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주체형성과 재조직화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
- '인간은 그/그녀가 행(行)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1. 차가운 사회에서, 개인으로 찢어진 인간들이 오직 욕망과 타인과의 투쟁으로 얼룩진 사회에서, 지식인은 사회의 난로인 것이다. 지식인은 많이 아는 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내면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행위의 양태일 뿐이다.
'자신이 처한 계(세계)에서 끊임없이 저항선을 만들며 참여하는, 그리고 그러한 다른 계와 횡단적 연대를 서슴치 않는.....(특정한 행위의 양태)'
자신과의 끈질긴 투쟁에서 대중적 일상을 벗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가 지식인이다. 이것은 역동적인 사유와 행위이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는 생(生)은 지식인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룩해 놓음이 다른 누군가나 무엇에 의해 무너질 때 아름다운 것이다.
가을 저녁의 노을처럼...곧 이즈러질 누부신 하얀 만월(꽉찬 달)처럼...
고통과 쓰라림이 끝나는 편안한 휴식(죽는 것)을 누리지 못한자는 추한 것이다.

-[인간의 얼굴]이정우 저 (민음사) 읽고 나서 생각을 나누기 위해 씀.


2.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의식개혁운동이다. 게으른 봉건적 삶을 탈피하고 근면, 자조, 협동으로 의식을 개혁하면 '우리도 한 번 잘 살 수 있다'라는 물질적 풍요의 결과물을 제시한다. 하늘에서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의식을 개혁하면 인간의 삶은 달라진다'는 철학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의식개혁운동은 근대적 사유의 전형적 산물이다. 의식을 바꾸면 새로운 역사가 창출되는가? 생각을 바꾸면 신세계가 열리는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실패했다. 물질적 풍요는 일부 재벌과 권력집단에 지나지게 집중되었으며 의식은 개혁되질 못했다. 주어진 삶을 거부하는 저항의식은 탄생하지 못하고 달라진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신봉건적 노예주체’만 반복될 뿐이다.

3. 동양사상에서 인간에 대한 고민은 성(性)의 문제이다. 주희와 다산의 문제의식은 인간의 본성이 후천적 요인이 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원래부터‘그런놈’으로 탄생하는 주체는 없고 역사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4. 맑스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주체를 ‘생존하는 인간들’로, 그리고 그 인간들은 ‘유적인간’으로 설정한다. 개별인간 보다는 '생존하는 인간들'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이 ‘인간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임을 주장한다. 계급투쟁 역사를 지고 나갈 주체의 본질은 과거-현재-미래를 인식하는 ‘(인)류적 인간’이며 개인(개별자)의 발전과 모두의 발전을 인정하는 주체들이다. 바로 이 ‘유적 인간’은 현재의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혁명적 실천가’들인 것이다. 혁명적 실천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새로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것이 맑스의 공백이다.

5. 레닌는 맑스의 공백을 철학적 사유로 채우질 않고 실천(practice)으로 완성한다. ‘해석의 문제를 실천의 문제’로 역사 속에서 실현시킨 레닌은 구체적 결과물로 소비에트를 호명한다. 소비에트는 스탈린과 사회주의국가장치에 의해 왜곡되고 소멸된다. 새로운 주체인 혁명적 실천가는 권력과 국가기계에 재코드화된다. 다시 부활할 수 없는가?

6. 부활하지 못하는 썩은 소련체제를 바라보고 알튀세르는 국가장치(당과 국가)와 새로운 주체에 대한 고민을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 이데올로기로 호명되는 주체는 동일시되거나 비동일시되는 문제만 남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끔찍한 이데올로기’뛰어넘어 새로운 주체성 형성을 시도한다. 동일시되거나 비동일시 되는 주체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제3의 주체형성을 설명한다. 계급투쟁과 더불어 욕망투쟁에 대한 문제설정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성을 시도하는 들뢰즈/가타리는 레닌처럼 실천(현실)으로 공백을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체를 억압하는 권력의 미시적 작동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전복과 자율적 주체성를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를 정치(맑스주의)와 정신분석(프로이트)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횡단'을 꿈꾸며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영역을 모색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기존의 구조주의적 분석을 벗어난 새로운 무의식 분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성을 생산하는 방식.
"무의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무의식은 건설되고 창안되어야 한다."

7. 새로운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단순히 계급으로 호명하거나 의식을 바꿈으로써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국가장치와 문화장치, 매체장치와 같은 국가/자본기계의 작동에 복종하거나 탈주(저항)하는 주체만 있을 뿐이다. 또한 실현됐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레닌의 경험). 끊임없이 실현되고 다시 복종되고(재코드화) 갈등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주체형성의 완성은 영원한 과제일지도 모른다(가타리의‘영원한 개량주의’). 단지 실현되는 것은 순간에 드러나는 혁명적 주체성과 갈등하면서 소멸하는 주체성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한번 혁명적으로 무장된 인간이 영원히 민주화 투사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적 주체가 영원히 비국가꼬뮨주의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과 우리들을 되물어보고 비국가꼬뮨사회를 실현(=실천)하는 경향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존엄한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개별적 노력보다는 집단적 실천과 마주침이 필요하며 끊임없는 투쟁과 모순된 현실에 대한 저항, 그리고 학습회와 연수가 필요하다. 자율성의 정치의 한계(개별화되는 경향과‘폭발적 힘’을 증폭하기 위한 어려움)를 넘어 집단적 실천를 통한 연대와 차이를 실현하는 주체(성)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 인간은 그/그녀가 행하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 200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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