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이 사회는 장애인과 함께 살기를 정녕 원하는가?
절망들을 향해 돌을 던지자
박경석(노들장애인야학 대표)

1. 이 사회에서 장애인은 인간으로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이 땅에는 450만 장애인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리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장애인을 만나거나 접촉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개인이나 단체가 장애인시설에 자원봉사를 나가는 특별한 노력(?)이나, 장애인의 날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장애인을 만나거나, 장애문제에 대하여 접하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땅에는 450만의 장애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결코 적은 인구는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일상적으로 장애인을 거리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인가? 장애인은 과연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 이 사회는 정녕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말로는 아름다운 말을 수없이 내뱉으면서 실제로는 끊임없이 장애인을 차별하고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구조에 대해 눈감고 있다면, 그리고 단지 장애인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몫은 개인의 장애극복으로 치부한다면, 그 의미가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수만 명의 장애인들에 대해 소위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 규정하고 장애인들을 ‘안락사’라는 미명 하에 유대인보다 먼저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한 것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과연 한국사회에 장애인은 헌법에 보장된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국가는 장애인에게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존의 절망 속에서 죽어간 장애인들을 기억한다. 그 이름 최정환.
최정환씨는 척수장애와 교통사고 중도장애인으로 장애 1급의 중증장애이었다. 분신 당시 37세로 미혼이며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랐고 이후 다방 껌장사, 수세미 장사 등을 해왔으며, 애덕의 집 등 장애인시설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95년 3월 8일 서초구청 단속반과의 실랑이 끝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점에 필요한 스피커와 배터리를 빼앗긴 최정환씨는 같은 날 오후 서초구청으로 압수당한 물품을 찾으러 갔다가 거부당하자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그리고 95년 3월 21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분신 후 병원에 실려와서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 달라”고 절규했다.

그리고,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상을 하다가 공권력에 의해 의문사한 이덕인 열사, 부산의 지하철 역에서 ‘생산성없는 삶은 아무 의미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한 시각장애인 박병훈씨,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도 장애로 인하여 취업하지 못하여 비관 자살한 김현욱씨, ‘거리에 턱을 낮추어달라’는 유서를 서울시장에게 남기고 자살한 김순석씨... 그들의 죽음이 엄연한 현실 속에 있음을 기억한다. 이들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과연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인가?

장애인수용시설이 지역사회 들어서면 땅값 떨어진다고 데모하는 나라, - 그래서 항상 장애인수용시설은 물좋고 산좋은 곳에 아름답게(?) 짓는다. 그리고 가끔 천국에 재물을 쌓고, 양심을 한번 빨래할 때즈음이면 봉사하러 오고, 보수정치인들은 선거 때면 라면박스나 생필품들을 상자 가득 가지고와 기념사진 한방 박고 가는 그들의 배려에 감사해야는 우리의 장애인들! 그리고 그 시설장들은 친인척으로 人의 장벽을 만들어 시설을 요새화시켜버리고 자손대대 장애인을 팔아 부귀와 사회적 명예를 구축한다. 온갖 인권유린과 비리는 사랑과 봉사의 현장에서 무럭무럭 탐욕의 자양분 먹고 향연을 즐긴다. 그 구조를 정당화하는 관료들은 여전히 그 향연에 결탁하여 주어진 자신들의 최대한 남용한다. 그 핵심에 ‘에바다’ 시설비리가 존재했다.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은 우리 대학에 지원할 수 없다’라고 입시요강에 선명하게 명시하는 나라, - 그래서 부당함에 대하여 문제제기하면 이구동성으로 “본 대학을 다니기가 힘들 것 같아서 시설이 되어 있는 대학으로 안내를 해주었을 뿐이다. 단지 그들을 위해서, 불쌍해서, 보살펴주려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장애인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 차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장애인을 위해서!’라는 선한 가면 속에 많은 장애인들이 누군가의 시혜와 동정에 의해 보호되어야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 그래서 오히려 장애인을 구조적인 차별의 희생물로 전락시키는 두 얼굴의 위선적인 편견이다.

전체 장애인의 33.2%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학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본이 왕’인 사회를 지향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인간의 뼈 속까지 기름칠하는 사회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는 신체적 장애보다 더한 사회적 장애로 작용하고 치명적인 자괴감을 유발한다. 그런데 장애인 몇 명이 정말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해 개인적인 이유로 학교를 가지 못했다면 말하지 않겠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1조) ”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31조)”

그래서 초등교육을 의무교육으로 헌법에서 선명하게 규정하고 있건만, 어찌 장애인의 33.2%가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던가? 그리고 60%가 초등학교 겨우 졸업한 학력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법 앞에 평등’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단지 선언적이고 자의적인 문구일 뿐이었나? 교육받을 권리는 술자리의 안주거리고 주정이었나?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 아니고 사회적 상황논리에 합법화되어지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그렇고 그런 유감스러운 일일뿐이었나?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의 날이면 마치 '장애인의 생일'인양 많은 기념행사와 잔치로 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체육관에서 대통령 영부인이 하사하는 훈장을 받으랴, 롯데월드에서 공짜로 놀이기구를 이용하며 사탕처럼 달콤한 하루를 보내랴, 장애인에게 그 날 하루만은 세상이 온통 자신을 위한 날로 채색되어 진다. 그래서 언론의 한 타이틀 기사에는 "365일 오늘 하루만 같아라" 하며 달콤한 하루의 한 단면을 표현한다.

"나들이라고는 엄두도 못냈던 장애인들이 개인 택시운전자 봉사단체의 도움으로 봄나들이에 나섰습니다. 10년 만에 처음 나들이를 하는 장애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화사한 햇살처럼 장애인들의 얼굴도 활짝 피었습니다. 봄나들이가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장애인의 날 뉴스 기사이다. 그 뉴스에는 4월의 푸르름과 잔임함이 함께 녹아져 있다. ‘10년만의 외출’을 화사한 햇살처럼 묘사한 그 언어 속에 섬뜩한 차별의 실상을 외면하는 사회적 가면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장애인들을 최대한 불쌍하면서도 아름답게 미화하면서 TV화면 왼쪽 상단에 표시되는 모금금액 숫자를 빠르게 올리는 것이 장애인 날의 최대 성과물인양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장애인단체들의 입방아만 맴도는 것이다.

이것은 건물, 도로, 교통 등 사회의 모든 활동구조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계획되고 건설된 상황에서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재가장애인이 가족에 의지하거나, 자원봉사자의 도움만을 기대하면서 집안에서 철저하게 사회와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는 수치스러운 사회적 차별인 것이다. 성년이 되어 자원봉사단체의 도움을 받아 몇 십 년만의 외출에 감동하는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그 장애인의 감동에 뿌듯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야만적인 격리를 집단적으로 구조화시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사회는 아무런 법적구속력도 없는 집단적 차별과 편견으로 장애인을 창살없는 사회감옥 속에 수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가 장애인을 사회감옥에 구형하였는가?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 대해 정부는 시혜의 눈길과 조금의 떡고물을 던져주며 추상적인 ‘내일'로 기만할 뿐이다.

과연 이 사회는 장애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이 국가는 장애인들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헌법에 명시된 이러한 선언은 장애인들에게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처럼 장애라는 이유로 노동, 교육, 이동 등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졌기에, 장애인은 사회, 정치, 문화적으로 배제되어 격리된 채 이 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장애인과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과연 이 사회는 장애인과 진정으로 함께 살기를 원하고 있는가?

이제 ‘바로 지금’ 수많은 장애인에게 죽음과 사회적 차별을 자행하는 사회는 이 물음에 진지한 대답을 주어야 하고, 대답에 상응하는 실천으로 지금까지 장애인이 받아온 죽음같은 사회적 차별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2.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실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사회적 실체로서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것은 분명 신체적 차이일 뿐이지만 그것이 지니는 사회적 함의는 단순한 차이를 넘어 ‘차별’로 고착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차별’은 이 자본의 사회를 천년만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 착취의 수단으로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차이’를 ‘차별’로 변질시켜버리고 그것을 합리화하고 구조적으로 재생산시키는 데 ‘편견’은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매우 다양하다. ‘무능하다’, ‘더럽다’, ‘무섭다’, ‘고집이 세다’ 등 악질적인 편견에서부터 ‘엄마 말 잘 안들으면 병신이 된다’, ‘죄가 많아서’ 등 종교적 근거(?)를 원용한 나름의 징벌적인 편견, 그리고 ‘선하다’, ‘성실하다’, ‘순수하고 낙관적이다’ 등 장애인을 위하는 척하는 선한(?) 편견들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여기에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차라리 선한(?) 편견보다 오히려 대처하기가 쉽다. 그것은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 자들에게는 확실하게 싸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한 편견을 가지고 장애문제를 재단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나름의 선한 뜻으로 자선의 미소를 띠며 다가오는데 어찌 욕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더욱 장애문제를 왜곡하고 문제의 본질을 사상시키고 있다는 것에서 심각성이 있다.

여기에서 장애인 날을 기념해서 장애인의 고용을 촉진시켜야한다는 목적으로 한겨레 신문에 기재된 ‘칼럼’을 통해 좀더 알아보자.

「장애인은 여러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중략)
우선 장애인은 집중력이 강하다. 장애인은 신체기능의 일부분이 손상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흔히 다른 기능이 일반인보다 훨씬 발달한다. 많은 장애인들은 남은 신체의 기능을 극대화하지 않으면 하루하루의 생활이 어렵다. 집중력이 높아지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인 스티븐 호킹이 두뇌를 고도로 활용해야 하는 이론물리학자로 성공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애인은 효율성이 높다. 효율성을 높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제도와 시설·물건이 일반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어, 사소한 일에서도 세밀히 연구하고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습관은 업무수행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게다가 긴장상황에 익숙해 있어 실수가 적다.

순수하고 낙관적인 태도도 장애인의 특징이다. 한국방송공사 1텔레비전 <일요스페셜-오체불만족, 오토다케의 즐거운 인생>에 나온 선천성사지절단 장애인 오토다케 히로다타(23)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알고 보면 대부분의 장애인이 그렇다. 장애인은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음모나 암투를 꾸미지도 않고 휩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는 너도나도 편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다. 남모르는 고통을 이기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삶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장애인은 또한 개혁적이고 진취적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항상 도전과제로 다가온다. 살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우리 모두의 화두가 된 `변화와 개혁'을 장애인은 이미 매일 실천하고 있다.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은 선천성사지기형 장애인인 이희아양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다. (중략)

- 김지석, 「장애인들을 위하여」, 한겨레신문 “데스크 칼럼”, 1999. 4. 20.」

칼럼을 쓴 사람은 장애인을 위하는 정말 착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하자. 하지만 그 글 속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그 글에는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스티븐 호킹, 오체불만족의 오토다케 히로다타,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 등 장애인를 극복한 쟁쟁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쉽게 언론을 통해서 장애인에 대한 따뜻한 미담이나 장애를 극복한 성공한 장애인을 통하여 장애문제를 접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된 사람들과 더불어 헬렌켈러, 루즈벨트 등 장애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통하여 장애는 개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고, 언론은 그렇게 극복한 인간드라마를 중심으로 장애문제를 선전한다. 또한 이 사회는 장애에 대한 개인의 극기주의나 영웅주의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장애인 당사자에게나 비장애인들에게 마치 그것이 장애극복의 모범답안인양 장애문제의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노력하면 어떠한 장애도 극복할 수 있다’라는 극기주의나 영웅주의를 통하여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처한 차별적인 현실을 회피하면서 개인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개선’의 도구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장애인은 집중력이 강하다. 하지만 집중력이 없고 산만한 장애인도 너무나 많다. 장애인은 효율성이 높다. 하지만 효율성이 낮고 일에 따라 별 쓸모없는 장애인도 다수이다. 순수하고 낙관적인 태도도 장애인의 특징이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약삭빠르고 탐욕적이고 성질 급한 장애인도 부지기수이다. 장애인은 개혁적이고 진취적이다. 그러나 수동적이고 타성에 젖어 있는 장애인들도 너무나 많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인간이고 인간의 다양한 모든 특성들이 개별마다 다르고 차이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교육받지 못하고, 이동하지 못하고, 노동하지 못해 실업자로 생존에 급급한데 성공한 소수의 장애인들이 장애문제를 해결하는 모델인양 선전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다. 그 성공의 덕목으로 집중력, 효율성, 개혁적, 진취적, 순수함, 낙관적 등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장애인은 어찌하란 말인가. 죽자살자 그렇게 되도록 헌신의 노력을 다하던가 아니면 자포자기하던가 선택해야 할 문제인가. 아직도 많은 장애인들이 그렇게 좋은 덕목을 자신의 장점으로 가질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정책은 전무한데 말이다.

분명하게 인식해야할 것은 모든 사회문제, 더 나아가 사회개혁 문제의 중심에 경제문제가 놓여있듯이 장애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인식의 문제’를 많이 언급하지만, 경제문제를 도외시한 인식의 문제는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 관념은 보수주의자들의 도덕성을 선전하기에, 그들의 천국행 티켓을 사들이기에 좋은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상존해 있다. 동정과 시혜의 기초 위에 자라고 있는 비장애인의 인식개선은 장애문제에 근본적으로 관철하고 있는 ‘물적 이해관계의 문제’를 베품의 문제로 미화시키고 또 다른 편견과 차별을 양상하는 기재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재벌기업인 삼성은 장애인에게는 이중의 잣대로 다가오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우리는 삼성에서 ‘작은나눔 큰사랑’이라는 행사를 익히 알고 있다. 삼성은 실제로 많은 돈을 기업의 사회기여라는 명목아래 복지사업에 퍼부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복지관들이 혜택을 받았다. 또한 휠체어로 유럽횡단을 한 장애인을 전면광고로 내면서 ‘장애가 장애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간다’고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사랑을 만들고 인간승리의 기업이미지를 각색하여 허풍떨고 있지만 실제로 장애인의무고용율(300인이상 기업 장애인 2%고용)을 가장 잘 지키지 않는 삼성은 ‘시혜’라는 가면 속에 숨겨 있는 악마의 웃음(자본의 논리)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장애문제에서 중심의 문제인 ‘경제문제’를 ‘인식문제’로 전환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인식문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장애인에게 수 천년의 세월에 쇠동아줄로 질기게 묶여져있는 노동능력에 대한 무능력과 무지와 악령과 같은 편견과 선입견인 것이다. 그러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재벌기업들에게 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환경과 사회를 차라리 고용부담금을 내는 것이 속 편하다는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 무엇이 장애문제를 왜곡하고 있는가?

이렇듯 장애문제를 더욱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기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기제로 작용하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장애인 문제를 생각하거나 접하는 사람들(집단)의 일반적인 시혜성이다. 시혜성은 장애인에 대한 관념적 종교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자본주의의 유지와 이익수호의 틀’속에서 기능하게 되고 장애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장애인 노동에서 시혜적 접근은 장애인의 노동문제를 임노동이 아닌 자선활동으로 여겨 성격을 개인 차원에서의 은혜적이고 자기 만족적 성격의 활동으로 비하시키는 경향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장애인 노동의 영역에서 자본의 모순관계는 사상되고 임노동자인 장애인 노동자의 권리와 요구를 억압하는 정치적 성격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장애인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이며, 지금까지 이 사회가 장애문제에 대하여 홍보하고 선전해왔던 자본사회에 규정된 개인의 인간승리를 위한 개별적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고 자본의 모순이 관철되는 계급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관념적인 시혜성은 장애운동의 실천의 영역에서 극복되어야 할 이데올로기적 전제인 것이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 -

멕시코에서 들려오는 어느 원주민 여성의 언어가 공감되어진다.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면서 ‘경쟁’의 원칙보다는 ‘인간존엄과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틀 속에서의 ‘상호협력과 연대’의 원칙을 지향하는 사파티스타의 투쟁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장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가치이다.

장애문제를 풀어가는 현장에서,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단순한 도움의 문제로만 바라본다면 서로에게 왜곡되어진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에게도 장애문제 해결에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있다면 함께 하자. 나와 당신의 해방을 향한 구체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이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고 인간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현장에서 절망하여 수동적이기 보다는 차별과 억압에 대항하는 분노를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길들여지는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길들이는 주체를 만드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이제 변화되어야 할 것은 기존의 사회질서에 적응을 강요당하는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라, 장애인의 조건에 맞게끔 사회적 참여가 보장되어지도록 사회가 변화되어야 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을 합법화하는 시혜의 망토를 벗겨 내고 그 진실을, 속셈을, 위선을 폭로해야한다. 또한 장애인들이 이 모든 모순, 위선, 기만, 속임수 등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결국 장애인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에게 노예적 삶을 강요당하고, 자신의 해방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차별과 억압에 대항하는 분노를 조직하고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급진적인 격렬한 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투쟁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장애문제의 해결은 자본주의 일체의 모순, 즉 생산관계의 모순, 인간관계의 모순 속에서 그들의 가면을 벗겨 그들의 본색을 낱낱이 뜯어내는 축에서 실천이 이루질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거대한 너무나 거대해서 다른 방향을 전혀 사고되지 않고, 그 흐름에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폐기처분될 것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망령 앞에서 던져진 다윗의 돌맹이같은 저항! 그리고 세계를 향해 던진 메시지, '이제 그만!

거대하게 구조화된 차별과 모든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 '이제 그만!'

이제 자기 자신과 사회와 정부를 향하여... 장애인에 대한 동정과 편견, 자본의 논리로 점철된 거대한 차별을 향해, '이제 그만!' 그 절망들을 향해 돌을 던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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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7 10:26 2006/03/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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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2007/11/16 17:12 URL EDIT REPLY
이 글을 이제서야 읽게 되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복지사의 길을 준비하는 저로서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저를 질책하는 것 같습니다. 깊이 세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