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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dirty ... .. .


 

 

1849-50 ; Oil on canvas, 314 x 663 cm (10" 3 1/2" x 21' 9"); Musee d'Orsay, Paris

 

 

회화를 허공에서 대지에 두발로 서게 한 Gustave Courbet(1819~77)의 [A Burial at Ornans]입니다.

 

그는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입니다. 그는 당시 회화계를 지배하고 있던 회화의 이상화를 거부하면서, 보이는 것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리얼리즘을 확립시켰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회화라고 하면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좀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을 거부하면서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 쿠르베였습니다. 당연히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위의 그림이 루브르박물관에 들어 갈 때에는, [이 그림이 루브르에 들어가는 것은 모든 미학에 대한 부정]이라고 까지 말해질 정도로 강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르낭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장례식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에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림에 영웅이 등장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평범한 농촌 사람들만이 등장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획기적인 혁명적인 그림이 된 것입니다.

 

6m가 넘는 거대한 화폭에 영웅의 등장도, 게다가 죽은 영혼을 위한 신의 은총도 없는, 오로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의 얼뜨기들로 가득 찬 그림. 이상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은 현실에 있다는 것을 이 그림으로 말없이 표현한 것은 아닐까싶습니다.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그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

 

이러한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에 의해, 당시의 현실을 가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으로 예술을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파엘을 따르지말라. 라파엘은 한명으로 족하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그의 말들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는 생명력이, 사조로서는 짧은 시기를 장식했을 뿐인 사실주의가, 그 후의 예술과 사회 등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1998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시작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40여개의 상을 수상한 [Life is Beautiful]. 이 영화의 제목(이탈리아 원어로는 La Vita E Bella)은 Leon Trotskii의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의 세대로 하여금 인생에서 악과 억압과 폭력을 일소하고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라.]에서 나온 말이다.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 또는 방랑자로서 떠돌다가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이 말을, 감독인 로베르토 베니니는 온갖 고난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워 나가는 인물을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다.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 말의 이탈리아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광풍처럼 몰아쳐서 암흑과 절망만이 존재하던 때였다. 영화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지방도시인 아르조(Arezzo)를 배경으로 한 전반부와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서의 이야기가 후반부이다.

 

 

전반부의 내용은 유태인 웨이터인 귀도가 교사인 도라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그 후,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도라는 귀도와의 순수하고 운명적인 사랑의 이끌림에 의해 마을을 도망쳐서 결혼한다. 귀도는 책방을 하면서 아들 조슈아가 태어나는 등의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파시즘의 광풍은 몰아친다.

 

한마디로 이탈리아 로맨틱 코메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명대사로도 유명한 귀도가 도라와 만났을 때, 말한 [Buon giorno, principessa!(안녕하세요, 공주님!)]는 지금도 귀가를 울린다.

 

후반부는 파시즘의 광기에 휩쓸려서 귀도와 조슈아가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고, 남은 도라는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서 뒤따라서 간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 조슈아를 위해서, 귀도는 이것은 게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독일군들은 악역을 배정받았을 뿐이고, 그들이 배당하는 과제들을 통과해서, 득점이 더해져서 1000점이 되면, 부상으로 탱크를 주고, 여기서 나가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고 절망적인 수용소 생활 속에서 희망을 아들인 조슈아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

 

이 게임이라는 말에 의해서 유태인 강제 수용소는 하나의 희극의 무대가 된다. 마지막에 가족과 탈출하려다가 잡혀서 끌려가던 귀도가 자신을 숨어서 보고 있을 아들을 위해서 우스꽝스런 장난감병정 흉내를 내기도 한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희극적인 요소들 ... .. . 이런 형식은 고전적인 희극에서 흔히 접하던 것이다. 약자가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강자를 엿먹이는 장면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텅빈 수용소에서 1등이 누구인지 보려는 조슈아에게 다가오는 연합군의 탱크. 어머니와의 상봉, 그리고 탱크에 올라서서 [게임에서 이겼다!]고 외치는 조슈아의 목소리...

 

 

어쨋든,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 버금 갈 정도로 파시즘에 대한 강한 풍자를 엿 볼 수 있는 영화이다. 또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희망을 부성애-또는 가족애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희망은 현실과의 깊은 괴리를 가지고 있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영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 등의 파시즘으로부터 인간들의 [희망]을 실현시키는 것은 연합군, 즉 미국이다.

 

트로츠키가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을 한 것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인 전쟁에 의해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지만, 자신의 신념은 더욱 더 확고하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언제나 [희망]은 미국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일 뿐, 현실에서의 [희망]은 아직 요원할 뿐이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과 그들의 특별한 동맹국들의 행위들을 보면서, [Life is Beautiful]은 이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아득한 말이 되어 가는 것 같다.

 

 

Life is dirty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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