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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 있는 위빠사나 명상센터 호두마을에 다녀왔다. 이번이 1주일 여름 집중수련 다섯번 째다. 다섯번이라고는 하지만 수행이 뭔가 진전되는 게 있나 살펴보면 영 신통찮다.

 

이번엔 지난해에 이어 우 또다나 사야도께서 지도했다. 또다나 스님은 14세에 출가해 20여년간 빨리(고타마 붓다 당시 언어)경전을 수학했고 1990년 그 어렵다는 미얀마 담마 짜리아 법사 자격을 취득한 분이다. 법문할 때 보면 빨리어 게송을 그냥 줄줄 외신다. 그저 놀랍다. 2002년 한국으로 건너와 인천에 있는 한국마하시선원에서 9년째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서 경행(걸음을 관찰하는 수행, 행선이라고도 한다)과 좌선(앉아서 하는 수행)을 하다가 5시에 새벽 법문을 듣고 6시에 아침을 먹는다(공양을 한다). 아침은 죽이다. 다시 경행, 좌선하다가 오전 11시에 점심공양. 오후에는 10분씩 스님 인터뷰하는 것 말고는 또 경행 1시간, 좌선 1시간을 번갈아 한다. 오후 5시에 음료수 먹는 시간이 잠시 있고(오후 불식이라 저녁밥은 없다), 오후 6시에 저녁 법문. 8시부터 보통 밤 10시까지 경행, 좌선. 더 오래 앉아 있는 분들도 있다. 이렇게 6박7일이다. 얼핏 보면 엄청 빡빡한데 하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말을 해서도 안되니까 나처럼 평소에도 말 많이 안하는 사람은 남 눈치 볼 일 없어 편하고 그저 자기 경행과 좌선에만 신경쓰면 된다. 돈도 6박7일에 17만5000원이니까 다른 데 견주면 비싼 편이 아니다. 주변에 한번 가보라고 권하는데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많이들 못 간다. 그래도 몇 명 내 성화(?)에 못 이겨 다녀온 이들이 있다.

 

경행은 '발을 들고 나가고 놓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하는 수행이다. 발을 들고 나가면서 발바닥에 느껴지는 바람이나 시원함 같은 걸 관찰하고, 발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닿을 때 바닥의 딱딱함, 차가움 같은 걸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다. 물론 발의 듦-나감-놓음이라는 동작도 함께 관찰해야 한다. 발걸음이라는 일종의 물질 현상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 물질 현상을 잘 관찰하다보면 발을 들려고 하는 의도, 나가려고 하는 의도, 놓으려고 하는 의도라는 정신 현상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경행하면서 발을 들고 잠시 섰다가 나가고 또 잠시 섰다가 내려놓고 닿고 누르는 과정들을 제법 망상 없이 보는 편이다. 하지만 의도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잘 관찰되지 않는다. 또다나 스님은 물질 현상을 자세하게 관찰하다보면 정신 현상에 대한 관찰력은 저절로 생겨난다고 한다.

 

좌선은 숨을 쉴 때 배의 부름과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두 다리가 겹치지 않게 평좌로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가볍게 감는다. 손은 자기 편한대로 두고 허리를 편안하게 바로 세운 뒤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 마음을 배에 둔다. 들숨에 불러오는 배의 움직임, 팽팽함, 공기가 배를 밀어내는 느낌 등을 관찰하고, 날숨에 꺼져가는 배의 움직임, 잡아당기는 느낌, 홀쭉함 등을 관찰한다. 좌선도 배가 불렀다가 꺼지는 일종의 물질 현상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처음 좌선하는 경우에는 졸리거나 망상 때문에 한 시간 앉아 있는 동안 배에 집중하는 시간이 채 몇 분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또 다리나 허리 통증도 문제다. 졸리는 건 이를 악물고 물리쳐야 하고, 망상은 그냥 알아차리고 다시 배로 돌아오면 된다. 통증은 통증을 싫어하는 마음이나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찰해서는 안되고(물론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이다) 통증의 특성을 알도록 관찰한다. 그럼 신통하게 통증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통증은 또 수행의 좋은 친구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통증에 신경쓰다보면 다른 망상을 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1주일 내내 하루 두끼만 먹고 왼종일 경행과 좌선을 반복하는 이유는 물질 현상에 대한 관찰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대상의 특성에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 점에서 사마띠(삼매) 수행과 차이가 있다. 경행이나 좌선에서 집중해 관찰하는 것은 걸음과 호흡이 갖는 특징인 '바람의 요소'를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좀 어려워지긴 하는데 그래도 하다보면 이해가 간다. 물질은 地.水.火.風이라는 4대 요소로 이뤄졌다고 보는 게 불교다. 경행으로 치면 발을 드는 물질 현상은 불의 요소고, 나가는 것은 바람의 요소, 내려놓는 것은 물의 요소, 바닥에 닿을 때 일어나는 물질 현상은 땅의 요소라는 식이다. 이 가운데 가장 쉽고 분명하게 이해되는 특성이 바람의 요소다. 이렇게 부지런히 바람의 요소라는 물질 현상의 특성을 관찰하다보면 그것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마음이라는 정신 현상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네 가지를 대상을 한다. 몸, 느낌, 마음, 대상(身受心法)이라는 4념처가 그것이다. 좌선과 경행이 몸을 관찰하는 것이라면 좌선할 때 다리 통증 관찰 같은 것이 느낌 관찰이다. 망상이나 졸음, 좋아함, 싫어함, 성냄 등을 관찰하는 것이 마음 관찰이고, 몸, 느낌, 마음의 현상을 제외한 나머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닿고, 아는 모든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이 법(대상) 관찰이다. 한마디로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세수하고, 문 여닫고, 일어나고 앉는 것, 밤에 잠 들 때까지 알아차릴 수 있는만큼 열심히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관찰하면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나서 닙바나(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요지다. 위빠사나 수행법을 집대성한 마하시 사야도의 게송에 따르면 눈,귀,코,혀,몸,의식(안이비설신의(眼耳卑舌身意))이라는 여섯 문을 통해 들어오는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오온(五蘊):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를 항상한 것, 좋은 것(갈애), 나라고 생각해서(사견) 집착하게 되는데, 이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가 생겨날 때 바르게 관찰하면 집착이 사라지고 무상.고.무아(無常.苦.無我)라는 성품만 분명하게 지혜에 드러난다고 한다. 여기에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라는 여덟가지 바른 길(팔정도(八正道))을 통해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四聖諦))와 12연기(緣起)에 대한 또다나 스님의 간략한 설명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는 끊임없이 생멸한다. 그것은 무상하고 고통이다. 고통은 갈애 때문에 생겨난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기 때문에 원하게 되고 원하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기 때문에 가지려고 하고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기 때문에 얻으려고 하고 얻은 것은 다시 고통이다. 고통의 진리(고성제)는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진리고, 고통의 원인은 갈애라는 생겨남의 진리(집성제)는 제거해야 되는 진리다. 마찬가지로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멸성제는 열반을 증득하고 실현해야 하는 진리고, 열반에 이르는 8정도를 이르는 도성제는 생겨나게 해야 하는, 수행해서 닿아야 하는 진리다. 수행 순서로 보면 도고집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부분적으로 열반을 얻는다. 관찰할 때마다 애착과 갈애가 생겨나지 않고 사라지는 순간적 열반이다. 또다나 스님의 말로는 "알아차리는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싹' 하고 사라지는 것이 열반이다."

 

음... 여기까지;;;


마지막 날 새벽 공양 마치고 찍은 사진 몇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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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30 22:13 2010/07/3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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