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청춘

2019/09/18 22:19
나는 천당 가기 싫어
천당은 너무 밝대
빛밖에 없대
밤이 없대
그러면 달도 없을 거고
달밤의 낭만도 없을 거고
달밤의 사랑도 없겠지
나는 천당 가기 싫어
(112쪽)
 
 
살아있는 독수리는 무섭지만
박제된 독수리는 멋이 있다.
 
살아있는 호랑이는 무섭지만
박제된 호랑이는 멋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랑은 무섭지만
박제된 사랑은 멋이 있다.
 
우리들의 삶은 '죽고 싶다'와 '죽기는 싫다' 사이에 있다.
우리들의 사랑은 '자유롭고 싶다'와 '자유가 두렵다'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삶은
마치 박제된 독수리와도 같은
감미로운 가사상태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랑도
박제된 독수리와 같은
가사상태이다.
 
죽어가는 생명은 애처롭지만
박제된 생명은
멋이 있다.
(112~114쪽)
 
 
자살자(自殺者)를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마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마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마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마라
 
바람이 부는 것은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닷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마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마라
그는 가장 솔질한 자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178~179쪽)
 
 
자살에 대하여
 
예술가가 자살을 하면 멋있고
승려가 분실자살을 하면 소신공양(燒身供養)이고
혁명가가 자살을 하면 열사(烈士)가 된다
이건 참 우습다
자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활고에 의한 자살은 비겁한 것이고
치정 사건에 의한 자살은 병신 짓이고
예술가의 자살은 근사한 것이라는
편견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자살이나 자연사나 병사(病死)나 무엇이 다른가?
죽는다는 것은 다 같은 것이다
개의 죽음이나 소의 죽음이나
파리의 죽음이나 인간의 죽음이나
다 같은 거지 무엇이 다른단 말이냐
(198쪽)
 

['마광수, 2013, <청춘>, 책읽는귀족'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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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사랑의 형태

2019/09/18 16:37

1. 에로스(Eros) :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사랑

- (플라톤) ‘인간의 마음속에서 홀연히 정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불가항력적으로 인간을 엄습하는 본능적 사랑’, 에로스적 정열의 주된 대상은 ‘아름다움’ -> 에로스적 사랑은 남녀, 성숙한 남자와 젊은 청년,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신적 일체감에서부터 남자끼리 육체적 애정 표현을 추구하는 남색까지도 에로스 안에 포함

- ‘에로스’는 ‘성애적 사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사랑’까지도 포함, 다만 에로스가 정신적 사랑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근거는 ‘육체적 아름다움’에 있음 ; 인간 육신의 아름다움이 지식과 덕의 아름다움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폰을 위시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공통된 생각

* (에로스 안이 이미 필리아나 아카페적인 요소가 함께 포함되어 있음) 육체적 아름다움에 바탕한 ‘미적 숭경’이 바로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그리고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든 다 똑같이 적용되는 사랑의 본질

 

2. 필리아(Philia) :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우애적인 사랑)

- 그리스어 ‘필로스(Philos)’에서 유래, 필로스는 친구라는 뜻으로 필리아는 ‘우애’를 가르키는 말 -> 좁은 의미에서의 우정보다는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의 우정, 즉 우리가 감각만으로는 감지해낼 수 없는 정신적인고 인격적인 사랑

- 필리아는 짐승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인간의 ‘인격’안에서만 계발될 수 있는 사랑 -> 단순한 동성끼리의 우정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애(부모와 자식, 형제애), 부부애 등을 포함

***(필리아는 에로스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음)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라는 것이 정신적 우애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미소년과의 동성애적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때, 필리아 자체가 따로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것 -> 아무리 부모자식간이나 형제간이라고 해도, 언제나 사랑의 바탕이 되는 것은 ‘육체적 아름다움’일 수 밖에 없음

 

3. 아가페(Agape) : 성스럽고 은총이 가득 사랑

-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 신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는 한없는 은총 -> 인간 사이에서 아가페적 사랑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조건 주는 사랑’이거나 ‘헌신적인 사랑’ 정도의 의미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무리 숭고하고 정신적인 차원의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종교예술을 통해서 아가페 안에 내포된 ‘미적 요소’를 많이 발견함) 불교의 관세음보살상의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의 모습, 성모마리아의 초상이나 예수그리스도의 초상을 될 수 있는 한 아름답게 그려내려고 함 -> 절이나 교회에 나가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아카페적 사랑 그 자체 만으로써가 아니라 에로스적 사랑이 더불어 충족되기 때문(교회에 젊은 여자들이 많이 나가는 것은 이성으로서의 예수가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 예수는 33세에 죽었기 때문에 ‘영원히 늙지 않는 미남 청년’, 석가모니는 여든 살에 죽었지만 석굴암을 비롯한 곳곳의 부처님상은 가장 건장하고 원숙한 육체미를 보여줌)

 

=> 그러므로 사랑에는 에로스밖에 없고, 필리아나 아가페는 인간이 에로스적 사랑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그 대용물로 취하게 되는 자위적 성격의 사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마광수, 2013, <청춘>, 책읽는귀족, 48~54쪽에서 발췌하여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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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황혼

2019/09/17 18:03

황혼

 

스러져가는 것은 아름답다

나는 황혼을 바라보며 내 삶을 반추하고 있다

 

무엇이 그리 그리워 헐레벌떡 달려왔던가

무엇이 그리 보람돼 열심히 살아왔던가

 

어차피 이 나라에서의

인생엔 기대를 걸지 말았어야 할 것을

 

어치피 이 나라에서의

자유엔 희망을 두지 말았어야 할 것을

 

아니 어느 나라든 인생은 그저 먹고 자고의 반복인 것을

아니 어느 별이든 생명은 그 자체가 이미 슬픈 것을

 

자식을 낳기 싫으면 사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죽은 뒤의 일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면

글조차 쓰지 말았어야 할 것을

 

황혼처럼 활활 불타게 세상에 불이나 지르고 죽을까

황혼처럼 멋지게 놈들을 타당탕 쏘아 죽이고 죽을까

 

아아 그래봤자 어차피 세상은 징그럽게 거듭될 것을

그래봤자 어차피 놈들도 징그럽게 되살아날 것을

 

스러져가는 것은 아름답다

나는 황혼을 바라보며

어떻게 스러져가야 아름다울지 생각하고 있다

 

 

- 마광수, 2016, <섭세론>,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살면 마음이 편해진다', 철학과현실사, 120~121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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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사랑의 슬픔

2019/09/17 13:59

사랑의 슬픔

 

오 내 사랑, 넌 내가 팔베게 해주는 걸 좋아했지

내 팔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곤 했지

 

처음에 난 그저 행복하기만 했어

곱게 잠든 네 얼굴에 키스하며 온밤을 새웠어

 

오 내 사랑, 제발 기억해 다오

내가 아픔을 참고 매일 밤 팔베개를 해줬다는 걸

 

하지만 난 결국 팔에 신경통이 생겨

더 이상 팔베개를 해 줄 수가 없었지 정말 아팠어

 

오 내 사랑, 그러자 넌 내 곁을 떠났다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나는 팔이 아파 너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애원하며 설득했을 뿐, 이것이 사랑의 실존이라고

 

오 내 사랑, 그래도 넌 내 곁은 떠났다

팔베개 하나 못해 주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며

 

그립다 내 사랑, 제발 기억해 다오

내가 매일 밤 팔베개로 널 재웠다는 걸

 

돌아와라 내 사랑,

이젠 팔이 다 나았으니

 

 

(마광수, 2016, <섭세론 涉世論>, 철학과 현실사, 44~45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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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친사랑

2018/07/13 15:40

 

나오미는 아침마다 11시가 지나도록, 자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부자리 속에서 깜빡깜빡 졸면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신문을 읽기도 합니다..(326쪽)

 

그녀는 세수를 하기 전에 침대에서 홍차와 우유를 마십니다. 그러는 동안 몸종이 목욕물을 준비합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목욕을 하고, 욕탕에서 나오면 잠시 누워서 마사지를 시킵니다. 그런 다음 머리를 묶고 손 톱을 다듬고...식당에 나오는 것이 대개 1시 반쯤입니다. (326~327쪽)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까지 거의 할 일이 없습니다. 밤에는 초대를 받거나 또는 손님을 초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호텔로 댄스를 하러 가거나, 어쨋든 뭔가를 하지 않을 때가 없으니까 그때가 되면 그녀는 다시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나오미의 친구들은 자주 바뀌었습니다..(327쪽)


사람은 한 번 호된 꼴을 당하면 그게 강박관념이 되어 언제까지나 머리에 남아 있는 듯, 나는 아직도 전에 나오미가 나가버렸을 때의 무서운 경험을 잊을 수 가 없습니다...그녀의 바람기와 방자함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 결점을 없애버리면 그녀의 가치도 없어져버립니다.

바람기가 있는 계집이다, 제멋대로 하는 방자한 계집이다,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귀여워져 그녀의 함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내면 낼수록 내가 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328쪽)

 

 

- "다니자키 준이치로, 김석희 옮김, 2013, <미친 사랑>(원제목(일어)은 ‘치인의 사랑’), 시공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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