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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라는 이름의 비상식


 

 

1537-41 ; 1450 x 1300 cm ; Sistine Chapel of the Vatican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의 [The Last Judgment]입니다.

 

몇년 전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도 종말론이 유행했고, 지금도 믿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기가 바뀌기 전인 1999년에는 프랑스의 예언계의 슈퍼스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공포에 숨 죽였던 것이 바로 어제였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최후의 심판]이나 [종말]이란 것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달에 인간이 갈 경우에 세계는 종말한다고 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갔을 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1999년이 아닌 999년에도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행해진다고 해서 사회적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시작한 것은 60세때부터라고 합니다. 완성했을 때에는 66세였다고 하니 그의 정력과 열정에 감탄할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4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미켈란젤로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실존인물들이 모델로서 이용되었듯이, 아마도 각각의 모델들이 미켈란젤로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는 전부 다 나체로 그려졌지만, 후에 비속한 표현이 금지되어서 미켈란젤로의 제자에 의해서 성기 부근이 덧그려졌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도 그려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우측에 있는 노인- 쩝 ... 이름난 성자인데 ... 이름을 까먹었습니다. -이 형벌로서 자신이 겉가죽이 벗겨졌습니다. 노인이 잡고 있는 겉가죽을 자세히 보면, 노인의 얼굴 형태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겉가죽이 미켈란젤로 자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자부시이 무지 강했던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이런 모습으로 그린 것은 자신의 위선과 나약함을 겸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겸허함과 성실함이 생각나는 그림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상식(常識) :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및 사려분별.

 

상식(常識) : 상식이란 깊은 고찰을 하지 않고서도 극히 자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식도 과거의 철학자들의 독창적인 사색과 고찰 결과 얻어진 것이 허다하다. 철학은 누구나 다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전복하고 처음부터 다시 고찰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얻어진 결과가 다시 상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기인(奇人)의 비상식적인 말이 오늘의 상식이 될 수 있고 과거의 상식이 오늘날에 와서는 진부하고 괴이한 비상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출처 : naver)

 

[상식]이라고하면 일반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보편성이 결여된 [상식]도 생활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식적인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상식]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나라에서는 [비상식]이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상식이라는 것도 문화적 종교적 환경적 등의 요소에 의해 통용되는 사회도 있지만, 그것이 비난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는 [상식]인 것이, 다른 사회(집단)의 눈에는 [비상식]으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회(집단)의 [상식]은 거기에 소속된 구성원들에게는 진실이고 올바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회(집단)의 눈으로 보고 그 [비상식]을 거론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그는 그 사회(집단)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비상식적인 그 사회(집단)만의 [상식]이 보편 타당한 것으로 그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대선자금을 둘러싼 문제들이 이슈가 된적이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후보의 당선이 유력했기 때문에, 아마도 천문학적인 기업 비자금이 선거자금으로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하긴 선거자금 문제에 있어서 때묻지 않은 정치인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국제경쟁력과 파업 등으로 인해 죽는 소리만 하던 대기업들이 100억이라는 로또복권의 대박의 금액을 꺼리낌없이 사용해왔습니다. 일반 국민들의 눈에는 정치권과 경제인들의 [비상식]에 놀라움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정치권과 경제권이라는 집단의 [상식]에 맞는 짓을 한 것에 불과하고, 일반 국민들의 시각에 불만을 느낄 것입니다.

 

정치권이 자신들의 [상식]이 사실은 [비상식]인 것을 깨닫지 않는 한, 어떠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도를 보완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더라도, 개혁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은 혁명적인 제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정치자금법을 개혁한다고 해도, 무수한 탁상공론 속에서 지금까지의 제도 속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논의가 도출되면서, 오히려 개악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상식]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소위 말하는 고문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몸 어딘가가 불편하게 되거나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과는 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각종 고문으로 병들게 하거나 죽이거나 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의 문제일까요? 사실 이것은 그들의 인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상식]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인도 그들에게는 [상식]적인 행동이었기에, 일말의 죄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각종 고문으로 인간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비상식]이었습니다.

 

[상식]의 무서운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상식]이란 것이 만들어지면, 그 구성원들은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비상식]적인 행위도 아무런 죄의식없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상식]과 [비상식]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사회(집단)의 눈으로 보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부안과 NEIS, 노동문제와 파병을 [상식]으로 믿는 참여라는 이름의 정부, 자신들의 기득권옹호를 위해서 한나라당과 탄핵을 시도했던 민주당의 [상식], 그리고 [몰상식]이 그들의 [상식]인 한나라당 ... 여전히 이 사회의 [상식]은 그들만의 [상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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