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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02
    나눔에는 대한민국은 없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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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10/02
    나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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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라는 이름의 비상식


 

 

1537-41 ; 1450 x 1300 cm ; Sistine Chapel of the Vatican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의 [The Last Judgment]입니다.

 

몇년 전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도 종말론이 유행했고, 지금도 믿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기가 바뀌기 전인 1999년에는 프랑스의 예언계의 슈퍼스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공포에 숨 죽였던 것이 바로 어제였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최후의 심판]이나 [종말]이란 것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달에 인간이 갈 경우에 세계는 종말한다고 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갔을 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1999년이 아닌 999년에도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행해진다고 해서 사회적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시작한 것은 60세때부터라고 합니다. 완성했을 때에는 66세였다고 하니 그의 정력과 열정에 감탄할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4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미켈란젤로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실존인물들이 모델로서 이용되었듯이, 아마도 각각의 모델들이 미켈란젤로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는 전부 다 나체로 그려졌지만, 후에 비속한 표현이 금지되어서 미켈란젤로의 제자에 의해서 성기 부근이 덧그려졌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도 그려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우측에 있는 노인- 쩝 ... 이름난 성자인데 ... 이름을 까먹었습니다. -이 형벌로서 자신이 겉가죽이 벗겨졌습니다. 노인이 잡고 있는 겉가죽을 자세히 보면, 노인의 얼굴 형태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겉가죽이 미켈란젤로 자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자부시이 무지 강했던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이런 모습으로 그린 것은 자신의 위선과 나약함을 겸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겸허함과 성실함이 생각나는 그림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상식(常識) :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및 사려분별.

 

상식(常識) : 상식이란 깊은 고찰을 하지 않고서도 극히 자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식도 과거의 철학자들의 독창적인 사색과 고찰 결과 얻어진 것이 허다하다. 철학은 누구나 다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전복하고 처음부터 다시 고찰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얻어진 결과가 다시 상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기인(奇人)의 비상식적인 말이 오늘의 상식이 될 수 있고 과거의 상식이 오늘날에 와서는 진부하고 괴이한 비상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출처 : naver)

 

[상식]이라고하면 일반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보편성이 결여된 [상식]도 생활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식적인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상식]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나라에서는 [비상식]이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상식이라는 것도 문화적 종교적 환경적 등의 요소에 의해 통용되는 사회도 있지만, 그것이 비난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는 [상식]인 것이, 다른 사회(집단)의 눈에는 [비상식]으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회(집단)의 [상식]은 거기에 소속된 구성원들에게는 진실이고 올바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회(집단)의 눈으로 보고 그 [비상식]을 거론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그는 그 사회(집단)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비상식적인 그 사회(집단)만의 [상식]이 보편 타당한 것으로 그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대선자금을 둘러싼 문제들이 이슈가 된적이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후보의 당선이 유력했기 때문에, 아마도 천문학적인 기업 비자금이 선거자금으로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하긴 선거자금 문제에 있어서 때묻지 않은 정치인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국제경쟁력과 파업 등으로 인해 죽는 소리만 하던 대기업들이 100억이라는 로또복권의 대박의 금액을 꺼리낌없이 사용해왔습니다. 일반 국민들의 눈에는 정치권과 경제인들의 [비상식]에 놀라움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정치권과 경제권이라는 집단의 [상식]에 맞는 짓을 한 것에 불과하고, 일반 국민들의 시각에 불만을 느낄 것입니다.

 

정치권이 자신들의 [상식]이 사실은 [비상식]인 것을 깨닫지 않는 한, 어떠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도를 보완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더라도, 개혁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은 혁명적인 제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정치자금법을 개혁한다고 해도, 무수한 탁상공론 속에서 지금까지의 제도 속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논의가 도출되면서, 오히려 개악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상식]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소위 말하는 고문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몸 어딘가가 불편하게 되거나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과는 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각종 고문으로 병들게 하거나 죽이거나 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의 문제일까요? 사실 이것은 그들의 인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상식]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인도 그들에게는 [상식]적인 행동이었기에, 일말의 죄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각종 고문으로 인간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비상식]이었습니다.

 

[상식]의 무서운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상식]이란 것이 만들어지면, 그 구성원들은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비상식]적인 행위도 아무런 죄의식없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상식]과 [비상식]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사회(집단)의 눈으로 보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부안과 NEIS, 노동문제와 파병을 [상식]으로 믿는 참여라는 이름의 정부, 자신들의 기득권옹호를 위해서 한나라당과 탄핵을 시도했던 민주당의 [상식], 그리고 [몰상식]이 그들의 [상식]인 한나라당 ... 여전히 이 사회의 [상식]은 그들만의 [상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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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꿈 권하는 사회 ...


 

 

1851 ; Oil on canvas, 55.5 x 46 cm (21 7/8 x 18 1/8 in)

 

 

한국의 이발사들이 가장 좋아했던 화가인 Jean F. Millet(1814~1875)의 [The Walk to Work (Le Depart pour le Travail)]입니다.

 

밀레는 Gustave Courbet를 이어받아서, 도미에와 함께 사실주의 화풍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파리에 진출했지만, 경제적 곤란때문에 누드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밀레는 나부밖에 그리지 못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바르비종으로 이주하기 전에도 농민들의 삶을 그린 그림들이 있지만, 바르비종으로 옮긴 후, 그의 그림은 현실-그것도 힘든 노동과 빈곤에 허득이던 농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밀레의 그림에는 어떤 영웅도 역사적인 사건도 없지만, 이름 없는 농민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에게 노동의 아름다움을 전해 줍니다.

 

그림은 아침에 일하러 걸어 가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르비종의 거친 대지밖에 의지할 곳이 없지만, 농부의 굵은 다리와 힘찬 걸음에서 변혁의 주역으로서의 민중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 조잡한 의복과 신발, 그리고 왠지 보는 사람들을 우수에 젖게 만드는 분위기 연출은 당시-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만 - 농민들의 힘든 삶을 느끼게 해줍니다.

 

밀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노동이 보여주는 모습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신문기사를 보면, OO열풍, OO붐 등의 제목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전국민의 한방부르스 로또열풍, 미국의 서부시대를 능가하는 폐광에서 금 찾는 정선카지노, 재건축아파트붐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대상과 이름만이 바뀌었을 뿐 일확천금의 신화를 쫓는 한국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확천금 ...... 그 사전적인 의미는 힘들이지 않고 단번에 많은 재물을 모으는 것입니다. 이 흔들림없는 신화를 보고 있으면,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이라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농촌에서 성실하게 소작을 하는 영식이, 친구의 꾐에 빠져서 금을 찾기 위해서 소중한 콩밭을 파헤칩니다. 이 모습을 본 동네주민들이 만류해 보지만, 아내의 부추김도 있어서 더욱 더 금찾기에 열광합니다. 생활은 한층 더 궁핍해지고, 마침내 체력까지 고갈되어 인간 폐인이 됩니다. 이 모습을 본 친구는 책임추궁이 두려워서, 황토를 금맥이라고 속이고 그날밤에 도망칠 궁리를 합니다.

 

소설에서는 친구가 충동질하고 아내가 부추기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매스매디어가 국민들을 충동질하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추기고 있습니다.

 

CF에서 배용준이 나는 [부자아빠]를 꿈꾼다는 말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어서, [부자아빠]되는 법이라던지 [일확천금]에 성공하는 법 등의 글들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부자의 기준을 100억정도라고 (51%의) 어린이들이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100억 ...... 정말 꿈같은 금액입니다. 솔직히 소시민인 저같은 사람으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 액수입니다.

 

이 꿈같은 100억이라는 돈이, [일확천금]의 신화에서는 하늘 나라가 아닌 현실이 됩니다. 지방세수의 확대와 낙후된 지역발전 등의 슬로건 아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확천금]신화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하룻밤 꿈 잘 꾸어서 로또 당첨되면 100억+의 금액이 자신의 것이 된답니다. 생업을 포기하고 정선의 폐광의 슬롯머신을 도구 삼아 금을 찾는 사람들, 벼락맞기보다도 더 힘든 로또에 열중하는 소시민들, 은행 대출 등 모을 수 있는 돈을 전부 모아서 복부인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우리네 어머니와 아내들. 알게 모르게 [일확천금]교의 신도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노동은 신성한 것도, 땀 흘려서 일하는 것이 바보같고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 손에 로또와 칩을], 그리고 돼지꿈을 쫓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 그만큼 희망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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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일까?


 

 

1819 ; Oil on canvas, 491 x 716 cm ; Musee du Louvre, Paris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Theodore Gericault(1791~1824)의 [The Raft of Medusa]입니다.

 

그는 장르화에 뛰어났고, 동물-특히, 말을 좋아해서 속도감 있는 동작들을 잘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린 유화는 얼마 안되지만, 소묘가 그의 주종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의 소묘 그림은 http://www.ibiblio.org/wm/paint/auth/gericault/lithograph/ 에 가셔서 살펴 보십시요).

 

이 그림은 실제로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던 사건을 그린 것입니다.

 

1816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에 400여명의 군인과 이주민들을 실고 가던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고급장교와 선장 등의 선원들인 250여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지만, 일반 선원들과 이주민, 졸병들인 150여명은 뗏목 등을 만들어서 표류하게 되었다. 14일간의 표류 끝에 구조된 것은 단 15명뿐으로,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당시의 여론은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주류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생존자를 일일이 찾아가서 경험 등을 듣거나 시체안치소에서 시체들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메두사호에 관한 그림을 그릴 때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그림에서 보듯이 14일간의 표류 끝에 극적으로 배를 발견했을 때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그림 자체의 느낌은 암울하지만 지나가는 배를 발견해서 도움을 요청하면서 환호하는 장면입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고, 파도는 미친듯이 날뛰고, 돛은 강풍에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있는 장면을 통해, 그들이 14일간 경험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뗏목 앞쪽의 사람들은 배를 발견해서 옷을 흔들거나 일어나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머리에 터빈을 한 남자는 다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잡고 있습니다.

 

대각선을 이루는 그림의 구도와 명암법 등을 통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림에 극적인 요소까지 가미시켰지만, 출품 당시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것에 실망한 Gericault는 영국으로 건너 갔고, 거기에서 큰 평가를 받게 됩니다.

 

개인의 영웅적인 활동 등을 표현함으로서 낭만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흔히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습니다. 이 말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인생,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여러 가지 뉴스나 주위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면, 위의 이야기는 배부른 자의 푸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넘쳐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혹은 무관심한 시선을 자주 느낍니다.

 

청년실업과 명퇴, 카드빚 등 먹고 살기 위한 기본적인 생활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도 가지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생활의 문제를 떠나서도, 먹거리는 사소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환경 오염과 유전자 식품, 다이옥신 등 인간의 몸에 유해한 식품들이 넘쳐나는 도시생활에서 먹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습니다.

 

장수와 먹거리에 관한 프로그램은 이제 방송국에서는 기본적인 것이 되었고, 웰빙식품이니 요가니 하면서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일상을 넘어선 느낌도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건강과 장수를 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생활의 수준을 떠나서 공통된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가 하나의 계층(혹은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배고픔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에 대한 논쟁은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보는 느낌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아가 일상이 된 사람에게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배 부른 소크라테스들의 비생산적인 말장난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개혁이니 ceo형 시장이니 말들이 많지만, 그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생활고에 따른 생계형 자살과 범죄 등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과 동반(?)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사람에게 자식이나 부인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는 물음을 던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그 가장들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웰빙열풍에 따라서 츄리닝 하나도 따지는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들]과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중 어디에 속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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