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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17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봄날
  2. 2005/06/17
    17년 동안 되풀이 되는 동생 만나기
    봄날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개새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잘못 들은 것임에 틀림없다며 다시금 물었다. 보다 또렷한 음성이 귀에 와 닿는다. 분명 “개새끼”였다. 한국 공장에 다닌다는 리아와의 첫 만남에서 머쓱함을 피하기 위해 아는 한국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욕지거리였다. 마사에게 각인된 말도 다르지 않다. 마사는 “야, 임마”라는 성난 소리를 가장 자주 듣는다고 했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그래도 남의 집 안방까지 가서 그리 험한 짓 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마닐라에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까비테에 닿자마자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필리핀 내 4개의 수출자유구역 중 가장 크다는 까비테에 자리 잡은 250여개 공장 중 해외기업의 30~50%는 한국기업. 다른 기업들이 그러하듯 한국기업들 역시 수출자유구역이 주는 장기간의 세금 면제 혜택과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곳에 왔다. 공장들이 문을 열자마자 가족부양과 가난의 무게를 진 필리핀 노동자들이 앞 다투어 줄을 섰다. 리아와 마사 역시 5년 전, 여고생 교복을 벗자마자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해외진출 한국기업들 횡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해요. 주문량이 밀리면 토요일은 물론이고 밤을 새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하지만 할당량제라서 초과 근로 수당이나 야근수당은 거의 없어요. 연일 야근이 계속되면 몸이 못 견디는데 맨 처음에는 겁 없이 ‘하루 쉬겠다’는 말도 했었죠. 어떻게 됐느냐고요? 한국인 관리자가 별일 아니라는 듯 쉬어도 된다고 하기에 쉬고 다음날 출근했더니 필리핀 상사가 불러서 해고됐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있은 후론 아파도 쉬고 싶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결혼 혹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고된 사람들이 있기에 2살 된 딸의 엄마이면서도 싱글이라 속이고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리아. 그는 매일 녹초가 된 몸으로 공장에 충성을 바치고서도 법정 최저임금에도 채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라도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예고도 없이 폐업을 하거나 “경기가 안 좋다”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는 공장이 많기에, 그 알량한 월급조차 체불돼 제때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많기에. 거기에 6개월 이상 일한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도록 한 필리핀 노동법 망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5개월 이상의 계약을 하지 않다보니, 다음달부터는 꼼짝없는 실업자 신세다. “화장실 가는 것도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까지 체크해요. 관리자들의 대부분이 남성이다보니 생리라도 하는 날엔 얼마나 끔찍한지….” 마사가 몸서리를 친다. ‘한국인’임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성희롱도 건너 뛸 수 없는 화두다. 툭툭 몸을 건드리거나 슬쩍 껴안는 것은 예사고 어떤 관리자들은 공공연히 성적 요구를 해오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해고시키겠다고 협박을 해온단다. 공단 내 일본, 대만 등의 기업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한국기업처럼 성희롱이나 욕설이 일상화된 공장은 없다는 게 노동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인가 보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한국 공장을 가장 ‘나쁜’ 일터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현지서 가장 나쁜 일터로 꼽혀- 넌지시 노조를 만들거나 싸움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떠본다. 한숨 섞인 답변이 되돌아온다. “일곱 식구가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한번 눈 밖에 나면 지금 다니는 공장은 물론이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당신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꿈이라곤 계속 일을 할 수 있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전부라는 사람들. 너무나 소박하지만 돈에 눈먼 한국 기업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투자자 유치’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자국 정부의 방관 속에서 한없이 아득해진 그네들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필리핀 까비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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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동안 되풀이 되는 동생 만나기

 <퍼온 글>

 

17년 동안 되풀이 되는 동생 만나기


박래군(유가족,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봄날의 끝자락이다. 어느새 녹음은 짙어지고, 산마다에는 흰색의 아카시아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곧 뻐꾸기가 우는 초여름이 될 것이다.

1년 중 나는 이 기간을 가장 침울하게 보낸다. 나와 동생에게 5월은 계절의 여왕이 아니었다. 광주학살 원흉 처단 투쟁을 매년 벌여야 했던 투쟁의 계절이었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경찰에 맞서고 쫒기면서도 뜨겁게 외치고, 거리를 내달려야 했던 그런 계절이 5월이었다.

우리 형제에게 5월은 투쟁을 요구했고, 우리 형제는 그 투쟁을 외면하지 않았다. 1986년 5월말에 난 감옥을 가야 했고, 1988년 6월초에 동생은 광주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나의 아름다웠던 투쟁의 계절은 거기서 끝이 났다. 노동운동에 대한 꿈도 접고, 나는 유가족이 되었고, 이제는 그 길에서 발견한 인권운동의 길을 가고 있다. 동생의 뜻이 몇 사람의 분신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도 오늘도 난 동생과 약속한 이 길을 가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해방의 세상을 만들자는 그 약속을 안고 벌써 17년째를 살아내고 있다.

내게 동생은 나이 어린 동생만이 아니었다. 80년대 그 엄혹했던 독재의 시기에 함께 고민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던 동지였다. 그런 동지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처음 동생이 죽었을 때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던 나날이 있었다. 늘상 난 동생이자 동지였던 래전이와 대화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레 그가 죽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여느 유가족들처럼 아무에게나 보일 수 없는 가슴 속 비밀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가는 술에 취해 동생과 자취하던 집을 찾아가고, 그 앞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깨고는 했던 날들이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를 추억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17년이 지난 오늘에도 스물여섯의 청년으로만 기억된다. 과도한 책임감으로 민중의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가장 문학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살았더라면 더 풍부해진 세상과 삶에 대한 인식으로 열정적인 시를 쓰고 있을까?

오늘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산산이 부서져 보수정치인들의 득세에 이용되고 있고, 소득수준은 높아졌다고 해도 오히려 빈곤층은 증대한다. 진보운동은 분열하고, 약화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형식과 절차만 발전할 뿐, 이전의 민주화운동세력에 의해 민주주의는 오히려 질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광풍은 이미 우리 사회의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으며,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쉴 새 없이 밀려든다. 그가 죽던 그날보다 세상은 그래도 나아졌다고 위안해야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우리 시대의 추악함 앞에 난 다시 절망한다.


올해도 다시 난 그의 무덤 앞에 설 것이다. 그의 유작시인 ‘동화’가 적힌 묘비가 있는 그 무덤 앞에서 그래도 꺾을 수 없는 새 세상에 대한 의지를 되살려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고, 그 결심으로 1년을 살고, 지나온 세월처럼 다시 무덤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가장 행복하게 동생이자 동지였던 래전이와 만난다. 작은 인간의 아들이고자 했던 그의 염원, 그리고 열사들의 염원을 다시 확인한다. 죽은 자를 욕되게 하지 마라, 그의 뜻을 받아 열심히 살아가자 그렇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의 형제는 이어지고, 동지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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