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도 아니었던 곳에 우연히 있게 된 참에 우연히 보게 된 영화인 건데 며칠째 생각이 난다. 내게 어떤 이야기도 강요하지 않는 듯하면서, 그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듯한 pose를 pause한 듯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진득한 마음의 울림같은 느낌이 있냐 없냐가 내게는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쭉 그 안에 있는 거 같은 느낌. 워낙 유명하고 시간도 꽤 지난 영화지만, 멋모르는 내게는 되게 충격을 줬다. 이런 걸 두고 '영화적'이라는 거구나 하는 느낌. 이래서 최소한 남들이 좋다는 건 많이 보고 많이 들어야 하느니... 

 

엘리펀트 식의 발언이 윤리적이냐 비윤리적이냐 따지는 일 자체가 내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지는데, 아마 항상 확신에 차 있지 못했고 문약했고 찌질거리느라 시간을 다 써온 사람으로서의 회피이기도 할 테다. 각자에게는 나름의 방식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기질에 대한 동경도 좀처럼 잦아들지는 않는다. 무튼 그래서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 자꾸 기억을 돌리려는 엘리펀트 식의 욕망과 윤리, 나는 그같은 방식의 속죄가 익숙한 사람이고 그게 건강하냐 건강하지 못하냐를 또 많이 고민했고... 이 역시 그냥 자위일까? 자기 검열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영화를 본 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되게 답답하고 짜증도 났다. 나는 살면서 웬만한 차이는 다 마음 편히 존중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존중이라기보다 남이사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개의치 않는 편이라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무튼, 영화나 소설을 두고 이야기할 때는 확실히 좀 편협해지고 이견에 대해 날카로워지고 곧잘 짜증이 난다. 상대에 따라 흥분해서 싸울 수도 있다. 이건 좋아한다는 뜻인 건가?

 

농담삼아 영화와 멀어져야 취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을 던졌지만, 뭐 그리 굳게 마음을 먹었던 적도 없고 그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욕망을 어느 정도는 유예할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이지, 사랑에 실패하고 아무 남자나 조건 보고 결혼할 마음 먹은 여자처럼 모가 아니면 내 인생을 놔버리고 살겠다는 가학적인 욕망 정도도 수습 못하면 이제껏 먹은 밥이 아까운 나이가 아닌가. 그래도 연말이라고 누구 말마따나 배고프고 가난하고 춥고 외로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새삼 또 생각하게 된다. 내 안의 엘리펀트랑은 친하게 지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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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0 17:05 2010/12/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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