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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경제학] 제2회 [노동의 분담]과 [생산물의 교환], 그 동일성과 차이(2)

 


제2회 [노동의 분담]과 [생산물의 교환], 그 동일성과 차이(2)



분업이 있기 때문에, 교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환을 성립시키는 분업]이라고 했지, 분업이 있으면 교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에, 할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할머니는 옹달샘에서 빨래를 하고, 아버지는 밭일을 하고, 어머니는 베를 짜는 등의 성별이나 세대에 따른 분업을 하는 자급자족의 공동체 가족이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고매를 먹기 위해서 산에서 베어 온 나무와 교환할까요?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알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베어 온 나무도, 아버지가 가져 온 고매도, 어머니가 베를 짠 옷감 등은 모두 다 가족의 것이기에, 할아버지는 교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라는 자격으로 고매를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빈슨이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 얻어진 여러 가지들을 자신과 교환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족 각자의 노동은, 가족이라는 하나의 주체의 노동의 일부로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로빈슨이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가족의 이야기로는 잘 모르겠다고요? 그럼, 현대의 대기업이라는 삼성이나 현대 등을 생각해 봅시다.

공룡과 같은 이런 기업에서는 몇 만, 몇 십만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직종, 직장에서 분업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A공정에서 B공정으로 물건을 보낼 때에 [교환해야할 무엇인가가 있어야지 넘기겠다] 등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현대라고 하면 현대라는 회사 안의 반제품도, 원료도, 기계도 모두 다, 그것에 어떠한 노동이 더해지더라도 현대의 것이므로,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교환하는 등의 미련 곰탱이 같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효리나 성유리가 하던 노동은 개개인의 노동이 아닌 현대라는 주체가 행하는 노동인 것입니다(단지, 가족 공동체의 할아버지 등과는 달리 현대의 노동자들은 현대의 일원이라는 자격으로 노동의 결과를 소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노동자들의 노동은 현대의 일원으로서 노동한 것이 아니라, 기계나 원료 등과 같이 생산의 수단으로 참가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일단, 분업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교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개인 활동을 열심히 해도 그녀들은 핑클의 멤버이다!!



사회의 내부 분열=사유재산이 분업을 교환으로 바뀌게 한다


그렇다면, 분업 외에도 어떤 조건이 되면 교환이 발생하는 것일까? 생산물이 사적 소유물로서 나타나는 독립된 주체 사이에 분업이 이루어질 때, 생산물은 서로 교환됩니다. 공동체 가족도 다른 공동체 가족과는 생산물을 교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도 자신들이 생산한 자동차를 어떤 [대가]도 없이 삼성이나 이효리에게 줄 리가 없습니다.

위에서 [독립된 주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왠지 있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별 것 아닙니다. 우리들의 사회라는 것은 서로 이해를 공유하지 않는 등의 관계에 있는 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사유재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만,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지배와 피지배 등으로 계급의 분열과 내부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외연적으로 보면, 작은 부족 사회와 같은 것에서부터 근대민족국가 라는 것으로 발전했고, 내부의 구성원들 간에는 분열=적대를 키워 왔습니다. 이 내부분열에 의해서, 부라는 것도, [공동체의 것]이라는 개념에서 각자의 것으로 분열된 부=사유재산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이 분열의 결과로, 생산물은 사회(공동체)의 것이 아닌 사유재산이 된 것입니다.

사유재산제가 발달했다고 해서 사회의 분업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실제로는, 그 반대로 사유재산제 하에 사회의 분업은 고도의 발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결과가 사유재산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노동의 분담은 각자가 하고 있는 노동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유하는 물건의 차이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노동의 분담이 아니라, 물건의 교환을 통해서 분업관계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효리가 아무리 sexy해도 공짜술은 없다!!



하지만 [자유로운 노동] 아래에서 분업은 가능한가?


직접적인 노동의 분담이던지 물건의 교환이던지, 어느 쪽이던 분업이 성립한다면 문제없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분담이 물건의 교환이 되는 것이 되면, 노동의 분담을 누가 결정하는 가?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산물이 사유물로서 나타나므로, 노동도 각자의 사적인 일이고, 사회가 직접적으로 분담을 결정할 수 없어서, 분업의 어느 부분을 누가 얼마나 할 것인가?에 사회적인 의지가 개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동은 [자유롭게]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의지(이것이 중앙정부의 결정이든, 관습/관례상의 결정이든, 신의 신탁이든, 무엇이든, 각 개인의 위에 서서, 각 개인들을 사회적인 필요에 따르게 하는 힘을 의미)가 노동의 분담을 결정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노동이 허용되고도, 분업이라는 것이 성립하는 것일까?

무인도의 로빈슨 아찌가 살아가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간을 배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 몇 시간, 잘 곳을 위해서 몇 시간 등과 같이 자신의 한정된 노동 시간을 적절하게 배분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노동 인구와 생산성이 주어진 일정한 사회에서, 일정한 필요물자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쌀 생산에 몇 명이 몇 시간, 집 등을 짓는 공사에 몇 명이 몇 시간 등으로 노동 인구와 노동 시간을 각각의 생산부분에 배분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노동과 시간의 배분이 없으면 무인도의 로빈슨 아찌가 살아남기 어렵듯이, 사회도 존속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속의 모든 사회들은 이것을 실시해 왔습니다.

사회가 가족 공동체와 같이 좁은 범위에 한정 되었을 때에는, 세대나 성별 등에 의한 관습적인 노동 분담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좀 더 발전한 봉건사회에서는 노동 분담이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농노는 농노이니까 농노의 일을 하고, 농노의 아들 역시 크면, 당연히 농노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농업 부분에 일정한 노동 인구를 투입해야하고, 또한 그것을 고정적으로 유지해야만 하는 봉건사회의 생산의 필요성이, 일정 인구를 농노라는 신분에 고정시켰던 것입니다. 신분이 사람을 특정 직업에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직업에의 일정한 고정된 인구의 필요가 신분의 고정을 만든 것입니다.


각자 제멋대로인 것같아도 분업이 확실한 미녀삼총사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는 무엇이 이 노동의 배치를 결정하는 것일까?

기업을 들여다보면, 각 기업들은 매우 계획적으로 노동의 분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용직, 계약직, 파트타임이나 파견노동자, 하청 등을 어디에 몇 명을 배치해서 몇 시간을 일하게 할 것인가를 계획적으로 결정해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기업이라는 것도 사회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앞에서 봤듯이 농민이 구두 직공의 노동에 무관심-엄밀히 말하면, 관여할 수 없었듯이, 각 기업도 독립된 사적 생산자이므로, 타사의 노동에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즉, 사회 전체로 보면, 노동의 배치가 무정부적이고 각 기업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사회가 성립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고도로 발달한 상품 생산 사회]는 존속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기업(사람)들이 [자유롭게] [마음대로] 노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사회의 노동 배치의 필요에 맞추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가치법칙]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에겐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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