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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13
    ---
    -11
  2. 2006/08/09
    고통을 찾아서
    -11
  3. 2006/08/01
    慢性病
    -11
  4. 2006/07/12
    도망기.(2)
    -11
  5. 2006/07/11
    인간적인/ 과시적 비소비(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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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 가서 선글라스를 쓰고 건방지게 앉아 있었지만.

더이상 젊지도 않고 그럴 치기도 남지 않는
사람들이 길바닥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껴입을 마르크스도 바쿠닌 크로포트킨도 없고.
가진것은 오로지 형편없이 닳고 닳아 너덜너덜한 구호뿐 
그러나 아직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래서 언제나 공허하게 느껴지는 주문같은 구호 밖에 없으니.


반자본 투쟁 반미 자주
여러분들은 이런 구호가 무척 낯설 것이고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투쟁을 하기 전에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지요.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며 서로를 노가다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건설 노동자입니다. 우리가 교량을 짓고  건물을 짓고 이 도시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이 두 손과 두 다리로.


그 두 다리는 광화문에서 멈추어 아스팔트 위에 있고
두 손은 할 것을 잃고 무릎 위에 떨구어져 있다.
자기를 죽이는 것.
이미 한 사람이 죽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죽고.
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곳에서 자기를 죽여서 얻어야 할 절실한 목표가 있다니.
슬펐다.
함부로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치사한 일이고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더욱 치사스러운 짓이어서
최근 나는 많은 것에 대해 설명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 때. 집회가 재미없는 것을 느낄 틈조차 없이 슬펐다.


전에 사람과 고양이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들의 영역은 겹쳐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 아마도 기껏해야 네이버 첫화면 정도. 진짜 그럴까 싶었지만
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가난한 마을에 강제철거가 들어오면
주민들이 밤길에 길을 가다가 괴물에게 얻어 맞는다.
원인을 알수 없는 도깨비불이 자주 등장한다.
경찰은 때린 사람도, 불지른 사람도 없다고 한다
이른바 오컬트 마을이 되기 시작하고
그 뒤에 포크레인을 끌고 와서 강제로 철거한다.


3000명이 일하는 곳에 단 6, 7개의 화장실로 버텨내야 하고
샤워실도 식당도 없이 먼지 볶음밥. 쇳가루 찌게를 먹고
바닥에서 쪽잠을 자다 일어나 깊은 거푸집을 만들고
밤 새 뜬눈으로 높은 건물을 짓는다.


한결같이 가증스러운 표정을 한 여배우들이 나오는 그런 새 아파트 광고들.
그런 걸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 새로 지은 집에 들어선다
은폐의 내력을 가진 이 모든 건물들은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 곳에서 누가 어떻게 눈물을 흘렸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그들은 놀랍도록 겹쳐지지 않는다. 고양이는 사람한테 털이라도 부비지.
같은 시간에 또 다른 곳에서 이 모든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
학교에서는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저런 공간과 공간성들을 학습하지만
그저 '자이' 같은 하나의 아파트를 짓는 법에 대해서만 다룰뿐
하나의 가난한 집을 지키는 법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 놀라운 공간성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또한

이 사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멈추어 서지 않고.

더러는 길이 좁다고 불평하며 가기도 한다.

광화문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좀처럼 겹쳐지지 않는
이 엄청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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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찾아서


 
 
고통을 찾아서
 

1.
진지함과 의미와 무거움을 요구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행복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모든 고통이 나누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2.
한 시대를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개개인의 비극 속에 뛰어 들어가
개개인이 비극적 주인공이 되고,
비극 그 자체의 한토막이 되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비극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간격을 유지하면서
비극의 한 토막이라도 규명해보는 일이다.
오규원. 꽃피는 절망.
이 말은 지극히 지식인 적이라고 생각해
현명하고 조용한 자들이 적당한 거리에서 지루해지는 그런거
그것 역시 비극 그 자체의 한토막이다.


3.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자유주의 경제를 주장하고 있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딸이 굶어 죽는 것을 본 마르크스가
골방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써 내려간 사실처럼,
한 시대를 사는 우리가 대면하는 삶의 모습과 고통의 크기는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보는 시각과 대응방식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것을
칼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이라는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이건 '중산층'인 누군가가 낮은 곳으로 접근할 때 혼란을 감소시킨다.
-서구 이성중심의 개념. 자신을 어느것에도 닿지 않고
어느 것에도 뭍어나지 않는 객관적인 존재로 상정. 별로군요.


4.
다큐멘터리 the weather underground의 누군가 인터뷰:
"우리가 했던 그런 폭력적인 방식의 투쟁은 어쩌면
우리가 가진 중산층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것 이었을지도 모른다."


5.
[계급성과 계급의식은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잖아요]
계급의식이 '전복을 꿈꾸는 강도'를 말하는 건 결코 아니다.


6.
스트리트 펑크와 예술학교출신 펑크의 반목


7.
yippie가 되기를 원하는 elite


8.
누구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못한다.
세상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부정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세상의 가치를 완벽히 거부하지는 못한다.
가령 자본가나 부자를 혐오하면서도
그들의 지위나 성공의 일면들을 한 편으로는 동경한다.
그들의 비싼 개와 예쁜 인테리어와 고급 핸드백을.
그런 자신의 비굴이 혐오스럽고 자신의 혐오스러운 부분과
부자들의 모습중 어느 부분이 닮아 있기 때문에 더욱 완강하게
거부해 보려고 노력하는 거


9.
몇년 굴러먹어 고도로 진화된 클러버들이
이국 취미에 눈독을 들여서 구미를 통해 들어온 동양신비사상을
사랑할 때 기분이 좀 안좋아지는 이유가
표면적인 문화같은 달콤한 것만 쏙쏙 빼먹어서 그런건가 싶었다.
네팔의 옷과 음악과 향에 심취하면서도
네팔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네팔 노동자의 한국에서의 대우 같이
쓴 현실에는 고개를 돌리는 그런 것 말이다.
(어떤것이 누구에게 달고 쓴가 하는 것도 역시 취향의 문제지만.)
근데
네팔옷도 좀 입고 향도 피우고 음악도 듣고 차도 즐겨 마시고
이주노동자 문제도 적절히 관심을 가지는 부유한 좌파를 봤는데
역시 기분이 좀 안좋아졌다.
'낭만파'들이라서 싫어하는게 아니냐 해서
일 순간 싫었던 모양새들을 떠올려 보니
맞는 부분들은 꽤 있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10.

일본의 건축가가 옴진리교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

옴진리교에서는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목욕을 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힘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을 금지했고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천으로 대강 둘러싸고 동물처럼 구르며 지냈다. 바닥에는 포동포동한 회색쥐들이 떼를 이루며 다녔다고 한다.

그는 옴진리교에 '생활의 양식'이 없음을 꼬집었다.

미국의 셰이커 교의 경우 그들의 생활의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것을 자급자족했으며, 외부세계와가치관이 달랐으므로

식사,의복과 가구에서도 외부와 다른 고유한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옴진리교에는 그런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는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옴진리교에도 일관된 흐름이 있다.

목욕을 금지해서 몸을 지저분하게하는것을 신념으로 가지는 종교는

신도들을 타인과 사회로부터 떨어뜨릴 것이고

공간을 구획하지 않는것은 생활의 규칙성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어린애들 버릇고친다는 주말 sbs프로그램에서

'생각하는 의자'를 구석에 두는 것도

특정 장소를 구획하는 것이 질서를 부여해주는 데서 기인한다)

옴진리교는 결국

죽음을 향한 종교라는 일관된 흐름아래에서 마땅히 자멸했다.

 

어쨌든

생활의 양식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와 이념과 사상은

결국 죽은 종교와 이념과 사상이 될 뿐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좌파들도 신혼 가구로 앤틱 가구를 구매하는가?

스키니 진과 디올옴므를 예쁘다고 생각 하는가?

sg 워너비의 노래를 즐겨 듣는가?

 

 

11.

'우리안의 소부르주아성' (구멍)

내지는 인류의 공통된 방향성

9번의 부유한 좌파에게 느꼈던 불쾌감은
그런것이 원인인 것 같다.

어떤 좌파는 네팔과 이주노동자의 정치 상황에도 관심을 갖지만,

구미에서 들여오는 역오리엔탈리즘에 행동을 빚진다.

어쩌면 오리엔탈리즘 뿐만 아니라 맑시즘이니 아나키즘이니 하는

사상의 조류 역시 구미에서 들여오는 것이므로 그런식으로

가는 것이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20대에는 맑시즘과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지며

락큰롤을 들으며 반항하고 술마시며 이리저리 굴러본다.

30대 중반 이후에는 등한시했던 난폭한 자연을 어머니로 여기며

인디언 음악과 생태와 노자 장자 선 인도종교가에 관심을 가진다.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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慢性病

慢性病 

만성병

 

常年的奔波,让我倍感疲惫。

일년내내 바쁘게 뛰어다녀서 완전히 지쳐버렸다.

青藏高原的充足的阳光让我的皮肤变成了古铜色。

파란 고원의 충만한 햇빛이 나의 피부를 갈색으로 만들었다.

不稳定的生活和混乱的节奏让我患了很多慢性病。

불안정한 생활과 혼란한 생활리듬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만성병에 걸리고 말았다

咽炎,胃病,还有头晕,要命的失眠。

인두염, 위병, 그리고 현기증, 심각한 불면증.

这些慢性病让我每晚可以感觉微弱心跳地挣扎。

이런 만성병 때문에 매일밤 약하게 뛰는 심장처럼 발악하는 기분이다.

那些,劣质的烟草让我的脸色发黄。

질나쁜 담배같은 것들은 내얼굴을 누렇게 뜨게했고

廉价的劣质青稞烧伤我的胃子。

헐값의 쓰레기같은 음식은 내 위를 화상입혔다.

劳动和不足的食物让我消瘦。

노동과 부족한 음식은 날 비쩍 마르게 했고,

还有,还有那理想让我变得绝望。

그리고 , 그리고 이상을 쫓는 나의 생각들은 날 절망에 빠지게 했다.


独自在外 每晚噩梦 全是家乡和所做过的路

혼자 외로이 밖에서 매일 밤마다  내가 지나온 삶에 대한 악몽을 꾼다. .

奇怪的掌纹

이상한 손금.

只是要是走过的地方必定成为痛苦的回忆

내가 걸어온 삶의 모습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나에게 고통스런 기억만을 준다.

如同小马过河。

마치 작은 말이 대하를 건너는 것처럼.

我一直想去远方,遥远的远方,我以为会起上骏马,踏过草原,穿越那戈壁

난 항상 먼곳에 가고 싶었다. 아득히 먼곳.


난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초원을 지나 사막을 넘을 수 있을 줄 알았다.

爬过雪山去找一所海子所说的房子,找到海盗的酒瓶和绳子的吊床。

설산을 타고 넘어 한 호숫가의 방을 잡고, 해적의 술병과 해먹을 발견하고,

海鸟高飞,吉普赛人拉着手风琴,唱着一遍又一遍,欢天喜地地来到一个叫远方的地方。

해마는 높이 날고, 집시는 노래하며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기뻐하며 그 머나먼 곳이라 불리는 곳에 다다르는......  그럴 거라 생각했다.

充满欢笑

얼굴엔 웃음이 충만하고

男孩和女孩们手拉着手,小孩子们在做游戏。 

남자와 여자들은 손에 손을 잡고, 아이들은 다 같이 놀고 있다.

永远是食品,永远是胜利。

영원한건 음식. 영원한건 승리뿐.

他独自站在桥头高笑。起着骏马穿不过戈壁,

나는 홀로 다리어귀에 서서 웃는다. 준마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자마자,

只有戈壁的石头和戈壁。

사막의 돌과, 사막만 있다면.

他哭了,他笑了,他疯了,他还是只有戈壁和戈壁的石头。

그는 운다. 그는 웃는다. 그는 미쳤다. 그는 아직도 사막과 사막의 돌밖에 없다.

空空的戈壁和戈壁空空。

텅빈 사막과 사막의 텅빔.


西行的路上,只有白胡子和蝴蝶。带着他们去了传说的地方。

快节奏和阳光笑声带走了他们。

서쪽으로 가는 길에, 흰수염과 나비뿐.  전설의 곳으로 그들은 간다.

빠른 리듬과 태양빛, 웃음소리는 그들을 데려간다.

当他们都去了他们的地方,而他还只有戈壁......

그들이 그곳에 다다랐을때, 그에겐 오직 사막밖에 없다.

沙、石、人、马。只有戈壁......

모래, 돌, 사람, 말, 그리고. 오로지 사막.

 

 

 

 

중국 여행에서 만난 어떤 녀석의 글.

술 담배 음악 여자 같은것만 미친놈처럼 좋아하는

길바닥에서 굴러먹는 한량인 줄로만 알았는데

비트제너레이션, 펑크, 코뮤니즘, 노자 등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글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집시로 태어나지 못한 이들이

유럽의 집시를 꿈꾸고,

비트 제너레이션을 숭배하고, 왠지 혁명이라는 단어에 흥분하고 하는 것은  

헐리우드 스타일을 따르는 최신유행만큼 알쏭달쏭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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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기.

 

평택, 20060709 A.M.3:30---

 

 3시 30분 경 해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전경이 갑자기 에워싸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들과 방송차량 뒤를 쫒아가고 있다가 어떻게든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차장 가의 길로 향했으나, 그곳 이미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모두 연행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죄가 있건 없건 범죄자로 간주되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고 폭언을 들으면서 패배한 개같이 끌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몇 차례 충분히 증명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속속들이 전경이 오고 있었고 나는 전경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남자분 둘이 전경 틈 사이를 뚫고, 옆에 있던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여자 분을 잡아당겼다. 나는 필사적으로, 전경들 사이로 보이는 그 여자분의 팔을 잡았고, 그 팔이 나에게 동아줄이 되어주어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여자분과 나는 서로 마주보며 5초간 어색한 시간을 가졌고, 우리가 멍하니 아비규환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남자 몇몇이 일단 언덕 쪽으로 가자고 해서 약 20m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곳에 잠시 있다가 사람들이 연행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서 쪽으로 몇 걸음 갔을 때, 사복 형사가 뒤에서 쫒아왔다. 누군가 "달려!"라고 소리쳤고 모두 정말 미친듯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뒤를 돌아보면 돌이 되는 이야기처럼 너무나 두려워 뒤를 돌아볼 마음 따위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형이 도망가는 장면이 생각났으나, 우리는 젊지도 않아 멋지게 달릴 수도 없었고, CLASH의 LONDON CALLING같은 훌륭한 배경음악도 전혀 없었다. 영화가 아니니까 말이다. 모두 오로지 잡히지 앉도록 있는 힘껏 새벽 밤거리를 달릴 뿐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삼거리 쯤 왔을 때 누군가 흩어집시다!  하고 외쳤다. 나는 급한 대로 어느 원룸 빌딩으로 들어갔다.

1 층을 지나가는데 천장의 전조등이 켜졌다. 형사에게 들킬 것 같아 긴장감이 급습했다. 전조등 때문에 더 올라가지 못하고 1층과 2층 사이의 층계에 있을 때, 밖에서는 계속 비명 소리가 터지고 있었다. 나중에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도망치고 있을 때 뒤를 돌아보니 달리던 사람이 형사와 전경들에게 잡혀 팔을 꺾인 채로 아스팔트 바닥위에 눕혀지고 있었고 어느 여자 분은 실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밖을 보지 못하니 망상이 생겨, 몇 차례 심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이제는 경찰이 개까지 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다른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는데, 두세 명은 학교 운동장 수풀, 어느 빌딩 옥상 등 에 숨어있다고 했고, 나머지 일곱 명 정도는 모두 연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실신을 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다시 서로 돌아온 사람도 있고, 너무 많이 맞아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나는 건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고, 그 곳에는 전조등이 켜지지 않아서 창 밖 을 볼 수 있었다. 사복형사가 몇 차례 건물 앞을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려운 마음에 아침이 될 때까지 밖에 나오고 싶지 않았고, 만약 원룸 주민이 거기 숨어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나는 사람을 치지도 않았고, 살인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치고 살인까지도 불사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경찰 쪽이다. 그런데 왜 연행을 당해야 하고, 연행을 피해 수상하게도, 남 집 계단 모서리에 숨어있어야만 하고, 왜 사복형사는 끝까지 우리를 잡기 위해 한 시간도 더 지났는데 건물 앞을 도는 것인지 정말 납득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잡혀가던 광경은 홀로코스트와 같았고, 나찌를 피해 숨은 유태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밖에 나갈 마음이 들어 혹시 아직도 경찰이 있을까 주위를 살피면서 민주노동당 사무실로 갈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피해 상황, 그러니까 안정리에서 술취한 상인이 던진 돌에 내 팔을 얻어맞고, 친구는 골반에는 돌, 몸에는 썩은 달걀을 맞고, 한 여자가 가슴에 돌을 맞아 주저 앉는 것을 본 것에 관하여 써내려가고 있었을 때였다. 어떤 여자분이 친구가 연행 될 때 보았다고 했다. 자신이 두건을 잡고 있다가 놓쳤으며, 전경에게 머리채를 잡혀 휴짓장처럼 끌려갔다고 하면서 걱정하며 안부를 물었다. 이튿날 서울에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가 그 후에 있었던 해산집회에서 이 여자분이 마구 우는 사진을 보자, 나는 오히려 그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나중에 구치소에서 나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가관이었다. 구멍은 기술적으로 뒷통수와 등만을 집중 구타당하였다. 과거 '왕꽃미남'으로 불렸던 얼굴에 크게 흠이 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보기에는 상해가 없도록 교묘한 수를 써놓아, 상처 사진을 찍기도 곤란하니 어쩌란 말인가. 결국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평택에 있는 모 병원에 함께 간 형사가 의사에게, 이 사람들은 다 시위자다, 라는 언질을 줘서 의사에게도 매우 부당한 대우를 받고 다치지도 않은 곳 엑스레이를 찍었다고 했다. 또 어떤 여자 친구는 전경에게 끌려가던 도중, 남자 전경이 뒤에서 가슴을 잡았고, 거세게 항의했으나 비웃음과 욕설을 들었으며 여자 전경에게도 폭언을 듣고 구타당했다고 한다. 우스운 것은 서에 도착한 후, 형사가 수고했다면서 그 여경의 엉덩이를 만지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여성 시위자들에게 욕설을 내뱉고 구타하다가, 시위대를 향해 헛소리를 지껼이는 전경의 말에는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폭언을 하며 진압하다가, 저쪽에 가서는 전경에게 두드려맞은 환자를 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표정 짓기를 반복하며 갈피를 못잡았다고 하니, 후에 언젠가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행당한 친구들은 모두 평택 경찰서 앞에서 해산을 하려고 나가던 도중이었다. 그들은 전경이 어떤 여자분을 일부러 세게 밀쳐서 여자분이 항의하자 그 여자분의 배를 걷어차서 2m 날라가게 한 뒤, 쓰러져있는 여자분을 뒤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유유히 전경들 사이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에 한 친구가 항의하다가 여러 명의 전경들에게 집중구타를 당했고, 다른 사람들이 다시 항의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폭력적인 사태에 휘말려 모두 무차별적으로 얻어맞고 성폭력까지 당하면서 연행 되었다고 했다.      

 한편 평택 서 앞에서 집회를 할 때, 마치 이쪽 집회 참가자인양 굴면서 교묘하게 사태를 조장하던 이상한 남자가 있었는데, 흰 옷을 입고 머리가 짧고 덩치가 큰 사람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의 프락치였다. 때문에 이튿날 아침 나는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 프락치가 아닌 한 남자를 의심하고, 길거리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심한 망상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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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과시적 비소비

 

 토르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1.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한 끼에 만 오천원 짜리, 어쩌면 그 이상의 식사를 하고, 재미없는 술자리를 이어가느라 바에 가서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마시면서 돈을 쓴다. 십 여 만원 짜리 공연을 보러 다니고 돈을 모아 명품 가방과 구두를 사는 데 골몰한다. 

 사람들은 그런 소비들이 자신을 수식할거라고 믿는다.

 대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같은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같은 명품 가방을 매고 구두를 신은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좇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벌어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어떤 종교 이상으로 굳건하고, 이 ‘자본교’ 안에서 소비는 장엄한 종교 의식이 되며, 이러한 의식을 통과하는 자만이 자신의 신성성을 과시할 수 있다. 과시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사진 찍어 싸이월드에 올려 투데이를 높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신성한 자를 좇는다.


 토르스타인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이다. 과시적 소비란, 사람들이 자신이 보다 우월하고 특수한 사회 계급에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재화나 서비스를 아낌없이 헛되게 쓰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재미있게도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겨울이면 낭비적으로 선물을 분배하며 벌이는 축제인 포틀레치에서 이야기를 끌어온다. 포틀래치 중 족장은 고급 물건들을 분배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능숙한 예법을 선보이며 과시한다. 타인이 가지지 못한 물건을 나누어 주며 물질적인 부를 과시하는 한편, 그 와중에 적절한 화술과 예법을 구사하고 타인의 찬사를 들으며 우월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베블런은 이러한 것이 유한계급의 축제나 연회 행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이것은 단순히 고급 취향과 명품 소비의 축제에서 물질적인 면을 넘어 그 속에 숨어있는 내포하는 초 물질적인 코드를 이용하여 소비자의 마음을 빼앗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싼 물건’ 자체에 열광하는 것은 무언가 속물 적이고 품위 없다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물건’을 이용하는 이유가 그것을 가지고 사용함으로서 생기는 ‘당당함, 자신감, 기품 등의 매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매력의 핵심이 구매력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구매력 있는 자들이 오늘날의 신성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2.

 최근 몸짱, 얼짱 열풍은 일면 웰빙과 결합하여 지칠 줄 모르는 가속을 자랑하며 퍼져나가고 있다. 잘 먹고 잘 살자 는 것이 웰빙의 기본 취지라면, 열심히 몸과 얼굴을 가꾸자는 것이 몸짱, 얼짱 열풍의 기본 취지일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태적으로 환경을 생각하여 우주의 순리와 이치를 따르는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웰빙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몸짱 얼짱 열풍에 대해서도 조금 더 복잡하고 보기 좋은 설명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웰빙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나무가 조금 있고 다른 주거환경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곳에 대도시에 위치하여, 거실에는 천연 성분 본드를 발라 나무 바닥재를 깔고 주방에는 인조 대리석을 깔은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사는 것, 유기적인 식물의 형태에서 모티브를 따 디자인된 자동차를 몰고 주위에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 가서 유기농 코너에 있는 완벽하게 씻어서 포장된 야채들을 사다가 집에서 이리 저리 연구를 해 보며 요리를 하는 것이다.

 베블런은 값비쌈과 아름다움은 점점 의도적으로 혼동되어,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 되지 않기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야생화를 불쾌하고 비위생적인 잡초로 여기는 한편, 본질적으로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다른 꽃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재배하며 즐기고, 좋은 환경에서 감식력을 기르는 교육을 받아 이른바 고급 취미를 갖게 된 꽃 애초가들은 그 비싼 꽃에 찬사를 보내곤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웰빙 열풍 역시 이와 다를 것이 없어서, 웰빙을 이야기 하면서, 결코 가난하여 단칸방에 살면서 화분에 야채와 채소를 재배해서 먹는 그런 삶, 혹은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부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상추나 배추, 콩나물보다는 로즈마리, 민트, 세이지, 레몬 버베나 등의 허브나 먼 이국으로부터 들여온 야채나 채소를 즐겨 다루며 값을 쳐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웰빙과 합쳐지는 몸짱 얼짱 열풍은 계속해서, 아마도 다음과 같이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저녁이면 헬스클럽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생약 성분을 넣어 만든 수제 비누와 허브 성분이 든 샴푸와 바디 워시로 목욕을 한 뒤, 집에 가서 아로마 테라피를 하며 요가를 하는 것이다. 그런 뒤 감자와 서 너 가지 곡물을 믹서로 갈고 꿀을 넣고 저어 반죽을 만든 뒤 얼굴에 팩을 한다.

 웰빙이나 몸짱 얼짱의 뒷면에는 무언가 ‘성실성’이라는 코드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게을러 운동을 하지 않고, 피부를 가꾸지 않으면 미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를 보면, 단순히 몸짱, 얼짱 열풍은 ‘성실성’만으로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몸짱이나 얼짱들은 애초에 외모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게 태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외모를 만들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보다 계속해서 자신의 외모를 꾸며나갈 여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로, 혹은 오로지, 돈과 관련된 문제이다.   


 3.

 최근 들어 ‘과시적 비소비’라는 말이 눈에 띄고 있다. 엄청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낡은 티셔츠를 입거나, 오래되고 초라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과시적 소비를 일삼는 중류 계급을 향해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하는 초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류계급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부해 버린다. 이런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비소비의 표면적인 양상은 매우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루어 지는 심리적 작용은 거의 유사하다. 

 토르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유한계급의 과시적인 소비와 각종 행위들의 구조를 밝히며, 그러한 것들이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원시적인 속성으로부터 기인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이야기고 있다. 상류 계급들은 생산 수단이나 노동에 관련된 일상적인 것을 천박한 것으로 여기고, 실생활 대신 그로부터 무언가 유리되어 있는 격식과 고급 취미로 그들의 온 행위를 전환시킨다. 이러한 소비의 제의 속에서  자신의 고귀함과 우월함을 뽐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류 계급의 과시적 소비 제의를 중류 계급이 따라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신성성이 침해당하자, 이번에는 과거와는 반대로 돈을 쓰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거액의 돈을 기부하거나 환원하는데, 이러한 것은 무언가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어렵고, 좀처럼 흉내 내기 어려운 면모를 가진다. 과거에는 상류계급의 과시적 소비를 이해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었다면, 이제는 상류 계급의 과시적 비소비를 이해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다. 상류계급은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초월과 신성을 갖고 싶어 한다.

 우스운 것은 그들의 이러한 모든 행위들은 바로 잔인함과 민첩성이라는 두 야만적 특성을 가지는 약탈의 습성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약탈성은 차별적인 성공을 추구하고, 개인의 편의를 도모하며, 금력을 과시하는 문화에 의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육성되고 있다고 베블런은 말한다. 일상이나 어떠한 통념에서 자신을 유리시켜 우월함을 가지려는 시도가 사실은 매우 원시 적인 인간의 본능의 발현이라는 것을 보면, 인간적인 어떠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다른 시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인간 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 보던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서 주인공인 60대의 경제학 교수 유택(야나기사와)은, 경제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인간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던 경제학은 재미없기 짝이 없었고, 나는 오랫동안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제학의 게임 이론들이 인간의 행동 양식에 의해 정리되고 이론화되어 다시 행동으로 수렴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인간의 물적 토대와 현상들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과시적 소비에서 과시적 비소비로 넘어가듯 계속해서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바뀌어 나가겠지만, 초물질적이고 근본적인 무엇, 원형은 결코 바뀌지 않으며 진화하거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비롯한 인간에 대하여, 혹은 동식물이나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혹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세계에 대하여 개념을 정의하고 분류를 나누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론화한다. 이러한 학문이라는 인간의 작업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베블런은 고등학문이 금력을 과시하는 현상에 대하여 통렬하게 분석하여 써 내려간다. 그리고 이 책은 경제학 분야의 고전이 되었고 고등학문의 일부가 되었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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