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이라는 소문이 많아 적잖이 기대했던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조금 실망했는데. 감동하는 일이 갈수록 드물어지는 것은 나이먹는 것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내 탓일까? 내 식견이 부족한 탓인지 어쨌든지 보기가 괴롭기까지 했던 영화 파우스트를 보고 나와서도 실망밖에는..

 

레미제라블은 정말 내 마음을 끌었던 작품이다.. 범우사판 5권짜리를 고등학교 때 자의로 꾸역꾸역이지만 벅차게 읽고, 대학에 온 뒤 다시 봤다. 그전에 더 어릴 때부터 장발장이라는 제목의 어린이를 위한 단권짜리 책들마다 찾아 봤었다. 전래동화를 보고 또 보듯이, 이런 식으로 많이 읽었던 고전도 없다.

민음사에서도 이번에 번역을 했던데, 레미제라블 영화의 인기에 비해 아마 5권짜리 레미제라블을 다 읽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읽었다고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레미제라블에 담긴 엄청난 역사 사회 사상이나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 지금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감동과 감탄이 어땠던지.

작가가 돼서 이런 책을 쓰지 못할 거면 그저 종이 낭비겠구나, 이만한 책을 쓸 수가 없을 게 아닌가 작가란 꿈이 온당한가 그런 질문을 처음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덧붙여 레미제라블을 읽고 나서야 그 말이 쉬운 혁명이 무엇인지, 세계에서 사람들의 삶에서 혁명은  무엇인지, 고딩 세계사 때 달달외웠거나 쉽게 내뱉던 혁명의 실체를 조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 레미제라블의 대단한 인기가, 오히려 원전에 대한 이해와 접근을 해치는 것이 아닐런지 걱정이 되는 거다. 영화를 보면서 짧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빅토르 위고의 인간애를 이해할 기회를 가질까? 간단히 말하면 그 좋은 소설을 갖고 아무리 노력해도 영화로는 이만큼밖에 안되는 건데, 거기에 열광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꼽다는 거다.

 

두려운 마음까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 세대의 어느 작가가 후손들에게 빅토르 위고처럼 기억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이청준이나 박경리나 혹은 조정래라거나, 현재 문단의 젊은 작가 중에 이같은 작가로 기억될 이들이 과연 있을까? 세계로 눈을 돌려봐도 그렇다. 살만 루시디나 밀란 쿤데라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후세대에 다시 등장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시대가 이같은 작가를 원하는가.. 그런 작가들이 미래 세대에게 필요할까? 지난 시대였다면 문학에 재능을 바쳤을 이들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나 개중 많은 이들이 지금은 영상을 택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옳다 그르다 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영상에 큰 것을 빼앗긴 듯한 느낌에 억울함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내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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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6 04:40 2012/12/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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