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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일본 나고야 고등재판소는 이라크에서 미군을 지원하는 항공자위대의 파병을 헌법 9조에 대한 위헌이라는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판결을 남겼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아프간이나 이라크 파병 문제는 한미동맹 강화와 이라크 석유 획득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것 외에 딱히 이라크와의 거리를 좁혀줄만한 것이 없다. 오히려 한국인과 이라크인 사이의 파병에 관한 인식의 괴리는 더욱 커졌다. 파병문제가 국회에서 밀고 당기는 정치적인 사안 정도로 전락된 반면, 이라크에서는 한 인간의 생존이 가능한가 아닌가를 가로짓는 거대한 삶의 문제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 이라크 파병이 점점 우리와 연관성이 떨어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한국인들이 이라크 파병 연장에 대한 우려와 분노가 무뎌지는 동안, 훨씬 강력한 의미와 질서들이 우리 사회 속에 빠른 속도로 침투해 왔다. 몰라보게 세련되고 유연해진 방식의 해외파병이 우리의 부정적인 파병 인식을 남몰래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적극적으로 발맞춰 추진되고 있는 아프간, 이라크에 지역재건팀(PRT) 파견, 유엔 평화유지군(PKO)의 상설화 및 국회 동의절차 간소화를 위한 법제화 움직임 등이다. 이는 군대가 비군사영역 활용을 높이거나, 재건 및 인도적 지원을 병행한 군사작전을 확대한다는 정책 중 일환인데, 사실 말 그자체로도 모순일뿐더러 실제로 현지에서는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PRT나 PKO 와 같은 방식의 파병이 마치 전쟁과 분쟁을 막기 위한 적절한 대안이자 합리적인 해결로 받아들이거나 긍정적인 수단인 것처럼 주장하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군대의 힘에 의존한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강제가 될 수 있고, 나아가 군사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어떤 파병이든 결국에는 '무력에 의한 평화'가 본질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파병에 관한 정책 결정과 사회적 합의 등은 여전히 미숙한 상태이며, 평화주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것은 더더욱 힘든 과제로 남아있다. 분명한 것은 이라크 파병이 이라크인만이 아니라 한국인도 쉽게 비켜갈 수 없는 복잡한 고민들을 계속해서 던져주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파병국가'가 되었다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무분별하고 원칙없는 '파병 남용'이 가져오게 될 미래의 문제가 우리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 2008년 5월 제12회 인권영화제, 영화 '전장에서' 인권해설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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