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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2/14
    퇴직연금...
    시다바리
  2. 2006/02/13
    조카의 글쓰기
    시다바리

퇴직연금...

작년12월에 퇴직연금제가 도입된 이후 현재까지 약 200억원의 기금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아직은 중소기업 위주로 참여하고 있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대기업의 참여가 예상된다고 한다. 어떤 기관에서는 퇴직연금으로 약 50-100조의 기금형성을 예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투자자 계급'이라는 새로운 계급(?)의 형성을 예고하며 진보진영은 이에 대응한 주체형성 및 운동의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는 투자자 및 투자기금을 의제로 한 운동(투기자본에 대한 운동이 아님을 명심하길)은 보수진영이 펼쳐야 하는 운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으로 말이다.

 

퇴직연금을 앞장서 도입했고, '국가복지'를 대신해서 '기업복지'가 발달한 미국에서 연금제도의 실태와 폐해는 이미 여러자료를 통해서 알려진 바가 있다. 최근 GM자동차 및 많은 미국의 대기업과 미국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및 외국기업이 경영악화를 이유로 연금 및 의료보장관련 비용절감을 한다는 소식이 있다. 이제 막 제도도입의 초입에 선 우리나라의 퇴직연금제도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물론 '집단이기주의'로 욕먹고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운동의 방향과 혁신, 그리고 단협 및 임금에 대한 투쟁을 준비하는 데에 참고삼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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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의 글쓰기

조카 중의 한명이 글쓰기를 했댄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다.

학교에서 소설쓰기 숙제를 냈는데,  뭘 쓸까 고민하다가

첨에는 이종사촌동생의 얘기 - 이제 다섯살인데, 간질로 고생하고 있다 - 를 쓸려고

했다가, 요즘 미식축구 선수인 하인즈 워드 얘기를 많이 떠들고 있길래

이걸 영감삼아 썼다고 한다. 

 

엄마가 나한테 보여주면서 삼촌의 감상은 어때? 라고 하길래..음..좀더 살 붙이고, 다듬어 보라고 그랬다.

 

 

 



20년 전쯤이었을 겁니다. 저는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고, 그 곳에서 저의 운명을 바꿔놓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와 같은 봉사활동 단체에 속해있는 베트남 사람으로 그리 잘 살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부자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저를 위해 봉사해주시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제가 마음에 들었었나 봅니다. 그래서 저희는 같이 한국으로 귀국해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항상 ‘국제부부’라는 타이틀을 벋어날 수 없었고, 남편은 일자리를 구하는 일 조차 힘에 겨워했죠. 그러던 중 신발 제조 공장에 취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뒤 저희의 생활을 순탄할 것만 같았습니다.

8년 전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라면 시작이었습니다. 저희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이 바로 그 아이에게로 넘겨졌기 때문이지요. 그 아이는 혼혈아를 바라보는 사회의 냉대에 부딪치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도 저희는 아이를 강한 아이로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어느덧 초등학교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 좋았어?”

“응, 너무너무 좋았어. 친구들도 잘 해주고”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아이는 학교가 좋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아이들이라 그런지 자기와 생김새가 다른 아이들이라도 좋게 대해주는가 봅니다. 그 뒤로 저는 아이의 학교에 대해서는 걱정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4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몸에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하민아, 너 여기 왜이래?”

“아, 그.. 그거? 아까 요 앞에서 넘어졌어요. 원래 내가 좀 잘 구르잖아요.”

넘어졌다고 하는 하민이를 보고, 저는 걱정했지만 그렇게 큰 의미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 때 알아챘어야 하는 거였습니다. 바보처럼 전 아이의 아픔조차 알지 못했던 거였어요.

그 날 저녁,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던 저는 아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걸 알았어요.

“뭘 그렇게 숨기고 있어? 어? 공개수업?”

“아, 이제 다음주 화요일에 학교에서 공개수업 한대.”

“그래? 근데 이걸 왜 숨기고 있어?”

“엄마 바쁠까봐 그랬지. 엄마 오지 말아요.”

“괜찮아. 엄마 하나도 안 바빠. 바빠도 딸 일인데 엄마가 빠지면 안 되지.”

“오지 말라고요!!”

처음이었습니다. 하민이가 저에게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저는 놀랐지만 이 아이가 저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알았어. 안 갈게.”

그 뒤로 꼭 8일이 흘렀습니다. 바로 공개수업이 있는 날이지요. 학교에 가면서까지 하민이는 저에게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마음에 공개수업 시간보다 한 시간 빠른 시간에 학교를 찾아갔지요.

그때는 쉬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5-6반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모습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민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떤 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 우리 하민이 못 봤니?”

“아 그 튀기요? 걔 아마 화장실에 있을걸요?”

튀기라니 좀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전 그냥 하민이의 별명이겠거니 하고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웬일인지 화장실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꽤 시끄러웠죠. 그 아이들은 제가 그 곳에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비웃고 있었지요.

충격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비웃음의 대상은 바로 우리 딸 하민이었어요. 아이들은 하민이를 둘러싸고 발로 밟고, 때리고 또 화장실 물을 아이에게 붓고 그랬지요.

이거였습니다. 하민이가 저를 학교에 오지 못하게 한 이유. 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겁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제가 알면 슬퍼할 것을 알고 또 자존심도 상했겠죠.

저는 그 아이들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저를 발견하면 하민이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또 미안해서 하민이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나왔습니다. 이제껏 하민이가 이상하게 행동했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이라고 아이에게 그러는 걸까요.

저는 아이에게 무척이나 큰 상처를 준 장본인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저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제 스스로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결혼한 것까지도 후회하게 되어 버렸지요.

학교에서 하민이가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밝은 모습으로 저에게 말하더군요.

“엄마, 오늘 공개수업 안 왔네. 잘했어요.”

“그래.”

아이를 보자 흐르는 눈물에 저는 하민이를 쳐다볼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보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 하민이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학이라는 큰 결단을 내리게 되었지요. 그리고 하민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하민아. 너 전학갈래?”

“갑자기 무슨 전학이야~”

“그냥, 너 학교생활 힘들지 않아?”

그냥 그 말을 꺼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민이는 눈치를 챘나봅니다.

“.....왔었지?”

“오긴 어딜와~ 그냥 해본 소리라니까”

“왔었잖아! 학교 왔었잖아! 와서 다 봤잖아! 그러고 지금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왜 이러는데? 맞지?”

“그래 갔었어. 가서 다 봤어! 그래서 너 전학 보내려고 그래. 너 힘들잖아.”

“됐어. 이제 와서 그러지마.”

하민이는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하민이니?”

“아, 저기 여기 삼성병원인데요. 혹시 윤하민씨 보호자 되시나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아까 사거리에서 사고가 났어요. 아주 큰 사고였죠. 그래서 지금 환자의 상태가 아주 위급합니다. 지금 와주셔야 합니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습니다. 사고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눈물을 머금고 저는 병원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글쎄요. 제 생에 이렇게 빨리 뛰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잠시 뒤 저는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기요. 여기 윤하민 어디 있어요. 어디 있어요!”

“윤하민 환자는 지금 수술 중입니다.”

나는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아내며 수술실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지요. 만약 하민이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제 잘못이겠죠. 내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수술실에서 나오는 하민이와 의사 선생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민이는 머리와 몸에 온통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요.

“어떻게 된 거죠?”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이 학생이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3중으로 차에 부딪쳤나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환자의 상태는 심각합니다. 과다출혈과 뇌손상과....”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살 수 있나요?”

“글쎄요 아직은…”

아직은 이란다. 아직은 이라니. 그럼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어떡하죠. 어떡하지. 어쩌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도중 하민이는  중환자 실로 옮겨졌습니다.

하민이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정말 흉측할 정도로 많이 다쳐있더군요. 이게 다 하민이가 한 짓이라니. 뛰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랬지요. 아이가 감당하기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버거웠던 것이었던 걸까요.

그 후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때까지 하민이는 깨어나지 않았고요. 저는 여기저기로 불려다니며 하민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빴지요. 오늘도 그런 일들로 잠시 병실을 비웠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난 하민이가 좋아하는 초밥을 사들고 병실로 향했습니다.

“하민아, 엄마 왔...........................”

하민이가 사라졌습니다. 저는 간호사에게 물었죠.

“여기 있던 환자 어디 갔어요?”

“아 그 환자분 보호자 되세요? 그 환자분 오늘 아침 사망하셨다고...”

사망. 사망. 사망. 사망.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간호사가 지금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냉대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아이의 최후였던 것입니다.


2007년 12월 28일

유난히도 추운 날이었습니다. 어떤 무덤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울고 계십니다. 이 아주머니는 무언가를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면제였습니다. 아이의 죽음 앞에 슬퍼하던 어머니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한 손에는 이렇게 써져있는 종이가 쥐어져 있군요.


‘우리의 죽음으로 더 이상 혼혈아라는 이름아래 아파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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