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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일까?


 

 

1819 ; Oil on canvas, 491 x 716 cm ; Musee du Louvre, Paris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Theodore Gericault(1791~1824)의 [The Raft of Medusa]입니다.

 

그는 장르화에 뛰어났고, 동물-특히, 말을 좋아해서 속도감 있는 동작들을 잘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린 유화는 얼마 안되지만, 소묘가 그의 주종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의 소묘 그림은 http://www.ibiblio.org/wm/paint/auth/gericault/lithograph/ 에 가셔서 살펴 보십시요).

 

이 그림은 실제로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던 사건을 그린 것입니다.

 

1816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에 400여명의 군인과 이주민들을 실고 가던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고급장교와 선장 등의 선원들인 250여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지만, 일반 선원들과 이주민, 졸병들인 150여명은 뗏목 등을 만들어서 표류하게 되었다. 14일간의 표류 끝에 구조된 것은 단 15명뿐으로,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당시의 여론은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주류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생존자를 일일이 찾아가서 경험 등을 듣거나 시체안치소에서 시체들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메두사호에 관한 그림을 그릴 때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그림에서 보듯이 14일간의 표류 끝에 극적으로 배를 발견했을 때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그림 자체의 느낌은 암울하지만 지나가는 배를 발견해서 도움을 요청하면서 환호하는 장면입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고, 파도는 미친듯이 날뛰고, 돛은 강풍에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있는 장면을 통해, 그들이 14일간 경험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뗏목 앞쪽의 사람들은 배를 발견해서 옷을 흔들거나 일어나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머리에 터빈을 한 남자는 다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잡고 있습니다.

 

대각선을 이루는 그림의 구도와 명암법 등을 통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림에 극적인 요소까지 가미시켰지만, 출품 당시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것에 실망한 Gericault는 영국으로 건너 갔고, 거기에서 큰 평가를 받게 됩니다.

 

개인의 영웅적인 활동 등을 표현함으로서 낭만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흔히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습니다. 이 말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인생,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여러 가지 뉴스나 주위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면, 위의 이야기는 배부른 자의 푸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넘쳐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혹은 무관심한 시선을 자주 느낍니다.

 

청년실업과 명퇴, 카드빚 등 먹고 살기 위한 기본적인 생활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도 가지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생활의 문제를 떠나서도, 먹거리는 사소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환경 오염과 유전자 식품, 다이옥신 등 인간의 몸에 유해한 식품들이 넘쳐나는 도시생활에서 먹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습니다.

 

장수와 먹거리에 관한 프로그램은 이제 방송국에서는 기본적인 것이 되었고, 웰빙식품이니 요가니 하면서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일상을 넘어선 느낌도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건강과 장수를 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생활의 수준을 떠나서 공통된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가 하나의 계층(혹은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배고픔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에 대한 논쟁은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보는 느낌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아가 일상이 된 사람에게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배 부른 소크라테스들의 비생산적인 말장난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개혁이니 ceo형 시장이니 말들이 많지만, 그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생활고에 따른 생계형 자살과 범죄 등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과 동반(?)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사람에게 자식이나 부인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는 물음을 던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그 가장들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웰빙열풍에 따라서 츄리닝 하나도 따지는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들]과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중 어디에 속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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