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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과시적 비소비

 

 토르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1.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한 끼에 만 오천원 짜리, 어쩌면 그 이상의 식사를 하고, 재미없는 술자리를 이어가느라 바에 가서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마시면서 돈을 쓴다. 십 여 만원 짜리 공연을 보러 다니고 돈을 모아 명품 가방과 구두를 사는 데 골몰한다. 

 사람들은 그런 소비들이 자신을 수식할거라고 믿는다.

 대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같은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같은 명품 가방을 매고 구두를 신은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좇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벌어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어떤 종교 이상으로 굳건하고, 이 ‘자본교’ 안에서 소비는 장엄한 종교 의식이 되며, 이러한 의식을 통과하는 자만이 자신의 신성성을 과시할 수 있다. 과시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사진 찍어 싸이월드에 올려 투데이를 높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신성한 자를 좇는다.


 토르스타인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이다. 과시적 소비란, 사람들이 자신이 보다 우월하고 특수한 사회 계급에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재화나 서비스를 아낌없이 헛되게 쓰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재미있게도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겨울이면 낭비적으로 선물을 분배하며 벌이는 축제인 포틀레치에서 이야기를 끌어온다. 포틀래치 중 족장은 고급 물건들을 분배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능숙한 예법을 선보이며 과시한다. 타인이 가지지 못한 물건을 나누어 주며 물질적인 부를 과시하는 한편, 그 와중에 적절한 화술과 예법을 구사하고 타인의 찬사를 들으며 우월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베블런은 이러한 것이 유한계급의 축제나 연회 행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이것은 단순히 고급 취향과 명품 소비의 축제에서 물질적인 면을 넘어 그 속에 숨어있는 내포하는 초 물질적인 코드를 이용하여 소비자의 마음을 빼앗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싼 물건’ 자체에 열광하는 것은 무언가 속물 적이고 품위 없다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물건’을 이용하는 이유가 그것을 가지고 사용함으로서 생기는 ‘당당함, 자신감, 기품 등의 매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매력의 핵심이 구매력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구매력 있는 자들이 오늘날의 신성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2.

 최근 몸짱, 얼짱 열풍은 일면 웰빙과 결합하여 지칠 줄 모르는 가속을 자랑하며 퍼져나가고 있다. 잘 먹고 잘 살자 는 것이 웰빙의 기본 취지라면, 열심히 몸과 얼굴을 가꾸자는 것이 몸짱, 얼짱 열풍의 기본 취지일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태적으로 환경을 생각하여 우주의 순리와 이치를 따르는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웰빙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몸짱 얼짱 열풍에 대해서도 조금 더 복잡하고 보기 좋은 설명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웰빙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나무가 조금 있고 다른 주거환경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곳에 대도시에 위치하여, 거실에는 천연 성분 본드를 발라 나무 바닥재를 깔고 주방에는 인조 대리석을 깔은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사는 것, 유기적인 식물의 형태에서 모티브를 따 디자인된 자동차를 몰고 주위에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 가서 유기농 코너에 있는 완벽하게 씻어서 포장된 야채들을 사다가 집에서 이리 저리 연구를 해 보며 요리를 하는 것이다.

 베블런은 값비쌈과 아름다움은 점점 의도적으로 혼동되어,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 되지 않기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야생화를 불쾌하고 비위생적인 잡초로 여기는 한편, 본질적으로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다른 꽃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재배하며 즐기고, 좋은 환경에서 감식력을 기르는 교육을 받아 이른바 고급 취미를 갖게 된 꽃 애초가들은 그 비싼 꽃에 찬사를 보내곤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웰빙 열풍 역시 이와 다를 것이 없어서, 웰빙을 이야기 하면서, 결코 가난하여 단칸방에 살면서 화분에 야채와 채소를 재배해서 먹는 그런 삶, 혹은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부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상추나 배추, 콩나물보다는 로즈마리, 민트, 세이지, 레몬 버베나 등의 허브나 먼 이국으로부터 들여온 야채나 채소를 즐겨 다루며 값을 쳐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웰빙과 합쳐지는 몸짱 얼짱 열풍은 계속해서, 아마도 다음과 같이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저녁이면 헬스클럽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생약 성분을 넣어 만든 수제 비누와 허브 성분이 든 샴푸와 바디 워시로 목욕을 한 뒤, 집에 가서 아로마 테라피를 하며 요가를 하는 것이다. 그런 뒤 감자와 서 너 가지 곡물을 믹서로 갈고 꿀을 넣고 저어 반죽을 만든 뒤 얼굴에 팩을 한다.

 웰빙이나 몸짱 얼짱의 뒷면에는 무언가 ‘성실성’이라는 코드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게을러 운동을 하지 않고, 피부를 가꾸지 않으면 미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를 보면, 단순히 몸짱, 얼짱 열풍은 ‘성실성’만으로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몸짱이나 얼짱들은 애초에 외모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게 태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외모를 만들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보다 계속해서 자신의 외모를 꾸며나갈 여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로, 혹은 오로지, 돈과 관련된 문제이다.   


 3.

 최근 들어 ‘과시적 비소비’라는 말이 눈에 띄고 있다. 엄청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낡은 티셔츠를 입거나, 오래되고 초라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과시적 소비를 일삼는 중류 계급을 향해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하는 초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류계급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부해 버린다. 이런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비소비의 표면적인 양상은 매우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루어 지는 심리적 작용은 거의 유사하다. 

 토르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유한계급의 과시적인 소비와 각종 행위들의 구조를 밝히며, 그러한 것들이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원시적인 속성으로부터 기인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이야기고 있다. 상류 계급들은 생산 수단이나 노동에 관련된 일상적인 것을 천박한 것으로 여기고, 실생활 대신 그로부터 무언가 유리되어 있는 격식과 고급 취미로 그들의 온 행위를 전환시킨다. 이러한 소비의 제의 속에서  자신의 고귀함과 우월함을 뽐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류 계급의 과시적 소비 제의를 중류 계급이 따라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신성성이 침해당하자, 이번에는 과거와는 반대로 돈을 쓰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거액의 돈을 기부하거나 환원하는데, 이러한 것은 무언가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어렵고, 좀처럼 흉내 내기 어려운 면모를 가진다. 과거에는 상류계급의 과시적 소비를 이해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었다면, 이제는 상류 계급의 과시적 비소비를 이해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다. 상류계급은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초월과 신성을 갖고 싶어 한다.

 우스운 것은 그들의 이러한 모든 행위들은 바로 잔인함과 민첩성이라는 두 야만적 특성을 가지는 약탈의 습성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약탈성은 차별적인 성공을 추구하고, 개인의 편의를 도모하며, 금력을 과시하는 문화에 의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육성되고 있다고 베블런은 말한다. 일상이나 어떠한 통념에서 자신을 유리시켜 우월함을 가지려는 시도가 사실은 매우 원시 적인 인간의 본능의 발현이라는 것을 보면, 인간적인 어떠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다른 시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인간 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 보던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서 주인공인 60대의 경제학 교수 유택(야나기사와)은, 경제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인간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던 경제학은 재미없기 짝이 없었고, 나는 오랫동안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제학의 게임 이론들이 인간의 행동 양식에 의해 정리되고 이론화되어 다시 행동으로 수렴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인간의 물적 토대와 현상들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과시적 소비에서 과시적 비소비로 넘어가듯 계속해서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바뀌어 나가겠지만, 초물질적이고 근본적인 무엇, 원형은 결코 바뀌지 않으며 진화하거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비롯한 인간에 대하여, 혹은 동식물이나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혹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세계에 대하여 개념을 정의하고 분류를 나누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론화한다. 이러한 학문이라는 인간의 작업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베블런은 고등학문이 금력을 과시하는 현상에 대하여 통렬하게 분석하여 써 내려간다. 그리고 이 책은 경제학 분야의 고전이 되었고 고등학문의 일부가 되었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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