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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와 비만이 공존하는 세계


 

 

Oil on canvas; 134 x 100 cm (53 x 39 1/4 in); Musee du Louvre, Paris

 

 

Bartolome Esteban Murillo(1617-1682)의 [The Young Beggar]입니다.

 

무리요는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연 무리요이지만, 그의 유년시절은 고아로 불우하게 보냈습니다. 무리요가 활동한 스페인의 세비아는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향해 떠난 이래로 식민지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활동한 17세기의 세비아는 무역의 중심지가 카디스로 옮겨짐에 따라서 급속하게 몰락하게 되고, 여기에 중세를 휩쓴 페스트가 창궐해서 6만에 가까운 인구가 죽었습니다.

 

이 그림 역시, 폭동과 도둑이 일상이 되고, 거리에는 창녀와 부랑자로 가득찬 세비아에서, 특히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페스트 등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그린 그림입니다.

 

일반 서민-혹은, 민중을 그린 유럽의 풍속화들을 보면 북유럽과 스페인의 미술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등으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그림들은 풍자와 번영으로 가득차 있지만, 스페인의 그림에서는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무리요의 그림은 일반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가 주로 성모마리아에 관한 그림들을 그렸던 것도 어쩌면 현실의 궁핍함과 비참함을 그림을 통해 희망과 이상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의 모순 속에서 언제나 약자로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아이와 여성인 것을 얼마전의 미국의 침략전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굶주린 아이가 17세기 세비아의 거리를 뛰어넘어서, 지금의 현실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에서 이 그림이 주는 감상일 것입니다.

 

 

 



 

한때, 다이어트는 여성의 전유물로서 여겨졌지만, 지금은 다이어트-비만은 여성만이 아닌 남녀노소를 불문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약 60억의 인구 중에 11억정도가 비만에 해당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무의식중에 비만을 하나의 사회의 풍족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비만은 그 사회의 발전과 경제적 여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하나의 사회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습다고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할지 지구상의 약 8억정도의 인구가 기아상태에 있다고도 합니다. 단순히 기아가 아프리카만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중남미, 게다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것같은 북미와 유럽에도 기아가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세계 3대 곡물수출국의 하나인 아르헨티나의 일반 민중들이 기아에 허득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단순히 기아가 생산의 문제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곡물의 품종개량과 비료 등의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산량은 과거에 비해서 증가했고, 세계 전체 인구가 먹고 남을 만큼을 생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면, 지금의 기아 문제는 세계적인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7초(혹은, 3초라고도 한다)마다 1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인해 죽는다는 통계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비만과 기아가 공존하는 이 모순들...

 

게다가 이 기아가 자연현상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에 의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라크침략전에 의해 최소한 740만명의 이라크인들이 기아에 빠질 것으로 예측한 유엔보고서 앞에서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충분한 부를 이성적이고 계획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21세기 비만 해결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된 지금, 자연재해와 전쟁, 질병 등에 의해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평등한 존재가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의식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건조차 주지 못하는 이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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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아인슈타인 그리고 레닌


 

 

1899; Oil on canvas, 74 x 93 cm (29 1/8 x 36 5/8 in) Musee du Louvre, Galerie du Jeu de Paume, Paris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Paul Cezanne의 [Pommes et oranges]입니다.

 

이 그림이나 이와 비슷무리한 그림을 본 적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자주 이 그림이 저 그림같고 저 그림이 이그림으로 착각을 할 정도로 비슷무리한 정물화 그림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와 같은 일반인을 위해서 몇개만 그렸으면 좋을 것을 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잔 입장에서는 그리고 싶을 때에 그렸을테니까 ... .. . 저의 무지를 탓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잔 역시 생전에는 무능한 화가의 전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의 중학교 때부터의 친우였던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호 에밀 졸라도 그를 모델로 한 무능한 화가이야기를 쓸 정도로 실패한 화가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0세기의 미술을 르네상스의 사실주의로부터 해방시킨 cubism(야수파)의 모태가 되었기에, 앞에서도 거창한 칭호를 붙인바와 같이 근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인상파들이 순간의 감각에 치중한 것에 비해서, 그는 자연의 본질을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색채를 분할해서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물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서 전통적인 명암법과 원근법을 포기했습니다. 거기에 완벽한 형태를 위해서 사물을 왜곡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물화]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변화도 재미도 뵨태성도 반전도 없는 무미건조한 푸석푸석한 과일나부랭이 그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친구로부터 위의 그림을 보면서(모조품이지만), 많은 설명을 들으면서 정물화도 무미건조하기만 한 푸석푸석하고 맛없는 과일 등의 그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파와 테이블, 그 위에 넓게 펴져 있는 흰 천과 물병, 오렌지와 사과들 ... .. .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 눈에 들어올 뿐, 어떤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듯한 안정감을 주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순들로 가득찬 그림입니다. 옆으로 경사진 소파, 올라가는듯한 테이블, 그 위에 놓인 흰 천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서 과일들이 지금이라도 쿵하는 소리를 내면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의 수수께끼는 원근법의 무시와 다양한 각도에서 본 것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즉, 이차원의 화폭에 다차원을 구성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과 색으로 바라보는 것에 의해서 새로운 세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상대성이론]에 관한 책에 [A. Einstein은 Ernst Mach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적혀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Ernst Mach에 대해 제가 알고 있었던 지식이라고 하면, V. Lenine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마하주의라는 이름하에 관념론자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 대한 마하의 학설이 관념론적이라는 것에는 조금의 의문도 없다]고 한 정도였습니다. 그런 마하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 .. . 마하의 이론에 대한 레닌의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하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실증주의 철학의 논객으로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로, 18세기 뉴턴이 제창한 절대공간 개념을 아인슈타인보다 먼저 부정하고, 상대성이론의 구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기류의 실험을 행한 까닭에 지금도 초음속의 속도를 나타내는 마하라는 이름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사실 마하의 최대 공적은 뉴턴역학에 대한 비판입니다. 뉴턴역학이란, 던진 볼이 몇 초후에 어느 지점에 있는가, 천체의 운행법칙 등을 정리한 것으로, 이 법칙의 전제조건으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모든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절대시간과 절대 공간은 없고, 만약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라고 물은 것이 마하였습니다. 그 당시 과학에 있어서 절대적인 바이블과 같은 뉴턴역학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한 마하.

 

레닌이 마하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은, 그가 뉴턴의 역학에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잘 몰랐고, 또한 그는 단지 마하가 비판하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에 대한 비판을 유물론에 대한 비판으로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뉴턴은 진공상태의 우주공간 속에 에테르로 가득차 있고, 이것이 [절대공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천체공간의 운행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해도 에테르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절대공간]이 부정될 수밖에 없으므로, [절대공간]을 전제로 해서 계산된 천체운행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하는 절대적인 공간의 기준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새로운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마하 이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었습니다. 갈릴레이의 주장은,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는 사람은 기차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바깥 풍경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물에 대한 견해는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상대적인 공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하는 [사물에게는 각각의 고유한 시간이 있다. 우리들이 말하는 [시간]은 사물이 변화하는 것에 의해서 나타난 개념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절대시간에 대해서도 부정합니다. 갈릴레이는 공간의 상대성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상대성으로까지 확대해서,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것입니다. 레닌이 마하를 비판한 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공간과 시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마하는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했을 뿐, 실재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마하는 뉴턴 역학의 약점(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라는 개념)에 주의가 미쳤고, 이것을 레닌은 뉴턴을 비판하는 관념론자라는 딱지를 마하에게 붙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야말로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마하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기에 상대성이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연방의 건국을 이끈 레닌도 이렇게 많은 잘못과 판단 미스 등을 범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고 진리라고 무비판적인 지지가 절대적인 선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된 것이 1905년, 마하 등을 비판했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나 온 것은 1908년이므로, 레닌이 자신의 실수를 그 후에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일반상대성이론]이 나온 것이 1916년인데도,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제2판이 출판되는 1920년에도 여전히 마하를 관념론자로 비판했습니다. 레닌이라는 한 때는 완벽한 인간으로 추앙받던 그 역시 자신의 실수와 잘못 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대와 과학의 발전에 의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정신 등이 나오지만, 그 전까지 뿌리 깊게 당연시되고 있던 낡은 관념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마하의 위대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비판적인 추종은 결국 - 여러 가지 이유는 있었지만 -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라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완벽할 수 없고 언제나 정의나 진리만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부정되었을 때, 사이비종교로, 혹은 우상화 되어 왔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기 보다는 이름없는 풀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지 ... .. .

 

 

참고 링크 : 우주는 왜 동일 세계인가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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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1930 ; Oil on canvas, 260 x 325 cm ; Musee du Louvre, Paris

 

 

Eugene Delacroix(1798-1863)의 [Liberty Leading the People]입니다.

 

18세기의 유럽에서는 두 가지 큰 혁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산업혁명이었습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로 상징되는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를 거쳐서,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산업혁명은 기차와 증기선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가져와서, 인류의 생활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지만, 대도시로 집중되는 인구에 의해서 빈부의 격차가 격심해졌습니다. 급속한 사회적 변화는 다양한 모순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회화사에서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서로 대립되는 유파의 출현으로 나타났습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자세한 것은 밑의 링크를 참고하시고, 간단한 차이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신고전주의]는 이상적인 미-균형적인 미와 교훈성과 합리성, 조화 등을 추구했습니다. [낭만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거부하면서, 개성미와 상상력, 비현실성 등을 추구하면서 발전했습니다.

 

                        참고 링크 : 신고전주의미술
                                             낭만주의

 

이와 같은 시기에 들라크루아는 프랑스의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전파 화가로서 유명했던 게랭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해서, 루브르미술관을 다니면서 루벤스와 베로네세 등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제리코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리코의 [The Raft of Medusa]를 통해서 낭만주의를 수립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됩니다.

 

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여신]은 1830년의 7월혁명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국기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혁명군을 이끄는 여신이 들고 있는 것도 혁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프랑스 국기입니다. 그리고, 먹물을 상징하는 모자를 쓴 남자와 권총을 양손에 잡은 노동자풍의 소년과 안정된 삼각형의 구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인간들 사이에 여신이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상체를 드러낸 모습으로 ... 그 해답은 들라크루아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사실은 먹물을 상징하는 모자를 쓴 남자는 들라크루아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The Massacre at Chios] 등을 그렸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비난뿐이었습니다. [카오섬의 학살]은 그 생생한 묘사와 역동성 등에 의해서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들을 만큼,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평가에 대한 실망만이 가득할 때, 프랑스 7월혁명이라는 역사의 역동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역동성을 어떻게든지 표현하고 싶었지만, 이전의 경험으로 인해 망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림이 가지는 생생한 현실미를 중화시키기 위해서 여신을 그렸다는 설과 세상의 모진 평판으로부터 자신과 이 그림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의미로서 그려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쨋든 여신의 효력이 있었는지, 이 그림을 통해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혁명의 역동성과 열기가 가득한 [민중을 이끄는 여신]. 이 혁명을 이끄는 여신이 든 프랑스 국기는 프랑스라는 내셔널리즘을 넘어서 지구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 ... 이 세가지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테러  1. 온갖 폭력을 써서 남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
          2. 테러리스트(테러리즘을 신봉하는 사람. 폭력주의자.)의 준말.
          3. 테러리즘(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암살이나 폭행·숙청 따위 직접적인 공포 수단을 이용하는 주의나 정책. 폭력주의.)의 준말.

 

[테러]라는 단어는 국제면에서 빠지지 않는 글자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이라크 무장저항세력과 [테러리스트]혹은 [테러]는 바늘과 실과 같은 관계처럼 예외없이 따라다닙니다. 알카에다가 직접적으로 한국 등을 목표로 공개 경고가 있어서 지금 한국 정부는 우왕좌왕하면서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 이전에 있었던 故김선일씨의 참수 등도 있어서 이라크 저항세력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행위를 야만적인 행위라고 규탄하는 목소리들도 있습니다.

 

이라크의 무장저항세력은 테러리스트로서 [악]한 존재인 것일까? 만약 80년대 전두환집단을 미국과 영국이 독재와 있지도 않는 핵무기를 이유로 한국을 침략한다면 ...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나는 전두환일당에 대해서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침략적인 행위에 의한 해결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전두환 일당이 반인류적인 행위를 했어도 점령군인 미국과 영국을 향해서 웰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침략군인 이상 침략군에 대항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라크의 삶의 질이 떨어진 것에는 후세인정권의 책임도 일부분 있지만, 가장 큰 책임은 미국에게 있습니다. 후세인정권의 과거와 현재를 만들어 준 것이 미국이고, 또한 봉쇄정책에 의해서 기본적인 의료품, 식료품조차 없는 나라로 만든 것도 미국입니다. 그런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따라서 미국의 침략 행위에 저항하는 이라크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닌 무장저항세력입니다. 침략국인 미국과 영국,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용병국들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이라크 국민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상대로 이라크 저항세력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게릴라전 밖에 없습니다. 게릴라전은 역사적으로 베트남에서도 쿠바에서도 힘의 우세가 확실한 상대로 유효한 수단이었습니다. 암살과 자살폭탄 등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민간인이 무슨 죄가 있길래 그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인 행위를 하나?라는 볼멘 목소리도 있을 것입니다.

 

이라크만이 아닌 중동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50여년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조차도 없었고, 학살과 구타, 고문이 일상화된 팔레스타인...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행위를 뒷받침해 온 미국... 아랍인들의 그들에 대한 적개심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번 이라크침략전에서도 그렇지만, 국제사회는 어떠한 제제도 하지 못했고, 반대로 그러한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악의 축(미국, 영국, 이스라엘)들을 동맹국으로, 혹은 세계의 리더국으로서 인정해왔습니다. 아랍인들에게 악마적인 정책을 일삼는 정치인을 선택한 그 나라의 국민들 또한 슬프게도 그들의 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라크인들에게 [평화]와 [민주주의], [재건]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몇겹으로 포장해도 중무장한 한국군은 그들을 침략한 미영국군과 별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한국인들도 이라크 혹은 아랍무장세력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중동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은 안전할까요? 한국에서 그들의 행위에 의해서 나의 부모, 형제 등이 사고를 당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원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X같은 정부가 내가 선택한, 혹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만 ... 이 세계가 미국과 그들의 특별한 동맹국들만의 것이 아닌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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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친일파다!! 난 친미파다!! 난 친이스라엘파다!! ...


 

 

1833 ; Oil on canvas ; 246 x 297 cm ; National Gallery, London

 

 

Paul Delaroche (1797~1856)의 [Execution of Lady Jane Grey]입니다.

 

동화 [거지왕자]의 모델이라고 말해지는 에드워드6세는 1553년 7월 6일 소년왕이라는 칭호를 뒤로 하고,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헨리8세는 유언장에 왕위계승 순서를 남겼습니다. 첫번째가 당연히 에드워드6세, 그 다음이 메리1세, 3번째는 엘리자베스1세, 4번째는 헨리7세의 증손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제인 그레이였습니다.

 

제인 그레이는 매우 총명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권력암투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녀와 에드워드6세의 결혼을 추진했던 토머스 시모어가 반역죄로 참수당한 후에, 노섬벌랜드의 공작인 존 더들리의 아들과 결혼을 합니다. 에드워드6세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 더들리는 왕을 설득해서 제인 그레이가 왕위계승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제인 그레이가 여왕이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종교의 대립때문이었습니다.

 

헨리8세는 자신의 이혼을 반대하는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국교회를 성립시켰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때문인지 메리1세는 카톨릭을 믿었습니다. 이런 메리1세에 대한 위기감으로 더들리로 대표되는 국교회파들은 제인 그레이를 왕위계승자로서 점찍었던 것입니다.

 

1553년 7월 10일 에드워드6세의 죽음과 제인 그레이의 왕위계승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도 엘리자베스1세도 많은 귀족들도 메리1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제인 그레이는 왕위를 메리1세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와 더들리 등은 런던탑에 수감되게 되었습니다.

 

10월 1일 메리1세는 정식으로 왕위계승을 합니다. 이로서 헨리8세와 에드워드6세의 국교회와 메리1 세의 로마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대립이 영국을 피로 물들게 된 것입니다.

 

그림은 1554년 2월 19일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순백의 드레스는 아마도 그녀의 순결함과 결백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시녀들은 제인 그레이에 대한 국민들의 동정심을, 그리고 붉은 바지와 붉은 모자를 한 망나니는 [피의 메리]시대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메리1세는 제인 그레이에게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다면 사면해주겠다고 했지만, 제인 그레이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대립의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의 제인 그레이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거만하고, 왕위에 대한 집착이 강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무뇌아적인 인형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이 그림에는 제인 그레이가 아닌 16살이라는 나이에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소녀의 모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일전에 [고종 독살 입증 문건 발견]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클릭해서 읽어 본 순간 제목과는 다른 내용이어서 상당히 황당했습니다. 기사 내용을 보면, 단지 고종황제의 딸인 덕혜옹주가 친한 일본인 여성에게 자신이 듣거나 본 내용을 이야기 한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듣거나 본 것이라고 한 것은 덕혜옹주가 직접 보거나 들었다는 내용은 없지만,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 다.

 

기사 제목에서는 입증문건발견이라고 되어있지만, 기사 내용상은 고종황제 독살에 관한 문건, 혹은 덕혜옹주의 증언에 관한 기록 발견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북한과 일본은 정권과 극우주의자의 좋은 먹이감이 되어왔습니다. 자신들의 비리나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 두나라에 관한 글들이 언론에 보도되어서 극일, 반공이라는 자기최면의 축제를 벌려왔습니다.

 

최근에는 북한에 대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유효한 코드입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이모연예인의 [일본군 성노예]를 주제로 한 누드파문과 북한의 리상옥할머니의 증언, 일본 극우주의자들에 의한 독도상륙작전, 일제의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일본내 판결과 망언 등이 있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매우 안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모연예인의 누드집파문 때에도 쓴 적이 있지만, 제 자신은 일본의 만행과 행위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제 자신의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고생하신 분들을 사회적으로 왕따를 시킨 사람들이 누구일까? 지금도 여전히 성매매 여성들의 폭로와 성폭력 피해자 등에 대한 언어적 폭력 등을 보면서, 극일이니 반일이니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신적 건강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으로만 보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복장과 행실 등을 이유로, 혹은 그들의 직업을 이유로, 혹은 남성이니까 한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는 사회적 관대함 ... 이런 생각들이 제 머리 속에도 있으면서도 제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좋은 꺼리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일본제국주의와 이스라엘, 미국 등의 행위에 대해서 졸라 씹으면서 우리들의 주장은 어떤 것일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으로 대마도상륙을 실행하려는 극우단체, 공공연하게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땅의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 ... 우리 안에도 침략자의 근성은 없는 것일까? 베트남파병과 이라크의 파병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야기하거나 약소국의 비애로서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 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일제에 대한 만행과 미국과 이스라엘 등의 불량국가들의 행위에 대한 반대를 위해서는 우리 주변부터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제 자신도 저의 어려움만 생각했지 주위의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무엇 하나 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야학교실과 몸이 불편한 분들을 위한 시설 등에서 고민을 해 본 기억이 저 멀리 까마득한 것 같습니다. 내 안의 친일과 반인류성은 거창한 구호나 그때 그때의 배설이 아닌 작은 실천부터 가능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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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dirty ... .. .


 

 

1849-50 ; Oil on canvas, 314 x 663 cm (10" 3 1/2" x 21' 9"); Musee d'Orsay, Paris

 

 

회화를 허공에서 대지에 두발로 서게 한 Gustave Courbet(1819~77)의 [A Burial at Ornans]입니다.

 

그는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입니다. 그는 당시 회화계를 지배하고 있던 회화의 이상화를 거부하면서, 보이는 것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리얼리즘을 확립시켰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회화라고 하면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좀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을 거부하면서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 쿠르베였습니다. 당연히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위의 그림이 루브르박물관에 들어 갈 때에는, [이 그림이 루브르에 들어가는 것은 모든 미학에 대한 부정]이라고 까지 말해질 정도로 강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르낭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장례식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에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림에 영웅이 등장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평범한 농촌 사람들만이 등장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획기적인 혁명적인 그림이 된 것입니다.

 

6m가 넘는 거대한 화폭에 영웅의 등장도, 게다가 죽은 영혼을 위한 신의 은총도 없는, 오로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의 얼뜨기들로 가득 찬 그림. 이상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은 현실에 있다는 것을 이 그림으로 말없이 표현한 것은 아닐까싶습니다.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그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

 

이러한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에 의해, 당시의 현실을 가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으로 예술을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파엘을 따르지말라. 라파엘은 한명으로 족하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그의 말들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는 생명력이, 사조로서는 짧은 시기를 장식했을 뿐인 사실주의가, 그 후의 예술과 사회 등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1998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시작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40여개의 상을 수상한 [Life is Beautiful]. 이 영화의 제목(이탈리아 원어로는 La Vita E Bella)은 Leon Trotskii의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의 세대로 하여금 인생에서 악과 억압과 폭력을 일소하고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라.]에서 나온 말이다.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 또는 방랑자로서 떠돌다가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이 말을, 감독인 로베르토 베니니는 온갖 고난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워 나가는 인물을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다.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 말의 이탈리아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광풍처럼 몰아쳐서 암흑과 절망만이 존재하던 때였다. 영화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지방도시인 아르조(Arezzo)를 배경으로 한 전반부와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서의 이야기가 후반부이다.

 

 

전반부의 내용은 유태인 웨이터인 귀도가 교사인 도라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그 후,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도라는 귀도와의 순수하고 운명적인 사랑의 이끌림에 의해 마을을 도망쳐서 결혼한다. 귀도는 책방을 하면서 아들 조슈아가 태어나는 등의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파시즘의 광풍은 몰아친다.

 

한마디로 이탈리아 로맨틱 코메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명대사로도 유명한 귀도가 도라와 만났을 때, 말한 [Buon giorno, principessa!(안녕하세요, 공주님!)]는 지금도 귀가를 울린다.

 

후반부는 파시즘의 광기에 휩쓸려서 귀도와 조슈아가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고, 남은 도라는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서 뒤따라서 간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 조슈아를 위해서, 귀도는 이것은 게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독일군들은 악역을 배정받았을 뿐이고, 그들이 배당하는 과제들을 통과해서, 득점이 더해져서 1000점이 되면, 부상으로 탱크를 주고, 여기서 나가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고 절망적인 수용소 생활 속에서 희망을 아들인 조슈아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

 

이 게임이라는 말에 의해서 유태인 강제 수용소는 하나의 희극의 무대가 된다. 마지막에 가족과 탈출하려다가 잡혀서 끌려가던 귀도가 자신을 숨어서 보고 있을 아들을 위해서 우스꽝스런 장난감병정 흉내를 내기도 한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희극적인 요소들 ... .. . 이런 형식은 고전적인 희극에서 흔히 접하던 것이다. 약자가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강자를 엿먹이는 장면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텅빈 수용소에서 1등이 누구인지 보려는 조슈아에게 다가오는 연합군의 탱크. 어머니와의 상봉, 그리고 탱크에 올라서서 [게임에서 이겼다!]고 외치는 조슈아의 목소리...

 

 

어쨋든,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 버금 갈 정도로 파시즘에 대한 강한 풍자를 엿 볼 수 있는 영화이다. 또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희망을 부성애-또는 가족애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희망은 현실과의 깊은 괴리를 가지고 있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영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 등의 파시즘으로부터 인간들의 [희망]을 실현시키는 것은 연합군, 즉 미국이다.

 

트로츠키가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을 한 것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인 전쟁에 의해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지만, 자신의 신념은 더욱 더 확고하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언제나 [희망]은 미국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일 뿐, 현실에서의 [희망]은 아직 요원할 뿐이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과 그들의 특별한 동맹국들의 행위들을 보면서, [Life is Beautiful]은 이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아득한 말이 되어 가는 것 같다.

 

 

Life is dirty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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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기상이변에 대한 망상 ...


 

 

1823-29 ; Color woodcut, 10 x 15 in;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깊은 문화적 충격과 영향을 준 일본의 浮世繪(UKIYOE). 그 대표적인 인물인 葛飾北齊(Katusika Hokusai)의 富嶽三十六景 神奈川沖浪裏(The Great Wave Off Kanagawa From "Thirty-six Views of Mount Fuji")입니다.

 

19세기의 회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오리엔탈리즘과 위에서 말한 일본의 회화-즉, 우키요에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아랍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신고전주의, 로망파를 거쳐서 인상파에게까지 영향을 주었지만, 그 영향은 어디까지나 주제와 모티브로 회화표현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본회화-우키요에는 새로운 회화표현을 추구하고 있던 인상파화가들-Edouard Manet, Claude Monet, Edgar Degas, Vincent van Gogh, Paul Gauguin 등에게 단순한 이국취향이 아닌 구도와 주제의 절단 등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일본의 후지산을 테머로 한 이 시리즈는 원래 36장으로 예정되었지만, 당시에 인기가 있어서 추가되어 총 46장으로 되었습니다. 인기있는 드라마가 연장방송하듯이 돈 앞에는 예술이라는 것도 맥을 못추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작은 배들을 덮치려는 장면으로, 파도와 파도 사이로 후지산이 보입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배.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투쟁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듯 우뚯 서 있는 후지산.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이 그림의 진가는 회화 구도의 기발함보다는 자유로운 선을 추구하는 호쿠사이의 풍경화가 가지는 특징과 바다의 농담의 차이, 낮은 곳에 시점을 두는 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멋대로 지껄임

 

범세계적인 기상이변이 최근 몇년동안 중요한 뉴스의 하나가 되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폭우와 가뭄, 혹은 폭설, 폭서 등등이 지구촌 곳곳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고, 그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최근에는 영화 [투모로우]에 의해서 지구 온난화와 환경, 그리고 미국의 부시정권을 공격할 수 있는 꺼리가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구 온난화는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에 의한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와 마구잡이식 개발의 영향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몇가지 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지구가 온난화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인양 알려지고 있지만, 70년대까지는 빙하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대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온난화와 빙하기는 양립할 수 없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리고, 온난화때문에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다. 또한, 남극의 온존층 파괴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운 점이 많이 있다. 그 때의 데이터 이후로는 새로운 데이터를 본 적이 없고, 게다가 온존층 자체의 현상인지 어떤지도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사실상 현대적인 의미의 기상관측이 행해진 것은 세계기상기구가 설립된 것이 1950년이므로 아직 50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나 퇴적물 등으로 과거의 기상을 예측하는 방법도 있지만, 제대로된 기상관측을 위해서는 최소한 70년정도의 데이터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정도라고 한다면, 겨우 50여년의 데이터로 지금의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기상이변이라고 딱지붙이기에는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구는 지금까지 극이동이 3차례인가 몇차례 있었다고 하는데 그 극이동현상이 일어나는 전조일지도 모르고, 지구도 태양을 돌고, 태양도 어딘가를 돌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도 돌고 있다. 그 경로 어딘가에 기상이변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들이 갖추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온난화논의의 이면에는 무엇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너무 음모론에 심취해서 그런지 그런 생각들이 든다. 상식적으로 빙하기가 당연한데도 어느 순간부터 온난화 타령만이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 실제로 지구 온난화가 주창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이다. 70년대를 대표하는 사건은 아마도 [오일쇼크]일 것이다. 오일쇼크와 함께 지구상의 석유는 30년 후에는 고갈된다는 예측이 난무하면서, 대체에너지로서 국가적인 지원 아래 발전한 것이 원자력발전이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서 이산화탄소를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에너지인 석유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만, 원자력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이상적인 대체 에너지라고 선전을 해왔다. 그렇지만, 사실 우라늄을 가공하는 단계에서 화력발전 이상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있다. 또한, 원자력발전은 핵무기와 관련된 군사산업이다. 핵의 평화적 이용을 내세워도 군사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다.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에 대한 반대가 있을 때마다, 혹은 원자력발전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지구온난화]와 [30년 후 석유고갈]이 거론되고 있다는 의심은 지울 수가 없다.

 

지구온난화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인데도,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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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영화 속의 편견들


 

 

1889 ; Oil on canvas, 60 x 49 cm;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Vincent van Gogh(1853~1890)의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입니다.

 

고흐의 그림에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흐도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그것은 모델을 구할 필요가 없고, 또한 생계유지가 힘들었던 그로서는 모델료가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자화상의 고흐는 귀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습니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창녀에게 자신의 귀를 잘라서 사랑의 증표로 줬다던지, 함께 살고 있던 고갱과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크게 다투고 나서 잘랐다라고 합니다. 아니면, 평생을 괴롭혀 온 이명 때문이거나 정신 분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고흐는 자신을 속박하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학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감옥(무지, 편견 등)을 없애는 게 뭔지 아니? 깊고 참된 사랑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가치이며, 그 마술적 힘이 감옥의 문을 열어준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다.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곳에서 인생도 다시 태어난다.

 

귀를 자르고 난 후의 아픔보다도 두 눈에 번뜩이는 녹색톤 ... 그것은 그의 광기일 것입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광기는 그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선과 속임수를 모르는 그의 순수함 영혼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거짓의 벽에 부딪쳐서, 무너져 가는 자신의 내면을 자화상을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는 것은 아닌지 ... .. .

 

자화상은 화가 자신의 내면과의 만남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숨김없이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본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이 사람은 강렬하게 느꼈고, 섬세한 감수성이 나타났다고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 나 자신이 저속하다고 부르는 특징들에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 .. .

 

 



 

네 멋대로 지껄임

 

몇년 전에 읽었던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랍계 미국인이 영화 출연 면접에서 단 5초만에 합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단 5초만의 합격, 그것은 그의 외모가 테러리스트풍(?)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레바논의 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헐리웃영화-무성영화를 포함해서 909편의 영화를 조사한 결과, 아랍에 대한 편견없이 만들어진 것은 단 12편뿐이었다고 합니다.

 

곰곰히 지금까지 본 헐리웃영화들을 생각해 보면, 아랍이라는 이미지는 빈곤과 인명을 경시하는 테러리스트 등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액션영화의 경우,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는 아랍계로, 그것도 민간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상하거나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존재로만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랍이란 이미지는 제 자신도 사막이라던지 너무 더워서 한낮에는 더위를 피해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식으로 알게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인간미 없는 교조적인 사회 ... .. .

 

그리고, 예전에 상영되었던 [Once Upon a Time in Mexico]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남미 역시 사회적 정치적으로 혼란함과 빈곤 등이 주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중남미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책임은 대부분은 미국과 미국의 거대 기업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남미인들의 무능력함이 원인인 것처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중남미가 배경이 아니더라도, 헐리웃영화에서 히스패닉계는 대부분 무능하고 게으른 사회의 낙오자들로 연출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의 헐리웃 진출이 이루어져서 나름대로(?) 흑인에 대한 이미지는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문율처럼 흑인과 백인의 사랑은 없습니다. 최근에 이 불문율도 무너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 .. .

 

냉전시대에는 헐리웃영화에서 주된 악역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냉전 종결 후, 지금은 아랍과 중남미, 그리고 북한 등입니다. 몇년 전 한국에서도 큰 반발을 받은 [007 어나이더데이]에서, 헐리웃-혹은 미국이 바라보는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일찍부터 유럽에 큰 영향을 준 일본에 대한 이미지 역시 돈밖에 모르는 일벌레나 잔혹함이나 문화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헐리웃은 어떤 의미에서 상황과 시대에 따라서 희생양으로서의 악의 존재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초창기의 흑인, 2차대전에서의 독일, 냉전시대의 소련, 그리고 80년대의 경제상황에 따른 일본, 최근에는 아랍 ... .. .

 

이런 영화 속의 인종 차별이 무슨 문제가 될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헐리웃영화는 이제 미국을 벗어나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왜곡된 인종차별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헐리웃영화를 통해 세계인들은 자신들이 잘 모르는 인종에 대해서 무의식중에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9.11 동시 테러사건 이후, 한국에서도 아랍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아랍인 = 테러리스트라는 등식이 그전부터 보아 온 영화 속 이미지와 현실의 사건을 통해서 고착화된 것입니다.

 

예전에 안면이 있던 아프리카 친구와 대화 중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그렇지만, 솔직히 아프리카-혹은, 아프리카인이라고 하면 창을 들고 풀이나 나뭇잎으로 팬티 비슷무리한 것으로 특정 부위만을 가리고 사바나나 밀림 등에서 사냥하는 모습을 누구나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 말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그러한 이미지의 인구는 전체 아프리카 인구에서 극소수에 불구하고 대부분은 농경에 종사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고정된 이미지도 TV에서의 동물의 왕국이나 영화 등에 의해서 원시인과 같은 존재로 확대 재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헐리웃영화에서 문명인으로서의 인간적인 존재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백인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에 의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인간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구조를 헐리웃영화가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헐리웃은 백인과 백인에 의해 교육받은 극소수의 피부색이 다른 사람만이 지구라는 혹성에 사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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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드무비]를 보고 ...


 

 

1893; Casein/waxed crayon and tempera on paper (cardboard), 91 x 73.5 cm (35 7/8 x 29"); Nasjonalgalleriet (National Gallery), Oslo

 

 

초등학교 교재 등에서 자주 접했던 Edvard Munch의 [The Scream (or The Cry)]입니다.

 

뭉크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 사랑에 대한 고뇌 등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막연한 느낌들을 테머로 회화로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유럽의 세기말을 대표하는 한 사람입니다.

 

고독, 병과 죽음, egoism, 性에 대한 고민 등, 누구나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피하고 싶어 하는 문제들을 뭉크는 어떤 의미에서 노골적으로 회피나 애매함 없이 정면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민족과 시대를 넘어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주제로 표현한 것에 뭉크가 가지는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자신의 침실이나 거실 등에 장식해 두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보고 있으면 가슴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답답함은 불안때문인지 공포때문일지 모르겠지만 ... .. .

 

바다위에 설치된 다리 위에 귀를 막고 절규하고 있는 사람과 그 뒤의 뒷모습만 보이는 두 사람. 요동치듯이 묘사된 노을진 하늘, 강 위의 배 두척,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피요르도...

 

이 작품을 그리기 1년전에 작품에 뭉크 본인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해가 저물고 있던 거리를 나는 친구들과 걷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어 갔다. 나는 멈춰서서, 피곤한 몸을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른 피요르도, 거리 위의 구름이 피나 불꽃처럼 옆으로 퍼져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강렬한 불안에 몸을 떨면서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크고 강혈한 영원한 소리를 들었다.

 

즉, 이 그림에서의 절규는 그의 절규가 아닌 것입니다. 자연의 절규를 그가 들었던 것입니다.

 

공포를 느낄만큼 조용함에 따른 불안. 아마도 뭉크는 이 조용한 풍경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자연의 절규를 들었는 지도 모릅니다. 귀를 막고 모든 소리를 밀폐하고 자연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귀에도 처음으로 자연의 절규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김인식감독의 [로드무비]를 봤다. 기대밖의 진정으로 찬사를 보낼 만큼의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괜찮은 영화였다. 분명히 이 영화도 상업성을 목표로 만들어 졌지만, 그 완성도의 놀라움은 상업성이란 딱지를 떼기에 충분했다.

 

일반적으로 [로드 무비]라는 말은 영화의 장르를 의미한다. 길에 관한 영화가 [로드무비]인 것이다. 여기에서의 길이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Thelma & Louise]에서는 자아의 발견으로, [Simple Men]에서는 가족제도의 허상을, [Drugstore Cowboy]에서는 한 인간의 성장을 의미한다.

 

영화 [로드무비]에서는 길이 소통을 의미한다.

 

무엇에 대한 소통인가? 바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형식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이성간의 그것도 남자가 연상이고 여자가 연하인 언제나 정형화된 형상을 쉽게 떠 올린다. 하지만 주위를 곰곰히 살펴 보면 의외로 소수의 형태이지만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 미성년자와의 사랑, 혹은 해외 토픽으로 자주 나오는 사제간의 사랑 등등 ... .. . 이 영화는 그러한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경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동성간의 사랑을 주제로 내세운다.

 

동성애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의 반응은 어떤 혐오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아마도 동성애에 대한 선입관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사회의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이성애자들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동성애문제도 결국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에 관한 것이다.

 

UN의 인권위원회의 선언과 남아프카공화국의 헌법 등에는, 인간이 이성 혹은 동성의 어느 쪽을 연애의 대상으로 하는가에 의해서(성적 지향의 차이에 의해서) 차별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서구의 동성애자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의 사회에 스스로 맞춰서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권리 등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성에 눈 뜨는 10대의 경우에는 자신이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동성애자임을 알게 될 경우, 강한 거부감과 심한 고독감을 느낀다고 한다. 일전에 있었던 10대 동성애자의 자살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다.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의 빈곤함이, 또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일방적인 편가르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억제하거나, 혹은 숨기고 살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또 한, 영화 [로드무비]는 동성애 외에도 우리 사회의 경직성이 가지는 소통의 부재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일주로 대표되는 몸을 파는 여자들, 거리의 부랑자 등과의 사회적 소통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민석(정형기)이 자살하기 전에 말들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계속 나는 길 위에서 생활했다. 이 길 위를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희망이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뿐이었다. 영화에선 자살 장면이 자주 나온다. 사회와의 소통의 부재에 따른 일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자살인 것이다.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가난도 육체적 힘겨움도 아니다. 사회와의 단절에 따른 불안과 절망을 이기지 못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로드무비]는 개인과 개인간, 개인과 사회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국도를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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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에 대한 잡생각들 ...


 

 

1457-60 ; Wood, 76 x 96 cm (30 x 38 in); Musee du Louvre, Paris

 

 

Andrea Mantegna의 [Calvary]입니다.

 

Mantegna는 르네상스 초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파도바파의 거장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장엄한 구도, 조형성이 강한 해부학적 인체 표현과 소실점을 밑으로 낮춘 독특한 원근법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를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구분시키는 중요한 것은 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환각기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환각기법의 사용에 의해 표현의 대상을 더욱 더 돋보이게 표현함으로서, 보는 사람들에게 대상을 마주 대하고 있는 듯한 생동감과 장중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역삼각형 구도를 채택함으로서, 보는 사람들에게 강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세밀하게 표현된 인물들의 표정과 길게 뒤로 이어진 원근법 등에 의해 그림에 생동감과 장엄함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병사들을 조각적으로 표현함으로서 강한 엄격함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우러르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층 더 강한 비통감과 긴장감을 가지게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왜 중앙의 그리스도보다는 양쪽의 죄인들에게 눈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양쪽의 죄인 중의 하나가 사반일지도, 혹은 아하스 페레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하늘의 나라보다는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구현되기를 바라는 - 어떻게 보면, 매우 세속의 때가 잔득 묻어 있기 때문일지도 ... .. . 모르겠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 의견이 대립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찬성쪽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이유로는,
1) 흉악범은 그의 목숨으로서 그 죄값을 치르야 한다.
2) 사형제도를 폐지할 경우, 그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해서
3) 사형제도가 폐지될 경우, 흉악한 범죄가 늘어날 것이다(사형이라는 강력한 형벌에 의해서 범죄가 예방된다).
4) 재범의 우려가 높다 등이다.

 

하지만, 강한 처벌이 범죄억제 효과가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므로, 사형제도가 가지는 의미는, 피해자를 대신해서 흉악범을 사회로부터 말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한 사회적 보복인 이 제도가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흉악범에게는 강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의견은 오로지 범죄의 책임은 그것을 행한 개인에게만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실제로 대부분의 범죄의 내적인 원인은 그 사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사회적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는한 ... .. .

 

그리고, 강한 처벌만을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의 문제점들을 외면하고 단순히 그 개인의 인성 등에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강한 처벌은 강력한 경찰국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한 움직임에 의해 개인의 자유 등이 무시되고, 획일화된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될 위험성도 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의 감정은 무시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우선 매스컴의 선정적인 보도의 규제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 제도의 확립 등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 합법적인 살인은, 사형과 전쟁뿐이다. 둘 다 국가가 강제하는 살인 행위이면서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국가에 의한 살인 행위는 일어나고 있고, 게다가 그것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얼마나 사형이 국가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용되어 왔는가? 사형과 전쟁은 국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이용되어 왔다. 사형제도의 폐지는 무엇보다도 자의적인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한 국가권력에 의한 살인행위에 대한 폐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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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


 

 

1814 ; Oil on canvas, 104 3/4 x 136 in ; Museo del Prado, Madrid

 

 

Franceso Jose de Goya(1746-1828)의 [The Shootings of May Third 1808]입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거장인 고야. 원래는 초상화와 인물화를 그렸지만, 나폴레옹의 스페인침공에 의해 유명한 이 그림과 [전쟁의 참화]라는 판화를 연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원래 고야는 자신의 출세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궁정화가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이 때, 고야는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에서 화가로서 최고의 지위를 가졌을 때에 고열로 인해 목숨은 건지지만, 청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이라는 시대적 흐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림은 포로로 잡힌 스페인인들을 학살하는 나폴레옹의 군대의 모습입니다. 총부리 앞에서 절규하는 사람,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두손으로 가리는 사람, 애절한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했을 때, 프랑스 군대에 대항한 마드리드의 시민들을 끌고 가서 총살하는 장면을 통해 고야는 애국심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잔인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강력한 화력 등으로 스페인을 점령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정신을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죽어 있는 시체들과 양팔을 크게 펼친 사람과 죽음의 공포 앞의 다양한 포즈의 사람들을 통해서, 고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시대의 변화가 한 개인의 광기가 되어 버린 것을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분의 전쟁도 그것이 반인간적이며 어떠한 정당성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동물인가를,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서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지금 시점에도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인간학살이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애국심 :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국가에 대하여 헌신하려는 의식/신념(출처 : naver).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고 하면 왠지 모르게 망설여지게 됩니다. [애국심]이란 단어를 접하고 들은 적은 많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받으면, 이것이 [애국심]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각자에 따라서 애국심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던지, 스포츠 등에서 한국과 다른 나라의 경기에서 한국팀을 열성적으로 응원한다던지, 세계적인 화가나 과학자 등이 한국 사람인 경우에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등을 [애국심]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애국심]이란 단어에서 국수주의와 군국주의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한국의 근대사에서 [애국심]은 하나의 국가주의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 혹은 국가에 대한 경례 등을 통해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여전히 군사문화와 국가주의의 잔재들이 남아서 활개를 치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에, 최근 냉전의 종식과 함께 [국익]이라는 이름의 [애국심]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사회를 냉전시대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별되었지만, 지금은 무한 경쟁시대라는 구호 아래 국가의 이익 추구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은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베트남에, 국제경쟁시대의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에 동참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이라고 칭한 법이 악법인지 어떤지를 떠나서, 악법임을 알면서도 법을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판단 역시 개개인의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악법인 것을 알지만 법을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그 악법을 바꾸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결정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 역시 다양한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국가의 선택에 무조건적으로 국민-혹은, 각 개인이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에 대항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무조건적인 충성이 아닌 [자유]와 [평등], [공존] 등을 우선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구에 하나의 정부가 있다면, [애국심]이란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애국심]이나 [국익]이라는 제로섬논리-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는 죽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 [인류애]를 추구하는 세계로의 발상의 전환은 불가능한 것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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