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이 떠나간 방에서 혼자 운다. 울고 싶었다. 울고 싶다는 말을 안 한다는 것만으로 어리광부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유치하다. 유치한 인간이 의젓한 척이라도 하려던 거였나? 아니다, 다들 그만큼의 예의를 갖추고 산다. 마음에 없는 호의와 친절을 가볍게 베풀듯, 우울할 때는 울고 싶다고 얘기하고 투정 부리고, 그러면 뭔가가 해소되는 것처럼 여기고 일단 다시 살아가는 게 사람의 예의다. 어느 부분에서든 기본적인 수준의 예의를 무시하는 인간이야말로 징글맞은 이일 확률이 높다. 게다가 방에서 혼자 우는 일은 아주 보편적인 일 아닌가? 누군가에게 울고 싶다고 말하는 건 이런 느낌이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존감이 다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일.

내가 의지하는 믿음들이 얼마나 바스라지기 쉬운 것들인지를 완전히 잊지 말라는 신의 친절함일까? 아무렇지 않게 지나던 일상이 공포가 되고 불신으로 가득함을 깨닫게 하는 일이 여지없이 찾아온다. 나 몰래 몇 번이나 내 방을 들락거렸을지 알 수도 없는 그 남자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정말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어쩌겠는가, 나 또한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가 생각하면 타인을 믿지 못하겠다고 불신 사회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나는 또 살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믿음을 주워 모으고서 꼭 그만큼의 불안은 흩어버리면서, 별 수 없이 다시 속아야겠다 생각하며 시간이 좀 흐르면 이렇게 생각했던 사실조차 잊은 채 잘 살 거다. 더 어렸을 때는 내가 맞닥뜨린 일에서 세상의 밑바닥을 다 본 줄로 착각하고 희망이 없다고 비관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걸 알려주는 따뜻한 손들이 있다. 그리고 다시 반복.
 

오랜만에 혼자인 밤, 쏟아내고 싶은 말글이 너무나 많다. 누군가 나를 감당할 이가 있을까. 아니다, 누군가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세상에 묻는 게 아니다. 나는 바로 너에게 네가 날 감당할 수 있어? 해 봐, 더 해 보라고 괴롭히고 온몸으로 묻고 말 거다. 종국에는 네 끝장까지 바닥까지 헤집어내고 말 테다. 뻔한 결론을 피하느라 가짜 사랑만 하게 되겠지. 여러 종류의 이별을 겪으며 내 안에 자리잡은 두려움을 최근 동거인이 떠나면서 나는 확실히 인정했다. 사람들은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를 만나 알콩달콩 살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회의하지만 그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내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갈수록 확실해진다. 90년대 언저리에서 유행했을 법한 감성을 담은 소설 제목처럼, 내게 금지된 듯한 일을 내가 가장 소망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두려움이란.. 나는 이제까지 두렵다, 무섭다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용했는지, 그 말들의 가치가 싸져서 이 두려움을 표현할 만큼의 언어를 찾을 수가 없다. 

두려움은 입 밖으로 내버려서 더럽히고 뭉개고 찢어야 한다. 나는 결국 세속의 평범한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세상 끝까지 파고 들고 싶은 열망에 가득차 있어봐야, 세상의 온갖 경계를 초월할 수 있을 것 같아봐야, 결국 그건 내 머릿속에서의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라면 타인의 방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세상의 윤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이야기를 두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지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 나는 떨면서 울기밖에 못했다. 그 남자가 진심을 담았다고 가져온 편지에 쓰인 '정복감'이라는 말 때문에 나는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그리고 그에게 정복당한 사람이 돼버렸다. 그 말 한마디로 나는 희생자의 역할, 정복당한 사람의 역할에 쥐덫처럼 걸려들었다. 몇 시간 전에는 실직도 했다. 아르바이트도 직업이라고 해 준다면. 아주 대대적으로, 부당한 평가를 받았지만 어디 제대로 하소연할 데도 없이, 자존심 상하게 실직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실존, 권태 이런 게 아니라 당장 내야 할 방세와 대출금이고 그 때문에 결국 또 어미에게 손을 벌려야 할 순간이다. 

 

세상 속의 나는 벌어먹는 일이 불안한 백수고 내 방 안에서 쉬는 일조차 불안한 여자다. 한동안은 내가 뭘 하더라도 나는 결국 이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다. 한동안, 끔찍한 그 시간 동안 이 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옴싹달싹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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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2 03:19 2010/11/02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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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u_topia
    2010/11/02 17:33 Delete Reply Permalink

    여기에 "..."만이 덧글로 허용되지 않네요. 침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보여주면 더 이상 침묵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지... 이 침묵을 님의 마음에 연결되게 받아주세요.

    1. Re: 어느바람
      2010/11/03 19:20 Delete Permalink

      가끔 괜히 심각한척 휘갈겨질 때가 있지요.. 뭐 금방 또 털어지는 건데 보는 사람까지 심각하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하고 민망하네요. 마음은 참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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