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권력

2007/01/18 20:45
 

1. 깊히 생각하고 스스로 생각하기


2. 먼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를 인간으로 파악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쪼금 경직되게 설명하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노예나 몸종들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고상한 척하는 귀족들이 인간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의 핵심은 주체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존재’를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카르트의 생각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등장하고, 그의 사유를 밀고 나간 라캉에 의해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로 뒤집어집니다. ‘생각’과 존재’가 하나로 일치하지 않다는 발상입니다. 프로이트가 반역의 깃발을 든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나’라는 존재가 거시기(이드)/자아/초자아로, ‘생각’은 의식/무의식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쪼금 더 비틀어서 라캉은 프로이트와 같으면서도 다르게 밀고 나가는데, R/S/I라는 라캉의 개념인데, R은 실재, S는 상징계, I는 상상계라고 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이 말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우선 언어(상징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말해지는 대상, 즉  무언가가 존재(실재)해야 하며, 셋째로 말해지는 내용 혹은 대상에 어떤 고정된 의미가 부여될 수 있어야 한다(상상계)고 설명합니다. 좀 더 쉽게 갑시다. 실재는 사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상상계는 이미지 또는 기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상징계는 말이나 언어(기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란께 그것이 더 쉽게 거시기 해불믄, 어떤 대상(실재 R)을 보고 말을 할려면 머리로 생각하고(상상 I), 말로 소리(상징 S)쳐지면 되는 것입니다.


3. 이 문제는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이고 인간 인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언어나 말, 또는 호명되어서 사회적 정체성이 나타난다고 사고한 것입니다.


라캉은 언어학자 소쉬르의 문제의식을 끄집어 냅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밀고 가면, 가타리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생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앙티오이디푸스라는 반정신의학적 개념이 등장합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정신의학과 다르게 우울증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믄 항우울증제 같은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상담을 통하여 정신의 구조를 분석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 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며, 그래서 정신분석이 정신의학보다 훨씬 비싸게 먹힙니다. 참고로 정신의학은 미국에서 DSM이라는 기준표에 따라 사람을 갖다 맞추는 문제이고, 정신분석은 환자의 무의식을 파악하여 드러내게 하고 치료하는 것을 말합니다.


4.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런 복잡한 ‘주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합니다. 뭔말이냐 하믄, 예를 들어 ‘은행나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장 정확한 대답은 ‘은행나무 이외의 나무들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말장난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은행나무’와 ‘다른 나무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은행나무의 타자는 ‘다른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은행나무 이외의 나무들이 아닌 것’이라는 답은 내용이 없는 대답입니다. (여기서 답답한 사람들은 그냥 은행나무는 ‘부채꼴 모양의 노랑 잎을 가진 나무다’라고 악쓰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내용없는 답은 결핍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만, 자신의 존재결핍을 채워줄 상대방 역시 존재결핍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순환’이라는 개념입니다. 주체와 타자가 끊임없이 상호 순환하면서 불완전하지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실재(현실 또는 말하는 대상)는 원래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존재조차도 알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실재나 현실)이 체현되거나 드러나는데 항상 뭔가가 부족(결핍)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욕망의 원인이 발생합니다. 그 무엇으로 채우는 것이 욕망의 만족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욕망(desir)과 요구(demande)와 욕구(besoin)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욕망은 상징으로, 요구는 상상, 욕구는 실재로 이해하면 됩니다.


5. 이런 사유들과 관련하여 ‘착취라는 현실(R)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상징(S)을 가상(I)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이 계급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착취하는 자본주의 현실은 존재(실재)하나 항상 그것은 왜곡되고 결여되어서 나타나고, 이것을 돌파하고자 하는 계급투쟁을 임의로 설정(기의/가상)하여 말(언어/상징)하는 것이 계급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인데 자본권력과 노동권력이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맑스가 이제까지와의 계급투쟁과는 다르게 스스로 소멸하는 계급으로 노동계급을 설정한 것이 특이할 만한 점이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해체되는 것으로 설정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프로레타리아 권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권력으로 똑같이 작동해서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이나 끌라스트르와 같은 고고학에서 권력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모스의 ‘증여론’이나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말하는 ‘선물’개념으로 뭔가 해답을 찾을려고 합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닐려면 자기 것을 다 내주어야 한다는 발상인데, 은밀하게 자기 몫을 챙기지 않고 확실하게 쏘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밀고 가면 권력=선물=죽음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권력을 획득한 순간 자신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장난말로 하는 말이 대통령을 하믄 임기가 끝난 뒤에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리더 또는 대표, 또는 선배라는 사람들이 조직이나 모임내에서 구성원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성질내면 분명한 권력자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사기 안치고 진짜로 다 내놓고 말하거나, 자신의 일부(생명, 재산, 사상 등)을 선물하면서-스스로 죽어가면서 말하는 것은 국가나 권력이 생성되지 않는 비국가적 조직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서 스스로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죽어가는 유기체인데 뭔가를 도모하는 사람은 죽을 때를 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발상은 공자나 불가의 윤리적 문제의식과 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재산, 자기의 생명, 자기생각(사상)에 대해서 깊히 사유해야 하고, 재산/생명/생각을 다 내놓고 공유하는 것이 뭔가 새로운 조직(꼬뮨)이 아닌가 고민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실재는 알 수 없습니다. 건투!!!

2006.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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