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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5/16
    내 친구 따따와 아베
    봄날
  2. 200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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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

내 친구 따따와 아베

 


“따따, 그건 안 된다니까” 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30분 째 타갈로그어(필리핀의 국어)와 영어, 그리고 바디 랭귀지까지 총 동원해 얘길 해보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다. 서점에 책을 같이 사러가기로 한 약속을 앞두고 따따는 내게 하숙집 주인장에게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얘기해달라고 말하고 있고,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따가 직접 주인장에게 가서 영어공부를 하기 위한 책을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따는 흔쾌히 ‘오케이’라고 말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한 지, 아님 자신의 생각이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일어설 기미가 없다. 결국 따따가 먼저 운을 떼고 내가 거들기로 한 선에서 얘기는 마무리 됐지만, 우리는 결국 그날 서점에 같이 가지 못했다.

 

어쩜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따따에게 하라고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따따는 필리핀에서 내가 거처하고 있는 하숙집에 고용된 핼퍼. 말이 좋아 가정 도우미지 우리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식모와 다름없다. 아니 더 아득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일요일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24시간이 모두 차압된 대기조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더 없이 친근한 관계처럼 보이다가도 주인장이 종이라도 흔들어 될 때면 어김없이 달려가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런 따따에게 휴일도 아닌 평일 오후에, 학습교재를 사기 위해 서점에 다녀오겠노라고 말하라고 했으니, 주인장의 힐난이 두렵고 월급 깎일 걱정부터 드는 것이 당연하다. 


생면부지의 낯선 이국 땅에 도착해 마음이 산란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한달 째로 접어든 필리핀 생활은 이제 적응 단계를 넘어 이곳 사람들이 동네사람들처럼 보이고, 타갈로그어가 한국말처럼 들리는 환청에 빠져 살 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정붙이기 어려운 것은 필리핀에 짙게 드리운 가난과 가난의 그림자 같은 핼퍼(필리핀의 ‘가정 도우미’)의 존재다.


서울 떠나오기 전 ‘필리핀 핼퍼’에 대해 얼핏 들어보긴 했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타국 생활에서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 바로 이 핼퍼다. 우리네로 방 세칸짜리 집에 살 정도쯤이면 자가, 전세를 가리지 않고 한집 살이를 하는 핼퍼 한두 명쯤 두는 것은 여기선 매우 자연스럽다. 해서 그 거대한 수에 놀라고 상이한 문화는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핼퍼들의 고달픈 인생살이와 더없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핼퍼와의 관계에선 ‘주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웃기도 잘 웃고, 장난도 잘 치는 내 하숙집 핼퍼 따따는 전형적인 필리핀 농부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 꿈은 간호사가 되는 것. 여전히 따따는 그 꿈을 먹고 산다. 하지만 가난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따따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에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올해로 25살이 되었으니 벌써 8년 전이다. 틈이 날 때마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지만 대화는 꼬리를 잇지 못한다. 필리핀 교사의 1/10밖에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한달 월급의 절반을 학비로 덜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고작 8시간 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간을 모두 학교에 반납해야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는 일요일만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존재한다.) 매일 남자친구인 ‘준준’이 그립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돈 많은 새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단다. 오토바이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준준의 벌이로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따의 진담 섞인 농담 앞에서 ‘노’라며 단호하게 엑스자를 그린다. 하지만 말과 맘은 정반대로 향한다. 아무리 바지런히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라면, 3살짜리 딸을 언니에게 맡기고 남의 집 핼퍼 생활을 하고 있는 미혼모에게 눈먼 ‘행운’이라도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따의 고된 삶도 앞집 핼퍼인 아베에 비하면 복에 겨운 편이 되고 만다. 때로 따따는 잔꾀를 부리기도 하고, 똥배짱을 튕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베는 끼니조차 거르는 일이 다반사다. 집주인의 잦은 출장 때문이다. 물론 길나서는 집주인이 일정한 돈을 식비로 챙겨준다고는 하지만 하루 두 끼를 겨우 해결 할 수 있는 액수밖에 되지 않는다. 월급도 따따의 절반 수준이다. 슬쩍 방문해 본 아베의 집은 무섭기만 했다. 아베의 방엔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30도를 오르내리는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 냉장고 코드는 뽑혀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집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약간의 쌀과 아베가 저녁거리로 사온 생선 한 마리뿐. 4년 동안 한달에 절반이상을 배고픔과 어두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아베는 그만 둘 엄두는커녕 불평 한마디 뱉어내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아둔하다는 사람들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10년의 핼퍼 생활을 통해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문턱을 겨우 넘은 그에겐 돌아갈 곳도, 잠시라도 쉬어갈 안식처가 없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아무런 꿈도 없다고 말하는 그의 바램은 단지 7년 전 남편이 데리고 떠나버린 아이를 한번이라도 보는 것. 무표정함이 얼굴이 되어버린 아베의 나이는 이제 겨우 27살이다.


가난은 이렇듯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비집고 찾아들고,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만든다.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고, ‘노예의 평화’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눈망울에 절망을 새겨 넣는다.


하지만 아직 핼퍼에 대해 고민하는 이 하나 만나지 못했다. 게으름과 짧은 영어실력이 그 연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계전선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16세미만의 아동 중 1/6이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회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보다 여행객들을 향해 돈을 구걸하거나 시장거리에서 전대를 찬 아이들을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는 사회에서 어쩌면 핼퍼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를 찾는 것은 이 나라를 뜰 때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할지조차 모를 암담한 현실 앞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친구가 되는 것뿐이다. 따따와 남자친구의 담장 데이트를 위해 보초를 서고, 아베와 같이 식사를 하기위해 주인장에게 어떤 핑계를 될까를 궁리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되는 타갈로그어와 영어, 그도 모자라 한국어와 바디 랭귀지를 총 동원해 수다를 떨고, 가끔 산책에 나설 때면 손을 맞잡는 것뿐이다. 풀이 잔뜩 죽은 따따의 얼굴 위로, 올 이 없음을 알면서도 집 앞 버섯바위에서 일어서 줄 모르는 아베의 기다림 위로, 오늘도 필리핀 다바오의 밤은 깊어간다. 헤아려지지 않는 핼퍼들의 고단한 삶을 밟고.


2005. 4. 8 필리핀의 다바오 시티에서.

 

<따따의 사촌 집 앞에서. 해맑은 웃음을 가진 처자가 바로 따따>

 

 

<모처럼의 외출에 아베는 한껏 멋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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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기

 

"나는 안다. 나

를 다 고백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첫 걸음부터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또한 나는 안다. "


서른이 방향을 잃고 흘러가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불행에 숨쉬는 것조차 버겨웠을 때 떠나옴을 계획했다. 내게 닥친 현실의 암담함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 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가 있지 않을까하는 어리석은 마음 반으로.


그렇게 무너지는 마음을 안고 ‘떠나고 싶었다’는 길동무와 1년 여행 계획을 세우고 무작정 필리핀으로 날라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3월과 5월을 보냈다. 하지만 처음을 제외하고 달라진 것이 없었다. 새로운 것들과 조우하면서 기억 속에서 서울을 그리고 불행을 털어낸 듯 했지만 새로움에 차츰 익숙해져갈 때 쯤 다시 어두운 기억들이, 그리움과 상처가 나를 흔들었다. 또 다른 것들을 찾아,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야한다고 짐을 꾸릴 생각을 하면서 문득 그것만은 해답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짐을 꾸리고 또 떠남을 반복할 수만은 없다는.


문득 기록이라는 것이 하고 싶었다. 내가 만나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의 삶이 가진 의미에 대해 소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인생들 속에서 나의 삶도 풍요로와 지기를 바래고 싶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지금도 희미해져가는데, 시간 앞에서 다른 언어로 표현되거나 살이 붙어 ‘사실’이 흐려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조금 더 지나면 모두 지워질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노트북을 켰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붙잡으려 애써도 무기력하게 잊혀질 기억들과 그때의 그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 이들과 함께 했기에 나의 서른이 너무 어둡게만 기억되지 않으려는 바둥거림으로 ‘고백’을 시작한다.

 

맘의 평온 앞에서 또 다른 걱정이 엄습한다. 조급증을 내지 말아야한다며, 삶의 여유를 잊고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 많아 때론 봄이 지나갈 때가 되어서야 봄이 온 것을 알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진 말자며, 긴 호흡이 필요하다며 떠나온 길에 혹여 또 짧은 호흡 속에 허덕일까봐.


결국 ‘동전’이면서도 동전의 앞 뒷면처럼 서로 다른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나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너무 미워하진 않기. 하지만 그게 나라고 쉽게 인정해버림으로 인해 포기해버리진 않기. 아직 살아내야 할 많은 날들이, 그리고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이 아주 많은, 절망 속에서도 한번도 주저앉음을 용인하지 않은 나이기에.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인다. 사람들이 내미는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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