존재로 그려져 노년에 대한 모종의 비하나 연민의 시선이 결합되어 있다. ‘칭송하면서 과거에 묶어놓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경향성은 농촌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향수의 대상으로 그리는 경향성과 그 궤를 같이한다. 곧 ‘세련된 나’는 나의 차별성을 확인하기 위해 과거에 고착된 타자를 설정한다.


현 노년세대는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지도 없이 여행하면서 노년의 삶의 의미를 새로이 만들어가는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담당한다. 만일 우리에게 노년의 꿈을 키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그들이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해나가는 ‘실험’들은 후속세대의 앞길을 밝혀주는 소중한 등불이다. 90 가까운 나이에 비로소 얻은 작은 깨달음에 감사하며, “내가 이걸 깨닫지 못하고 죽었으면 어쩔 뻔했나”며 고개를 젓는 노인의 얘기를 듣는다. 그런 경험들의 소소한 내용을 이해하고 널리 나누는 것이 곧 풍부한 노년의 청사진을 지닌 문화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우리는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지를 모른다면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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