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메일] 니체가 꿈꾼 그리스 비극의 재탄생
음악에 심취한 많은 학자와 명사가 있지만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만 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어릴 적부터 직접 작곡을 했던 그의 삶은 누구보다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수의 음악회를 들락거리며 바그너 등 실제 음악가들과 친분도 쌓고 당대 음악계의 정보에도 밝았던 니체 - 음악의 본질에 대한 그의 관심과 견해는 사상 정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니체 철학에 영감을 받은 후대의 음악가들이 이를 다시 그들의 음악으로 승화함으로써 음악이 확장되고 발전하는데 기여했다. 심지어 음악은 니체의 문체에도 영향을 끼쳤으니, 그 스스로 자신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5)를 한편의 음악으로 표현했을 정도이다. 모든 예술 중에서 음악이야말로 인간의 형이상학적 심연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던 니체! 그의 눈을 통해 음악을 느껴보자.
니체 『비극의 탄생』: 디오니소스적 가치 VS 아폴론적 가치
니체의 음악 예찬은 그의 처녀작 『(음악의 정신에서의)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에 잘 나타나 있다. 사실 그는 25세 때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될 만큼 철학보다 먼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에 정통했다. 이러한 전문가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상반되는 두 축을 독자적으로 제시하고 그 차이를 통해 그리스 비극과 예술의 핵심을 소개하였다.
디오니소스[Dionysos]가 누구인가? 바로 포도주의 신이자 광기에 휩싸인 여신도들이 환각 속에서 살아 있는 가축을 물어뜯는 사육제를 주관하는 신이다. 반면, 아폴론[Apollon]은 정적인 균제미와 웅장함을 자랑하는 예지의 신이자 엄격한 태양의 신이다. 디오니소스가 역동성과 내면의 불같은 열정, 충동, 혼을 빼앗긴 매혹과 도취를 상징한다면, 아폴론은 차가움과 균형, 절제와 관조로 이루어진 분별과 질서를 나타낸다. 전자가 파토스(Pathos, 정념)라면 후자는 로고스(logos, 이성)이며, 전자의 예술이 음악과 서정문학으로 대표된다면 후자는 좀 더 객관적인 조각(조형예술)과 서사문학에 해당한다.
최고의 예술, 그리스 비극
2,000년 이상, 역사는 서구 철학이 이룩한 합리적 질서를 추앙해 마지않았지만 놀랍게도 니체는 퇴폐적이라며 천시받아 온 디오니소스적인 원리야말로 인간 내면의 원형이자 생의 원초적인 힘이라 보았다. 인간은 도덕이나 종교가 아닌, 꿈틀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몰입된 힘 혹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디오니소스적인 무아경의 환희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는 음악이야말로 최상의 인간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결되어 치솟으면서 투쟁과 화해를 통해 발전하였다. 물론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기반이긴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그 자체만으론 온전한 예술일 수 없다. 아폴론적인 가치가 예술의 형식이자 틀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가치는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내면적 표현의지이기 때문이다. 형식이 강조되면 작품은 메마른 것이 되나 열정이 지나치면 과잉으로 쇠락해 버리듯, 둘은 조화가 필요하다. 니체는 이 두 가지가 조화의 정점을 이룬 최고의 예술로 그리스 비극을 꼽았다. 그러나 이 황홀한 균형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소크라테스 이후 로고스 중심주의와 낙관주의가 강화되면서 정신과 육체가 온통 환락으로 들뜬 디오니소스적 세계는 설 자리를 잃고 그리스 비극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으므로.
비극의 재탄생: 음악을 하는 소크라테스
감성(파토스)과 이성(로고스)이 서로를 강화시켜 나가는 가운데 미적 경지를 이룬 그리스 비극 - 오늘날과 같은 지성주의 시대에 그러한 예술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로? '비극의 재탄생'을 꿈꿨던 니체는 청년 시절, 바그너의 극에서 그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나중에는 잘 알려진 대로 그를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과연 '음악(디오니소스적 원리)'을 하는 '소크라테스(아폴론적 원리)'는 다시금 우리 시대에 도래할 수 있을까?
확실히 디오니소스적 가치는 오랫동안 저급 혹은 비도덕적 산물로 밀봉되어 왔다. 그러나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생의 본질은 결코 논리적이라거나 합리적일 수 없다고. 그것은 오히려 충동이며 도취라고 말이다. 가득한 생명력 속에서만이 고통마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에너지로 충만할 때 우리는 괴로움을 기꺼이 껴안아 이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지만, 불안하고 두려울 때는 마음의 도피처를 찾는 소심한 낙천주의자가 될 뿐이다. 요컨대 그리스 비극은 기쁨과 활력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때문에 니체는 단순한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가 아닌 삶을 긍정한, 생을 음악이 울려 퍼지는 축복으로 받아들인 '니힐리즘 극복'의 철학자이다. 자연과 합일되길 원하는 본능적인 힘, 근원적인 일자로 향하는 충만한 기운에 전율하며 음악에 귀 기울여 보자.
참고문헌 『비극의 탄생』 (니체, 박찬국역, 아카넷, 2007)
『철학 속의 음악』 (오희숙, 심설당, 2009)
Written by cowgirlblues (cowgirl@artnstudy.com)
=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inerva.asp?cli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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