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시집 <물으면서 전진한다>를 낸 조성웅 시인을 효정재활병원 연대집회 장소에서 만났다.
▲조성웅 시인
조성웅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스무살 때부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이외수와 천상병 시인 등 기인의 삶을 동경했고, 고 3 때는 경찰서를 부셔서 무기정학을 당했던 삐딱선 조성웅은 고향인 경포대로 가는 버스 안에서 60년대생 시인들의 시를 모은 시집을 보게 된다. 거기 20명 시인 가운데 7명이 서울예전 출신이란 걸 보고 89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문을 두드린다. 시제가 '어머니'였던 실기시험 3등.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했다.
대학 입학 후 오리를 키우던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처음 하는 서울생활은 거의 노숙생활이었다.한달 26일은 술을 먹었고 나머지 4일은 술병을 앓았다. 2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 시인은 공사판에서 벽돌짐을 날랐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 때려치려고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해남 출신 형님. 조성웅 시인은 그토록 동경하던 이외수보다 최선을 다해 땀 흘려 일하는 해남 형님의 모습에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갔다. 이 시기에 조 시인은 모더니스트에서 리얼리스트로 전향했다.
대학 입학 초기 교수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조 시인은 어느 새 선생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신통찮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93년 군대를 제대한 조 시인은 부천의 한 마찌꼬바에서 용접을 시작했다. 거기서 부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조금 했다. 93년은 민정련이 막 출범하는 시점이었다. 조 시인은 민정련 동대문지부에 가입했다. 노동자교실에서 외국어대 대학원생들이 철학과 정치경제학, 역사를 가르쳤다. 처음으로 학습을 하게 된 조 시인은 당시 원진레이온 투쟁에도 정말 열심히 참가했다. "정말 허벌나게 파이들고 병던지고 열심히 투쟁했다." 술도 열심히 먹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우리 사회에 노동자계급정당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렇게 '조직활동'을 시작한 건 95년. 조 시인은 "시를 포기하려고 노력했지만 거부할 수 없이 시가 올 때 몰래 몰래 시를 썼다."
조 시인은 시를 전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는 내 활동의 일부다. 선전 선동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시로 표현하는 것이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나의 벗 시를 통해서 경직되지 않고 사유하게 되고 보다 풍부한 인간 삶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조성웅 시인은 2000년 연말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에 입사한다. 다음해 4월 1일 20대에 썼던 시들을 모아 첫 시집을 냈다.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조현문이란 필명으로 낸 생애 첫 시집이었다.
두번째 시집 <물으면서 전진한다>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해고되기 전 하청노동자의 삶이 1부 '새싹에게 고맙다'에 실렸다. 이 시기 조 시인은 일기를 많이 썼다. 시로 만들지 못한 많은 내용들이 있다. 아직 시로 못 쓰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애착이 많이 간다.
2부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 정치활동을 하면서 겪고 느낀 '정치적 생활'에 대해 썼다.
3부는 배달호 열사부터 류기혁 열사까지 열사들의 삶과 투쟁을 다뤘다. 조 시인은 하중근, 김동현 열사에 대해 쓰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
조 시인은 요즘 시를 쓰지 않는다. "작년부터 시를 안 쓴다. 맥이 쭉 빠져 있다. 류기혁 열사를 너무 무기력하게 보내서 그런것 같다. 온몸으로 아파하지도, 분노하지도, 내 생을 걸어서 투쟁하지도 못하고 사무적으로 너무 건조해지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시는 새로운 삶인데 요즘은 안 쓴다. 시 이전에 새로운 싸움, 새로운 삶이 필요하다. 그것을 찾고 있다."
효정재활병원 간병사 조합원들의 투쟁을 보면서 조 시인은 말한다. "싸움은 저렇게 재미있게 해야 하는데... 음식도 맛있고... 저런 게 시인데 선뜻 예전처럼 메모도 못하고 시도 못쓴다..."
조성웅 시인은 두번째 시집 <물으면서 전진한다>에 대해 "비정규직 투쟁의 한 시기를 마감하는 것"이라고 자리매김했다. "대단히 절박하고 진실했지만 정치적으로는 허약했던 한 시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속에서 성장했던 계급적 활력과 노동자 민주주의의 가능성, 죽음을 통해서라도 인간적 삶을 회복하려는 몸짓들, 이미 지금 발생하고 등장하고 있는 꼬뮨과 공동체적 삶을 정치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