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결정할 권리는 자신의 것인가? 자살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가 아니므로 존중받아야 하는가? 이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사람의 처지를 이해해야 한다, 로 답이 끝나면 논의는 종결된다. 왜 갈수록 자살할 자유를 행사하는 이들이 늘어 가는지 원인을 밝힐 수 없고 자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근거로 하여 낙태를 허용하자는 것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여성은 섹스, 임신, 출산 등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선택'이라는 프레임에는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을 가리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애매하고 모순적인 지점에 위치한다. 낙태는 분명 불법으로 명문화되어있지만 기십 년 동안 한 해 수십만 건 가까이 행해져왔다.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고, 낙태를 원하지만 하지 못하는 경우도 드물다. 낙태하는 여성의 절대 다수는 원치 않는 임신과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낙태를 '치러낸다'. 한국에서 낙태는 여성의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라기보다, 여성권이 침해당하는 현실을 반증하는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건 낙태는 임부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정적인 후유증을 남긴다. 낙태가 임부와 태아에게 남기는 상처와 그 심각성에 대해 사회 성원들이 공감하고, 낙태 근절의 기치가 전 사회적으로 절실하게 받아들여질 때, 동시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패배적인 현실론을 벗어나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다. 원치 않는 섹스를 거부할 권리, 당당히 피임할 권리, 노동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는 권리들과 낙태는 양립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임부의 몸은 해당 여성 개인만의 권리가 행사되는 곳이 아니다. 낙태는 무엇보다도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비극적인 일이다. 어느 시점부터 태아를 생명체로 보느냐는 논쟁은 결론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국 법은 “생명은 잉태된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회임된 태아는 새로운 존재와 인격의 근원으로서 존엄과 가치”로 판시한다. 강간에 의한 임신이거나 태아가 임부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등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생명권은 임부의 자기 결정권보다 더 존중받아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생명존중은 인류 역사의 본질적인 가치다. 많은 경우 낙태는 안전 불감증 혹은 도덕불감증에 의해 일어난다고 본다. 피임 없이 섹스하는 커플은 전체의 3~40%에 육박한다. 낙태가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남녀 모두에게 적극적인 피임이 필수로 여겨진다면,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다른 이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를 가진 이는 없다. 낙태는 원칙적으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생명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임신과 출산에 관해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 낙태를 선택하게 만든다. 낙태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조문에 의한 처벌이나 합법/불법화 문제를 넘어서는 종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현재 존재하는 낙태에 대한 고민들과 경험을 공론화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이 낙태를 선택하게 하는 조건을 밝히고 그것을 실질적인 여성가족 정책 수립에 반영해야 한다. 생명과 낙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캠페인도 필요하다. 한 몸에 있는 임부와 태아의 권리는 본시 충돌하는 게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울 테다.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으로는 인위적인 대립을 무화시킬 수 없다. 태아의 생명권은 물론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동시에 지킬 수 있는 길은 궁극적으로 낙태를 근절시키는 것이다.

 

     낙태에 대한 입장으로 진보/보수를 가름하는 것이 미국만의 일인지, 아니면 어디 사회든 다 그러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나름은 진보에 가까운 듯하고, 여성주의자들이 많은 데서는 난 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성주의를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는 여성주의자요, 라고 말하고 싶은 이상한 심보를 가진 사람이다. 근데 잘은 모르겠지만 프로초이스를 지지하는 여성주의적인 입장들이 많은 거 같은데... 그게 나랑 완전히 다르거나 맥락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은 나는 그게 불편하다. 프레임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인 것도 같지만 어쨌든 가장 소중한 건 생명이 아닌가? 하하...  한 인간의 몸과 삶을 통제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아서 그냥 편하게 질문으로만 언급하고 말지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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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23:41 2010/09/0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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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태

    Tracked from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2010/09/09 01:10 Delete

    어느바람님의 [진보와 낙태] 에 관련된 글. 글쎄. 진보와 낙태는 별 관련이 없는것 같다. 내가 아는 진보라는 것이 선이나 진리같은건 아닌것 같아서 말이다. 사상의 자유가 왜 있겠나. 선택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낙태도 선택 가능하다. 그럼 낙태의 자유도 있는걸까? 누군가가 사상의 자유를 외치듯 낙태의 자유를 외쳐도 되는걸까? 박수를 받을 일이 될까? 사상의 선택으로 누군가를 헤칠수는 없다. 내가 머리속으로 혹은 목소리로 내가 믿는것을 생각하고 ...

  1. 비밀방문자
    2010/09/13 07:22 Delete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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