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대세계의 역사 8. 프랑스대혁명, 유럽의 영광>(삼성출판사, 1982)

 

 

영국의 노동자는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상태에서는 기계나 공장주에 대한 분노만이 인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무렵, 지금까지 손으로 하는 일에만 종사하고 있던 직공들은 기계의 출현으로 한동안 직장을 뺏기는 현상이 일어났다. 하아그리브스가 발명한 제니방적기가 손으로 잣는 것의 6배의 능률을 올렸으며, 다시 또 카아트라이트의 직조기가 출현하여 인건비를 종래의 반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실업자가 대량으로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8세기말 영국 레스터셔의 어느 마을에 라드라는 소년이 있었다. 자기 마을에 양말 제조기가 들어왔을 때, 그는 그 기계를 부수었다. 그후로 노동자의 기계에 대한 반항은 이 소년의 이름을 따서 러다이트운동이라 불렸으며, 1811~1812년에 걸쳐 대규모 반항운동이 일어났다.

 

영국의 여류소설가로서 유명한 샤알러트 브론테(1816~1855)는 <제인에어>의 작자로서 알려져 있다. 그녀가 그 뒤에 쓴 <셔얼리>(1849)는, 이 1811~1812년의 방적공장과 기계에 대한 러다이트운동을 사회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각지에서 자꾸 공장이 습격당하고 기계가 부숴졌기 때문에 의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으며, 많은 의원이 폭동의 진압법을 의결했다. 그러나 바이런(1788~1824)은 "라드왕 이외의 왕은 넘어뜨려라"고 노래했다. 시인의 직관으로써, 러다이트운동에 자유를 구하는 하층 백성의 정열을 느꼈을 것이리라. 1812년 그가 상원의원이 갓 되었을 때였는데, 의회에서 자기 혼자만이 노동자에 대한 폭도 진압법을 반대했다.

 

1815년, 곡식 가격의 기준을 정하고, 수출입을 통제하는 이른바 곡물조례가 만들어졌다. 노동자는 비싼 빵을 사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해, 식량 부족이나 노동 조건의 악화 때문에 스트라이크, 공장에 대한 방화, 빵집 습격이 잇달아 일어나고 영국 사회는 불안과 동요 속으로 떨어졌다.

 

윌리엄 코비트(1763~1835)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기자 수업을 한 저어널리스트로서, 귀국한 후 런던에서 겨우 2펜스짜리 신문을 내어 노동자에게 보통선거권과 의회 개혁의 약속을 주라고 부르짖었다.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며, 3년동안 인신보호법률을 정지했다. 1817년에는 집회금지법을 냈다.

 

1819년, 불황은 또다시 심각해졌다. 각 도시의 노동자와 급진파는 궐기하여 곡물조례의 폐지, 의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8월 16일, 멘체스터의 세인트피터 광장에서 7만명으로 이루어진 대집회가 열렸다. 그런데 여기에 기병대가 사정없이 돌입하여 세인트피터 광장의 대집회는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이 사건은 워털루와 세인트피터를 따서 '피털루의 학살'이라고 불리고 있다. 정부는 그 후 여섯 개의 탄압법으로 출판, 집회 등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1/12 15:09 2007/01/12 15:09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plus/trackback/267
dkw9108 2012/12/10 10:22 URL EDIT REPLY
거훅허국허궇거새서훅하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