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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친일파다!! 난 친미파다!! 난 친이스라엘파다!! ...


 

 

1833 ; Oil on canvas ; 246 x 297 cm ; National Gallery, London

 

 

Paul Delaroche (1797~1856)의 [Execution of Lady Jane Grey]입니다.

 

동화 [거지왕자]의 모델이라고 말해지는 에드워드6세는 1553년 7월 6일 소년왕이라는 칭호를 뒤로 하고,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헨리8세는 유언장에 왕위계승 순서를 남겼습니다. 첫번째가 당연히 에드워드6세, 그 다음이 메리1세, 3번째는 엘리자베스1세, 4번째는 헨리7세의 증손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제인 그레이였습니다.

 

제인 그레이는 매우 총명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권력암투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녀와 에드워드6세의 결혼을 추진했던 토머스 시모어가 반역죄로 참수당한 후에, 노섬벌랜드의 공작인 존 더들리의 아들과 결혼을 합니다. 에드워드6세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 더들리는 왕을 설득해서 제인 그레이가 왕위계승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제인 그레이가 여왕이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종교의 대립때문이었습니다.

 

헨리8세는 자신의 이혼을 반대하는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국교회를 성립시켰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때문인지 메리1세는 카톨릭을 믿었습니다. 이런 메리1세에 대한 위기감으로 더들리로 대표되는 국교회파들은 제인 그레이를 왕위계승자로서 점찍었던 것입니다.

 

1553년 7월 10일 에드워드6세의 죽음과 제인 그레이의 왕위계승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도 엘리자베스1세도 많은 귀족들도 메리1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제인 그레이는 왕위를 메리1세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와 더들리 등은 런던탑에 수감되게 되었습니다.

 

10월 1일 메리1세는 정식으로 왕위계승을 합니다. 이로서 헨리8세와 에드워드6세의 국교회와 메리1 세의 로마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대립이 영국을 피로 물들게 된 것입니다.

 

그림은 1554년 2월 19일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순백의 드레스는 아마도 그녀의 순결함과 결백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시녀들은 제인 그레이에 대한 국민들의 동정심을, 그리고 붉은 바지와 붉은 모자를 한 망나니는 [피의 메리]시대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메리1세는 제인 그레이에게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다면 사면해주겠다고 했지만, 제인 그레이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대립의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의 제인 그레이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거만하고, 왕위에 대한 집착이 강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무뇌아적인 인형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이 그림에는 제인 그레이가 아닌 16살이라는 나이에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소녀의 모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일전에 [고종 독살 입증 문건 발견]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클릭해서 읽어 본 순간 제목과는 다른 내용이어서 상당히 황당했습니다. 기사 내용을 보면, 단지 고종황제의 딸인 덕혜옹주가 친한 일본인 여성에게 자신이 듣거나 본 내용을 이야기 한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듣거나 본 것이라고 한 것은 덕혜옹주가 직접 보거나 들었다는 내용은 없지만,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 다.

 

기사 제목에서는 입증문건발견이라고 되어있지만, 기사 내용상은 고종황제 독살에 관한 문건, 혹은 덕혜옹주의 증언에 관한 기록 발견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북한과 일본은 정권과 극우주의자의 좋은 먹이감이 되어왔습니다. 자신들의 비리나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 두나라에 관한 글들이 언론에 보도되어서 극일, 반공이라는 자기최면의 축제를 벌려왔습니다.

 

최근에는 북한에 대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유효한 코드입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이모연예인의 [일본군 성노예]를 주제로 한 누드파문과 북한의 리상옥할머니의 증언, 일본 극우주의자들에 의한 독도상륙작전, 일제의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일본내 판결과 망언 등이 있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매우 안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모연예인의 누드집파문 때에도 쓴 적이 있지만, 제 자신은 일본의 만행과 행위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제 자신의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고생하신 분들을 사회적으로 왕따를 시킨 사람들이 누구일까? 지금도 여전히 성매매 여성들의 폭로와 성폭력 피해자 등에 대한 언어적 폭력 등을 보면서, 극일이니 반일이니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신적 건강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으로만 보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복장과 행실 등을 이유로, 혹은 그들의 직업을 이유로, 혹은 남성이니까 한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는 사회적 관대함 ... 이런 생각들이 제 머리 속에도 있으면서도 제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좋은 꺼리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일본제국주의와 이스라엘, 미국 등의 행위에 대해서 졸라 씹으면서 우리들의 주장은 어떤 것일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으로 대마도상륙을 실행하려는 극우단체, 공공연하게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땅의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 ... 우리 안에도 침략자의 근성은 없는 것일까? 베트남파병과 이라크의 파병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야기하거나 약소국의 비애로서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 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일제에 대한 만행과 미국과 이스라엘 등의 불량국가들의 행위에 대한 반대를 위해서는 우리 주변부터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제 자신도 저의 어려움만 생각했지 주위의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무엇 하나 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야학교실과 몸이 불편한 분들을 위한 시설 등에서 고민을 해 본 기억이 저 멀리 까마득한 것 같습니다. 내 안의 친일과 반인류성은 거창한 구호나 그때 그때의 배설이 아닌 작은 실천부터 가능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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